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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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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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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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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DUMMY

인류 연맹이 발족했다고는 하나,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당연했다. 인류 연명은 희대의 학살범―― 이스피리아의 말살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니까.


백성과 귀족 모두가 이 명분이 필요한 일임을 이해했다. 그러나 과거에도, 미래에도 다시는 없을, 전 인류의 동맹을 성사한 명분으로는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됐든 이스피리아는 겨우 한 명의 개인이니까.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군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명분 이외에도 돈과 인력, 시간이 필요하다.


안 그래도 사이가 나쁜 삼국이다. 서로 이권을 챙기기 위한 암투가 물밑에서 벌어져도 으레 그러려니 싶다. 그러니 구태여 손을 잡을 이유로서는 확실하게 미달. 되려 대신들의 반발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다.


하지만 한 사건으로 인해 모두의 인식이 바뀌었다. 과거의 감정에 연연할 때가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사건이란 바로 추격대의 몰살······.


희대의 범죄자, 이스피리아를 잡기 위해 파병된 각국의 병사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살해당한 것이다.


소식을 알린 각 부대의 전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제 역할을 완수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무척 안도한 얼굴로······.


목숨마저 아끼지 않은 그들의 노고를 허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윽고 조사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알게 됐다. 전령들은 임무를 완수했기에, 먼저 떠나간 전우들을 볼 낯이 생겨 안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죽음을 바라고 있었던 거다. 너무나도 끔찍하고 두려운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현장은 벨루디스의 동쪽 관문에서 약 50km 떨어진 구역이었다. 그곳으로부터 약 10km에 이르는 구간에 걸쳐 5만에 달하는 병사들의 시신이 늘어져 있었다.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은 터라 근처는 피로 이루어진 강이 만들어졌으며, 썩어 문드러진 악취가 저 멀리 관문에까지 이르렀다.


너무나 참혹한 그 현장에 도착한 조사대는 아연실색했다.


일부 병사가 탈영하는 등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힘겨운 조사 끝에 5km의 간격을 두고 주둔한 각국의 추격대가 급습―― 차례차례 전멸당했으리라고 보았다.


정확한 추측은 불가능했다. 추론의 근거가 될 시신의 상태가 베르다드의 학살을 고스란히 재현한 듯하여,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를 도저히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시간의 격차 없이 모두 전멸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고, 조사대는 즉각 복귀하여 보고를 올렸다. 더불어 그 임무를 끝으로 조사대에 속한 병사들은 서로 앞다투어 제대를 요청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는 바로 항소하기까지 했다.


점차 원성도 높아져만 갔는데, 그들은 사건 현장을 보고 안 것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를······.


그리고, 한 발짝 늦게 현장에 도착한 라프리트는 다시금 재현된 지옥도를 망연자실 쳐다봤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실수했다······. 실수했다······.


그리 자신만만하게 굴었건만 이 무슨 결과란 말인가.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이래서야 황제가 비웃었던 그대로다. 어리다. 세상 물정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정말 아는 게 없다.


무엇하나 이루지도, 달관하지도 못한 영애 따위가 당최 무얼 믿고,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리 까분 것일까······.


이런 주제에 소베르비아를 비웃은 거다. 웃음거리로는 이만한 것도 없다.


알고 있었다시피 아직 각국은 진심이 아니었다. 막으려면 지금뿐이었고, 이들의 행군만 막아낸다면 최소한의 희생만으로 이번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리된다면 제아무리 교황이 애를 써도 인류 연맹의 발족은 유야무야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막으러 왔음에도 지켜만 봤다.


설마 더 진군하겠거니, 설마 정말로 이스피리아의 고향으로 향하겠거니······. 아직은 괜찮겠다며 제멋대로 단정 짓고는 멍청하게 보고만 있었다.


물론 때를 봐서―― 대해에 들어서기 전에 막으려고는 했다. 비젠탈이 있으니 여차하면 강행 수단도 취하려 했었다.


그러나 결국 아무것도 안 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 못 한 것은 과연 어느 쪽인지······.


막으러 왔으면 바로 막았으면 그만이거늘. 기껏 와놓고는 변명이나 늘어놓으며 우물쭈물하는 게 전부라니.


너무나도 한심한 그 결과가 이 참상이다.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비젠탈이 이변을 알려줘 현장으로 향했을 때는 모든 상황이 종료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이스피리아조차 만나지 못하였다. 그녀의 고향도 가보았으나 성한 게 하나도 없는 처참한 폐허만이 반겨줄 뿐, 정작 그녀는 찾을 수 없었다.


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미숙하단 말인가.


자괴감과 후회로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여 결코 기다려 주거나 하지 않는다. 매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곧장 별장으로 향했다.


2주 만에 보는 아버님―― 리벨리타스 후작은 몹시나 수척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일들로 인해 극도로 정신이 피폐해진 라프리트에겐 후작의 안위를 살필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더는 돌이킬 수 없다는, 원했던 것과는 상반된 답변만을 듣고 붙드는 가족을 냉정하게 뿌리쳤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 이제 와 결과가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재차 알현한 황제와 공왕에게선 처음과 마찬가지의 대답만을 들었고, 이스피리아의 대한 경계심을 극상으로 올린 그들은 더는 좌시할 수 없다며 꺼낸 교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인류 연맹이 탄생했고, 연맹은 이스피리아와 전쟁을 벌인다고 선포했다.


백성들은 이 선포를 하나의 작은 이벤트 정도로만 생각했다.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잡기 위해 다시는 없을 삼국과 세인트리안의 연맹이 탄생했다면서······.


언뜻 축제 같은 분위기도 띠었다. 심상찮은 일의 전조임을 눈치챈 사람은 단연코 없었으며, 그나마 일부 귀족 몇 명만이 범상치 않은 규모에 촉각을 곤두세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들조차도 연맹이 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았다.


그 인식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는 벨루디스의 국왕―― 아크티알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가 살해당한 뒤였다. 그 외에도 재상, 벨페르 페네리 파라디우스 공작과 알렌나시안 후작이 살해됐다.


범인이 누구인지는 곧장 밝혀졌다.


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마치 누가 그랬는지 알리는 것처럼 현장은 처참했으니까. 근위와 병사, 사용인과 대신들의 시신이 뒤엉켜, 국왕의 시신을 수습하기조차도 번거로울 지경이었다.


채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이 소식이 타국에 전해지기도 전에 사건은 연이어 발생했다.


