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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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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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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9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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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207

DUMMY

“전하, 준비되었습니다.”

“음.”


명상에 잠겨있던 레오노반은 조용히 다가온 전속 사용인, 파세에게 고개를 끄덕여 짧게 치하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꽤 성의 없는 답례임에도 그녀는 무척 기뻐하는 기색을 흘린다.


성실하군.


눈을 뜬 레오노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런 제1 왕자를 뒤따르는 건 파세와 그리고 6명의 사용인 전원이었다. 자국인지라 호위를 위한 근위병은 데리고 있지 않다.


베르다드는 1명의 사용인만을 데리고 다니도록 하나, 그 외에는 몇 명을 두둔 상관없다. 어리다 하더라도 왕자. 곁에서 수발을 받들 인원은 많이 필요로 했고, 소베르비아도 품위유지와 기타 꿍꿍이들을 위해 상당수의 사람을 대동했다. 물론 공간의 물리적인 한계 때문에 무한정 데리고 올 순 없지만.


그리고 왕자나 공주 같은, 직책이 높은 이들에겐 반드시 있는 집사가······ 레오노반에겐 없었다.


쫓아낸 것이었다. 집사로서 언제나 주인에게 바른 조언을 한다는 이유로······.


‘실로 한심한 짓을 했지.’


진정 가치 있는 자가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음이 한탄스럽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음은 물론이고, 쫓겨나기 직전까지도 자신의 안위를 염려하던 그를 떠올리니 더욱 아쉬움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생각 이상으로 울적해진다. 무심코 한숨이 나올 정도로.



“전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제1 왕자로서 당당히, 아무도 없음에도 부끄럽지 않을 자세로 복도를 나아가던 레오노반은 슬쩍 뒤로 시선을 움직였다.


드문 한숨에, 그것도 이런 자리에서 한숨을 쉬어 착각했나 보다.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파세가 눈을 번뜩였다. 자못 심각하다.


저래 보여도 파세는 상당한 강자. 괜히 왕자의 전속으로 오랫동안 있었던 게 아니다. 그녀는 가사, 전투, 외모 등등, 이전 어리석었던 때의 자신이 보더라도 버리는 게 아까울 정도로 전반적인 능력이 출중했다.


그녀만이 아니라 남아있는 전원이 그러하다. 어디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인력들뿐이다. 충성심은······ 여태 남은 것으로 보아 말할 것도 없고.


‘아아······. 생각할수록 자괴감만 드는구나.’


몸 안을 내달리는 창피함을 감추며, 레오노반은 덩달아 긴장감을 끌어올리는 모두를 말렸다. 간단히 손을 올리는 동작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전원 그 즉시 경계심을 거두었다.


이토록 충직한 신하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양심 이전에, 위에 선 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레오노반은 짐짓 목청을 가다듬었다.



“어리석었던 지난 날의 행동을 반성한 것이다. 그러니 너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된다.”

“화, 황송합니다.”


여태 한 번도 없었던 일에 다들 당황한다. 그러나 추태를 부릴 수 없다는 듯 기품있게 예를 취했다. 오로지 모시는 자를 위한 일념 하나만으로······.


‘이만한 자들을 놔두고······.’



“하아. 새삼 내 눈이 옹이구멍이었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구나.”

“염려하시는 일이라도······?”


재차 이어진 한숨에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파세가 조심히 물어왔다.



“그냥 아까운 짓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의 주변엔 이리도 우수한 신하들이 많았거늘, 그걸 제 손으로 내치다니. 실로 한심하지 않은가.”

“저······, 그러면 재차 손을 내밀어 보심은 어떠십니까?”


깜짝 놀란 레오노반은 무심코 멈춰 돌아봤다.



“지금 뭐라······?”

“주, 주제넘은 말을 드렸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재차 손을 내민다고 하였느냐?”


질책하는 게 아님을 알고 파세는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은 너무나 조심스러워 레오노반의 마음을 다시금 깎아내렸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기에 참고 파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모두가 반기진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부는 아쉬운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을 겁니다. 아니, 반드시 그러할 겁니다. 전하께서 자책하셨다면 더더욱.”


상당한 충격이 레오노반의 안을 달렸다.


왕족으로 자라고, 배워왔던 레오노반으로서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그가 있는 세계에서는 버린다는 건 곧 끝을 의미했다. 거두어 다시 쓴다는 건 있을 수도 없다. 어느 왕족이 그러하겠는가.


사치의 극치지만 어쩔 수 없다. 지배자로서 권위와 위엄을 보이는 데에 필요한 일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면 좋겠다만, 대부분의 자는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했다. 그러니 적나라하게 보여줘야만 했다. 누구나 쉽게 알아먹을 수 있도록.


현재도 그러한 의식이 딱히 달라진 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입된 가치관이 돌연 변할 리가 없으니. 게다가 납득하고 있다. 왕족의 영향력이 작아진다는 건 나라가 혼란해진다는 소리이고, 이는 곧 멸망을 의미하니 말이다.


하지만 예외는 존재했다. 유서 깊은 명화나 가보의 경우 그것을 거두는 경우는 흔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현자와 같은 유능한 인물이라면 과거 이력이 어떻든 포섭한다.



“그런가. 그런가······. 아쉬워만 할 때가 아니었군. 좋은 충언이었다, 파세.”

“화, 황송합니다, 전하.”


고개를 숙이는, 기쁜 기척을 흘리는 파세를 힐끔 쳐다본 레오노반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멈췄던 걸음을 재차 움직여 서쪽 기숙사를 나왔다. 향하는 곳은 마차장.


한창 걷고 있으니 기합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작게 들여온다.



“리아 양의 공부 모임인가······.”

“예. 남은 분들을 위해 퍼스트 님께서 모임을 맡아주신다고 합니다.”

