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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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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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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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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쪽

209

DUMMY

점심은 에르가 준비해 준 도시락이었다. 나트알에 온 뒤로는 줄곧 필리아가 해주어서 그의 요리는 오랜만이었다.


‘으음. 맛있어······. 한 달 동안 쉬어서 내심 살짝 녹슬 줄 알았는데.’


여전히 훌륭하다 못해 눈이 번쩍 뜨이는 빵과 스프의 코스 요리다. 플레이팅과 코스의 순서, 에스코트도 완벽하여 바깥임에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기분이다.


요리로 에르를 따라잡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다······.


다소 의기소침해졌으나 식사만큼은 충실하여, 그릇을 모두 깨끗이 비운 리아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렸다.



“자. 그러면 가볼까? ······아! 잘 먹었어요, 에르. 맛있었어요. 진짜로요.”

“후훗. 뭘. 근데, 볼 일이 있어?”

“네. 프리에나 씨가 잠시 대련하자고 해서요.”

“흐음. 그래?”

“왠지 좀 진지하셔서 놀랐어요. 대련 정도야 별거 아닌데. 헤헤.”

“뭐, 적당히 놀아주면 되겠지.”

“에이. 부탁받았는데 그러면 안 되죠. 성의가 있는데.”

“음. 그렇군······.”


에르는 감명받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따금 하는 그거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에르는 간혹 저러고는 한다. 대련 자체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 보인다.


‘이해하지만······.’


자만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프리에나와의 역량 차는 확연. 애초에 1단계 마력인 시점에서 이미 승부가 되지 않는다.


물론 디카이로트처럼―― 0단계 마력임에도 기량만으로 2단계 마력을 쥐어짜 내는 예외가 있기는 하다. 그걸 잊지 않았다. 그때의 충격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디카이로트는 정말 달랐다. 그는 언뜻 대단한 사람이라고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마주 섰을 때부터 뭔가 찌릿찌릿한, 방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느끼게 했으니까.


그에 비해 프리에나는 평범했다. 아무것도―― 그 어떠한 경계심도 생겨나지 않았다.


실은 무심코 알게 된 거다. 그녀의 역량이 어느 수준인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인지 아닌지가······.


몸이 안정되어 가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역량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게 됐다.


‘시기적으로 보면 세인트리안에서 폭주한 이후부터인가······.’


처음에는 단순한 착각이라 여겼다. 그러다 확신하게 된 건 퍼스트와의 대련. 그전까지는 어렴풋하게 그런가 보다 했지만, 그와 마주하며 알게 됐다.


이 내달리는 묘한 감각이 바로 상대의 역량이라고······.


빈말 같지만, 퍼스트는 진짜로 강했다.


솔직히 따라가기 벅찬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만큼 여태 만났던 누구보다도 퍼스트는 강대했다. 검술도 세련되기 그지없었고. 재차 이런 오토마타를 정말로 자신이 만든 건가 싶어 놀랐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절대 질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감각이 결코 적수는 아니라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말린 건 그저 무리하기에, 그 이상은 에르의 보호막이 견딜 수 없기에―― 더 해봐야 퍼스트만 만신창이가 될 뿐이기에 말린 것이었다.


‘판타지 세계답게 역량 같은 걸 알 수 있게 되어서 좋긴 한데······, 너무 뜬금없어서 도리어 좀 무서워.’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감각이랄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쩐지 초조해진다.



“리아, 정리 다 했어.”

“아! 미안해요. 다 맡기고.”

“아니야. 좋아서 하는 거니까.”


반짝반짝―― 에르의 미소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너무 눈부신 나머지 그냥 에르가 하고 싶은 데로 모두 다 맡겨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안 되겠어······. 이러다가는 내가 점점 글러 먹게 될 거 같아.’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건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배를 벅벅 긁으며 TV를 보고 있는 자신. 거기에 더해 과자까지 씹어먹고 있다.



“우와······.”


무심코 탄성이 나왔다.


그냥 백수이지 않은가. 너무 처참한 광경에 되레 오싹해졌다. 게다가 제법 현실미가 있던 터라 정말 남 일 같지 않았다.



“리아?”

“그런 글러 먹은 인간이 될 수 없지! 가요, 에르!”

“응? 으응.”


어정쩡한 에르의 대답을 들으며 리아는 앞으로 걸어갔다. 향하는 곳은 훈련장. 하지만 리아가 가는 방향은 마을 외곽이었다.


본래 훈련장은 마을 내에 있는 광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광장은 공동식당과도 비슷하게 활용되고 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예외 없이 이곳에서 식사했다.


문제는 준비다. 여태 일일이 식사때마다 준비하고 치우고를 반복했으나, 조리도구까지 나르는 건 너무 번거롭지 않은가.


확실히 말해서 불필요한 중노동이다. 다들 힘도 세고, 체력도 넘쳐서 순식간에 끝나기는 해도.


그래서 치우지 않도록 했다. 덤으로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 구애되지 않고 쾌적하게 쓸 수 있도록 에르가 마법으로 조치해 놓았다.


대신 훈련장을 옮겼다.


외곽 쪽에 아직 활용하지 않는 토지를 개간하여 그곳에 넓은 공터를 만들어놨다. 당연히 그냥 공터는 아니다. 마력부터, 일절 여파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결계를 쳐둔 최고의 훈련장이다. 넓기도 해서 서로 걸리적거릴 일도 없다.


물론 에르의 작품이다. 말해주기로는 세스와 가베인의 대련 때 겸사겸사 해둔 것이라고 한다. 매번 어울려 주기 싫다면서······.


