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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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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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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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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06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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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DUMMY

왕형. 본명은 물론이고,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베일에 쌓인 정보꾼.


특유의 정보를 수집 능력과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는 정보꾼이면서도 널리 명성을 떨친 아이러니한 사람이었다.


그만큼 왕형은 특별했다. 정보력에 있어선 발군으로, 어지간한 단체와 국가의 정보부 및 암부보다도 특출났다.


그 탓에 온갖 자들이 왕형을 원하였다. 심지어 일부 세력과 나라의 상층부에서는 납치하여 본인의 입맛대로 쓰려고도 했었다. 그가 가진 정보는 범죄 같은 걸 따질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기에 주저는 없었다.


하지만 모두 다 실패했다.


포획하기는커녕, 왕형이 어디에 있는지, 누구인지조차 알아내지 못하였다. 아직도.


국가 단위로 움직였음에도 도망칠 수 있는 건 일반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왕형의 타고난 재능이 크게 한몫했다.


그건 바로 [신체변화].


왕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체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그 수준은 용왕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에겐 닿진 못 하더라도 월등히 탁월했다. 생김새는 물론이고, 성별마저도 완벽히 바꿀 수 있는――생식 활동마저 가능하다―― 탓에, 왕형은 여태껏 정체를 들키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10년 전까지는······.


설마 유일하게 정체를 꿰뚫어 보고, 단박에 포착해낸 이가 4살짜리 꼬맹이였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왕형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정을 듣고 보니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연둣빛의 큰 눈망울을 빛내는 꼬마야말로 신의 사도였으니.


신에게 선택되어 이 세상의 모든 미래를 전해 받은 존재에게 어찌 들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형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었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고백하는 사람이 성대하게 차일 걸 맞춘다거나, 살짝 삐져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사람을 정확히 짚어낸 모습을 보자 믿을 수밖엔 없었다.


시원찮아 보일 증명이다. 하지만 정보를 취급하는 왕형이기에 알 수 있었다. 즉석에서 갑자기 벌어질 이벤트를 맞추는 건 단순한 예측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오히려 이런 시원찮은 일을 골랐다는 것 자체가 왕형의 의심을 단숨에 불식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왕형은 듣게 됐다. 자신이 처할 운명이 어떠한지.


운명은 총 3개.


하나는 왕위 다툼으로 내전이 벌어진 혼란한 벨루디스에서 지금처럼 정보를 수집하는 것.


왕형으로서도 이건 참으로 행복한 미래였다. 여기저기 사건이 넘치다 보니, 지루할 틈도 없이 정보 수집에 여념이 없는 나날일 테니.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다음 두 개의 미래는 최악이었다.


그 첫 번째는 미쳐버린 용왕이 날뛰는 파멸의 세상.


그곳에선 왕형이 추구하는 재미고 뭐고 없다.


세상이 끝장나기 직전이니까.


사람이 살고, 세상이 멀쩡해야 정보를 수집하고 음미하며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정보를 생산해낼 사람들이 몽땅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기에 왕형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이후 결성될 토벌대와 임시 통합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 본의 아니게도 무상으로. 아무 보람도 없이.


뼈 빠진 헌신은 결국 빛을 본다. 여섯 영웅의 토벌대가 전원 그 목숨과 맞바꾸어 용왕을 토벌한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위업에 왕형 또한 공적을 인정받아 통합 정부에 정보부 장관 자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정체를 드러낸 20여 년의 생활은 왕형을 피폐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니, 질렸다고 표현하는 게 좋으리라.


용왕이라는 거대한 위협이 사라지자마자, 하나로 뭉쳤던 이들은 각자 야욕을 피우고 분열했다.


그 중심엔······ 안타깝게도 인간이 있었다. 그들은 토벌대의 리더인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의 영광이 마치 본인들의 것인 양, 타종족에게 여러 이권을 강요했다.


이전부터도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에 잔뜩 신물이 난 왕형은 그대로 잠적. 좋아하던 정보 수집도 그만둔 채 영영 모습을 감추게 된다.


왕형에게 최악인 건 바로 이것이었다.


인생이자 삶인 정보 수집을 그만두고 은거했다는 것―― 그토록 마음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자신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왕형은 모든 걸 포기한 본인의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마지막 미래도 그러했다.


어쩔 수 없는 인류 종말의 상황으로 내몰린 왕형은 정체를 드러내고 정보를 무상으로 제공하게 됐다.


그렇지만 그건 쓸데없는 짓이었다. 애당초 인류는 종말의 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파악한―― 자신을 속인 그 뛰어남에 감탄함과 동시에 왕형은 진위를 깨달았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어째서 본인이 아직 살아있는 것인지를.


효용 가치가 있어서 산 게 아니었다. 그저 인류에게 도움이 됐기에. 정보 제공을 통해 인류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좀 더 진득하니 발버둥 칠 여력이 생기긴다는, 고작 그런 이유로 살려둔 것이었다.


다른 말로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소리로, 이를 깨달은 왕형은 모든 일에 싫증을 느껴 잠적. 다만, 이 경우엔 제법 두렵다는 연유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이러나저러나 끔찍한 최후들뿐이다. 죽지는 않았다만 왕형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그래서 협력하기로 했다.


신의 계시를 받은 사도에게······.


그것이 벌써 10년이 넘었고, 왕형은 오늘도 신의 사도――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를 만났다.


만난 장소는 지난번과 똑같았다. 최근의 은신처인 루띠 아르제티아의 집무실에서 왕형은 입수한 정보들을 라프리트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딱히 특별할 건 없다고요?”

