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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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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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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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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쪽

211

DUMMY

어느 관문이나 그렇겠지만 세인트리안의 관문도 그 역할이 있었다. 그건 바로 성지에 불미스러운 게 반입되지 않도록 걸러내는, 일종의 필터와도 같은 역할이었다.


더 없을 정도로 무척이나 중요한 업무다. 구태여 설명할 것도 없다. 그러하기에 관할도 중앙 행정 기관인 심의회가 맡고 있다.


하지만 중요도에 비해, 여태까지 유명무실한―― 까놓고 말해, 방치하다시피 놔둔 업무였었다.


달리 게을렀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그런 신앙심이 없는 자는 심의회엔 없었다. 도리어 여신님의 성지를 지킨다는 긍지로 점철된 신관들만이 존재했다.


그저 관문에 인력을 배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


그만큼 성지는 안전했다. 치안을 어지럽히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지금이라고 변한 건 아니다. 여전히 루시아스의 성지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장소였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변했다. 성전이라는 사태가 평화가 깨졌음을 알린 것이다.


교황청은―― 교황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기다렸음에도 어떠한 지시도, 향후 대응책도 내려오지 않았다.


심의회로서는 곤혹스러웠다. 명령이 하달된다면 그걸 따르면 그만이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여 행동하는 것은 다르다. 그에 따른 책임이 있는 것이다.


각종 의견이 오가는 회의 끝에 심의회는 결정했다. 검문 시스템을 손보자고.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여신님을 섬기는 종인 이상 그러한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황청도 쉽게 이를 허가해 줬다.


그리하여 심의회는 본격적으로 검문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우선 각 관문의 위병 대장을 주체로 돌아가던 연락 체계를 수정. 중앙 관리소를 두어, 일괄적으로 처리하도록 바꾸었다. 이것으로 기존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정보를 교황청으로 전파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오늘 그 효과를 톡톡히 보게 되었다.


띠링. 띠링.


꼭짓점마다 엄지 크기의 마광석이 박힌 정사각형의 구리판에서 일정하게 알림음이 난다.


구리판은 연락용 마도구. 쇠퇴가 적은 세인트리안답게 상당히 귀한 마도구를 사용했다. 물론 술식마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레진으로 마감처리를 한 구리판에는 어지러이 술식이 그려져 있었다.


굳이 술식마법을 이용한 건 그 외에 다른, 원초마법으로 제작된 마도구가 없어서였다. 그것들은 전부 성전 사태 때 돌연 마법의 힘을 잃고 평범한 물건이 됐다. 무사한 건 오로지 술식마법으로 제작된 마도구만이었다.


일부 신관들 사이에선 자인 디바오러가 그런 게 아니냐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너무나도 터무니없다. 짧게는 수백, 길게는 수천 년이나 잘 유지되었던 마법의 힘을 지운 거다. 가히 신의 영역. 대다수는 믿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달리 동시에 마법의 힘이 사라지게 될 만한 원인도 없었다.


끝끝내 의견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했다.


여하튼 다시금 마법의 힘이 사라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긴급한 순간에 먹통이 되는 것만큼 최악은 없다. 성전 사태 때도 덕분에 대혼란으로, 상황을 파악하기조차 힘들었었다.


그때의 경험을 떠올린 심의회는 새롭게 마도구를 만드는 대신, 기존에 있던 술식으로 제작된 마도구를 쓰기로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술식만큼은 멀쩡했으니까. 사라진 전적이 있는 원초마법보다는 훨씬 신뢰도가 높다.


이러한 뒷사정이 있는지는 모른 채, 10급 신관인 남성은 책상 위에 놓인 구리판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남성은 구리판에 손을 올렸다.



“중앙 관리소입니다. 소속과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마도구는 1:1로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상대측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예, 예.”란 대답만이 들려오고, 잠시 후 남성은 마도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제법 상기된 목소리로 외쳤다.



“알립니다! 동쪽 관문에서 벨루디스 깃발이 내걸린 행렬이 진입. 확인 결과 벨루디스 국왕이라고 합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중앙 관리소에서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진짜 왔다면서 놀라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정숙! 전파받은 내용을 잊진 않았겠지? 각자의 업무에 집중하도록. 곧 있으면 바빠진다.”


중앙 관리소를 책임지는 신관은 손뼉을 치며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교환원의 남성에게 가 조용히 물었다.



“이후 대처는?”

“미리 준비한 대로 성기사들의 선도와 함께 대성당으로 향한답니다.”

“도로 통제 같은 건 알아서 했겠지. 그 외에 다른 사항은?”

“없습니다만······”

“뭔가?”


고민스러워 보였던 남성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들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터라 별로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동승자가 재상, 파라디우스 공작과 그 세기의 대마법사, 클로디아노라고 합니다. 이거 어쩌면 정말로······”

“――거기까지. 우리의 업무는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불확실한 추측은 자제하도록. 사사로운 감정이 끼게 되면 자칫 왜곡을 초래할 수 있다. 모두 명심하도록!”

“아, 옛!”


남성을 포함, 아닌 척 보고 있던 자들도 저마다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남성의 경우 교황청으로 보고를 올리기도 하였다.


주의를 준 신관은 동요 없이 자리에 앉았다.


겉으로만······.


속내는 조금 달랐다. 남성이나 다른 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지휘관의 입장이 없었더라면 이토록 평정을 유지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벨루디스의 국왕이―― 그것도 최측근인 재상과 클로디아노를 대동하여 왔다는 사실은 그만한 파급력을 품고 있었다. 겨우 10명의 부하를 둔 자라 할지라도 절로 근엄함을 갖게 할 정도의 파급력이······.