뭐, 차갑기는 해도 언제나의 에르다. 부끄러운 것이겠지.


‘실은 따듯한 사람이니까.’


당시의 잔뜩 찡그린 남편을 떠올린 리아는 기분도 좋게 훈련장에 도착했다.










세스타스―― 세스.


그는 아무리 좋게 포장하려 해도 좋은 말이 하나 나오지 않는, 반대의 의미로 진짜 굉장한 인물이다.


우선 머리가 나쁘다.


뭐, 그게 잘못됐다는 게 아니다. 넓은 세상에 바보가 한둘도 아니겠고. 막말로 머리 정도야 나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세스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마냥 멍청한 주제에 골치 아픈 일만을 양산······. 그걸 수습하는 자들의 이마에 주름이 늘게 만드는 재앙 같은 녀석이었다.


하다못해 태도라도 괜찮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세스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교양과는 완전히 담을 쌓아 어른을 공경하기는커녕, 껄렁대는 교만한 놈이었다. 자기 뒷일을 수습해 주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닌지라 뻔뻔하게 잘난 척이나 떨어댔다.


굳이······ 멀쩡한 곳을 꼽자면, 잘만 움직여 대는 오체만이 전부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그 외에는 전부 나사가 열 개씩은 빠져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세스는 묘하게도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당최 어떤 매력 때문인지, 어느덧 보면 그의 주변은 뭔가 바글바글했다. 그건 종을 가리지 않았다. 마수와 마물, 일반 동식물과 사람종 등등, 종족을 초월하여 세스의 곁으로 모여든다.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어떤 매력을 보고 모여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이쪽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이런 녀석의 동생으로 태어났나 싶은데······.


‘솔직히 말해 오빠랑은 위치가 반대로 된 거 같아.’


속으로 툴툴거렸으나······ 프리에나는 그리 진심이 아니었다.


애초에 자신을 위해 망설임 없이 목줄을 찬 세스였다. 이후에 물어보니 죽을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동생이 오래 살 수 있는 길을―― 여차하면 같이 신께 가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었다.


차마 말로서 표현하진 못하지만,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나의 오빠는 이만큼 멋진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여전히 바보이기는 하지만.’


프리에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이내 상냥하게 올라간 입가가 내려왔다.



“이스피리아······.”


어린 소녀라는 이 인간에 대해서는 눈을 뜬 순간부터 줄곧 들어왔다.


그러므로 알고 싶어졌다.


――정말 세스를 이겼는지.


홀린 아저씨의 말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직접 보았다는 새언니들을 의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물며 세스 본인조차도 사실이라며 인정한 것이다. 그러한 일에 토를 달려는 마음은 없다.


거기에 게헤르 엘의 부름으로 인한 마력의 파동이 있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강렬하게 느껴졌던 그것이 무엇보다도 진실임을 알게 해줬다.


그렇다. 빌어먹을 세인트리안과, 인간의 나라 근처를 얼쩡거렸던 어리석은 자신만을 질책하며 반성했었다. 거대운석을 만드는 마법 실력과 교황으로부터 최강의 전사라 칭해진 것 등, 놀라울 따름인 이스피리아의 일화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첫 만남 전까지는······.


이스피리아는 외형만큼은 들었던 그대로였다. 은발에 투명한 분홍빛의 눈동자, 귀엽고 어여쁜 생김새는 확실히 왜 그리들 요란을 떨어댔는지 알 만큼 단정했다. 행동거지조차 단아하여, 요정 같다는 사람의 심정도 공감됐다.


그렇기에 알 수 없게 되었다.


주변에서 소녀를 윗사람으로 추켜 주고, 소녀 본인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이 일련의 장면들이 정말 납득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만큼 소녀는 나약해 보였다. 전투는 고사하고, 강자라는 느낌조차 전혀 들지 않았다. 누군가를 지키는 게 아닌, 소녀가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물론 인간들은 약자라도 윗사람으로서 통치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소녀는 강자라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떠한―― 강자의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기만 했다. 보통이라면 분위기라든가 위압 같은 게 풍겨올 텐데.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것이었나······.


그런 생각에 재차 물어봤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홀린이나, 세스, 심지어 오랜만에 재회한 델리안마저도 단언했다.


소녀는 이 대륙을 넘어―― 이 세상에서 손에 꼽히는 강자 중의 강자라고······.


규모가 너무 크다. 정말 너무 크기에 되레 신뢰가 떨어진다.


그러나 다들 농담을 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세스에 이르러서는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찰하기까지 했다.


‘아주머니도 비슷했고.’


다들 이런 반응이니 혹여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겠거니 싶었다. 그렇기에 군말하지 않고 얌전히 지냈었다. 구해준 은인에게 따질 정도로 막돼먹지도 않았고.


······하지만 한계에 달해버리고 말았다.


한 달. 한 달이다.


그동안 이스피리아가 한 일이라고는 밭일이 전부였다. 빠르기는 했으나 딱히 특출난 부분은 없었고, 할당량을 마친 이후에는 그 어떠한 수행조차 하지 않는다.


강자일수록 수행은 빼먹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다. 그 게으른 세스마저도 수행만큼은 절대 거르는 법이 없다.


이처럼 강자는 꾸준하기에 강자일 수 있는 것이다.


따로 몰래 하는 건가 싶어 유심히 관찰하기도 했으나······ 이스피리아에게 그런 건 없었다. 유유자적 시간을 허비할 따름이었다. 그나마 점심 이후 단련하는 이들을 보러 매일 오긴 했지만, 이마저도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게 전부였다.