“나야 모르지. 이쪽은 정보를 제공할 뿐, 생각하는 건 그대라고?”


냉정히 잘라내는 말에 라프리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러나 괜한 입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는지 이내 생각에 잠겼다.



“하나만 확인할게요. 정말 그가 알렌나시안 후작과 접촉한 건가요?”

“맹세코. 아서라는 용사 건과 더불어 틀림없다는 걸 보증하지.”

“정확한 시간은요?”

“아마 지금 만나고 있을 걸세.”

“용건이 뭔지는 모르나요?”

“아쉽게도······. 그의 집사가 물어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더군. 후에 알아낸다면 그대의 사용인에게 일러두지.”

“부탁해요.”


짧지만 진지하게 말한 라프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돌아가는가? 아직 차가 남았는데.”

“변장했다지만 오랫동안 오너의 방에 있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건 그렇지.”

“알고 있다면 이젠 슬슬 연락용 마도구를 쓰는 게 어때요? 저도 매번 이리 찾아오는 게 번거로운데.”

“아무리 사도님의 부탁이라도 그건 안 돼.”

“역탐지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그런 게 통하지 않는 아티팩트라고 몇 번을 말했잖아요.”

“아니. 세상에 완벽이란 없어. 정보꾼인 이상 이건 절대적이야. 양보는 못 해. 귀찮더라도 그대가 조금 더 고생하면 돼.”

“으으. 고집불통.”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가? 그대로 돌려주지.”


10년의 만남 동안 쭉 이어지던 제안이었지만, 대답은 변함없다. 역탐지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정보꾼으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평행선을 이루자 라프리트는 거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제법 삐진 듯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고개만 돌려 쳐다보는 라프리트의 눈은 심술궂은 아이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그리 말하니.”

“자, 잠깐. 무얼 하려는 거야?!”

“무얼 하긴요. 그냥 앞으로는 여길 오는 빈도가 높아질 뿐이에요.”

“어, 어째서?”

“조금 있으면 방학이잖아요. 뭔갈 꾸미기엔 적당한 시기이니 당연히 촉각을 곤두세워야죠.”


틀리진 않았다. 베르다드의 방학은 9월 초순부터 시작하여 3월 초순까지로, 약 6개월가량이다. 라프리트의 말대로 무언가를 준비할 시간은 많다 보니 지금부터 경계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판단이었다.


게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도 많다. 지금은 원만한 관계더라도 방학이 끝난 뒤에는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6개월이란 시간은 그만큼 긴 것이었다.


그렇지만 등골이 오싹거린달까, 왕형은 원인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감은 적중했다.



“최대한 저도 조심하겠지만, 말씀하신 대로 완벽이란 없으니 또 모르겠네요. 방문하는 주기가 짧아져 꼬리가 잡힐지도······. 혹시 모르니 미리 사과드릴게요. 당신도 만일이라는 게 있으니, 다음에 하실 일을 미리 알아보시는 게 어때요?”

“협박하는 거야?”


라프리트는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은 제가 끌어들인 제 동료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마세요. 협박 같은 게 통할 사람도 아니면서.”

“이거 실례했군. 설마 사도님께서 보잘것없는 날 이리 아끼실 줄이야.”

“······다음에 또 뵙도록 하죠.”

“암. 언제든 찾아오게.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지.”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모습에 짧게 혀를 찬 라프리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길로 방을 나갔다.



“하하. 화나게 해버렸나?”


조금 실패했다며 왕형은 고개를 저었다.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그보단 나도 슬슬 출발해 볼까?”


뚜득, 어깨를 푼 왕형은 근래 맨날 짓고 있던 사근한 미소를 감췄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우두둑―― 뼈가 뒤틀리는 듯한 끔찍한 소리를 내며 기괴하게 뒤틀렸다.


누군가가 봤다면 비명을 질렀을 이 현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3분여 흘러 멈췄을 땐, 밑으로 갈수록 연해지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없었다. 대신 자줏빛의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성이 있었다.


키마저도 판이하게 줄어든 여성은 뻐근해진 목을 돌려 풀었다.



“아야야. 아파 죽겠네. 이래서 하기 싫었는데. 옷 갈아입기도 귀찮고.”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발랄한 목소리로 고통스럽게 말한 여성―― 왕형은 늘어뜨려진 소매를 봤다.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쉰 왕형은 주섬주섬, 준비해놓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모습은 특별한 것 없는 전형적인 마을 처자의 모습이었다. 어딜 가든 눈에 띌 일은 없으리라.


왕형은 거울을 보며 미소를 외형에 어울리게 만들고는 책장의 한 부분을 밀었다. 그러자 책장은 통째로 회전하였고, 왕형은 익숙하게 맞은편 방으로 가, 루띠 아르제티아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그렇지만 루띠 아르제티아엔 젊은 여성 직원이 많은바, 이내 사람들은 관심을 거두고 제 갈 길을 갔다. 혹시 몰라 이 얼굴로 직원 채용도 해둔 터라, 만약 가게 직원과 마주하더라도 큰 트러블은 없을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왕형.


그가 간 곳은 빈민가와 멀지 않은 주거구역으로, 왕형은 근처에 있는 작은 노점으로 갔다.


노점은 간단한 요깃거리와 함께 맹물과 비슷한 차를 파는 곳이었는데, 지붕 대들보에 달린 메뉴판을 슬쩍 읽은 왕형은 대충 몇 가지를 주문했다.