“전부터 계속하고 있었지만 말이지.”

“그러합니다.”


물러나는 파세를 보며 레오노반은 생각했다.


어찌할까······.


금세 결론을 낸 레오노반은 잠시 들러보기로 했다. 아까운 것이었다. 현재 베르다드에서 건국왕이 세운 설립 이념에 가장 가까운 저곳을 그냥 지나친다는 게······.


당연히 방해할 마음 따윈 없다.


레오노반은 왔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으려 조용히 상급 훈련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내다봤다.


리아가 만든 모임은 마치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하는 중으로, 여기저기 번뜩이는 빛과 함께 우렁찬 기합이 울려 퍼졌다.


보통 저러한 대련은 하지 않는다. [치유]의 비용이 너무나도 막대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재정이 넉넉한 베르다드라지만 하나하나 일일이 [치유]를 받는다면 금방 거덜 날 것이다.


달라진 건 최근 인도의 주교, 인디아 빌 쿠리스리움이 베르다드에 방문하고부터였다. 그의 명령으로 치유사들은 더는 바가지를 씌우지 않게 됐다.


실로 뻔뻔한 작태였지만 덕분에 베르다드뿐만이 아니라, 아네픽시르에선 치유사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리카드는 아예 치유사를 베르다드에 상주시켜 부려먹는 등, 이때를 기회라 여겼는지, 여태 실시하지 못했던 실전 수강들을 다시금 재개했다.


‘뭐,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저곳엔 리아 양의 [치유]가 있으니 상관없지만.’


레오노반은 슬쩍, 단 한복판에 설치된 수정의 조형물을 쳐다봤다.


저것의 목적은 알림. 저 수정이 붉은빛을 내뿜으면 [치유]가 발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충전까지는 최소 하루. 그전까지 위험한 대련은 하지 말라고 리아가 만든 표식이다.


하지만 저 수정이 붉은빛을 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당연히 별로 [치유]가 발동하지 않아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처음은 그랬을 수도 있다. 효과의 검증이 되지 않았으니 다들 반신반의하여 몸을 사렸을 테니. 하지만 그리모르가 적극적으로 나서 퍼스트와 대련하였고, 매번 만신창이가 된 그가 직접 몸으로 효과를 증명했다. 리아가 부여한 [치유]는 1급 신관 못지않은 위력을 지녔다고.


이후에는 다른 이들도 제법 적극적으로 변했다. 상대가 다치지 않을까 조심하는 행동은 버리고, 마치 적을 상대하는 듯 온 신경을 집중하여 대련에 임하게 됐다.


그 탓에 선혈이 낭자하는 등, 눈살이 찌푸려질 과격한 광경들이 그려졌다. 심약한 교수의 경우 너무 심하지 않냐며 탄원서를 냈다고도 한다.


그러나 리카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사자들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며······.


본인도 아는 것이다. 실전에 매우 가까운 이 대련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경험이 되는지를.


실제로 이 모임에 참가한―― 아직까지 남은 이들의 실력은 나날이 일취월장했다. 구경하던 3학년이 재밌어 보인다며 참여, 1학년과 대련에서 간신히 승리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비록 졌다고는 하나 1학년이, 그것도 하급반인 학생이 상급반의 성적 우수자와 종이 한 장차의 승부를 낸 것이다. 성과는 확실했고, 이후 누구도 리카드의 결정에 반박하지 않게 됐다.


더불어 그때 대련을 한 3학년을 비롯, 기사 지망생인 하급 귀족들이 모임에 참가하게 됐는데,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르다드를 떠나지 않고 지금도 참여하고 있다.


리카드는 이들을 배려하여 개학까지 지내도록 허락하였고, 일부는 연구원 과정을 밟아 그대로 남게 됐다.


‘저 분위기를 보면 차후 더 늘어날 것도 같군.’


저들도 점점 떠나기엔 아쉬우리라. 이만큼 자신을 발전시키는 데 최고인 곳도 따로 없으니. 더군다나 작위도 이을 수 없는 하급 귀족은 돌아가 봐야 평민과 같은 삶을 살 뿐이다. 베르다드에 남는 편이 미래를 위한 길이란 생각이 클 것이다.


퍼스트 같은 어마어마한 지도자를 재차 리아에게 만들어달라는 건 무리라는 건 알지만, 마음 같아서는 마법 실습장이나 다른 훈련장에도 [치유]를 부여해달라 부탁하고 싶다.


타국의 자제들도 함께 뛰어나지는 건 달갑지 않다. 그러나 베르다드의 명성이 오르면 벨루디스로선 반겨 마지않을 희소식. 정말로 한 번쯤 부탁해보는 건 어떠려나 한다.


‘리아 양이라면 기꺼이 청을 들어줄 듯하나 그래선 안 되겠지. 아직은······.’


레오노반은 한동안 훈련장을 차분히 내려다봤다.


보면 볼수록 참으로 이질적인 광경이다. 피 튀기는 것도 그러했지만, 분위기가 특히 더 그러했다.


서로 죽일 듯 무기를 들이댄 상대이지 않은가. 그런데 대련이 끝나고 난 뒤에는 지금의 것은 좋았다며, 화기애애하게 떠는 게 실로 신기하게 비쳤다.


저곳에 신분은 없었다. 부정적이거나 꺼리는 기색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누구 하나 신분 따위를 따지지 않고 평민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나라마저 초월한 듯 보이는 저들에게 존재하는 건 전우와 같은 동질감만이 전부였다.


참으로 설명하기 힘든 광경이다.


남작은 원체 직급이 낮은 터라, 그 자제는 평민과도 그리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귀족은 귀족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평민과는 분리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하건만, 놀라움은 더 해간다. 왜냐하면 저들 사이에는 백작 가의 자제도 몇 있었기 때문이다.


