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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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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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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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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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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195

DUMMY

제법 머리를 써가며 대화를 나눠봤지만, 인디아가 언급한 배후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결론이 나질 않았다. 하다못해 에르에게도 제1 위상, 가이란에 관해서 물었으나 마찬가지였다. 여타 이상한 기척이나 마법의 흔적은 없었다며 단언했다.


에르의 확증이다. 확실히 가이란의 상태 자체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인디아 주교의 묘한 확신이 마음에 걸린다.


이 안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 이후 돌아온 아이리스와 델리안, 페리에게도 말해주었다.


진지하게 들은 모두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심했다. 아니, 페리는 혼자 태평하게 소파에 늘어지게 누웠지만.


고양이이니 어쩔 수 없으니 넘어가고, 델리안에게 달리 짚이는 게 없는지를 물었다. 천년을 넘게 살아왔다는 델리안이다. 경험이나 지식 면에서는 압도적이다 보니 무언가 아는 게 있을 듯싶었다.


그러나 짐작되는 게 없는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이리스도 모르겠다고 했다.


기대는 했지만 실망하진 않고, 둘에겐 앞으로 유의하라고 일러두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쳤다.


친구들도 알아야 할 사안이라 [염화]로 연락을 보냈다. 사정을 대충 설명하고 만나자니, 둘은 알겠다며 시간을 냈다.





다음 날이 되어 리아는 마법 실습장―― 이전 마력의 압축을 연습할 때도 이용했었던 그곳으로 향했다.


굳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라프리트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부탁이란, 최근 마법사 죽이기에서 회복한 안네에 대한 것으로, 라프리트가 말하길 안네는 어마어마한 마법의 재능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심상마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친구의 부탁이니 고민도 없이 수락하긴 했지만, 솔직히 과연 그만큼의 재능이려나 싶었다.


안네의 용솟음치는 마력의 맥동은 분명 범상치 않다. 그러나 그게 곧 마법의 재능과 직결하는 건 또 아니었다. 마법에는 마법에 대한 재능이 따로 필요했다. 리카드가 딱 좋은 예시다. 그는 뛰어난 마력조작과 많은 마력량을 보유했음에도, 이미지와 감각적인 부분이 부족해 심상마법을 습득하지 못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였다.


가르치기로 한 날에 안네는 이미 심상마법을 쓰고 있었다. 라프리트가 심상마법의 기본 골조를 알려주자마자 해냈다는 것이다.


놀라운 재능이었다. 반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던 본인이 떠오른 리아로서는 과연 자신이 가르쳐도 되는지 자괴감마저 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자기 사용인이라 치켜준다며, 평소처럼 비꼬지 않은 루비아를 보고 예상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수락했다. 내뺄 순 없다.


다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안네는 빠른 습득 속도 대비, 자잘한 부분에선 묘하게 서툴렀다. 아마 마법사 죽이기에 의해 오랫동안 감각이 틀어진 상태로 있다 보니 그런 것 같았는데, 그 부분을 조언해주며 어떻게든 강사 노릇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 안네의 실습을 봐줄 겸, 다른 사람이 없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최근에는 바빠 다들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참작해줬는지, 루비아도 고분고분 받아들여 줬다.


그렇게 실습장이 한눈에 보이는 자리에서, 에르가 고풍스럽게 차려준 테이블에 앉아 리아는 오늘의 용건을 말해주었다.



“흐으음······. 그래? 배후 세력이 있을 수도 있다고?”

“네. 루비아 씨는 뭔가 낌새라는가 느끼지 못하셨어요?”

“글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있었다면 바로 알았을 거 같은데. 명령을 두 번 거치는 것이기도 하니 더욱······. 다만, 네 말을 듣고 한 번 의심하니, 그럴듯한 정황은 제법 있어.”

“엑?! 정말요?! ――아. 안네 씨! 화력이 너무 세요. 번거롭더라도 피드백으로 확실하게 체크하세요.”


멀리 안네의 대답과 함께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에는 욕심에 눈이 멀어, 실패할 걸 알면서도 멍청한 짓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만약 그게 조종당한 거였다면 그럭저럭 설명이 되긴 해.”

“그러면 역시 진짜 흑막은 따로 있다고······.”

“아니. 단정 지을 순 없어. 앞선 얘기는 어디까지나 흑막이 있다는 가정하에 짜 맞춘 거니까. 정말 있는지는 조사해봐야 할 거야.”

“그런가요······.”


에르도 그랬지만 루비아도 꽤 신중하다.


이해는 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걸 말한 사람이 인디아 주교다. 더군다나 리블리지의 해임이라는 초강수까지 뒀다. 장난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게 전해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대응하기엔 무리가 있다.



“저기, 관련이 있을지 모르는데······, 들어온 정보가 있어요.”


열심히 마법을 시연하는 안네를 번갈아보며, 진지하게 경청하던 라프리트의 말이었다.


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녀를 봤다.



“정말요? 진짜 정보가 들어왔다고요?”

“네. 어쩌다가······.”


때마침 정보가 들어오다니······. 이런 우연도 다 있을까.


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루비아도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날카롭게 쳐다봤다.


그런데 정작 라프리트 본인도 꽤 의외의 일이었나 보다. 입수했다는 정보들을 말하는 그녀에게는 제법 놀란 기색이 어려있었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루비아는 팔짱을 끼고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정보 자체는 틀림이 없을 거예요.”

“그러겠지.”


순순히 인정하는 루비아.


그런 그녀를 흘겨보며 라프리트는 이어서 말했다.



“마법은 분명 아니랬어요. 하지만 정보원조차도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사람의 행보는 매우 이질적으로 보인다고 했어요.”

