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2022
다술에 있던 백업
그대를.
남자의 입에서 불쑥 그런 말이 나왔다. 남자의 화법에 익숙한 여자는 말을 가로막는다.
***
“됐어. 짧은 시구만 읊고 환심을 사려는 얄팍한 수법이잖아.”
“그런 게 아니야.”
차갑게 말하며 돌아서려는 여자를 붙잡으며 남자가 다시 말했다. 실망한 듯 한 그녀를 부르자
“잠깐만. 기다려 줘.”
“아니라면 뭐가 아니라는 말이야! 오늘을 최고의 날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해놓고서······. 번번이 실수에 사고만 치고서 이제 와서 한두 마디로 용서를 벌려는 거잖아.”
그녀는 속에 있던 것을 털어 놓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화가 난 걸 수도, 눈물이 나는 걸 수도 있었다. 두 마음 다 있겠지만 어느 부분이 더 크냐 하는 문제였다.
남자는 그녀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며 괜히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없는 낡은 광장. 어두운 곳 한 가운데 이젠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대에 걸터앉은 채였다. 지겨운 기타 선율과 몇 마디 말로는 그녀가 마음을 풀 수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다시 입을 열 때에는 음이 흘러 나왔다.
“그대를.”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그대는 기억조차 못하겠지만
이렇듯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대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흐르곤 했었던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 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슬픔과 이별 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 지면 좋겠어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그대를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그대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그날들.
“······어때?”
낯선 가락의 노래가 끝나자 환기하듯, 말을 멈추고 들어주고 있던 그녀에게 남자가 물었다. 무엇보다도 그 치고는 조심스럽게. 평소 여자의 앞에서 늘 여유로운 남자였기에 그녀는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을 봤다고 느꼈다.
평소완 다른 사내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그가 들려준 울적한 노랫말 때문이었을까. 마음이 가라앉고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가 대답했다.
“······좋네.
······. 듣기에 노래가.”
“그렇지?”
하고 말하며 사내가 환히 웃
[2022.10.31.1.01.AM:다시 이어 적은 날짜]
었다.
종종, 생각이 나 부르곤 하던 노래였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부르기에 감정적으로 몰입이 편한 노래이기도 했다.
덧없는 멜로디에 단순한 가사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르기 쉽다. 가사에서조차 이미 떠나가버린 인연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긍정성을 회복한다면 불러 볼만한 노래였다.
다행히 사내는 목소리가 좋았다. 나름대로 여러 번 고치고 또 고치며 불러왔던 노랫소리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고. 당장에 울 것 같았던 연인의 얼굴도 음색에 잠겨 다양한 감상을 느꼈는지 다소 안정되어 보였다. 어쨌거나, 이 시간을 지나가게 해준다면 노래는 충분하고도 남는 역할을 해준 셈이었다. 그는 다시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 하루를 망쳤지만 나를 위해서 하루를 더 내줄래. 분명 즐거울 테니까."
사내의 약속은 비관적인 감상에 잠겨 노래를 지었는지 모를 가수의 노랫말 만큼이나 덧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생각을 바꾼다면 한 번 믿어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못내 지는 척, 울 뻔했던 얼굴을 다시금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늘, 용서와 허락이 많은 편이었다. 사내는 순한 성격의 선택을 하고야 마는 여자를 연인으로 만났다는 점에 감사했다. 너그러움은, 그들 연인 간의 문제에 있어서 언제나 정답이 되는 마음이었다.
"내일 점심에 여기서 보자. 잘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을게."
사내는 말을 마치고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다가, 포옹을 했다.
때를 잘못 건드리면, 간혹 거친 손아귀가 날아들고는 하는 시도였지만, 다행히도 생각보다 많이 누그러든 모양이었다.
그는 저녁 무렵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었고, 끝내 웃는 모습을 보고 나서 안심하고 헤어질 수 있었다.
다술에 있던 백업
- 작가의말
12년도,
고3 때.
김광석 노래를 듣다가 문득 적었나 봅니다.
생각해보면 이걸 적었던 당시의 감상이 떠오릅니다.
편하게 싯구를 읊는 것보다는,
노래를 정식으로 하는게 더 고생스럽다는 생각에 적었던 글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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