이런 이스피리아를 보고 있으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마치 병약한 소녀가 동경하는 이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모양새가 아니냐고······.


의혹은 의심이 됐고, 결국 할머니의 묘비에 말을 거는 이스피리아에게 부탁하게 됐다. 대련에 어울려달라고.


솔직히 냉큼 수락해 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많이 놀랐었다.


‘모르겠어. 재차 마주해 본 느낌으로는 평범한 소녀라는 인상인데.’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프리에나는 강자의 축에 들지 못한다. 이 마을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녀보다 강한 사람은 제법 많았다. 심판관에게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붙잡힌 시점에서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리에나 자신도 이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건 상대가 나빴을 뿐. 평범한 소녀가 상대라면 프리에나도 강자다. 그녀를 붙잡은 제1 위상――, 심판관 중에서도 격이 다르다고 하는 그와도 상대적 체감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모르겠어. 어째서 받아들인 거지? 강력한 무구라도 있는 건가? ······아니, 가보면 알겠지.”


무수히 생겨나는 의문을 접고, 프리에나는 잘린 나무 밑동에서 몸을 일으켰다.


마을 외곽에 있는 훈련장에 가보니 주민 전원이 와 있다. 세스의 무리와 몬스터 군단도.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모두가 모인 익숙한 모습을 둘러보며 프리에나는 세스에게로 갔다.


세스는 먼저 와 있던 이스피리아와 대화 중이었는데, 기척을 읽고 가볍게 눈길을 줬다.



“쯧쯧. 기본부터 글렀구먼. 뭐······ 직접 맞아보는 것도 좋은 약이 되겠지.”

“응?”

“아가씨에게 한 말이 아니야.”


이스피리아에게 고개를 흔든 세스는 모두를 향해 외쳤다.



“너희들도 잘 봐둬. 모처럼 아가씨가 나선다니까! 두 눈 크게 뜨고 배울 점을 찾아내도록 해!”

“뭣이?! 아가씨께서 대련하신다고?!”

“역시나······!”


이스피리아를 따르는―― 프리에나가 보기에는 숭배마저 하는 듯한 마족들이 환호하였다. 그들은 언제나 멀리서 구경하던 그녀가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예상했나 보다. 신속하게 왁자지껄 떠들며 자리를 만든다.


팽과 마이를 필두로 한 몬스터의 군단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부노의 지시 아래 관람하기 좋은 형태로 대형을 짠다.


희희낙락한 이들보다는 덜하지만, 인간 주민들과 손님들도 꽤 반기며 움직였다.


누구 하나 걱정하는 사람이 없다······. 이스피리아의 부모님들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하물며 조부인 촌장마저도 그렇다. 더 거리를 벌리라면서 자리를 조정해 주고 있다. 손녀를 염려하는 낌새는 그 파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스피리아의 부하―― 본인을 사도라 소개했던 폴스에 이르러서는 더 가관이었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를 작은 수첩을 꺼내, 마을 사람들과 내기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들려오는 대화는 프리에나를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근데 이게 내기가 돼? 다들 리아에게 걸 거 아냐?”

“상대는 프리에나인가······. 수행하는 걸 보면 나름 강하다는 건 알겠지만 역시 상대가······. 참고로 넌 어디다 걸 거니?”

“당연히 리아 님이죠.”

“에이. 그럼 내기는 힘들겠네.”

“으음······. 확실히 모두 같은 쪽에 걸어서야 내기가 성립하진 못하겠군요.”


주민의 말에 폴스는 곤란한 얼굴이 됐다.


단 한 명도 프리에나의 승리를 점치는 자가 없다. 간혹 프리에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되려 열심히 하라며 격려까지 해준다. 마족들의 경우 부럽다는 선망의 시선과 함께······.


뭔가 이상하다. 마치 자신만이 다른 세계에 동떨어진 느낌이다.


······아니, 그런 줄로 알았는데, 다행히도 동지가 있었다. 그들은 바로 자신과 함께 구출된 4인조의 수인들로, 그들은 무척이나 놀라면서 이스피리아에게 갔다.


대표로 말을 건 것은 토끼 귀와 꼬리가 인상적인 토인족의 여성이었다.



“저기, 아, 아가씨? 저, 정말로 프리에나 씨랑 대련하시는 겁니까?”

“네.”

“괘, 괜찮은 겁니까? 크게 다치시거나······.”

“어······, 꽤 힘을 뺄 테고, 여차하면 [치유]로 고치면 되니 괜찮아요.”

“[치유]가 있어도 다치지 않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아픔이 없다면 배움도 없을 거예요. 대련이고 하니 그 부분은 서로 이해해야겠죠. 뭐,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다비데 씨.”


구출해 줄 때 치료해 줬다더니 [치유]는 정말 쓸 수 있는 듯하다. 그래서 그런가, 의외로 터프한 마인드를 갖고 있다.



“정말로 대련을······.”


염려스러운 얼굴이 가시질 않는 토인족의 여성―― 다비데. 다른 셋도 한껏 불안하다는 듯이 시선을 주고받는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이들을 보며 이스피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승부에 나서는 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아니다.”

“세이라 씨······.”

“음. 마음은 알겠지만, 얌전히 지켜보도록. 그게 예의다.”


귀가 축 처져 왔다 갔다, 어쩔 줄 몰라 하던 다비데는 결국 수긍했다. 다른 셋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해하면서도 별수 없이 세이라와 함께 외곽으로 빠졌다.


