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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360
추천수 :
1,966
글자수 :
262,810

작성
24.06.07 19:05
조회
786
추천
31
글자
11쪽

회한의 종막, 혹은 재탄

DUMMY

- 너는 도대체 누구냐.


저 멀리서 전해진 물음. 목소리가 닿진 않았으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에 담긴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압도당한 감각.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을 봐버린 것처럼··· 그러나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해 시선이 고정되어 버린 것처럼.


그러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저 먼 곳에서 비롯된 의념에도 불구하고.


“······.”


강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별다른 감흥 없이 눈길을 돌렸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경이란 걸 써줄 만한 대상’으로 느껴지질 않았다.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관심을 줄 필요성도 없었다. 오히려 이리 느끼는 제 자신에게 더 큰 위화감을 느꼈다.


저들이 자그맣게 변한 걸까. 아니면 나 자신이 거대해진 걸까.


- 아무렴 어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고. 그렇게 단정 짓고서.


강우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무너져버린 남궁학의 시신보다도, 저 멀리서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이름 모를 자 따위보다도 훨씬 중요한 사람이 있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파괴된 남궁세가의 장원을, 아니. 이제는 ‘일찍이 장원이 세워져 있었던 폐허’를 거닐었다.


조금 전까지 가득했던 소리가, 곳곳에서 벌어지던 소란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곳에는 다만 정적만이 깔려 있었다.


깨진 기왓장.


부러진 나무 기둥.


피를 먹은 모래.


그리고 압사당한 시체들.


그따위 것들이 발아래 밟히며 찌그럭대는 소리만이, 이 정적 속에서 퍼져가고 있었다.


문득 시야 속에 무언가 눈에 띄는 것이 걸렸다. 강우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약간 주의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땅바닥에 내려앉은 지붕 아래 팔 한 짝이 튀어나와 있었다.


굳은살이 여럿 배긴 손, 흔들리지 않도록 동여매어 고정한 소매. 아무래도 가내에 남아있던 무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우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 투박한 손은 한가득 패물(佩物)을 쥐고 있었다.


옥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 금비녀, 진주 장식이 달린 노리개 등. 값나갈 물건을 한가득 쥐고 있었다.


혼란한 형세를 틈타 한몫 챙겨 보려던 속셈이었을까.


혹여, 이런 어리석은 탐욕 따위 접어두었다면 살아남았을까.


‘그럴 리가.’


그랬다고 한들, 깔려 죽는 신세가 그저 베여 죽는 신세로 바뀔 뿐이었겠지.


그러한 감상이 머리에 닿자,


“하.”


참 웃기는 꼴이라고.


그리 생각했다. 짧게 끊어지는 웃음이, 비릿한 조소(嘲笑)가 절로 튀어나왔다.


허나 그마저도 얼마 가지 못했다. 그 손을 힘있게 짓밟으며, 강우는 마저 발걸음을 옮겼다.


만연한 죽음조차, 자신이 벌인 파괴의 결과물조차 그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조금의 관심조차 묶어두지 못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하나의 역사를 파멸시킨 뒤의 여운도.


이 사변에 휩쓸려 사라진 수많은 생명을 향한 유감도.


그 모든 것을 제쳐둔 끝에 강우가 다다른 곳은.


“···왔는가.”


노인의 앞이었다.


장로원주 남궁후. 전각으로 가는 길을 막는 최후의 방벽.


그를 자신에게 맡겨두고서 나아가라고. 마땅히 해야 할 책무를 다하라고.


그리 말했던 노인에게, 강우는 그 책무의 완수를 알리고자 했다.


“···허.”


그러한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아챈 걸까.


노인은 기꺼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는 힘이 없었다. 애당초, 노인은 현재 살아있는 것이 되레 이상한 상태였다.


강우와 남궁학 사이의 싸움. 그에 못지않을 만큼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나마 싸늘한 시체로 전락한 남궁후와 달리, 아직 말이나마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노인이 승리했다고 봐도 되겠지. 허나···.


그조차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노인은 잔해에 기댄 채 겨우 앉아 있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가 없었다. 부러진 검이 복부에 꽂혀 있었다.


두 손가락을 잃은 강우처럼, 노인 또한 왼손이 팔꿈치 언저리까지 절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사투에 임하기 전부터 노인의 생명은 이미 사그라들기 직전이었으나,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 이만한 부상을 입은 이상 살아날 길은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래···.”


노인은 여전히 인자한 목소리로 물었다.


