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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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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1.01.23 12:29
최근연재일 :
2024.02.08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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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7 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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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빌 그런츠, 작가

다술에 있던 백업




DUMMY

소설은 언제 가장 소설다워지는가.


소설가에게 있어서 그런 명제는 깨나 중요한 것이었다.


빌 그런츠는 상념에 빠졌다.


그는 소설가로서 펜을 쥐고 있었지만, 원고지를 채우는 일은 지나치게 고되었다.


재능이 없다거나, 평생 그 일을 하지 못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 그건 아주 익숙한 일이었고 또 행복한 과정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도무지 한 문장을 써내려갈 수 없는 시간이 있다는 걸 인정한다.


그건 소설보다는 솔직히 삶의 일이었다. 글을 쓰는 건 가볍고 쉬운 일이다.

그것이 그가 살아가는 사회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면, 누군가에게 읽히리라 고민한다면 전혀 가볍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고 단지 쓴다는 건 그렇다.

그러나 반면 삶을 살아낸다는 건 무겁다.


그래, 거대한 돌덩이를 반대편에 올려놓은 지렛대에 자신의 온 힘을 실어 내려보아도 꿈틀이나 할까 싶은 그런 일이다.


그의 글은 가벼우나 삶은 무겁다.

글은 쉬우나 삶은 어렵다.


그런 고민에 빠져가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Telelelele.


정말 딱 의성어처럼 울었다.


셀룰러폰의 벨소리는 변경이 가능했고, 그는 아무리 깊은 딴 생각을 하고 멀리 있어도 알 수 있을만큼 귀에 꽂히는 요란스러운 종류로 변경을 해놓은 참이다.


그는 산에서 전화를 받았다.


사람이 없는 깊은 산중이었는데, 새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은 전화기는 훌륭하게 통신 전파를 수신했다.


나무들 따위로 여러모로 사방과 하늘이 막혀 있고, 도시나 그 안의 기지국과도 아주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달칵, 하고 폴더형의 셀폰이 열렸다. 위로 열린 화면에 떠 있는 번호는 모르는 것이었다.

등록되지 않은 번호.

그는 글을 적다가 받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수신을 눌렀다.


어차피 글이 막혀 있던 차였다. 길을 가다가 누군가 멈춰 세운 것이 아니라 애초에 쉬고 있을 때 그를 불러 돌아보게 한 것이기에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다.


"모시모시."


빌 그런츠는 능숙한 일본말로 전화를 받았다.

그가 있는 곳은 심지어 한국이었다. 미국인이었으나, 한국말은 현지에서 생활할 수 있을 정도는 구사하고 있었다.

그의 대학교 전공은 한국어였으니까.


외국인 특유의 어눌한 발음이 묻어나기는 하지만.

일본어는 전혀 특기도 아니었으나, 농담조로 사용할 단어 몇 가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한국어를 공부하다보니 붙어있는 한중일 삼국의 문화권에 대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게 되었고, 그 때 외워둔 헛소리들이다.


일본어의 발음은 거의 원어에 가깝다.


빌 그런츠라는 미국인에게 전화를 건 상대방은, 잠시 말을 멎고 침묵을 고수했다.


통신 너머의 상대는 생각했다. 전화를 제대로 건 게 맞나?


한 이 초 정도의 침묵 후에 상대방이 이야기를 열었다.


'여보세요Hello?'


미국인이며, 영어권에 사는 국민이고 백인인 빌이 가장 많이 듣는 언어는 당연히 미국식 영어이다.

이번에도 그러했다.

단지 빌이 미친 놈일 뿐이었다.


그는 장난을 좋아한다.


"안녕하세요, 제대로 받았습니다Hello, I got a call."

"이런···. 빌 그런츠 작가님 되십니까?"

"예 맞습니다."


40대 정도의 남성이 아닐까, 싶은 목소리였다. 약간은 거칠은 굵은 톤이 섞여 있고 깔끔하고 젠틀한 말투였다.

