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아직 안 정했습니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1.01.23 12:29
최근연재일 :
2024.02.08 23:16
연재수 :
64 회
조회수 :
2,122
추천수 :
3
글자수 :
324,022

작성
23.01.05 00:58
조회
43
추천
0
글자
24쪽

사랑에 대하여, 기독교적#단편#에이와 이이#아가페와 에로스

다술에 있던 백업




DUMMY



관점에 대하여


#


‘에이’는 헌신적인 성격이었다. 그에 반면, ‘이-이’는 다소 변덕스러운 구석이 있어 언제 그 성격이나 태도가 변할지 모르는 면이 있었다.


‘에이’의 태도는 늘 다른 이들에게 시선이 맞춰져 있었다. 그 자신의 내면의 요동보다도, 물론 에이라고 그런 일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마음의 방향성은 바깥을 향한다.


외부에 있는 것. 결코 변하지 않는 것. 세상에 있는 어떤 사람도 타인의 주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때로 주는 사랑을 하는 것, 관심을 표하는 것, 따뜻한 말과 표정을 건네며 지어보이고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힘든 게 있니, 내가 도와줄까?’라고 말하는 건 지칠 수 있을 정도로 소모적인 일이었다,


라는게 세상의 흔한 관점이었고 이야기였다.


그러나 ‘에이’에게 있어서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진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즉각적으로 그 스스로에게 나타나는 변화와 작용에 있어서도 그와 반대의 체험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에이는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주고,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고, 자신의 마음이 때로 요동치고 깊은 어두움을 찾아가려고 할 때조차 누군가의 어두움에 마음이 아파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 속에 있는 괴로움마저 사라지는 경험을 사실적으로 하고는 했다.


진리가 아니라는 점은, 에이가 배운 ‘따라야 할’ 방향성과 목적에 있어서도 반대가 된다는 이야기였다. 때로 즉각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염두에 두고 따라야 할 삶의 방향성이 그와는 달랐다.


‘에이’는 헌신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이이E-e’는 날카로운 구석이 많았다. 그 통찰력이 예리하고 본질을 꿰뚫어 본다는 직관성과 놀라운 이성의 힘에 대한 비유는 아니었고, 이따금씩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는 의미로의 날 선 구석이었다.


그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야 마는 그 쓰고 또 고된 마음의 습성과 상태들은, 그곁에 있는 다른 이들에게까지 전염이 되고는 했다.


‘이이’역시 사랑을 알았다. 몸으로 함께 하고, 시간을 보내고, 또 정열적으로 누군가에게 다가가 온갖 감정을 나누고 이야기를 길게 하기도 했다.


선물을 주고 받기도 하고, 기쁘게 웃기도 하고 즐겁게 놀기도 한다. 그러나 때로 ‘이이’의 감정은 변덕스러웠고, 그 자신의 내면이 밤에 어두움이 찾아오듯, 깊은 골짜기를 지나게 될 때 스스로 이겨낼 수 있는 자양분도, 목적의식도 없었다.


그럴 때가 되면 이이는 스스로의 골짜기 속으로 깊이 숨어버렸고, 그 자신의 인격과 이성은 저 멀리 사라지고 그저 괴롭고 고통스러운 자극만이 남아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지독하게 쳐내고야 말았다.


이이 스스로도 그것이 아프다고 하는 반응이었으나, 그렇게 매몰차게 쳐내는 것들에 대해 다른 이들이 도와주러 다가오는 일조차 멎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이는 지독하게 아팠고, 구원을 바랐으나 이이를 도와줄 누군가의 손길이 다가오기엔 스스로의 마음이 너무나도 멀었다.


이이는 감정에 휩쓸렸고, 긍정적인 감정을 나눌 때야 세상에 있는 누구보다 좋아 보였으나 힘들고 고난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면 바람에 먼지가 흩날리듯 버티는 힘이 없었다.


*


에이:이이, 이것 좀 봐봐.

이이:뭔데 그래?