대사건이라 해도 무방한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띠링. 띠링.


또 다른 쪽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주, 중앙 관리소입니다. 귀하의 소속과 용무를 말씀해 주십시오.”


앞선 남성과 똑같이 연락책의 남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재차 다른 곳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띠링. 띠링.


또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왔다.


연락책은 놀란 얼굴로 동료를 쳐다봤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구리판에 손을 올렸다.



“알립니다! 서쪽 관문에서 루 몬테르 공국 깃발을 내건 행단이 접근. 루 몬테르 공왕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나, 남쪽 관문도. 제국기를 건 마차가 진입! 황제와 샤라즈 공작이 탑승했음을 확인했답니다!”

“음. 알았다. 서둘러 교황청에 알리도록.”


각 연락책들은 긴급 연락망을 통해 교황청에 소식을 알렸다. 아직 놀라고는 있었으나 행동 자체는 빠릿빠릿하다.


당연했다. 삼국의 지도자들이 올 것이라는 걸 미리 들었으니 말이다.


그렇다. 알고 있기에 놀라면서도 재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문이야. 당최 교황청에선 어찌 저들이 올 것임을 알았지······?’


성국은 도시 하나로 이루어진 종교 국가다――현재는 구획을 나눌 정도의 거대한 영토지만――. 따로 미리 연락이라도 받지 않는 한 타국의 인물이 온다는 사실을 알 방도가 없다.


물론 당당히 깃발을 내걸었으니, 상단이나 모험가들을 통해 전파됐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교황청에서 연락이 온 건 한 달이나 전이다. 평범한 속도로 온다는 것을 가정할 때 성국까지 오는 시일은 한 달이다.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즉, 교황청은 출발함과 동시에 파악했다는 것이 된다.


이건 도저히 풍문을 통해 알아낼 수준이 아니다. 게다가 이 칼로 잰 듯한 도착 타이밍을 보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출발하지 않는 한 이리 딱 맞춰 온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는 건······.’


머리에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였다.


하지만 신관의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삼국이 모두 모인 초유의 사태다. 앞선 방문은 전초전. 이번이야말로 진짜다. 괜한 호기심은 수명에 악영향이다.


부하에게 충고했던 대로 신관은 자신의 업무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신관은 계속 신경이 쓰였다. 인류 역사에 기록될 이 정상 회담이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가······.










세인트리안의 대성당. 이곳에는 널찍한 회담장이 있었다.


나라를 관리해야 하는 이상 성당임에도 그러한 부속 장소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 회담장은 조금 특별하다. 원래부터 있었던 장소가 아닌 것이다. 성기사와 신관들이 바삐 준비한 것이었다.


분명 역사에 남을 정상 회담을 더욱 빛내기 위해······.


삼국과 성국이 모두 모이는 일은 800여 년―― 최초의 정상 회담이 성사된 이후로는 처음이다. 그런 막중함을 알기에 회담장 준비에 투입된 인원들은 최선을 다해 맡은 바 임무에 성실했다.


그러한 한 달간의 노고와 열정이 담긴 곳에······ 드디어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 도착하였다.


신관의 안내와 함께 처음 도착한 것은 벨루디스였다. 고풍스러운 은여우 가죽 코트를 두른 아크티알을 필두로, 붉은 로브의 벨페르 재상과 하얀 로브의 리카드가 좌우로 나란히 입장했다.


다음으로는 공국으로, 적당히 몸에 붙는 세련된 경장갑 차림의 그란이 당당한 걸음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재상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시종장과 공국의 검이자 방패, 디카이로트가 따랐다.


마지막은 제국이었다. 특유의 금속음을 내며 완전무장을 한 황제가 회담장에 발을 내디뎠다. 허리춤에는 애검마저 걸려있었는데,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관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본인의 자리로 향했다.


그런 그를 수행하는 건 황제와 마찬가지로 전신의 반만 가리는 검은 망토를 두른 장한―― 제1 군단장, 바하기스 루챠 데일이었다. 그 바로 곁에는 재상이자, 제국 마법성의 장관인 샤라즈 공작이 함께 했다.


전원 일국을 다스리는 지배자. 더군다나 왕으로 어울리지 않는 자도 없다.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장내는 지배자들이 내뿜는 기백으로 인해 절로 굴복할 듯한 압력이 가득해졌다. 동행인들마저도 하나 같이 범상치 않아 이 기세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런 자들을 안내했던 거다. 신관들은 저마다 위축되어 얼굴에 잔뜩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내 정점을 찍게 할 인물이 등장했다.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나는 가운데, 그 인물―― 백발이 가지런한 초로의 노인이 마지막으로 자리했다.


원형의 테이블에 서로 거리를 두고 앉은 건 4명. 동행인들은 빈틈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주군의 뒤에 대기하였다.


딱 보기에도 관계는 원만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적과 대치한 것 같은 긴장감마저 흐른다.


그러한 가운데 먼저 움직인 것은 검은 갑주와 망토를 두른, 강인한 인상과 탄탄한 육체를 지닌 남자였다. 그는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슬쩍 훑어보고는 거만하게 몸을 뉘었다.



“설마하니 이 인원이 얼굴을 맞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더군다나 애송이가 먼저 나서 이 자리를 만들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하였도다.”

“애송이란 짐을 가리키는 것인가, 폰타르트의 황제여?”

“이 자리에 달리 누가 있겠나, 벨루디스의 국왕이여.”

“뭣이――”

“――아아. 진정하거라. 이 몸은 칭찬을 한 것이리라. 정녕 시시한 농도 구분 못 하는 애송이는 아니겠지?”

“······.”


