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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화26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이렇게 천마가 되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공모전참가작

장연화 아카데미 작가
작품등록일 :
2024.05.08 11:58
최근연재일 :
2024.06.27 22:20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58,338
추천수 :
1,966
글자수 :
262,810

작성
24.06.21 20:41
조회
377
추천
15
글자
11쪽

순차(順差)

DUMMY

남궁세가의 장원.


일찍이 하늘을 찌를 듯 웅장히 서 있던 전각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고, 단지 하얀 잿가루가 눈처럼 쌓여 모든 것을 덮어낸 그곳에서.


“······.”


강우는 다만 침묵을 안고서 깊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겨울의 한 자락을 묶어 보존한 듯, 빛바랜 백색만이 가득한 그 광경에서 유일하게 다른 색을 띤 것이 있었다.


검은 흙무덤.


그 앞에 비석 대신 꽂힌 칼 한 자루.


그리고 그 위에 얹어진 망가진 삿갓까지.


강우는 이곳에 장환의 무덤을 만들었다.


직접 땅을 파고 흙을 덮었다. 이것만큼은 아무에게도 맡길 수 없었다.


하루 내내 걸려 묘를 빚어낸 이래로, 강우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 앞에서 보냈다.


그를 추모하거나 애도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강우에게 있어 더 이상 그를 향한 마음은 없었다.


일찍이 자신에게 복수할 힘을 준 은인. 우상. 더불어 오래전 파괴된 아버지 상을 대신 채워준 사람.


본디 우러러보고 있었으나, 그의 고백을 들은 이후 인간적인 호감은 희박할 정도로 사라졌다.


이해했으나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를 향한 모든 감정이 사라져 미워하지 않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의지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


현재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먼저 걸어간 선구자.


나의 삶을 앞서 살아본 인생의 선배.


강우에게 있어 지금의 장환은, 일종의 경전이자 예언서나 다름없었다.


수행자가 고난 앞에 불경을 외며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처럼, 그의 무덤 앞에 있을 때면 침착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고,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그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것을 생각하면, 이 땅에 그렇게 오래 머무르진 못하겠지. 그렇기에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이 자리에서 명상과 사색을 거듭했다.


그 덕에.


“여기 계셨습니까.”


창연은 어렵잖게 강우를 찾아낼 수 있었다.


“무슨 일이니.”


창연은 머리를 숙였다. 강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다만 그녀를 향해 시선을 옮기진 않았다.


“내일 세 방가가 이곳에 찾아올 것이라 합니다.”


자신들의 조건을 받아들여, 그간 누려온 직위 일체를 포기하겠다고. 재물을 바치고 충성을 서약하고자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찾아뵙고자 한다고.


보고를 올리는 창연에게서, 강우는 미미한 실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점이 되려 신경 쓰였다.


“수고가 많아.”


“아닙니다.”


짤막하게 답하고서, 강우는 그제야 몸을 살짝 돌려 창연을 바라보았다.


이 시야를 빌어 다양한 뜻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앞서 느낀 실망감, 약간의 기대감.


조급함. 맹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는 자신보다도 그녀가 더 잘 알 테지. 그렇기에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비하기 분주한 걸까.


동시에, 희열.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계(計)를 가다듬었다고 했다. 그저 자신의 머릿속에만 머물던 공상의 물감을, 현실이란 도화지에 흩뿌릴 기회에 설레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도···.


‘이곳은 이제 네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구나.’


강우는 그 사실이 신경 쓰였다.


나고 자란 고향 집, 오랜 세월 동안 혈연이 쌓아 올린 역사가 무(武)로 돌아갔음을 알리는 흔적.


창연은 그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자기 행동을 후회한다느니, 죄책감을 느낀다느니 하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남궁세가의 파멸, 자신의 본가를 파괴하는 일에 그녀는 누구보다도 앞장서 모든 것을 계획했으니까.


하지만, 더불어 그래서.


“아쉽진 않니?”


짧은 고민 끝에 강우는 그렇게 물었다.


“예?”


무슨 뜻인가. 곧장 이해하지 못한 창연은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들고일어나길 바랐기에 의도적으로 터무니없는 조건을 제시한 거잖아. 그렇지?”


강우의 물음에 창연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괜히 벌였구나.’ 하고.


창연에게 있어 강우의 물음은 그런 질책으로 들렸다.


“죄송합니다.”


그 생각을 정확히 읽고서.