이윽고 주문한 것이 나왔고, 왕형은 조촐하게 차려진 자리에 앉아 차분히 먹기 시작했다.


언뜻 한가하게 시간이나 때우는 것 같지만 그건 아니었다. 왕형이 이곳에 온 건, 당연하게도 조사―― 정보를 수집하기 위함이다. 오히려 다른 이유로 이런 곳에 올 이유 따윈 없다.


물론 이 점포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건 아니었다.


당연했다. 정보가 돌아다니는 곳은 정보꾼에게 있어선 적진. 직접 모습을 드러내며 수집하러 돌아다니는 건 삼류 중의 삼류나 할 짓. 되려 다른 염탐꾼에게 정보를 흘려댈 수도 있다는 점에선 삼류보다도 못하다.


그런데도 왕형은 이곳에 왔다. 제법 거리는 떨어졌다지만 초일류인 왕형이 취할 방식은 도저히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정보는 왕형조차도 머리가 갸우뚱해질 만한 것이었기에······.


왕형은 차를 훌쩍이는 것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대륙 전체를 주름잡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왕형의 특별한 능력은 [신체변형]만이 아니었다.


왕형―― 그의 진정한 능력은 귀. 여태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은 것도, 명성을 떨칠 만큼의 정보력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다 상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능력은 범상치 않아, 어디든,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상관없었다. 왕형은 거리조차 뛰어넘어 그 장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건 일종의 마법과도 같은 일로,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왕성의 견고한 결계조차도 간단히 돌파해내어 쉽게 그 자리를 꿰뚫어 봤다. 마도구도 소용없다. [밀실]과 [방음]의 마법으로는 왕형의 귀를 감히 막을 수 없었다.


이쪽 분야에서는 최고봉일 카딜라신디의 수령조차 간파해내지 못한 일이다. 그러하다 보니 왕형 스스로도 탐지나 방해할 것 따윈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얼마 전까지는.


처음으로 들을 수 없는 곳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갑자기.


그전까지는 분명히 귀가 닿았던 곳이었다. 몇 년이나 염탐했었으니 확실했다. 하지만 수차례 시도했음에도 이젠 더는 들을 수 없었다.


――이스피리아가 들어선 그 방은.


나쁜 마음이나 정보를 수집할 요량은 아니었다. 라프리트와 협력하게 된 계기이자, 입이 닳도록 언급하는 이스피리아가 아닌가? 그래서 살짝 어떤 인상인지 파악만 하려고 한 것이었다.


하지만 마치 무언가의 막이 있는 듯 귀가 닿지 않았다.


방을 나왔을 때를 노리기도 했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스피리아에겐 귀가 닿지 않는다. 아이리스와 델리안마저도······.


벨루디스 측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온갖 방법을 시도했지만, 원거리 탐지를 저항하는 아티팩트를 지닌 것 같다며 푸념을 늘어놓고는 했다. 덕분에 물리적인 감시자가 대폭 늘게 됐는데, 이는 왕형에겐 형편이 좋았다. 이들의 보고를 엿들어 대충 이스피리아의 동향을 살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놀라기는 했지만 쉽게 받아들일 순 있었다.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 용왕과 갈라사르의 마녀잖은가.


하지만 이스피리아가 만들었다는 오토마타―― 골렘마저도 그럴 거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분명 이스피리아들처럼 막힌 건 아니었다.


그러나――



“흠. 정탐입니까? 몰래 엿듣는 건 좋지 않으니 그만두시는 걸 권고드리는 바입니다만?”

“아앙?! 뭘 마음대로 쳐 듣는 건지요. 죽고 싶은 겁니까?”

“이봐, 왕형 씨. 여긴 애들밖에 없다구. 나올 것도 없고, 괜히 신경 쓰이니까 딴 데로 가줘. 기왕이면 세컨드 쪽을 추천해. 좋은 걸 들을 수 있을걸?”


단방에 들킨 것도 모자라, 정체마저 완벽히 파악됐다.


소름이 돋다 못해 무서웠다. 어투가 정중하고 말고 할 것 없이, 전원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기에 더더욱.


만들어져서 그런지는 모른다. 어딘가 평범한 사람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재차 엿들을 엄두는 나질 않는다. 본능적으로 깨닫고 만 것이다. 이들에겐 절대 도망칠 수 없다고······. 어떠한 모습으로 도망을 치든 반드시 찾아내, 무덤덤하게 죽일 거다.


최후의 경고를 어길 만큼 왕형은 바보가 아니었다.


‘진정하자······.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정보로 파악하면 될 일이야. 직접 엿듣지만 않으면 죽지 않아. 그러니까 경고한 거잖아? 그래. 괜찮으니까 진정하자.’


정말 괜한 것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느새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빠르게 손수건으로 닦고 왕형은 숨을 골랐다.


무서운 건 사절이었던 왕형은 단숨에 떨쳐내고는 얌전히 때를 기다렸다.


다행히도 간절함이 통했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저 멀리 의미심장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봐! 어떻게 된 거야?! 이야기가 다르잖아?”


흥분한 남자의 목소리에 이어 차분한――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드릴 말씀이 없군요. 솔직히 이번 일은 저도 좀 놀랐습니다. 설마 이리 흘러갈 줄은······.”

“변명은 됐어! 그보다 이젠 어떡할 거야?! 다 틀어졌잖아!”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할 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편히 계시길. 제가 언제 실망시켜 드린 적이 있습니까?”

“그렇지······. 미안. 조금 흥분했나 봐.”