다음은 루 몬테르 공국이었다. 공왕과 공왕비, 그리고 공국의 빛이라 불리며 실질적으로 공국을 다스리고 있던 공왕녀가 살해당했다. 공국의 자랑인 아룡, 에인샤론드도 함께······. 생존자는 무결의 기사, 디카이로트 로판만이 유일했다.


무력으로 유명한 제국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았다. 늦게라도 소식을 접해 방비를 단단히 하였음에도 황제와 프라바이드 공작, 샤라즈 공작 및 여러 대신이 모두 몰살당했다.


이는 세인트리안도 피해 갈 수 없었다.


타국 어느 곳보다도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었음에도―― 본인 자체가 인류 최강이었음에도 교황은 아주 싱겁게 살해당했다. 그를 지키기 위해 모였던 심판관들도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유일하게 외부에 나가 있어 화를 모면한 줄 알았던 제1 위상도 사실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스피리아의 손에 죽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이스피리아가 무얼 하려는지 알았음에도 라프리트는 언제나 한발 늦었다.


마지막 현장이었던 세인트리안에서조차도 도착했을 땐 모든 상황이 종료. 사지가 다 찢긴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대성당의 신상 앞에 덩그러니 놓인 교황을 발견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 한발 느, 늦었구먼.”


교황은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지만 라프리트의 관심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스피리아 양은?! 이스피리아 양은 어디로 갔나요?!”

“그, 그런 건······ 자,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오히려······ 어째서 여기로······ 왔는가? 진정······ 그녀를······ 마, 만나고 싶었다면······ 여기가 아니라 그곳으로 가, 갔었어야지······.”

“큭! 비젠탈, 일단 치료를!”

“소, 소용없네······. 나의 유, 육체는 완전히 파괴당했다. [소생]이 아니라면······ 무리일걸세.”


[소생]은 죽은 자를 되살린다고 하는 빛 속성 최고위의 마법, 신화시대에서나 존재했다는 기적이었다.


실상은 창조의 영역에 있는 대마도이지만, 제아무리 비젠탈이라 하더라도 그런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가능했다면 이미 교황 스스로가 했을 터다.



“······아니. [소생]이 가능했어도 당신은 이대로 죽을 생각이죠?”

“드, 드디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가, 갈 수 있거늘······. 주, 죽음을······ 마다하겠나?”

“미쳤군요.”

“진작에 미쳤었지.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아내가 죽은 그날에······. 라프리트, 자네도······ 그러지 않나?”

“저는 당신이랑은 달라요.”

“후후······. 내가 보기엔 자네도 훌륭히 미친 것으로 보이네만?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되네. 이 썩어빠진 세상에선 그 또한 필요한 것이니.”

“닥쳐요. 하나 남은 그 쓸모없는 눈알을 도려내기 전에.”

“그거 무섭군······. 다 죽어가는 노친네에게 아주 거리낌이 없군 그래.”


마음 같아서는 정말로 깐죽거리는 교황의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다.


그렇지만 교황은 이미 다 죽어가는 몸. 벌써 고통이 안 느껴지는지 어투가 서서히 평온해지고 있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젠장······. 당신은 이리될 줄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일을 키운 거예요?”

“평화를 바랐기 때문이라네. 진정한 평화를······. 이를 위한 초석으로 죽는다는 것은 영광이라네. 미련 따윈 존재하지도 않아.”

“희생으로 이룩한 평화예요. 반드시 그 끝이 존재하건만 그걸로 만족한다고요?”

“이 대륙 역사상 영원토록 이루어지지 않을 평화이지 않은가? 그러니 난 그것으로 만족하네. 이러나저러나 아내의 부탁을 이루어 주고 죽는 것이니 말일세. 어쩌면 이를 계기로 세상이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고. 애당초 인간이 일시적이라며 가릴 처지도 아니지만.”

“처지?”

“아······ 그렇군. 비젠탈에게 조약에 대해 못 들었나?”


들어본 적이 없다.


돌아보니 비젠탈도 딱히 부정하지 않는다. 진짜 무언가 조약이라는 게 있긴 한 모양이다.



“내 임종을 지켜준 보답이네.”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 그리 말한 교황은 이어 입을 열었다.



“그녀를 지키고 싶다면 서두르게나. 아직까진 인간들의 다툼이라 괜찮지만, 그녀의 계획은 이 대륙 전체를 끌어들이는 것. 조약에 따라 환수가 움직일 걸세.”

“환수?!”

“자세한 건 비젠탈에게 듣도록 하게. 하지만 이번처럼 느긋하게 굴진 말게. 그녀는 분명 이 대륙에 평화를 가져다줄 만큼 강대하기는 하나, 환수 넷을 동시에 상대할 정도는 아닐세.”

“환수가 넷······?”

“그렇네. 하나였다면 힘겹긴 하겠지만 그녀라면 어찌저찌 이기겠지. 그러나 넷은 현실적으로 무리라네.”


이스피리아의 목적이 평화임은 바로 눈치챘다. 증오를 모으는 것도. 그렇기에 각국의 수뇌부가 살해당할지를 미리 알았고, 이것으로 절대 끝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뒷배경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거기에 환수까지 얽혔을 거라고는 정말 추호도 짐작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스피리아는 훨씬 많은 진실을 깨닫고 이 일을 계획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더는 꾸물거릴 수 없었다.



“말씀 고마워요.”

“어서 가게. 이번에야말로 늦지 말게나······.”

“그럴 거예요.”


살며시 미소 짓는 교황.


그는 현 사태로 만든, 일을 이렇게나 키운 장본인이지만 이제는 그저 죽음을 목전에둔 노인에 불과했다.


욕은 속으로만 하고, 일단 방향을 제시해 준 것에 정중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안네도 조용히 그의 안식을 기도해 주었다.



“아아. 오래 기다렸지, 시메온? 이제 곧 당신의 곁으로 가겠네. 많이 늦어 미안허이.”


등 뒤로 애절한 말을 들으며 무정하게 대성당을 나왔다.


탄식할 것도, 그럴 가치도 못 느낀다. 본인이 바란 최후이니. 그보다는 조약이 우선이다.


하늘 위, 비통한 외침이 울려 퍼지는 대성당을 내려다보며 비젠탈은 조약에 대해 말해줬다. 의외로 선뜻 알려주어 많이 놀랐는데, 그 내용은 전혀 짐작하지도 못한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순간 화가 났다. 진작에 알려줬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비젠탈에겐 잘못이 없었다. 알았든 몰랐든, 해야 할 일은 변함이 없었으니.