그런 이에게 괜한 당황을 선사했나 싶어서 빌이 미안해질 무렵 용건을 밝혀왔다.


"이번에 뉴욕시 XX주간지에서 연재 소설 하나를 런칭하려고 합니다. 저희 편집기획부에서는 현재 주목받는 젊은 작가들 중에서는 알맞은 사람이 빌 그런츠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


생각보다 진중하고 쓸만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쓸만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렇지.

그는 원고지를 채우지 못해서 자신의 집 방구석에서 고민을 하다가 멀리 떠나와, 여기까지 당도했다.


한국의 축령산 어느 기슭에 도달할 때까지 결국 원고지 칸을 채우지 못하고 여기까지에 왔다는 말이었다.


그가 당면한 문제의 본론은 그것이다. 작가로서 이야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그에 반해, 연재를 할 만한 곳이 어디이냐 하는 건 그 다음의 고민거리였다.


"좋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은 대뜸 수락했다.


"요새 레거시 출판부에서 듣기로 탈고에 어려움Writer's block을 겪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와 함께 일을 하는 건··· 예? 좋다고요?"


상대는 빌의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괴짜 작가가 미국 동부에서 한반도 남한의 어느 산골짜기까지 왔던 여정은, 나름대로 업계에서 화젯거리였던 모양이다.

작가라는 인종들은 대개가 겉으로 보기엔 괴짜에 이상한 인간들 뿐이었지만, 개중에서도 글이 안써진다며 조금씩 자리를 옮기다가 그토록 멀리 간 일은 드문 편이었다.


그래서, 뉴욕 주간지의 편집부서에서 일하고 있는 디렉터Director 제이미 갈란트는 여러 대화의 경우들을 준비하고 연락을 한 참이었다.

빌 그런츠는 나름대로 인기가 있는 작가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고, 그만의 개성은 매니아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는 한다. 그들 잡지가 대상으로 하려는 독자층 역시 그 매니아층과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기에, 그를 섭외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아쉬운 것을 드러낼 필요는 없지만, 솜씨가 좋고 같이 일하기에 알맞다면 적극적인 영입 의사는 밝혀야만 한다.

그가 혹할만한 여러가지 조건들을 염두에 두고 건 전화였건만 한 순간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버렸다.


간혹 깐깐하게 군다면 정말 콧대가 높아지는 직종이라는 점을 미루어 봤을 때, 빌 그런츠의 대답은 참으로 예상 외였다.


제이미는 잠시간 생각을 하며 머릿속으로 말을 고른 뒤 말했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지금 좋다고 하신 거죠?”

“예. 좋네요. 뉴욕 주간지. 많은 사람들한테 제 글을 알릴 기회죠. 글은 더럽게 안 써지지만. 뭐 어떻습니까. 당신네들이 날 선택해 준 건데. 뭐 최대한 써보고 통화하죠. 마침 글 쓰는 중이었습니다. 이만 끊어요.”

“억.”


제이미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뇨, 작가님. 저희 프로젝트가 그렇게 기한이 많지 않아서 또 바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보셔야···.”

“그런.”


빌은 입을 떼서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런 얘기는 제 매니저와 하시죠’라고 하는 게 이 즈음에 할만한 쿨한 대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매니저가 없었다. 그와 같이 일하고 있는 레거시 출판사의 담당자는 책을 낼 때 해당 업무를 해주는 사람이지 그와 개인적으로는 아무 연관이 없다.

그는 아래에 사람을 두고 일을 할 정도로 대단한 인간은 아직 아니었고, 거드름뱅이도 아니었으니.


“···뭐. 알아서 챙겨주시죠. 좋아요. 노예 계약입니까? 제 저작물을 제 명의로 인정하지 않으실 건가요?”

“어··· 아뇨.”

“그럼 페이는 0달러 보다는 많겠죠.”

“예?”“아닌가요?”

“그게 무슨 미친 소리세요, 작가님.”