타국이기에 돌아가기보단 남는 것을 택한 듯한데, 그들 또한 같았다. 평민이라고 깔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비록 치료된다고는 하나, 본인의 피를 흘리게 한 이들이건만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호의만이 넘쳐흐른다.


‘그래······. 저것이야말로 정답이다. 능력에 귀천 따윈 없거늘.’


귀족은 분명 평민들을 다스리는 존재다. 하지만 무학이 많은 평민일지라도 바보는 아니다. 누가 자신을 위해주는지 정도는 안다.


콧대만 빳빳이 드는 귀족과, 같은 시선, 같은 눈높이에서 말을 섞는 귀족.


둘 중 어느 쪽을 따르겠는가. 불 보듯 뻔하다.


물론 선을 넘는다면 그건 문제겠지만, 저들의 분위기로 보면 그러한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친근하게 대하고는 있으나 평민들도 제대로 경의를 갖고 귀족들을 대하고 있었다.



“파세, 저자들은 모두 함께 방어전을 치른 사이인가?”


망설임 없이 파세는 즉각 대답했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만, 아닌 분들도 계십니다.”

“귀족은?”

“셋입니다.”

“벨루디스는?”

“조르조 남작 가의 적자가 있습니다.”

“호오. 서자도 아니고 적자인가······.”


남작이기는 해도 적자라면 사리 분별할 정도의 정치 감각은 있을 터. 그런데도 굳이 베르다드에 남으면서까지 참가했다는 것에 제법 감탄했다.


좋은 관람을 했다.


누구인지 확실히 머릿속에 새기고, 레오노반은 몸을 돌렸다.


그렇게 한 걸음을 뗐을 때였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돌연 한 남자가 나타났다. 레오노반이 느끼기에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듯했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한순간에 나타난 남자의 정체는 퍼스트.


갑옷의 철그렁 소리조차 내지 않은 그는 기사다운 태도로 묵례했다. 곧장 앞을 막아서는 사용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당당히. 무척이나 여유롭게.


어투 하나만은 분명 정중하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무가치한 벌레를 대하듯 하다는 것을 레오노반은 알아챘다.


무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레오노반은 모두를 물러서게 하고 그의 앞에 섰다.



“잠시 구경하러 들렀을 뿐이라네. 상상도 못 했었던 진귀한 장면이니 말일세.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다는 기분이 들었지.”

“영광입니다.”


이번에도 말뿐인 예를 취하는 퍼스트. 그러나 개의치 않고 레오노반은 흡족하여 고개를 주억거렸다.



“훌륭하더군. 앞으로 베르다드는 점차 변해가겠지.”

“말씀대로. 최근에는 마법사분들도 훈련에 참여해도 되겠냐고들 물어 옵니다. 방어전에 참가하셨던 분들 이외에도.”

“오호. 그들도 대련을 하는 겐가?”

“대련이랄 것도 못됩니다.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워낙 발동 속도가 늦는 터라. 1:1로 마주했을 시 대책을 강구하는 게 주된 훈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긴 마법사는 전위를 세우는 것을 기본으로 상정하니.”

“나름 성과를 얻는 듯도 하지만,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는 데까진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런가.”


굳이 방어전을 언급하는 모습으로 보아 퍼스트는 이쪽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 듣고 있었으리라. 그러니까 돌아가는 순간 모습을 드러냈겠지. 문득 알아차린 건 분명 아닐 것이다.


보기와 달리 꽤 능청스럽다.


그러나 무슨 상관이랴. 벨루디스엔 긍정적인 성과들만 나고 있거늘.



“다만, 이러한 성과들은 모두 리아 양이 있었기에 이루어낸 것이겠지······.”

“그렇습니다.”


중얼거린 것이었으나 들렸나, 퍼스트가 맞장구를 쳤다. 거기엔 굉장한 자부심과 함께 주인을 향한 끝없는 경외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여러모로 분하군. 하지만 리아 양에게 뒤처져 있을 수만은 없지. 벨루디스의 제1 왕자로서.’


레오노반은 피식 웃고는 작별을 고했다.



“이만 실례하네, 퍼스트 경. 바쁜 시간을 뺏었네.”

“왕성으로 가십니까?”


행선지를 묻는 건 결례지만 레오노반은 선뜻 답했다.



“그렇다네.”

“이런······. 괜한 발걸음을 붙들었군요.”

“그리 늦지도 않았고 괜찮다네. 애당초 내가 이곳을 들른 것이기도 하고.”

“······.”


지긋이······. 품평하는 눈으로 퍼스트가 쳐다본다.


뭔가 실수했나 싶어 레오노반은 내심 당황했는데, 이윽고 퍼스트에게서 의외의 말이 나왔다.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발을 묶은 책임이 있으니 확실하게 왕성까지 이동시켜드리지요. 물론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갑작스러운 제안에 사용인들이 흠칫했다. 그만큼 평범하게 생각하면 당연히 거절할 제안이었다. 안위의 문제도 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하지만 레오노반은 느긋하게 말했다.



“부담되지 않는다면 배려에 따르겠네. 다만, 모임 쪽은 괜찮은 건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일순간인지라. 마차장에 계신 분들도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까?”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 발언이었으나, 레오노반은 군말 없이 슬쩍 파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 직후······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혹시 마법에 당한 것인가 싶어 의심한 것도 잠시, 머릿속에서 웬 목소리가 들린다.



『뭐, 뭐지?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데.』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의 이야기로 레오노반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레오노반 디안 벨루디스다. 그대는 내가 탈 마차의 마부렷다?』

『어? 저, 전하이십니까?』

『그렇다.』


놀라는 그에게 레오노반은 착오가 생겼다며, 수고스럽지만 돌아가라고 일렀다.