“아뇨아뇨. 가슴 졸였을 그 마음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불초한 제 탓이죠. 하지만 더는 그러한 경험은 겪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반드시 데인 님이 원하시는 모든 걸 다 이루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 믿고 있어.”


순순히 수긍하는 남자.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왕형이 알아내고 싶은 것이었다.


무언가를 꾸미는 거야 인간사회엔 차고 넘치니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지금도 귀를 기울여보면 상대를 제치기 위한 모략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그렇지만 저들의 대화는 암만 들어봐도 기묘했다. 언뜻 듣기에는 크게 걸리는 점이 없는 듯하다. 그러나 대화 속에 담긴 감정들의 변화가 묘하기 짝이 없다.


남자는 분명 크게 격분했었다. 근데 한순간에 진정하여 사과까지 했다.


이거 자체만으로는 충분히 볼 법한 일이라는 건 안다. 그러나 남자―― 데인은 그만큼 자제심이 높거나, 인격적으로 뛰어난 자가 아니었다. 만날 장소에 도착 전까지도 그는 잔뜩 욕지거리를 되뇌고 있었으니까.


재차 생각해봐도 데인은 필시 그런 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처음부터 뒤가 구린 모략 같은 건 짜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마음을 고쳐먹고 믿는다며 순순히 말을 따랐다.


정보꾼으로서―― 무수히 많은 대화를 엿들었던 왕형조차도 이건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번 한 번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이런 기묘한 대화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처음엔 단순히 우연이겠니 싶었는데,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


무언가의 술수일 수 있겠다.


이러한 의심에 불을 붙이는 건, 바로 저 성별을 알 수 없는 자였다. 여간 볼 수 없었던 이 일의 중심엔 언제나 저자가 존재했다.


오늘 왕형이 이 자리에 온 것도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매혹] 같은 마법을 쓴 것인지, 그 술수를 파악해내려고. 먼 곳에서는 마력의 흐름을 느낄 수 없기에 이곳까지 몸소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답은―― ‘아무것도 없었다’였다.


마법을 썼을 만한 마력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병뚜껑을 여는 소리나, 다른 뭔가를 꺼내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실수는 없다. 대화 이외에 다른 것을 했다면 놓치지 않고 들었을 것이다.


‘다른 무언가의 개입이 있다고 보긴 어려워. 하지만 저 대화만으로 망나니 같은 사내가 수그러든다고?’


왕형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이윽고 생각을 멈췄다.


자신은 정보꾼. 정보를 토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는 건 다른 자의 역할이다.


깔끔하게 떨쳐낸 왕형은 남은 차를 마시고는 자리를 떴다.


왕형은 그 길로 곧장 루띠 아르제티아로 돌아와, 원래대로 모습을 바꾸고는 커피를 내려 집무실 의자에 앉았다.



“자, 누구를 고를까.”


[신체 변형]의 아픔을 느끼며 왕형은 잠시 생각했다.


왕형의 귀는 멀리멀리, 루 몬테르에마저도 닿는다. 하지만 여러 군데를 동시에 들을 순 없었다. 정해진 장소, 딱 하나만을 지정하여 들을 수 있었다.


뛰어난 건 사실이지만 한계는 명확.


그러니 선택해야 했다. 남자를 고를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를 고를지.



“역시 머리를 쓰는 건 나한테 맞지 않아.”


한참의 심사숙고 끝에 왕형이 내린 결론은 포기였다. 정보꾼은 정보꾼답게, 머리를 쥐어짜내는 일은 남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왕형이 믿을만한 사람은 이 세계에 오직 한 명. 그는 즉시 라프리트와 접촉하기로 했다.










모처럼의 휴일.


매번 이번에는 어디로 놀러 갈까만을 궁리만 했던 리아였지만, 오늘은 얌전히 방에 있었다.


딱히 약속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반대로 약속은 없다. 방학 전이라 그런지 친구들은 모두 바빠 만날 약속은 하지 못했다. 최근엔 자주 놀러 오는 비비안들도 마찬가지. 아이리스와 함께 도서관에서 시험 대비 공부를 하러 갔다.


이렇듯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남은 것이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열심히 아이디어를 궁리하고 있었다.


‘응. 델리안의 임금은 이젠 걱정 없다지만 마냥 농땡이 부릴 순 없지. 우리 넘버즈들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말이야.’


그렇다. 루비아에게 한 소리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껏 기특한 자신을 칭찬한 리아는 테이블에 놓인 조그마한 완드를 들었다.


마광석이 박힌 꼴을 보면 영락없이 마법지팡이로 보인다. 하지만 아니다. 잘 보면 마광석에는 술식이 새겨져 있었다. 술식 없이 길들이기를 하는 마법지팡이와는 분명하게 다른 물건으로, 이 10cm 남짓한 완드는 마도구였다.


이 완드가 만들어진 배경은 실로 하찮은 것이었다. 그저······ 심심풀이로 만든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처음의 리아는 의욕이 넘쳤었다. 이번에야말로 루비아가 놀라 나자빠질 것을 반드시 만들겠다며, 벌어지지도 않은 미래를 그리기까지 했었다.


그게 딱 10분까지였다.


아무리 쥐어짜도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자 불타올랐던 의욕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고, 리아는 테이블에 누워 다리나 흔들거리면서 빈둥거렸다.


바로 그때, 에르가 고생한다며 다과와 음료를 가져다줬다.


잠깐 다퉈 대화하지 않게 된 적도 있지만, 리아는 기본적으로 에르에게 푹 빠지다 못해, 무의식중에도 그를 찾을 정도였다.


