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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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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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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9,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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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1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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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쪽

206

DUMMY

자리를 비우기 전, 루비아는 벨루디스에 남는 수족들에게 지시를 남기고 공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솔직히 흉계가 몰아칠 것이 분명한 벨루디스에서 벗어난다는 게 여간 내키지가 않았다. 잠시 눈을 뗀 사이, 어쩐지 사건이 커질 듯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비아도 자신이 그딴 불분명한 것에 신경을 쓴다는 게 어색하긴 했다.


그러나 심복인 레딧츠의 말대로였다. 감이란 영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졸업식에서 나이젤 백작 가의 데인이 사고를 친 것이다.


일의 중대함에 비해 사고 자체는 꽤 가벼웠다. 그냥 데인이 저 혼자 헛소리를 한 것에 불과하니 말이다. 리아가 최고 국빈만 아니었다면 그리 화제가 되지도 않았을 터였다.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비슷한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이미 예상했으니까.


아니, 그때 학원장실에 있었던 전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리아가 잡아 온 도플갱어, 무무카케가 걸어둔 암시는 그대로 남아있었으니 말이다.


딱히 언급하지 않았다.


뭐 하러 그러겠는가. 데인이 일을 저지르면 좋은 건 이쪽이다. 마르티즈 후작 파벌을 압박하기엔 썩 나쁘지 않은 안건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전원 싹 입을 닫았다. 하물며 라프리트조차도.


아마 리아에겐 평생 입을 다물 것이다. 마음 쓸 게 뻔하니까.


‘리아라면 자기 실책으로 여길 게 뻔하려나? 그딴 녀석 아무래도 좋건만.’


어쨌든 기대한 만큼은 저질러줬다. 덕분에 마르티즈 후작과 파벌을 압박할 좋은 재료가 손에 들어왔다.


바로 상상된다. 어리둥절하고 있을 알렌나시안 후작이. 나이젤 백작에 이르러서는 사색이 되었을 테고, 이후 격정에 사로잡혀 여러 기물을 부수고나 있겠지.


그래. 모든 건 계산 내였고, 불안한 점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갑작스러웠지만 준비는 완벽했다. 이 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조언―― 명령도 아크티알에게 해두었다. 살짝 우려스럽기는 하지만 딱히 실패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딱 하나―― 너무 이르다는 게 마음에 걸린다.


데인의 폭주는 나중에나 벌어지지 않을까 했던 사안이다. 서자로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한 조바심이 쌓이고 쌓여 폭발할 테니.


그 기간이 대략 한 달이다. 이렇게나 빨리 터질 거라고는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너무 빠르다.


계산은 완벽했었다. 무무카케의 암시는 변수가 되지 못했다. 들키지 않으려 조절한 것이었기에 달리 오차라 할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였다. 그렇기에 이용당한 데인에겐 일말의 동정도 생기지 않은 것이었다. 전부 본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암시는 그저 거들 뿐.


스스로 자멸한 것과 다름없는 꼴이다. 그래서 라프리트도 차갑게 데인을 희생양으로 기꺼이 삼은 것이다.


‘그래. 모든 건 이 나의 손안에서 굴러갔어. ······그런데 어디서 어긋난 거지?’


데인의 데이터가 잘못된 건 분명 아니다. 그건 자신이 직접 찾아가 확인한 사항이다. 틀릴 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누가, 자신의 손안에 있던 구슬을 쳐내버린 걸까······.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나를 상대로 말이야.”


루비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세어봤다.


우선 우연.


제일 그럴듯한 가정이다. 이 천재적인 두뇌로도 어리석은 놈들의 행동을 100% 다 예측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두 번째는――


아니.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다는 기분이다. 객관적으로도 데인이 저 혼자 폭주한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이니 말이다.


수치로 호환하면 99%. 아마 사실과도 한없이 가까울 것이다. 이후 정말 그렇다고 밝혀지더라도 놀랍지 않다.



“1%의 어긋남이라······. 그저 나의 우려였으면 좋겠는데.”


한동안 고뇌에 빠지자니 후웅,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도착했나 보네.”


움직이지 않게 고정된 좌식 테이블에서 고상하게 정좌하고 있던 루비아는 시선만을 돌렸다. 그러자 레딧츠가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이내 미세한 진동과 함께 가라앉는 느낌이 그쳤다.


레딧츠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선 루비아는 신발장으로 갔다. 거기에는 유젯이 미리 대기해 있었고, 자연스럽게 발을 내미니 그녀는 정중히 신발을 신겨줬다.


차림새 점검까지 마치고, 루비아는 레딧츠가 연 문밖으로 나갔다.


곧장 밝은 빛이 엄습했고, 이윽고 적응한 눈에 비치는 풍경은 녹색의 빛이 적은, 다소 삭막한 공터였다.


제대로 도착했다. 공국에 마련된 루 몬테르 공작 가 전용의 비행 착륙장이다.


루비아는 성큼성큼 걸어 방금 막 나온 집의 모서리를 지났다. 그러자 거대한 그늘이 감쌌는데, 올려다보니 시야에 비치는 건 검붉은 빛이 도는 거대한 바위였다.



“수고했어, 에인샤론드.”


치하하며 손을 내밀자, 검붉은 바위―― 공국이 자랑하는 아룡, 에인샤론드가 얼굴을 가져다댔다.


엄청난 위압감이 느끼지는 장면임에도 루비아는 입가를 올리고는 에인샤론드의 비늘을 쓰다듬었다.



《만족스러운 비행이었습니까, 공주님?》

“그래. 여전히 빠르고 편안했어. 착지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고.”

《영광입니다.》

“후후. 푹 쉬고 있어. 며칠 후에 오라버님들을 만나러 가야 하니까.”

《예.》


겉보기와 달리 매끈하고, 서늘한 감각이 제법 마음에 들지만 할 일이 많다. 아쉽게 손을 떼고 발길을 돌렸다.


성에 들어오니 곧장 마중 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상당히 의외의 인물로, 그는 다가오는 루비아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 전하.”

“디카이로트 경, 환영 감사해요. 근데 당신이 왜 여길?”


공국의 근위대장이 있어야 할 곳은 단연코 아버님―― 공왕의 옆이다. 아무리 공주의 마중이라 할지라도 이런 곳에 올 게 아니었다. 지난번처럼 주요 외교관이라도 오지 않는 한은.



“마침 비번인 참이라.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마중하러 나왔습니다.”


디카로이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리아였다면 백방 훈남이라고 호들갑을 떨지 않았을까.


루비아도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기는 하다만, 별로 감흥은 없었다.



“내 기준에선 합격도 아니거니와, 학원에 있는 동안 맨날 본 듯하고.”

“예?”

“아무것도요. 마중 감사합니다. 이후 이야기는 아버님과 함께 하지요.”

“알겠습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디카이로트. 확실히 공작 가의 충정이 깊다.


