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바둑이란 종목에서
다술에 있던 백업
사실 바둑이란 종목에서 날 당황케 만들 수 있는 자는 별로 없다. 설령 그 앞에 세계에서, 라고 붙여버려도 말이다. 얼핏 자만으로 들리기에 충분했지만 솔직히 사실이 그렇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나 나란 인간은 꽤나 굉장한 기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 형국은 뭐야?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태에 입을 벌렸다. 그저 어버버버 하는 것만이 내 최선인 것이다.
"좀 다무시죠? 품위없게."
"어으으음."
꼴깍. 나는 요청대로 입을 꼭 오므리고 긴장된 침을 삼켰다. 목울대가 울렸고, 곧 자신 없는 떨림을 간직한 오른손이 나아갔다.
탁.
오른 아래 귀퉁이에 흰돌이 올랐다. 이미 할 수 있는건 없었다. 부질없는 몸부림에 쥐고 있는 백색 알이 부끄러울 지경이다(어쩌자고 당당히 상대에게 흑돌을 주었는지!).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한 만용이었다.
전세는 이미 형편없이 밀리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의 접전도 이긴 것이 없었다. 완벽한 패배. 역전의 가망이라곤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다. 압도적인 역량의 차이에 절망하는 날 깨우치게 한건 부끄럽게도 상대였다. 청년은 어느새 뒀는지도 모르게 고민 없이 툭 두곤 물었다.
"안두십니까? 끝나려면 아직인데."
"크흠."
나는 멋쩍은 헛기침과 같이 돌을 쥐었다. 다그락거리는 소리가 정신을 맑게 한다. 알게 모르게 확실히 완전히 진 것은 아니라는 듯 남아있는 구석이 있긴 했다. 믿긴 싫지만 어쨌거나 나는 저 새파란 청년에게 무진장 밀리고 있었고, 그건 처음부터 "어흠!"하며 거드름 피우지 않은 채 전력으로 시작했어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이미 패배는 기정사실. 흐름을 조금이라도 읽을 줄 아는 자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저 파란눈의 청년에게 한껏 항전하여 비참하지 않게,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키며 싸우는 것 뿐이었다.
딱!
그런 불혹의 의지를 담고 백돌이 올랐다.
···10분 후.
"졌네. 내 패배야."
처음의 오만한 기색은 한치도 없이 겸허히 말했다. 이 천재를 연장자와 선배로서의 위엄으로 대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헛소리였다. 그건 최소한 동수를 이루고서나 부릴 투정이리라. 수세에 몰려 정신없이 막다 제대로 된 응수 한 번 못 해본 놈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내가 멍청했군. 나이만 보고 상대를 깔보다니. 날 욕해도 좋네."
이렇게 되니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띈 채 청년을 슬그머니 바라봤다. 의의로 청년은 처음의 건방진 모습은 커녕 밝게 웃고 있었다.
아아, 저 아이는 이 아둔한 날 선배로서 배려하기까지 하는건가. 순간 쓸데없는 동정이라고 쏘아붙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기엔 그 큰 그릇앞에 내가 너무 옹졸해보여 그만 뒀다. 그저 그 청년이 입을 열자 경청할 자세로 귀를 기울일 뿐이다.
"멍청한 건 아니까 다행이네요. 나잇살만 먹은 양반이."
······거, 뭐.
난 무안하게 입맛을 다셨다. 이 망할 놈.
다술에 있던 백업
- 작가의말
2009-11-11 23:10:15작성
중3때. 쓴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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