“가볍게 넘겨짚을 건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건가······. 그래서, 너는 누굴 쫓기로 했어?”

“일단 둘 다 쫓으라고 말은 해뒀는데, 데인이라는 남자의 행방은 쉽게 밝혀졌어요.”

“누군데?”

“이미 아실 텐데요?”

“혹시나 해서야. 암만 머리가 나쁘겠거니, 본명을 대놓고 쓴다는 게 잘 상상이 안 되잖아?”

“안쓰럽게도 그분은 루비아 님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었네요.”

“저······ 누구이길래 그래요?”


리아의 물음에 라프리트는 뭔가 말하기 껄끄럽다는 얼굴이 됐다.



“그······, 일단 리아 양도 아는 분일 수도 있어요. 베르다드 학원에 다니고 있거든요.”

“엥? 데, 데인이란 이름이 있었나······?”


빠르게 기억을 되짚어 봤으나, 데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반사적으로 리아의 눈동자는 옆을 향했는데, 기색을 알아차린 에르에게서 즉시 고운 목소리가 나왔다.



“3학년 마법반에 재학 중인, 데인 도미에 나이젤. 나이젤 백작가의 서자야.”

“서자라는 건 첩의 자식이라는 거죠?”

“맞아. 나이젤 백작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야.”

“참고로, 나이젤 백작은 마르티즈 후작의 오른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에요. 아직 기억하시죠?”


에르 대신 이어받은 두 친구의 말을 듣고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모를 만도 했다. 3학년과 1학년은 수업이 거의 겹치질 않으니. 그나마 일반반이었다면 교양과목 쪽에서 만날 확률이 있긴 했지만, 데인은 마법반의 귀족인지라 전공과 이외에서는 만나기 힘들었다.


더군다나 나이젤 백작은 루비아가 알려준 요주의의 인물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자발적으로 만나려 할 리도 없으니 모르는 건 당연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데인이라는 녀석, 리아의 방과 후 모임에도 참가했었던 적이 있어.”


생각지 못한 소리에 올려다보니 에르가 틀림없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가 만든 검을 받아 갈 때, 특히나 더 언짢은 면상으로 있던 놈이야. 이후로는 오지 않게 됐지만.”

“그런 사람이 있었나······?”


······모르겠다.


검은 한 명 한 명, 일일이 나눠준 게 아니라, 완성 즉시 날려서 나눠줬다. 받아 간 인원도 천 단위. 그중에서 대놓고 언짢아하는 얼굴을 찾기란, 암만 사진처럼 장면을 기억한다고 한들 힘들었다.


그야말로 에르나 가능할 일이겠지.


그와 비교하기엔 너무나 평범했던 리아는 단숨에 추려내는 걸 그만두고, 라프리트에게 말을 걸었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사람 쪽은요?”

“정보원이 현재도 추적하고 있어요.”

“음? 의외로 계속 꼬리가 잡히나 봐요?”


그런 쪽의 사람이라고 할까, 뭔가 구린 일을 꾸미는 사람의 경우 보통 뒤를 캐내기 어렵다는 이미지 아닌가? 근데 아싸리 쫓는다는 느낌이다. 만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현실은 다르다지만······ 뭔가 흑막의 비중이 아니지 않아?”

“또 뭔 망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라프리트의 정보원이 뛰어날 뿐이야. 평범한 놈이라면 이렇게까지 추적하진 못해.”

“루비아 씨의 정보원도요?”

“아앙?! 장난해? 내 눈과 귀가 비루한 곰팡이보다 못할 거 같아?”


루비아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와 반비례로, 고목 같은 레딧츠의 얼굴에는 짙은 자긍심이 깃들었지만······.


아낀다고는 싶었지만 설마 저리 화를 낼 줄이야.


갑작스러운 만큼 더더욱 박력이 넘쳤다. 딱히 말을 잘못 꺼낸 것 같진 않지만, 아무래도 지뢰를 밟은 듯하다.


무섭다······.



“누가 뛰어난지는 됐고, 어찌할지나 생각해봐요.”


나이스 어시스트!


쾌재를 부른 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라프리트의 버스에 탑승했다.



“데인 선배 씨의 위치는 파악됐으니까, 정체불명의 사람을 쫓는 게 어때요?! 바로 라프리트 씨의 정보원과 합류하면 되잖아요.”

“아, 그게 그 사람은 혼자 다니는 걸 선호해서······. 정보꾼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라나? 역탐지 당할 수 있다면서 연락용 마도구도 쓰질 않아요.”

“시답잖고 하찮은 긍지네.”

“루, 루비아 씨!”


다행히도 루비아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지만, 이래서는 뒤를 쫓기 힘들다. 막상 어디 있는지 듣고 갔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라도 하면 낭패. 동선의 낭비도 낭비지만, 재차 물으러 가야 하는 시간이 아깝다.


방학은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은 좀처럼 잊지 않는 기억력 때문에라도 걱정이 없지만, 놀 시간이 줄어드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고민할 것도 없이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리아의 근처에 빛이 모여들었고, 사라졌을 땐 한 소년이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복면을 쓰고 있어 전체적인 얼굴의 형상이 보이지 않는다. 차림새 또한 이와 유사하게 온통 검은색뿐인, 흡사 암살자와도 닮은 패션이었다.


물론 쫄쫄이 같은 옷은 아니다. 가죽 계통의 세련된 차림으로, 언뜻 뒷세계에서 활동하는 검사의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허리 뒤편에도 20cm 정도의 직도 2개가 교차한 형태로 달려 있어 더욱 그럴싸했다.


‘음음. 내가 못 입을 걸 어찌 남에게 입히겠어? 그보다 잘 만들어졌구먼!’