그렇다. 이 모든 일의 책임은 섣불리 행동하고, 너무 눈치만 보다가 늦어버린 자신에게 있었다. 그를 나무랄 권한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재차 자괴감에 빠져들었지만, 교황의 말대로 더는 늦을 수 없다.



“비젠탈, 감시한다는 환수들과 면식이 있나요?”

《있다.》

“그럼, 누가 먼저 행동에 나설 거 같나요? 가장 성질이 급할 것 같은 환수에게로 안내해 주세요.”


비젠탈은 조금 고민하더니 그럴 만한 자는 하나뿐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달려 도착한 곳은 제국의 남쪽에 있는 어느 산림이었다.


잘 관리된 산림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전경을 훤히 볼 수 있었기에 자연과 어우러지게, 세심하게 신경 써서 관리한 것이 엿보인다.


식생들도 엄청나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못 보는 식물들이 엄청나게 자생해 있어,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라면 이 산림은 그야말로 보물창고와도 같을 것이다.



“굉장하군요. 자연에 통달한 환수인가요?”

《그렇긴 하겠지. 일단 태초부터 살아왔으니. 그렇지만 직접 관리하진 않았을 거다. 그저 본인의 능력에 의해 멋대로 자란 것에 불과할 테니.》

“신기한 능력이네요.”

《그것이 환수다. 다들 신비한 능력을 지녔지. 지금 만나러 가는 환수 또한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주변은 생명력이 가득해지는 능력을 지녔다.》


눈앞의 보이는 광경이 그 결과라면서 비젠탈은 말했다.


정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엄청난 능력이다. 더군다나 이만한 능력이면서도 마법은커녕, 아무 마력조차 쓰지 않는다고······.


가히 권능과도 마찬가지.


그러한 존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달리 교황이 경고한 것이 아님을 상기하며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환수는 땅에 내려오자마자 바로 볼 수 있었다.


마치 올 것을 알고 있었던 듯 기다리던 그 존재는 발뒤꿈치에 나풀거리는 하늘색의 털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새하얀, 30m 크기의 사족 보행형의 동물이었다.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다. 언뜻 보기로는 늑대의 종류 같으면서도 범이나 호랑이류의 모습도 보인다. 무엇보다 날렵하게 위로 뻗은 귀 아래로 있는 3쌍의 지성이 담긴 알록달록한 눈이 평범한 마수 따위가 아님을 암시했다.



《비젠탈······. 모처럼의 재회인지라 네가 혼자였다면 환영했겠다만, 인간과 함께라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용무가 있어서 왔다.》

《네가?》

《아니. 이 아이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느낌으로 환수는 고개를 내려 쳐다봤다.


알록달록 빛나는 여섯 개의 눈이 모두 자신을 직시하자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겨우 시선일 뿐이지만 본능이 수긍했다. 앞의 이 존재는 환수가 맞으며, 인간과는 격이 다른 생물체라고······.



《조약에 대해 아는 눈치로군. 네가 알려준 것이더냐?》

《그렇다.》

《흐음. 보는 눈이 없어졌다고 해야 하나, 어째 조금 해이해지지 않았나? 저 인간―― 반쯤 미쳐있다만?》

《안다.》

《뭐라, 알면서도? 허허. 미친 인간의 어디가 그리 마음에 든 것인지 이해가 안 되네······.》

“미쳤느니 뭐니, 아무래도 좋습니다. 저는 당신과 이야기하러 온 것입니다.”

《호오······. 비젠탈과 함께이니 그러려니 싶었지만 정말 대화가 가능하군. 이것도 미쳤기에 가능한 것이려나? ······한데, 겨우 그것만으로 나와 말을 섞는다? 주제 파악을 하거라. 네게 그만한 가치 따윈 없다.》


낮게 깔리는 싸늘한 말과 눈빛에 다시금 몸이 굳는다.


그 이스피리아와 거의 동등한 힘을 지닌 존재다. 기분이 상했다는 시시한 이유로 한순간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반격해봤자 의미도 없다. 보잘것없는 인간 따위로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으리라.


――그래서 어쩌라고.


죽일 테면 죽여라. 이 목숨은 진작에 끊어져 사그라졌다. 죽음 따윈 이제는 조금도 두렵지 않다.



《쯧. 망자의 눈이로군. 미친 것보다 더 질이 나쁘다. 하지만······ 악의가 없다. 너에게선 순수한 광기만이 느껴지는구나.》

“그게 다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대화입니다.”

《뭐, 좋다. 마침 나도 관심이 생겼으니. 다만, 부디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기를 바란다.》

“그건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정말 건방이 하늘까지 치솟는 인간이로구나. 덕분에 조금 궁금해졌다. 네 이름은 무엇이더냐?》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입니다.”


비젠탈에게서 내려와 드레스의 끝자락을 잡고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벨루디스 식의 예를 보였다.


가출한 끝에 비젠탈을 탈취, 멋대로 타국의 국왕을 알현하여 일을 저지른 자신이다. 본적에서 제적당했을 것이 분명하여 이젠 귀족이 아니게 됐을 거다. 그러니 귀족으로서 예를 취할 필요도, 자격도 없었다.


그러나 이건 친구를 가르치고, 본받고 싶다며 칭찬해 준 얼마 안 되는 것. 그러니 그녀의 기억 속 라프리트를 한평생 유지해 나갈 거다.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기다리며······.



《그래. 기억했다.》

“당신은요?”

《허······. 정말 당돌한 인간이로군.》

“그저 기본적인 예의입니다만?”

《알았다. 내가 졌다. 미친놈에게 겁을 줘봐야 나만 지칠 뿐이지.》


한숨을 쉴 듯한 분위기를 풍긴 환수는 그 거대한 몸체를 웅그리더니 시선을 맞췄다.



《아니마무스. 나는 아니마무스라고 한다. 어리석고 왜소한 인간이여.》

“네. 아니마무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할지 말지는 네 이야기를 듣고 나서다.》


정말 쓸데없는 것을 고민하는 환수다. 인사 하나 가볍게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괜히 비젠탈이 가장 먼저 이곳으로 온 게 아니랄까, 융통성이 없다.


그리 생각하면서 용건을 말했다. 환수―― 아니마무스는 겹친 앞발에 고개를 누이고는 편히 이야기를 들었다.



《뭐? 얼마 안 지나, 전 대륙이 얽힌 전쟁이 벌어진다? 고작 한 명 때문에?》


자세는 여전했으나 꽤 놀랐는지―― 아니, 어이가 없었는지 아니마무스는 심드렁했다.