그런 이들의 뒤를 폴스가 먹잇감 노리듯 재빠르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물었다. 내기는 어떠냐고······.


황당하게 보고 있자니 이스피리아가 물었다.



“준비는 되셨나요?”


뭐가 됐든 할 일은 변함이 없다.


시선을 떼고 프리에나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 준비 됐어요. 리아는?”

“저도요.”

“그럼, 바로 시작하죠.”


방긋 웃는 이스피리아.


여전히 의문이다. 여리고 어린 소녀가, 장점이라고는 무력뿐인 오빠를 정말 이겼는지가······.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이스피리아는 그 필리아의 딸이다.


필리아,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여 겨우 몇 달 만에 자신을 넘어선 강자다. 질투나 선망조차 감히 허락하지 않을, 재능의 덩어리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존재로, 최근에는 세스가 자신의 훈련에 도움이 되겠다고 반색하는 상황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요즘 세스와의 대련에 매진하고 있다.


그런 필리아의 피를 이은 거다. 분명 이스피리아의 재능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를 이긴 수준은 아니겠지만.’


필리아만큼은 인정한다. 직접 눈으로 본 게 있으니.


하지만 이스피리아는 별개다. 타산 없이 자신을 구해준 그녀를 마음속 깊이 존경하고 있지만, 전력을 다한 세스를―― 게헤르 엘의 부름까지 시전한 오빠를 이겼다는 게 상상조차 되질 않는다.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만큼 세스가 괴물처럼 강할 뿐이다.


혈육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렇다. 세스는 남들과는 다른 무시무시한 강함을 소유하고 있다. 공포의 화신이라 불리는 그 드래곤마저도 한 수 접는 수준이다.


실제 세스의 손에 죽어 나간 드래곤의 수는 상당했다. 일부 지능이 있는 드래곤의 경우 그 강하다던 자존심마저 내리고는 목숨을 구걸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자들을 그냥 돌려보내 줬다.


먼저 시비를 건 녀석들을 어떻게 믿고 보내는 건지······.


분명 바보가 맞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르고 어리석다. 자신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배포가 큰 그 모습은 자신의 자랑이자 긍지였다.


······그러니까 확인한다.


언뜻 포악해 보이지만 누구보다도 상냥한 오빠를 정말로 이겼는지······!



“잘 부탁드려요.”

“예.”


이스피리아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놓자마자······, 거두절미하고 프리에나는 쏘아져 나갔다.


대련은―― 시합은 이미 시작됐다. 명확한 시작 신호를 정하지 않았으니 딱히 반칙은 아니다.


다만, 아무리 방심하지 않기로서니 조금은 치사하다는 기분이다. 그래서 살짝 힘을 뺐다. 그래. 이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질 테니.


그렇게 어떠한 저항도 없이 이스피리아에게 주먹이 꽂혀――



“――오우. 빠르시네요. 결단이나 행동력 모두가. 과연, 세스의 혈육이랄까.”


아무 긴장도 없이 늘어지게 말하는 이스피리아. 그 어린 소녀의 관자놀이 옆에는 미처 닿지 못한 프리에나의 주먹이 있었다.


‘이럴 수가! 어, 언제?!’


전혀······, 막는 그 순간까지도 손목이 잡혔는지 몰랐다. 그대로 공격이 들어간 줄로만 알았었다.


‘아, 아니, 지금은 대응이 먼저야.’


놀란 마음을 추스르며 프리에나는 힘껏 팔을 잡아당겼다.


막은 건 대단하지만 근력은 뒤떨어질 터. 떨쳐내기는 쉬우리라.


프리에나는 그리 판단했으나······ 그건 오만한 생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안 움직여!’


꼼짝도 하지 않는다······. 팔목을 잡은 이스피리아가 조금도 꿈쩍하지 않는 것이다.


암만 발악해도 1mm도 움직일 수 없다. 마치 태산이 든든히 버티는 듯하여, 마법으로 공간을 고정한 게 아닌가 싶은 착각마저 든다.


‘크윽. 저 얇디얇은 팔 어디에서 이만한 힘이······. 끌려오지도 않고 말이야. 외견과 근력이 다른 경우가 흔하다지만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이대로 당할 순 없다.


힘 싸움으로는 답이 없다는 걸 느낀 프리에나는 빠르게 왼쪽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


뛰어난 재능과 더불어, 열심히 갈고닦은 엄니는 결코 무르지 않았다. 눈짓과 몸짓, 심지어 발동작과 몸의 중심 등의, 다중으로 페이크가 섞인 번뜩이는 일격은 감히 범인들이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의 본능적으로 나온 이 일격은 그녀가 얼마나 우수한 재능을 품고 있는지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뭐, 뭐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턱이 위로――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어느새 갑자기······. 펀치를 먹였다고 생각했더니 돌연 하늘을 보고 있다.



“네, 결착! 이걸로 프리에나 씨는 한 번 죽으신 거예요.”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이스피리아가 오른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붙잡았던 손을 놓아줬다.


자유롭게 해방된 프리에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제야 이스피리아가 검지로 미간을 눌러 제압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 손가락 하나로······?”

“――당연한 거 아냐? 나라도 너 정도는 손가락 하나면 충분한데. 굳이 다른 손을 써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

“아. 기습이라지만 어쩐지 정면으로 간다 싶더라니······.”


비꼬는 기색이 다분한 세스의 말에 이어, 깨달았다는 듯한 델리안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곧장 델리안에게서 [염화]가 걸려 왔다.