“그런 게 아니라면 됐습니다. 글을 써서 주면, 주간지에 실어주고 돈도 주며 제 작품을 훔쳐가지도 않는다는 데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전 지금 블레싱 스피릿 마운틴祝靈山에 있고, 이곳은 사람도 없고 바람도 아주 시원하게 불어오는군요. 원고지만 채워지면 딱입니다. 저는 이제 펜을 들어야겠습니다.”

“······.”


통화기 너머에, 뉴욕 시 어느 한 구석의 출판사 건물에 자기 데스크에 있던 제이미는 손바닥으로 제 눈가를 감싸며 지그시 문질렀다.

신사적으로 나온다고 했더니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 양반이었다. 원래 이런가? 작가라는 인종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빌 그런츠라는 작자의 인격에 대해서 논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죠.”


간신히 제이미가 입을 떼어서 얘기했다. 흰 머리가 나기 시작한 물빠진 블론드 헤어. 수염이 꺼끌하게 묻어있고, 체격이 투실하니 큰 중년의 사내는 편한 주황색 셔츠에 면바지 차림이었다.

새로운 종류의 어려움이었다. 승락은 해놓고 아예 계약 조건에 대해서 논할 수조차 없게 만들어 두다니.


“그럼 된 거죠? 글을 쓰기 전에는 한국에 있을 예정입니다. 여긴 좋아요. 사람들도 친절하고. 전 한국말을 아주 잘 하거든요. 거기는 지금 저녁인가요? 여긴 아주 이른 아침입니다. 지겹도록 초코바만 먹으면서 버티고 있는데, 얼른 쓰고 내려가서 브런치라도 먹어야겠습니다. 오늘 하루 수고 많으셨습니다.”

“예··· 작가님도요.”


제이미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걸 보면, 빌 그런츠의 정신 상태는 심각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글 말고는 머리에 들어오는 게 없는 듯 하다. 지금 건드려봐야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나중에 다시 연락을 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굿 이브닝입니다.”

“예Thank you···.”


뚝, 하고 빌은 Th까지 듣자마자 폴더폰을 닫아버렸다.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고 용건이었다. 또한 상대는 일하기에도 괜찮은 인간인 것 같았다. 이토록 그의 이야기를 잘 받아주고 화내지 않는 걸 보면. 최소한의 신용도가 없으면 어쨌든 일을 하기에 불편하다.

그의 글을 넘기려면, 적어도 상식적인 수준의 선의는 갖추고 있어야 했다.


빌 그런츠가 그런 선의를 갖는 상식적인 인간인가에 대한 문제는, 뭐 그 스스로가 판단할 수는 없는 논점이었다. 그를 상대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말해줘야 할 것이었다.


빌은 다시금 펜을 집어 들었다. 아침 공기가 시리도록 맑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선선하다는 느낌이었다.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숨결이 참 마음에 든다. 벌레도 그리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햇빛은 어느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아 평평한 곳에 원고지를 놓은 그를 계속해서 때리고 있었지만, 등산용의 챙이 넓은 모자는 든든한 그의 우군이었다.


글을 쓰려고 하면 온갖 것들이 다 신경이 쓰이게 마련이었다. 그가 앉은 바위의 울퉁불퉁함이나, 지나치게 딱딱한 것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의 소리나 말이다. 그런 것들에 신경을 두기 시작하면 결국 원고지로는 아무 집중을 두지 못한다.

그런츠는 막혔던 문장의 다음을 생각했다.


[···젝과 케일리는 황무지에 서서 망연자실하게 조슈아 트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다지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아니었고, 고대에 ‘여호수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에게 방향을 일러주는 신의 점지하심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당장 그들의 인생처럼 길이 막힌 황야에서 그들은 방향을 정해야만 했다.

이대로 있으면 굶어 죽는다. 도시로 돌아가면 라스베이거스에서 져버린 막대한 빚으로 갱들이 총구를 들이밀 테였다. 지도도 없고, 스마트폰도 배터리가 다 한 상태에서 길을 찾아 마을이라도 들러야 했다. 젝이 말했다.]