놀릴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상당히 무례한 언사다.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공기마저 한결 싸늘한 냉기가 풍겨 온다.


애당초 사이가 좋아 모인 것도 아니다. 가히 초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얼굴을 맞대고 앉을 일조차 거의 없었다. 그러한 상대에게 필요 이상의 견제해봤자 괜한 불화만을 가져올 것이다.


하지만 황제, 칼윈은 개의치 않았다. 되려 얼굴을 구기는 벨루디스 국왕, 아크티알을 흘겨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실로 유쾌하군. 이렇게까지 줄거리가 변하다니. 과연 하얀 악몽이다······. 그렇지 않나, 샤라즈?”

“말씀대로. 새삼스럽기도 하지만 말이죠.”

“그건 그렇군······. 하지만 재차 곱씹어 봐도 경이롭다. 저 벨루디스가 먼저 행동할 것이라고는······.”

“매번 답이 없었던 이전에 비하면 확실히 놀라운 행보긴 합니다.”

“짐을······, 벨루디스를 우롱하는 건가?”


공작은 지극히도 높은 직책이다. 제국의 한 축을 담당하는 샤라즈라면―― 자국 내에선 입지가 조금 애매하지만, 본래 어디 내놓아도 꿀리지 않는 명문이다. 어지간한 가문으로는 감히 어깨를 견주고 서지조차 못한다.


하지만 그래봐야 결국 일개 가문이다. 감히 일국을 깔아뭉갤 힘은 없고, 자국에 도움도 안 되니 발언에는 유의해야만 했다. 그러나 샤라즈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놀렸고, 국왕으로서 자국을 우롱당한 아크티알이 역정을 내기에는 충분한 사유였다.


불온해지는 분위기에 호위로서 대동한 제1 군단장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이를 곧장 감지해 낸 벨페르 공작과 디카이로트도 맞대응하듯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됐다, 바하기스. 오늘 우린 지저분한 싸움 따위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옛!”


가볍게 손을 들어 만류시킨 칼윈은 삐딱하게 턱을 괬다.



“너무 열 내지 마라, 아크티알이여. 공작은 그저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이다. 답이 있었다면 이리저리 치이지도 않았을 터가 아니겠느냐. 하물며 수습조차도 하얀 악몽과 그 친구들이 절반 이상을 해주었다. 설마, 요즘 관리들이 일을 잘해 압박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한데······ 당당히 자신 있게 가슴을 펼 수 있겠나? 혹여 그렇다면 이 몸이 신하를 대신하여 사과하도록 하지.”

“사과한다는 자가 기백 따위를 내뿜는 건가?”


아크티알은 기가 찬다는 듯이 투덜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더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칼윈의 말은 모두 사실. 반론을 펼쳐봐야 구질구질한 것이었다.


그만큼 이스피리아가 벨루디스에 끼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우선 파벌의 싸움을 멈췄다. 이스피리아라는 강대한 신흥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서로 물어뜯던 것을 멈추고 추이를 지켜보게 된 것이다.


나라의 안위는 뒷전인 건 여전했으나, 날로 격해져 갔던 알력 다툼이 줄어든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꽉꽉 막힌 숨을 틀 수가 있었다. 그러한 휴식기가 없었더라면 벨루디스의 앞날은 암울했을 거라는 건 자명. 여기저기 개입해 오는 세력에 대항할 여력 또한 없었을 것이었다.


심하면 오늘 이날을 맞이하지 못했을 터였다······.


이후로도 파벌들을 자제시키는 억제력으로 존재하는 등, 그 영향력에 있어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국외 정세도 그러했다. 공국과의 동맹은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기적이었다. 특히 공국 그 자체인 소베르비아와의 공조는 벨루디스에게 있어선 둘도 없는 호재였다. 제국의 간섭을 막은 것도 공주였고.


이스피리아가 숨통을 트여줬다면, 소베르비아는 여유를 가져다줬다. 덕분에 벨루디스가 엉망진창이었던 내부를 어느 정도 조율할 수도 있었다.


이 일 모두가 이스피리아에게서 비롯된 것. 얼마큼의 이득을 보고 있었는지는 말해 입 아프다. 정말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벨루디스는 많은 득을 보았다.


이 모든 게 단 한 번의 선택으로 인한 일이다.


만약 리카드의 청을 묵살했더라면 어찌 됐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지겠지.


그러나 아크티알은 표면상으로 전혀 드러내질 않고 무표정을 지켜냈다.



“호오······. 예전의 평정심을 제법 되찾았군. 더는 애송이라 부를 수도 없겠어. 전처럼 퇴보한 상태였다면 손쉽게 벨루디스를 장악했을 텐데. ······이것도 하얀 악몽의 영향인가······.”


발언의 내용에 아크티알과 벨페르 공작은 눈썹을 매섭게 치켜올렸다.


하지만 칼윈의 말은 옳기만 했다. 소베르비아에게 한 소리 듣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고치게 된 것도 결국에는 이스피리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걸 적국의 황제에게 순순히 인정할 일은 없다.


칼윈도 자세한 내막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들어 봤자 흥만 깨고.


그렇게 둘은 서로 한 발짝 물러났다.



“그런데······ 하얀 악몽?”

“음음. 짐도 아까부터 묻고 싶었다만, 그 여식을 말하는 것인가?”


아크티알에 이어 다른 편에 있던 남자―― 공왕, 그란도 몹시 궁금하다는 양 물었다. 상당히 흥미를 끌었는지 얼굴에는 대놓고 호기심이 어려있다.


더 볼 것도 없다. 벨루디스와 루 몬테르의 국왕들은 떠올리지 못했다.