“나 너 나무라는 거 아니야. 그럴 생각도 없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어차피 내게 있어선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 사람들이야. 그러니 네가 마음 가는 대로 다뤄도 괜찮아.”


그렇지만 나지막이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전전긍긍했다. 내색은 안 해도 창연의 그런 반응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이연석과 말을 나누는 편이 편했다.


그렇다고 내칠 생각은 없었다. 무책임해지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건···.”


그래서.


“너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는 거니.”


일찍이 환상 속 공헌명에게 들었던 질문을, 강우는 창연에게 그대로 읊어주었다.


삐걱대는 듯한 반응이 돌아왔다.


당황스러움, 약간은 안절부절못하는 느낌. 그녀는 곧장 받아들이지 못한 듯 보였다.


질문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리 묻는 건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잠시 굳어 있던 창연은 이내 자그마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연석 그 사람한테서 대강 남들이 아는 만큼은 들었지만, 너 자신한테선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서. 네가 왜 그토록 네 핏줄을 미워하는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하고 운을 떼면서.


“네가 지금 무엇을, 그리고 어째서 하고자 하는지를 알고 있어?”


본론을 전달했다.


주체할 수 없는 원한에 문드러지면서, 그저 죽이고 파괴하고자 날뛰었던 나처럼.


너도 지금 길을 잃은 채, 자각도 못 하고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고.


“당연히···!”


바로 열변을 토하려다 멈칫했다.


창연은 제 안에서 짙은 당혹감을 느낄 수 있었다.


차별받은 것에 대한 원망, 괄시받은 것에 대한 원망은 분명 뚜렷했다.


본가에 대한 원망, 특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말할 것도 없었다. 멋대로, 무책임하게 나를 만들었으니까.


엄마였던 사람이 죽고 한참이나 지나서야 나를 찾았다. 정작 집에 들이고서도 제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그 무공이란 것을 익히지 못하는 몸이라서 무시 받았다.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한이었다. 그래, 다른 사람의 무시보다도 그것이 더 큰 한이었다.


그래서 집을 나왔고, 그래서 짓밟아버렸다. 눈앞의 이 사람을, 이 힘을 빌어 철저하게 불살라버렸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나는 어디에 서 있지?’


멍한 느낌.


순간 몽롱해진 머릿속에서 생각이 줄줄 흘러갔다.


경, 란. 제 이복남매. 그렇게까지 원망스러웠나? 잘 모르겠다. 질투심은 있었다. 자신은 절대 갖지 못할 것들, 무의 자질이나 인정받는 위치 따위를 시기했다.


같은 정도의 노력을 쏟아부어도 나만 갖지 못하는 것에 좌절했다. 하지만 그 둘이 나한테 뭘 했던가.


방관에 원망할 순 있겠지만, 나는 단지 그 둘이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오한 것 아닐까.


금, 혁, 천. 그 세 방가하곤 어땠나. 죽은 연씨하곤 확실히 악연이 있었지만, 화씨는 어땠나. 나는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는 걸까.


아니, 그런 것보다도.


‘내가 원래 바랬던 건···.’


분명 나는 사람을 살리겠다고 맹세했는데.


의롭지 못한 자들을 쓰러뜨리는 대신, 의로운 자를 살리기로 마음먹었는데.


그래서 의원이 되길 택했는데.


그래서···.


그렇게 사람을 살리고자 아무리 애써도, 헛된 죽음이 거듭되는 현실에 절망했던 것인데.


‘나는···.’


- 언제부터, 일찍이 내가 가장 혐오하던 존재로 변해버린 걸까.


그리고 어째서 그게 괴롭지 않은 걸까.


“······.”


창연은 표정이 깨진 채 멀거니 제 자리에 굳어 있었다.


강우는 그녀의 안에서 지독한 혼란이 회오리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전에 환상 속에서 공헌명과 대화를 나눴을 적, 그리고 장환의 고백을 들었을 적 느꼈던 마음.


그때 자신이 겪었던 것을, 지금 그녀가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구나.


유독 자신에게 광신적인 모습을 보였던 창연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그러면서도 또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시도했던 이연석을 생각하면··· 그녀의 태도는 다소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문제를 겪고 있진 않을까.


장환의 죽음, 그를 통해 겨우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어떨까.


만일 나와 같다면, 그녀에게도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너가 나를 따른다고 해서, 너를 대신해 무언가를 결정지을 생각은 없어.”


나는 네게 아무것도 강요하고 싶지 않으니까, 하고.


“네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만큼 하도록 해.”


다만.


“네가 무엇을 어째서 원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단지 그뿐이야.