마부는 이에 따른다고 했다. 어지간하면 사칭은 하지 않을 테니 반신반의하면서도 명을 들은 것이다.


‘그러면······ 마차도 돌려보냈겠다. 이젠 어찌할 셈이지?’


굳이 4급에 달할―― 그것도 무영창으로 상호통신 마법까지 써주어 돌려보내게 한 것이다.


아무 생각이 없진 않을 터. 어찌 왕성까지 갈지 상당히 궁금했다.


그런 레오노반을 보며 퍼스트는 상긋하게 눈웃음쳤다.



“전하는 벨루디스 폐하께, 사용인 분들은 근처 대기실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어, 그렇다네.”


묻는 의도를 몰라 엉겁결에 답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풍경이 바뀌어 있었다.


시야에 비치는 건 많은 서류와 책, 지도들이 테이블에 펼쳐진, 고고하게 잘 꾸며진 실내.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두 명의 사람이었다.



“아바마마······ 벨페르 공작?”

“레, 레오노반?! 어, 언제 왔느냐? 아, 아니, 어떻게 왔느냐?! 아무런 기별도 없이!”


기별이라면 진작에 넣었고, 지금 만나기로 제때 약속되어 있었다.


자신보다 더 놀라는, 지리멸렬한 물음에 도리어 레오노반은 침착해졌다. 그리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됐다.



“하하······. 이거 참. 엄청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말 상식을 뛰어넘는구나.”

“――무, 무어냐? 제대로 말해 보거라, 어서!”


다그치는 아크티알을 일단 진정시키고, 레오노반은 어떻게 자신이 이곳―― 국왕의 집무실까지 왔는지를 알려줬다. 자초지종부터 천천히······.



“고, 공간이동이라고?”

“소자도 정확히 알지 못하나, 아마 그런 부류의 마법이지 않을까 합니다.”


원초마법을 쓸 수 있으니 안다. 마법에는 비슷한 효과를 지닌 무수한 마법이 있다는 것을. 그러니 얼추 그러하지 않나 같은 애매모호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크티알은 재차 놀라며 입을 벌렸다. 마법에 식견이 있던 벨페르는 바로 수긍할 수 있었는지 길게 신음을 흘렸다.


7급에 달한다는―― 인간이 쓸 수 있는 마법의 종착지를 두 눈으로 봤다는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덕분에 대화가 가능할 상태로 회복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소요됐다.


어느 정도 진정됐던 아크티알은 소파에 등을 기대어 이마를 쓸었다.



“골렘마저 이만한 능력을 지녔다니······. 경악스럽기 그지없군.”

“폐하, 얼추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보다 이건······.”

“그래. 어쩌면 일종의 경고일 수도 있겠어, 벨페르.”

“경고······.”


레오노반은 무심코 중얼거렸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아크티알과 벨페르가 진지하게 분위기를 바꾸었다. 그리고 각자 평소대로 돌아온 둘은 시선을 주고받았다.


목청을 가다듬은 아크티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을 보자 한 연유는 무엇이더냐?”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시겠다는 건가.’


묘하게 신중하다. 뭔가 평가한달까, 시험하는 느낌이다.


딱히 기분 탓만은 아닌가 보다. 벨페르가 진중한 태도로 말을 아끼는 게 아니겠는가. 분위기도 평소보다 다소 날카롭다.


‘짚이는 거라고는 데인의 일인데······ 그것만으로 이러진 않을 거 같다만.’


짐작이 안 된다. 하는 수 없으니 생각하는 걸 포기하고 레오노반은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 오늘 제가 뵙자 한 것은 레온하트 때문입니다.”

“레온하트가 어떻다는 것이냐?”

“아시지 않습니까?”

“알렌나시안 후작―― 마르티즈 후작 파벌에 몸을 담근 걸 말하고 싶은 게냐?”

“예.”

“그건 나도 제법 염려하는 부분이다. 후작의 욕망은 끝이 없으니. 왕가에 이를 드러낼 수도 있겠지.”

“그렇습니다.”

“하나, 딱히 문제 될 건 없지 않으냐?”

“지금······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놀라 묻는 말에 아크티알은 평온하게 힘을 빼 소파에 기댔다.



“한평생 제 세력을 갖지 못했던 아이가 아니겠느냐? 네가 버린 후작 파벌을 보니 취하고 싶은 욕심이 들 법도 하겠지. 어쩌면 제 나름대로 반기를 들지 못하게 고삐를 쥐려 한 것일 수도 있고.”

“가만히 놔뒀으면 그대로 와해했을 파벌입니다! 취하려거든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았습니다!”

“네가 있지 않더냐? 흩어진 파벌이 네게 흡수당할까 조바심이라도 났겠지.”

“폐하!!”


참지 못하고 레오노반은 테이블을 내려쳤다.


너무나도 안일하다. 어째서 이렇게 느긋할 수 있단 말인가.



“혼란한 현 정세에 필요한 건 단결된 하나의 세력입니다! 분단되어 다툼이나 벌일 때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 네가 왕위를 포기하고 레온하트를 지지하면 되지 않겠느냐.”

“그것으로 이 벨루디스가 부강해진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지금의 레온하트에겐 그럴 수 없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살짝 입까지 벌리고 멍하니 쳐다보는 아크티알. 그보단 덜하지만 맹한 기색의 벨페르.


어딘가 이상한 둘은 화들짝 기색을 가다듬었다.



“흠. 레온하트가 어떻다고?”


갑자기 공기가 무거워졌다. 찌르르 떨리는 듯한 무게감을 지닌 이 물음은 일국의 국왕으로서 한 것이었다.


