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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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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1.01.23 12:29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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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수 :
6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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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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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24,022

작성
23.06.11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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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8쪽

단편#대사#어느 노인의 유언

다술에 있던 백업




DUMMY

“여보, 그 동안 고생 많았소. 어찌 그리 사셨소. 못난 인간 만나서··· 참 못볼 꼴 많이 보고 고생 많았소. 주름 진 입가에 미소 대신 다른 걸 얹어 준 적이 너무 많소, 내가.

손이고 발이고 눈이고··· 물기보다는 그저 솜이불 덮어주고 따뜻한 구들장 위에 누이고 그렇게 지냈어야 했는데. 꽁꽁 물이 언 겨울 날에 당신이 나가서 발품 팔고, 물건 떼오고. 시장가에 가서 온갖 인간들과 드잡이질 하게 하고.

내가 아주 조금만 더 잘나먹은 인간이었다면 그렇게 살게 하진 않았을 텐데. 이제 와 너무 늦었지만 미안하단 말 전하오.

내가 그대 데려올 때 장인 어른께 한 말이 있었지. 고생은 몰라도 눈물은 적게 흘리게 하겠다고. 힘들 때도 있겠지만 내 곁이라 그래도 잘 견디도록 보살피면서 살겠다고. 하고 많은 인간들 중에, 이 최가 놈 고른 걸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면서 살게 해주겠다고, 확신을 했지.


그 말에 마지못해 끄덕이시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소. 본인도 병고病故가 심하셨는데 생전에 내색 한 번 안하시고, 늘 엄하게만 우리를 대하셨지. 아니, 내게만 그러셨는지 모르겠소. 당신 막내 딸이니 나 있을 때 보이신 적 없는 표정들이 많으셨겠지.


그런 아버님도 가고,


처음엔 무엇하나 할 줄 모르던 자네 데려와서 온갖 일 다 시키고. 규수던 젊은이가 그렇게 팔심 좋은 아줌마가 되고.

이내 검은 머리도 사라지고.

그래봤자 마음 여린 자네, 당신인데.


옆에서 늘 지켜주겠다고 하던 남정네가 이리 꼴이 말이 아니라······ 미안하오.”


사내는 침상에 누워 있었다. 여인네, 보다는 노파인 그녀가 물기 어린 눈가에 먹먹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옆에 앉아 있다. 안방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앉은뱅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였다.

머리를 곱게 땋은 노파는 아무 말이 없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곱던 아가씨가 벌써 할머니가 되었구려.”


사내는 느리게 입가를 들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누인 채 고개를 까딱거리는 것도 힘겹다는 듯 꼼짝 못하는 모습이다.

천수를 누리지 못했다고 할 만한 나이는 아니었다. 다만 몸 속에 느즈막히 발견한 종양이 그의 건강을 빠르게 해쳤다.

지금에 와서는 도리어 격통은 없었다. 사내는 때를 짐작했다.


“자네 겁많은 것 아는데. 이제 잘 때 곁에 아무도 없어서 어쩌오. 자다 깨서 새벽녘에 변소 갈 때 붙잡을 사내 팔이 없어서 어쩌오.

험한 세월, 못되먹은 인간들이 별 몹쓸 사기 짓거리를 쳐도 그 간담으로 용케 다 이겨냈소. 애 둘, 번듯하게 키워서 장가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고······.

형석이 민서 이제 얼굴에 주름진 게 참 우습지 않소. 그 딸 아이, 사내 아이 또 하나씩 낳아서 손주를 둘 보여주는데······ 걔들 얼굴 못보는 게 조금 아쉽소.


여보.


여보오···.

자네는 걔들 얼굴 좀 오래 보다가 오시구랴. 굴러도 산 개똥 밭이 좋다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참 따뜻한 분이시니, 나는 좀 먼저 간다지만 당신 남은 여정 잘 보살펴 주실 것이오.

할아범 먼저 가 없다고 낙담하지 마시고. 밥 먹을 때 같이 앉아 먹을 노친네 없다고 쓸쓸해 하지 마시고.

오후에 같이 산책 가거나 뒤뜰에서 볕 쬘 친구 없다고 슬퍼 하지 마시고. ······.”


남자는 긴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었다. 늙은이의 성대는 영 말을 듣지를 않는다. 간만에 몸이 활기가 돋고, 또 아무렇지 않다 싶더니 가끔 이렇게 덜그럭거린다.

젊은 날에는 이러지 않았다. 죽을 것 같던 때에라도 기어코 한 걸음을 더 내딛고 또 아무렇지 않게 뛰어대던 몸뚱이였다. 80을 넘긴 몸은 마음과 정확히 정 반대였다.


그는 아직도 책임감 넘치던 젊은 날의 그 사내였다. 무뢰배가 있으면 멀리 쫓아버리고, 애들이 버릇이 없을 때 엄하게도 굴고. 일감이 없어도 일터에 나가 목재 앞에서 머리를 싸매고 뭐라도 만들어내던 그 사내였다.

다만 시간의 흐름은 지나치게 정확하고 정직해서, 그의 마음이 조금도 변색되지 않은 것과는 다르게 군다.


노인은 마른 침을 몇 번 삼키며 입을 달싹거리다가 마저 말했다.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어렸다.

미소는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짓는 것이다. 제 스스로도 기분이 물론 좋지만. 주로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지어왔다.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아이들을 위해서나.


