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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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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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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1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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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10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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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쪽

219

DUMMY

‘크다······.’


대해를 나오자마자 펼쳐진 들판 길.


전혀 정비가 되지 않아 드문드문 풀이 자란 그곳을 조금만 걸으니 곧장 보인다. 이베시온과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고래가······.


아니, 정확히는 고래의 형상을 닮은 이름 모를 ‘마물’이었다.


그렇다. 마물이다. 동물에서 비롯된 마수가 아닌, 곤충류에서 진화한 그 마물이었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그 피부. 어두운 초록빛의 피부는 흔히 곤충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유의 거칠면서 매끈한 질감을 띠고 있다. 물러 보이진 않다. 화석 같은 외피인지라 평범한 갑각 정도는 가볍게 으스러뜨릴 강도를 지녔을 것이다.


무엇보다 크기가 압권이다. 눈대중으로는 대략 전장 1km, 폭은 500m쯤일까. 위로도 400m쯤은 거뜬하지 않을까 싶다. 정말 너무 큰 나머지 이베시온의 상공을 다 뒤덮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잘도 저기까지 컸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런 생물이 평범한 마수나 마물일 리가 없다. 마력의 양도 양이지만, 질적으로도 완벽히 안정된 2단계 압축이다. 백방 환수일 것이다.



“어떤가요? 바지탄스 씨. 이베시온을 습격한 그 마물인가요?”

“예······. 분명합니다. 그때 그 마물입니다.”


침음과 함께 그의 말에는 강한 분노와 격정이 담겨 있었다.


다른 마족들도 당시가 떠오른 듯했다. 조용히 대형을 지켰지만 속은 격양되어 마력이 날뛰고 있다.


저리 특징적이니 잘못 보긴 어렵겠지.


리아는 살짝 긴장감을 끌어올렸다.


바지탄스들이 나설 차례는 없다. 싸운다면 전원 살해당할 테니······.


멀쩡한 상태로 덤벼들었다면 희생은 많을지언정 이길 수는 있었을 것이라 했었는데, 예전 그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바지탄스들로서는 죽었다 깨도 이길 수준이 아니다. 지금은 너무나도 허황한 꿈으로, 아득한 세월 동안 수련을 거듭해야 간신히 가능하려나 싶은 일이다.


안타깝지만 격차가 어마어마하다. 비교하기조차 민망할 만큼······.


직접 마주하니 저 마물의 강함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진다. 되레 겁먹지 않고 승산을 찾은 것에 칭송의 말을 건네고 싶다.



“정했던 대로 가기로 하죠. 모두를 부탁해요, 에르.”

“응.”

“바지탄스 씨도. 지금은 잠자코 있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바지탄스는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족들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으로 쳐다봤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섣불리 나서진 않을 것 같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예상 밖의 사태를 맞이하는 것만큼 최악은 없으니, 주저하지 않고 리아는 [염화]를 사용했다.



『세스. 뛰쳐나가거나, 공격하려는 분이 있거든 막아줘.』

『잠시 기절이라도 시켜둘까?』

『거칠게 하진 말고.』

『뭐, 알았어.』

『부탁할게.』


조금 거칠지만,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대답은 가볍지만 세스라면 잘해주겠지.


꼼꼼하게 확인하고, 리아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페리?”

《뭐?》


옆에 선 페리가 심드렁하니 대꾸한다. 무관심하기 그지없어 흡사 산책하러 나가는 것 같은 태도다.


살짝 어이가 없었으나 리아는 참고 말했다.



“다 함께 기다리라고 했죠?”

《내가 왜?》

“페리······.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니에요.”

《난 항상 진지하다.》


리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의외지만 페리는 진심이었다. 정말 장난기는 하나도 없었다. 더불어 이러는 의도를 읽었기에 리아는 조금 쑥스러워졌다.


이래 보여도 페리는 걱정하는 것이었다. 홀로 나서는 리아를······.


아닌 척 굴지만 페리의 마력은 분명 불안하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물가에 애를 놔둔 부모처럼.


‘누가 츤데레 아니랄까 봐······. 후후.’


다른 때였다면 기특하다며 농담이라도 건넸겠으나 그럴 상황이 아니다.


리아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렇지만 역시 기쁘기는 한지라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페리.”

《······누가 신경 썼다고. 네가 온건하게 간다니 동행하려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안 싸울 게 아니냐.》


어투는 거칠어도 역시 말속에 상냥함이 담겨 있다. 게다가 부탁도 들어주려는 모양인지 기세도 가라앉았다.


빙긋 웃은 리아는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제 동생들을 봐주세요.”

《흥. 얼른 끝내기나 해라. 슬슬 지겹다.》

“그래야죠.”


‘달리 할 일도 많고······.’


슥슥.


가볍게 재차 페리를 쓰다듬어 주고, 리아는 천천히 걸어 나갔다. [위압]을 발동하면서······.


모두에게 말했듯 온건적으로 나갈 셈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자세로 나갈 마음 따윈 없다. 언제든지 덤비라는 심정으로 리아는 오랜만에 마력을 듬뿍 끌어올렸다.


이젠 큰 산처럼 보이는 고래는 묵묵히 있었다.


자는 건 아니었다. 시선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어제부터 줄곧······.


‘뭐, 정확하게 살펴본 기색은 아니었지만.’


대강 주변을 훑어봤달까, 핀포인트로 찍어 보는 루시아스의 시선과는 확실히 달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저 고래는 똑똑히 이쪽을 응시하는 중이다.


과연 어찌 대응할지······.


리아는 은근히 두근대는 심정을 억누르며 기다렸다.