『프리에나야, 어째서 빈말로 여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네 앞에 있는 소녀는―― 나의 벗은 일찍이 세상을 구했었던 영웅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임해 봐야 네겐 아무런 득도 없구나. 비록 오해에서 시작했을지언정 최선을 다하거라. 너 자신을 위해서라도.』


지금 뭐라고 한 것인가······?


프리에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세상을 구했었다니······.


그만한 대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다. 애초에 그런 상황이었다면 세인트리안이 허튼짓할 여유 따윈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헛소리를 할 리가······.’


굳이 [염화]를 쓴 것이다. 농담이라기엔 너무 정성이다.


게다가······


스윽.


프리에나는 눌린 감각이 남은 듯한 미간을 문질렀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진짜 상상 이상으로 강하긴 하다. 다른 이들이 괜히 떠받드는 게 아니랄까, 상당한 저력이 있음은 확실하다.


물론 인정할 수 없다는 고집은 여전했다. 그러나 프리에나는 그렇게까지 어리석진 않았다. 현격한 격차가 있음을 받아들여 거리를 벌렸다.



“이번에는 원거리 전인가요? 마침 잘됐네요. 요즘은 근거리만 대련한 터라 조간만 원거리도 하려 했는데.”

“――거리를 두고 본다라. 이해하고 공감도 되지만······ 상대가 안 좋았네.”

“음. 저래 보여도 리아는 마법사이니.”


이스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릴 듯 반색하며 즐거워하였다.


이어 평가하듯 한 마디씩 주고받는 세스와 델리안.


저 둘이 얼마큼 강한지는 마을 모두가 안다. 심심찮게 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거니와, 세스의 경우 마을의 강자인 잭과 대련도 자주 한다. 그래서인지 다들 둘의 주위로 몰려 있었다.


아마 해설을 듣기 위해서겠지······.


곁눈질로 이를 살피던 프리에나의 고운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법사에게 거리를 준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가······. 스스로 자신의 이점을 버린 행동이 프리에나에게 뼈아프게 다가왔다.


새언니 중 고명한 마법사인 로랴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녀와 중장거리에서 대치하면 접근하기도 힘에 부쳤다. 견제도 그렇지만, 압도적인 화력의 차이. 이것이 실로 까다로웠다. 사실상 프리에나에겐 원거리를 때릴 만한 공격이 전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리아는 인간. 충분히 승산이 있어!’


분명 마법은 대단하다. 나 자신은 쓰지 못하기에 그럴지도 모르지만, 무척 편리하고 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 마법사는 별로 위협적이지 못하다.


일단 발동이 느리다. 술식을 그린다는 공정이 새롭게 추가되기 때문에 움직이는 사물에게 명중시키기란 어렵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류라는 소리를 듣는다.


솔직히 말해 일대일로 만난다면 절대 질 수가 없는 시시한 상대다. 인간의 마법사 같은 건.


――이스피리아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리는 약 15미터. 그리 멀지 않다.


주먹을 움켜쥔 프리에나는 자리를 박찼다. 단단한 지면은 제대로 지지해주어 프리에나가 쾌청한 공기를 가를 수 있게 해줬다.


――딱.


‘뭐······?’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그것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프리에나는 쏘아나가는 힘을 억지로 틀어 옆으로 굴렀다. 왠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푹. 푹. 푹. 푹.


무언가 땅에 꽂히는 소리가 들린다.


빠르게 자세를 잡고 확인해 보니, 아까 서 있던 곳에 족히 수십 개는 되어 보일 얼음의 창이―― 거대한 랜스가 꽂혀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대로 계속 뛰어갔으면 벌집이 됐을 것이다.


프리에나는 소름이 돋았다.


암만 [치유]로 고칠 수 있다지만 좀 심하지 않은가. 자칫 불상사도 일어날 수 있는데.


살짝 과격하다는 인상은 있었는데, 싸움의 한에서는 정말 냉철하다.


‘그, 그것보다 지금 마법, 발동이 너무 빠르지 않아?!’


아니, 손가락을 튕기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빠르다. 분명히 움직이기 전까지, 이스피리아는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데 어느 순간에 소리가 울렸다.



“진짜 여태 뭘 보고 있었던 건지 원. 훈련하는지 안 하는지만 관찰해 댄 거냐? 마법 쓰는 거 하나로 놀라게.”

“으음······.”


비꼬는 세스, 그리고 차마 말은 하지 않았지만 델리안도 동의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델리안은 그렇다 치더라도 세스의 저 반응은 울화가 치민다.


‘진정하자······. 분석이 우선이야. 일단 발동어는······ 없어. 아마 저 핑거 스냅이 대신하는 거겠지. 우리처럼 완전한 무영창은 아니야. ······다만 발동까지의 딜레이가 거의 없어. 오히려 로라샤 언니보다도 빨라. 약점은 없다고 여기는 편이 좋을 거 같아.’



“성급하지 않은 건 좋지만,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잊으면 안 되죠. 생각은 짧고 간결하게. 덤으로 정확하면 더 좋고요. ······뭐, 힘든 주문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요.”


딱.


이스피리아가 재차 손가락을 튕겼다.


본능적으로 프리에나는 뒤로 빠졌다. 직후 아까 있던 자리에서 땅이 커다란 송곳이 되어 올라왔다. 끝이 매끈한 꼬락서니를 보면 강도가 범상치 않아 보인다.


이번에도 피하지 못했다면 초상을 치를 뻔했다.


다시금 소름이 돋는다. 그렇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프리에나는 솟아오른 송곳에 숨어 앞으로 튀어 나갔다.


