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800년 12월 25일 (3)
많은 분들의 격려에 무한한 감사를! 앞으로 더 좋은 글로 보답할 수 있게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왕과 무슨 안면으로 만난다······?”
“어쩔 수 없지. 하는 수 없었다고 하지.”
멜라피오르가 씰룩씰룩 볼을 움직이며 말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그의 특성상 이게 안 되느라.
“그게 될 리가 없잖아! 안 그래도 찍힌 지가 언젠데!”
“그야 네놈 아버지의 문제지.”
멜라피오르가 킬킬 웃으며 말하자 샤이츠가 발을 번쩍 들어 그의 엉덩이를 향해 날리려 했다. 물론 피했지만.
“웃어? 웃어? 이 자식아?”
“세월이 얼만데 이젠 좀 웃으며 할 수도 있는 이야기 아닌가?”
“망할! 네놈이나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지.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냥 살얼음판 위야!”
뭐, 반란이 반쯤 미수에 그쳤으니 망정이지 진짜 제대로 일어나 다른 영지까지 포섭에 성공하여 아헨의 문턱에 도달했다면 정말 큰일이 날 뻔했던 일이다.
뭐 그렇게 됐다면 지금 누군가는 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팔라딘씩이나 되는 분에게 왕도 그렇게 가혹하게 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르벤이 잔을 밀어 샤이츠에게 권했다. 나름 편안한 아버지의 미소 비슷한 것도 함께.
“우리의 왕이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르벤씨는 전혀 모릅니다. 장애를 가지긴 했어도 첫째 아들도 냅다 쫓아내는 사람입니다.”
샤이츠가 몹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첫째, 지금은 0번째 왕자가 되어버린 왕자의 일로 난리를 치렀던 샤이츠에게 그런 감각은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그를 괴롭히는 것이었으므로.
지금도 정말 생각만 해도 곤란한 그런 느낌. 말로는 못 하는 감각이 그를 괴롭혔다.
“글쎄, 그 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들었지. 그때 왕자에게 찬동했던 자들이······. 그, 부르쥬? 그곳의 영주였던 것 같군. 그런 일만 아니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르벤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멜라피오르가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멜라피오르 경은 무슨 행복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푸하하하하. 그 부르쥬의 반란자가 바로 이 친구요. 아까 소개를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래도 괜찮을 거요. 어차피 샤이츠 경은 팔라딘이 아니오? 왕의 최고의 기사들에게만 주는 칭호라고 들었는데.”
“하······.”
샤이츠가 고개를 떨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용기를 내시게. 어떤 일이 있어도 내일의 해는 뜨는 법이라오.”
르벤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잔을 샤이츠에게 밀었다.
“그래. 절망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네. 주워담을 수는 없지.”
멜라피오르가 낄낄거리며 신나게 웃었다. 그리고 맥주잔을 들어 몇 모금을 마신 후에 다시 웃었다.
“망할. 친구가 할 소리인가?”
샤이츠가 잔을 들어 바닥을 탁자에 쾅쾅 때리며 멜라피오르를 노려봤다.
“내가 무슨 잘못인가? 난 딱히 오라고 하지도 않았지. 그저 날 따라온 것 아닌가?”
“망할. 적어도 거리가 멀다고는 말을 해줬어야 할 것 아닌가!”
“그럼 반대로 넌 대관식에 참가하려 했다고 말을 했어야지.”
“하······. 결국 내 잘못이군, 망할 녀석.”
샤이츠가 다시 잔을 들어 쾅쾅 내리치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마시고 잊어, 기사양반.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네.”
르벤이 다시 한 모금 맥주를 마시고 잔으로 샤이츠의 잔을 쳤다.
떵 하는 나무잔의 소리가 기막히게 울리며 나름 분위기를 정화하려 노력했다.
“힘내라고. 얼마든지 회생의 기회는 있으니까 말이야.”
멜라피오르가 샤이츠의 등을 토닥이고 그의 어깨에 팔을 끼고 일어섰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좋아질 거야. 힘내라고.”
언제 그랬는지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린 샤이츠가 이마에 주름을 마구 그은 얼굴로 일어났다.
“그래도 이런 상황에도 위안이 되는 건 너 밖에 없다. 이 망할 친구야.”
“친구 좋다는 게 다 이런 거지.”
두 기사가 신나게 웃으며 마구 웃었다.
“결국 맥주는 한 모금도 안 마셨네.”
르벤이 샤이츠의 잔을 들어 꼴깍꼴깍 삼키며 문 밖으로 나간 두 기사를 무안한 표정으로 살폈다.
“에라, 알아서 하겠지.”
§
“이제 왕자님이 아니라 황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 이전에 이탈리아의 왕시지요.”
나믹시드가 아달기스의 팔에 어깨를 부딪히며 말을 고쳤다.
“아, 그렇지.”
“무엇도 아닙니다. 아직은.”
“겸손한 말씀이시군요. 물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믹시드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을 이어가려 했다.
“그 길에 방해가 될 요소라면 역시······.”
“말을 아끼도록 하지, 나믹시드. 그런 말은 우리의 왕을 곤란하게 하는 발언이 될 수 있어.”
“물론이지요. 하지만 우려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피핀이 상당히 근엄한 표정으로 나믹시드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자신에게 진정 진심으로 충성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당장 배신을 할 인물도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럴 기운이 과연 있는지 묻는다면 딱히······. 그런 것은 또 아니었다.
또한 그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달기스에게 기대는 인물인지라 아달기스의 의지가 중요하기도 하고.