“그렇다고 말씀드렸어요.”

《헛소리――는 아니로군. 꽤 가망성이 있는 이야기이니 비젠탈이 힘을 빌려준 것인가?》

“저는 단지 도와달라고 했을 뿐, 그의 속내까진 모르겠네요. 마음에 들었는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주셨지만요.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벌써 일은 진행되어 각국의 국왕이 모두 살해됐다구요?”

《뭣?!》


이번에야말로 놀란 아니마무스는 벌떡 일어나 산림 너머를 쳐다봤다.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 모습으로 보건대, 아마 이 자리에서 각국을 살피는 마법이나 능력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정말 모두 죽었군. 심지어 루시아스 님의 첫 번째 종을 자처하는 그자마저 죽다니······.》


한동안 둘러보던 아니마무스는 경악에 차 말했고, 그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원 이스피리아 양에게 살해됐어요.”

《단독으로 이만한 일을 벌일 정도라면 그 인간은 필시 초월자이겠구먼.》

“초월자? 그게 뭐죠?”

《마력레벨 650의―― 생물의 한계를 넘어선 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곳에 이르면 수명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한층 진한 마력을 쌓는 고위의 존재가 되지. 하지만 설마 인간이 초월자에 당도하리라고는······.》


650의 마력레벨······.


전체 평균 겨우 50대에 머무는 인간으로서는 전대미문의, 인류 최강이라는 건국왕을 한참 뛰어넘은 수치에 저도 모르게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동시에 납득이 갔다. 무슨 근거가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그녀는 분명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돌연 이스피리아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셌을 때가······.


정확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체험학습 이후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날 있었던 몬스터 군단의 습격으로 많은 학생과 교수가 죽은 뒤로 그녀는 변했다. 마치 무기력했던 그날의 일을 반성하는 것처럼 그녀는 수련에 매진했던 것이다.


이젠 그만 돌아가서 자라고, 리카드가 말해봤음에도 소용이 없었다. 혼자 꿋꿋이 밤늦게까지 남아 열중하였다.


장소도 가리지 않았다. 개인 수련장이 꽉 찼다면 연무장, 실습장을 가리지 않고 한 자리에서 실신하기 직전까지 본인을 혹사했다.


광기 어린 그 모습에 학생과 교수들은 미친 거 아니냐고 손가락질도 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고 매일매일, 하루를 거르지 않았다.


그 노력에 대한 결실로 그녀는 나날이 강해졌다. 수련만 하는 터라 시험 성적은 별로였어도 실기에서만큼은 단연 독보적. 간혹 시비를 거는 상급생을 손쉽게 제압하는 모습과 더불어, 비교를 불허하는 [치유]마저 지닌 그녀는 베르다드 역사상 최고의 학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평민. 그것도 출신을 알 수 없는 이방인이다.


한탄스럽지만 겨우 그딴 이유로 그녀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시간이 흘러 3학년 3학기가 됐다. 그리고 그날, 이스피리아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녀의 룸메이트인 셀레스테의 말에 의하면, 자고 일어나니 저렇게 되어 있었다고······


매끄러운 백발을 허리까지 내린 그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원래도 미인이었던 터라 너도나도 눈길을 빼앗겨 하루 종일 그녀의 이야기가 끊이지를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향한 시기와 질투가 만연해졌다. 화장하나 하지 않는 맨얼굴임에도 빼어난 미모와 능력이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신분마저 불명확하기에 학생들은 거침없이 그녀를 깎아내렸다. 일부러 눈에 띄려 염색을 했다느니, 교회의 눈에 들기 위해 아첨하는 것이라느니, 심지어는 동급생으로 있는 왕자에게 주제를 모르고 추파를 던졌다는 비방마저 서슴지 않았다.


정말 죽어도 싸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는데, 정작 그녀는 평온했었다. 관심이 없는 것을 넘어, 여유마저 있어 보였다.


여태 초조한 듯 수련에만 몰두했었던 그녀와는 확실히 달랐다.


당시엔 왜 그랬었는지, 화는 나지 않는 것인지 의아했었는데······ 지금 아니마무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알겠다.


그녀는 그때 초월자가 된 것이다.


끝없는 노력의 산물이자 결정체를 본인 스스로 느꼈기에 그녀는 비로소 여유로울 수 있었다. 그렇기에 온갖 부당한 대우와 처사에도 웃어넘기는 게 가능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는다.



“역시 이건 잘못됐어요. 그러니 저는 당신을 막겠어요. 추악한 인간을 위해 당신이 희생되어야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으니······.”

《다짐은 좋고 인간이 추악하다는 것은 동감하는데, 어째······ 순서를 착각하지 않았나?》


자기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게 한 아니마무스의 말에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아니마무스는 재차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라프리트여, 네가 바라는 것은 이스피리아를 막는 것이라지 않았느냐? 한데, 어찌하여 이곳에 있지?》

“네······?”

《하아. 인간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이리도 어리석을 수가······.》

“무, 무슨 말씀인가요?”


더듬으며 물으면서도 어렴풋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잘못됐다고. 자신은 재차 실수를 저질렀다고······.



《조약을 들었을 텐데? 비록 국왕들이 죽는 큰 사건들이긴 하나, 아직 우리가 나설 차례는 아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염려하여 나를 찾아온 것이더냐? 이스피리아를 막는 것이 목표라면 그 인간에게로 갔어야 할 텐데? ······뭔가 우선순위가 이상하지 않나?》

“아······.”


머리가 새하얘졌다.


정신이 들고 보니 냉큼 비젠탈에 올라타고는 어서 출발하라며 닦달하고 있었다. 안네는 아직 타지도 않았건만······.



“아가씨, 진정하세요!”


뒤늦게 비젠탈에 탄 안네가 버럭 외쳤다.


여간해서는 소리치지 않는 가족의 말에 살짝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초조해지는 마음만큼은 달래지지 않았다.



“어서 가야 해. 내가 올 곳은 여기가 아니야. 교황도 그랬었잖아? 진정 이스피리아 양을 만나려면 거기로 가면 안 됐다고······.”

“침착하시고,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할지를 말씀해 보세요.”

“어디로······? 그야 당연히······.”


――모른다.


어디로 가야 이스피리아를 만날 수 있는지 전혀 짐작조차 안 됐다.


당연하다. 이스피리아에 대해 무얼 안다고. 베르다드에서 꽤 친하게 지냈다고는 하나, 그건 그저 안면을 튼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본심은 아니었다. 사실은 안네처럼 그녀와도 친구로서 좀 더 친밀히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귀족과 평민의 신분상 그녀에게 폐가 된다는, 그런 하찮은 이유로 적당히 선을 그었었다.