둘은, 마치 친 자매처럼 보였다. 친밀하게 붙어있고 또 살가운 거리감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제각각의 개성을 드러내듯, 아름다운 옷으로 입고 있는 둘이었다. 그녀들은 해가 쨍쨍하게 비치는 오후 인적이 드문 시외에 피어난 꽃을 보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에이:이 꽃, 정말 예쁘지 않니?

이이:그렇네. 정말로.

에이:마치 너처럼 아름다워, 이이. 꽃잎 색깔이 선명하고 도드라지는게 어딜 가던 개성을 드러내는 너같구나.

이이: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빈말은.

에이:정말이야. 그런데, 방금은 이름을 부른 게 아니라 감탄사였던 거지?


이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이:그럼. 이름이 참 번거롭긴 하구나.

에이:아무튼. 너는 어떤 모임에 가도 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또 늘 가장 아름다운 자리를 차지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야. 이이, 넌 참 예쁘고 그걸 잘 나타내.

에이:에이, 됐어. 헛소리는.


이이가 다시 한 번 이름이 아닌 감탄사로서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이는 가끔 에이의 말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또 기분 좋은 말들이었지만 곧이 곧대로 좋다고 반응하기가 어려운 면이 있었다.


그런 말에 익숙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에이:저 꽃, 잘 찍어서 보여주자. ‘그’에게 보내보면 좋아하겠지. 걔도 이런 걸 좋아하잖아.

이이:어? 그라면··· 걔 말이야? 됐어··· 부끄럽고 또 어색한데···. 최근에는 말도 잘 못했단 말이야.


‘그’라고 부르는 이는 남자였고, 자매와 같이 친근한 그녀들과도 잘 아는 사이의 친구였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사내였고, 성격 또한 모난 점이 없어 둘 모두와 잘 지냈다.


이이는 그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고, 그때문에 고민하고 또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에이는 이이의 곁에서 그녀의 사랑과 노력을 응원하며 힘을 북돋아주었다. 이처럼 사소한 일이나, 시덥잖아 보이는 말과 행동들도 그렇다.


별 것 아닐지라도, ‘그’는 충분히 성격이 좋았고 또 그녀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다. 이런 사소한 이야깃거리라도 즐겁게 나눌 수 있고 또 이이와 더욱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이이:에이··· 됐다니까. 민망해.

에이:앞으로 에이라고 한숨을 쉴 때는 알파벳 A라고 혀를 굴려서 발음해줄래? 헷갈린다.

이이:알겠어··· 아무튼. 난 그럴 마음 없어.

에이:아냐, 잘 해봐. 내가 생각하기에 분명히 그도 너를 매력적으로 생각할 거야. 넌 내가 보기에도 너무나도 예쁘고 또 매력적인 걸. 여자인 내 눈에도 이렇게 보인다면 그의 눈에는 얼마나 호감스러워 보이겠니.

이이:너야 그렇지만···. 내가 너만 할까.


이이는 작은 말투로 이야기하며 에이를 슬쩍 보았다. 그녀가 보기에도 에이는 아름다웠다. 타고난 아름다움. 같이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선망의 대상으로까지 에이를 여기고는 하는 남자들을 보았다.


이이는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그 앞에서 때로 자신감을 잃기도 한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에이는 털털한 웃음을, 답지 않은 미모로 지어 보이며 이이의 어깨를 슬쩍 건드렸다.


에이:너, 예뻐. 요녀석아. 이 언니랑 어디서 비교를 하려고 해. 언니에 비하면 한참은 모자라지만, 너도 한 고상함과 아름다움이 있단다. 마치··· 한 떨기 장미꽃 같달까?

이이:에이, 그만해! 소름돋아, 으악! 어디서 그런 징그러운 말투는 배워온 거야.


에이가 소년처럼 웃어보였다. 이이가 이번에 말한 에이는 분명한 에이의 이름이었다.


에이:아무튼, 보낸다? 우리 단체 토크방에.


에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메신져를 조작했다. 익숙하게 다루는 통신기기는 익숙한 모양의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이이의 것이었다.


그녀가 카메라가 더 좋은 기계를 빌리겠노라고 한 오분 전에 빌려간 것을 이이는 까먹고 있었다.