“너, 또······.”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면 첩보원이 필요할 듯해서요.”


루비아는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라프리트는 지난 세컨드 때 보고도 매번 놀라운지, 신기해하며 소년을 살펴봤다.


색다른 둘의 반응에 어색하게 웃으며, 리아는 첩보원―― 소년의 손을 잡았다.


다른 넘버즈를 만들 때와 같은 공정이다. 이번에도 동력원인 마력을 쭉쭉 넣어줬다.


이윽고 이쯤이면 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다른 넘버즈들을 만들 때보다 주입된 마력이 적다고 해야 하나, 남은 마력이 전보다는 한참 많았다. 비교하자면 저번에는 7체가 한계였지만, 지금이라면 20체 가량 만들 것 같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에 리아의 고개가 꼬인 사이, 소년이 눈을 떴다. 그 눈은 원본이 되는, 어린 시절 루데릭과는 다른 검은 빛이었다.



“나의 창조주, 이스피리아 님께 인사드립니다.”


무릎을 꿇고 정중히 머리를 숙이는 소년.


퍼뜩 정신을 차린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년을 손수 일으켜 세웠다.



“만나서 반가워. 어디 보자, 네 이름은 서드 다음이니까······, 폴스로 할게. 나는 편하게 리아라고 불러줘.”

“옛! 저는 폴스. 다시금 인사드립니다, 리아 님.”


아이 같이 들뜬 음색으로 대답하는 폴스. 복면 너머에서도 활짝 미소 짓는 모습이 드러났다.


구상했던 대로, 늠름한 척하면서도 순박했던 어린 시절의 루데릭을 닮았다.


첩보활동엔 작은 아이인 편이 유리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고른 것이었는데······, 의도지 않게 제법 그리운 기분을 느낀다.


리아는 다정하게 폴스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 모습은 언니가 남동생을 귀여워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실제로도 폴스가 매우 기쁜 듯한 기색을 풍겨, 겉으로 볼 때는 사이좋은 남매 같았다.



“폴스. 부탁할 게 있는데――”

“――예. 데인과 함께 있던 자를 추적하겠습니다.”

“으응. 그게 맞는데, 먼저 라프리트 씨에게 어디 있는지를 듣고 나서――”

“――그거라면 문제없습니다. 리아 님께서 축적하신 데이터 한 달분을 건네받은바, 목표를 특정해냈습니다. 지금이라도 곧장 추적할 수 있습니다.”

“어······? 누군지 특정했다고?”

“그렇습니다. 시험하시지 않으셔도 괜찮으십니다.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걱정이고 뭐고,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겠다.


‘애당초 누군지도 모르는데, 시험이고 나발이고 할 수나 있을 리 만무하고.’


하지만 폴스가 거짓말할 리가 없달까. 저 순수한 눈빛으로 없는 말을 지어낼 것 같지 않다.


‘그렇다는 건, 정말 내 기억에서 나온 데이터로만 특정해냈다고? 정작 나는 모르겠는데······?’


혹시 이 아이도 다른 넘버즈들처럼 무지하게 똑똑한 게 아닐까.


특정해낸 방법은 얼추 유추할 수 있다. 어마어마해진 기억력은 절대 까먹는 법이 없으니까. 이를 토대로 데인의 마력이 움직인 동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어디서 누굴 만났는지까지 모두 밝혀낼 수 있다.


다른 나라로 갔더라도 문제없다. 리아의 마력 탐지 범위는 삼국을 모두 커버치고도 남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니마무스가 있던 별장마저도 쉽게 닿으니 놓칠 일은 없다.


다만, 거기까지다. 분석하여 특정해내는 건 완전 별개의 문제다.


어딜 가서 누굴 만났는지 아는 것까진 좋다. 그러나 그게 목표인 정체불명의 사람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루에 만나는 사람만으로도 몇십 명은 넘을 텐데.


일일이 추려낼 재능은 단언컨대 없다. 무얼 근거로 추려야 할지도 전혀 모르겠고.


‘데인 선배 씨의 마력이 뭔지도 모르는 판국에 가능할 리가 없지.’


확실한 건 아이는 인심이 후하다는 거다. 그러지 않고서는 모든 넘버즈들의 내용물을 하이스펙으로 꽉꽉 담아 넣진 않았을 것이다.


친숙한 위기감이 들었다.


방금 막 만들어졌음에도 만든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이쪽이 못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혹여나 저 순수한 눈망울이 삐뚤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마저 든다.


넘버즈는 총 넷. 익숙한 만큼 판단은 빨랐다.


리아는 대범한 맹자와도 같은 근엄한 얼굴로, 깊이 만족한다는 양 고개를 주억거렸다. 뒤이어 나오는 목소리도 이에 어울리게 다소 낮게 깔았다.



“훌륭하구나. 내, 아무런 걱정 없이 일을 맡길 수 있겠어.”


곧바로 싸늘한 친구들의 눈빛이 쏟아진다.


대번에 까발려졌다는 걸 알았지만 리아는 밀고 나가야만 했다. 역시 그랬냐고 하는 폴스에겐 한 조각의 의심도 없었기 때문에.


순진한 이 아이의 꿈은 지켜줘야 한다. 그것이 비록 잔뜩 부풀려진, 질소로 가득 찬 풍선일지라도. 어른으로서 순순히 타락하게 둘 수는 없는 것이다.


배에 힘을 준 리아는 더듬지 않았던 자신을 칭찬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폴스여. 그대를 믿고 일을 맡긴다. 신원미상의 그자를 추적하라. 보고는 꼭 잊지 말도록!”

“존명!”


다부지게 외친 것과 동시에 폴스는 사라졌다. 그림자에 빨려들듯이······.