습관처럼 변하지 않는 모습을 체크하고 루비아는 모두를 대동한 채로 당당히 걸었다. 향하는 곳은 아버님, 그란의 집무실로, 디카이로트가 비번인 것을 보면 그란은 오늘 거기서 움직일 예정이 없으리라.


왕성의 기사 및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도착하자 곧장 디카이로트가 나섰다.



“폐하,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음. 들여보내게.”


작게 그란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화도 되고 꽤 방음이 안 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건 일부러 그런 것으로, 국왕의 신변을 위한 조치다.


너무 방음이 잘 되면 왕성에서 이변이 일어나더라도 알아차릴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것처럼 국왕의 집무실은 적당히 외부 소리가 들리게끔 만드는 게 일반적이다. 그만큼 이 주변을 다닐 땐 침묵하도록 유의해야지만.


잠시 후 스르륵 문이 열리고 시종장이 나왔다.



“어서 오시지요, 공주 전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네. 오랜만이어요, 시종장.”

“안으로 드시지요.”


살짝 미소 지은 시종장은 길을 비켜섰다.


루비아는 그를 지나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게 됐다. 정면에 앉아 집무를 보는 그란과 멀지 않은 테이블에서 이를 돕고 있던 듯한 두 사람을.


그란은 그렇다 치더라도, 저 두 사람은 루비아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이후 만나러 가려 했으니까 상관없기는 한데······ 날 이렇게까지 읽어내다니. 달리 그런 사람은 없을 테니 어머님의 지시인가 보네.”

“분석부터 해대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그래도 많이 변했습니다, 아바마마. 혼잣말도 다 하고. 저런 모습은 평생 처음 봅니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하나로 모아 정갈히 묶은 남자. 그의 말에 그란은 작게 숨을 토했다.



“이스피리아, 그 여식에게 물든 거겠지.”

“그렇습니까?”

“버릇인 거 같더군. 저번에 왔을 때도 꽤 중얼중얼 혼잣말이 많았었지.”

“호오. 신기하군요. 저 아이가 가족 이외에 마음을 열다니.”

“그런 기특한 것이겠느냐? 그냥 흥미로운 장난감을 구한 기분이겠지.”

“아뇨. 보기보다 여린 아이라는 걸 아시잖습니까?”

“음음. 우리 루비아는 괜히 강해 보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죠.”


고개를 주억거리는 짧은 머리의 남자.


루비아는 능글맞게 웃는 두 사람을―― 건장한 남성들을 째려봤다. 하지만 둘은 개의치 않고 더욱 웃음을 진하게 만들었다.


다른 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야 그렇겠지.’


괜히 공주를 앞에 두고 저딴 짓을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은 파스텔 톤의 주황빛. 공국에서 이 머리카락 색을 지닌 사람은 오직 루 몬테르 공작 가의 피를 이은 사람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쿠 엘 델리안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람만이 저 주황빛을 타고났다.


예외는 없다. 쿠 엘 델리안 왕가의 피는 우성 덩어리인지라 그 피를 받았다면 무조건 주황빛을 띠게 된다. 차이는 오직 명암만이 전부로, 더더욱 진하게 피를 이은 자일수록 파스텔 색조에 가까워진다.


저 남성들은 그중에서도 특별하여 루비아와도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더 볼 것도 없이 순혈에 한없이 가깝다.


만약 저런 사람이 또 있다면 필시 사생아. 하지만 알기로 쿠 엘 델리안 왕가에 그런 망나니는 없거니와, 마지막 남은 후손인 레이니도 외도 따윈 하진 않았다.


게다가 저 얼굴을 보라. 능글맞게 쳐 웃는 꼬락서니가 그냥 레이니랑 판박이 아닌가.


루비아는 이마에 솟아오른 핏줄을 손으로 누르고는, 아직도 웃고 있는 자신의 ‘오라버님’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뒤탈 없이 하고 온 거겠지?”

“인사보다 먼저 묻는 게 그거니?”


머리를 묶은 남자가 섭섭하다는 양 말한다.


샌님처럼 가지런한 생김새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이―― 특히 여자가 보면 절로 눈이 하트로 변할 듯하다. 하지만 속아선 안 된다. 저 남자는 그란과 레이니의 피를 이은 자다. 단세포적인 놈들과 똑같이 않다.


저딴 뻔뻔한 연기에 휘말려선 안 된다. 시간이 아깝다.


무시하고, 루비아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긋이 남자를 쳐다봤다.



“에휴. 도통 농담을 받아주지 않는구나.”

“재미가 있어야 받아주든 말든 할 거 아냐. 확실하게 말해서 그런 쪽으로 재능은 없으니까 때려치워. 첫째답게 굴란 말이야. 자꾸 그러니까 아버님이 왕위를 주기 불안해하는 거잖아.”


그리 말하자 장남, 핸드릭 드룩카나 루 몬테르는 자못 슬프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는 어깨를 떨궜다.


일비일희하는 속도가 참으로 빠르다. 애도 아니고. 게다가 정말 행동 하나하나가 여심의 마음을 자극해댄다. 바람둥이로 이름을 날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일부러 하는 게 아닌 터라 더더욱 질이 나쁘다.


하지만 루비아는 알고 있다. 왕태자답지 않은 저 한심한 모습 뒤엔 굳건한 심지가 있다는 것을.



“바보짓은 그만하고, 제대로 사후 처리는 했어?”

“확실히 하고 왔으니 걱정 말거라.”

“뭐, 네가 볼 땐 만족스럽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핸드릭에 이어 짧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너스레를 떨었다.


남자의 정체는 루 몬테르 공작 가의 차남, 잉그라드로, 보다시피 상당히 그란을 닮아 행실이 좋지 못하다. 어투도 닮아 시정잡배 마냥 가볍다.


‘하아. 이제 와 든 생각이지만, 우리 집안 사람들은 어째 전부 이 모양이다냐?’


완벽을 추구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은 상식적인 사람이 태어나면 어디 덧나나. 그나마 다들 일 처리만큼은 그란을 닮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적당히 말하는 것치고는 꽤 꼼꼼히 확인해두었을 것이다.


푹, 한숨을 쉬며 루비아는 대충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어머님은?”


물음에 그란이 서류를 살피며 대답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다. 정치는 남자, 내실은 여자가 하는 거라며 빠졌다.”

“하아. 진짜 이상한 고집이 있다니까. 그나마 남에게 강요하진 않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너무 그러지 말 거라. 왕비의 입장을 알지 않느냐.”

“알 게 뭐야.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왕가의 마지막 후손이니 뭐니, 하등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작게 콧방귀 낀 루비아는 곧장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피핏하고, 감각이 연결되는 느낌이 났다.