그런 사모하는 남편에게 축 처진 한심한 꼬락서니를 어찌 보이겠는가.


얼마 전 화해하기도 했겠다, 되도록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리아는 곧장 머리가 터질 정도로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렇게 탄생의 비화가 완성됐다면 완드도 나름 만족했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아이디어는 나오지 않은 것이다.


잔뜩 울상이 된 리아는 절망했다. 안타까울 만치 텅텅 빈 자신의 머리통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때에 아이가 다급히 한 가지 제안을 전해왔다.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게 어떻겠냐고.


그 제안대로 리아는 기분상 뜨거워진 이마 위에 얼음을 얹어 쉬었다. 그러다 번뜩, [치유]면 나을까 싶었고, 기왕 쉬는 거 생산적인 일이나 하잔 생각에 창문을 넘어 밖에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왔다.


이리하여 탄생한 게 이 완드―― [치유]의 마도구였다.


딱히 어려운 건 없었다. 적당히 나뭇가지의 첨단에 마광석을 대충 끼워 넣고, 술식을 새겨넣었을 뿐이니까.


여타 마도구와 다를 바 없다. 멀쩡히 작동도 하여 [하급치유]는 제대로 발동했다.


――그렇게 리카드의 염원인 [치유]의 마도구가 만들어졌다.



“······응? 어라?”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은 리아는 멍한 눈으로 완드를 보았다.


그리고 딱딱하게 테이블 너머, 맡은 편 자리를 봤다.


거기에는 몇 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사실 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손님―― 아니,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들과 함께였다.


‘제대로 된 손님이었다면 나도 이처럼 없는 사람인 양, 혼자 물건이나 만들진 않았겠는데······.’


이번만큼은 이 푸대접이 좋지 않게 작용했다. 왜냐하면 불청객들은 인디아 주교들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원치도 않던 불청객들이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터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내쫓고 싶었다. 그렇지만 신분이 신분이다. 차마 그러진 못하고 안으로 들이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배알이 꼴린다. 그래서 하다못해 최소한의 복수로 혼자 있는 듯 굴었는데······.


[치유]가 신의 축복으로 여겨지길 바라는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마도구를 만들었다.


제아무리 신경줄이 굵은 리아라도······ 은근히 눈치가 보였다.


······뭐어, 크게 상관은 없지만.



“음. 잘 만들어졌네~?”

“그래 보여. 생긴 건 싸구려 막대기지만.”


대놓고 한 도발을 인디아가 덤덤하게 받아쳤다. 별 타격은 없어 보인다.


이러려고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상한 리아는 비꼬는 티를 팍팍 내며 물었다.



“여억~시 세인트리안! [치유]를 독점하는 만큼 [치유]의 마도구쯤은 널렸나 봐요?”

“부정하진 않을게. 모르긴 해도 아티팩트 급의 것들도 제법 있을 거야.”

“쓰레기들이 따로 없네요. 그렇게 자기 혼자 국력을 높이는 게 인간을 위한 건가요?”

“······그래.”


머뭇거리긴 했지만 확고하게 답한 인디아.


리아는 눈을 가늘게 하고는 그를 쳐다봤다.



“저기요, 주교님. 말이 나온 김에 우리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요. 도대체 인간을 위한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인간이란 종을 염려하는 것 말고 뭐가 더 있겠어?”


또 입을 다물리라 생각했는데, 답변이 돌아와 리아는 꽤 놀랬다.


과연 주교. 심판관들보다도 발언할 수 있는 권한이 큰 모양이다. 운도 저번과는 달리 반발하지 않고.


어떻게 온 기회이거늘 놓칠 순 없다. 곧장 감정을 숨기고는 조금 진지하게 마음을 다졌다.



“염려하신다고 했는데, 무얼 염려하는 건가요?”

“인간의 존속―― 멸종을 우려하는 거야.”

“스케일이 크지만······ 생각보단 멀쩡한 이유네요. 핑곗거리로는 나쁘지 않아요.”

“핑계가 아니라 그게 전부야. 우리 성국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 사력을 다해왔어.”

“타국의 약체화를 꾀하면서까지요?”

“맞아.”


역시 틀리지 않았다. 이들은―― 세인트리안은 고의로 타국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만, 결코 멸망까지 끌고 가진 않는다. 원하는 건 약체화이기 때문에. [치유]를 독점하거나, 나라가 힘들 때 개입하려 드는 것도 모두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학기 초 루비아와 라프리트에게 현 정세를 들었을 때부터 얼추 예상했기에 놀라움은 덜했다. 그렇지만 막상 들으니,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치 허탈하다.



“그냥 다 귀찮아졌는데, 일단 물어는 볼게요. 인간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약체화는 불리하지 않나요? 그건 오히려 멸종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잖아요.”

“아니. 틀림없는 생존을 향한 길이야.”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요?”

“다소 정도를 넘은 자가 있었다는 건 인정해. 우리의 감독 불찰이지.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는 생각엔 변함없어.”

“타종족의 배척도 포함해서요?”

“그래. 우린 절대 그들과 우호적인 입장이어서는 안 돼.”


조금만······. 조금만 더 들으면 무언가 감이 잡힐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리아는 생각을 정리했다.



“약체화, 배척······. 이 모든 것의 시작은······ 대전쟁? 아, 그러고 보니 케트로 씨가 그랬었죠. 인마대전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인간의 본성이라든가 그런 소릴 했었는데······, 인디아 씨, 혹시 관련이 있나요?”

“······.”


이것만큼은 인디아라도 대답할 수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흐음······. 이제 보니까 [맹약]이 걸려있네요. 그걸 해제한다면 말씀해 주실 건가요?”