이이:아악! 내 걸로 하지마!

에이:호호호호.


이이가 다급하게 난리를 피웠고 에이는 능숙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피하며 기계를 눌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꽃이네? 갑자기? 아무튼 예쁘다. 이이. 네가 이런 감성이 있다니. 무슨 꽃인지도 나중에 알려줘. 나도 정말 좋아하거든, 식물같은 거.


그가 답장을 보내왔고, 이이는 다급하게 움직이던 팔다리를 멎고 에이를 처다보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이이는 이제 다음 이야기를 위해, 식물 공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한참이 지난 후. 그러니까, 몇 주 뒤.


이이는 울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이이와 에이는 함께 있었고, 에이의 집이었다. 작은 단독 주택을 임대해 살고 있는 참이었고 시내에서는 다소 거리가 떨어져 있다.


허름하지만 잘 가꾸고 깨끗하게 인테리어를 해서 지내기엔 조금도 불편함이 없고, 아늑한 분위기다.


저녁 무렵에 쉴 새 없이 내리는 비는 마치 우연이었지만, 이이의 눈물과도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흘렀다.


약간은 싸늘한 날씨이다. 봄인데도 불구하고, 비나 다소 낮아진 기온이 바깥을 돌아다니려면 외투가 필요했다.


이이:흐흑, 으. 이제, 으으으.

에이:이이···. 그만 울어··· 언니 마음이 다 아프다.


에이는, 언니는 아니었지만, 때로 그렇게 말하듯한 익숙한 농담과 함께 말을 건네며 이이의 등과 어깨를 쓰다듬었다.


에이의 여자치고는 크고, 길다란 손과 손가락이 이이의 어깨를 쓸어내리자 이이는 조금쯤 진정하는 듯했다.


따스한 사람의 체온이 닿자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 안정감이란 것이 있었다. 에이는 그렇게, 얼마간 천천히 또 일정한 박자로 여린 마음의 친구를 토닥이며 함께 있어 주었다.


좀 괜찮니, 라고 하며 손수건이나 티슈를 건네주고 따뜻한 차를 준비해 주었다.


이이는 에이의 반복적인 말과 나직한 위로, 그리고 집안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분위기의 클래식 오케스트라의 음률 속에서 아주 약간의 평온함을 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요동치는 풍랑 위의 작은 배처럼 움직였지만, 최소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이의 사랑은 진짜였다. ‘그’를 향한 마음도. 나름대로 긴 시간 친밀한 관계를 쌓아온 그들 간의 친구 관계 속에서, 이이는 사랑과 호감을 키워왔고 조금씩 그에게 다가섰다.


그 과정에 에이가 도움을 주는 일도 있었고, 그녀 스스로 나름의 용기를 내본 적도 있었다. 알 수 없는 타인의 마음을 가늠하는 건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이이는 늘 소름이 끼치도록 두려운 불안감을 견디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였다. 오늘이 가기 전까지는.


‘그’에게는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에이와 이이와는 누구보다도 친밀하게 지내는 친구였으나, 이성적인 호감과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시원스레 웃고 농담을 즐겨 하던 좋은 친구는 다른 곳에서 만난 인연과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어찌나 그것이 빨랐는지, 그녀가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진전이 되었다.


그가 다른 곳에서 많은 만남과 시간을 갖는 건 당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인간관계 역시 그가 전부가 아니었으니, 그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이렇게 급하게.


이이는 자신이 아직 마음을 다 전해보지도 못했다는 점이 한심하고 또 초라했다. 어느 정도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머릿속으로는 그와의 진전된 관계와 나날을 상상했다.


이이는 그 여린 마음에 나름의 결심까지 굳혀 가며 여자로서 어려운 고백까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공교로운 타이밍에 그가 말을 꺼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 사실 나 여자친구가 생겼어. 아주 괜찮은 사람이고, 일하는 데서 만난 동갑 친구야. 서로 사정이 잘 맞아서,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 아마 올해가 가기 전에 그럴 것 같아.’


이이는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모든 길이 막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이토록 완벽한 가로막힘이라니. 순식간에 이어진 관계성에서 결혼까지.