《들리지?》

《루비아? 아아. 이거 [염화]였구나. 연결되는 감각이 신기하네?》

《처음도 아니면서 뭔 호들갑이야?》

《아니. 리아 때와는 꽤 달라서. 그땐 이질감 같은 게 전혀 없었거든.》

《그 계집애랑 비교하지 말아 줄래? 안 그래도 걔가 쓰는 [염화]의 염가판인데 말이야.》

《어······. 그러고 보니 감정 같은 게 전해지진 않는구나? 말만 전해지는 건가?》

《설마 처음이야? 내가 [염화]의 술식을 전해준 지가 언제인데?》

《에헤헤. 그게······ 어쩌다 보니?》


하트가 떠다닐듯한 교태가 섞인 목소리로 얼버무리는 여성.


자식이 셋이나 있는 다 큰 성인으로서 부끄러움도 없는 모양이다. 그 이전에 일국의 왕비로서 어떠려나 싶다.


루비아는 어머님, 레이니의 꼬락서니에 한숨이 나올 것 같았지만 참고 말했다.



《보나 마나 동물과의 대화에 [염화]가 소용없다는 걸 알아서 그랬겠지. 됐고, 어서 아버님 집무실로 오기나 해.》

《응? 나도?》

《하찮은 연유로 내빼도 될 게 아니야. 그만큼 현재 상황이 좋지 않아.》

《그래······. 알았단다. 금방 가마.》


능글거리는 것에 비해 상당히 눈치가 빠른 편에 속한 레이니다. 바로 심각성을 인지하고는 진지해졌다.


꼴을 보면 사육장 근처 언저리에 있겠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용건을 마친 루비아는 [염화]를 끊었다.



“훌륭한 솜씨로군.”

“옛 시대의 마법인가······.”

“아. 역시 마법이었구나! 발동어가 없어서 긴가민가했네.”


당연하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부자들. 이쪽은 목숨까지 내걸고 고생한 끝에 알아낸 심상마법이거늘.


루비아는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없었는데, 이를 보던 그란은 숨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뭘 그리 보느냐? 여긴 공국이다. 몬스터와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그 마법의 체계가 다름을 아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하는 핸드릭과 잉그라드.


하지만 루비아의 심안은 속일 수 없다. 그란만은 다르다. 그는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과 달리 그란은 몬스터와 지내며 알아차린 게 아니었다.



“과연. 거기까지 전해져오는 거였나.”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자 그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러나 루비아는 모른 척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비아, 어머님을 부른 것이니?”

“맞아.”


핸드릭의 물음에 답하니 잉그라드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꼬았다.



“왜? 어머님은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시는 편이잖아?”

“정말 얼굴만 멀쩡하지, 생각하는 수준이 아버님이랑 같네. 그런 걸 일일이 따질 상황이 아니니까 부른 거잖아.”

“으······. 우리 루비아야, 나한테만 너무 말이 심한 거 아니니?”

“바보에서 벗어나면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지 않을까? 잉그라드 오라버님?”


재차 풀이 죽었는지 잉그라드는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힘없이 떨구었다.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이 두드려졌다. 레이니였다. 전속인 엠마가 눈을 번뜩여서 그랬겠지만, 이번에는 발코니로 오지 않고 용케 정문으로 왔다.



“아무 데나 편하게 앉아. 좀 길어질 거 같으니까.”


대충 손을 휘휘 저으니 레이니는 그대로 옆으로 와 앉았다.



“당신······, 좀 쉬었나요?”

“그럴 시간이나 있었겠어? 여기저기 개판 오 분 전인데.”


순간 레이니는 무척 걱정된다는 얼굴이 되었다.


반쯤 농담이었는데······.


다르게 말하면 반은 진담이란 소리였지만, 굳이 떠벌릴 마음은 없다. 그냥 만사가 귀찮다. 레이니의 말대로 요즘은 거의 쉬지도 못할 정도로 바빴고.


유젯의 케어가 좋아서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루비아는 생각보다도 더 피로가 쌓인 상태였다.


대충 달래주기로 하자.



“나라고 죽어라 일만 하고 싶을까. 얼추 정리되면 붙잡아도 쉬러 갈 거야. 그러니 얼른 시작하자. 할 이야기가 제법 있어. 아. 그리고 오라버님들을 불러줘서 고마워. 덕분에 따로 들르지 않아서 살았어.”

“······알았어요. 이야기가 끝나면 꼭 쉬도록 하세요.”


레이니가 대답하는 것과 동시에 그란이 물었다.



“얼마 전에 정기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할 이야기가 많다고?”

“그 일주일 사이에 많은 것들이 일어났어.”


그란은 이마를 짚었다.



“점점 일이 커지는군······.”

“이리될 거라 얼추 예상했었잖아. 새삼 그러지 마.”

“그래도 말이다······. 왜 하필 지금이란 거냐.”

“운이 없다고 밖에. 곯고 곪다 버티지 못해 터진 시기가 지금일 뿐. 딱히 이유는 없어. 아버님이라면······, 알고 있을 텐데?”

“······.”


가만히 쳐다보는 그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찰나였지만 루비아는 보았다.


‘그때 그 눈이로군. 있는 것, 없는 것 다 끌어와 전력을 다해 이 나를―― 어린 딸의 앞을 막아섰던 그때의······.’


벌레가 땅을 기는 것만 같은, 처절함만이 가득한 게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 자신을 낳은 아버님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렇게 어렸을 때는 보기 흉한, 꼴불견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겼었다.


하지만 이게 철이 들었다는 것인가······. 그 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어쩌면 봤음에도 무시하고 넘겼을 것들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가족을, 자식을 염려하는 부모의 마음이.


분명 보기 흉하다. 여전히 꼴불견이라는 생각엔 변함없다. 백성을 살피는 국왕의 의무보다 자식의 안위를 먼저 염려하는 게 못마땅하다.


그러나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이리 어리석으면서도 아름답다고······.



“확실히 리아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작게 중얼거린 루비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맞아. 알아차렸듯이 내 저주는 풀렸어. 지난번에 돌아가는 길에 리아, 그 꼬맹이가 해제해줬지.”

“뭐? 저주?”

“우리 루비아에게 그런 게 있다고?!”


핸드릭과 잉그라드가 놀라 소리쳤는데, 직후 그 둘은 누가 강제로 입을 닫아버린 것처럼 침묵하였다. 저주의 조건이 충족하여 발동한 것이었다.


그란이 매서운 눈매로 째려본다.



“뭘 하고 싶은 거냐?”

“잊은 거야? 공국에서 낡은 관습을 가장 많이 없앤 사람이 누군지?”

“설마······?”


루비아는 빙긋,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800년이나 유지됐으면 슬슬 퇴장할 때가 아니겠어? 애당초 아버님도 저주에서 벗어났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뭐?”

“역시나 몰랐구나. 아버님에게 보낸 브로치. 그거 리아가 만든 거야. 효과는 알려줬듯이 모든 부정을 물리치지.”

“저주도 예외가 아니라고······?”


그란은 멍하니 자신의 가슴팍에 달린 고풍스러운 브로치를 내려다봤다.