‘설마······. 지금의 것들은 시험이었나?’


아크티알이 보고 싶었던 것은 진정 벨루디스를 염려하는 마음. 아마 이를 확인하기 위해 태평한 척 굴며 떠보았던 것이리라. 그게 아니면 이 변모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조금 허탈했던 레오노반은 손에서 힘을 뺐다. 그렇지만 정신은 꽉 붙들었다.


시험은 통과한 듯하나 긴장을 놓을 순 없다. 이제부터가 진짜다.


꿀꺽 침을 삼킨 레오노반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신하로서 신중히 말을 골랐다. 국왕에게 함부로 허튼소리를 상고할 수는 없으니.



“우선 여쭙겠습니다만, 폐하께선 최근 레온하트를 만나 보셨습니까?”

“안 그래도 후작 파벌의 일로 호출을 했었다.”

“그때 뭔가 느끼신 게 없으십니까?”


아크티알은 힐끗 벨페르를 쳐다봤다. 그리고 벨페르는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이상함도 못 느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군.”

“정말 평소와 다른 점이 없었습니까?”

“짐이 볼 땐 그러하였다. 되려 의젓하여 믿음직스럽기만 했다.”

“예. 그건 소자가 느끼기에도 그러하였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그 모습은 한 꺼풀 허물을 벗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직스러운 면모엔 무엇이 존재하는지, 혹시 아십니까?”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이더냐.”

“레온하트가 변한 건 분명합니다. 왕자로서 손색이 없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요. 더군다나 인망도 높습니다.”

“따르는 자들은 그대가 훨씬 많을 텐데?”

“아첨이나 떠는 무리를 과연 따른다고 할 수 있겠나이까?”

“아니. 되려 눈을 흐트러뜨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러합니다. 그에 비해 레온하트의 곁은 진정 심장을 바친 충신들뿐. 평민들도 방어전을 치른 이들부터 시작하여 경외를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머리를 숙이는 소자와는 달리. ······솔직히 지금의 레온하트라면 왕위를 양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꾸밈없는 본심이렷다?”

“찬란한 이 벨루디스를 더욱 잘 다스린다면야 기꺼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왕위를 내놓겠나이다, 폐하.”


아크티알은 숨을 삼켰다.



“무엇이 너를 이리 변하게 했느냐?”

“황송합니다만, 소자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백성은 하찮지 않다――. 너무나도 당연한 그것을 깨달았을 뿐입니다.”


잠시 내려다보던 아크티알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게 물었다.



“······왕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지배자. 나라를 부강하게 끌어가야 할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건 백성을 억압하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왕족은 백성들이 더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게 보살펴, 보다 나은 환경을―― 국가를 만드는 것이 그 역할입니다.”

“너의 말이 백번 지당하다. 지배자에 따라 국가는 흥망성쇠가 엇갈린다. 그러하기에 비정한 결단이라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 다만, 그 모든 건 백성과 벨루디스를 좋게 이끌기 위함이다. ······그런데 레온하트는 아니란 말이렷다?”


서글픔이 느껴지는―― 아버지로서의 슬픔이 묻어나는 말에 레오노반은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현재의 레온하트는 왕족의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왕자의 본분은 잊고, 사사로운 감정으로 휩싸여 책무는 안중에도 없을 겁니다······.”

“사사로운 감정이라 함은?”

“――질투. 레온하트는 리아 양―― 이스피리아 공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모한다는 건······ 아니로군.”


그렇다. 단순히 사모할 뿐이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왕족도 사람이다. 좋아한다는 것을 뭘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 왕들의 일대기를 보면 사용인이나 교사, 마을 처자를 마음에 담았다는 소리도 제법 있는 판국에.


표현하지만 않으면 된다. 조용히 마음에만 품고 지내면 어떠한 탈도 없다.


다만, 상대에 따라서는 마음에 품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되기도 한다.


레온하트가 사모하는 사람은 많고 많은 상대 중에 유부녀인 것이다.


귀족 사회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첩을 두는 건 제법 흔하다. 그렇지만 최고 국빈을 상대로, 그것도 자식마저 있는 여성에게 첩으로 들여달라 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예 남편을 버리고 재혼하자는 건 더욱 있을 수 없고.


신분에 따른 책임도 있는 것이다.


결례도 이만한 결례도 없다. 그냥 대놓고 싸움을 거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왕족으로서 그러한 위험성을 어떻게 떠안고 지내겠는가. 깔끔하게 마음을 접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에 교육―― 미인계를 떨쳐내기 위한 실습도 사전에 해둔 것이었다.


하지만 레온하트는 전혀 떨쳐내지 않았다. 그런 낌새도 없이 되려 커다랗게 부풀리고 있었다.



“아직 겉으로 드러내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한데, 그 시커먼 부의 감정으로 보아······ 그리 오래가진 않을 겁니다.”

“정말 그렇게 느꼈다는 것이냐?”


레오노반은 단호히 그렇다며 답하였다. 그러자 약간의 시차를 두고 풀썩, 아크티알과 벨페르의 고개가 떨궈졌다.



“벨페르······.”


골이 아프다는 아크티알에게 벨페르 또한 골이 아프다는 어감으로 대답했다.



“폐하께서도 보셨다시피. 차마 거짓이라고는······. 게다가 전하가 출중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 고하신 말씀대로겠지요.”

“노리는 건?”

“이스피리아 양을 손에 넣는 것 말고 뭐가 더 있겠습니까?”

“역시나 그런 건가······.”


근엄함조차 사라진 아크티알은 거한 한숨과 함께 이마를 짚었다. 벨페르도 딱히 행동하는 건 없었으나 머리를 부여잡고 싶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겨왔다.