연속 발동은 아무리 그래도 힘들 터.


송곳의 왼쪽에서 나온 프리에나는 더더욱 속도를 높였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힐 생각으로.


바로 그때, 이스피리아가 펼친 손바닥을 내렸다.


마치 무언가를 내려치는 듯하다······.


――깜짝!


섬뜩한 느낌에 화들짝 놀란 프리에나는 바로 왼쪽으로―― 가려다가 오른쪽에 있는 송곳에 기대,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왜 이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다. 그저 왼쪽으로 가면 위험하리라는 직감이 들은 것이었다.


그리고 프리에나는 자신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퍽! ······퍽!


마법이다······. 이스피리아는 손가락을 튕기는 것만이 아닌, 기타 제스처로도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질이 나쁘게 위에서 노리는 척 페이크를 쓰기까지 했다.


――퍼버버버버버벅!


하나둘로 시작했던 뭔가는 이내 셀 수도 없이 많게 되어 솟아오른 송곳에 부딪힌다. 느끼기에는 무수히 많은 돌팔매질을 당하는 것 같은데, 담긴 힘이 제법 엄청나다.


송곳에 맞닿은 등으로 진동을 느끼며 프리에나는 숨을 죽였다.


이윽고 우박 같은 소음이 그쳤다. 눈여겨 본대로 송곳은 단단하여 무너지지 않고 잘 버텨냈다.


안도함과 동시에 프리에나는 눈매를 매섭게 하고는 쏜살처럼 달려 나갔다.


더 이상의 생각은 무의미. 세스도 그러지 않았는가. 어쩔 땐 감에 의지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당시에는 무슨 멍청한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알겠다. 어설픈 분석 따윈 방해라는 게······.


감은 재능의 영역인지라 다소 불안하다. 그러나 제법 재능이 있다고 한 세스의 말을 믿고 프리에나는 달려들었다.


수많은 자갈들이 흩어진―― 이스피리아의 마법이 미친 광경을 지나, 멀어졌던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이스피리아가 이에 대응으로 손바닥을 위로하여 올린다.


아까와 마찬가지다. 저건 페이크.


진짜는 오른쪽이다.


프리에나는 감에 의지하여 동물처럼 네 발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 자리에 흙으로 된 가시들이 찔러왔다.


다름이 아니라 아까까지 기댔던 거대한 송곳에서······.



“서, 성질 변화라고?!”


찔리기 직전에 피해냈으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성질 변화는 델리안이 말하길 생각에 유연함이 없다면 하기 힘든 고난이도의 테크닉으로, 마법사 대부분은 바로 직전에 쓴 마법의 변환까지가 한계. 시간이 좀 지난 마법까지는 힘들다고 했었다.


이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를 기준으로 델리안은 일류를 가린다고 했다.


즉, 이스피리아는 저만한 괴력을 지녔음에도 일류 마법사였다.


사실은 송곳에 몸을 숨겼을 때 이미 승부는 갈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의 무기에 기댄다는 최악의 선택을 했으니까.


그런 생각이 프리에나의 온 머리를 지배해 간다.


‘아, 아니야! 난 멀쩡하잖아?! 지금은 괜한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떨쳐내며 프리에나는 달렸다. 그리고 이때를 맞춰 이스피리아가 손가락을 튕겼다.


정면이다. 보이지 않는 뭔가가 날아온다.


프리에나는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이며, 정면에서 날아오는 바람의 탄환을 곡예 하듯 유연하게 회피해 냈다. 그야말로 호인족만이 해낼 몸놀림이었다.


푝!


땅에 말 그대로의 바람구멍이 생겨났다. 지름 1cm의 작은 구멍이었는데, 뚫고 간 깊이가 상당한 듯하다. 내리쬐는 빛이 끝도 없이 내려간다.



“음. 과연······. 꼬리로 마력을 감지한다는 게 사실인 모양이네요. 솔직히 여기까지 반응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니. 그럴 리가 있겠는가. 꼬리에 그런 부가 기능은 없다.


도대체 저런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누가······.


어렴풋이 아른거리는 누군가가―― 언뜻 팔짱을 끼고 자랑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세스가 보였지만 프리에나는 단숨에 일축했다.


5미터. 이제 곧이다.


‘다 왔다.’


거리를 둔 뼈아픈 실책의 대가를 모두 치르고, 이제는 한 걸음 남았다. 프리에나는 그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디디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스피리아가 주먹을 쥐었다.


그 순간 프리에나는 소름이 돋았다.


본능이 감지하는 것보다 빠르게, 프리에나는 뒤로 훌쩍 물러났다. 기껏 좁힌 거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전력으로 날아가듯 몸을 날렸다.


쿠웅······.


묵직한 소음과 함께 지름 3m의 땅이 10cm쯤 가라앉았다. 그리고 프리에나와 교대하듯 처음의 얼음 랜스가 날아들었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니었는데, 땅이 꺼진 지름에 들어서자 갑자기 엄청난 가속도를 냈다.



“중력 마법······.”


자세를 수습한 프리에나는 손잡이 근처까지 파고든 랜스를 보며 쓴 신음을 흘렸다.


중력을 다루는 건 아무리 못해도 5급에 이르는 수준으로, 로라샤조차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그 외의 다종다양한 속성의 마법도 만만치 않았다. 하나 같이 전부 3급은 가뿐히 뛰어 넘는다.


‘15미터······. 안간힘을 썼는데 제 자리라니.’