안도감이 강했던 리아는 기운이 쫙 빠져, 멍청하니 폴스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봤다.


그러다 이내 소리쳤다.



“에, 에르?! 방금 거! 방금 거요! [공간이동] 아니에요?!”


방금까지 있었던 체통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리아는 광분하여 에르의 팔을 흔들어댔다.



“으음······. 확실히 비슷한 유형이었어.”

“어, 어떻게?!”

“그림자를 매개로 공간을 확정하는 것으로 안정성을 확보한 거야. [수납]이나 [차원수납]과도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아. 연 공간의 안쪽을 사용하느냐, 입구와 출입구의 역할로만 사용하느냐의 차이이지. 그렇지만······ 과연. 어쩌면 [공간이동]의 개념을 너무 어렵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군. 굳이 존재 자체를 이동시킬 이유는 없었건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중얼거린 에르는 돌연 미소를 보냈다.


갑작스러운데다, 다소 에르치고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파괴력은 충만했다. 직격당한 리아는 완전히 넋이 나가 꿈속의 왕자님을 만난 소녀처럼 해롱거렸다.


――그래서 에르가 사라지는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려 반대쪽을 보니, 그곳에는 아까와 같은 미소의 에르가 있었다.



“어, 언제 이동했어요?”

“방금. 명칭 해보자면, [그림자 이동]쯤이 되려나?”

“그림자?”


리아는 멍청하니 기억을 되짚어봤다.


직후······ 리아는 달려들듯 에르를 붙들었다.



“에르! 아, 알려줘요!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건 비밀.”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요. 네?”

“나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알려주고 싶어. 하지만 리아는 아직 공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잖아? 자칫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지금은 리카드와 하는 연구를 통해 조금씩 배워가도록 하자. 게다가 아직은 안정해야 하잖아. 알겠지?”


달콤한 어조로 달래는 에르.


반칙이다. 가뜩이나 미안한 얼굴인지라 더는 물고 늘어질 수가 없다.


눈앞에 꿈을 놔두고 ‘기다려’ 라니. 말려 죽이는 처사다. 조금이지만 리카드의 심경마저 공감된다.


근심 없이 오로지 욕망을 향해 내달렸을 것이 분명한 페리가 부러울 지경이다.


정말 너무 부러운 나머지······ 페리에겐 반드시 ‘기다려’를 가르칠 예정이다. 화풀이는 아니다. 그저 페리도 예절이라는 걸 배웠으면 싶을 뿐이었다. 다른 마음은 결단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역시 이대로 지나가기엔 너무 아쉬운데······.’


고민하던 리아는 다급하게 에르의 옷깃을 잡았다.



“대신 체험시켜 주세요!”

“그런 거라면야······.”


대수롭지 않게 말한 에르는 즉시 마력을 움직였다. 동시에 리아는 의자째로 에르와 함께 밑으로 떨어졌다.


시선이 땅과 일치하게 되고, 밑으로 꺼지는 순간 중력이 반전됐다. 떨어지는 느낌도 위로 올라가는 것으로 바뀌더니······ 금세 움직임이 멈췄다.


왠지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다.


짧은 감상평을 남긴 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보이는 풍경은······ 아까와 똑같았다. 눈을 휘둥그레 뜬 친구들과 어느새 수련을 끊고 돌아온 안네까지, 처음 그대로의 풍경이었다.


‘제 자리에서 사라졌다, 나타난 건가?’


즉시 상황판단을 한 리아는 속으로 외쳤다.



‘아이, 분석 좀 부탁해!’

『분석 완료.』

‘버, 벌써?! 아니, 뭐가 됐든 좋아. 데이터를 좀 보내줄래?’

『수락.』

‘고마워!’


똑똑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남다른 분석력이다.


정말 누구의 아인지······.


자화자찬과 비슷한 짓을 한 리아는 아이를 대견스럽게 여기며,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정보들을 서둘러 살펴봤다.


아이가 분석해준 정보에 따르면, 에르가 명명한 [그림자 이동]은 웜홀이란 개념과 비슷했다. 다른 건 매개체가 되어 공간을 고정한 건 그림자일 뿐. 이를 통해 공간과 공간을 이어 먼 거리를 도약하는 것이었다. 종이를 접어 구멍을 낸―― 웜홀 하면 빠지지 않는 그 예시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아들과 여타 서브컬처 문화를 즐겼었던 리아에게도 꽤 익숙한 개념이었다. 이해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어······.’


아이에게 데이터를 받았음에도 그렇다. 공간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보니 절대 풀 수 없는 철학 문제집 같기만 했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예 수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살짝이지만 델리안의 공간 마법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걸? 흐음······. 대충 이렇게 인가? ――[공간절개].”


창피했지만 불필요한 발동어마저 입 밖으로 낸 것이다. 수년간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보람도 있어, 피드백으로 확인까지 마친 [공간절개]는 무사히 실습장의 중앙에 발동했다.


찌지직――!


번쩍이는 스파크와 함께 거칠게 허공이 갈라져 틈이 만들어졌다.


마치 종이가 찢긴 듯,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이다. 조용히 원으로 깔끔하게 열렸던 델리안과는 한눈에 보기에도 차이가 났다.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부차적인 효과도 없고.


냉정하게 말해 실패다.


어딜 어떻게 봐도 저 어두운 공간의 틈만을 열어젖힌 것에 불과하다. 그것도 상당히 억지로. 제대로 된 마법이라고 보기엔 힘들었다.



“델리안과 비교할 생각은 없었지만······, 꽤 처참하네. 하지만 문이 열린 것만큼은 틀림없어. 안정화하는 법을 고안하고 다른 곳과 연결할 수만 있다면, [공간이동]도 더는 꿈이 아니야.”