칼윈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배우의 선택에는 나름의 고심이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지 않나, 리카드여?”


갑작스러운 지명에 다들 그 유명한 베르다드의 학원장인 그에게 시선이 쏠렸다.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아크티알과 벨페르도 쳐다보았는데, 리카드는 동요도 없이 차분히 머리를 숙였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황제 폐하.”

“처음······? 후후. 짐에게 굳이 새침 떨 필요는 없느니라,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여.”

“······아시는 겁니까?”

“싫어도 알 수밖에 없구나. 존재감이 명백히 이전보다도 확연하니. 이토록 증가하는 일이 달리 없을 테고, 애당초 그대 없이는 이 이야기는 시작조차 못 한다. 떠올리지 못했을 리가 없겠지.”

“존재감을 가시화하는 마안입니까······.”


정답을 맞춘―― 이 시대에서는 달리 아는 사람이 없는 비밀을 아는 리카드에게 칼윈은 짙게 미소 지었다.



“하나, 제아무리 마안이 있다 하더라도 모른다면 알 수 없는 일입니다.”

“7년 전이었다. 갑자기 묘한 감각이 들더니 하나하나 떠오르더군. 그래서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이외에도 다른 자들이 미래를 떠올렸을 거라고.”

“상당히 오래되셨군요······.”

“라프리트―― 당연히 그녀보다는 짧으리라 생각하긴 했다만 그대는 최근이었나?”

“그렇지요.”

“후후. 감시자들은 어쨌느냐? 이곳에 함께 온 것으로 보아 해결은 한 듯한데.”

“폐하를 알현하여 정면에서 상고했지요. 반역이나 배반할 것이었다면 진작에 했었다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부에서 다툴 시간이 아깝더군요.”

“정론이로다.”


의심암귀에 사로잡혀 괜한 견제를 하는 건 서로에게 있어서 악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전 미래에서도 이로 인해 여러 대처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정면으로 돌파하여 단박에 해결한 리카드의 판단은 실로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순순히 인정하고 받아들인 아크티알도 제법이고.


과연 다른 미래를 떠올린 자. 한순간에 성장이라도 한 듯 사람이 확 달라졌다.



“으음. 한데 떠올린 시점의 차이는 무얼 노린 것일지······.”


꽤 흥미로운 주제다. 과연 시기별로 나눈 그 저의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 칼윈에겐 이 회담의 가치가 충분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겐 아니었다. 무시하는 듯한 반응에 아크티알이 불쾌한 기색을 대놓고 드러냈다.



“답답한 건 알겠다. 하나, 달리 해줄 말이 없다. 그도 그런 게, 우리들이 떠올린 것은 다른 미래의 기억이다. 이런 걸 당최 어찌 설명하겠느냐.”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는 칼윈의 발언에 일순 고요해졌다.


······하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예상했던 건 황당해하거나, 미친 자를 보는 듯한 시선들이었다. 결코 이런 게 아니었다.


이 침묵은 어이가 없기에, 허무맹랑하기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야기를 믿었기에 발생한 공백이었던 것이다.


도리어 놀란―― 살짝 소름마저 돈 칼윈의 눈이 커졌다.



“그렇군······. 이번이야말로······. 이번이야말로 시간이 흐를 듯하구나······.”


반신반의했었던 생각이 비로소 확신으로 변하게 됐다.


흡족하다.


정말 몹시 기분이 좋아진 칼윈은 기꺼이 알려주기로 했다. 이들이 궁금해하던 진실을······.



“우린 이 시간을 영원토록 반복하여 살고 있다.”

“······.”


칼윈은 조용해진 실내를 둘러봤다.



“신의 거룩한 뜻을 알 도리는 없다. 그저 무지한 채로 우리는 기나긴 세월 끝나지 않는 시간을 돌고 있다. 그리고 이 몸을 비롯하여, 특정 인물들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됐다. 어째서,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다만······, 이제 와 든 생각이지만 필시 하얀 악몽이 관여되어 있지 않을까 한다. 신의 변덕이라기엔 그편이 더 실감 나지 않은가?”

“그 하얀 악몽이라는 건······?”


조심스럽게 묻는 아크티알에게 칼윈은 자긍심을 갖고 대답했다.



“이스피리아―― 그녀가 도달했던 미래 중의 하나다. 무수히 많은 미래를 통틀어 가장 존귀했던 존재였지. 그리고 이 몸이 유일하게 경외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것치고는 현재의 그녀에게도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계십니다.”

“불만인가?”

“그럴 여부가 있겠습니까? 모든 건 폐하의 뜻대로······.”


능청스럽게 가슴에 손을 대고 예를 표하는 샤라즈 공작. 그에 비해 두 국왕의 얼굴에는 고뇌가 깃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믿지 못한다는 건 아닐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도 힘든 내용이다.


그 심정을 백번 헤아릴 수 있었던 칼윈은 드물게 충고를 해주었다. 아니, 경고를 했다.



“여기 있는 리카드나, 다른 떠올린 자들에게 묻는다면 여러 미래를 들을 수 있을 거다. 하나하나가 실로 엄청난 것들이지. ······그러나 이 몸은 듣는 걸 그리 추천하지 않는다.”


한순간이지만 샤라즈 공작의 분위기가 흐려졌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황제 또한 본인이 말을 꺼냈음에도 제법 착잡했다.



“왜인지 물어도 되겠나······?”


분위기를 살핀 아크티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칼윈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모르는 게 약인 것도 있는 거다. 인간이란 호기심을 이겨 내지 못하는 생물이니. 알면 괜스레 바꾸려 들 겠지.”

“음······. 안 좋은 미래라면 바꾸는 편이 좋지 않나?”


