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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첼
작품등록일 :
2008.11.22 23:02
최근연재일 :
2008.11.22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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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5.15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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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신대륙(10)

DUMMY

‘가보는 게 좋겠어. 내가 보기엔 확실히 어비스야.’ 돌아온 카린은 엘에게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엘은 그녀의 말에 따랐다. 가장 빠르게, 그는 달렸다. 달리면서, 엘은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비스에 대한 생각, 검에 대한 생각, 악마의 대공에 대한 생각, 얼마 전에 발견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비스적인 것에 대한 생각. 하지만 결국 엘이 생각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가 의식함과 의식하지 않음을 떠나서, 엘의 사고를 루딜에 집중되었다.


슬픈 마을이었다. 예고된 몰락 앞에서 어깨를 늘어뜨린 사람들이 힘없이 살아가는 마을. 그 몰락을 가장 조용히 이루어내기 위해서 한 소녀의 희생을 필요로 하고 있는 마을. 마왕은 없었지만, 슬픈 사람들은 있었고, 마왕은 없었지만, 희생되어야 하는 사람은 있었다. 슬픔과 희생은 마왕이나 어비스와는 다른 곳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작정한다면 루딜을 구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엘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루딜이 있을까? 엘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 모두를 구할 수는 없다. 메르첼과 벤이 생각났다. 엘은 한숨을 쉬었다. 알고는 있었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와보니 그 사실이 뼈에 달라붙어오는 것만 같았다. 확신하고 있었던 것과 달리, ‘자유’는 자신의 손에 있는 것 같지 않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는 발걸음을 멈췄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은, 천만년의 고독을 고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담담함으로 운행을 계속한다. 중단 없는 고독의 굳건한 빛 옆에서, 별들은 부서진 태양의 파편처럼 어둠에 깔리었다. 그것들은, 조용히 숨 쉬는 짐승처럼 반짝이거나 희미해지며, 인지 너머의 아득한 신비를 품고서 구차한 세상에 빌붙은 모든 존재를 조롱한다. 그것들을 두 눈에 담으며, 엘은 아아- 하고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 같은 신음을 희미하게 쏟았다.


실버라이트가 떠올랐다.

엘은 그가 무척이나 싫다.

엘은 그를 경멸한다.


엘은 눈을 떴다. 시선을 내리고 다시 달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고, 엘은 혀를 끌끌 찼다. 할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것뿐이다. 그 이상의 것은 무의미하다. 어비스의 음모를 쳐부수는 것, 그것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이 구원받는다.


“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공부가 해 보고 싶군.”


대지를 박차고 대기를 가르며, 엘은 중얼거렸다. 힘으로 구원될 수 없는 슬픔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그는 생각했다.





돌아오는 길에, 엘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카린의 말에서 이미 확신하고 갔던 것이긴 하지만, 정말 어비스였다. 그들이 마을을 완전히 쓸었다. 집도 집기도, 주변의 식물도 하나 상한 것 없이 정적 가운데 낡아가는, 사람만이 사라진 기묘한 유령촌이었다. 세키리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그런 마을이었다. 확실했다. 언제 적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신대륙에서는 확실히 어비스가 준동하고 있었다. 꼬리를 밟았으니, 이제 그걸 잡고 본거지를 치고 들어가야 한다. 그럴려면 역시 이곳을 떠나 도시로 가야 했다. 그곳에는 특무기관의 지부가 있어 각지의 정보를 다양하게 입수 할 수 있다. 아무리 용과 삼좌의 후계자라고 해도 둘이서 이 압도적인 크기의 대륙을 싸돌아다니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더구나 어비스도 이제 삼좌 측에 자신들의 행위를 들켰다는 걸 알고 있다. 주먹구구식의 탐사로는 그들을 잡을 수 없다.


‘그럴려면 오우거를 우선 때려잡아야 하는데.’