곧 반응이 나왔다. 뭔가 허둥대는 기척이······.


겉으로 보기에는 움직임도 없고 그대로인 것 같다. 그러나 고래의 마력은 통통 튀며 감정을 숨기지 못하였다.



“뭐지? 환희······하는 건가?”


리아가 의문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에서 말이 울렸다.



『알림. 대상에게서 적의가 없음을 확인. 평시로 전환함.』

‘후유증이 있을까?’

『전무.』

‘그래? 이젠 이 정도 개방이라면 괜찮나 보네.’


리아는 몸 상태에 만족하며 위를 올려다봤다.


통통 튀던 고래의 막대한 마력이 움직였다.


――번쩍.


고래의 그 큰 몸에서 빛이 산란한다.


꽤 익숙하다 싶은 광경이었는데 역시나. 빛이 사라지고 나니 그 커다란 고래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어서 오십시오. 이 땅에 왕림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친구들이나 델리안과는 제법 느낌이 다른, 비단처럼 고운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왔다.


그것은 사람을 닮은 형체로, 안쪽은 흰색, 밖은 옅은 하늘색의 투 톤 컬러가 인상적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소 짓는다. 베이지의 눈동자도 맑고 깨끗하여 굉장히 눈길을 끄는 미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명백히 사람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피부가 달랐다. 아까 고래에게서 봤던 어두운 초록빛의 외피를 두른 형태였다.


[소형화]―― 아니, 모습까지 변한 것이니 조금 다른 마법일 것이다. 히야시스가 쓴 것과도 좀 달랐고. 느낌상으로는 에르와 아이리스가 인간으로 변한 것과 비슷한 부류인 듯하다.


이러나저러나 대화를 나누기엔 편해졌다. 성대구조가 비슷한지라 사람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고.


그렇지만 굳이 인간으로 변했어야 했는지는 조금 의문이다.


‘불쾌한 골짜기라고 하던가? 어설프게 닮은 터라 썩 유쾌하진 않네.’


물론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족처럼 대충 저런 종족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니. 그러면 별로 불쾌하지도 않다.


잡생각은 정리하고 리아는 입을 열었다.



“환영은 고마워요. 근데······ 언제까지 계속 떠 있을 셈인가요? 목이 아픈데.”

“아!”


싸늘한 리아의 말에 여성은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화들짝 놀랬다. 그러고는 다급히 땅으로 내려왔다.



“감히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를!”


리아는 가만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고래를 쳐다봤다.


‘뭐······지? 엄청 깍듯하네.’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개방 상태에서 [위압]을 발동하긴 했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굽신거린다는 느낌이다. 도리어 당혹스러울 정도로······.


위에서 내려다본 것도 깔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고래는 그저 원체 나는 게 익숙하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그것이 태도에서부터 너무 잘 드러났다.


예상 밖이었다. 바지탄스들에게 들었을 때는 자비가 없는 악당의 인상이었는데, 눈앞의 고래에게서는 그러한 기색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거꾸로 경건하달까, 이상한 비유 같겠지만 묘하게 신관과 마주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솔직히 사람을 잘못 봤나 싶기까지 했다. 이젠 아예 엎드려 머리를 땅에 박은 저 모습을 보노라면.


‘제법 바닥이 축축한데 말이야. 찝찝할 텐데. 거기다······ 상식이 좀 부족해 보이네. 암만 그래도 알몸이라니.’


곤충의 외피라지만 좀 자극적이다. 달리 가슴이라던가 생식기는 안 보이지만 남성과 어린아이도 있는데······.


짧게 고민한 리아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고래였던 여성에게 옷을 만들어줬다. 추운 날씨에 맞게 대충 두툼한 코트와 바지, 블라우스, 부츠 등을 적당하게.


별다른 디자인이 없는 평범한 것이었으나 원판이 괜찮은지라 꽤 어울린다.


자신의 옷깃을 본 여성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상당히 깊게 머리를 파묻었는지 이마에 진창이 꽤 묻어있다.



“제, 제게 하사하시는 겁니까?!”

“먼저 일어나시기나 하죠.”


대단한 걸 만들지는 않았다. 넘버즈의 것과는 달리 마력이 담겨 있지도 않은 평범한 것들이다. 색도 물이 빠진 것처럼 선명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럼에도 여성은 굉장히 감격했는지 눈에 작게 이슬이 맺혀 간다.


어쩐지······ 폴스 같다.


요즘 더욱 익숙해진 광경에 눈썹이 꿈틀꿈틀한다. 자의식이라도 생긴 듯하다. 그러나 리아는 참고 [정화]를 썼다.


몸을 일으킨 여성은 휙휙, 몸을 빠르게 둘러봤다.



“아아! 깨끗이 하라는 말씀이었군요! 확실히 깨끗하고 건강한 육체에 강인한 정신이 깃든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허억! 지금 보니 피부가?! 이런! 미처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사색이 된 여성이 다급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마법의 성질 변화를 한 것으로, 한순간에 여성의 피부 변하기 시작하더니 인간과 비슷한 질감으로 변하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변화]에는 익숙하지 않은지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이젠 인간이나 다름없는, 구릿빛 피부의 굉장한 미녀로 탈바꿈한 고래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아~ 피부는 실수로 안 바꾼 거였어?’


이색적이었던 만큼 강렬하게 인상이 남았건만. 진상을 알고 나니 조금 허탈했다.


그랬는데······ 이 모습을 보고 무얼 착각했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여성이 빠르게 엎어졌다. 그리고 머리를 땅에 박았다. 엄청난 기세로······.


쿵!



“······.”