“전혀. 제약이 있든 없든 내가 말할 일은 없어. 죽는 그 순간까지 입을 열지 않도록 맹세했거든.”

“뭐, 그럴 거 같았어요.”


못내 아쉬운 건 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으니 말이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인마대전이요. 그것에 관한 기록은 어디로 가면 볼 수 있나요? 슬쩍슬쩍 둘러보고 있기는 한데, 영 찾을 수가 없네요.”

“인간들의 나라엔 남아있지 않아. 우리가 전부 없앴거든.”

“아~ 역시 당신들이었나요?”

“짐작은 하고 있었나 보네. 하긴 이만큼이나 부자연스러우면 누구라도 알겠지.”


······아니. 알지 못했다.


알 수 있었던 건 전부 에르의 조력 덕분이었다. 그가 넌지시 말해주지 않았다면, 아마 100%의 확률로 인위적인 낌새 따윈 냄새조차 맡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드러낼 순 없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인디아들에게는 절대 바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담아 리아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 대충요.”

“······.”


인디아가 빤히 쳐다본다.


식은땀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지만 리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때아닌 눈싸움이 벌어졌는데, 인디아가 먼저 한숨을 쉬며 그만뒀다.



“됐다. 널 보고 있으면 불필요하게 맥만 빠져. 그보다 이젠 나도 좀 물어볼게.”

“아~ 어쩐지 나불나불 잘도 이야기한다 싶었더니 이걸 노렸나요?”


인디아는 부정하지 않고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한 방 먹었네요. 하지만 받은 게 있으니 관대하게 넘어가죠. 궁금한 게 뭔가요?”

“가이란이야.”

“왜 죽였냐고요?”

“비슷하지만, 아니야.”

“헤에······. 동료의 죽음인데도 의외로 냉철하네요.”


화해는 했다지만 그때의 일은 리아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과장되게――마치 자신이 했음을 강조하려는 양―― 말했는데, 놀랍게도 인디아는 무반응이었다. 화를 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감정의 흔들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세 심판관도 그러했다. 침착하니 가이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대의가 어떻든 남을 해치는 거야. 죽을 각오 같은 건 처음에 끝내뒀어. 이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각오를 못 하는 놈 따윈 사전에 내 면담에서 걸러져. 오히려 하고 싶은 일을 하다 죽은 건 우리에겐 축복이야. 슬퍼는 하되, 원통해하진 않아.”


그리 말하는 인디아의 눈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차마 더러운 일에 손을 댄 자라고는 볼 수 없을 만치 아름답게.


――너무나도 역겨웠다.


본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것만 같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역겹고 역겨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리아의 입가는 예쁜 호를 그렸다.



“당신들은 정말 역겨운 쓰레기들이네요.”

“아아. 그 말대로야. 우리들은 비겁하고 역겨운 쓰레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광대처럼 너스레를 떨며 비하하는 인디아에겐 주교다운 위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존재하질 않았다.


피식 웃은 리아는 턱을 괴고는 테이블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쓰레기들 따위에 쓸 시간은 없어요. 말을 섞는 것만으로 귀가 썩어들어갈 지경이니까 퍼뜩 용건이나 말해보세요. 제1 위상 씨의 뭐가 궁금한 건가요?”

“가이란 그 자체야. 그에게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어?”

“흐음. 글쎄요······. 그 미치광이랑 만난 건 4분 안팎에 불과해서.”

“미치광이란 건?”

“그대로의 뜻이에요. 그자는 신관이면서도 크게 뒤틀려있었어요. 타고난 순수함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 탈선의 정도는 혐오감이 들 만큼 심각했죠.”

“마법의 낌새는?”


뭔가 묘한 의도가 담긴 질문이다.


이래서는 마치――



“혹시 그가 조종당했었다고 의심하는 건가요?”


인디아는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듯 망설였지만, 이내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래전의 일인데, 언제부터인가 가이란에게 위화감을 느꼈어. 처음 만났을 때와 조금 다르다고 할까? 하지만 딱히 뚜렷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아 기분 탓이겠거니 싶었어.”

“그런데 아니었다?”

“모르겠어. 사실은 지금도 헷갈려. 그저 내 보는 눈이 잘못됐을 수도 있고. 그러니 묻는 거야. 이젠 나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겠거든.”


젊은 외형에 걸맞게 인디아의 품행은 언제나 방정맞았다. 그러나 올곧게 바라보는 지금의 그는 한없이 진지하여 다른 사람이란 착각이 들게 했다.


‘아니, 이 모습이 바로 인디아 본연의 성품이겠지.’



“이스피리아. 네 실력을 믿고 물을게. 가이란은 누군가의 마법에 걸린 상태였어?”


리아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봤다.


그리고――



“아뇨. 그는 마법에 걸리지 않았어요. 제 이름, 이스피리아에 맹세할 수 있어요.”

“그래······. 내가 틀렸었나 보네.”

“그건 몰라요. 제가 증언하는 건 그저 마법에 당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에요.”

“다른 술수가 있다는 소리?”

“그것도 몰라요!”


당당히 외치는 말에 인디아가 살짝 짜증이 섞인 눈으로 본다. 그러나 리아는 굽히지 않았다.



“모르는 건 모르는 거예요. 의구심이 다 밝혀지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일이에요.”

“쭉 가능성만 열어둔다고?”

“맞아요. 어떤 사건들은요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 전말이 풀리기도 하거든요? 그러니 단정 짓지 않을 거예요. 찝찝하게 넘기기보단 그게 낫잖아요?”