어쨌거나, 루딜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는 떠날 수 없었다. 오우거자체도 그렇지만, 실비양이 내키지 않는 선택을 하지 않도록 해 주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딜 마을로 근처로 돌아왔을 때, 엘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을이 밝았다. 지금은 자정을 넘은 시각이다.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엘은 마을로 들어갔다. 다행히 특별히 마을은 괜찮아 보였다. 엘은 가슴을 쓸었다. 그러면 그렇지, 카린이 지키고 있는 곳에 어떤 문제가 생기리라 생각하는 것은 기우다. 그녀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지만, 순수한 강함 만이라면 엘을 능가한다. 하지만 안도했던 엘은 이내 표정을 바꿔야 했다. 그것도 새파랗게. 마을의 대부분 건물은 무사했지만, 교회의 대문과 정문은 여러 창문과 함께 박살나 있었다.


“자, 자네...!”


강직하지만 지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은 시선을 돌렸다. 촌장이었다. 그는 여전히 상처를 천으로 봉한 채로,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무리해서 일어났다는 것이 역력했다. 그의 뒤로는 마을 사람들이 다급하거나 풀죽었거나, 분노했거나, 슬퍼하는 얼굴로 서 있었다. 분명히, 마을에는 무언가 큰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시, 실비가 방금 오크들에게 잡혀갔네. 그 아이를 구해주게!”


촌장이 다급하게 설명했다. 엘의 얼굴이 긴장에 굳었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다. 그는 촌장에게 거칠게 설명을 요구했다.


“잡혀가다니요? 그럴리가! 린카는요!”


그래. 카린을 마을에 남겨놓고 갔다. 그녀는 강하다. 대공조차 그녀의 힘을 감당하지 못해 꼬리를 말았다. 일개 변방의 시골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카린을 능가하는 힘의 소유자가 움직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촌장은 한숨을 섞어 설명했다.


“갑자기 숲에서 몬스터에게 습격당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마을을 떠났네. 사냥하러 마을을 떠난 이들이 몇몇 있는데, 그들이 아닐까 싶네. 그녀가 떠나고 얼마 있지 않아 오크들이 쳐들어와서... 막기 위해 싸웠네만 소용이 없었네. 무장한 오크 무리는 우리보다 훨씬 강했네. 몇 사람이 무의미하게 부상당했을 뿐이지.”


“양동이란 말입니까? 대체...”


마법이 걸린 호루라기는 사냥을 나선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나갔다. 마을에서는 이미 나간 카린을 불러들일 수단이 없었다. 카린이 밖으로 나가자 마을이 빈틈을 타 오크가 침입해 들어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카린이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구하고 돌아오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길어도 한 시간이다. 결코 긴 시간은 아니다. 한 시간을 걱정해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고 하면 이 마을이 여지껏 유지되었을 리가 없다. 얼마전 있었던 자이언트 베어와 같은 몬스터와의 조우도 사실 일 년에 한번이나 있을까 한 일이다. 우연이라 보기에는 너무 기묘했다.


“나도 모르겠네. 하, 하지만 실비를 구해주게.”


“얼마나 지났습니까?”


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실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촌장의 요청이 있다던가 없다던가 하는 것은 고려사항이 될 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았네. 불과 십분 정도 전의 일이니...”


다행이었다. 오크는 인간의 여자를 납치해 아이를 낳게 하곤 한다. 하프 오크는 오크에 비해 지능이 뛰어나서 오크 부족을 관리하는 좋은 부관이 될 수 있다. 그러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다면 그만큼 실비가 몹쓸 짓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10분이라면 다행히 그런 우려는 적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떠났습니까?”


“저쪽이네.”


촌장은 손가락으로 목책이 박살나 구멍을 휑하니 내놓은 곳을 가리켰다. 그 구멍 너머로 어둠에 물든 숲이 불길한 묵묵함을 품고 들어서 있다. 실비를 납치한 오크들은 저곳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엘은 뛰었다. 엘은 곧장 나는 것처럼 뛰어놀라 숲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멍청한 얼굴로 그의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엘이 평범한 전사가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았지만, 이건 예상을 한참 넘어서는 장면이다.




엘은 예리한 눈길로 숲을 살폈다. 어둠은 그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한다. 의식을 집중하자, 숲의 어지러운 모습이 세밀하게 시야로 들어섰다. 가지가 부서지고, 풀잎이 이그러진, 그런 장면들이 발견됐다. 어느 것은 짐승의 것들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들은 짐승의 것들이 아니었고, 다급한 이동의 흔적이 읽혔다. 조금 큰 인간의, 그리고 무리의 이동흔적.


‘이쪽이다.’


