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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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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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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03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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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신대륙(2)

DUMMY

한 마리 용이 날개 짓하며 대해(大海)를 건너고 있었다. 늘씬한 유선형을 그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용이었다. 용답지 않게 우둘투둘한 갑각의 껍질로 피부가 덥혀 있지 않았고,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의 황금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엘은 그 용의 등에 타고 있었다. 주변에는 하늘과 바다와 구름 밖에 없었다. 어디서도 대지는 보이지 않았다. 단순하고 아름다운 세계였다. 때때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한없는 바다의 표면에는 보석이 뿌려진 것 같은 빛 모래가 반짝였다.


“-아아. 좋군.”


엘은 유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품에 책을 한권 품고 있었다. 제목은 ‘고결한 노래’였다. 꽤 많이 읽은 듯 후반부에 종이가 접혀 있었다. 날고 있는 용 위에 올라탄 것 같지 않게, 그의 주변으로는 한 점의 바람이 불지 않았다. 느긋한 유람을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엘을 태운 용은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날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것은 마법으로 결계를 쳐 두었기 때문이고,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다와, 하늘과, 구름밖에 없는 단순하고 거대한 세계에서는 용의 그 빠른 속도조차도 아무 것도 아닌 사소한 것으로 바뀌어지기 때문일 뿐이다.


-자기가 안 난다고 관광 기분 내기는!


화난 목소리가 엘의 뇌리를 직격했다. 엘은 찔끔, 하고 물러서는 표정을 지었다가 변명했다.


“그래도 보기 좋잖아. 카린도 좋지 않아?”


지금 엘을 태우고 있는 용은 카린이었다. 트리타스에서 협상을 통해 특무기관에서 정보를 제공받기로 한 엘이 우선적으로 알아 본 것은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일로 대량의 인원이 사라져 유령촌이 되어버린 곳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엘과 카린이 본 바에 따르자면, 어비스에서는 인간의 사념을 모으기 위해 납치에 꽤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그 결과 기관 요원들의 도움으로 몇 군데 후보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루스 내에서는 자연스레 발생하는 유민이 워낙 많아 유령촌의 이유가 어비스 인지 쫓겨나는 건지 확인 불가능했다. 그리고 세키리아나 모르모른과 같은 타국의 정보는 이런 시시콜콜한 인구 문제에 까지는 잘 손이 닿지 않아 정확성과 신속성에 문제가 있었다. 몇 가지 냄새가 나는 것이 것이 있었지만 가십 수준이라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는 망설여지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그래서 엘은 비교적 확실하고 신선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신대륙쪽으로 첫 목적지를 정하게 됐다. 그 곳에는 몬스터의 탓으로 치부하기에는 조금 어색한 사건들이 몇 개 보였다.


-그딴 거 몰라! 하루 종일 이렇게 날아야 되는데, 힘들단 말야!


카린이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엘은 다시 찔끔, 물러섰다. 신대륙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은 좋은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배를 타고 가면 되겠지만 그렇게 할 경우 가장 빠른 경우도 편도로 3개월이 걸린다고 한다. 3개월이란 말에 경악한 얼굴을 한 엘을 향해 정보자체는 그곳에 심어둔 요원들과 마법적인 수단을 통해 비교적 신속, 정확하게 전달되어 오지만, 인원을 이동시키는 문제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고 특무기관의 부장이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팔자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여유가 없었다.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 자체도 아까웠고, 무엇보다 3개월이면 얻은 정보가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엘은 카린에게 부탁해서 그녀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가기로 결정했다. 그녀라면 3개월 걸릴 거리라도 하루 만에 가는 것이 가능했다. 카린은 꽤나 싫어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마냥 싫다고 할 수는 없어서 몇 가지 조건을 엘에게 걸고 이렇게 신대륙으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오면서 읽을 거라던 책은 다 읽었어?


화제를 바꿔서 카린이 심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저 날기만 하는 일은 지루한 일이엇다. 날아가는데 엘이 책 보느라 자기와 놀아주지 않았다는 것도 카린이 화내는 이유의 한 가지였다. 엘은 품의 책에 힐끗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고결한 노래’ 말야?”


-응.


고결한 노래는 아루스의 민족서사시다. 삼좌와 황녀가 아루스라는 국가를 성립시키고, 마침내 마왕을 물리치기까지의 장대한 과정을 다루고 있다. 그 자체의 예술성은 물론이고, 고대 키틴어를 완성시킨 작품으로서도 무척 중요하게 평가되고 있다. 물론 고대 키틴어는 현대 키틴어의 원류다. 그래서 언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 중에는 심지어 이 작품을 통해 아루스라는 국가가 진정으로 완성되었다고 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사료로서도 중요하게 인정받고 있다.