“비로소 어둠을 몰아내었나?”


정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자신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강우를 배려하여 인내한 걸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어느 쪽이든 매한가지라고 생각했다.


‘어둠을 몰아내었냐고.’


답하기에 앞서, 강우는 노인의 그 물음을 한 차례 곱씹어보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재와 먼지 탓에, 일몰 때처럼 어둑해진 주변 광경하곤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그 점이 꽤 역설적이었지만, 그 역설적인 느낌 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노인이 말하는 어둠. 그것은 단지 지금까지의 무림을 일컫는 것이 아니었다.


‘어둠을 몰아낸다’. 그 일은 그저 창연이 바라던 ‘기존 세계의 종말’만을 뜻하지 않았다.


그는 진작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그때처럼.


그간 자신이 떨쳐내지 못했던 공헌명과의 은원.


도저히 풀리지 않던 여한과 미련.


그날, 객잔을 나선 이래로 줄곧 가슴 속을 태우던 그 잔불이··· 드디어 가셨느냐고.


노인이 그리 묻고 있음을, 강우는 비로소 이해했다.


아무 말 없이, 다만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소리 없는 강우의 대답에, 노인 또한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군.”


그제야 안심한 것처럼.


“다행일세.”


더 이상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는 것처럼.


“그걸로··· 되었다.”


잦아드는 목소리와 더불어, 기울어지던 고개가 끝내 넘어가려던 순간.


“아니.”


강우는 그를 가로막았다.


“아니 되오.”


높낮이 없던 목소리가 차츰 거칠어졌다.


“이렇게 매듭짓지 마시오.”


무감정하던 어조에 차츰 간절함이 실렸다.


- 난, 아직.


이리 말을 이으려다.


강우는 잠시 멈칫했다.


노인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


남궁조차 꺾은 이 힘으로도 그를 어찌할 순 없다.


분명 노인 자신 또한 이를 알고, 또 오래전부터 각오했을 테지. 그러니···.


여기서 가지 말라고 해봐야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렇기에.


그리 말하는 대신, 강우는 질문을 꺼냈다.


“당신은 누구요.”


오래도록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을.


“난 그걸 알아야만 하오. 당신은 도대체 누구요.”


클클클···.


대답에 앞서 웃음이 돌아왔다.


“그러지 말게.”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알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그 웃음 속에서도··· 눈동자만큼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자네가 듣는다고 한들 아무런 의미가 없어. 오히려 안 듣느니만 못할 정도로 추악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일세.”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강우의 시야는 노인의 눈동자 속에 깃든 다양한 뜻을 읽어내었다.


좌절감.


무력감.


···원한.


그리고 증오.


“그런 삿된 사연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게나.”


더불어··· 부끄러움까지.


그러한 뜻을 읽는 강우의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노인은 겨우 고개를 들고서 그를 마주 보았다.


- 부디 이대로.


서로의 시선을 맞대고서, 의념을 전했다.


- 아무것도 모른 채, 끝나다오.


그러나.


“아니오.”


그 부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끝날 순 없소.”


그 부탁을··· 강우는 도저히 응해줄 수 없었다.


“그리 끝나선 아니 되오!”


강우는 소리쳤다.


뇌리에 생각 한 조각이 스쳤다. 이렇게 소리친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이던가.


“아비도, 어미도, 왜 죽었는지 끝내 이해할 수 없었소. 결코 납득할 수도 없었고 납득해서도 안 되었지.”


아, 그래.


떠올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그날. 그날이 마지막이었지.


그날 마주했던 죽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


그러니.


“당신마저 그리 잃을 순 없소.”


그래서.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대로 떠나보낼 순 없다고!”


그렇게 소리쳤다.


더없이 간절하게 애원했다.


나는 이렇게나 크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었구나. 그 사실이 강우 자신에게 있어 너무나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요동쳤다.


당신과의 만남.


운명의 끝을 닫은 게 아니라, 단지 시작을 열었음을 알려줬던 그 겨울밤의 만남.


“그것이 지금의 나를 빚어내었소.”


기연(奇緣).


“그날 이래로, 나는 당신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는 거요.”


그러니까.


“당신의 이야기는 이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것이 아니요, 그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야!”


그것이 얼마나 추악하고 삿되든 간에 상관없다.


“내겐 들을 권리가 있어.”


그것이 어떤 진실을 품고 있든 간에 상관없다.


“내겐 알아야만 하는 의무가 있다고!”