엘은 그들 흔적을 읽고 날렵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역시 그냥 달리는 것에 비하면 훨씬 느렸고, 자신의 느린 움직임에 엘은 초조함을 느꼈다. 시간의 흐름이 날카롭게 돋아선 신경을 꺼끌꺼끌하게 갉아내는 것만 같았다. 이마에서, 희미한 땀이 무의미하게 배어나왔다. 본디 전력으로 수 시간을 달려도 엘은 땀을 흘리지 않는다. 그 땀은 토해낸 감정처럼 피부를 질척거리게 했다. ‘자유’는 달라붙지 않을 텐데. 자유는 ‘쿨’하다. 엘은 그런 생각을 했다. 엘은 작업을 계속하며 몸을 이동했다. 늦지 않기를, 엘은 기원했다. 패튼이 진정 선하고 자비로운 신이라면, 그녀를 구해주기를.




실비는 눈을 떴다. 퀘퀘한 공팜이 냄새와 썩은 고기의 악취가 희미하게 섞여 있는 것 같은 곳이었다. 시선을 둘러보니, 사냥꾼들을 위해 마련된 숲의 자그마한 코테지였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여기에 와서 가공해 저장하거나, 겨울에 추위를 피해 묶거나 하는 곳이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이 바스러져 가는 짚 위에 누워있다는 것을 알았고, 손발이 묶인 채, 입에도 재갈이 채워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눈앞에 두 남자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은 마티, 였고, 다른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걍팍한 인상의 전사였다.


“여기 있소.”


미티는 주머니를 남자에게 넘겼다. 남자는 그것을 받고, 주머니를 열어 안의 것을 꺼냈다. 10루셀짜리 화폐였다. 가죽 주머니에 든 게 모두 10루셀 화폐라고 한다면, 굉장한 거금이다. 그는 주머니를 허리춤에 걸며, 웃음과 불만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쯧, 기껏 훈련시킨 오우거를 잃게 된 것치고는 싼 값이지만, 계약은 계약이니 이걸로 만족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주십시오.”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도 그렇고, 돈을 받는 모습도 그렇고, 남자는 상금 사냥꾼인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하겠소.”


마티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비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왜 이런 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누워 있어야 하고, 마티 씨는 저 사람과 무슨 대화를 나누는 것일까? 맞추기 어려운 퍼즐이 혼란스럽게 오갔다. 걍팍한 인상의 남자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음.”


마티 촌장은 별말을 돌리지 않았다. 남자는 코테지 밖으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건조하게 들려왔다. 문틈 사이로 크르륵, 거리는 익숙하지 않은 짐승의 소리가 들렸다. 실비의 얼굴이 파래졌다.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오크들의 소리였다. 실비와 마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흥분한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무서운, 얼굴이었다. 다가온 촌장은 재갈을 풀었다.


“촌장님 이게 대체 무슨-”


실비는 다급하게 물었지만 그것은 이내 “꺄악!” 하는 비명으로 뒤바뀌었다. 재갈을 풀자마자 그는 실비의 앞섬을 찢어 내렸기 때문이다. 맑고, 형태가 아름다운 가슴이 드러났다. 그러나 손이 묶은 실비는 그것을 가릴 수 없었다. 이어서, 촌장은 실비의 위에 몸을 실으며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거친 손길의 애무는 충격적이었다. 전신으로 소름이 돋았다. 다른 손은 실비의 치마를 걷어 올렸다. 새하얀 허벅지가 보기 좋게 드러났다. 촌장이 지껄였다.


“후우, 후우, 니년이 나쁜 거야. 얼른 받아들였으면 이런 짓 따윈 하지 않아도 좋았을텐데!”


“아, 아, 그, 그만두세요...”


실비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가 그만두리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묶여진 몸을 꿈틀거리며 애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도리어 상대의 흥분을 키운다는 사실은, 그녀도 몰랐다. 촌장의 숨결은 한층 거칠어졌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주연도 데굴데굴 굴리는데 조연쯤이야. 큼. -_-;


*각종 의견 받습니다. 여러분의 다양한 감상은 좋은 글을 위한 토대가 됩니다~(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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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5) +10 08.08.07 3,960 18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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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죽음의 방식을 결정한다는 것(2) +15 08.07.28 3,992 9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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