“아직 좀 남았지만, 대충 다 읽어가. 읽으면서 느낀 건데, 역시 실버라이트가 제일 약해.”


블랙 둠의 후계자 엘이 뻐기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카린이 속으로 쯧쯧 혀를 차며 저런 거 읽으면서도 결국 그딴 거 따지는 거 보면 엘도 어쩔 수 없는 남자애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과거에 축약본으로 읽어본 적이 있는데, 그때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실버라이트와 황녀 간의 애절한 연애담이었다. ‘누가누가 더 세냐!’ 니, 카린은 너무 저열하고 동물적인 관심사라고 생각했다. 물론 ‘고결한 노래’ 전문 연구자들이 들으면 그 수준이 그 수준이라 말할 만한 초점이지만 그녀는 그걸 모른다. 엘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역시 초대 일좌는 실버라이트일 수 밖에 없는 거 같아. 그는 블랙 둠보다, 라이트닝 클로보다 약하지만, 그래도 실버라이트만이 유일하게 초대 일좌로 불릴 자격이 있는 거 같아. 인정하긴 싫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의 목소리는 어딘가 쓰고 비어있는 것 같다고, 카린은 느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음. 실버라이트는 힘이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필요조건은 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던 사람 같단 말야. ‘고결한 노래’의 고결한 노래란, 결국 실버라이트가 모험 도중에 이야기하는 그와 연결된 일련의 사상들을 지칭하는 거고. -라고 편집자 서문에 쓰여 있던 건 무시한다고 쳐도, 결국 벤 알리 같은 사람은 실버라이트의 영향력 아래서 나타난 거지, 블랙 둠이나 라이트닝 클로에게서 나타난 것은 아니니까.”


벤을 다시 떠올리자 엘은 다시 가슴 깊은 곳이 징징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울림은 틀림없는 숭고에 대한 감각이었다. 숭고는 인간적인 것이 아닌, 신의 거대한 발걸음 같은 것일진데, 어째서 벤은 그렇게 숭고하게 느껴졌던 걸까? 엘은 벤이 숭고한 사람이라 확신하지만, 그에게서 느낀 숭고함의 정체는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건 그런가.


벤이 화제에 오르자 분위기가 엄숙해졌다. 그는 농담의 대상으로 삼기 어려운, 화제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옷깃을 여미게 하는 그런 사람이다. 엘은 분위기를 반전시킬겸 웃으면서 말했다.


“하여간 읽고 있으니까 벤씨 생각이 나서, 마음도 싱숭생숭해지고, 이것저것 공부라도 해 보고 싶어지더라. 그를 안 만났으면 나는 지금도 아루스를 그저 단순하게 마음에 안 든다고, 그저 단순하게 안 좋은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무식하게 말야.”


엘은 자조적으로 말했다. 엘의 자존심이 얼마나 센지를 생각하면, ‘무식하다’고 자기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이는 벤을 만남으로서 엘이 얻은 것의 크기를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헤, 엘이 공부라니, 안 어울리는 걸.


“그냥, 그런 마음이 든다는 거야.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 보다는.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이 그렇게 파악하기 쉽게 생겨 먹진 못한 거 같기도 하니, 악당노릇 할 게 아니라면 좀 더 복합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싶고. 그리고, 그렇다고 해도 역시 나는 실버라이트가 너무너무 싫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 같은 이상한 결론이었다. 카린이 물었다.


-황녀 찬 것 때문에?


“큼.”


엘은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정답일 것은 뻔했다. 카린은 ‘히히’하며 속으로 웃었다. 카린은 옛날에 꼬맹이 엘이 펑펑 우는 걸 본적이 있는데, 그때 왜 우는 가 했더니 축약본 ‘고결한 노래’를 모두 읽고 나서 그렇게 울고 있었다. 뭐가 그리 슬퍼서 물었냐고 했더니 황녀가 불쌍해서 울었다는 것이다. 고결한 노래는 그녀와 실버라이트가 헤어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끝난다. 말이 좋아 헤어지는 거지, 잘라 말해 황녀가 차이는 것이다. 카린이 기억하기에 그 이후로 엘은 실버라이트를 아주 싫어하게 됐다. 조기교육의 막강한 영향력을 실감케 하는 일화다.