“저, 아바마마. 이런 말씀 드리기는 그렇지만, 신용해주시는 겁니까?”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다. 아크티알의 입장이었으면 도리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음해로 여길 소지가 충분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낌새조차 없어 상당히 놀랍다.


그런 레오노반을 곁눈질로 문득 본 아크티알은 헛기침과 함께 자세를 정돈했다.



“같은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었다.”

“저 이외에 말입니까?”

“소베르비아다. 공주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라며 충고했었다. 자칫 큰일로 번질 수 있다고.”

“아······.”

“알고 있었느냐?”


순간 눈매가 날카로워지는 아크티알을 보며 레오노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훈식이 있던 날, 공주의 행태와 여러 정황을 보아 동맹관계임을 알아차렸습니다. 행사 내용 또한 모두 그녀의 스토리였다는 것도.”

“그렇다. 그때의 행사는 모두 소베르비아가 준비한 무대였다.”


이렇게나 순순히 밝힐 줄은 몰랐던 레오노반은 흠칫 몸을 떨었다.



“벨페르, 이야기가 길어질 거 같다.”

“이후 일정을 미뤄두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표한 벨페르는 곧바로 아티팩트를 사용해 국왕의 일정을 조율한다며 알렸다.


그저 동생의 동태를 알리러 온 것이었던 레오노반은 당황했다. 그렇지만 끼어들진 못하고 얌전히 지켜봤다.


그렇게 벨페르가 일정을 무사히 조율하고, 아크티알이 서두를 뗐다.



“자, 그러면 시작하지.”

“실례이오나, 아바마마. 무엇을······?”

“당연히 우리 벨루디스의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겠느냐?”

“······예?”

“그러고 있을 게 아니다. 어서 앉거라.”


어리둥절 자리에 앉으니, 잠자코 보고 있던 벨페르는 주군의 뜻을 따르겠다는 신하의 예를 보였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길래.


궁금해하는 레오노반을 보며 입꼬리를 올린―― 무척이나 오랜만에 아들의 앞에서 미소를 보인 아크티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물으마. 네 바람은 무엇이더냐?”


의도가 짐작되지 않았으나 레오노반은 머리에 떠오르는 그대로를 솔직히 고했다.



“소자의 바람은 하나. 못났던 소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준 파세와 신하들의 믿음을 보답하는 것. 오직 그것뿐입니다.”

“왕위를 계승하고 싶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소자의 신하들이 맘 편히 지낼 수 있는 국가―― 세상을 만들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를 실현할 수 있다면야 왕위는 어찌 되어도 좋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진심이었다. 정말로 파세들이 걱정 없이, 편히 살 수만 있다면 미련 없이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할 속셈이었다.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 바라고, 당연시했던 왕위였거늘. 지금은 하나의 수단, 그 이상도 이하의 의미도 남지 않았다니. 언제 자신은 이리도 소박해졌단 말인가.


아크티알들이 달라졌다고 착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스로도 자신의 모습이 꼴사납다 여길 정도이니 말할 것도 없다. 레오노반이라는 인간을 아는 자라면 반드시 모두가 변했다며 착각할 것이다.


그러나 레오노반은 만족스러웠다. 이것도 결코 나쁘지만은 않다며······.


‘실로 알 수 없는 세상이로구나.’



“그런가······.”


여운을 길게 끈 아크티알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중대한 것을 결단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너무나도 놀랍고 놀라운, 경악스러운 사태를······.


이야기는 제법 길게 이어졌는데, 모두 들은 레오노반은 입을 벌리고 더듬거렸다. 아니,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사태였다.



“아, 아바마마, 진정 사실입니까?”

“우리가 직접 확인한 건 없다. 그러나 라프리트와 소베르비아가 알린 것이다. 굳이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면 사실이라 봐야겠지.”

“하, 하지만······.”


레오노반은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아크티알이 놀리기 위해 농담했나 싶다. 그러나 분위기도 그렇고, 벨페르의 심각한 얼굴을 보면 아무래도 그건 아니리라.


‘그렇군. 앞선 확인 작업들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나.’


만약 아크티알이 바라는 사상과 동떨어졌었다면 그저 이야기만 듣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신뢰를 얻은 건 좋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벌써 비밀 공작부대의 제1 위상이 죽었다고도 하고.


리아가 죽였다고 하는 것엔 별로 놀라움은 없었다. 그녀라면 가차 없었을 거란 기분마저 든다. 왠지 모르게······.



“사로잡았다는―― 초대 국왕님으로 변했다는 도플갱어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바마마.”

“이스피리아가 풀어줬다고 하더군. 동포들을 만류하겠다는 말을 듣고.”

“그렇습니까······.”

“안일하단 생각은 안 드느냐?”

“당연히 안일합니다.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믿고 풀어준다니. 어리숙해도 너무 어리숙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도플갱어를 잡은 것은 그녀. 어떻게 처리할지 정하는 건 그녀의 몫이겠지요. 아니면 항의하시겠습니까?”

“그런 게 가당키나 할 리가.”

“예. 그녀와 관계가 틀어지면 벨루디스에는 손해밖에 없습니다. 그저 사건을 미연에 방지해준 것과 이를 알려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겁니다.”

“그렇지······.”

“뭐,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그녀는 기회를 준 것이라 여겨지니. 나서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그 도플갱어만큼은 확실하게 제어할 겁니다.”


게다가 넘겨받는다 한들 할 수 있는 게 없다. 건국왕으로 의태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겉모습만 따라 한 게 아니다. 역량마저도 상당히 비슷하다는 것이다.


464라는, 인류의 정점에 거의 다다른 마력레벨인 자를 어떻게 제어하겠나.


제압당했다고 한들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리아니까 가능한 거다. 오히려 넘겨받지 않은 게 다행일지 모를 일이다.