말문을 잃은 리아는 거의 목까지 땅에 박힌 여성을 멍한 눈으로 보았다.


‘이게 대체 뭔 일이다냐?’


전력으로 [위압]을 발현하기는 했다. 지난번 아네픽시르에서 이와 같은 수준으로 했으면 전원 게거품을 물면서 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압은 위압일 뿐. 태곳적부터 산 환수에게 통용될 수준은 아니었다.


근데 이 광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좀 정도가 심하게 공손하다. 저 뒤의 로즈를 봐라. 귀여운 눈망울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고 있지 않나. 다른 사람들도 반쯤 질색하고 있고······.


억울하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 일단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데······ 일어나 주시겠어요?”

“즉시!”


힘찬 대답과 동시에 여성은 흙을 뿌리며 순식간에 튀어나왔다. 별로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눈을 똑바로 보며 방긋방긋 웃고 있으니.


그렇지만 목을 박은 만큼 여러모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기껏 옷도 입혀놨건만······.’


인간으로 완벽히 변한 고래는 건강하고 쿨한 미녀처럼 보인다. 복근에도 크게 왕자가 있을 듯하다. 팔과 다리도 길쭉하여 여러모로 부럽고.


하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미묘하게 나사가 빠진지라 괜스레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뭐어, 인간이 아니니 어쩔 수 없겠지만······.’


재차 한숨을 쉬며 리아는 [정화]를 썼다. 그리고 여성의 페이스에 말려들지 않게 먼저 물었다.



“궁금한 게 많습니다만 그전에, 어째서 인간으로 변하신 건가요?”

“그야 당신께서 인간이시니. 같은 모습인 것이 예의라고 판단했습니다만······ 혹시 아니었습니까?!”

“아뇨! 전 대화하기 편하니 좋아요! 그러니까 머리를 박으려고 하지 마세요!”

“옛!”


대답과 함께 정중히 머리를 숙이는 여성. 왠지 기쁜듯하다.


그런 그녀에 비해 자동문처럼 스르르 무너지려던 그녀를 [염동]으로 막은 리아는 지친 숨을 토해냈다.


피곤하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노곤해진다. 오죽했으면 페리의 마음도 공감될 만큼 당장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바지탄스들을 위해서라도.


리아는 자꾸만 일그러지는 얼굴 근육을 붙들면서 말했다.



“자기소개부터 하죠. 저는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오오! 존귀한 성명을 듣다니!”


머리를 움켜쥐는 여성.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격렬한 반응이다. 하지만 여성에게서 그러한 낌새는 없었다. 저래 보여도 진심이었다.



“······당신은요?”

“보잘것없는 저는 레비아라고 합니다. 아니, 부디 아무렇게나 불러주시길!”


감격에 찬 외침을 낸 여성은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미소 지었다. 그에 반해 리아는 아리송함에 고개를 갸웃했다.



“레비아······? 고래니까······ 레비아탄? 에이. 아니겠――”

“――오옷?! 저, 저를······ 소녀를 아십니까?!”


바짝 다가와 흥분한 얼굴을 들이미는 여성―― 레비아.


이쁘다. 연령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을, 로즈에 버금가는 순수한 눈망울도 그렇지만 이 세그언도 대륙에서는 보기 드문 이방의 외모가 아름답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레비아탄이야?’


게임이나 만화 등등에서 은근히 등장하는 레비아탄은 고래나 악어, 용으로 표현되고는 했다. 간혹 악마로 나올 때도 있고. 그 기억에 빗대어 이름을 듣고 그냥 말해봤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게 맞을 줄은······.



“이, 이상하게 비슷한 생물이 많네. 전부 다 공상의 이야기 속이지만. 아니면 번역이 최대한 비슷하게 되었을 따름인가······? 흐음. 모르겠네······.”

“저 말고 다른 레비아탄이 있다는 말씀인지······?”

“아. 아뇨. 그냥 들어본 기억이 있어서요.”

“그렇습니까?”


레비아는 고개를 꼬았다. 하지만 달리 반문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설명하기 어렵고 귀찮았던 터라 더 캐묻지 않아서 살았다.



“그보다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만?”

“아! 확실히 인간은 거주 공간을 따로 만들어 생활하는 습관이 있었지요. 이른바 대화의 장! ······실례했습니다. 계속 이런 곳에 세워두고······.”


이제 깨달았다는 듯 레비아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역시나 인간의 예의나 관습 같은 것에는 어두운 모양이다.



“그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관리하는 성지로······.”


‘성지?’


많은 의문이 드는 발언이지만 리아는 일단 앞장서는 레비아의 뒤를 따랐다. 그다지 망설이지는 않았다. 뻔히 함정을 팔 것 같지도 않거니와, 그러더라도 아무 문제 없었기 때문이다.


레비아가 어마어마하게 강하다는 건 분명하다.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겨우 그거밖에 안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힘들긴 하겠지만 딱히 질 요소가 없다. 본체의 덩치가 산이나 마찬가지인지라 위압감이 있지만, 이 수준에서 덩치는 오히려 걸림돌. 거대한 만큼이나 단순한 과녁, 그 이상도 아닌 것이다.


레비아도 전력을 다할 때는 필시 지금처럼 몸의 크기를 줄일 터다. 되려 그렇기에 히야신스도 그렇고, 다른 환수들도 전부 [소형화]를 습득한 게 아닐까 싶다.


여하튼 문제는 없었고, 에르도 크게 무리 없다는 뜻으로 슬쩍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이베시온으로 입성하게 됐다.