태평한 발언에 무심코 감았던 칼윈의 눈이 번쩍 떠졌다. 힐끗 째려보는 시선에 놀란 그란은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움찔했다.


전혀 그 심각성을 짐작하지 못하고 있다······.


한심하다. 일국의 왕으로서 그 자질마저 의심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처절하면서도 눈부신 광채를 다른 미래에서 봤었다. 하얀 악몽의 진위도 모르면서, 가족의 안위가 위험하다는 것을 가장 먼저 파악한 게 바로 그란이었으니 말이다.


이후에 펼쳐진 그 결사 항쟁을 떠올리면······ 암만 바보 같아도 그를 무시할 마음 따위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만한 사내였다. 저 그란은······. 그는 칼윈이 인정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시를 떠올린 칼윈은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모르니까 그런 것이겠지. 우리 또한 그러했었고.”

“자세히 말해줄 수 있겠나?”

“간단한 이야기다, 아크티알이여. 미래란 생각보다도 복잡하다는 것이지.”


부동제답지 않게 맥없은 목소리로 말한 칼윈은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우리가 바꾸려고 한 미래는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딸아이의 운명을 바꾸는 것이었다. 허약한 그 아이는 출산 후에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하여 사망한다. 이 몸은 그것을 바꾸려 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되려 철저했던 준비가 발목을 잡았지. 너무 철저한 나머지 간병인들의 긴장이 풀렸고, 긴급 상황에 적절한 조치를 하지 못했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그때가 떠오른 칼윈은 말문을 잃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는 부동제로서 온 것이었다. 금세 떨쳐내고는 말을 이었다.



“분명히 미래는 변했다. 이 몸의 손녀, 로즈린느는 어미를 일찍 여의는 아이에서―― 어미의 온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가 됐을 뿐이지만.”

“······다른 하나는?”

“샤라즈 공작 쪽이다. 공작의 위신이 걸린 문제라 자세하게 말하긴 어렵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했다. 원한 방향과는 상당히 틀어져 버렸지. 그뿐만이 아니다. 주변의 인과관계도 이전과 상당히 달라졌다.”

“미래를 알면서도 그것을 바꾸기란 그리 힘들다는 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쨌거나 금방 결과를 볼 수 있었으니. 만약 수십 년 후에나 결과를 보게 됐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문제없는 줄 알고 계속 바꿔댔을 테니 수습은 불가능하겠군.”


아크티알은 무겁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대로다. 일찍 결과를 봤으니 망정이지. 결과가 나오기까지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면 이 미래를 잃을 뻔했다. 어느 미래보다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이 미래를······.


어찌 될지 모두 알고 있다는, 너무나도 유리한 조건에서의 미래 개변. 손쉬울 따름일 것이라 예상했었던 일이 설마 이토록이나 어려울 줄은 정말 몰랐다.


결코 만만히 본 건 아니었다. 어떠한 요인으로 미래 개변에 실패할지 몰라 철저하게 대비까지 했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미래는 한낱 인간이 다루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것이었다. 딸과 손녀의 일은 당연히 안타깝고 미안하다고 생각하지만, 덕분에 함부로 바꾸는 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어찌나 안도한 줄 모른다.


심지어 라프리트······ 그녀마저도 필시 실패했을 터다. 아마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미래를 떠올렸을 게 분명한 그녀조차도. 그렇기에 아크티알에게 전혀 알려주지 않았고, 그가 저토록 무지한 것이니라.


이렇듯 미래는 인간이 다루기 벅차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자라고 한다면 소베르비아만이다. 그 지성의 마물 정도만이 어느 정도 제어하는 게 전부일 것이다.


‘꼴을 보면 미래를 거의 떠올리지 못한 듯해서 실현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완벽히 통제가 가능한 인물은······ 오직 단 한 명뿐이다.


현재 상태가 애매하긴 하다. 어딜 어떻게 봐도 그 눈부신 위광으로 가득하던 이스피리아가 분명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상태로도 미래를 개변하고 있다.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건만.



“그렇다. 그녀야말로 유일무이······.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다.”


그 외의 다른 자들은 정해진 틀에서 크게 벗어나는 경우조차 없다. 오로지 이스피리아만이다. 그녀만이 자유롭게 미래를 나아갈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열쇠가 아니라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이 정체된 시간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신의 농간이 끝나기 전까지.



“이리 터놓고 이야기하는 연유가 뭔가, 황제여? 그대의 성격상 정보를 나누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거 같았는데.”

“떠올리지 못한 너희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다. 어떠한 위화감도 없이 잘 지내겠지. 하지만 떠올린 자들에게는 아니다. 반복되는 현재의 세상살이는 고역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괜한 알력은 사양하고 싶다는 게 본심이다.”


근원을 찌르는 그란의 물음에 황제는 대답하면서도 많은 감정들이 오갔다.


원래 이리도 격정적인 인간이었나 싶기도 하다. 본디 자신은 부동제란 이명에 어울리는 성격이었건만······.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기분이기도 하다. 기억에 남은 것은 수십에 불과하다지만, 죽음이라는―― 어지간하면 인생에 한 번만 경험할 일을 여러 번 겪은 것이다. 매 순간마다 인생의 회한이라든가 겪은 감정은 제각각 달랐지만, 그것들은 모두 하나 같이 강렬했다.


특히 강하게 남은 건 하얀 악몽의 손에 죽을 때다.


그때만치 화상을 입은 듯 뜨겁고, 아린 죽음의 숨결이 몸 전체로 번져가는 감각이 싫은 적이 없었다. 여태 헛살았다는 기분마저 느낀, 강렬했던 만큼 무척이나 애석한 죽음이었다.