정보는 얻을 만큼 얻었다. 굳이 위험한 폭탄을 넘겨받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만큼이나 발설했으니 숨기는 것도 거의 없을 테고 말이지. 어쩌면 리아 양은 이 모든 걸 예상하고 풀어줬나? 그렇다면 거의 확실하게 안전장치도 해두었을 거란 생각도 드는군.’



“하지만 다른 도플갱어들은 어찌 대처해야 할지. 레온하트도 저런 마당에······. 얌전히 있어 주면 좋으련만―― 응? 아바마마, 갑자기 든 생각이옵니다만, 혹시······?”

“아니다. 레온하트는 암시에 당하지 않았다. 데인과는 달리.”


단호한 아크티알.


제법 의외의 답변이었다. 그리 변모한 모습에는 반드시 암시가 개입했을 거란 예상이었는데.


다만 그렇다는 것은 암시를 확인할 수 있는, 혹은 암시를 풀어내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효과는 데인을 통해 검증했으리라.


그 예상대로였다. 조금 지친 듯한 얼굴로 아크티알은 이를 말해줬다.



“왕가에 전해져오는 보물이 있다. 전설급의 아티팩트지. 능력은 도플갱어의 감지 및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의 해주다.”


근데 레온하트에겐 반응이 없었다는 것이겠지.



“예전에는 왜 이런 아티팩트가, 그것도 보물로서 은밀히 전해지는 것인지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도플갱어는 진작에 멸종했다 알려졌으니. 하지만 이때를 위해 선왕들이 대비한 것이겠지.”

“그토록 오래전부터 암약을······.”

“그럴만한 원한이지 않느냐.”

“현 벨루디스의 정세가 이리된 데에는 혹시······.”

“짐은 그렇게 믿고 싶구나. 책임이라도 떠넘기지 않으면 너무나 암울하니 말이다.”


아크티알은 씁쓸하게 얼굴을 구겼다.


국왕으로서 언제나 굳건하고 위엄이 가득했던 모습만을 보았던 레오노반은 덩달아 착잡했다. 본인이 저지른 짓이 있기에 차마 얼굴을 들기 힘들었다.



“폐하······.”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아깝지.”


곧장 다부진 표정으로 돌아온 아크티알은 진지한 시선을 보냈다.



“레오노반. 레온하트가 무얼 하려는지는 알고 있으렷다?”

“왕위를 계승하는 겁니다. 이스피리아 공을―― 그녀를 빼앗기 위해.”

“세력을 키우거라.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확고한 위치를 다져놓아야 한다.”


아크티알도 마음 같아서는 폭주하는 레온하트를 유폐하듯 가둬놓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겉으로 드러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유폐한다면 마르티즈 후작 파벌이 반발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얻은 동아줄을 잃을 수는 없을 테니.


즉,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위의 자리를 놓고.


현 벨루디스는 내부에서의 다툼은 극도로 조심해야 할 사항이다. 그러니 압도적으로―― 어떠한 이견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차이로 압승을 거두어야 한다.


확실히 말해 무리한 주문이다.


세력도가 역전당한 듯한 현재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의 레온하트는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다. 승리를 장담하긴커녕 패하지나 않도록 사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선택지는 없다.


레온하트가 가는 길의 끝은 정해져 있다. 그건 자신의 바람과 맞지 않는 일. 물러선다는 건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레오노반은 그 뜻을 담아 선언했다.



“폐하의 뜻에 따라 소자, 왕위에 오르겠나이다.”


아크티알은 벨페르가 건네는, 화려하게 치장된 예식용 검을 받았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뽑아 레오노반의 어깨에 검 끝을 가져다 댔다.


순간 아크티알이 웃었던 것 같은데 기분탓이였으려나······.



“레오노반 디안 벨루디스를 왕세자로 임명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왕위에 어울리는······, 백성 모두가 우러러보는 군주가 되거라, 레오노반 디안 벨루디스여.”

“예.”


짧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말하였고, 그렇게 레오노반은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았던 왕세자가 됐다.





“벨페르. 짐의 판단이 너무 섣불렀다 생각하는가?”


자신의 뒤를 이을 장남이 나간 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크티알은 물었다. 정말 벨루디스를 위한 일을 한 것인지를―― 한 명의 자식을 쳐내는 이 결단은 과연 옳았는지를······.



“아닙니다. 급변한 사태에 맞게 현명하고 신속한 성단이셨습니다. 전하―― 왕세자 전하께서도 잘 해내시겠지요.”

“그러한가.”

“예. 이후 도플갱어에 관한 대처를 묻지 않았을 땐 탄복했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파악하신 거겠지요. 본인이 암시를 당했을 시의 위험을. 분명 어진 군주가 되실 겁니다.”

“소베르비아의 말대로인가. 과연 공주는 여기까지 내다봤을는지······.”

“아마도. 전부 머릿속에 그렸을 것입니다.”

“실로 무서운 계집이로군.”


아크티알은 허벅지를 내려치며 일어났다.


언제까지 쳐질 순 없다. 자신은 국왕. 백성과 벨루디스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 따윈 버려야 했다.


무엇보다 자식에게 한심한 모습 따위를 어찌 보이겠는가. 온전히 외부에만―― 도플갱어에게만 집중할 수 있도록 내부를 맡아준 레오노반을 위해서라도 그래선 안 됐다.



“어느덧 이렇게나 커버렸구나.”

“폐하, 감상은 나중에······.”


여전히, 어떠한 때던 바른말만 하는 밉살스러운 충신은 오늘도 듬직하다.


‘사실은 그도 편치만은 않을 터인데.’


벨페르에게서 환한 미소가 사라진 지 얼마나 되었을까. 공작부인, 밀리아나와 언제나 화기애애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줄곧 곁에서 애쓴 그의 노고를 아는지라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이걸 때마침 이라고 할지······.’


