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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343
추천수 :
1,966
글자수 :
262,810

작성
24.05.08 12:50
조회
4,637
추천
113
글자
17쪽

칠 년, 그리고 사흘 전.

DUMMY

어쩌면 칠 년 전 그때부터, 나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 아닐까.


“비무에 앞서, 배례!”


열다섯 살, 무관에 다니던 시절. 그날엔 나와 공헌명 사이에 비무가 있었다.


누가 무관에서 으뜸가는지를 가리는 싸움이었다. 구경을 위해 몰려든 문하생들 가운데, 우리는 서로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하압!”


선공은 공헌명이 가져갔다. 확 내지르는 목검에 성질이 묻어났다.


장차 공씨세가의 가주될 몸으로써 일주일에 겨우 두세 번 나오는 평민 따위와 비교된다니. 자존심이 상한다. 아마 이런 마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단지 뒤로 펄쩍 뛰는 움직임에, 검격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간다.


“이얍! 합!”


공헌명은 그치지 않고 공격을 이어 나갔다.


약간은 성급하지만 강인함이 실린 연격. 그대로 밀어붙여 승기를 잡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하나, 둘. 다시 하나.’


그때, 나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성내는 공헌명의 모습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보다 흥미로운 것이 눈에 밟혔다.


얼핏 마구잡이로 쏟아내는 듯한 공격들 사이에 자연스레 빚어지는 일정한 간격이 보였다.


마치, 무(武)의 세계를 설핏 엿보는 것처럼.


횡 베기에 맞춰 허리를 젖히고, 곧장 이어진 내려치기는 목검을 올려붙여 막는다.


‘그리고 지금.’


순간 움츠리는 동작을 포착한다. 확 치미는 찌르기에 맞춰, 나는 다시금 가벼운 뜀박질로 공격에서 벗어난다.


“이익···!”


공헌명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수가 읽혔음을 깨달았는지, 그 표정에는 약간의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감각이 좋았다. 본디 조금 예민한 정도였던 그 감각은, 무관에 다니면서 점차 이상할 정도로 날카로워졌다.


‘이 아이는 천살(擅殺)의 업을 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탁발하던 비구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게 천살성(天殺星)이 깃들어있다고.


부모님께선 삿된 소리 말라며 내쫓았지만, 종종 그 말이 참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해보자, 이거지?”


한편 공헌명은 다른 수법을 꺼내 들었다.


자세를 고쳐 잡고 확 숨을 들이켠다. 곧이어 목검에 깃드는 사나운 기세.


무관에서 익히는 곧은 기운하곤 뚜렷하게 달랐다. 오오, 새로운 기술에 구경꾼들 사이에서 작은 환호가 일었다.


일규도전(一揆刀錢).


공씨세가에 내려오는 검법으로, 본래 무관 내 비무에선 사용이 금지된 초식이었다.


“아, 뭐야! 반칙이잖아!”


“반칙은 무슨, 질 것 같으니까 큰 소리냐!”


확, 날카롭게 들이닥치는 궤적을 가까스로 피한다. 아까 놀지 말고 반격해둘걸. 짧은 후회가 머릿속에 스쳤다.


‘칫···.’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강하지만 어딘가 미숙했다. 빈틈이 있다. 어떻게 하면 그 틈을 노릴 수 있을까.


한낱 대련인 만큼 그냥 져 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오기와 호승심. 그리고.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땐, 우선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혀보렴.’


언젠가 도공(陶工) 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렵사리 그릇을 빚어볼 때, 어머니께 들었던 말 때문에.


답이 없는 문제는 없다고 배웠다.


암만 어렵더라도, 생각하며 기다리다 보면 충분히 길을 찾을 수 있다.


별것 아닌 승부라 한들 어린 마음은 부모의 그 말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때는.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가 검게 뒤덮인다.


승기를 잡은 공헌명의 낯빛. 화려한 검의 움직임. 혼란스레 바뀌는 보법.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오직 소리만이 남은 세상에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잡념을 내려놓고서, 그저 끌어 올린 감각에 집중했다.


그러자.


‘찾았다.’


어둠 속에서 붉은빛이 떠올랐다.


일렁이는 불꽃처럼 흔들리는 그 빛이 궤적을 밝힌다.


다음 검격이 어디서 닥쳐오는지. 반격의 길은 어디에 있는지.


차례차례 그어지는 빛의 선은, 어둠을 밀어내며 더 많은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빠르게 순환하는 혈도의 흐름부터 한두 걸음씩 낭비하는 헛동작까지.


상대의 모든 것을 낱낱이 밝혀내려는 것처럼.


이윽고 겨우 잡은 기회로 슬쩍 감춰둔, 조급한 마음을 간파한 순간.


따악!


“어···!?”