백방 딸이 준다기에 별생각도 없이 냉큼 달았겠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그래. 이 대화를 지속할 수 있다는 게 그 증거지. ‘저주’라는 말도 입에 담았고.”

“그, 그러고 보니! 하지만 어떻게······? 내밀히 조사했음에도 해주 할 수가 없다고 판명 났거늘. 근데 겨우 이 브로치가?”

“겨우라니. 그거 신기에 가까운 물건이거든? 아니, 그냥 신기일 가능성이 높을지도.”

“시, 신기?!”


헛소리와는 연이 먼 루비아다. 이를 이 방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알고 있고, 믿을 수 없음에 전원 경악으로 두 눈이 물들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던 루비아는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고는 쿡쿡 웃었다.



“정말 욕심이 없는 녀석이라니까. 암만 만들라고 시켰다지만, 저만한 물건을 아무 대가도 냉큼 넘긴다는 게 말이 돼? 아우······. 필요했다지만 아크티알에게 준 게 아쉽네.”

“자, 잠깐만. 저, 정말이더냐? 이게 진정 신기란 말이느냐?”

“그렇다고 하잖아. 실제로 효과도 봤으면서 딴소리하지 마.”

“하, 하지만 그 여식이 만들었다고······.”

“어. 내 눈앞에서도 몇 개 만들었으니까 확실해.”

“그러면 이상하지 않느냐. 인간이 만든 게 어찌 신기라는 게냐? 아, 아니······.”


말을 멈추고 그란의 눈이 크게 떠졌다. 드디어 진실에 도달한 모양이다.


여전히 머리 회전이 느리다고 생각하며 루비아는 입을 열었다. 웃음기를 싹 지우고 진중하게.



“리아는 이 지상에 강림한 신―― 혹은 그와 유사한 존재야.”

“마, 말도 안 되는――”


그란은 말을 하다 말고 루비아를 쳐다봤다. 그는 아는 것이다. 자신의 딸이 근거도 없이 허투루 떠들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모두의 시선을 받으면서 루비아는 이어 말했다.



“다들 제국에서 리아가 루시아스께 축복받았다는 소리 정도는 들어봤지?”

“단순한 소문이 아니라는 거군.”


자못 진지해진 그란에게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믿기지 않았어. 근데 상상 이상이었지. 리아, 걔, 축복 정도가 아니라 직접 루시아스 님을 대면하고 왔더라.”

“뭣?! 지, 직접 대면을 해?”

“말보다 보는 편이 빠르겠지. ······레딧츠.”


묵례하고 다가온 레딧츠는 [수납]의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한 뺨 크기의 작은 조각상을 꺼냈다.



“루시아스 님의 신상······?”

“직접 대면하고 기억 그대로 옮긴, 리아가 만든 작품이야. 맞은편에선 리아가 앉아 있었다더군.”

“시, 신과 티타임을 가졌다고?!”

“제국 쪽에서 잘 나는 커피를 마셨다고 하더라.”

“······.”


다들 입을 벌린 채로 다물어지지 않았고, 신상을 거둬가는 레딧츠의 손을 따라 멍하니 시선이 쫓아갔다.


충격이 가시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란이 묵직한 신음을 냈다.



“그렇군······. 저 신상을 만들라고 지시한 건 루비아, 너로구나. 우리를 수긍시키기 위한 재료로서 준비한 건가.”

“그것만 있는 건 아니지만.”

“또 있다고?”

“당연하지. 이것만이라면 그냥 지어내서 만든 거라고 우길 수 있잖아.”

“아니. 네가 그럴 사람도 아니고, 믿는다만?”


그란의 의견에 모두 동의한다는 듯한 눈빛을 향해왔다.


믿어주는 건 고맙긴 한데, 아직 멀었다. 다들 어렴풋하니 그저 대단하구나, 정도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리아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전 리아의 마법을 본 적이 있는 레이니만을 제외하고.


솔직히 영 귀찮은 게 아니다. 일일이 이해시키기도 번거롭고. 하지만 이건 간단히 넘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래선 안 됐다.


‘앞으로의 일에서도 필요하고.’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시작하기에 앞서······.”


루비아는 넋을 놓고 쳐다보는 두 오라버님에게 갔다.



“자. 둘 다 이거 한 번씩 차.”


그리 말하면서 루비아는 손을 목뒤로 돌려, 섬세하기 그지없는 목걸이를 풀어 내밀었다.



“이건······.”

“아버님에게 준 것과 같은 거야.”


잠시 침묵이 흐르고 둘의 눈이 번뜩였다.



“내거니까 탐내지 마. 어차피 어울리지도 않으니까.”

“아. 어쩐지 직접 건네주러 왔더라니.”

“신기 급의 아티팩트라면······ 모양새라든가 별로 상관없지 않나? 여차하면 옷 안에 넣으면 되고.”

“아앙?”


눈을 부라리니 핸드릭과 잉그라드는 황급히 입을 다물고는 눈치를 봤다.



“자자. 얼른 착용해보자꾸나.”

“으응. 오랜만에 봐서 우리 루비아가 어떤 아이인지 잠시 잊고 있었어.”


속닥속닥 말을 나눈 둘은 번갈아 목걸이를 착용하고 곧장 돌려줬다.


살짝 기분이 나빠진 루비아는 팔짱을 낀 상태로 그런 둘을 째려보고 있다가, 건네오는 목걸이를 빼앗듯 회수했다.



“불만이라면 직접 리아에게 만들어달라고 해.”

“면식도 없는데 갑자기 그런 부탁을 어떻게 한다는 거니, 우리 루비아야.”

“그러면 없는 채로 살아.”

“으으······. 역시 나한테만 쌀쌀맞아.”


풀이 죽었다는 듯 어깨를 떨구는 잉그라드. 광대 같은 그를 뒤로하고 핸드릭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본다.



“뭐?”

“조금 신기해서 말이다. 굳이 성능 때문이 아니라 목걸이 자체를 아끼는 듯해서.”

“흥······.”


대답할 가치가 없다.


‘쓸데없은 부분만 어머님을 닮아 가지고.’


단칼에 잘라내듯이 루비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자. 이걸로 얼추 이야기할 준비가 됐어.”

“루비아, 지금 걸로?”

“응, 어머님. 저주는 풀렸어.”

“확실히 ‘저주’라든가 말할 수 있게 됐군.”

“그러게. 아까는 입이 열어지지도 않았는데.”


간단히 해제된 게 신기했는지, 두 사람은 이후로도 몇 가지 테스트를 이어 나갔다.


문제는 없었다.


당연하다. 앞서 그란으로 확인까지 했는데 이상이 있을 리가 없다. 애당초 해제를 위해 일부러 저주의 발동조건을 충족시킨 것이었다. 실패하면 곤란하다.


루비아는 조금 소란스러운 실내를 보며 손뼉을 쳤다.