“아우와의 우애는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나의 아우들은 건전하고 바른 정의감을 가지고 있으니 결코 왕관을 이유로 다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왕자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요.”
나믹시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달기스의 눈치를 살폈다.
피핀은 나믹시드의 저런 태도를 썩 나무라지는 않았지만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의 절대적인 충성이 향하는 방향이 어쩔 수 없이 아달기스인 것이다.
그것에 무어라 말을 붙여서 좋을 일도 아니고 굳이 별 무리 없이 그를 따르는 부하를 의심하고 탓해서 좋은 것도 없다.
“그런 우려는 기미가 보이고 나서 해도 좋을 일이오. 더 이상 그런 말은 삼가도록 하시오.”
“다 왕자님을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왕자님의 안위가 바로 제 운명입니다. 제 마음도 조금 알아주시지요.”
나믹시드가 다소 비굴한 느낌으로 웃으며 말했다.
저 표정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괜히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태도는 좋지 않군. 기사라면 당당히 자신의 운명에 맞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네.”
“아달기스 경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더 말해서 좋을 것은 없겠군요. 저 역시 왕자님의 운명을 거스르지 않고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수상한 말이었지만 아무튼 충성은 하겠다 하니 피핀도 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결국 늙은 노인이 자신의 몸을 지키고자 하는 의도겠거니. 딱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되지 않겠나?
“그렇다면 더 바랄 것이 없군요. 든든합니다.”
진짜로 든든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의자에 앉은 다리가 탁자를 때리며 덜덜덜덜 거리는 것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과거의 영광을 회복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던 시도는 미묘하게 어긋났고, 한 수 더 떠서 극복할 수 있는 대상이라 생각했던 자는 만천하에 위상을 달리하는 가공할 위력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망할. 도대체가 되는 일이 하나도 없군.”
르노의 위상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전에 비해서 상승했으면 상승했지 내려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마지막 숙명의 적수는 이미 하늘 끝의 천상에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로마 제국의 황제.
그 관을 쓴 자에게 도전해서 좋을 일이 과연 있을 것인가?
도무지 이길 수 있다는 계산이 서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권위에 올라선 그의 숙명이 생각을 하면 할수록 더욱 큰 위압감을 휘몰아쳤다.
“도대체 어디까지 올라갈 셈이냐.”
한계를 모르고 하늘 끝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르노에게 이번 일은 고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막아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어떻게 막을 것인가?
이탈리아, 아키텐 그리고 아헨과 그 인근의 모든 상대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다고 따를 생각은 없을 것이다.
“환장하겠네.”
그렇다면 속도전이 관건인데 심지어 왕, 아니지 황제의 사돈인 기욤이 떡하니 그 속도전을 방해할 요지에 서있었다.
“베르모아 녀석이 그리울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과거 툴루즈는 자신의 권세 하에 있었던 영역이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판단 착오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은 누구 하나 부정하지 않았다.
망했다. 정말로.
조합이 잘 맞는 아군을 만들려 해도 주변에 온통 왕의 세력이었다.
고개를 돌리라 전하려 해도 그들에게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쫄레쫄레 달려가 왕에게 자신의 배반을 고해버릴 것이다.
“계산이 안 되는군.”
무슨 계산이 안 되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에라이. 고민해서 무얼 하겠나?”
결국 짜증만 쌓인다.
자신이 욕심 하나만 살짝 버리면 편해질 수도 있겠지만······.
욕심 버리고 살면 사람이 아니다.
분명 르노의 기준에서는 그렇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말이야 쉽지. 하지만 그걸 버리면 인간, 발전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
“소란스럽군.”
그 어느 밤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의 게르하르트가 창 밖을 내다봤다.
어째서 그리도 진지한 표정인지 궁금할 법도 했지만 엘리오르는 더욱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무슨 소리라도 들려? 엄청 조용한데.”
“마을이 시끄럽다는 말이 아니라 또 지방 영주들이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기 시작했다는 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이제 로마의 황제가 된 그 분에게 거역하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또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군. 이제 그 강건해진 권세에 안심할 때도 되지 않았나 생각하는데.”
“저런. 그런 것은 더욱 걱정을 해야만 한다고.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은 곧 더 올라갈 곳은 없다는 말이야. 하지만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도 간단하지. 쌓은 노력이 큰 만큼 추락하는 속도가 더욱 빠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역사가 증명하는 사실이지.”
게르하르트가 엘리오르의 눈을 거의 뚫을 기세로 강하게 쳐다봤다.
“후, 내가 그런 생각만 한다고 생각하면 정말 살기 힘들 것 같군. 난 사양하겠어.”
“사람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우려하는 바가 다른 것뿐이다. 넌 너의 일만 잘 하면 되는 거지.”
“내 일이라는 건 결국 싸움이군.”
“그 외에 너에게 가치는 없거든.”
게르하르트가 크게 웃자 엘리오르도 그냥 웃었다.
“근데 이거 좀 화가 나도 되는 말 아닌가?”
“아, 그러지는 말고.”
그리고 다시 게르하르트가 크게 웃었다.
“행복이 마구 들려오는군.”
문이 열리며 갈로아가 방으로 들어왔다.
“오, 갈로아 경. 그리고 위온 경까지.”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계시나?”
“엘리오르가 힘쓰는 일 외에 못 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지요.”
게르하르트가 두 사람을 향해 엘리오르를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나도 재주라고는 힘 하나 밖에 없어서.”
“아.”
아무래도 말을 할 상대를 잘못 짚은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6장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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