기습적으로 내지른 일격에 공헌명에게서 당혹스러운 고함이 터졌다.


공세를 굳히려 한 탓에 되려 반격의 위험을 간과했다. 다음 공격을 어찌 넣을까, 그 생각뿐이었겠지. 간신히 막아냈지만 몸통이 훤히 비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결착은 빠르게 맺어졌다.


1초, 팔이 풀렸다.

2초, 목검이 흔들렸다.

3초, 균형을 잃었다.


균형이란 싸움에서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라 배웠다. 그를 잃은 직후, 꽈당 하고 끝내 공헌명이 넘어진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졌다.


슬쩍 시선을 살피니, 다들 구름 위 신선놀음 보듯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공헌명은 싸움 내내 날 수세로 몰았고, 나는 그 공세 속에 숨어있던 빈틈을 잡아냈다.


남들이 보기엔 누구 하나 꼴사납게 지는 일 없이, 치열하고 또 아깝게 끝난 싸움이었겠지.


괜히 머쓱했다. 나는 목검을 거두곤 공헌명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좋은 비무였어.”


고개를 떨군 채 힘없이 한숨 쉬던 공헌명. 그는 이내 못 이기는 척 피식 웃었다.


“점잔 빼기는. 날 아주 갖고 놀던데?”


조금 전 성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실력 하나는 진짜 대단한 녀석이라니까.”


내 손을 맞잡고 일어나며, 공헌명은 은근한 투로 물어왔다.


“맨날 부모님 도와드리느라 시간 없을 텐데. 혹시 숨겨진 비결이라도 있냐?”


“어, 글쎄. 특별한 건 없는데··· 감이 좋아서 그런가?”


부러움 섞인 인정에 멋쩍은 웃음으로 답한다.


‘경쟁자와의 승부에서 어머니의 조언을 떠올려 거머쥔 승리.’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단지 괴로운 탓에 떠올리고 싶지 않을 뿐.


다음 달, 공씨세가는 우리 공방과 거래를 끊었다.


불한당들이 근처에 알짱거리기 시작했다.


그릇이 깨지고 기자재가 망가지는 행패가 몇 번 벌어질 즈음, 때에 맞춰 공헌명도 내게 시비를 걸었다.


누가 더 나은지 다시 한번 붙어보자고.


뻔한 수작질이었다. 그러나 속아 넘어가 버렸다.


그깟 비무, 한 번 져 주면 되겠지. 그리 생각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싸움을 포기하면 가족을 건드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2년.


가세가 완전히 무너지는데 고작 2년이었다.


이사를 가려 해도 관청의 허가는 나지 않았다.


몇 차례 도망치려 할 때마다, 어찌 알았는지 빚쟁이들이 따라붙어 도로 끌려오고 말았다.


아버지는 평생 나지 않을 허가를 기다렸다. 술에 겨우 기대면서. 그 술은 곧 노름을 불렀고, 그것이 끝이었다.


끝내 아버지는 목을 매달았다.


상을 치르기도 전에 독촉장이 들이닥쳤다.


그칠 줄 모르고 불어난 끝에 천 냥에 다다른 빚.


아버지께 물려받은 그것은 내게 채워진 족쇄이자, 공헌명의 손에 들린 살생부였다.


그것이 나를 체념하도록 만들었다.


공방이 망하고 한낱 막일꾼 신세가 되어도, 툭 하면 불려 가 술판에서 조리돌림을 당해도, 나는 그 수모에 저항할 수가 없었다.


장장 칠 년 동안.


약간의 후회가 있다면, 그날 괜히 품은 어린 마음에 몸을 맡겨선 안 됐다는 거겠지.


뒤늦은 미련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그리 믿어왔다.


허나 그조차도 착각이었다.


나는 끝을 닫은 게 아니라, 단지 시작을 연 것에 불과했다.


***


유달리 추운 겨울밤. 나는 언제나 그랬듯 취해 있었다.


매일 같이 술을 끼얹지 않고선 하루를 맺을 수 없었다.


특히 이날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치 막일을 끝낼 무렵, 공헌명은 사람까지 시켜 날 투전판으로 불러냈다.


여기까진 으레 있는 일이었다. 그의 부름에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붙들어 놓으려나, 겨우 이 정도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하루.’


연초 향 찌든 그 투전판에서, 공헌명은 의외의 제안을 건넸다.


‘일주일 동안 열릴 연회 중 내일 하루, 그 하루만 점소이로 일해주게. 그럼 자네 빚에서 일백 냥을 탕감해주지.’


백무회.


몇 달 전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안휘 내 크고 작은 문파들이 모이는 친목회를, 이곳 하성에서 연다고.


그럴듯한 별호의 협객들.


이름 있는 세가의 공자 소저들.