이베시온은 대해의 근처에 있는 마을답게 거대도시처럼 돌벽이 부지를 에워쌌다. 물론 그리 높지는 않아 대충 방비했다는, 그런 안심감을 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고, 만든 양식도 색달라 제법 보는 맛이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인간 쪽의 관문들은 잘도 저리 섬세하게 쌓았네 싶은―― 만화에서나 볼 법한 것들인 반면, 이쪽은 훨씬 투박했다.


‘대충 지구의 고성들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이 나름대로 웅장하지만, 수작업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이는 탓에 살짝 엉성하기도 했다. 마법으로 돌 간의 간격을 완벽하게 맞춘 인간과는 확실히 완성도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엄청 튼튼하게 만들었다.


쿵쿵.


활짝 열린 관문을 지나치며 두드려 보니 철문이 꽤 묵직한 울림을 낸다. 아마 아낌없이 소재를 때려 부은 게 아닐까.


어쩌면 세인트리안의 관문보다 튼튼할 수 있겠다.


제법 감탄을 하며 리아는 이베시온의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곧장 시선이 모인다.


오기 전부터 느꼈었던 마력의 주인들이다. 그들이 레비아와 함께 들어오는 리아와 일행들을 경계 어린 시선으로 주시한다.



“인간······?”

“마족이 인간이랑?”

“앞서시는 분은······ 레비아 님? 그런데 어째서 인간의 모습으로······?”


술렁거리는 그들의 말은 금세 주변으로 퍼졌고, 거리에는 놀람의 환성이 터져 나왔다. 개중에는 직접 보고 싶었는지 모인 이들을 비집고 나오는 자도 있었다.


이 모습에 리아 또한 많이 놀랐다. 특히 저들의 외형이 그러했다. 레비아와 비슷하면서도, 좀 더 진한 적갈색의 피부에 팔다리 다 붙어 있는 모습은······ 인간과 굉장히 흡사한 것이었다.


의복이 간소한―― 최소한의 부분만을 가린 탓에 근육질의 몸매도 잘 드러났는데, 덕분에 인간의 신체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다른 부분이라고 하면 송곳니 정도로, 인간과 달리 위에서 내려오는 앞니의 송곳니가 제법 크다.


‘뭐, 귀엽게 입술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정도라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지만······ 확실히 인간은 아니지?’


곧이어 이베시온에 있던 전원이 모여들었다. 별로 많진 않았다. 대략 팔십 명 정도다.



“바지탄스 씨, 저들은?”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습격할 때 있었던 분들은 확실히 아니죠?”

“예. 습격은 분명 몬스터의 군단으로 이루어졌었습니다. 처음 보는 자들입니다.”

“무슨 종인지 아시겠나요?”

“――오거야.”


리아는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세스를 흘겨봤다.



“잘 아는 상대야?”

“안다면 알지? 일단 같은 숲의 민족이니까. 다만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아.”

“경쟁하는 관계라는 건가······.”

“대충 그렇지. 그래도 적대적이진 않아. 어차피 우리들은 유목민이니까. 얼마 안 지내다가 떠나는데 굳이 싸울 필요가 없는 거지. 하지만······ 좀 의아하네. 오거가 인간의 마을에서 지낸다니 말이야.”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봐야겠지.”


‘오거라······.’


전생의 만화에서 가끔 본 것도 같은데······ 잘 모르겠다. 기억에 남은 인상이라고는 탁월한 신체와 더불어 호전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하는 정도랄까. 대부분 매체에서의 설정이 이랬던 것 같았다.


세스의 말마따나 숲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라면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베시온 습격 때는 분명 없었다고 하니 이후 빈 마을에 정착했다는 것인데······. 타이밍이 너무 기가 막히다. 어떠한 의도나 모략 같은 게 있어도 바로 수긍될 정도로······.



“음. 마침 다들 모여있습니까? 잘 됐군요. 누구 한 분 오실 수 있겠습니까?”


레비아의 말에 웅성거렸다. 선뜻 나서려는 이는 없었다. 되려 조심스러워하는 분위기마저 흐른다.


‘별로 친하진 않은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들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한 노파가 걸어 나왔다. 물론 노파라고는 하나 몸은 정정하다. 신장도 상당하고. 허리도 전혀 굽지 않았고, 시선에서는 백전노장의 기운마저 감돌고 있다. 이어 나오는 목소리에도 상당히 힘이 담겨 있어, 적어도 오늘내일할 것 같진 않다.



“부르셨습니까, 레비아 님.”

“으응?”


레비아가 고개를 꼬고는 본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노파를 지긋이 노려봤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예를 갖출 상대를 착각하셨습니다.”

“······예?”

“당신이 무릎 꿇을 상대가 틀렸다고 했습니다. 예를 갖춰야 할 상대는 바로······ 이분입니다!”


척!


절도 있는 동작으로 레비아는 공손히 옆을 가리켰다.


그 가리키는 방향의 끝을 멍청하니 리아와 노파가 따라갔다.



“여기 이 인간에게 말입니까?!”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에······?”


노파와 리아는 동시에 따지듯 외쳤다.


레비아는 이러한 반발이 있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못했나 보다. 정말 놀란 얼굴로 멍청하니 쳐다본다.



“아~ 알겠습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뭘 맡겨달라는 건지······.


돌연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레비아는 자신만만해했다. 그와 비례하여 리아의 불안감은 증폭해 갔다.


그러나 끼어들기에는 너무 외지인이다. 분명 호의적인 목적으로 찾아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사이가 틀어질 이유는 또 없지 않은가.


여러 들을 이야기도 있는바, 얌전히 있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 리아의 심정은 꿈에도 모른 채 레비아는 [염화]를 썼다. 상대는 노파였다.


‘어떤 비밀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이려나······.’