이 죽음 말고도, 아마 헤아리기도 힘든 횟수의 최후를 맞이했을 터다. 떠올렸다면 무덤덤한 인간이라도 조금은 달라질 수밖엔 없으리라.


칼윈은 살짝 심호흡했다.


그것으로 부동제로 돌아온 칼윈은 지금껏 조용히 있는 초로의 노인―― 교황을 흘겨봤다.


교황은 무덤덤하였다. 언뜻 보면 이야기에 관심조차 없는 듯했다.


본심이 어떤지는 모른다.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에는 연륜의 벽이 너무나도 거대하다. [정신 방벽]이라도 건 것처럼.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겠다. 교황, 바오로 클레멘스 또한 떠올린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호수처럼 잔잔한 저 평온함을 볼 때 아마 그러할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그가 배우에서 제외된다는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반드시 교황은 선택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물었다.



“그대는 어쩔 텐가? 교황이여.”


이 전무후무한 인류 정상 회담의 열쇠는 이스피리아가 아니다. 그녀는 모든 길이 통하는 문이지만 열쇠는 아니다. 그 역할은 교황이다. 어느 길로 갈지는 오로지 그의 손에 달려있다.


아니꼽지만 그게 교황, 바오로 클레멘스다. 그가 어떤 성향을 취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를 진행할지 말지가 결정된다.


혹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면 회담은 종료다. 곧장 제국으로 돌아간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교황이 드디어 관심을 가진 눈이 되었다.



“나 또한 자네들과 다를 바 없다. 이 시간의 끝을 보고 싶을 따름이지. ······그렇기에 나는 방관하기로 했네.”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건가?”

“의심하지 않아도 되네. 자네도 내가 실패해 온 일들을 떠올리지 않았는가? 그토록 도전했음에도 한 번의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그건 무능한 것이야. 그래서 난 빠지기로 했네.”


예상외의 답변이다.


칼윈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예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교황뿐만이 아니라 분명 거의 대다수가 여태 실패밖에 하지 않았을 테니. 떠올렸다면 두려워하더라도 하등 이상할 게 없다.


‘그렇지만 아예 물러난다고? 저 교황이?’


기억하기로 교황은 목적을 위해 단호히 나아가는, 어느 부분에선 하얀 악몽과 결을 나란히 하는 냉혈한이었다.


만나는 건 오랜만이지만 딱히 그 성향이 바뀌진 않았을 터다. 그 정도로 줏대 없는 자였다면, 제아무리 초월자라 한들 천 년이란 시간에 가깝도록 교황의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분명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겠지.


하지만 그럴 가치가 과연 있는 것일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다. 흔들림 없는 교황의 눈빛에선 켕기는 것 같은 부정적인 기운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황은 선언대로 한발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할 거다. 몰래 뒤에서 무언가를 꾸미는 짓 따윈 하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이 존재감이란 말인가······.’


마안에 비치는 교황의 존재감은 거대했다. 자포자기로 일선에서 물러난 자가 지닐 것이 결코 아니었다.


속셈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도 시간이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다.


어느 시점, 절묘한 타이밍에 다시 무대를 오르겠지······.


칼윈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 몸은 납득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 전원을 인정하도록 하지.”

“뭘 잘 났다고 구는 건지 원······.”


툴툴대는 그란의 투정을 들으며 칼윈은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다른 이들의 시선도 한곳으로 모였다.


모두의 시선을 받자, 교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일어나는 그 모습은 초라한 노인 같았지만, 외견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중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가 살며시 손을 앞으로 뻗자, 허공에서 한 석장이 나타났다.


‘저게 그······.’


금빛의 석장은 상단에 루시아스를 상징하는 두 개의 정십자와, 교차하는 정십자 기둥에 각각 2개의 고리가 달린 검소한 형태였다. 그렇지만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장에서 은은하게 발하는 오색빛을······.


분명 오리진의 색이다.


신의 금속으로 불릴 정도로 귀한 것을 가품에 넣진 않았을 터. 저건 필시 진품―― 신의 사도, 디바오러가 썼다는 ‘구원의 완드’일 것이다.


소문만 자자했던 구원의 완드를 직접 보긴 처음이다. 다른 이들도 신화급의 무구가 신기한지 제법 흥미롭게 쳐다봤다.


그런 가운데, 교황은 석장의 끝을 살며시 바닥에 내리쳤다.


짤랑――


고리가 튕기며 맑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재차 내리쳤다.


교황은 이것을 총 5번 반복했다. 이는 오대신께 고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루시아스만을 섬기는 세인트리안에서는 좀 보기 드문 절차였다. 극단적으로 말해, 순례 여정 시작에 진행하는 게 전부였다.



“옛 맹약에 따라 나 바오로 클레멘스가 이 회담의 증인이자 중재자가 되겠다. 우리 주께 맹세코 성실히 임할 것을 맹세하지. 이의가 있는 자, 뜻을 밝히도록.”

“없다.”

“어, 없다.”

“나도 없다.”


엄숙한 분위기에 그란은 어색하게 답했다. 아크티알도 평정을 유지한 듯하지만 내심 동요하고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이의는 없다.


교황은 재차 눈으로 뜻을 물었으나 변함은 없었다. 도리어 둘은 남아있던 어리숙함이 사라지고는 국왕다운 위엄을 내보였다.



“각국 모두 동의한 것을 확인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인류 정상 회담 개최를 선언한다.”


초로의 노인 같지 않은 교황의 엄숙한 목소리가 울리고, 그 말에 담긴 의미에 장내의 공기는 한층 진중해졌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두 명의 1급 신관―― 심판관들도 몸을 움찔하며 전율했다.