결심을 한 아크티알은 집무실 벽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대충 적당히 선반에 놓인 반지를 꼈다.


반지는 [수납]이 부여된 아티팩트였다. 다만 여타 아티팩트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인증. 현대에는 해석조차 불가능한 정밀한 인증 시스템이 깃들어있다.


종래의 마법과는 완전히 다르기에 철통 보안. 인증된 사용자가 아니라면 절대로 열지 못한다. 더군다나 훔쳐 가더라도 속으로 떠올리면 곧장 손안으로 돌아온다. 만능은 아닌지라 하루에 딱 한 번만 가능하지만.


중요한 재보임에도 보관에 소홀한 건 그 탓이었다. 계속 끼고 있기에도 불편하니 적당한 곳에 둔 것이다.


······물론 안에 든 물건은 이런 취급을 당할 정도로 전혀 가볍지 않았다. 전부 국왕에게만 내밀히 전해지는 보물들이니까. 앞서 도플갱어를 감지하는 아티팩트―― 진실을 꿰뚫는다는 신수의 이름을 딴, 호르투스 또한 그 보물들의 하나이다.


그런 국왕만의 작은 보물전에서 아크티알은 알록달록한 구슬을 꺼냈다.


평범해 보이는 유리구슬이다. 크기도 적당하니 구슬치기에 써먹기도 좋아 보인다. 어째서 이런 것이 보물전에 들어있는지, 누군가 실수로 넣은 것은 아닐지 의심마저 드는 모양새다.


하지만 이 구슬은 어엿한 아티팩트이자 보물이다. 괜히 국왕에게만 따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설마 이것을 쓰는 날이 올 거라고는······.”


반지에 들어있는 물품은 선왕에게서 모두 일일이 설명받으며 들었었다. 하루가 멀게 매일매일. 완벽히 숙지할 때까지―― 머리에 각인이라도 시킬 기세로 끊임없이 주입했었다.


그토록 신나 보였던 선왕의 모습은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당시에는 처음으로 봤던, 아이 같은 선왕의 활발함에 무척이나 당황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이해한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던 그 고통이 짐작되었기에.


그래. 선왕은 잊지 않도록 가르치려한 게 아니다. 그저 공유하고 싶었기에 열성이었던 것이다.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으니······.



“하지만 좀 지나치셨습니다, 아버님.”


오래전 돌아간 아버지에게 작게 불만을 토로한 아크티알은 구슬을 기동시켰다.



“폐하, 그것은?”


벨페르도 이것을 보기는 처음. 상당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들여다본다. 아니, 대충 취급하는 반지에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몰랐는지 꽤 놀란다.


아크티알은 가슴팍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브로치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이것은 말일세, 신호기라네.”

“신호······ 말입니까?”

“그래. 이 구슬은 총 4개가 한 세트지. 각각 어느 인물들이 나눠 가졌고, 누군가가 가동하면 전부 불빛이 발광하네. 그리고 알리지. 가동되었다고.”


구슬을 나눠 가진 자들이 분실했다면 신호를 받지 못하겠지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신처럼 매일 붙잡혀 달달 외우게 되었을 테니.


아크티알은 창문 밖을 쳐다봤다.



“구슬을 나눠 가진 자는, 초대 건국왕과 당시 세 국가의 통솔자라네.”

“폐하, 그 말씀은······.”


그렇다. 현재 소유주는 세 국가와 세인트리안의 통솔자. 이 구슬은 거리가 얼마나 되든 반드시 그들에게 신호를 전할 것이다.


――인류 정상 회담의 신호를.


조금 더 기다렸다, 도플갱어의 소식이 전해진 다음에 해도 됐을 것이다. 그편이 여러모로 대화에 차질도 없을 테고.


하지만 자식들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아들들에겐 되도록 깨끗하게 벨루디스를 물려주고 싶으니 말이다.’


국왕답지 않은 감정적인 행동에 아내는 뭐라 할지······.


그것을 생각해보며 아크티알은 강철과 같은 음성으로 명했다.



“세인트리안으로 가겠다. 시급히 준비하도록.”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 기백에 벨페르는 곧장 머리를 조아리고는 행동을 개시했다.


아크티알은 소란스러워지는 분위기를 느끼며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주사위는 이미 굴려졌고, 더는 돌이킬 수도 없다.



“그렇다면 쟁취해내야겠지. 생존이란 희망을.”


수십 년만의 바깥 외출. 아크티알은 그때를 고요히 기다렸다.


작가의말

참고로 아크티알이 지닌 반지는 라프리트가 지닌 보물전의 레플리카입니다!


다음화 예고!

성녀 일행이 드디어 베르다드에 도착! 그리고 리아의 느긋한 방학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방학 스토리가...

개인적으로 이 방학 시즌의 서두가 제일 힘들지 않았나...ㅎㅎ

그래도 이제 끝났습니다!

헤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나트알에서의 방학편이.. 흐흣 흐흐흣!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57 루이미너스
    작성일
    23.10.30 10:13
    No. 1

    ??? : 와 드디어 우릴 악독하게 굴려먹던 작가가 우리에게 휴가를 줬어!

    ?? : 리아님 베르다드에 조ㄱ...아니 연구원 노ㅇ...아니 연구원 공급에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5 Lastia
    작성일
    23.11.11 19:09
    No. 2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혹사를... 흑
    아. 교원들 만큼은 노동력 공급에 환호하고 있다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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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199 +2 23.08.14 73 0 42쪽
233 198 +2 23.08.04 85 1 39쪽
232 197 +2 23.07.27 80 0 42쪽
231 196-2 +2 23.07.19 5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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