오히려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그녀의 룸메이트인 셀레스테 쪽일 것이다.


그녀의 고향에 대한 것도 그렇다. 리카드의 보고가 리벨리타스 후작에게 전달될 때 우연히 엿들은 것에 불과했다. 실제 찾아갈 수 있었던 것도 비젠탈 덕분으로, 하늘을 나는 그가 있었기에 발견한 것이지 아니었다면 한평생 찾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설마······. 이미 늦은 거야······?”


깊은 절망이 내려앉는다.


그녀를 찾을 수 있는 최후의 마지노선은 각국의 추격대를 몰살할 때였다. 그때만큼 그녀의 목표가 명확할 때가 달리 더 없었다. 비젠탈조차 감지해 낼 수 없는 그녀와 만날 기회는 분명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멍하니 여유를 부리다가 시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아니, 기회는 또 있었다.


국왕들과 교황의 암살······.


설마 주변인들까지 모두 죽이리라고는 예상 못 했지만, 국왕들만큼은 반드시 제거할 것이라고 어렴풋하게 짐작했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 증오를 모으는 일에 이것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방해된다고 하여 순순히 물러났다. 외박을 하든 비젠탈 위에서 잠을 청하던, 삼국 중 아무 왕성에서 머물기만 했다면 그녀를 만났을 것이 분명했을 것인데 그러지 않았다.


그럼 뭘 했느냐?


자신을 찾으러 다닐 사람들을 피해, 벨루디스의 외진 여관에서 자고 있었다. 너무나 놀랍게도······.


이 얼마나 미련하고 멍청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도대체 뭘 한 거지······?”


계획의 스타트를 끊은 그녀를 이제 와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행적을 예측하기에는 이스피리아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다.


넋이 나간 중얼거림에 아니마무스는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비젠탈, 이게 인간이란 것이다. 심히 왜소한데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의 진리를 깨달았다는 양 쉽게 교만해지는 어리석은 종족이지.》

《······알고 있다.》

《호오. 이 나에게 이를 드러내다니······. 어지간히도 그 미친 인간이 마음에 든 모양이야?》

《······.》

《칫. 흥이 깨졌다. 볼 일도 다 봤으면 어서 데리고 돌아가거라. 너랑 싸울 마음은 없다. 그게 인간 때문이라면 더더욱.》


비젠탈은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어떠한 소득도 없이 이스피리아의 고향으로 갔다. 어떻게 갔는지는 모른다. 안네에게 안긴 채로 그저 멍하니 있으니 도착했다.


인간들의 나라에는 갈 수 없었다. 리벨리타스 가에서 보낸 수색대 때문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말과는 다른 비젠탈과 함께 있으니 어딜 가도 눈에 띄고, 금방 수색대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었다.


괜히 말도 통하지 않을 가족들에게 돌아간다면 시간만 허비할 테니, 이곳으로 향한 안네의 선택은 최선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방향을 잃었다고 해도 좋으리라. 폐가들이 늘어선 이스피리아의 고향에서 그나마 멀쩡한 곳에 들어가 시간만을 죽이고 있었다. 먹을 건 비젠탈이 안네와 함께 구해와 곤란하진 않았다.


그러한 나날이 이어지다가,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아침에―― 뺨을 세게 맞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건가요?! 도대체 뭣 때문에 리벨리타스 가를 나오셨나요? 친구를 구하려 하셨던 게 아니었습니까?!”


처음 맞아본 안네의―― 가족의 손찌검은 매우 아프고 강렬했다. 정신을 차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망설임은 없어졌다.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상관없었다. 아니, 없어졌다는 게 맞을 거다. 재차 의기소침해진다면 반드시 일깨워 줄 안네가 있으니까.


며칠 허탈하게 보낸 만큼 서둘렀다. 그 첫걸음으로 비젠탈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약하다. 초월자인 그녀 앞에 서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힘이 있어야 했다.


비젠탈도 선뜻 수락해 주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체계가 다른 심상마법까지도. 하지만 선천적으로 습득할 수 없는 체질인지라 술식마법에 응용하는 정도에 그쳤다.


아쉽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법적으로 뛰어나졌다. 적어도 성질 변화도 못 하는 학생의 수준은 아득하게 벗어났다.


마력레벨을 올리는 요령도 배워 꾸준히 실천했다. 너무 의욕만 앞선 탓에 마력이 폭발할 뻔도 했지만, 확실히 성과는 있어 마력량은 거의 100배 이상 증가하였다. 물론 그래야 봐야 마력레벨로 따지면 겨우 몇십이 오른 것에 불과했지만.


초월자인 그녀에게는 도저히 닿지 않는다. 그래도 이전보단 나을 테니 만족했다. 성급해봤자 강해지는 것도, 일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이러는 동안에도 인류 연맹과 이스피리아와의 전쟁은 격해져 갔다. 국왕들이 살해됐으니 당연했지만, 더는 전처럼 가볍게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비젠탈과 함께 진척 상황을 봤을 때는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도시가 파괴되고, 거리에는 시신이 즐비한 그 광경은 그만큼 끔찍했다.


전투의 흔적은 놀랍도록 적었다. 돌연 나타나 하늘에서 마법이라도 퍼부었는지 일방적으로 당한 것으로 보인다.


혼자인 것에 대한 장점이었다.


국가는 지킬 게 많다. 영토와 그곳에 사는 사람 등등. 그에 비해 이스피리아는 오직 본인의 몸만이 전부다. 더욱이 비젠탈조차 탐지하지 못하는 은밀성마저 지녔다.


이런 그녀를 상대로 인류 연맹이 취할 방안은 그리 많지 않다. 기껏 해봐야 대비하는 것뿐이다.


이스피리아도 이 점을 노리고는 산발적으로 여러 군데를 습격했다. 어느 날에는 공국, 어느 날에는 벨루디스, 또 어느 날에는 제국과 세인트리안 등으로.


힘을 합쳤다고는 하나, 이렇게나 무작위로 습격을 당하니 각자도생하는 것처럼 각국은 본인의 영토를 지키기 바빴다. 덕분에 변변찮은 대항조차 하지 못하고 피해만을 누적해 갔다.


라프리트도 막을 수 없었다. 시도는 해봤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해 보면 매번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이러한 일이 계속 반복되니 알게 돼버렸다. 이쪽이 탐지하려는 것처럼, 그녀 또한 탐지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니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고,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말리는 것은 그만두도록 했다. 시간은 유한하지 않은가. 소용없는 짓에 허비할 순 없다.