다른 때라면 1초도 걸리지 않을 거리이건만, 오늘따라 유독 길어 보인다. 허탈함에 한숨도 나온다. 그리고 새삼 마법사가 이리 까다로운 존재였나 생각하게 된다. 그만큼 버겁다.


‘인정하지. 그래, 인정해. 리아는 무지막지하게 강해.’


여기까지 직접 경험하고 인정 못 한다면 그거야말로 보는 눈이 없다. 거기다 속도 좁다.


그래도 이대로 끝낼 수야 없다. 하다못해 한 방이라도 쳐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


프리에나는 호전적으로―― 세스와도 같이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마법인가······?”


‘역시······. 마력만 끌어올렸을 뿐인데 한눈에 알아보나?’


경악스럽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여기서 그만둔다면 마력만 소모하고 만다. 다행히 이스피리아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다. 방해할 마음은 없는 듯하다.


방심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다. 기왕 기다려 주니 여유롭게 시간을 쓰도록 하자.


이미지를 확고하게 다진 프리에나는 마법을 발동했다. 끝까지 이스피리아는 가만히 지켜봤다.


인간과 같은 발동어는 없이, 머릿속에 그렸던 구상대로 삽시간에 훈련장에는 짙은 안개가 꼈다. 소규모라고는 하나 날씨를 다루는 마법으로, 급수로는 4급에 해당했다. 이것이 마법은 그리 능숙하지 못한 프리에나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마법이었다.


한 번 숨을 토해낸 프리에나는 자세를 낮추고 내달렸다.


시야가 꽉 막힌, 코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이지만 상관없었다. 한껏 부푼 꼬리는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이처럼 시야가 막혔을 때는 제2의 눈이 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선조로부터 이어온 육감이 있다. 덕분에 이스피리아의 위치는 손에 잡힐 듯 훤했다.


반대로 이스피리아는 이쪽의 위치를 잃었을 것이다. 인간에겐 짙은 안개 너머를 파악하는 힘 따윈 없으니 말이다.


이것이 프리에나의 전술. 호인족에게 유리한 환경을 만들어 내, 단숨에 목덜미를 물어버리는 것이다. 산속 환경을 재현해 낸 이 전장은 호인족에겐 안방과도 마찬가지. 인간이 상대라면 승기는 이미 굳은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앞선 전적들과 델리안의 충고가 있다.


무리하지 않고 프리에나는 이스피리아의 오른쪽을 돌았다.


이스피리아는 빈틈투성이였다. 시선도 정면으로 고정되어 있어 이쪽의 움직임을 완전히 놓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로 감각을 넓혀 주변을 파악하는 것 같지도 않다.


――호기다.


프리에나는 눈을 번뜩였다.


분명한 기회. 그렇지만 한 번 더 신중을 기해, 예측 당하기 쉬운 뒤가 아닌, 45도 옆에서 달려들었다.


‘상대의 저력은 전부 파악되지 않았어. 단기로 결착을 봐야 해.’


이스피리아에게서의 견제 따윈 전무했다.


사정 범위에 드디어 들어선 프리에나는 주먹에 마력을 담았다. 그리고 오른발을 크게 내디디며, 오른팔을 쭉 찔렀다.


발끝에서부터 전신의 힘을 끌어와 내지르는 붕권.


이것이야말로 프리에나가 펼칠 수 있는 최대의 일격이었다. 다만, 굉장히 동작이 큰 공격이니만큼 회피당할 위험성이 있었다. 공격의 진로가 직선인지라 더더욱.


하지만 지금처럼 시야가 가려진 환경에서는 그러한 걱정도 없는 일격필살이다.


강렬한 힘이 담긴 주먹을 따라 안개가 빨려 들어가며 소용돌이쳤고, 정확히 이스피리아의 왼쪽 옆구리에 작렬했다.


감촉이 있다. 제대로 먹혀들어 갔다. 확실하게 피부와 뼈를 때리는 느낌이 났다.


‘그런데······ 어떻게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상당한 힘이 실린 일격으로, 결코 살살 치지 않았다.


이스피리아의 체중이라면 날아갔어야 정상. 뼈와 살은 아작이나 땅바닥에서 꿈틀거렸어야만 했다.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체 뭐냐고!”


프리에나는 당황하며 잇달아 주먹과 발차기를 내질렀다.


주먹과 발을 내지를 때마다 확실한 감촉이 뒤따른다.


급소조차 가리지 않았다. 분명 적지 않은 타격이 있다. 그러나 프리에나는 멈추지 않고 더욱 격렬하게 공격을 잇달았다.


점차 초조해지는 것이다. 너무나도 태연히 맞고 있는 이스피리아를 보고 있노라면······.



“그러면――!”


프리에나는 뒤로 몸을 날려 안개 속에 숨었다.


그리고――



“――[게헤르 엘, 나의 선조가 함께 할지니].”

“하?!”


안개 너머, 이스피리아가 당황하여 소리를 높인다.



“······으응? 잠잠······하네? 마력이 떨어져야 하지 않나?”


‘게헤르 엘의 부름’은 비기인지라 아는 사람은 극소수―― 하물며 호인족도 현상을 모르는 자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스피리아는 인간이면서 확실하게 알고 있다.


‘즉, 그때 오빠가 싸운 상대는 리아겠지!’


전력을 다한 세스와 싸웠음이 거의 확실시 됐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틈이 생겼다.


대련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틈을 보인 것으로, 이스피리아는 주변은 안중에도 없이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떨어지지 않을 게헤르 엘의 마력을 기다리며······.