“잡담은 나중에 해. 계속 진행할 거야.”


바로 진지하게 자세를 고친 모두를 루비아는 찬찬히 둘러봤다.



“앞에 이야기한 것도 그렇지만 여기부터는 정말 발설은 엄금이야. 특히 아버님이랑 잉그라드 오라버님, 두 사람은 조심하도록 해.”

“아, 알았다.”

“윽. 아, 알았어.”


미덥지 않긴 하지만 할 땐 하는 이들이다. 불안을 걷고 루비아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우선 아까 하던 것을 이어 할게.”

“우린 믿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부족하니까 그렇지. 어머님 빼고 다들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


거기서 말을 멈춘 루비아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잘 들어. 아버님은 들어서 알겠지만, 벨루디스에는 리아가 만든 골렘이 있어. 본인 명칭으로는 오토마타라고 해.”

“음. 분명 보고서에서 본 적이 있지. 디카이로트를 닮았다고 했었나?”


그란의 시선을 받은 레이니가 슬쩍 눈을 깜빡였다.


시종장과 다른 사람들은 처음 듣는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디카이로트는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어리둥절해했다.


이런 이들의 대표로 핸드릭이 물어왔다.



“그래서 그 골렘이 어떻다는 거니?”

“리아는 골렘이라고 우겼지만 겨우 그딴 게 아니야.”

“그럼?”

“아까 내가 리아를 뭐라고 했어?”

“그야 신,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했었지?”


가볍게 이야기를 받는 잉그라드. 그리고 그렇다고 수긍하는 이들.


역시 제대로 실감하고 있지 않다.


이해는 한다. 자신이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면 헛소리로 치부할 것이다. 뜬금없이 신과 동급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그럴 터.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새겨들어. 그거 골렘이 아니라 사도야.”

“신의 사도라 할 때, 그 사도를 말하는 거냐, 루비아?”

“맞아. 리아는 자신의 사도를 만든 거야. 골렘 따위가 아니라.”

“잠시.”


핸드릭이 살짝 손을 들었다.



“네가 하는 말이니 허튼소리가 아님을 알고 있단다. 하지만 근거를 듣고 싶구나.”

“일단 대화가 가능해. 당연히 기초적인 회화 같은 게 아니야. 다른 사도의 경우 현재 벨루디스에 새롭게 생긴 상인 조합의 장을 맡고 있어.”

“간단한 회화 수준으로는······ 가능할 리가 없겠군. 네가 볼 땐 어떠했니?”

“괜히 사도라고 한 게 아니야. 지성이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꽤 똑똑해. 적어도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선 제일 똑똑해. 나보단 아니지만. 하지만 지식이 풍풍하달까, 어지간한 학자들보다 아는 게 많아 보이더라.”


심안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루비아가 사람 보는 눈이 좋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다. 반박 없이 여기저기 앓는 소리가 울린다.



“게다가 강해. 끔찍할 정도로. 공간도약마저 심심풀이하듯 쉽게 해대더라.”

“고, 공간도약······? 그거 실제로 존재하는 마법이었어?”


경악하는 잉그라드와 함께 정말이냐고, 눈으로 묻는 모두에게 루비아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뿐만이 아니야. 라프리트도 같이 눈앞에서 봤어. 거기다 리아의 서방님도 보자마자 바로 따라 했지.”

“······루비아, 저번부터 묻고 싶었다만, 그 여식의 서방이라는 남자 말이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더냐? 레이니도 그렇지만 상당히 고평가지 않느냐.”

“나도 정확히는 몰라. 대충 짐작만 할 뿐. 말해줄 수 있는 건, 벨루디스에서 리아들을 최고 국빈으로 받아들인 배경에는 그가 관련됐을 거란 거지.”

“그 여식은 처음엔 그저 들러리였다?”

“아마도. 하지만 이후 리아가 벌인 행적들에 식겁했을 거야.”

“골렘―― 사도도 그중 하나란 말이렷다?”

“그래. 나 이외에도 삼국 모두와 세인트리안도 똑똑히 사도를 만드는 순간을 목격했어. 인디아 주교의 경우 생명창조라는 말까지 했지.”

“주교가 그런 말을······.”

“그것만이 아니야. 리아가 디카이로트를 닮았다는 제1 사도―― 퍼스트와 벌인 그 대련은 가히 충격적이었어. 며칠 있으면 베르다드에서 돌아온 자제들로 인해 각 나라들은 혼비백산하여 정신도 없을 거야. 아마 벨루디스는 이미 난리일걸?”

“그 정도라고?”

“······레딧츠.”


부름에 레딧츠가 다시 한번 묵례하고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네가 퍼스트와 싸우면?”

“백이면 백 모두 제 패배입니다.”

“얼마큼 압도적으로?”

“움직이기도 전에 제 목숨이 취해질 겁니다. 갓난아기와 어른의 싸움 정도가 아닙니다. 애당초 저로서는 인식조차 힘든 대련이었습니다. 싸움으로 성립조차 안 될 만큼의 격차가 존재합니다.”

“아예 한 차원 다르다고 보면 되나?”

“정확하십니다.”

“짓궂은 걸 물어서 미안해. 고마워.”

“아닙니다.”


작게 고개를 숙이고 레딧츠는 자리로 돌아갔다.


장내는 조용했다.


무력으로는 정말 최상급의 인력이 바로 레딧츠다. 그런 그가 이런 소리를 하는 거다. 다들 레딧츠가 어떤 자였는지 알고 있는 만큼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루비아는 한명 한명과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여러 정보를 취합해 내가 내린 결론은 골렘이 아닌 사도야. 그리고 리아는 그걸 거의 무한히 만들어낼 수 있어. 수도 벌써 다섯이나 돼. 지금에 이르러서는 거의 심부름꾼 만들듯이 만드는 지경이야.”

“그만한 것을······.”

“말할 필요도 없지만 사도 하나하나가 레딧츠는 갓난아기만도 못할 수준의 강자들뿐이야. 그리고 그런 사도들보다 리아는 더 강해. 시조님이 확답까지 해준 사실이야. 기습조차 가당찮다며, 만약 해낸다면 그것만으로도 칭찬해야 한다더군.”


다들 공작 가의 일원으로서, 레이니의 경우 쿠 엘 델리안 왕가의 후손으로서 델리안 아세트 세니알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괜히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대마도사가 아니다. 그 무력은 일기당천 하여 홀로 능히 일국을 지키고도 남았다. 그만한 인물이 증언해준 것이다. 의심은 강당치도 않다.


더군다나 현재 델리안은 리아와 매우 우호적이라 자진하여 사용인 노릇을 하고 있다.


즉, 리아를 적대하면 델리안, 그와 더불어 그녀의 자식인 세스타스까지도 적으로 돌리게 된다.