그렇게 잠깐의 만남을 가졌다가, 예상 밖의 소식을 듣고 돌아온 이이는 에이의 곁에서 자신의 못남을 한탄하며 감정을 게워내고 있었다.


처량하다. 오는 비처럼, 비만큼. 비에 지워지는 먼지보다 하찮다.


그녀의 마음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이루어지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했고, 그저 그것이 좋은 설렘을 가져왔을 때처럼이나 같은 선명한 강도로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퀼 뿐이었다.


이토록 바보같다니, 이이! 용기도 없고, 자신감도 없는. 시도조차 하기 전에 끝나버린.


이이는 자신의 사랑을 자조적으로 비웃으며 처량함을 감추려다가, 그것마저 괴로워서 하지 못했다.


그저 맑은 눈에서 눈물만이 흘러 나왔다.


토닥토닥, 하고 두드리는 에이의 손길이 그녀 스스로를 더 서글프게 느끼게끔 하는지도 몰랐다. 이이는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감성의 구렁텅이는 이따금씩 주변에 대한 눈을 멀게 한다.


에이의 표정이 어떤지, 실제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떠올리지 못하게 방해하고, 그저 왜 그랬는지 모를 부정적인 감정의 흐름만이 그녀의 내면에 소용돌이쳤다.


에이:충분히 울고나서, 천천히 그쳐보렴. 이이, 괜찮아. 세상에 그만이 유일한 남자인 것도 아닌데. 혹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 잘 될 수도 있어.


에이가 하는 흔한 위로가 그런 눈이 먼 상태의 이이의 귀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흔하게 들어서 지껄이는, 관용구적인 위로처럼도 들렸다.


이이:···그만해. 나는 더 괴로워야 해. 죽을만큼, 아니 그 이상 죽도록. 그래야만 내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있는 걸. 드러내보지도 못하고 없어진 사랑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야.


울먹이는 물기 어린 말소리가 점차 공격적으로 변했다.


이이:너는, 이런 적이 없지? 고아하고, 분위기 있는 모습으로 늘 돌아다니잖아. 모든 사람들이 너한테는 잘 하지. '에이', 너는 잘 모를거야. 이토록 초라하고 자신감 없고, 나 자신이 먼지같아 지는 기분따위. 남자들조차 네 앞에서는 네 기분만 살피는 걸.


자신에 대한 책망과 고통은 결국 정답이 아니었다. 이이 스스로가 아무런 문제도 없는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그렇게 무턱대고 괴로워 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올바른 방법이 아닌 답없는 괴로움은 그녀의 고통을 격화시켰고, 지나친 아픔은 결국 옆에 있는 누군가에게 독처럼 토해지고야 만다. 이이도 사실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이:잘난 에이. 너는 평생 행복했을거야··· 평생.


잘못은 때로 주워담을 수 없는 물이나, 떨어진 칼날처럼 누군가에게 깊은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에이는 별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아무렇지 않게 웃었고, 그렇게 따뜻한 조명이 있는 가정집에서 빗소리와, 바흐의 선율을 들으며 이이의 울음을 토닥여주었다. 슬픔에 지치고 무언가에 취한듯이 아무 소리나 하는 이이가 스스로 피곤해서 잠에 들 때까지.



*



에이에게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공교롭게도, 가장 친한 친구이자 마치 자매처럼 굴던 이이가 조금쯤 드러내려 했던 사랑이 시도조차 못해보고 져서, 연민에 빠진 여인으로 그녀의 집에 들어오기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세계의 모든 인간들은 삶의 고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누구라도 풍파를 맞고 또 괴로운 상처를 얻었다가, 딱지가 지고 또 떼어지기도 한다. 적게 받은 이가 있을 수 있고, 이겨낼 힘이 다행스럽게도 많고 빠르게 도움을 받는 자가 있을 수는 있지만.


에이에게도 역시 잘 내색하지 않는 여러가지 괴로움들은 물론 있었고, 그 날은 조금 심한 날이었다.


그녀가 쉽사리 웃거나, 혹은 아무런 떨림도 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이이의 등을 두드려 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믿는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



그리고 또 몇 달 뒤.