애초에 인간이 얼마나 죽든, 리벨리타스 가가 몰락하든지 말든지 상관없었다. 경고는 했다. 자존심 때문에 듣지 않은 건 본인들이니 얌전히 대가를 치르면 된다.


더는 때를 놓치지 않을 거다.


불필요한 일에는 관심 끄고 더욱 훈련에 매진했다. 특히 마력조작을 집중적으로 단련하는 데에 공을 들였다. 그녀의 탐지에 걸리지 않게끔······.


이런다고 별다른 소득은 없을지도 모른다. 암만 해봐도 그녀는커녕 비젠탈보다 뛰어나지는 자신의 모습은 그려지질 않으니. 그래도 최선을 다했고, 느리지만 차츰 성장하는게 느껴졌다.


이따금 보러 가는 삼국의 전황도 제법 바뀌었다.


이젠 수색대를 유지할 수도 없을 테니 벨루디스의 도시에도 들렀는데, 가는 곳마다 활력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는 마치 도시 자체가 죽은 것 같았다.


사는 백성들의 표정도 어두침침 생기가 없다. 그들도 아는 것이다. 이스피리아―― 단 한 명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 패색이 짙음을.


덕분에 막 나가게 된 자들이 생겼고, 일부는 비젠탈을 팔려는 목적으로 납치를 꾀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그들을 잡아 버렸다. 자신도 그렇지만, 엄청난 재능으로 몰라보게 성장한 안네를 일반 백성이 감당할 순 없었다.


꽤 치안이 안 좋아진 현재로서는 납치범들을 어찌 구워삶든 아무 문제 없다.


본인들의 처지를 직감했나, 벌벌 떠는 납치범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보내주는 대신 주변 정세 같은 것을 불라고.


광명을 본 듯 환해진 그들은 이것저것 열심히 말해줬다.


대부분은 쓸모없는 것들이었지만, 그중에서는 꽤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그건 바로 귀족에 대한 불만이었다.


패색이 짙어지니 그제야 의구심이 든 것이다. 어째서 이 전쟁의 시발점인 베르다드의 학살이 벌어지게 됐는지가······.


참으로 허탈할 따름이지만, 이제 와서라도 뒷배경을 알아보는 게 어딘가.


다행히도 그 진실은 쉽게 밝혀졌다. 벨페르 공작의 영부인을―― 심지어 성녀마저 수명이 다한 것이란 진단을 내렸음에도, 숨을 거두게 했다는 연유로 사형 선고가 떨어지지 않았나. 벨루디스의 귀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지라 쉬쉬하면서도 어딘가에서는 이야기가 새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재판조차 없었던 그 불합리함에 백성들은 치를 떨었다.


결국 만악의 근원은 귀족들이었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분노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쌓인 불만이 많았던 터라 걷잡을 수 없었다. 더욱이 당시 이스피리아를 옹호하며 판결에 불복했던 자가 후에 조용히 처리됐다는 소식은 불난 집에 기름통을 끼얹는 꼴이 됐다.


이윽고 불만이 극에 달한 일부 영지에서는 민중 봉기가 발생했다.


그들은 짧은 머리로 생각한 것이다. 본인을 분노케 한 귀족을 넘기면 화를 가라앉히는 게 아니냐고.


결과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예상대로 영주의 머리를 내미는 백성들에게 헛웃음을 터뜨리고는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을 그대로 몰살시켰다고 한다.


너무나 당연했다. 이스피리아의 목표는 평화. 귀족 머리 따위를 들고 간들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이 전쟁의 주범 격인 벨루디스 왕가도 귀족과 백성으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는데, 앞선 사건 덕분에 득을 봤다. 현 국왕인 레온하트의 목을 가져가도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까.


아마 당사자들은 이미 이스피리아의 손에 죽은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지도자 없이 사태를 극복하기는 어려움을 알았으리라. 그래서 생각보단 쉽게 가라앉은 듯하다.


다들 이래저래 힘들게 버티고 있나 보다 싶었다. 그러나 벨루디스 이외에는 제법 내정이 안정화된 모양새였다.


괄목할 곳은 공국이었다. 왕세자인 핸드릭이 즉위하여 상당히 안정적으로 국가를 꾸려 나간다나. 특히 국왕 살해 사건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무결의 기사, 디카이로트 로판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그의 주도 아래 하나로 집결한 군대의 기세가 대단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에는 그래봤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과가 있어 삼국 중에서 피해가 가장 적었다고 한다. 세인트리안보다도 더······.


경악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더욱 놀라운 소리가 나왔다. 디카이로트가 직접 나서서 무려 이스피리아를 패퇴시켰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당장 공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납치범들의 말이 사실임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정말 피해는 미비했다. 여느 곳과 다름없이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는 했으나 큰 피해를 본 것 같지는 않았다. 백성들도 벨루디스와는 달리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활기가 있었다.


하지만 계속 둘러보다 보니 어찌 된 것인지 이해해 버렸다.


이스피리아는 일부러 공국에만 격한 공세를 가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것을 전혀 손상이 없는, 드넓은 경작지를 보고 알아차렸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먹을 것이 필요하다. 먹을 게 없으면 굶어 죽는다. 인간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 농지 또한 파괴되었기에 식량난은 필연적으로 다가올 문제였다. 애당초 경작지를 관리할 인원도 부족하고.


그래서 공국을 남겨둔 것이다. 삼국 최대의 식량 생산지를. 먹을 것 따위에 증오가 옅어지지 않도록······.


디카이로트에게 패퇴했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인간이 희망을 잃지 않게, 대항할 수단이 남아있음을 보여줄 목적이었을 거다. 그러니 디카이로트는 분명 강할 것이다. 이스피리아의 선택을 받은 만큼 상상 이상으로.


하지만 그렇기에 디카이로트 본인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스피리아가 연극이나 하면서 봐주고 있음을······.


차마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혼자 속으로 삭이고 있겠지.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인간들의 기세는 점점 올라갔다. 작금에는 이르러서는 주제도 모르고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정말 인간은 끝도 없이 어리석고 금방 오만해지는구나 싶었다.


당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이스피리아 상대로 어떻게 공세로 나간다는 건지······.


디카이로트나 공왕, 핸드릭은 바보가 아니어서 그런 생각은 없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민중의 말을 계속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민심 달래기용의 차선책을 택했다.