- 헉··· 헉···.


한바탕 열변을 토해낸 강우는 제자리에서 헐떡였다.


심장이 뜨거웠다. 진기가 열감을 품고서 온몸에 퍼져나가는 것 같았다.


갈증이 났다.


다만 두 손 모아 빌어야 하는 이 상황에.


그 어떤 힘을 얼마나 가지고 있더라도 상관없이, 그저 기도해야 할 뿐인 이 상황에.


“······.”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한참이나 답이 없었다.


깊이 패여 들어간 눈가에 빛이 없었다.


- 설마.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내려앉는다.


불안이 꽃핀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세계는 부스러지는 것만 같았다.


이윽고, 엄습하는 허무에 절망이 차오르던 순간.


“좋아.”


마침내 답이 돌아왔다. 그때.


강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났다.


저 한마디.


이제 막 운을 뗀 그 한마디에, 공기가 변한다.


호흡을 통해 악성(惡性)을 들이켜는 것 같았다.


강우는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아직 압도당할 수 있다는 사실에, 더불어 그만한 기운을··· 죽음에 닿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눈앞의 노인이 내뿜을 수 있다는 것에.


언제나 인자했던 그 음색이 변화했다.


타들어 가는 재와 같은··· 회한에 침식되어 문드러져 가는 목소리로 변한다.


아주 오랫동안 거듭하던 연기를, 이제야 그만두는 것처럼.


“들려주도록 하겠다.”


그대로 무덤까지 안고 갔으면 좋았을 것을.


이대로 땅 아래에 묻혀, 비로소 취할 안식과 함께 썩어들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허나···.


'이 또한 내가 쌓아 올린 업보요.'


고해할 수밖에 없는 죄악일지니.


'나 역시 눈 내린 연못가에 피어있는 새하얀 연꽃처럼··· 스스로를 고고하다고 기만할 순 없던 모양이군.'


하긴.


그런 건 애당초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한참 전에 숨이 끊겨야 마땅했던 이 몸을 지금껏 지탱해온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가슴 깊이 짓눌러 온, 질척한 살의였으니.


- 자.


"시작하지."


삶의 마지막 순간, 겨우 마음을 다잡으며.


노인은 강우에게 들려주었다.


"장환張煥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어리석은 남자의 이야기를."


작가의말

재탄(載誕): 태어나려고 함.

재탄(滓炭): (잘게 부스러져) 찌꺼기로 된 탄이나 숯.

추천과 댓글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 금일 이 작품에 후원해주신 moon5652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나은 이야기로 화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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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순차(順差) +1 24.06.21 378 15 11쪽
42 순리(殉利) ※24/06/20(목) 수정※ +1 24.06.18 393 22 13쪽
41 순조(順潮) ※24/06/20(목) 수정※ +3 24.06.16 490 23 14쪽
40 순례(巡禮) ※23/06/20(목) 수정※ +3 24.06.15 647 23 11쪽
39 순복(馴服) +4 24.06.14 735 27 13쪽
38 교(交), 교(敎), 그리고 교(矯) +2 24.06.12 745 33 13쪽
37 맹(盟), 맹(盲), 그리고 맹(儚) 24.06.11 724 29 13쪽
36 "그대는 그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길을 나아가주게." +3 24.06.10 732 33 11쪽
35 “···이리하여 나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24.06.09 758 31 13쪽
34 “옛날 옛날, 한 옛날에.” +1 24.06.08 750 28 11쪽
» 회한의 종막, 혹은 재탄 24.06.07 787 31 11쪽
32 퇴락한 꿈 +1 24.06.06 814 28 13쪽
31 대물림 24.06.05 819 30 12쪽
30 하늘에서 내려온(天) 악마처럼(魔). +1 24.06.04 864 38 11쪽
29 비로소, 파(破) +2 24.06.03 860 34 12쪽
28 몰(歿)할 때까지 몰(沒) 24.06.02 867 30 13쪽
27 악(惡)이 벼려낸 악(鍔) +1 24.06.01 863 30 12쪽
26 회(徊)를 딛고서 회(䝇) +3 24.05.31 889 32 11쪽
25 해(害), 이어서 해(邂) +1 24.05.30 901 31 11쪽
24 재(災), 이어서 재(齎) +3 24.05.29 953 31 11쪽
23 업(業), 더불어 업(嶫) +1 24.05.28 950 28 13쪽
22 절(切), 더불어 절(折) +2 24.05.27 996 3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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