시기적으로 따진다면, 에이와 이이의 친한 친구인 사내가 결혼을 하거나 혹은 그것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이전에 알렸던 것과는 다른 일이 많이 벌어졌다.


우선 '그'의 결혼은 실패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완전히 실패하지는 않았다.


'그'는 직장에서 만난 다른 그녀와 결혼을 하려고 했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차근차근 교제를 해나갔다. 시간을 보내고 또 일을 계획했고, 단계를 밟아나갔다. 그러다가 복잡한 사정을 서로 깨닫게 되었다. 그와 그녀의 가문은 서로에게 적합한 대상이 아니었다. 결혼의 대상으로서. '그'의 집안은 굳이 따지자면 가난한 편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집안은 아주 부유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는 일이었으나, '그녀'의 집안이 기울어가면서 문제가 있었다. 큰 재산을 보유하고 깨나 거대한 규모의 가업을 이루어가던 그녀의 가문이 세가 기울고 가문의 사업이 부도의 위기를 맞이했다. 난국을 타파하기 위해서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임원진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비슷한 시기에 규모 있는 사업을 가지던 다른 가문과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다른 재벌 가문의 아들 역시 훌륭한 인성을 가진 청년이었고, 또 그녀의 이상형에도 제법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나무랄 것이 없었고, 그와 결혼을 하기만 하면 모든 가문의 문제가 풀리는 상황이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재력이나 돈만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재단한다는 건 사실 야만적이고 원시적인 일이었지만, 결혼을 약속했던 상황에서 둘 모두 아무런 일도 없이 헤어진다면 그것 또한 불법은 아니었다.


애초에 길고 또 깊고 오랜 관계를 다져가며 결혼을 약속했던 사이는 아니었던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고, 가문의 입김에 따라 그녀는 재벌집의 자제와 연을 맺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졌고, 나름의 상심을 얻었지만 회복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어떤 일을 계획하다가 잘 안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때 '이이'가 마침 곁에 있었다. 이성이기 이전에 가장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이이는 그의 사정을 잘 들어주었고, 그의 마음을 헤아려주었다. 전에 없던 자상함과 적극적인 태도로 여성적인 아름다움과 매력을, 그리고 자상함과 위로를 보여주는 모습에 그는 쉽사리 마음을 열었다.


마치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이, 그게 자연스럽다는 듯이 '이이'와 '그'는 잘 만나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친구같은 관계가 아닌 이성으로서의 만남으로.


애초에 결혼에 대한 강렬한 감정이 있었던 둘은, 원래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준비를 마쳤고 '그녀'의 자리에 대신 '이이'가 들어가 계획을 했던듯 결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고, 이이는 '그'와 행복하게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주 오래도록 살아왔고 또 친근한 동네에서 같이 커 온 다른 친구를 마주치게 되었다.


'에이'였다.


'이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온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감정과 몸을 지배한 것은 미안함, 과 어쩔 줄 모르는 당황과 곤혹스러움이었다. 수치심마저 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약간의 슬픔.


이이는 에이에 대해서 나중에 듣게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오랜 시간이 지나고, 다시 그와 만나서 잘 되게 된 다음에 다른 친구의 입으로 들은 소식이었다.


'에이'에게는 이이 역시 잘 알고 있는 형제가 있었다. 이이 역시 친자매와 같은 사이였지만, 혼자인 이이와는 달리 에이에게는 오빠가 있었다.


몇 학년인가 위의 남자 형제였고, 그녀를 몹시 아끼던 사람이었다. 이이에게도 늘 친절하게 웃어주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랬던 오빠가 갑작스러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유전적인 희귀병이 질환으로 있었고, 관리를 잘 한다면 크게 문제는 없으리라는 것까지는 이이 역시 들은 바가 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가 되었고 손쓸 틈도 없이 생명을 앗아갔다. 에이의 집안, 가문에 있었던 큰 비극이었고 이이 역시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빠'가 마지막을 맞이한 건, 이이가 다녀가고 난 그 주에 일어난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오빠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에이 역시 한창 당황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병을 알고 있던 에이 역시 속으로 많은 상상과 염려를 했을 것이다.