아까도 뒤를 내줬으나 이만한 빈틈은 아니었다.


정신조차 팔린 이 기회가 재차 찾아오진 않으리라.


프리에나는 몸을 낮춰, 어깨너비로 팔을 벌려 땅을 짚었다.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와 닮은 그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백호. 프리에나는 먹잇감을 사냥하듯, 기백을 죽이고 힘을 비축했다.


‘잡다한 재주는 됐어!’


그딴 건 통용되지 않는다는 걸 질리도록 확인했다. 상대는 역대로 방어가 단단하다. 그러니 최대, 최고의 일격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프리에나의 종아리와 허벅지가 부풀어 올랐다. 어깨의 승모근도 비대해졌다.


이윽고 최고치까지 도달했고―― 한순간에 해방했다.


한계까지 자세를 낮춘 프리에나가 전광석화처럼 쏘아졌다.



“[혈화낭조]――!”


한 줄기의 빛이 되어 육박한 프리에나는 엑스자로 손톱을 내리쳤다.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손톱은 흉악무도한 병기. 닿는 건 모조리 찢어발겨져 아름다운 피의 꽃을 피운다.


그렇기에 [혈화낭조]······.


대련이라는 것도 잊고 이스피리아의 가슴을 찢어발겼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끝이다. 하지만 방심은 없다. 프리에나는 이스피리아의 어깨를 밟고 빙글 돌며 등짝에 재차 날카로운 살수를 휘둘렀다.


사냥은 성공했다······.


땅을 끌며 가속을 멈춘 프리에나의 뒤로, 반응조차 못 한 이스피리아가 넝마 짝이 되어 널브러졌다.


화들짝 놀란 폴스가 급히 뛰어가 [치유]를 쓴다. 상처는 깊을 테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역시나 그런 거다. 세스는 역시 지지 않은 것이다. 그저 은혜를 입었기에, 다정하고 상냥하기에 이스피리아를 치켜 준 것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그래. 그랬어야만 해야 했다.



“오. 이거 놀랍구먼. 저 마력레벨로 이 속도가 나올 줄은······. 과연 세스의 동생이란 건가? 여러모로 대단하네.”


후웅――.


손짓하는 기척이 느껴지고, 돌연 태풍과 같은 바람이 불어 안개를 단숨에 걷어냈다.


그리고 드러난 이스피리아는······ 건재하였다.


조금의 상처도 없다. 긁히거나 스친 부분조차 없다. 입고 있는 의복조차도 찢어진 곳 없이 멀쩡했다. 아예 전투를 치르지 않은 듯 깨끗한 모습은 상상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고개를 돌려 이 모습을 본 프리에나의 얼굴에는 경악이 깃들었다.



“어······어, 떻게. 부, 분명 감각이 있었는데······.”

“마력의 갑옷을 두른 거예요. [무효]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 익숙해져 봤자니 방어 연습을 한 거죠. 오늘 이날의 경험과 지식이 훗날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정면으로 공격을 받아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 체크했는데······ 강도와는 별개로 개선할 점이 보이네요.”


순간적으로 맞기 직전에 마력을 두를지, 강도를 높여 마력의 소비를 줄이는 대신 충격을 몸으로 받아낼지 등등―― 개선점이라는 걸 중얼거리는 이스피리아.


흡사 산책이라도 나간 듯한 모습에선 아무런 경계심도 없었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간담이 서늘할 법도 했을 텐데 그러한 것도 없었나 보다. 평온하기 그지없다.



“음음. 훌륭한 검증이었어요. 환경을 유리하게 바꾸는 것도 기발했고 말이죠. 여태 굳이 그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터라 신선했어요. ······근데 혹시 이게 끝인가요?”

“······.”

“······그렇겠죠. 마력도 바닥나셨는데.”


이스피리아가 낙담했다는 듯이 어깨를 떨구었다.



“적청에―― 시간에 닿을 정도로 빠른 건 좋지만, 단발성이라 아쉽네요. 차라리 속도를 낮추더라도 2~3의 연격이었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저도 여러 가지 더 체크할 수 있었을 거고요. 1단계 마력인지라 위력도 조금 약하지만······ 뭐, 하지 못하는 걸 바랄 순 없겠죠. ······그보다 그 발동어는 뭔가요? 세스가 했던 게헤르 엘의 부름이었나? 그거 같았는데, 보니까 그냥 능력향상 버프네요? 효과는 상당하지만······.”


다 알면서 뭘 묻고 있단 말인가.


게헤르 엘의 부름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발동어는 그냥 세스가 하기에―― 이미지하기 쉬워 인간처럼 발동어로서 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이스피리아가 말한 대로다.


그저 따라할 뿐인 이 유사 게헤르 엘의 부름도 엄청난 능력의 향상이 있다. 이미지한 대상이 세스, 언제나 바라봤었던 그의 뒷모습이기에 그건 당연했다. [전능력증강]을 넘어, 일부만 가능하다는 [전능력초증강]에도 이른다.


다만 분에 넘치는 힘인 만큼 마력의 소모가 극심하다. 안개를 만든 것도 있어 마력이 바닥을 긴다. 무리한 대가로 인해 전신의 근육도 비명을 지른다.


전투 속행은 불가능이다······.


프리에나는 구부러지는 허리를 무릎을 짚어 가까스로 지탱하며 이스피리아를 쳐다봤다.


작가의말

오랜만임다!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어 진짜 기쁩니다.

오늘은 2화를 준비한지라 정식 인사는 다음화에서 하겠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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