만족스럽게 입가를 올린 리아는 [공간절개]를 해제했다.



“고마워요, 에르. 많은 참고가 됐어요.”

“뭘. 그렇지만 아까 거기에 뛰어들거나 하면 안 돼?”

“아무리 저라도 위험한 건 안다고요.”


걱정도 팔자다. 암만 그래도 저런 곳에 들어가려고.


살짝 부끄러웠던 리아는 툴툴거리고는 방치해놓은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친구들은 몹시도 눈을 끔뻑거리며 놀란 눈치였지만, 모두 뜻하지 않게 좋은 걸 봤다며 기꺼이 용서해줬다.


그때였다. 안네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왜 그러세요?”

“다름이 아니라, 방금 마법들 말입니다.”

“[그림자 이동]과 [공간절개]요?”

“예. 괜찮으시다면 몇 급의 마법들이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문득 관심이 생겼는지 라프리트와 루비아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본다.


그러나 리아는 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아직도 무얼 기준으로 급을 나누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교과목에 실린 것이라면 외운 것을 토대로 말해줄 수는 있지만······, 내가 아는 걸 저 똑똑한 사람들이 모를 리는 없겠지.’


리아는 명확하게 답해줄 수 있는 이―― 에르를 쳐다봤다.



“[그림자 이동]은 6급의 마법이다. 리아가 쓴 [공간절개]는 본래 8급에 달하는 마법이다만, 불완전한 탓에 7급 수준에 이를 것이다.”

“엇?! 에르, 잠시만요! [그림자 이동]이 더 낮다고요?”

“응. 그림자를 매개로 쓰는 만큼, 공간을 여는 [공간절개]보다는 아무래도 훨씬 쉬운 마법이야.”

“그런 거예요?”

“리아는 아직 개념이 부족해서 그래. 리카드와 계속 연구하다 보면 금세 쓸 수 있을 거야.”


알쏭달쏭하지만 에르가 그렇다고 하니 일단 알겠다고 했다. 답변을 들은 안네도 감사하다며 묵례하였다.


다만, 그녀에겐 별다른 놀라움이 없다.


루비아와 라프리트, 심지어 레딧츠도 그러했다. 8급이라는―― 통상적인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급수가 언급됐음에도 딱히 반응이 없었다. 그러냐며, 살짝 감탄하는 것에 그쳤다.


‘왜, 왜지? 나야 에르가 10급의 마법도 쓸 수 있다는 걸 아니 그렇다 치지만, 그녀들은 아닐 텐데?’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루비아가 일어났다.



“아. 가시게요?”

“대충 방침도 정했으니 이만 가 봐야지. 아직 정리할 일이 많아.”

“리아 양, 그러면 저희도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죠.”


모두가 돌아간다고 하니 리아로서는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자리는 순식간에 치워졌고, 정보가 들어오면 [염화]를 통해 알리기로 하고 오늘의 모임은 해산하게 됐다.


아쉽지만 리아도 며칠 만에 만난 친구들을 배웅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디로 갈래?”

“어떡할까요······. 아! 모처럼이고 하니 퍼스트에게 가볼까요? 잘하고 있나 보러 갈 겸, 폴스의 소식도 알려주고요.”

“나야 상관없지만, 괜찮겠어?”

“그럼요. 데인 선배 씨를 조심하랬지만 설마 만나려고요.”


데인은 3학년. 거기다 귀족이다. 실습장이라면 몰라도, 일반반이 대부분인 훈련장에는 가질 않는다. 검을 받아 간 전적이 있지만 이후로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학원은 넓다. 만날 일 자체가 거의 없다 보니 리아는 발걸음도 가볍게 퍼스트를 만나러 갔다.


‘잠깐. 생각해 보니······ 근근이 얼굴을 보긴 했지만, 거의 방치하듯 놔뒀었네.’


조금―― 아니, 꽤 무책임했다.


지낼 곳도 제대로 정해주지 않고, 방임해놓다시피 나 몰라라 일을 떠맡기고 간 적이 있는 터라 몹시도 양심에 찔린다.


사람으로서 도리를 저버렸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 무척이나 잔인한 짓을 해버리고 말았다.


크게 반성한 리아는 빠르게 퍼스트가 있을 상급 훈련장으로 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발견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나온 중갑 차림의 기사를······.


근면한 그 모습에 양심의 쓰라림이 맹렬해지는 것을 느끼며, 리아는 서둘러 다가갔다.


[상급치유]를 걸어놓은 덕인지, 학생들은 마치 실전처럼 거칠게 대련하고 있었는데, 지켜보며 조언해주던 퍼스트는 멀리 리아를 발견하고는 전력으로 뛰어왔다.


그렇게 남들의 눈엔 사라졌다 나타났을 퍼스트는 기사다운 태도로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스피리아 님.”


그저 인사를 했을 뿐임에도 리아는 바로 문제점을 깨달았다.


‘아······. 퍼스트만 애칭을 허락하지 않았네.’


세컨드와 서드는 물론이고, 하물며 방금 막 만들었던 폴스에게도 간단히 허락한 애칭이다. 풀네임을 부르는 건 오직 퍼스트만이다.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하지만 모두 본인이 실수한 거라 리아에겐 할 말이 없었다.


틀렸다. 이젠 양심의 한계. 버티다 못해 갈가리 찢겨, 호흡이 곤란한 기분이 든다.



“저, 저기, 퍼스트? 깜빡했었는데······, 앞으로는 편히 리아라고 불러주렴.”

“오오. 명을 받들어, 앞으로는 감히 리아 님이라 부르겠나이다.”