사룡의 소동은 시조 델리안의 이야기와 함께 모두에게 전해지도록 했다. 그 마력의 파동을 느꼈으면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예상대로 이야기가 끝나자 리아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끝났나, 다들 말없이 길게 침음을 흘렸다.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세력. 이걸 말하고 싶었던 게냐, 루비아?”

“비슷해.”

“하지만 말이다. 우린 애당초부터 그 여식과 척질 마음 따윈 없었다. 시조님까지 계시는 판국에 그럴 리가 없지 않느냐?”

“그래. 그게 본론이야. 다들 리아와 싸우려 들면 안 된다는 걸 절절히 실감했지?”


말해 무얼 하겠는가. 리아와 싸우면 멸망뿐이거늘.


사도 하나만 보내도 그러하다. 공간도약마저 해대는 상대를 막을 수 있다는 대신이 있다면 바로 그놈부터 모가지를 쳐 버릴 것이다. 꿈은 꿈속에서 꾸라면서.


그러한 판국에 그보다 훨씬 강한 리아가 참전한다?


제아무리 루비아라도 희망 따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절망적인 승률이 집계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침공당하지 않는 한 절대 적대만큼은 하지 않겠다며 전원 입을 모아 말했다.



“아니. 침공당해도 적대하지 마. 리아가 원하는 만큼 다 줘. 그리고 만족하고 물러나길 기도하면서 기다려.”


알겠냐면서 루비아는 일일이 집요하게 모두의 대답을 들었다.



“확실히 조금은 그 여식을 가볍게 여기고 있었을지도. 그런 의미에서 황제의 그 빠른 판단은 좀 경이롭구먼. 냉큼 전권대리인으로 임명하다니.”

“칼윈은······ 조금 아버님이랑 달라. 리아와 절대 적대하지 않으려는 것만큼은 같지만.”

“하지만 루비아여, 아까도 말했듯 우린 그 여식과 적대할 생각이 없다.”


일국의 국왕으로서 묻는 그란.


태도가 확연히 달라진 것을 느낀 루비아는 슬슬 다음으로 넘어가도 되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말해주었다. 도플갱어들에 대해······.


먼 옛날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과, 이로 인해 생긴 지독한 증오의 사슬을 하나 숨김없이 낱낱이 들려줬다.



“삼국에서 발발한 각종 트러블의 뒤엔 어쩌면 도플갱어가 있었을지도 몰라.”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

“확정이야. 인간의 활동 영역이 극단적으로 줄고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된 방아쇠, 인마대전도 사실 그들의 소행이지 않을까 싶어. 그야 그렇잖아. 암만 대성했다 해도 세상엔 용왕이나 드래곤 같은 감당하기 힘든 존재들이 있어. 그런데 갑자기 미쳐서 수십 년 동안이나 전쟁을 질질 끌고 간다고? 절멸당하고 싶어 환장했나.”

“확실히 그 부분은 나도 의아했었다. 800년이 지날 동안 복구는커녕, 쇠퇴로 들어설 정도의 피해이건만 어째서 전쟁을 지속했냐고.”

“제정신이 박혔다면 진작에 정전 협정을 맺었겠지.”


거기서 루비아는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진실은 뭐야? 저주도 풀렸으니 이제 말할 수 있잖아?”


그란은 잠시 흠칫했으나 이내 찬찬히 입을 열었다.



“하나 묻겠다만, 왜 저주로 묶인 내용이 대전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느냐?”

“간단하잖아? 대전쟁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게 첫 번째. 암만 피폐해졌다지만 무엇 하나 남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잖아. 다른 기록들은 멀쩡히 남은 주제에.”

“다음은?”

“하나라면서 또 묻기는. 뭐, 좋아. 두 번째는 환수 때문이야. 제국에 갔을 때 우연히 리아를 따라가게 됐는데, 거기서 환수, 아니마무스를 만났지, 뭐야? 아. 참고로 리아는 그 아니마무스를 강아지 취급했다? 쫄래쫄래 안고 다니기까지 하더라.”

“······.”


순간 적막이 흘렀다. 그야 환수를 강아지 취급했다는데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공국의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만큼 환수는 신성하면서도 강대한 존재다.


괜히 저 밥벌레 같은 다이로스에게 굽신거리며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다. 몬스터와 함께 살아가는 공국인지라 다른 국가보다 더욱 환수에 대해 자세히 알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리아가 완전 예외 중에서도 예외인 거다.


하지만 남들과 달리 그란은 아무 감정의 변화도 없이 침착하다.



“역시 아니마무스를 아는구나?”


고민이 많아 보였던 그란이었지만, 이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순순히 실토하였다.



“그래. 얼마 전에 네가 한 것과 같이 [염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말하였지. 조약을 지키라고.”

“과연. 그래서?”

“이미 전모를 다 파악하지 않았느냐.”

“확인은 필요하잖아. 나라고 완벽한 건 아니고.”

“어떻게 할지는 네 이야기를 더 듣고 하겠다.”


왕으로서의 그란은 제법 쓸만하다. 적어도 남부럽지 않은 강단은 있다.


‘절대 이 이상은 입을 열지 않겠지.’


사실 여기까지 들은 것만으로 충분했다. 꿋꿋하게 숨기는 내용 따윈 앞선 정보를 토대로 거의 다 짐작이 갔다. 그란의 말대로······.


그렇기에 더더욱 입을 열지 않는 그의 마음이 이해됐다. 실로 꿈도 희망도 없는 내용인지라.


‘아아. 골이 아프네.’


얼른 쉬고 싶다고 생각하며 루비아는 남은 이야기를 마저 했다.



“지금도 도플갱어는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어. 인간의 멸종을 위해. 하지만 그들은 수가 부족하지.”

“그래서 인간끼리 부딪치게 한다······.”

“정답.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한계가 있잖아?”

“그건 아니다. 동족이 멸종 직전까지 학살당한 거다. 그 분노를 참아가며 조용히 암약한다고? 수백 년이,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났음에도 잊지 않은 자들이?”

“다른 이유가 있구나?”

“그래. 마음 같아서는 한꺼번에 모두 쓸어버리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단행하지 못할 이유가 있었지.”

“그걸 말해줄 마음은?”

“네 이야기가 먼저다.”


확고한 반응에 루비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극도로 조심하는 그란에게는 미안하지만, 방금의 것으로 얼추 감이 잡혔다. 그래도 확인하는 작업은 중요하니 일단 바라는 대로 했다.



“내 이야기는 끝이야. 인간을 멸종하기 위해 인간을 이용할 거고, 거기에 최적화된 인간이 리아라는 거지.”

“그 여식의 원한을 사려 드는 것이로군.”

“리아가 강대하다는 건 알잖아? 여러 소란 때문에. 실제로 제1 위상을 손쉽게 처리했고. 그러니까 암시를 걸려고 들진 않을 거야. 실패할 확률이 높으니까. 대신 주변 놈들을 조종하는 거지.”

“배척하고 고립시켜 한 명에서 두 명, 그리고 인간 전체를 원망하게 만든다······. 대충 이러한 계획이렷다?”