노인, 사내는 누워 있는 꼴이나 주름진 안면과는 정반대의 또렷한 목소리였다. 늘 마지막 힘이라는 게 있었다. 사내는 그렇게 살아왔다.


“할 말 참 많았소.

······

근데 다 하질 못하고 살았소.

이제사··· 그게 아주 약간 맘에 남소.

여보, 당신. 사랑하오.”


노인을 앉아서 바라보는 노인의 눈가에 어린 물기가 많아졌다. 늙어서는 영 눈물도 줄어드는지 잘 울지 않았는데, 반려의 떠나감은 켜켜이 쌓였던 온갖 심려나 잡생각을 밀어내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같이 살았던 세월이 상상치 못할 정도로 길었다. 따로 살았던 날의 기억이 흐려질 정도로 말이다.


둘은 사이가 좋은 부부였고, 언제나 함께였었다. 늘 같은 방을 썼고 같이 잠에 든다. 일상을 같이 했고, 가장 먼저 하루의 힘든 삶에 대해 서로 토로하던 사이였다.

마음에 안 드는 양반이 있으면 그에 대해 말하기도 했고, 또 어떤 고민이 있어도 가장 먼저 나눴다.

부부는 한 몸이다. 그래봤자 각자의 삶이며 건드릴 수 없는 고독함이 없는 인간이 없었지만.

두 노부부는 그런 고독함을 서로 가장 많이 덜어주는 존재였다, 서로에게.

남편이자, 부인이자, 절친한 친구였으며, 동행자였고 대화의 상대였다.


부인이 감정을 채 추스르지 못할 때 자리에 누운 노인이 더 말했다.


“내··· 가. 이 최가가 곰살스럽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지. 애들··· 걱정은 마시고 그저 잘 지켜만 봐주시오. 늙어서 괜한 고민 떠안지 마시고···.

나이 들어도,

당신 그 때 그 모습 아직도 남아있소. 여전하오. 이 씨 아저씨 막내딸, 그 미모 말이오. 내가 여러 감사할 거리가 있지만 자네만큼 속도 얼굴도 똑같이 고운 처자 만나 즐겁게 살아온 세월에 하나님께 감사하오.

혹시 못해줄까봐 여러 번 말하오. 사랑하오. 이李 양림. 자네 참 잘 살았소. 애들 돌보고, 나 추켜세우고. 시장가서 고되게 일하고.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잘했소. 이제 돌볼 인간 하나 줄어드니 숨 좀 고르고 사시오.

당신이랑 같이여서 원래보다 한참 많이 웃었소. 무뚝뚝한 인간 만나 표현 많이 못들었을텐데, 죄송하오······. 영원히 사랑하오.”


남자는 숨이 일정하다. 고르게 내쉬는 호흡에 마치 멀쩡한 사람인 양 느껴지기도 했다.


노쇠한 사내는 그렇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던 걸, 눈가를 휘게 보이던 걸 그대로 유지했다.


그 이후로 여인은 한참을 기다렸다.

몇 시간도 아니며 분 단위 잠깐의 시간이었는데, 아주아주 길게 느껴졌다.

어린 날에 시집을 와서 노파가 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보다 더 긴 것도 같았다.


남자는 근 한달 간 한 말보다 더 많은 말을 하고는, 그게 마지막이었다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여인은 눈물을 말없이 흘리다가, 쏟아지는 걸 차마 다 닦지도 못하고 동반자의 누운 가슴팍에 제 몸을 겹쳐 무너지듯 깔아 안고는 얼마간 더 흐느꼈다.


마침 그 날. 집에 딸 아들 두 자식들의 내외가 모두 와 있었다. 어머니가 방 안에서 울음을 토해내는 소리를 들었는지 바깥에 있던 아이들이 들어와 함께, 얼마간 더 울었다.


흰 벽지. 오래된 장롱. 곱고 또 따뜻한 솜이불이 깔려 있다. 집기들은 낡고 오래 되었지만 구석에 먼지 없이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삼십 년은 넘게 산 단독 주택의 어느 방 안에서 그렇게 한 가족이 염려하던 작별을 치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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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단편#대사#수군통제사 23.06.13 19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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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단편#대사#젊은 청년, 고백 23.06.12 24 0 7쪽
» 단편#대사#어느 노인의 유언 23.06.11 26 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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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그대를, 2022 23.01.05 44 0 5쪽
44 누군가에게 연기를 시키려#남자#시트콤 23.01.05 37 0 2쪽
43 사랑에 대하여, 기독교적#단편#에이와 이이#아가페와 에로스 23.01.05 43 0 24쪽
42 누군가 에게 연기를 시키려고#판타지#공녀#기사#비룡 22.11.23 40 0 7쪽
41 누군가에게 연기 시키려 끄적 22.11.14 37 0 4쪽
40 문혈, 젊은 천재 22.11.14 31 0 14쪽
39 연극독백#트라우마#김한수 22.11.09 37 0 9쪽
38 점퍼, 순간이동자 22.09.17 38 0 27쪽
37 잠수도시, 칼젝 21.07.09 53 0 5쪽
36 발란은 숲에서 길을 잃었다. - 21.06.23. 21.06.23 58 0 26쪽
35 2:01 PM 21.06.22 42 0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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