“······.” 여기까지가 원래 써 둔 부분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듯 단어를 천천히 골랐다.


원고지에 싸구려 펜촉이 굴러가면서 다음 글자를 그려나갔다.


[“기도할까?” 퍽, 하고 케일리가 젝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주일도 안 지키는 놈이 무슨 낯으로.” “신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보는 거지.” “······.” 케일리는 면상을 구기면서 젝을 노려봤다. 삼 초 간 그러고 있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퍽. 하고 젝이 케일리의 뒤통수를 때렸다. “악!” “이건 그냥 억울해서 때린 거야. 잘했어.” “우리 상황이 나아지면 난 네 다리를 부러뜨리고 말 거야.” “오 이런, 너무 말이 심한 걸 친구.”

부르르르릉.

그 때 멀리서 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지평선 너머에서 연기를 일으키면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었다. 젝과 케일리는 잔뜩 긴장해서 그것을 노려보았다. 그래보았자 윤곽조차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제법 큰 자동차 종류라는 건 알았다.

그들은 느린 두 발뿐이었으므로, 어딘가로 피할 수는 없었다. 자동차는 공교롭게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곧장 직진해왔다. 지평선의 끝에 있던 것이 그들이 있는 자리까지 닿는 것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체감으로는 긴장감 속에서 길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젝의 손목 시계가 돌아간 분량은 고작해야 10분 정도다.

쿠르르르릉, 하고 거친 엔진 소리를 내며 다가온 것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거대한 트럭이었다. 오프로드마저 앞마당처럼 평탄하게 갈아내며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몬스터 트럭이다. 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높이에 좌석이 있었고, 벌컥, 하고 그 문이 열렸다.

젝과 카일리의 심장은 빠르게 두근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설마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고 라스베이거스의 갱단이 찾아온 건가? 그게 맞다면 당장 도망을 쳐야 했지만, 다리가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심은 미련하게 사람의 몸을 굳게 만든다.

그 문이 열리고 사내 하나가 내리는 동안 젝과 카일리는 아주 긴 긴장감을 느껴야 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선글라스. 덥수룩한 회색 수염. 대머리. 어느 정비소에 있을 것 같은 중년의 터프 가이가 내렸다. 그는 걸친 재킷에서 주섬거리며 무엇을 꺼냈고, 젝은 화약 무기를 떠올리며 다리가 조금 떨렸다.

트럭에서 내린 사내가 이야기했다. “너네가 젝과 카일리냐?” “오······.” “예?” “멍청한 걸 보니 맞나 보군. 오렌지 타운 벱티스트 철치의 페스터께서 말씀하셨다.” “···?”

젝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카일리는 머리가 잘 안돌아가면 도리어 표정이 굳고 냉담한 낯이 되어버리고 만다.

사내가 선글라스 너머로 눈을 휘게 웃으며 이야기했다.

“이번 주는 주일 예배 꼭 나오게 잡아오라던데. 젝네 어머니가 안 그러면 못난 아들을 거꾸로 매달아도 좋으니 부탁하셨다고 하더군.”

“엄마···?” 젝이 입을 벌려 바보처럼 이야기했다. 28살의 사내가 하기에는 어벙한 말투였다.

“분명히 미친 짓거리를 하러 갈 것 같아서 스마트폰에 추적 프로그램을 깔아 놨다더군.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딴 데 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구나. 전원이 꺼져서 이 주변을 한참을 돌았지.”

“오 마이 갓······.”

카일리는 그 설명에 무릎을 꿇었다. 황무지의 모래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그는 아마 평생 처음으로 간절하게 해봤던 0.1초 정도의 기도에 감사함을 느꼈다.

반대로 이번엔 젝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청한 눈으로 아저씨를 처다 보았다. 동갑내기 두 청년의 기괴한 꼴에 사내, 슈나이더는 볼을 긁적였다. 수염이 그의 손가락을 방해했다. 그는 두 멍청이가 한동안 감격이나 감상에 젖도록 내버려둔 뒤, 그러니까 이 분 정도 지난 다음에 말했다.