마침내 이 순간이 왔다는 양, 광명이라도 내리쬐는 듯한 표정으로 퍼스트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내심 다른 넘버즈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지 눈에 선하다.


버틸 양심은 진작에 소멸했다······.


고개조차 들지 못할 지경인 리아는, 최소한의 속죄로 다정하게 퍼스트를 일으켜 세웠다.


겨우 그것뿐이었건만······. 퍼스트는 몹시나 감격하여 방울방울 맺혀있었던 눈물을 흘렸다.



“흠흠. 직접 인사하긴 처음이구나. 만나서 반갑단다.”

“아! 인사가 늦어 실례했습니다, 찬크에르 님.”

“아아. 님은 빼고 편히 부르려무나.”

“예. 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더는 지켜보기 안쓰러웠는지, 에르가 분위기를 전환할 겸 나섰다. 덕분에 퍼스트도 눈물을 닦고 의젓하게 돌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더욱 리아의 마음을 후벼팠다.


어지간해서는 나서질 않는 에르가 자진해서 나선 것이다. 그만큼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퍼스트의 처사가 잔혹했다는 거다.


물론 아내 사랑이 지극한 에르이기에 그저 리아를 도와주려 한 것일 수도 있다. 냉정하게 보아 그럴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아이리스 이외의 사람에게 저리 상냥한 에르는 본 적이 없었다. 즉, 제법 마음이 쓰였다는 소리이고, 다른 때와는 다르게 리아의 지분율이 100%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몹시도 울적해진 리아는 조용히 퍼스트의 손을 잡아줬다.



“우우······. 이제부터는 더 잘 대해줄게.”

“어, 예. 감사드립니다, 리아 님.”


고개를 꼬면서도 성실히 감사를 전하는 퍼스트.


착한 아이다. 이런 아이에게 어쩜 그런 짓을 한 것인지.


재차 미안하다고 사과한 리아는 퍼스트의 손을 이끌며 한창 대련 중인 학생들에게 갔다. 갑작스러운 일에 놀란 듯싶었던 퍼스트는 오늘로써는 최고의 미소로 따랐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소개하지 않았는데, 세컨드 말고도 형제 격인 서드와 폴스를 만들었었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

“예. 직접 만나진 못했지만, 서드와 폴스 쪽에서 먼저 [염화]를 걸어, 인사를 나눴습니다.”

“오······. 자주적으로 연락 체계를 꾸린 거야?”

“그리 대단할 건 아니오나, 리아 님의 손발이 되기 위해선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응응. 굳이 내 손발이 되려 한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서로 연락하며 지내는 건 좋지.”


사이좋게 떠들고 있자니, 리아들을 눈치를 챈 학생들은 대련을 멈추고 일제히 쳐다봤다. 일부 몇 그룹은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뜨거운 눈빛을 향해왔다.


다만――



“왠지······ 엄청 줄지 않았어?”

“당연합니다. 리아 님의 대신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나이까. 노력은 하였습니다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퍼스트에게 맡기기 전, 모임의 규모는 거의 천 단위에 달했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학생의 수는 십 단위.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게 팍 줄어 있었다.


대인기 강사의 수업이 이리 쪽박 찰 줄이야······.



“혹시, 오늘만 적은 건가? 나중에 더 온다거나?”


퍼스트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간혹 때가 맞아 백이 넘기도 합니다만, 이게 평균입니다.”

“암만 그래도 이렇게나 적어진다고?”

“이 모임의 본질인 단련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던 것이겠죠. 태반은 리아 님께 접촉하기 위한 구실로서 참가한 게 아닐까, 짧은 소견을 말해봅니다.”

“아~ 역시 그런 건가.”


얼추 예상은 했던 사실이다. 그래서 충격은 덜했지만······, 설마 이리 많은 숫자일 줄은 몰라 조금 얼떨떨하다.



“하지만 전화위복일지도. 의욕이 있는 사람만 남았다는 뜻이기도 하니.”

“예. 미꾸라지가 물을 흐린다고, 있어봤자 도움도 안 됐으니 제 개인적으로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쉽게 떨어질 인상이 아니었는데, 퍼스트에겐 귀찮게 안 했니?”

“리아 님과의 연줄을 노리고 접촉하는 자가 몇몇 있기는 했으나, 별다른 트러블은 없었습니다.”

“으. 그렇구나······.”

“앗!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이후 다시 접근하는 자는 없으니.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자는 아예 근절됐습니다.”

“하긴 그러니 이렇게 줄었겠네. 어쨌든 다행이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드리나이다, 리아 님.”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고개를 숙이는 퍼스트에겐 아무 근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딱히 신경 써서 말을 한 것 같지도 않고, 정말로 불편한 점은 없는 듯하다.


끈덕지게 달라붙는 그들에게 당해본 경험이 있는 터라 괜찮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흐린 얼굴을 편 리아는 남은 학생들에게 갔다.


쭈뼛쭈뼛 보던 학생들은 황급히 몸가짐을 정리하는 등 분주해졌는데, 그들 앞에 선 리아는 치맛자락을 잡고 사뿐히 머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뵈어요. 요즘 다들 어떠신가요? 퍼스트는 잘 가르치나요?”


누구에게랄 것 없는 질문에 답한 건, 꽤 눈에 익은 남자―― 그리드였다. 방어전 때도 선뜻 방패를 들며 도와줬던 그가 호의적으로 웃으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최고야. 처음에는 무서운 형씨 같아서 쫄았는데, 막상 접해보니 친절하고 좋더라. 가르치는 것도 각자 개개인에게 맞게 조언해주고. 그리모르 교수도 칭찬 일색이야.”