불안하다 보니 순간 염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환수라고는 하나, 전력을 다해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하니 슬쩍 끼어드는 것쯤은 간단하다.


제법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 노파의 표정이 다양하게 변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경악으로, 노파는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이따금 리아를 힐끔힐끔 곁눈질로 보았다.



“저, 정녕 사실이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신원을 감추고 싶은 듯하시니······. 알겠지요?”

“예.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저들끼리의 대화를 마치고, 노파는 리아를 향해 진중하게 절을 하듯 머리를 숙였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미천하여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나이다.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어······ 아뇨. 됐어요.”


할 말이 무지하게 많았다. 그렇지만 리아는 정정하지 않고 대충 넘어갔다. 어찌 됐든 이들은 바지탄스의 고향을 빼앗은 침략자가 아닌가. 자세한 사정은 들어봐야 하겠지만 아직 친해질 마음 따윈 전무했다. 그러니 그냥 착각하게끔 놔뒀다.



“너무 끌리는데, 슬슬 안내해 주지 않겠어요?”

“아, 옛! 어······ 점술사이신 드카네스 맞죠?”

“그러하옵니다.”

“마을을 잘 알고 있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모쪼록 이스피리아 님을 모실 수 있는 만한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설마 싶었는데 안내를 위해 굳이 사람을 부른 것이었나.


인간의 상식이 부족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만······ 너무 무지한 게 아닌가 싶다. 왠지 모르게 여기 사람들과도 그리 친해 보이지도 않고.


뭔가 관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리아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솔직히 안내라고 할 것도 없다. 그저 정면의 큰 대로를 쭉 나아갈 뿐이니 말이다. 거리도 별로 안 멀다. 애당초 이베시온은 그리 크지 않아 1시간만 걸어도 부지 전체를 돌 정도로 작다.


심지어 어디로 갈지조차도 너무나 뻔했다. 오직 레비아만이 모를 뿐이다.


그렇게 오래 걷지 않아 노파는 예상대로의 집 앞에 멈춰 섰다.



“이곳입니다.”

“음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다른 곳보다는 조금 더 나은 듯하군요.”


아니.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니다.


노파―― 드카네스가 안내한 곳은 널찍한 마당과 화단이 딸린 좋은 집으로, 부지 자체가 넓은 데다, 벽돌도 제대로 말끔하게 다듬은 티가 엿보인다. 투박한 것만큼은 어쩔 수 없어 보이지만 다른 집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멀쩡했을 때는 좀 더 괜찮았겠지······.’


지나치며 본 다른 집들도 그러했지만, 이곳도 상당 부분 무너져 내렸다. 마당과 화단도 그러했다. 엉망진창으로 파헤쳐져 있고, 전혀 관리하지 않아 이름 모를 잡초가 한껏 자리 잡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최근에 생긴 것 같지 않다. 필시 3년여 전에 있었던 몬스터 군단의 습격 때 생긴 흔적일 것이다.


‘지금까지 고치지 않은 것은 저들에게 기술이 없기 때문이겠지.’


오면서 보았던 반나체의 그들이 풍긴 분위기는 원시 부족 같은 것이었다. 단순히 성향이나 풍습이 그러할 수도 있겠으나, 잘 발달한 육체와 더불어, 상당히 호전적인 듯한 얼굴들을 보노라면 문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지 않나 싶다.


그려지는 것은 나무 그늘 밑에서 곤히 자는 모습이다. 집을 수리할 기술은커녕, 고칠 필요성을 느낄지나 모르겠다.



“영주관 같은 곳이었나요, 바지탄스 씨?”

“그렇습니다, 아가씨······.”

“담벼락도 없고, 꽤 친근한 영주―― 아니, 직접 올 리는 없으니, 대리나 관리자겠네요.”

“예. 권위 없이 모두를 두루 챙겨주던······ 좋은 사내였습니다.”


많은 감정이 담긴―― 이곳을 너무나도 잘 아는 바지탄스의 말에 드카네스는 움찔했다. 이제야 이쪽이 누군지, 무슨 연유로 찾아왔는지를 안 모양이다.


아쉽게 집을 올려다보며,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별건 안 했다. 그냥 안에 쌓여있을 먼지를 [정화]로 없앤 것이었다.


저들도 나름 청소를 하긴 했을 테지만, 그리 믿음이 안 가는지라 직접 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잡초도 없애고, 집도 깔끔하게 개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주제넘은 짓 같아서 참았다.



“오옷! 가히 예술에 가까울 만큼 섬세하고 정교한 마법입니다!”

“······들어가도 될는지요?”


일일이 반응하기도 이젠 귀찮다.


감탄하던 레비아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고, 순간 폴스가 튀어나와 전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정문을 열었다.



“고마워.”


집사처럼 공손히 예를 차린 폴스를 지나쳐 리아는 영주관으로 들어섰다.


‘깨끗해지긴 했다만······.’


시야에 비치는 건 엉망진창으로 어질러진 실내로, 안에서도 전투가 있었던 듯싶다. 드카네스들이 최소한의 정리는 한 것 같지만, 흡사 당시 상태를 거의 그대로 남겨둔 것 같은 상태였다.



“바지탄스 씨, 대화할 만한 장소가 있을까요?”

“예. 모시겠습니다.”


바지탄스는 익숙한 모습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무너지지 않은 방 중에서도 넓고 세간이 잘 갖추어진 곳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인가?’


다행히 여기까진 전투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는지 상당히 상태가 좋다.