“그런 거지. 강하면 강할수록 그 힘을 인간에게 향했을 시의 피해는 막대할 테니. 내가 볼 땐 계속 그런 식으로 인간의 힘을 갉아먹었을 거 같아.”

“해충들과 죽이 잘 맞을 거 같군.”

“글쎄. 그 녀석들이 바라는 건 약체화. 멸종이 아니다 보니 의외로 죽이 잘 안 맞을지도?”


빤히 쳐다보던 그란은 이마를 짚었다.



“내 딸이지만 정말 두렵구나. 겨우 이만한 문답만으로 모든 걸 파악할 줄이야.”

“나도 아버님을 별로 안 닮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하아.”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한숨을 길게 토해낸 그란은 시종장이 건네는 물컵을 받아 목을 축였다.


그렇게 진정도 할 겸, 그란은 의자에 몸을 묻고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리하자면, 도플갱어는 인간의 멸종을 위해 권력자에게 접근. 그 여식을 적대하게끔 조종한다.”

“정확해. 그거 말고는 달리 답이 나오지 않아. 어중간한 놈이 날뛰어봐야 리아에게 바로 제압당하고 끝이니까.”

“그러니 제일 강한 그 여식을 몰아세운다라······.”

“굳이 적대하지 않아도 리아가 인간에게 싫증 나기만 해도 충분해. 그러면 나중에 다른 놈이 날뛸 때 막지 않을 거 아냐?”

“걸림돌이면서 좋은 말이라는 거군. 그래서 우리에게 바라는 건 무엇이느냐?”

“딱히? 지금처럼 있으면 돼.”

“그렇군······. 누차 적대하지 말라고 강요한 건 그 때문이었나?”


드디어 그란이 집요했었던 의도를 이해했다. 다른 이들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놀란 눈을―― 그다지 가족에게 향하지 말아야 할 눈빛을 향해온다.


마음에는 안 들어 의욕이 뚝뚝 떨어지지만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참아냈다.



“다들 리아를 적대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명확히 알았지? 그런데 갑자기 돌변하여 적대하려 들면――”

“――조종당하는 것이로군.”

“그렇지. 필시 암시에 당한 상태라는 거야.”

“하고자 하는 말은 알겠다만, 짐이 조종당하면 소용없지 않느냐?”

“허얼······. 벌써 까먹은 거야?”

“무얼 말이냐?”

“브로치지 뭐긴 뭐야? 그거 온갖 부정을 막는다고 했잖아. 요행이지만 아크티알에게도 줬으니 그쪽도 문제는 없을 거야. 칼윈은······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전권대리인의 증표도 리아에게 줬고.”


그리 혼잣말하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니, 문득 자신감 없는 그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암시도 막을 수 있을까나?”

“아앙? 장난해? 자식에게 전이되는 강력한 저주마저 단방에 풀어대는 마당에, 신기 급이 그딴 것도 못 막을 거 같아?”


어이가 없다. 그리도 누누이 말했건만 저딴 걱정을 한다니.


‘오히려 내가 다 걱정되네. 저리 허술해서 원.’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루비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는데, 그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시선의 주인은 핸드릭과 잉그라드였다. 그 둘이 마치 간식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간절한 눈으로 애절하게 보고 있다. 안 그래도 신기라는 소리를 듣고 탐내는 것 같더니, 만능 같은 효과를 듣고 나선 더더욱 탐 나는 모양이다.


잠시라지만 루비아는 할 말을 잃었다.



“저, 저기, 우리 루비아야. 이 오라버니들의 몫은?”


참지 못하고 잉그라드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재촉했다. 핸드릭은 옆에서 조용히 거들었고.


끔찍하게 징그럽다.


한계치까지 짜증이 솟구친 루비아는 대뜸 소리쳤다.



“없어!”

“에, 에이. 그러지 말고. 철두철미한 우리 루비아잖니. 사랑하는 오라버니들을 위해 준비했지? 아! 깜짝 선물이구나?!”


도통 알아듣질 못하는구나······.


루비아는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만들었다. 까무러칠 정도로 상냥한 미소를.



“리아는 이미 관여하지 않기로 발을 뺐거든? 더 만들어 달라 해도 이젠 거부할걸? 게다가 오라버님들은 애당초 미끼로 내정되어 있어. 왕자들이니까 도플갱어들도 군침을 흘리고 있을 거야. 그러니 얌전히 돌아가서 먹잇감이 올라오길 기다려.”

“우, 우리가 위험하잖니.”

“괜찮아. 암시에 당하거든 아까 저주를 푼 것처럼 아버님의 브로치를 채우면 되니까. 저항하면 때려눕혀서라도 반드시 착용하게끔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렇지요? 디카이로트 경.”

“예? 아, 예.”


얼떨결에 대답한 디카이로트를 쳐다본 둘은 힘없이 쳐졌다. 암만 발악해도 힘으로 그를 이길 순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깔끔히 포기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아쉬움이 사라진 건 아닌지라, 혹시나 하며 힐끔힐끔 쳐다본다.


저런 건 관심을 주면 안 된다. 버릇만 나빠진다.


루비아는 냉정하게 말했다.



“도플갱어들도 되도록 오라버님들을 죽이려고 하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호위들과 함께 다녀. 거동이 수상해지진 않았나 감시도 하고.”

“그, 그래. 알았다.”


침몰한 동생 대신 힘없이 대답한 핸드릭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루비아는 완전히 관심을 끊었다.



“아버님도 주변 대신들이 변하진 않았나 잘 관찰해. 여차하면 처리하고 본인이 그 자리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들으니 확실히 무서운 종족이구나. 도플갱어는.”

“그러니까 옛 인간들이 무자비하게 학살했겠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그란.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인다.


잠시 기다리니 그란은 무거운 분위기로 말을 걸었다.



“그 여식은······ 손을 뗐다고?”

“어. 리아는 이번 사태를 아는 자들이 서로 통수치지 않나 감시만 할 거야. 걔가 짊어질 연유는 없는 거 같더라고.”

“같은 인간인데?”

“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리아는 본인과 고향은 관련이 없을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더라. 뭔가 있겠지. 어쨌든 걔가 한 번 정한 이상 번복하긴 힘들어. 우리들의 힘만으로 어떻게든 헤쳐나가야 해.”

“그건 무척 아쉬운 소식이로군. 신과도 같은 존재라면 천군만마이거늘.”

“반대로 적이 된다면 재앙이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그 여식의 성격상 틀어진다면 적이 되기보단 고향으로 돌아가리라 보인다만?”


확실히 그 확률이 지배적이다.


그란조차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뻔하디뻔했다.


무얼 어떻게 보더라도 도플갱어가 암약한다는 상황을 아는 이상, 리아는 자신에게 떨어진 불씨만 털어내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이후로도 간간이 찾아와 얼굴을 비칠지언정 적이 될 확률은 희박하다.