“회담을 발안한 벨루디스 국왕은 발언하도록.”


좌중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린다.


이미 국왕으로서 자세를 고친 아크티알에게 흔들림은 없었다. 당당히 모두와 눈을 맞추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소식을 들은 이들도 있겠지. 하지만 사안이 중하니 처음부터 설명하려 한다. 이 점 양해해주길 바란다.”


서두를 땐 아크티알은 천천히, 성급하게 굴지 않고 차근차근 배경부터 이야기해 나갔다.


그의 이야기는 짧았다. 채 30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짧은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중대하였다.


모든 걸 들은 칼윈은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나하나가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던 것이다.


칼윈은 거의 반사적으로 교황과 리카드를 보았다.



“그대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만?”

“리아 양―― 이스피리아 양께서 불러 모은 자리에는 저도 있었으니까요. 거기서 확실하게 실물을 확인했죠. 벨루디스의 건국왕, 인비트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로 의태한 도플갱어를.”

“이쪽은 자인 디바오러에게서다. 그녀의 경고를 듣고 탐사해 보니 성지에 2마리의 도플갱어가 있음을 확인했다. 즉시 추방해서 현재 위치까지는 모른다만.”

“아니. 그딴 걸 물은 게 아니다!”


그렇다. 어째서 바로 추방한 것인지 따위를 묻는 게 아니다. 그딴 걸 굳이 물어야 할 정도로 전락하지 않았다. 그거야 너무 뻔하지 않은가.


――진정 묻고 싶은 건 ‘원래’ 알고 있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되묻기 전에 칼윈은 깨닫고야 말았다.



“알았을 턱이······ 없겠군.”

“예. 알고 있었다면 이전 미래가 그리 흘러갔을 리가 없었겠죠.”


고개를 끄덕인 리카드를 보며 칼윈은 눈매를 날카롭게 했다.



“이스피리아―― 그녀가 처한 상황은 어찌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한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내부 중추가 모두 장악당했다는 것으로 보인다만?”

“아마도······. 제1 위상, 가이란 케아코찰을 필두로 벨루디스의 중추가 그들 손에 떨어졌겠지요.”

“확실하나?”


제1 위상, 가이란이 어떤 자였는지 확실히 기억에 남아있다.


이전, 벨루디스가 무너진 것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공국과 함께 전쟁을 벌였던 당시였다. 세인트리안과 총력전을 벌이던 치열한 전장 속에서 유독 이상한 전황이 포착됐다. 한 전선에서 물자의 보급이라든가, 어느 순간부터 어떠한 연락도 오지 않게 된 것이다.


의아함에 조사를 보냈고, 그들은 제1 군단장, 바하기스의 목을 가져왔다.


그리고 보고했다. 제1 군단은 괴멸. 조사 결과 단독범의 소행인 것으로 확인된다고.


그렇다. 범인은 가이란이었다. 그가 홀로 1개 군단을 무너뜨린 것이었다. 그것을 그의 손에 죽기 전에, 본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전투력과 잔혹함을 잊은 적이 없다. 그야말로 악의만 존재한다는 마물―― 악마라 불릴 그러한 사내였다.


그런데 그런 자가 세뇌당하여 형편에 좋은 손발이 됐다?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도플갱어의 장로가 세뇌시켰다는 증언이 있습니다. 딱 본인이라는 확정······까지는 아니지만, 정황상 가이란 케아코찰일 확률은 높습니다.”

“그렇게 세뇌당한 제1 위상이 중추를 장악한다? 하나, 죽이는 것과 달리 사람을 뜻대로 조종하는 건 생각 이상으로 힘들다. 언제 마음이 달라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그게 가능했기에 도플갱어의 장로가 노린 겁니다. 가이란 케아코찰에게도 강제적으로 따르게 할 방법이 있으니 말이죠. 물론 도플갱어와는 방식이 다르지만.”

“증명은?”


리카드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제 학생을 해코지한 그를―― 그 X놈을 잡기 위해 도대체 몇십 년을 쏟아부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드물게 격한 발언을 쏟아붙는 리카드. 그것만으로 어떤 사건인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겠다.


하지만 그 사건에 개입이 되어 있다니 상당히 놀랍다. 언뜻 보기에는 연관성은 전무한 단순 사고로 보이건만.


‘저 사건이 그렇다면, 사소한 일들에서도―― 그냥 지나칠 사건에서조차 도플갱어와 제1 위상의 흔적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녀석 덕분에 하얀 악몽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가? 후후. 그렇게 된 것이란 말이지······.’


흡족하게 생각을 마친 칼윈은 물었다.



“녀석은 현재 어디에 있지?”

“신의 곁으로 갔습니다. 미래를 떠올린 즉시 찾아와서는 잔뜩 까불다가 리아 양께 목숨을 잃었지요.”

“그녀의 손에 갔다면 나름대로 영광이었겠구먼. 생의 여한은 없겠어. 그렇지만 과연 하얀 악몽이다. 제1 위상마저 손쉬운 상대에 지나지 않는가 보군. ······그때의 심판관들도 어쩌면 그녀에게 모두 배제됐을지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녀가 구상한 미래에는 불필요했을 테니. ――교황 예하께서는 어찌 생각하나?”


살짝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대기하고 있던 심판관들에게서는 스멀스멀, 적의가 피어올랐다.


칼윈은 개의치 않았다. 그러라고 일부러 심기를 건드린 것이니까.


하지만 정작 노린 인물에게서는 반응이 없었다. 천년이나 가까이 산 노괴답게 미온적으로 무심히 대꾸한다.