만족하고 리아는 덩그러니 놓인 상석에 앉았다. 평소라면 절대 사양할 테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테이블을 두고 놓아진 소파의 한쪽에는 바지탄스와 아시리트가 앉았고, 당연하다는 듯 레비아가 바닥에 양 무릎을 꿇었다. 덩달아 드카네스도.



“······저쪽 자리에 앉으세요.”

“옛!”


허락이 떨어지자, 리비아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착석했다. 드카네스도 그녀의 뒤에 대기시켰다.


나머지 사람들은 적당히 벽에 기대거나 구석에 모였다.


로즈나 프리에나가 끼고 싶은지 안쓰럽게 쳐다본다. 그러나 눈길도 주지 않았다. 당사자인 마족들조차 방이 좁아 정작 밖에 있건만 어찌 그러하겠는가.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제대로 대화를 나눠보기에 앞서,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죠.”


이제 시작이다. 앞으로 어찌 행동할지는 이 대화를 통해 결정된다.


서두를 땐 리아는 무표정으로 앉아있는 바지탄스와 아시리트를 가리켰다.



“바지탄스 씨와 아시리트 씨예요. 원래 이곳―― 이베시온에서 거주하셨던 분들이죠.”


역시 그런 것이냐면서 드카네스는 무겁게 침음을 냈다. 그런 노파에 비해 레비아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저는 레비아! 환수, 레비아탄의 레비아입니다. 오랜만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시간으로 아마 3년 만이죠?”

“잠깐······. 기억하고 있다고?”


밝은 목소리에 울컥했지만, 그 이상 괴리가 느껴지는 발언에 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이상했다. 분명 레비아는 이베시온을 습격한 군단의 우두머리다. 어찌 된 영문인지 현재 살고 있는 거주민은 생뚱맞은 사람들이지만 그것만큼은 확실하다. 혹시 몰라 조금 전에도 재차 확인했었다.


――그런데 어찌 바지탄스들을 아는 것인가.


정밀하게 준비된 습격이라면 상대가 누구인지 상세히 알아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그렇지만 레비아의 습격은 그렇지 않았다. 불시에 기습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바지탄스들도 누군가 이베시온을 염탐하는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원거리에서 살피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천리안] 같은 마법을 쓰면 된다. 하지만 레비아는 환수다. 태고부터 살아온 신화 속의 존재가 과연 남의 눈치나 살피는 짓 따위를 할지 의문이다.


용왕과 관련이 있다면 또 모르겠다. 아니마무스나 히야신스 등등, 묘하게 에르의 눈치를 많이 봤으니까. 자세한 배경은 모르지만, 무서워하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환수는 감각이 예민하여 단박에 용왕임을 알아본다.


만난 환수들 전원이 그랬으니 틀림없다. 그들은 결단코 용왕을 못 알아보거나 하지 않는다. 이베시온에 용왕이 없다는 것쯤은 바로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간단한 탐색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그게 강자다. 신화시대를 살아온 이 지상의 절대 강자인 그들에겐 다른 종들의 저항 따위는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몸부림에 불과한 것이다.


과장도 없는 담백한 사실이다. 괜히 바지탄스가 레비아를 목격하는 순간 곧장 도주를 택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레비아가 바지탄스들을 안다는 것이 더욱 기묘하다······.


보통 기억할 만큼 관심 있게 본 것이라면 그에 따르는 인상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바지탄스들은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하지 않고 이베시온을 빠져나왔다. 인상은커녕, 오히려 기억에 남는다는 게 더욱 어려운 상황이다.


‘아니. 애초에 바지탄스 씨들은 어떻게 도망쳤지······?’


말이 안 된다. 살짝 바보스러운 면모가 부각되어 시원찮게 여겨지는 레비아지만, 그 강함만큼은 진짜배기다. 괜히 환수가 아니다. 배짱을 부리고 있지만 리아도 내심 꽤 긴장한 상대다.


이만한 존재가 도망치는 자를 놓친다?


단언컨대 있을 수 없다. 마력레벨이 높다고 하는 것은 마력과의 친화도가 높다는 뜻이다. 그만큼 마력에 민감하여 그 안에 담긴 의지나 감정마저 읽을 수 있다. 탐지하는 범위 또한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개개인 간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극심한 편차는 없다. 하물며 레비아는 어제 에르가 발한 마력을 느꼈다. 탐지 범위가 결코 좁지 않았다.


저런 레비아를 상대로 도망친다? 지금보다 훨씬 약한 3년 전의 바지탄스들이?


냉정하게 말해 불가능하다. 일부러 놓아주지 않는 한은······.



“어? 일부러······?”


리아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부정했다.


그야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바지탄스들을 보낸다고 해서 레비아에게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부정하면 할수록 더욱 이 추론이 머리에 달라붙었다. 무엇보다 고의로 보낸 것이라면 바지탄스들이 기억에 남아도 이상할 게 없다는 점이······ 쉬이 떨쳐내지 못하게 했다.



“이봐요, 레비아 씨.”

“옛!”

“당신······ 왜 여기를 공격한 거야? 먹을 게 필요한 것도, 무슨 원한이 있던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어째서?”


레비아는 초월자다.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안 그래도 가뭄이었다는 곳에 진미가 있을 리도 없으니 더더욱 먹거리로 칠 이유는 없다. 원한도 그렇다. 탐색 한 번 하지 않았을 곳에 원한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싸늘한 말에 레비아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 못 할 질문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살짝 화가 나지만 리아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야······ 신께서 명령하셨기에······.”

“······뭣?!”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리아는 경악했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신께서 명했다고 했습니다.”


재차 들은 말은 틀림없다는 확증이었다.