“확실히······. 그럼, 이스피리아――”

“――부탁하지 않아도 한 번 알아볼 거예요. 저는 그 일의 관계자이기도 하니까.”

“고맙다. 나도 개인적으로 알아는 볼게. 혹시 단서가 나온다면······.”

“정보를 공유할게요. [염화]는 쓸 수 있죠?”

“그래. 고마워. 진심이야. 정말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감사를 전하는 찰나, 인디아의 눈엔 살짝이지만 안도하는 감정이 깃들었다.


리아는 혀를 찼다.



“감사는 무슨. 처음부터 이럴 셈으로 찾아왔으면서.”


그랬던 거다. 인디아는 애초에 답을―― 가이란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했다고 확정한 상태로 찾아온 것이었다. 알고 싶다느니 물어본 건 단순히 이쪽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었다.


앞선 정보의 제공도 마찬가지. 다음 단계를 나아가기 위한 초석이었다.


짜증 날 정도로 보기 좋게 낚였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네요. 이참에 신관은 때려치우고 연기자로 전향하는 건 어때요?”

“미안해. 괜히 나이를 먹은 게 아니라서 말이야.”

“잘난 척은 됐네요. 볼일이 끝났거든 얼른 돌아가기나 하세요.”

“네게 볼일은 끝났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어. 그거만 마치고 돌아갈게.”


그리 이야기한 인디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뭘 하나 싶었더니, 성의에 걸쳐진 금색의 영대를 단정히 고쳐 매는 게 아니겠는가.


급작스러운 치장에 황당해하고 있자니 준비를 마친 인디아가 돌연 몸을 돌렸다.


그의 시선의 끝에 있는 건 청순하고 가련한 생김새의 여성으로,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다른 동료들을 빠르게 쳐다봤다. 하지만 그 둘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금익편성의 심판관, 제 10위상, 리블리지.”


어울리지 않는 인디아의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심각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지명 당한 리블리지는 거의 반사적으로 정십자를 그리며 무릎을 꿇었다.


‘뭐다냐······. 왜 여기서 이러고들 있는 거야? 다른 데 가서 하면 안 되나?’


당장 내쫓고 싶다는 기분이 부풀어 오르는 것과 함께 인디아의 말이 이어졌다.



“신의 종으로서, 인간을 위해, 성국을 위해 헌신한 그대의 노고는 능히 찬사받아 마땅하다.”


여기까지 들은 리블리지는 뭔가 짐작되는 게 있었는지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다는 그녀의 이 반응을 보고도 인디아는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늘에 가려 그대의 헌신과 사랑은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주께서는 필히 굽어살펴 주시리라. 우리 또한 잊지 않고 그대에게 감사한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 약속한다.”

“자, 잠시만요!”

“――하여!”


턱.


황급히 외치는 말은 무시. 잘라내듯 끊은 인디아는 눈물이 글썽거리는 리블리지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제10 위상, 리블리지! 나, 인도의 주교가 예하의 입을 빌려, 오랜 그대의 헌신에 예를 표하며, 그대를 심판관의 직위에서 해임한다!”

“주, 주교님. 어, 어째서······.”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리블리지의 눈에선 굵은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인디아는 멈칫하여 아련하게 리블리지를 봤으나, 이내 상냥하게 미소 짓고는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태 고생 많았다, 리지.”

“주교님······.”

“자자. 해임이라면 듣기엔 안 좋지만, 사실 엄청 명예로운 일이거든? 엄청 오랫동안 남을 위해 헌신하고 헌신한 사람만이 손에 넣을 수 있는 영광이니까 말이야. 그저 시기가 지금일 뿐, 절대 네가 슬퍼하길 바란 건 아니야. 생각해 보렴. 당연하지 않니? 딸이 슬퍼하도록 만들 아버지가 어디 있다고! ······그러니까, 리지. 울지 마렴······.”


따스하게 울리는 인디아의 목소리는 참으로 진실했다. 그야말로 딸을 아끼는 아버지처럼······.


이윽고 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소리가 커진다.


‘와~ 저, 저, 능구렁이 좀 보소. 어쩜 저리도 뻔뻔하게 굴 수 있는지 그 속을 모르겠네. 루비아 씨도 저 정도는 아닌데.’


······몹시도 탐탁지 않다.


그런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리아는 삐딱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는 한쪽 다리를 경박스럽게 떨었다.


물론 리아도 사람인지라 이 광경을 두고 지금 당장 뭐라 할 기분은 안 들었다. 하지만 열받는 건 어쩔 수 없달까, 용케 사람을 면전에 두고 잘도 낚아댔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격투기로 따지자면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인디아의 저 태연자약한 짓이 이해됐다. 같은 부모로서······.


그야 당연히 무엇인들 이용하고 써먹을 것이다. 설령 동료를 죽인 극악무도한 살인자라도. 그게 부모라는 족속들이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욕을 먹을지라도 망설임 없이 시행할 수 있다.


‘나로선 끔찍하게 불쾌하지만!’


흥, 콧방귀를 낀 리아는 그렇게 홀로 삐져, 에르가 재차 따라주는 특제 음료를 마시며 시간을 달랬다.


잠시 후 울다 풀이 죽은 것인지 리블리지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인디아는 걱정스레 보다가 리아에게로 다가와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신관으로서의 예는 없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아버지로서 마주했다.



“염치가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우리 리지를 부탁한다.”