그렇게 그녀가 필요로 할 것을 덧붙여서. 장환에게서 들었던 그 말을.


강우는 창연에게 전달해주었다.


다시금 등을 돌렸다. 그만두었던 사색을 다시금 시작했다.


선문답이나 다름없다고, 어울리지도 않는 스님 노릇이나 하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그 이상 말을 붙인다면, 그저 내가 품은 뜻을 주입하는 것에 불과하기에.


‘자기가 했던 후회를 답습하지 말라고, 당신은 그런 뜻에서 스스로의 이야기를 고백했을 테니까.’


분명 그런 생각이었을 테지. 강우는 제 앞에 있는 장환의 묘를 시야에 담고서, 곧 눈을 감았다.


“······.”


그의 말이 끝나고서도 한참, 창연은 멍하게 제 자리에 못 박혀 있다가.


“······그리하겠습니다.”


이윽고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지금껏 생각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더불어, 그 또한 다시 보게 되었다.


귀인이라 칭송하며 누구보다 먼저 섬겼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처음, 그에게 머리를 숙였을 적.


그때의 나는 단지, 지금까지의 세상을 파괴할 누군가를 바랬을 뿐이라고.


좀 더 적나라한 표현을 쓰자면, 그저 ‘내 꿈을 이루어줄 수단’으로 본 것에 불과하다고.


그러나 지금은···.


‘내가 무엇을 바라느냐고···.’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사실 가장 듣고 싶었던 건데.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에게서 듣게 되었다.


진즉부터 기대하고 있었다면 기뻐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야···.


“···기분 되게 복잡하네.”


더불어, 뜻 모를 감정.


아직 자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복잡하게 느껴졌다. 심란하기도 하고, 미처 가시지 않은 혼란에 몽롱하기도 했다.


그래도···.


“나쁘진 않지만.”


짧게 독백하며, 창연은 서둘러 청월루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다음 날.



백의를 입은 한 무리의 행렬이 합비로 들어왔다.


작가의말

순차(順差):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커져 가는 차이


기다려주신 독자 여러분께 죄송하고, 또 감사하단 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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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순치(脣齒) +2 24.06.25 259 14 13쪽
45 순율(恂慄) +1 24.06.23 292 18 11쪽
44 순연(恂然) +1 24.06.22 350 16 13쪽
» 순차(順差) +1 24.06.21 378 15 11쪽
42 순리(殉利) ※24/06/20(목) 수정※ +1 24.06.18 392 22 13쪽
41 순조(順潮) ※24/06/20(목) 수정※ +3 24.06.16 489 23 14쪽
40 순례(巡禮) ※23/06/20(목) 수정※ +3 24.06.15 646 23 11쪽
39 순복(馴服) +4 24.06.14 734 27 13쪽
38 교(交), 교(敎), 그리고 교(矯) +2 24.06.12 745 33 13쪽
37 맹(盟), 맹(盲), 그리고 맹(儚) 24.06.11 723 29 13쪽
36 "그대는 그저,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길을 나아가주게." +3 24.06.10 732 33 11쪽
35 “···이리하여 나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24.06.09 758 31 13쪽
34 “옛날 옛날, 한 옛날에.” +1 24.06.08 750 28 11쪽
33 회한의 종막, 혹은 재탄 24.06.07 786 31 11쪽
32 퇴락한 꿈 +1 24.06.06 813 28 13쪽
31 대물림 24.06.05 818 30 12쪽
30 하늘에서 내려온(天) 악마처럼(魔). +1 24.06.04 864 38 11쪽
29 비로소, 파(破) +2 24.06.03 860 34 12쪽
28 몰(歿)할 때까지 몰(沒) 24.06.02 866 30 13쪽
27 악(惡)이 벼려낸 악(鍔) +1 24.06.01 862 30 12쪽
26 회(徊)를 딛고서 회(䝇) +3 24.05.31 888 32 11쪽
25 해(害), 이어서 해(邂) +1 24.05.30 900 31 11쪽
24 재(災), 이어서 재(齎) +3 24.05.29 952 31 11쪽
23 업(業), 더불어 업(嶫) +1 24.05.28 949 28 13쪽
22 절(切), 더불어 절(折) +2 24.05.27 995 30 14쪽
21 전(前), 혹은 전(戰) +1 24.05.26 1,035 29 12쪽
20 신(神), 혹은 신(信) +2 24.05.25 1,105 36 12쪽
19 린(躪) +3 24.05.24 1,088 3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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