리아는 동그랗게 뜬 눈을 에르에게로 향했다. 그러나 그도 짐작조차 안 되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경악스러웠지만 리아는 진정하고 물었다.



“어느 분이었나요?”

“운명을 관장하시는 분―― 글로디아 님이셨습니다.”

“······하하.”


리아는 실이 끊긴 인형처럼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점차 소리가 높아져만 갔다.



“크하하핫······!!”


리아는 크게 웃어 재꼈다. 정말 마음 놓고.


마치 광인과도 같은 모습에 폴스를 비롯, 로즈가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할애할 신경은 없었고, 리아는 계속해서 미친 것처럼 웃었다. 그 기분과 동화하여 몸에서도 마력이 마구 뿜어져 나왔다.


맹렬한 파동이 사람들을 덮치기 직전, 가까스로 에르가 막았다. 미리 이럴 줄 예상하고 있었기에 거침없는 것이었지만, 자칫 대형 사고로 번질 뻔했다.


거기에 이어――


――뚝뚝.


무언가가 몸속에서 끊어진다.


상당히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 함께 몸을 공유하고 있는 아이가 웬일인지 무척 당황한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되려 상쾌해지는 기분에 개방까지 하여 마음껏 마력을 발산했다.



“이거이거, 아주 재밌게 됐구먼. ······그렇지 않나, 루시아스여? 크큭······. 신은 지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개소리가 잘도 나왔어. 이쯤 되면 네년도 무안하지 않나? 아니, 그전에, 이만큼이나 개입해 왔건만 여태 몰랐다면 도대체 얼마나 무능한 것이더냐? 아니면 알고도 나에게 숨겼느냐?”

『알림. 시전자―― 이스피리아, 진정하길 권고. 신체의 부담이 상정 이상임.』

“쯧.”


리아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이제 막 흥이 올랐거늘······.


하지만 리아는 크게 숨을 내쉬며 진정을 꾀했다. 너무나도 안절부절못하는 아이를 차마 무시할 순 없었기에.



“루시아스여, 똑똑히 듣게. 내 앞에서 재차 헛소리는 하지 말아다오. 혹여나 하려거든, 부디 신중히 내뱉기를 바란다. 몹시 짜증이 난 내게 파운딩 당하는 수모를 겪기 싫거든. 그게 아니더라도, 신이나 된 주제에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함부로 내뱉는 게 아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창피하지도 않나?”


꽤나 후련하다.


에르의 부모님―― 시어머니임은 안다. 버릇이 없다는 것도 안다. 그렇지만 할 말은 해야겠다.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린 리아는 곧장 흩뿌려진 마력을 회수하여 몸을 안정시켰다.



“저, 저기. 죄송하지만 뭐, 뭐가 잘못됐나요?”


무겁게 침묵 속에서 불안한 레비아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리아는 소파에 깊게 몸을 뉘었다. 여러 시선이 모이지만 별로 개의치 않았다. 도리어 신을 향한 도를 넘는 발언이 거슬린다며 누군가가 따져주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런 자는 없었고, 리아는 아쉬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하니 여기에까지······. 도대체 운명의 신은 언제부터 개입을 해온 거지?’


수수께끼가 늘었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해졌다. 글로디아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이. 이전 에르의 예측은 틀림이 없는 거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리아는 뒤를 돌아봤다.



“에르. 당신, 레비아 씨와 구면이죠?”

“······응.”

“아, 예! 일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걱정스레 보면서도 에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레비아도 벌떡 일어나 에르에게 머리를 숙였다.


역시 만난 적이 있다.


앞선 에르의―― 어지간하면 대놓고 살기를 내뿜지 않는 그의 반응으로 레비아와 면식이 있다는 것은 얼추 예상했었다. 별로 좋지 않은 만남이었다는 것까지도.


그래서 묻지 않으려 했다. 에르가 스스로 말해주기 전까지는.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순 없었다.



“레비아 씨와 무슨 일이 있었죠?”


어쩔 수 없음을 안 에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말하기 싫었었나 보다.


그리고 [차원단절]의 결계가 펼쳐졌다. 레비아도 포함한 크기로, 주변은 완전한 어둠에 감싸였다.



“별로 밝힐 얘기는 아닌가 봐요?”

“응. 아이리스가 얽혀있거든.”

“아이리스요?”

“일전에 이야기했었지? 아이리스의 알을 도둑맞았었다고.”


에르와 만나게 된 그 사건을 어찌 잊겠는가. 안 그래도 귀엽디귀여운 아들의 일인데.


더욱이 그 과정이 너무 황당한지라 선명히 기억에 각인 되어 있었다.



“분명 마수와 마물들이 연이어 나타나 우리 아이리스를 옮겼다고 했었죠? 아! 그러면 그때 그 마물이······?”

“맞아. 저놈이야.”


당시 사건 때 제법 강한 마물이 있었다고 했었다. 에르가 강하다고 할 정도이니 아마 환수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혹시나 했는데······ 보기 좋게 딱 들어맞았다.


이 어둠 속에서도 잘 보이는지 레비아는 시선이 모이자 쑥스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반성 따위는 없었다. 아니, 애당초 무얼 잘못했는지조차도 모르는 것 같았다.


순간 리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무심코 주먹도 꽉 쥐었다.


그때 에르가 어깨를 가볍게 쳤다.



“괜찮아, 리아. 아니꼽기는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잖아?”

“그건······ 그렇죠······.”

“응. 별로 열 내지 않아도 돼. 오히려 난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기까지 해. 뭐어······ 진짜로 감사할 마음은 없지만서도.”

“후훗. 그게 뭐예요?”

“어쩔 수 없잖아? 본의는 아니지만 사실이기는 하니까.”


