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태풍 사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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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진 태풍이 잠든 후 혼자서
그토록 설치던 풍파가 한눈 팔 때에야
모순된 상황을 알아챘지만 꼼짝 못했어.
진공관 한 구석에서 숨죽인 생물체인양
태산 같은 파도가 왈카닥 뒤집어서
풍비박산되는 배는 서른 넷 내 청춘의 분신.
이뤄도 가뭇해져갈 운명의 푯대 거머쥐었어.
잡으면 잡힐 것만 같은 섬을 바라보며
어서 가자, 가자, 재촉하는 소리엔 돌이질 쳤어.
모진 풍파 헤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냐며
익숙하게 헤엄쳐가는 선원들의 팔다리가
눈부셨어. 눈부셨지만 나는 손을 흔들었어.
어서 가! 당신들이라도 부디 살아라, 하고
열 살짜리 우리 큰딸 너랑
나흘 뒤에 첫돌을 맞이하는 막내까지
3녀2남의 올망졸망한 눈망울들도
머릿속을 오락가락하였지만
이승인연은 겨우 여기까지였다고,
그렇게 체념하였어.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어.
급기야 파선조각에 몸을 맡긴 채로
수십 수백 번, 파도에 쓸려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히 곤두박질쳐져서는
바다 속 고요풍경과 딱 맞닥뜨렸다가,
이내 파도의 등쌀에 밀려 높이 떠올려져선
자꾸만 멀어져가는 섬을 신기루인양 바라보았어.
그러다 아물아물하게 정신을 놓았는데,
하룻밤이 지났는지 이틀 밤이 흘렀는지
며칠이나 흘렀는지 저승인지 이승인지
어쨌든 눈을 떠보니 태풍이 온데간데없어진 뭍이더군.
기진맥진하여 고향이라고 돌아오니 모두들
나 보기를 귀신이라도 본 듯 깜짝 자지러지더니
잠시 후엔 선원 가족들이 우우 몰려와서는
‘왜 혼자만 살아왔느냐’며 성토대회를 여는데
기가 막히고 어안이 벙벙하여 나는 말문을 닫았지
여차저차 이러저러하여서 나만 살았나보다는
배와 함께 죽자 했더니 살아왔다는
나 홀로 죽지 못해 살아온 이 죄를 용서하라는.
잠깐 새 사라져갔던 그들은 틀림없이
든든한 수영실력 덕에 살아나지 싶었는데
후회도 실망조차도 삼켜버렸던 나더러
혼자만 살아왔느냐 아우성치는 그들에게
자지러지는 내 혼을 붙들고 중얼거렸어.
서럽게 메아리치는 생즉필사 사즉필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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