건강했고, 또 젊은 나이였기에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에이가 했을 그 어떤 최악의 상상도 현실로 벌어진 것보다 심각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그 순간에도 에이는 먼 거리에 있는 오빠를 보러 가기 전에, 그녀를 위로했다. 심지어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이이는 술에 취한 듯 기억이 흐릿한 그 날의 대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걸 끄집어올린 건 그녀의 양심인지, 죄의식인지 어려웠다.


마지막 순간에는 가장 편안하고 친근했던 자신의 친구에게 독기가 서린 말마저 토해냈다. 자신의 괴로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질책이었다. 제대로 된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무분별한 비난이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던 에이가, 그림처럼 멋들어진 미소를 몇 걸음 앞에서 지어 보였다.


이이는, 자신이 무엇을 보게 될까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이이의 옆에 있던 '그'역시 에이의 일을 알고 있다. 그가 몹시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에이의 입이 먼저 열렸다.


에이:이야, 둘 모두 잘 어울리는데. 나만 빼놓고 이런 행복을 즐기다니, 귀여운 녀석들. 사실 정말 보기 좋다.


에이의 웃음에는 티가 한 점이 없었다. 이이는 사람의 표정을 늘 살핀다. 어릴 때부터 주변의 눈치를 은근히 봐 왔던 그녀의 성격 탓인지, 남들보다 정교하고 예리한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관찰력으로 보아도 에이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이이는 그 말과 표정에, 그만 심장에 막아 두었던 댐의 둑이 터져 나오듯 어떤 감정이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그건, 슬픔과 닮아 있었고 또 크고 깊은 감정이라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깐 멈춰 선 그녀의 곁에서 '그'와 에이는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약간의 안부를 묻고, 그 역시 조심스레 에이에게 말을 건넸다. 얼마간 이야기를 하다가 에이는 그녀에게 다가와 웃었다. 언제나처럼, 친구면서 또 언니처럼, 그녀는 부드러운 손으로 이이의 머리를 슬쩍 쓰다듬더니 들릴까 말까한 소리로 이야기를 건넸다.


에이:이이, 잘 될거야. 라고 네게 늘 말했었지. 거 봐.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 잘 새겨 들어.


툭툭, 하고. 마지막으로는 가볍게 볼이나 어깨를 쓰다듬고 에이는 가던 방향으로 마저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까지도 그녀는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그들을 축하해준다.


이이는 그 날, 자신의 어떤 감정이나 선입견, 고약하고 또 못된 성격들이 모조리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야 말았다.


그녀의 친구는 자애롭다.


그녀 이이보다도 더 아름다워 보이는 외모를 지녔다고 늘 생각했지만, 에이에게 있는 것은 그녀보다 강하고 또 담대한 마음씨였다.


이이는 그럴 수 없었고, 이전에 비통에 잠겨 비오는 날 울었던 것 보다 더 깊고 진실되게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


다시 몇 달 뒤.


에이에게도 기쁜 소식은 있었다.


오매불망, 그녀를 기다리고 또 고대하던 한 남성이 기어코 그녀에게 고백을 하고야 말았다. 멋있고, 또 유쾌한 청년이었다. 에이가 외모를 따지는 기준이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마침 누가 보아도 이상적일 정도의 외모를 갖기도 했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그는 상냥하고 또 부드러웠으며, 남자다운 강인한 면까지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 온 그는 순식간에 마을의 인기를 얻었으나 오로지 에이 하나만을 바라보았다.


에이는 그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 동안 지켜보았던 내면과, 유머러스함과, 또 그녀의 깊은 속이나 슬픔을 이해해주는 헤아림에 반했다.


둘은 서로에게 최고의 것을 주기 원했고, 또 많은 것을 겪어왔던 만큼 절제된 매너로 서로에게 대했다.


아름다운 인간 관계란, 비단 연인이나 부부간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된다. 전혀 모르는 남에게 대하는 최고의 친절과, 동성에게 베푸는 예절 따위를 그대로 적용해도 존중이란 것은 값진 것이었다.