하지만 제국의 칼윈을 통해 얻은 정보가 있다.


그래. 다른 미래에서 리아는 적이었다. 그 결과가 하얀 악몽.


――도플갱어의 암약이 성공한 예일 것이다.


그때의 리아가 도플갱어의 존재를 알았는지, 자신도 거기에 휘말렸다는 걸 인지했는지 알 순 없다. 그러나 선례가 있는 것이다.


비록 지금 상황에서는 이루어지기 힘든 미래라 할지라도, 이미 한 번 이루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고, 어차피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차근차근 대비하는 편이 가장 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조금 불안하달까. 이유 모를 불안감이 좀처럼 가시질 않는다.


‘아니야. 그리되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거잖아?’


루비아는 억지로 자신을 다독이며 솟아오른 닭살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 내 이야기는 끝났는데, 어떻게 좀 정하셨나?”

“그 전에 다른 나라는?”

“솔직히 제국 말고는 다 불안불안 해. 나라 전체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화약고나 다름없어. 제일 문제는 벨루디스고.”

“저번엔 제국과 해충이 적이라지 않았나?”


‘쯧. 쓸데없는 데서 예리하네.’


대차게 혀를 찬 루비아는 의욕 없이 서류가 쌓인 테이블 위에 상체를 뉘었다.



“최종적으로는 적이 맞아. 칼윈은 이러나저러나 리아를 이용해 먹을 생각이거든. 제국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 해충은 해충이니 말할 것도 없고.”

“정확히는?”

“인간의 성장을 촉진하는 리아는 그들에겐 눈엣가시야. 이르든 늦든, 언젠가는 수작을 걸어올 거야.”

“성전 사태를 겪고도?”

“······아. 나도 몰라. 스스로 좀 생각해. 아크티알처럼 퇴보하지 말고. ······아니다. 애초에 그럴 머리도 없었나?”


정말 이제는 다 귀찮다. 요즘은 쉬지도 못하고 매일 머리를 굴리는 터라 더더욱.


레이니가 질책하듯 바라보지만, 뭘 어쩌라고. 당장 여기저기 신경 쓸 게 많은데. 먼 미래까지 내다보기엔 지금은 너무 지쳤다. 하물며 아니마무스를 만나서 깨우치게 된 것을 가지고 레이니를 약올리려 했는데 그것마저 귀찮다.


파업이다. 여기까지 했으면 이젠 좀 알아서들 움직여줬으면 한다.


‘그나저나 달콤한 게 급격히 당기네.’


욕망에 충실해지기로 한 루비아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 할 이야기도 없지? 그럼 난 간다?”

“다시 앉거라.”

“왜에? 내 볼일은――”


늘어지게 말하던 루비아는 돌연 자리에 다시 앉았다.



“이거 길어질 거 같네.”


루비아는 즐거운 기색으로 그란을 봤다. 평소의 어리바리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일국의 왕으로서 위엄을 발하는 그란을.


‘백부도 이러한 점을 보았기에 왕위를 양보한 것이려나?’


묘한 감탄과 함께 루비아는 사용인을 시켜 대령시킨 파르페를 먹으며 공왕의 이야기를 들었다. 저주까지 걸며 꽁꽁 감추고 있던 진실의 이면을······.


공왕이 말해주는 진실의 이면은 그 깊이만큼이나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듣고, 여러모로 혼란한 분위기 속에서 루비아는 진작에 다 먹고 빈 유리컵에 스푼을 튕겼다.



“대체로 예상하던 것과 큰 차이도 없네.”

“너야 그러겠지.”

“잘난 걸 어떡해? 하지만 도움은 됐어. 조약에 대해서는 별로 감이 잡히지 않았거든. 그래서 무수히 많은 가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좀 숨통이 트였어.”

“거기엔 내가 말한 내용도 포함됐었나?”

“대충은.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심각할 거라고는 이 나도 몰랐다고?”


진짜 처참하다며, 루비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심각하다 못해 아무 웃음기도 없는 모습을 보노라면 루비아의 이 반응은 너무 가볍기만 했다.



“이건 도플갱어의 집념에 감탄해야 하려나, 인간의 어리석음에 감탄해야 하려나······.”

“둘 모두겠지.”

“이야. 이런 걸 나한테 몽땅 떠넘기고 나 몰라라 은거하려고 한 거야? 아버님도 너무하네.”

“나라고 좋아서 그랬겠느냐?”

“뭐, 그건 그래. 근데 이젠 좀 후련해졌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구나.”


국왕이 된 이후로―― 선왕이 서거한 뒤로는 줄곧 혼자만 간직한 것을 토로한 거다. 차기 국왕에게는 알려줄 수 있다고는 하나,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안고 있다는 중압감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저런 한심한 얼굴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루비아는 생에 처음으로 그란에게 동정심을 가졌다. 그만큼 이 비밀은 그녀에게도 적잖은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괜히 국왕들에게만 전해지는 게 아니랄까······.



“자기들이 사는 세상이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성이라는 걸 공표하기도 그렇고.”


가벼운 루비아와 달리 실내의 공기는 점차 무거워졌다.


‘다들 언제까지 저러고 있을는지. 쯧쯧. 지금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그리 생각하긴 했지만 사실 저들의 심정이 공감되긴 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루비아도 꽤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안의 작은 정원인가······.”


첩첩산중도 이리 심할 순 없다.


정말 잘도 문제가 잇달아 온다. 이렇게까지 상황을 만든 선조들의 머리통을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오죽하면 해충들이 왜 그렇게 인간의 약체화를 꾀했는지 납득이 간다. 더불어 어째서 칼윈 황제가 굳이 리아를 이용하려는 건지 구구절절이 공감한다.


진짜 달리 수단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 정도로 선조들이 싸질러 놓은 똥은 푸짐했다. 예상을 한참 뛰어넘은지라 도통 어떻게 치워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힐 만큼······.


‘어쨌거나 오늘은 무리.’


정말로 지친 루비아는 이만 돌아가기로 했다.



“다들 오늘 이야기는 엄금이라는 건 알지? 적당히들 하고, 난 이만 쉬러 갈게.”


대답이 없는 이들을 뒤로하고, 루비아는 유젯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갔다. 앞장서는 그녀는 생각보다 평온했다.


그녀의 이 평온함은 주인이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란 믿음에서 나온 것.


바로 꿰뚫어 본 루이바는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니냐며 슬쩍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리아도 아니고.’


침대에 곧장 몸을 날린 루비아는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걱정은 없었다. 어차피 처리할 일은 하나. 도플갱어를 막으면 그만이다. 그러면 만사 오케이다.


그리 결론을 내리며 루비아는 천천히 의식의 끈을 놓았다.


작가의말

X간이 미안해! 시즌 2 돌입합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여러모로 사정이 나아졌습니다. 의욕도 돌아왔고, 앞으로는 연재가 이전 속도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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