그들 모두가 한데 모여 우애를 다질 거라고. 심지어 남궁세가의 다섯 방가 중에서도 참여하는 이가 있을 거라고.


본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하고는 관련 없는 이야기였다.


그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던, 싸움판을 벌이던, 그 구름 위 신선놀음이 무엇이건 간에··· 빚에 메인 나의 삶은 하등 달라질 것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제안이 함정임을 직감했다.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괴로운 일이 벌어지리라.


하지만.


‘참이오?’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공헌명이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든 간에,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


천 냥의 빚. 목을 맨 아버지. 평생 삯바느질만 한 어머니.


그리고 선금으로 준 은자 한 냥의 무게.


‘우리 나름 소년 때 무관에서 함께 수학하던 사이 아닌가. 신뢰의 증표라고 생각하게.’


그 말과 함께 쥐여 준 돈주머니의 무게에··· 나는 고민할 수가 없었다.


‘···하겠소.’


‘잘 생각했어. 후회 없을 거야. 흐흐.’


공헌명의 만족스러운 웃음.


이 돈으로 쌀을 살 수 있다. 근래 기침이 심해진 어머니께 쓸 약도 구할 수 있겠지.


이 은자 한 냥으로, 겨울을 날 수 있을 거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해도 괴로움이 가시질 않았다.


그 웃음을 도저히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기에.


아버지를 죽게 만든 자에게, 겨우 돈을 받아 연명하는 내 처지에.


그 지독한 비참함에 술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머리를 마취시켜야 버틸 것 같았다.


그게 원인이었다.


골목에서 들려오던 소란에, 되려 그쪽으로 향했던 이유는.


“이보시오.”


취한 머리로 받아들인 소란은 분명치 않았다. 저 같은 취객끼리 다투는가보다, 나는 그리 착각했다.


“곱게 들어가 자기나 하지, 이 밤중에 무슨 소란이오? 어디···?”


그러나 별 고민 없는 발걸음으로 골목길에 접어든 그 순간.


“-”


나는 침묵했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상황이 내 감각을 침범했다.


진동하는 피비린내.


얼어붙은 흙길을 뻘밭으로 뒤바꾼 습기.


처참하게 널린 무복(武服) 차림의 시체들.


그리고 그 참혹한 광경 한가운데 서 있던, 어느 노인까지.


노인의 차림은 남루했다. 망가진 삿갓 아래, 눈처럼 하얀 백발이 너저분했다.


타지에서 흘러들어온 걸인이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그 행색만큼은.


분명 누구든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맨손이 어느 무사에 가슴팍에 박혀 있지만 않았다면, 누구든 그리 생각했을 것이다.


쑥 하고, 노인은 가슴팍에서 제 손을 빼내었다.


울컥하고, 동맥이 생명을 게워냈다.


그제야 확, 현실감이 치밀어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노인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직감했다. 저 정체 모를 살인귀가 나까지 죽이겠구나.


다양한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늙은 어머니에 대한 걱정, 끝내 벗어나지 못한 빚의 굴레.


그리고 품 안에 든 은자 한 냥의 무게.


하지만.


“가도 좋네.”


노인의 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자네를 해하진 않겠네.”


그때, 나는 흠칫하며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며, 나는 삿갓 아래 감춰진 노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얼굴 가죽이 통째로 깎여나간 채 눈이 있던 자리에 구멍만 둘 뚫린 안면.


그리고 그 섬뜩한 낯과 상반된 목소리. 노인은 터무니없을 만큼 인자한 미성을 갖고 있었다.


“어째서···?”


하도 얼떨떨했던 걸까. 무슨 용기인지, 나는 그리 물었다.


“자네는 무(武)를 모르니까.”


아직 걸음을 떼지 못한 내게, 그 거죽 없는 얼굴은 그리 답했다.


보통 때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도망쳤을 것이다.


겨우 살아났음에 안도하며, 그 이해 못할 대답 따윈 잊어버린 채 곧장 집으로 내달렸겠지.


“무를 몰라서?”


나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요?”


그날엔 왠지, 알 수 없는 울분이 차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릴 만큼 머리에 혈기가 올랐다.


그 혈기는 널브러진 시체를 지우고, 짙게 깔린 피비린내를 지우고, 마음속 공포마저 지우며···.


그렇게 나와 노인만을 감각 속에 남겼다.


원인으로 짚을 거리는 많았다. 아련한 어린 시절의 기억. 공헌명의 지독한 웃음, 아니면 이 또한 술 때문에···.


전부 변명이었다.


술을 퍼부으면서 덮어두려던 마음의 응어리, 그를 건드린 것은.


“그 빌어먹을 놈의 무가 뭐 어쨌다고. 망할 쌈박질이나 하는 재주가, 사는데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러는 거요?”