다른 학생들도 되려 정규 수업보다 배우는 게 많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일부 학생의 경우 너무 세세한 조언에 좌절할 때도 있지만 뼈와 살이 됐다며, 퍼스트에게 감사를 표했다.



“호평이라 다행이네요. 근데······ 닐 씨는 안 계시네요.”

“그 녀석은 시험 준비에 한창이라서. 과부하 된 머리를 식힐 겸 가끔 오긴 하는데, 요즘엔 대부분 도서관에 짱박혀있어.”

“그렇군요.”

“그래그래. 아씨가 준 검을 매일 차고서 행복해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보다 아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그리드는 슬쩍 퍼스트의 눈치를 보더니 손짓했다.


뭔가 싶어 다가갔더니 그는 몸을 숙여 귓가에 입을 가져왔다.



“저기, 퍼스트 형씨 말이야. 나도 직접 보긴 했는데, 정말 골렘이 맞아? 아무리 봐도 인간 같달까······.”

“일부러 그리 느끼도록 만든 거예요. 하지만 제대로 감정을 지녔으니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당연하지. 뭐가 됐던 날 가르쳐주는 형씨잖아. 고마울 따름이라고? 은혜도 모르고 막대할 쌍놈은 아니니 걱정마셔!”


허리를 핀 그리드는 엄지로 가슴을 찌르며, 자신만 믿으라고 당당히 외쳤다.


그의 이 모습에 다른 학생들도 얼추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알았나 보다. 골렘이든 아니든 뭐가 중요하냐며, 배움을 청하는 자로서 상도덕은 지킨다고 말하였다.


‘역시 의욕 있는 사람만 남다 보니 다르긴 다르구나.’


이것이야말로 초기 상상했던 방과 후 모임이다. 언제부터인가 원래의 방향에서 멀어지게 됐지만,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


지금이라면 다시 주도적으로 해 나가고 싶다.


그러나 이미 퍼스트에게 맡긴 일. 함부로 빼앗을 수는 없다.


대신 리아는 귀걸이를 발동, 열린 공간에 손을 넣어 은빛 대검을 꺼냈다.



“퍼스트. 모처럼이니 오늘은 나도 모임에 참가하려 하는데, 상대 좀 해주겠니?”

“기꺼이!”


이 선언에 그리드를 필두로, 학생들은 갑자기 굉장한 대련이 성사됐다며 환호를 질렀다. 그러더니 요란스럽게 주섬주섬 짐을 챙겨, 훈련장이 한눈에 보이는―― 오늘도 어김없이 놓인 끔찍한 옥좌가 있는 단 위로 이동했다.



“제한이 있어야겠지? 퍼스트는 날 공격하기 영 껄끄러워하니까.”

“예. 제까짓 게 감히 리아 님께 닿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도 리아 님께서 다치실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아예 없었으면 합니다.”


전혀 다치지 않는다면 대련의 의미가 퇴색되는 게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간절히 바라보는 퍼스트의 바램을 무시하기도 힘들다.



“그럼, 공격만큼은 1단계 마력으로 하되, 출력은 제한이 없는 걸로 하자. 그러는 편이 저분들도 보는 맛이 있겠지.”

“과연. 알겠습니다.”


3단계의 마력―― 신력으로까지 승화된 마력이 가득한 리아의 신체는 강대하여, 2단계 마력 이하의 공격이라면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는다. 하물며 10급의 대마법이라도 그렇다. 발동에 사용된 마력이 1단계라면 조금 아플지언정 다칠 일 따윈 없다.


출력 제한이 없는 건 이 때문이었다.


일방적인 건 원치 않는다. 당초 모임의 목적대로 배우고 단련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 퍼스트가 가능한 한 전력을 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마력조작과 다중 사고 훈련도 되고 말이지.’


2단계 마력과 1단계 마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건 은근히 까다롭다. 분명 도움이 되겠지.



“그럼, 선생님. 한 수 배울게요.”


농담 섞인 리아의 말을 끝으로, 주위를 거대하게 아우르는 에르의 결계가 쳐졌다.












베르다드 내의 개인 훈련장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척 특징적인 소리였다. 하지만 알 사람들은 다 아는 소리로, 어지간하면 듣자마자 단방에 검으로 낸 것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갸웃하리라.


이게 정말 검으로 만든 소리인가 하고.


뭔가가 달랐다. 분명 검을 휘둘러 나는 소리이기는 하나, 말로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있었다. 비유하면 프로 악단과 아마추어 악단이랄까, 같은 악기를 썼음에도 마치 다른 악기인 듯한 격차 같은 게 존재했다.


그건 같은 프로가 아니고선 정확히 알기 힘든 것으로, 만약 검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 이곳에 있었다면 대번에 깨달았을 터였다. 동시에 경외심, 혹은 질투와 부러움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감히 넘지 못할 재능의 벽을 목도하고는.


엘리트만이 모인 베르다드에서도 압도적으로 발군이었다. 대륙 전체로 시야를 넓히더라도 마찬가지. 발 끄트머리에 닿을 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아서니까.


신의 축복, 그 자체 같은 재능을 지닌 아서가 휘두르는 것이기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흣!”


재차 아름답게 여운이 울리는 검격이 대기를 갈랐다.


아서는 평소 껄렁거리며 건들먹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얼굴로 굵은 땀방울들을 흘렸다. 걸핏하면 불평을 늘어놓던 그였지만, 지금은 입도 벌리지 않았다. 그저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두르기만 했다.


이 세계에 막 왔을 때 이후로 좀처럼 보기 힘든 아서의 모습이었다.


현재의 아서만을 아는 이들은 필시 몇 번이고 눈을 비볐으리라.