‘그러고 보면... 영웅은 삼처사첩 따위의 뻘소리도 그때부터 했던 거 같은데...’


카린은 크게 날개 짓을 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주변은 여전히 고려할 것 없이 단순한 세계였다. 하늘과, 구름과, 바다. 문득, 카린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단순함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고려할 것 없이 앞으로 쭉쭉 날개 짓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세계였다. 어떤 고민도, 불필요한 세계였다. 그렇기에, 편안한 세계였다.




*여전히 감상 모집 중.


*저 자신의 취향을 살리는 글쓰기야 많이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의견은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필요한 의견은 저 자신의 취향을 억제하는 글쓰기를 성립시키기 위한 의견입니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완전히 죽일 수는 없지만 최대한 억압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의견 주실 분들은 이 점을 고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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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38

  • 작성자
    Lv.96 안군84
    작성일
    07.05.04 21:47
    No. 31

    뻘소리;;; 하하;;;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론 울프
    작성일
    07.05.04 22:18
    No. 32

    카이첼님의 집필성향이 생각이나 사상을 독자들에게 자세하게 묘사하는데 있으시다면 (제 생각이 틀릴수도 있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카이첼님이 생각을 표현하시기전에 독자들이 얼마나 쉽게 이해할수 있을것인가? 하고 좀더 노력을 해주셨으면 합니다..짧게 요약해서 설명해주시면 글의 진행템포에 영향을 안줄거같고요..좀더 몰입감이 강해질거 같읍니다..비뢰도의 작가분이 요새 집필성향이 바뀌셨는데 예전에는 늘리기신공을 위해서 작가분의 전공(철학과던가?)을 십분활용 하셨지만 요새 출판사에서 압력이 들어와서 그런지 좀 템포가 빨라지고 이해해야될 내용을 짧게 쓰시더군요..일반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템포감이 있어야 어필이 되겠죠^^
    카이첼님의 더 좋은 창작물을 볼수있기 바라며 두서없이 적었지만 독자의 사랑이라고 이해해주시길..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5 조화연
    작성일
    07.05.04 23:23
    No. 33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환상검무
    작성일
    07.05.05 00:44
    No. 34

    ㅎㅎ 잘보고 가구요.... 자신만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것도 경계하는것이 옳지만 저는 오히려 작가님의 성향대로 ㄱㄱ 하시는게 나을듯 합니다.
    아무래도 성향을 바꾸다 보면 리듬감이 흐트러져서 연재도 느려지고 스토리흐름도 어색해질꺼기 때문에죠. 그럼 힘내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1 티끌인생
    작성일
    07.05.06 02:14
    No. 35

    잘보고갑니다.
    건필하세요...
    건강조심.........~~~~~~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다훈
    작성일
    07.05.11 12:14
    No. 36

    참으로 위험한 시도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재미로 하여 많이 팔리는, 그리고 그 외는 문제가 안 되는 이라고 하시는 듯하여.......

    생계에 약간의 도움이 되는 한편 뭔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절박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2 어킁
    작성일
    08.11.12 20:22
    No. 37

    잘봤습니다...
    카린의 용모습(?)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5 루이네드
    작성일
    09.07.15 19:12
    No. 38

    고결한 노래, 희망을 위한 찬가..
    ..어째 제목의 뜻이 비슷한 느낌이 [..응?]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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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황립 실버 라이트 아카데미 (3) +74 08.11.22 10,217 56 10쪽
117 황립 실버 라이트 아카데미 (2) +36 08.11.09 3,936 13 16쪽
116 황립 실버 라이트 아카데미 (1) +18 08.11.03 4,457 18 13쪽
115 다시 아루스로(2) +18 08.10.27 4,273 37 13쪽
114 다시 아루스로(1) +15 08.08.22 4,226 21 12쪽
113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8) +29 08.08.18 4,560 56 15쪽
112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7) +22 08.08.15 3,730 7 15쪽
111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6) +13 08.08.10 3,876 15 13쪽
110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5) +10 08.08.07 3,959 18 16쪽
109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4) +15 08.08.03 3,961 11 16쪽
108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3) +11 08.07.31 3,928 11 18쪽
107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2) +15 08.07.28 3,991 9 15쪽
106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1) +12 08.07.25 4,763 28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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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가장 위대한 전사(1) +32 07.05.20 9,442 47 11쪽
101 신대륙(14) +42 07.05.19 5,382 2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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