그들이 택한 차선책―― 그건 세인트리안에서 얻은 [예속의 서약]이었다.


분명 하나로 집결한 공국의 군대는 막강했다. 그렇지만 전체 전력은 오히려 이전보다도 떨어졌다. 왜냐하면 공국에 있는 몬스터들이 모두 이스피리아와 싸우길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인간보다 예민한 몬스터들이기에 아는 것이다. 이스피리아는 싸워 이길 상대가 아니고, 감히 적대할 존재가 아니라는 걸······.


[예속의 서약]은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전쟁을 거부하는 몬스터들을 강제로 싸우게 하는 목줄인 셈이었다.


이것은 최악의 수였다. 공국에게도, 라프리트에게도.


공국은 이스피리아를 추호도 모르는 거다. 그녀의 습득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 능력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강제로 따르게 한 몬스터를 대동한 첫 전투가 벌어진 날―― 공국은 유래가 없는 피해를 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들이 이끌고 간 몬스터들에 의해······.


그렇다. 이스피리아, 그녀는 맞서는 몬스터들을 보자마자 즉시 [예속의 서약]을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는 고쳐 쓴 [예속의 서약]으로 인해 몬스터들은 전원 그녀의 군대가 되었다.


바로 사태를 파악한 공국은 경악하면서도 대책을 마련했다. 원초마법―― 심상마법이 안 되면 술식마법을 쓰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탄생하게 된 것이 [예속의 서약]의 목줄. 이 대륙에 전무후무한 혼란을 초래하게 된 물건이었다.


혼란이 발생한 연유는 간단했다. 이것이 몬스터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에게도 모두 통했기 때문이다.


이스피리아와의 전투가 끝난 혼잡한 그곳에 흔히 말하는 시체 털이범들이 국군보다 먼저 쓸만한 물건들을 노획, 노예의 목줄로서 시장에 풀렸다. 그 외에도 마도구 제작자들이 몰래 빼돌리거나, 개인적으로 만들어 내는 등 점차 수가 불어났다.


채우기만 하면 바로 노예가 되는 참신한 이 특성은 욕망을 불태우기에 충분했다.


뒷세계에서 암약하는 이들과 왕권이 약화 된 이때를 기회라 여긴 자들, 기타 개인의 목적을 가진 자들이 서로 혈안이 되어 노예의 목줄을 찾았다. 오죽 심했으면 간혹 암시장에 출품되면 그날 최고가 낙찰을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 물건이 나도는 것이다. 각국은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개판이 되어갔다. 안 그래도 없었던 거리의 활기는 더욱 침체하여 그야말로 죽은 자들의 도시 같았다.


다행이랄까,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언제까지고 인간끼리 다툴 수 있을 정도로 이스피리아의 침공은 상냥한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 여전히 각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암암리에 납치가 벌어졌지만.


이렇게 도움은커녕, 내부의 혼란만 조장하게 만든 노예의 목줄이다.


이런 것이 전장에서 큰 효과를 볼 리도 만무하다. 처음 심상마법 때와 같은 절차를 밟아 금세 이스피리아에게 분석 당했다. 마광석의 술식을 변경할 필요도 없었다. 원래 담긴 마력을 빼내고는 본인의 마력을 채워 주인을 갈아치우고는 본인의 병력으로 썼다.


아군이 적군으로 돌변하는 상황을 바랄 멍청한 사람은 없으니 금세 노예의 목줄은 제작이 금지됐다. 하지만 이미 제작법을 기억하는 이들과 실물이 시중에 퍼진 이상 더는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이스피리아에게 [예속의 서약]이 넘어갔다는 것이다.


그녀는 증오를 모으기 위한 방편으로 이를 적극 활용할 터.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이 다가왔다.


이미 많은 때를 놓쳤다.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곧장 아니마무스에게로 향했다.


환상향 같은 산림에서 아니마무스는 이번에도 오는 것을 알고 있던 것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2년 만인가?》

“예. 아니마무스도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호······. 인간의 시간은 빠르다지만 몰라보게 성장했군. 마치 다른 존재인 것 같다. 분위기도 잘 다듬어진 발톱처럼 정돈되어 있고.》

“덕분에······.”

《훗. 미친 자 나름의 저력인가.》


만족스러웠던지 아니마무스는 작게 웃었다.



《무슨 용건으로 왔느냐?》

“이전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려할 만한―― 용왕이 나설 일은 벌어지지 않을 테니 가만히 있으라?》

“예.”


아니마무스는 잠시 가만히 쳐다봤다.



《여전히 농담 따위가 아니로군.》

“물론이죠. 당신도 어렴풋이 아실 텐데요? 줄곧 지켜봤잖아요?”

《그래······. 네가 간 이후로 이스피리아를 관찰했지.》

“그녀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다고요?”

《처음에는. 하지만 점차 어려워지더니 이젠 전혀 탐지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투를 벌일 때조차도 그러하다. 쉬이 탐지가 안 된다. 심지어는 우리의 시선마저도 느끼더군. 너와 마찬가지로 성장한 것이지.》

“당연하죠.”

《······그렇기에 좌시할 수 없다. 이스피리아, 그 인간은 너무나도 강하다. 이 대륙 전체를 끌어들인다는 너의 이야기도 허무맹랑한 헛소리가 아님을 확신했다.》

“말했을 텐데요? 그녀의 바람은 평화. 종이 사멸할 일은 발생하지 않아요.”

《그건 단지 너의 주장일 뿐이다. 위험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이상 방관할 생각 따윈 없다.》

“그건 당신들 모두의 총의인가요?”


아니마무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도 본인의 주장일 뿐, 제대로 된 회의를 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어차피 오늘 이곳에 온 목적은 경고.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러면 저는 다른 분들을 설득하러 가겠습니다.”

《다른 자들이 어떠하든 제지한다는 나의 생각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제지가 아니라 죽이는 거겠지요. 다만······, 그게 당신 혼자서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이 내가 겨우 인간 따위를 처리하지 못한다?》

“아아. 지켜봤다고 했으니 나름 승산을 점치셨군요. 어처구니가 없는 승산을······.”

《뭐라?》

“어이없다고 했습니다. 설마 평균 마력레벨이 50인 인간을 상대로 그녀가 전력을 다했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애당초 2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떻게 인간이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이스피리아가 전력을 다했으면 인간은 한 달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숨어도 매한가지다. 이쪽이 가는 것을 그 먼 거리에서 감지하는 그녀라면 전부 찾아내 죽이고도 남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니마무스에게 힘을 담아 말했다.