하지만 이게 아서의 원래 본성이었다. 그는 한 번 집중하기는 어렵지만, 몰두하기만 하면 놀라울 정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인간이었다.


이 단순한 수련도 그러했다. 마력을 모르는 지구에서 온 아서였기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이 수련법이야말로 최적의 선택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검무가 한동안 펼쳐졌다.


하지만 하나의 예술 공연인 듯 숨조차 죽일, 그 환상적인 시간은 돌연 끝을 고하고야 말았다. 문득 소음이 들려온 것이다.



“응? 페네리로. 뭔가 시끄럽지 않아?”


줄곧 얌전히 지켜보던 페네리로도 들었는지, 시선이 벽 너머 멀리 밖을 향했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됐어. 귀찮게 뭐 하러――”


――탁!


다 듣지도 않고 페네리로가 밖으로 나갔다.



“웬일이래? 어지간해서는 문 닫는 소리 하나 안 내던 녀석이. 뭔가 화난 느낌이었는데······. 에이. 그럴 리는 없겠지.”


저 페네리로다. 괜한 생각을 한 자신에게 헛웃음을 터뜨린 아서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렇게 땀을 식히고 있으니, 예상보다 빠르게 페네리로가 돌아왔다.



“뭐야. 무슨 일이래?”


침착하게 문을 닫고 다가온 페네리로는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나가기 전의 모습은 역시 착각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조금 낌새가 이상하다. 어딘지 곤란하다는 듯 어물쩍거리는 게 아니겠는가.



“도대체 뭔데 그래?”


재차 묻자 그제야 페네리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소란의 원인은 이스피리아 님이셨습니다. 그분이 현재 대련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쯧. 또 그 꼬맹이냐? 그리고 넌 뭘 그딴 걸로 뜸을 들여?”

“죄송합니다.”

“됐고. 누구랑 대련하길래 이 난리야?”

“그분께서 만든 골렘이랍니다.”

“아아. 그거?”


이건 하도 여기저기 떠들어대서 들어는 봤다.


골렘 같지 않다나 뭐라나? 어쨌든 만든 꼬맹이를 닮아, 태도가 엄청 시건방지다며 귀족들이 투덜대고는 했었다.



“근데 겨우 그걸로 이 난리야?”


지금도 귀를 기울여보면 빨리 가자며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자신이 만든 골렘과 싸울 뿐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관심을 보인다는 게 아서로서는 이해되지 않았다.



“저도 정확한 사정을 모르겠으나, 주워듣기론 골렘이 상당히 특별한듯합니다. 이스피리아 님도 그렇지만, 그 탓에 더욱 관심을 끌은 모양입니다.”

“쳇.”


마음에 들지 않은 아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옷이나 줘.”

“예.”


맡겨놓은 가디언을 입은 아서는 그대로 개인 훈련장을 나갔다. 도중에 끊겨 기분도 잡친 겸, 오늘은 여기까지 할 셈이었다.


페네리로는 안내를 위해 즉시 앞장섰다.



“아니. 돌아가는 게 아니야. 다른데 들를 거야.”

“어디로······?”

“어디긴. 그 꼬맹이에게지. 방해까지 해댔는데, 골렘이랑 함께 얼마나 대단한지 안 보고 배기겠냐?”

“알겠습니다. 즉시 안내하겠습니다.”


돌아오기 전 위치를 확인해뒀나, 페네리로는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방향은 이전에도 가봤었던 상급 훈련장 쪽이었다.


틀림은 없었는지 도중부터 사람이 많아진다.


징글징글하게도 많은 인파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니, 익숙한 면면들이 보였다.


‘벨루디스의 왕자들이랑 제국의 황자들과 레스들. 거기에 소베르비아까지 왔네. 총출동하셨구먼. 아주 삼국지가 따로 없네. 곁들이로 그리모르랑 다른 교수들도 다 와있고.’


그것만이 아니다. 지난번 만나지조차 못하고 문전 박대한 인디아도 있었다. 같이 온 1급 신관 모두를 데리고. 게다가 사람이 몰리기 전에 일찌감치 왔었는지, 떡하니 명당자리에서 편하게 관람 중이다.


그런 그들은 앞만을 바라보며 눈을 떼지 못했다.


‘거참. 교회라기에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런 세계관이 아니었나 봐? 분명 별것도 아닐 대련에 저러고 있는 걸 보면.’


급격히 의욕이 팍 죽었다. 덕분에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앞뒤, 양옆 모두가 사람으로 바글바글한다. 이런 상태로는 돌아가는 것도 일이다.


여기까지 온 이상 선택지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이다. 이를 깨달은 아서는 한숨을 내쉬고는, 심심풀이로 그냥 보고 가자며 억지로 자신을 달랬다.



“아아. 미안. 잠시만 지나갈게.”


밀며 나아가니 다들 노려본다. 그렇지만 아직 용사란 타이틀은 완전히 유명무실해지진 않았나 보다. 그 이상 특별한 불만은 제기해오지 않는다.


덕분에 아서는 조금 편하게 쭉쭉 나아갈 수 있었고, 마침내 훈련장이 내다보이는 위치까지 왔다.


――그리고 보게 됐다.



“이, 이게 뭐야······?”


작가의말

슬금슬금 리아의 꿈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7 루이미너스
    작성일
    23.07.12 10:26
    No. 1

    ??? : 꿇어라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유사 '용사' 나부랭이

    리아가 아무리 똑똑해도 역시 사람이군요! 잊어먹는게 있다니

    찬성: 1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Lastia
    작성일
    23.07.12 10:49
    No. 2

    리아는 기억력이 초월적이지만 지적 능력만큼은 평범해서...
    떠올리지 못하면 무심코 지나치는 일도 많슴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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