그 우물 같은 눈동자에 비친, 작은 연민.


“자, 보시오. 은자 한 냥이오. 그따위 사람 패는 일 안 해도 이렇게나 벌 수 있어!”


품 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쩔그렁, 묵직한 소리가 났다.


내가 그것으로 정확히 무엇을 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단지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그 무게감이··· 내게 자신감을, 객기를 불어넣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점소이 일 한 번 하는 걸로 이렇게나 벌 수 있었어. 이 돈으로 쌀 도 살 거고, 기침병에 쓸 약도 구할 수 있겠지. 은자 한 냥! 이거면 이 겨울을 날 수 있어! 당신이 무시할 만한 게 아니라고!”


나는 노인을 향해 마구 소리쳤다. 아니, 무언가 나의 입을 빌어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비참함이었다.


은자 한 냥.


사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미끼였다. 나귀 앞에 드리우는 당근이었다.


낚싯대에 건 채 눈앞에 들이밀어, 안간힘을 다해 내달리도록 만드는··· 그런 미끼.


공헌명에게 있어 그 돈은 그깟 장난질에 쓸 푼돈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게는.


하성 뒷골목, 다 쓰러져가는 초가에 사는 강우에게는 아니었다.


내게 은자 한 냥이란, 그 어떤 비굴함과 참담함을 감내하더라도 악착같이 거머쥐어야만 하는 돈이다.


그게 뭐가 잘못되었다고.


그 은자 한 냥으로, 이 겨울을 날 수 있는데.


그때.


“괜찮네.”


나는 멍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저 한마디.


인자함이 깃든 그 한마디 말이 마음에 닿았다.


직후, 혈기가 지워내던 감각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겨울밤의 찬 공기.

시신에서 피어난 피비린내.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방금 느껴진, 따스함 한 자락.


아무래도 내가 미쳤나 보다. 이렇게나 따스할 리 없다. 그것도 이런 상황에서. 무릎에 힘이 탁 풀린다. 나는, 지금 뭘 하는 거지.


습관처럼 품을 더듬었다. 술병을 찾고 한 모금 들이켰다.


뜨거운 느낌이 목 아래로 내려가자 겨우 나아진다. 이 판국에서도 취기에 기대야 했다.


취기로 간신히 연명하는 삶이었다.


싸울 줄 모르는 게 아니라, 싸우지 않기로 결심한 삶이었다.


술기운을 빌면서까지 애써 지켜오던, 어린 시절 맺은 그 결심을··· 노인의 동정 섞인 시선이 어리석다 힐난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화가 난 거다.


알고 있었다.


“···되었소. 말한 대로, 얌전히 떠나겠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혔다. 곱게 보내줄 때 서둘러 가자.


내일 하루는 힘들 것이다.


견뎌야 한다. 거기선 오늘처럼 참지 못해선 안 된다.


그렇게 견디다 보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 길을 찾을지도 모르지.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소.”


그렇게 스스로를 추스르며, 자리를 뜨려던 그때.



“복수를 원하나?”



느닷없이, 노인의 물음이 찾아왔다.


마음속을 꿰뚫어 본 듯한 그 물음이 내 가슴에 파고들었다.


정신이 멍해졌다. 급소를 찔린 듯 꼼짝할 수가 없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해했다.


어째서 노인의 시선에 객기 어린 분노가 터져 나왔는지, 그 진실된 원인을.


그 객기에도 불구하고, 노인이 나를 해하지 않은 이유를.


그 눈동자에 담겨 있던 것은 한낱 연민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줄곧, 내가 수년 동안이나 숨겨 왔던···.


가슴 깊이 짓눌려 있던, 질척한 살의를.


날 핍박하는 모든 것에, 되갚아 주고 싶은 한(恨)을.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하는가.


저 노인은, 내게 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가.


생각했다.

고민했다.

진정하려 애쓰고,

떨림을 억눌렀다.

마음을 정리하고···.


마침내, 정신을 차릴 즈음.


노인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시체가 널린 골목에는 그저 바람결에 실린 목소리만이 남아있었다.


- 곧 다시 만나지.


***


···노인과 헤어진 뒤, 나는 도망치듯 그 골목에서 벗어났다.


쉬지 않고 집까지 달음박질쳤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집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괜찮냐고 걱정스레 물을 정도였다.


나는 얼버무렸다.


이 역시 술 탓으로 넘겼다. 그 변명은 어머니보단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 같았다.


나의 한을 짚던 노인의 그 물음이, 계속 귓전에 울렸던 탓에.


내일을 위해서라도 그를 잊으려고 했다. 다시 만날 일은 없으리라 믿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른 채.



사흘 뒤, 나는 노인과 재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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