“썩 나가기나 하세요. 소금 뿌리기 전에. 당신의 저 커다란 딸도 같이. 벌써 여기다 버려둘 생각은 말고, 방학 때나 데려오든지 말든지 하세요. 알겠어요?”

“고맙다······.”

“징그러우니까 그만둬 줄래요?”


순간 원래의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온 인디아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래. 꼴도 보기 싫어하는 거 같으니 이만 가볼게. 아아. 그래도 정보 공유 때문에 올지도 모르니 그건 양해해줘?”

“에르, 소금 좀 부탁해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졌다 나타난 에르는 엄청난 기세로 소금을 뿌려댔다. 리블리지는 제외됐다. 좀 의외랄까, 에르도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머지 셋에겐 가차 없었다. 단지 안에 든 소금이 금세 동이 날 정도로 맹렬하게 부려줬다.


‘그래봤자 아무 의미도 없지만······.’


저들은 이미 목적을 이뤘다. 계속해서 소금을 꺼내 뿌려봤자 기꺼이 맞으며 입가를 올릴 뿐이었다. 리블리지를 부축하는 인디아에 이르러서는 환한 미소마저 띠고 있었다.


어처구니없었지만, 보던 리아는 말을 걸었다.



“이봐요, 인디아 씨. 하나만 물어볼게요.”


일시적으로 소금 세례가 멈추고, 머리 위에 소금눈이 잔뜩 쌓인 인디아는 고개만 돌려 쳐다봤다.



“제1 위상 씨가 조종당했다고 확신한 계기가 뭔가요?”

“리시타야. 그 녀석이 우리에게 왔을 땐 완전 넋이 나가 있었는데, 문득 이런 소릴 했어. 확실히 자신이 알던 가이란과는 무언가가 달랐다고······.”

“근거가 부실해 보이는데요?”

“아니. 리시타는 가이란과 오랜 친구 사이야. 나만이 아니라 걔도 위화감을 느꼈다면 틀림없으리라고 봐. 분명 배후가 있을 거야.”

“흠. 그런가요.”


대화가 끝나고 재차 시작된 소금 세례를 맞으며 인디아들은 방을 나갔다.


확 조용해진 방.


리아는 인디아들이 머문 자리와 닫힌 출입문을 보며 고심했다.



“흑막인 줄 알았는데 그 뒤에 또 다른 흑막이 있다라······.”

“리아는 어떻게 생각해?”

“에르도 봤다시피 리블리지 씨를 떼어놓기까지 했잖아요? 당사자 빼고는 정해진 이야기 같고, 굳이 공들여 거짓말할 이유는 없다고 봐요.”

“그럼?”

“조사해볼 가치는 있어 보여요. 헛발질이면 다행인데, 만약 정말로 그 흑막이라는 게 있으면 좀 위험할 거 같아요.”


가장 강하고 굳세다는 제1 위상이 조종당한 것이다.


괜히 인디아가 얼굴에 철판 깔고 여기서 리블리지의 직위를 해임한 게 아니다. 어지간한 사람은 당해낼 수 없을 터. 강제로 리블리지를 떠맡도록 연극을 부릴 만큼의 위험성은 다분해 보인다.



“그냥 흘려듣기엔 인디아 씨의 사람을 보는 눈이 꽤 정확했어. 말릴 틈도 없이 밀어붙이면 내가 승낙할 걸 알았다는 소리니까. ······그렇다면 역시 존재한다고 봐야 하려나?”

“어떻게 할래?”

“낚이긴 했지만 일단 협력한다고 했으니까 알아보기로 해요. 왠지 불온한 느낌이 드니 루비아 씨와 라프리트 씨에게도 도움을 요청해봐야겠어요. 그리고 약속 잊지 말아요.”


약속이란 화해했을 때 정한 것으로, 용왕인 에르에게도 사명에 위반되지 않을 만한 조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조항이란――


첫째, 절대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

둘째, 죽일 상대가 생긴다면 정해진 방식을 통해 승자가 처리하도록 한다.

셋째, 긴급한 상황일 경우 예외적으로 동의 없이 죽여도 된다.

넷째, 위 조항들을 어기거나 조작할 시, 1년간 먼저 스킨쉽을 할 수 없다.


자꾸 죽인다는 소리가 나와서 살벌하긴 하지만 나름 합리적이다. 질질 끌며 어색하게 지내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정하는 편이 좋으니 말이다.


다소 벌칙 조항이 약해 보이지만······ 그건 문제없다. 강제력은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저것이야말로 리아와 에르에겐 그 어떤 벌칙보다도 치명적이니까.


그야······ 자면서 안을 수도 없는 게 아닌가?


각방을 쓰는 것과 다름없는 이 처벌은 상상만으로도 살이 떨리며 소름이 돋는다. 오죽했으면 평생 거절하는 일이 없던 에르마저도, 이건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며 1달로 줄이자고 제안했었다.


솔직히 리아도 같은 심정이긴 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애초에 조항을 지키면 될 일이다. 어기지만 않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에, 피눈물을 머금고 단호히 에르의 제안을 잘라냈다.


지금도 그렇다. 단호하게 에르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알겠죠, 에르? 약속했으니까 지켜야 해요?”

“······응. 알았어.”


미덥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일단 대답을 들은 것이니 만족했다.


걱정을 던 리아는 그렇게 어찌하면 좋을지 에르와 의견을 주고받았다.


작가의말

바닥에 흘린 소금은 에르가 수거하여 모두 페리의 간식에 썼습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덥습니다. 네. 더워요.

매번 그렇지만 여름에는 겨울이 빨리 왔으면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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