“안 올라타면 나는 그냥 갈 거다.” “아악!” “아악!”

젝과 카일리는 물벼락을 맞은 고양이처럼 발작하면서 그의 뒤를 따라, 몬스터 트럭의 좌석에 부랴부랴 올라탔다.]


“흠.”


빌은 이야기를 멈췄다. 한 단락은 적어도 끝난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새 태양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손으로 적어 내려가는 글은 속도가 조금 느렸다.

슬슬 내려가서 브런치를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그는 원고지를 잘 접어서 가져온 백팩에 넣었다. 펜도 보조 주머니에 챙겼다. 엉덩이를 털며 딱딱한 바위에서 일어선 그가 내려가려고 방향을 찾았다. “음?”


그러고 보면, 그가 있는 곳은 길이 아니었다. 무작정 아침부터 산을 찾아 올라온 뒤에 사람이 없는 곳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어느 방향으로 왔더라?’

“······.”


작가는 잠시 고뇌에 빠졌다. 침착하게 나무와, 불어오는 바람을 느꼈고, 다시 나무와 흙바닥, 바위를 관찰했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태양의 위치도 확인했다. 음.


길을 잃었다.


“······오 마이 갓.”


그리고 빌 그런츠는 주머니를 더듬대 초코바와 핸드폰이 있는 걸 확인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이 쓴 소설 속의 주인공들보다는 상황이 훨씬 나았고, 또 일반적인 궤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난생 듣도 보도 못한 산의 어느 기슭에 있는 상황은 변함이 없었지만. 여기는 통신도 되고, 그의 폴더폰은 배터리가 아주 많다. 그런데 한국에서 조난 신고가 몇 번이더라···?


턱, 하고 그가 이마를 잠시 짚었다.


한 삼 분 간 자리에 멈춰서서 온갖 생각과 신에 대한 종교심과 유년 시절 교회에서 보냈던 추억들에 대한 그리움,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따위까지 상상하고 떠올린 그는 그 기억의 혼돈 속에서 무언가가 번쩍 하고 생각나는 걸 느꼈다.


그의 대학교 전공 시절은 지나간지 벌써 십 년이 다 되어가는 시기였으나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한국어문학 전공생이었던 그는 그것을 배우면서 다양한 수업을 들었고, 그 커리큘럼에는 한국 사회의 정보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One One Nine.'


미국의 조난 신고 번호를 뒤집은 꼴이었다. 그게 특이해서 당시에 외웠던 것이 떠올랐다. 빌은 “Thank God.” 이라고 중얼거리며 셀폰을 뒤적거렸다. 역시 사람이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그 때 어딘가에서 떠드는 소리같은 게 들렸다. “~.” 웅성거리는 종류는 아니었고, 날카롭게 쏘는 톤으로 누군가 화가 난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빌은 그게 사람의 음성이라는 걸 깨닫고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에서부터 부스럭거리며 그의 곁까지 다가온 건 등산복을 입은 어느 노인이었다. 한국인, 할머니.


“에그머니나!”


빌이 멀뚱히 나무 둥치 근처에 가려져 서 있던 걸 못 본 노인은 그쪽으로 점차 다가오더니, 훤칠한 키로 선 사내를 바라보고 놀라서 외쳤다. 빌은 발음은 약간 어눌했지만, 한국어는 능통했으므로 감격을 하며 이야기했다.


“아이고, 할머니!”

“뭐시여.”


꼼짝없이 조난당했다고 생각했었기에 더욱 반가운 얼굴이었다. 산기슭에서 식재가 될만한 뿌리 채소를 캐러 올라온 할머니, 김영순 여사는 웬 금발의 백인이 한국말을 내뱉자 놀라서 대뜸 답했다.


“살려주세요!”

“뭐시여!”


팔을 벌리며 외치는 그 말에 더욱 놀라 소리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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