에이는 그 동안 걸어왔던 삶의 많은 슬픔과, 또 고난과, 이겨내었던 딱지의 자리 같은 것들을 이제는 함께 걸어가고 또 이겨낼 수 있는 동반자를 만났다.


둘은 몇 개의 계절을 같이 보냈고, 자연스럽게 결혼을 했다.


이전까지보다, 에이는 깊은 행복을 느끼며 남은 삶을 보냈다.



*




rodion-kutsaiev-PEm_sLmJT-w-unsplash.jpg




다술에 있던 백업


작가의말


에이는


Agape아가페의 약어이고



이이는


Eros에로스의 약어입니다.



철자가 맞는지, 잠깐 확인을 해보고 나서야 안도를 하네요.



뭐 아무튼.



그렇습니다.



기독교적이라는 단서를 단 건



뭐 그렇습니다.



개신교의 여러 신학과 말씀에 대한 설명, 설교들 중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가페, 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단어입니다.


에로스, 도 사랑이지만 그건 불완전하고 현시적입니다.



위의 것은 절대적이고, 변함이 없습니다.


아래 것은 강렬함마저 보이지만, 상황이 변하고 대상이 가치를 잃으면 그 감정의 불마저 식고야 맙니다.



위의 것은 지속적이고, 상대가 가치가 없을 때마저 가치를 부여하며


마치 자석에게 비벼진 것이 자성을 얻듯


그렇게 옮아가며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직 안 정했습니다.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64 야구#대본 24.02.08 6 0 5쪽
63 라디오 드라마Radio Drama, 사자의 나날, EP(1)작심삼일 24.01.16 7 0 60쪽
62 시, 누군가의 생일 선물로 쓴 24.01.08 12 0 1쪽
61 낙산 공원의 밤_연극 대본#어딘가에서 연극을 할 글 23.12.30 10 0 93쪽
60 산#영화대본#이것도뭔가를찍으려고했었으나 23.12.15 13 0 13쪽
59 홀리샷#연극대본#어딘가에서 연기를 하려다 말았음 23.12.15 10 0 43쪽
58 누아르물# 23.09.07 21 0 14쪽
57 B와의 인터뷰(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 적은 글) 23.08.28 16 0 31쪽
56 연개소문 컨셉#대사 위주#단편 23.07.03 24 0 11쪽
55 단편#대사#수군통제사 23.06.13 20 0 8쪽
54 커피샵의 남녀 23.06.12 21 0 12쪽
53 단편#대사#젊은 청년, 고백 23.06.12 25 0 7쪽
52 단편#대사#어느 노인의 유언 23.06.11 26 0 8쪽
51 형사刑事 이야기, 윤계식(2) 23.06.11 26 0 18쪽
50 사실 바둑이란 종목에서 23.06.07 26 0 3쪽
49 빌 그런츠, 작가 23.05.17 24 0 18쪽
48 짧은 형사 묘사 23.05.14 27 0 14쪽
47 글1 23.04.17 25 0 6쪽
46 유르타Eurta:Conscience story 23.01.12 38 0 28쪽
45 그대를, 2022 23.01.05 44 0 5쪽
44 누군가에게 연기를 시키려#남자#시트콤 23.01.05 38 0 2쪽
» 사랑에 대하여, 기독교적#단편#에이와 이이#아가페와 에로스 23.01.05 44 0 24쪽
42 누군가 에게 연기를 시키려고#판타지#공녀#기사#비룡 22.11.23 41 0 7쪽
41 누군가에게 연기 시키려 끄적 22.11.14 38 0 4쪽
40 문혈, 젊은 천재 22.11.14 31 0 14쪽
39 연극독백#트라우마#김한수 22.11.09 38 0 9쪽
38 점퍼, 순간이동자 22.09.17 39 0 27쪽
37 잠수도시, 칼젝 21.07.09 54 0 5쪽
36 발란은 숲에서 길을 잃었다. - 21.06.23. 21.06.23 58 0 26쪽
35 2:01 PM 21.06.22 43 0 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