에르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고, 리아는 빵 터졌다.


원래 개그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해서 그런지 참기 힘들다. 덕분에 기분도 꽤 나아졌다.


눈가를 쓸어내린 리아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고마워요, 에르.”

“뭘.”


리아는 따스하게 미소 짓는 에르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참을 수 없게 된 에르가 조심스럽게 리아의 허리에 손을 둘러 안아 올렸다.


그 상태로 에르는 레비아의 앞에 섰다.



“에르―― 제 남편이 괜찮다고 하니 일전에 있었던 일들은 넘어갈게요. 하지만 이유는 꼭 들어야겠어요. 어째서 우리 아이리스의 알을 훔쳤죠?”


남편이라는 소리에 놀란 눈치였지만 레비아는 즉시 절을 하듯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글로디아 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 심연처럼 어두운 알―― 자제분이신 아이리스 님의 알을 운반하라고.”

“······자세하게 말씀해 보세요.”

“송구합니다만 더 아는 게 없습니다. 그저 지정된 곳까지 옮기라고, 이후는 다른 자가 대기하고 있다고만 하셨습니다. 용왕께서도 보셨겠지만, 실제로 그 자리까지 가니 다른 자가 있어 알을 넘겨줬습니다. 그게 전부입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천성인지, 꽤 순수한 성격을 지닌 레비아다. 능글맞게 꾸며내는 그런 쪽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그 탓에 제1 위상, 가이란이 살짝 연상되기도 하였다.


이런 자에게 화를 내봐야 무의미하다. 아무 이해도,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테니.


아니.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다. 지금은 인간의 외견이지만 엄연히 다른 종. 가치관이 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인간끼리도 다른 판국에 말이야.’


그러니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 당장 주먹을 날리고 싶더라도······.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니 어떻게든 참아냈다.



“글로디아 님이 직접 명령을 내린 건가요? 에르의 알을 운반하라고?”

“예! 직접 말을 거시어 명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따라 저는 [소형화]로 작아진 다음 안전하게 이어받았습니다. 곧장 용왕께 저지당하긴 했습니다만······.”


당시가 떠올랐는지 레비아의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당연히 리아는 아니었다. 레비아의 반응에 열불도 나지만, 그보다는 그 내용에 딱딱하게 굳었다. 에르도 심각한 얼굴로 고뇌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글로디아 님에게 놀아났을 수도 있겠네요. 저와 에르, 레비아 씨와 다른 이들까지도.”

“그렇겠지. 지금 보면 기괴한 점이 넘쳐나기도 해.”

“에르에게 알을 탈취한 것부터요?”

“맞아······.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필시 운명의 신이 개입했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에르에게서―― 세계를 한눈에 살피는 용왕에게서 알을 훔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제아무리 환수라 하더라도.


‘이 모든 수고를 들이고 노린 것은······ 나의 죽음이었나?’


빼돌려진 아이리스의 알이 자신에게 온 것은 에르를 유인하기 위함이었을 거다.


그리고 분노한 에르에 의해 처리된다.


아마 그것이 운명의 신이 계획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그 외엔 달리 설명이 안 된다. 거의 반쯤 성공하기도 했고.



“좋게 끝났으니 다행이긴 하다만······ 여기서 포기하진 않겠죠?”

“그렇겠지. 리카드에게 다방면으로 개입한 것을 보면 쉽게 그만두진 않을 거야.”

“아서 씨를―― 용사를 소환한 것도 저를 죽이기 위함이었겠네요. 확실히 그리 생각한다면 다소 적대적인 태도도 납득이 가요. 어찌 됐든 아서 씨에게 저는 마왕과 같은 존재일 테니.”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에르도 같은 결론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신이니 소환할 때 아서에게 손을 써두는 것 정도야 쉬울 테고. 물론 진실은 아직 모르지만.



“뜻하지 않게 이런 데에까지 연결됐다는 걸 알게 됐네요. 근데 나와 무슨 원한이 있다고 이러는 것일까나······?”

“······.”

“헤헤. 얼굴 펴요. 어차피 뭔 짓을 한들 떨쳐내면 그만이잖아요? 이럴 때를 위해 대비해 온 것이기도 하고요.”

“응. 그렇지······.”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지만 확실히 에르의 기분이 살짝 풀어지긴 했다.


안심이 된 리아는 살짝 그의 목을 끌어 안았다.



“으음. 근데 용사라······. 여태 별생각이 없었는데, 루비아 씨를 괜히 말린 것이려나? 신이 일부러 준비한 것이라면 분명 성장이 어마어마할 텐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죽여야 하나······? 하지만 우리 아이리스랑 조금 친해졌는데······. 이러나저러나 동향이기도 하고.”


죽인다는 것에 큰 고민은 없다. 가족의 안위보다 우선되는 것은 없으니. 망설인다면 반대로 죽는 것은 이쪽이 될 것이다.



“천천히 정해도 되겠지. 제까짓 게 덤벼 봤자고.”

“그건 몰라요. 운명이라는 강제력이 작용할 수도 있잖아요?”

“리아가 말하는 강제력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만약 신력이나 권능에 의한 것이라면 한시름 놓아도 될 거야.”

“그래요?”

“확실해. 리아는 이미 그딴 술수가 통할 수준을 넘어섰어. 뭔가 하려거든 직접 강림해야 할 거야.”

“신이 직접?! 그게 가능해요?!”


작가의말

느, 늦었습니다!

늦은 만큼 -2가 준비되어 있으니 인사는 그쪽에서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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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203 +2 23.09.14 62 0 39쪽
238 202 +2 23.09.14 93 0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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