“죽어가는 교황이 말하길, 일 대 일이라면 분명 그녀가 이길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까 당신은 그녀가 더욱 성장했다고 했죠?”

《······.》

“당신을 위해 하는 말입니다. 혼자 멋대로 나서다간 죽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이 빠진 만큼 다른 환수들의 부담은 커지겠죠.”

《아무리 강해져 봤자다. 한 명만 나와 함께 한다면 압도하는 것쯤은 손쉽다.》

“처음은 그러겠죠. 하지만 그때 죽이지 못한다면 돌이킬 수 없을 겁니다. 지켜보셨으니 아시겠죠? 그녀의 성장 속도가 어마어마하다는 걸. 그러니 부디 성급한 판단은 자제하시길 추천합니다.”


사뿐히 예를 취하고는 비젠탈에 올라탔다.



《만약 전원이 나와 같은 뜻을 보인다면 어쩔 거냐? 우리 넷이라면 제아무리 이스피리아라 하더라도 죽음은 면치 못할 것이다.》

“그리된다면 당신들을 죽일 겁니다.”

《이번엔 반대로 물어보마. ······네까짓 게 그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아뇨. 비젠탈조차 못 이기는 제가 당신들에게 닿을 리가. 하지만 맹세하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반드시 당신네를 죽이겠다고. 그것을 이루기 전까지는 이스피리아 양의 곁으로 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죠.”

《미친 자답게 허풍이 대단하구나.》

“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죠? 이미 이스피리아 양이라는―― 겨우 20년을 산 인간이 당신들을 뛰어넘는다는 기적을 보였는데?”

《말 그대로 기적이다. 너와는 연이 없는 이야기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불가능은 없다는 것을 그녀가 증명해 냈으니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마무스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할 말은 다 했고, 정말 그리할 생각이었다. 세상에는 신검이 있고 하니 찾다 보면 환수를 죽일 무구도 분명 존재할 터.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나름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는 다른 환수에게로 향했다.


다행인지 다른 환수들도 비젠탈이 기억하는 장소에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쉽게 만나긴 했는데······ 대답은 좋지 않았다. 대체로 좀 더 지켜본다는 듯했으나, 아니마무스와 크게 다른 의견은 아니었다.


――한 환수만을 제외하고.


그게 동쪽을 지키고 있던 히야신스였다.


참 신기한 환수였다. 목소리는 분명 듬직한 남자이건만, 어투와 간드러진 미성이 그 큰 덩치와 더불어 적응이 안 됐다. 그런 덕분인지 다른 환수와 달리 위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불만이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아니, 그녀 덕분에 환수를 조금 다시 보게 되었다. 적어도 히야신스만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됐다. 그녀는 그만큼 갑자기 찾아온 인간에게도 상냥했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그 특유의 나긋나긋한 분위기 때문인지, 여태 다른 환수에겐 하지 않았던 이야기마저 했다.



《어머나······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구낭. 아니마무스도 참······. 이런 가슴 아픈 이야기를 어쩜 그리 쏙 빼고 말한 거라니잉?!》


짐짓 화가 났다는 투로 말하는 히야신스. 그리고는 고생했다며, 맘고생이 심했을 텐데도 열심히 했다며 위로해 주었다.


가슴에 스며드는 위로였다.


그녀는 단순히 말만 그런 게 아니었다. 실제로도 히야신스는 이후 전장이 점차 넓혀짐에도 홀로 뜻을 같이 해주었다. 하물며 다른 환수들을 설득하기까지 했다. 분명 많은 이들이 죽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본래 자신들이 조약을 만든 까닭은 용왕 때문이 아니냐면서······.


물론 잘 설득되진 않았다. 애초부터 그들의 마음은 확고했으니까.


하지만 그리 확고했음에도 그녀 덕분에 끝끝내 환수들이 나서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히야신스가 빠진다고 하니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과연 3:1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싶어서······.


이들도 시기를 놓친 것이다.


강대한 존재로서 태고부터 살아왔기에 생긴 그들의 오만이었다.


어쩌면 우습게 봤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경고했음에도 이스피리아의 성장 속도를 얕봤고, 환수들이 나서겠다며 마음먹었을 때는 이미 그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나 기세등등하고 절대자처럼 굴던 그들도 직접 두 눈으로 그 광경을 목격했다.


본인들과 같은 환수가 무참히 살해되는 것을······.


크나큰 격전도 없었다. 이스피리아는 그저 자신에게 달려드는 환수를 벌레 퇴치하듯 가볍게 처리하였다. 후에 히야신스에게 듣기를, 이 당시 이스피리아의 마력레벨은 측정하지 못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더불어 이 시기 쯤부터 그녀는 대륙 전체에 널리 알려지는 그 위명―― 하얀 악몽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그 모습에 환수들은 돌변, 너도나도 힘을 합쳐야 한다고 외쳤다.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도 단호하게 군 주제에 막상 본인의 목숨이 달려있으니 신중해지기나 하고.


시간을 벌어준―― 당시엔 어찌 끝났는지도 모른 그 미래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함께 해준 히야신스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묵묵히 힘을 보태주었던 비젠탈과 안네만큼이나.


그래서 마국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뻔뻔하게 따라왔다. 히야신스와 다시금 재회하기 위해······. 솔직히 바지탄스들의 고향 일은 두 번째로, 호기심 정도의 관심밖에 없었다.


정 기회가 안 생기면 일행과 따로 떨어져 나와 만날 생각까지 했었다.


히야신스가 다른 미래를 떠올렸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만나 그때는 하지 못했던 감사를 전하고 싶었다.


찾아가는 길은 익숙했다. 직접 걸어서 가긴 처음이지만, 근처라면 헤매지 않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드디어 감사를 전했는데······ 되려 위로받았다. 전과 마찬가지로······.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비록 다른 미래의―― 한낱 꿈과도 같은 일임에도, 자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지지해 준 히야신스의 말은 무척이나 따뜻했다는 느낌이다.


참아보려 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하염없이 나왔고, 손바닥만큼 작아진 히야신스를 안고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잊지 않고 기억해줘서 고맙다면서······.


그렇게 시공간을 넘어, 라프리트는 후회뿐이었던 과거의 미련을 조금이나마 해소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회상편 끝!

허허~ 암울하고 빡센 미래였네요.

저때의 리아는 무얼 어떻게 해서 대륙 전체를 끌어들이는 싸움을 했을지 흥미진진하군요!

하지만 그 이야기는 언제 나올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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