“다른 미래 같은―― 허상이나 다름없는 일에 낼 의견은 없네. 가이란의 일도 마찬가지일세. 조종당한 일은 안타까우나, 나는 그의 행보를 긍정하네. 죽음마저도.”


흔들리지 않는 긍지가 담긴 강인한 말이었다.



“그럼 다른 걸 묻도록 하지.”

“뭔가?”

“도플갱어는 어떤가? 그들도 지지하는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실내의 온도가 한층 떨어졌다. 마력을 내뿜거나 한 건 아니다. 교황은 그저 언짢아했다. 그것만으로 대기에 중압감이 생긴 것이었다.


존재의 격이 다르다.


‘역시나 초월자라는 것인가······.’


쓴 신음을 내고 있으니, 교황이 나지막하니 말했다.



“그대들의 눈엔 우린 분명 악으로 비치겠지. 하나, 우리 주께 맹세하네. 우리가 저지른 일들은 모두 인간을 위한다는 이념 아래 행한 것. 이에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그리 말한 교황은 모두를 찬찬히 둘러봤다.



“오랜 맹약을 이어온 그대들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들은―― 인간은 감옥에 갇혀 지낼 죄인이라는 걸. 그러한, 한 치 앞도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발판 안에서도 성국은 살길을 찾아 나섰다. 그게 성국, 세인트리안이다. 인간의 절멸을 꾀하는 도플갱어를 긍정하는 일은 결단코, 미래영겁 존재할 수 없다.”

“오오.”


교황의 연설에 감동한 나머지 역할도 잊고 심판관들은 기도를 올렸다.


무슨 싸구려 연극인가 싶은 광경이다. 그렇지만 칼윈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마저 느껴지는 교황은 실로 진실했고, 그 안에 담긴 각오는 무거웠다.


물론 그걸 받아들이는 건 별개였지만······.


몹시 기분이 상한 칼윈은 삐딱하게 턱을 괬다.



“아니꼬워 미치겠군. 모두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면서 퉁치려는 그 꼬락서니가 말이야.”

“마음에 안 들겠지. 타인의 입맛대로 휘둘리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이해한다네. 하지만 그 독단 덕분에 지금까지 인간이 생존했다고 난 확신하네. 그 정도로 인간의 상황은 너무나도 좋지 않았네. 그대들이 아는 것 이상으로······.”

“예. 지금은 저희끼리 견제나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닙니다.”


리카드가 중재에 나섰다.


국왕들의 담소에 끼어들다니 무례하기 짝이 없다. 아까와 달리 언급된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 기백이, 용자와 같은 맹렬한 기백이 이를 용인하게 만들었다.


리카드는 눈빛을 날카롭게 하고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예상하셨겠지만, 삼국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계기이자, 인간이 쇠퇴의 길을 걷게 된 인마대전은 그들이 뒤에서 손을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저희끼리 분열하는 건 그들이 바란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철창 우리 신세가 된 것도 말이지.”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그렇지만 전부 그들의 탓만은 아닐 겁니다. 인간의 기질이라는 게 있으니깐요. 당대 선대들께서 그 어처구니없는 저주를 왜 받아들이셨겠습니까? 분명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겠죠.”

“그리고 과거를 지우고, 모두 새로 고쳤다는 거냐? 피해자였을 마족에게 모든 죄를 떠넘기고? 이보게, 리카드여. 어이가 없는 건 바로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거다.”


사양은 없다. 어찌 만들어진―― 아마 다시는 없을 자리일 텐데 그딴 짓은 사치를 넘어 어리석음의 극치다.


때는 무르익었다. 보아하니 다들 저주도 해제한 듯하니 구태여 돌려 말할 것도 없다.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모두 털어내기로 하자.



“계속 들었었던 의문이다. 인간이 저지른 짓과 처한 상황을 감추는 것까진 알겠다. 공표되면 혼란이 이만저만이 아닐 테고, 개중에는 정신 나간 짓거리를 하는 종자가 나올지도 모르고. 그러니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어째서 마족의 탓으로―― 굳이 적대적인 관계로 꾸며냈느냐? 그 외의 타종족에게도 그러하다. 무슨 연유로 인간이란 종이 미움받을 짓을 자행했던 것인가, 교황이여?”


세인트리안이 수인이나 엘프 같은 사람종과 이종족에게 고문 따위를 해댄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없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경멸의 눈이 된 아크티알과 그란도 묵묵히 쳐다본다.


‘오늘내일할지도 모를 처지에 여기저기 싸움을 걸어댄다니······.’


제정신이 아니고선 할 짓이 못 된다.


사실 그 저의야말로 칼윈이 제일 듣고 싶었던 거다. 도대체 무슨 득이 있길래 저딴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이에 대해 교황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무수히 많은 미래에서도 알 수 없었던 그의 진위를 반드시 듣고야 말 것이다. 기적이나 다름없는 이 자리가 아니고선 절대 듣지 못할 터. 양보 따윈 없다.


아크티알과 그란, 심지어 리카드마저도 같은 의견이었다. 전원 굳은 눈으로 교황을 지긋이 쳐다본다.


그렇게 5분을 기다리자······ 마침내 교황이 항복했다.



“설마 그녀 이외의 인간에게 이야기할 마음이 들 줄은 몰랐군. ······확실히 이전 시간대와는 다르긴 하구나.”


교황은 뭔가 많은 감정이 깃든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그는 후련한 듯,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다들 기대하는 것 같은데,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세.”


교황의 분위기가 다소 가라앉았다.


‘드디어······ 드디어다.’


내심 격앙된 칼윈과 함께 교황이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작가의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자세한 인사는 -2에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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