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연재수 :
259 회
조회수 :
29,934
추천수 :
315
글자수 :
3,609,859

작성
24.01.22 19:30
조회
29
추천
0
글자
33쪽

212

DUMMY

“나의 저의라······.”


모두가 바라보는 가운데 교황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의 감정이 들키지 않도록 감추는 것 같다.


하지만 저럴 필요까진 없었다. 어차피 교황의 속내를 완벽히 읽을 수 있는 사람 따윈 이곳에 없으니까. 소베르비아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정말 쓸데없는 행위였다.


미래를 떠올린 교황이다. 당연히 이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알면서도 행한다라······. 실로 인간다운 어리석음이로군.’


교황에게 그런 면모 따윈 진즉에 풍화되어 사라진 줄 알았건만.


잔혹하기만 했던 이전 교황을 머릿속에서 그린 칼윈은 차분히 귀를 기울였다.



“딱히 진의나 저의라 부를 만한 건 없네. 그저 인간을 믿지 못할 뿐이지. 모두 알지 않은가? 인간은 지나치도록 영악하다네. 태초부터 그런 생물이었지. 물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네. 그러했기에 그 어떠한 종족보다도 나약한 인간이 지금껏 생존한 것이겠지.”

“아. 그렇군요······. 당신은 알리고 싶었던 겁니까? 우리 인간은 이만큼이나 위험한 종족이라고?”


리카드의 말에 교황은 천천히 눈을 떴다.



“세월이란 잔혹한 법이라네. 상처가 아무리 깊고 깊어도 시간 앞에서는 풍화되어 사라질 따름이지. 대전쟁 또한 다르지 않네. 그때를 기억하는 자는 이젠 거의 남지 않았고, 당시의 혐오, 원한, 슬픔, 분노, 공포, 광기의 기억도 희석되었지. 신의 곁으로 돌아간 이들을 따라······.”


80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수명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존재만이 가능한 무거운 발언이다.


진실은 그의 말과 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떠한 반박도 할 수 없다. 필멸의 존재에 지나지 않는 이들로서는······. 도대체 무얼 안다고 주절주절 의견을 늘어놓겠는가.



“하지만, 난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네.”


다들 쓴 신음만 내는 가운데 공기가 떨릴 만큼 강인한, 작지만 잔뜩 힘이 실린 교황의 목소리가 울렸다.



“인간은 나를 포함하여 모두가 간사하네. 긍지 따윈 있지도 않고, 명예와도 거리가 멀지. 그런 종족일세, 인간은······. 그 성향을 단편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게 바로 역사 왜곡이라네. 우리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는 진실은 숨길만하네. 하지만 그러기 위한 방편이 웃기지 않나? 전쟁의 결과를 바꾼 것도 모자라, 피해자인 마족을 전범으로 만들다니 말이야.”

“그건 네놈의 머릿속에서 나온 일일 텐데?”

“암암. 물론. 내가 했다네. 구체적인 구상부터 그 실행까지, 모두 나의 진두지휘 아래 이루어졌지. 다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네. 인간 따위 모두 없애버리고 싶었다만, 그러면 아내의 부탁을 어기는 게 되지 않겠는가? 정말 진심으로 타개책을 마련한 것이었지.”

“그 타개책이라고 나온 게 겨우 그거라고? 진실의 눈을 지녔다는 교황의 이름이 울겠군······.”


칼윈이 거하게 비꼬았다. 그러자 교황은 빤히, 감정의 기복이 없는 눈동자를 향해 왔다.



“괜찮은 생각이 아니었나?”

“당연한 것을 묻는 게 아니다, 교황이여. 인간이 우리 안의 동물 신세라는 걸 감춘다고 하더라도 달리 방법은 많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당시에는 가만히 있었던 겐가?”

“뭐······?”

“어째서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냐는 것이야. 그때 나의 방침이 틀렸다고 했으면 구태여 밀고 나갈 생각은 없었다만?”

“무슨 헛소리냐? 이 몸은 그땐 태어나지도―― 아. 그게 아니로군.”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닫고 만 칼윈은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교황이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역사 왜곡과 인간의 약체화, 그리고 인간이란 종족의 인식을 나쁘게 하는 것, 이것들은 교황의 독단으로 저지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다들 동의했던 거다. 당시의 벨루디스, 루 몬테르, 폰타르트의 지도자들은······.


그들은 저딴, 타개책이라는 이름의 모지리 짓을 자신의 귀로 듣고도 그대로 승낙한 것이었다.


간격을 두고 하나둘 이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장내는 침묵이 흘렀다.



“다들 나처럼 인간을 혐오하거나 한 건 아니라네. 그저 인간이 지닌 그 잔혹성과 교만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게지. 이후로도 그러하다네. 인간이 벌인 끔찍한 짓을 알고, 그건 틀린 것이라며 지적한 사람은 없었지. 그렇다고 동의하지도 않았지만 말일세.”

“그렇게, 인간이 미움받도록 행동해 왔다······.”

“정말 내키지 않았다면 도중이라도 반발했을 테지. 하지만 여태 그런 적은 없었고, 지금에서야 마침내 그대들이 말을 꺼내게 됐네.”

“이제야 처음이라니······. 참으로 길었군······.”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국왕으로서의 입장이 있다지만 실로 한심하다.


물론 안위를 지키는 게 잘못은 아니다. 지난날의 자신이 틀렸다고는 추후도 생각지 않는다. 황제로서 부끄러움 따윈 한 점도 존재하지 않았고, 누군가 묻는다면 당당히 가슴을 펼 수도 있다. 하지만 좀 더 나은 선택이 가능하지 않았나 조금은 반성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교황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이 아니라네. 그대들보다도 먼저 그녀가―― 그래. 오직 그녀만이 ‘지랄맞게 겁도 많다.’며, 날 비난했었지.”

“그녀라함은······.”


교황은 추억을 떠올리듯 하늘을 보고 있었는데, 그 상태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 사도의 성명을 계승한 그녀일세.”

“그래. 그렇군······.”

“마음에 안 드는가?”


뻔히 알면서 물은 것이겠지.


하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은근슬쩍 도발이나 해댄 것이 같잖기만 할 뿐이다.


칼윈은 보란 듯 거나하게 콧방귀를 끼었다.



“이 몸이 경외하는 건 분명 하얀 악몽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때의 그녀를 부정하겠나? 결국 그녀이거늘. 하물며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는 그 용왕에게서 세상을 구한 위대한 영웅이 아니더냐. 이 몸은 그만한 위업을 이룬 자를 깎아내리는, 그런 몰상식한 자가 아니다.”

“과연. 면목이 없는 짓을 했다.”

“정말로 그렇다. 노망 난 것도 아니고 시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아까의 이야기나 마저 해라.”


거침없는 언사에 두 심판관이 움찔했다. 그중 퀭한 눈의 여성 심판관은 살짝 고개를 꼬고는 스멀스멀 살기를 내뿜었다.


명령만 떨어진다면 곧장 이 회담장을 피로 물들이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교황은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든 모양이야. 요즘 들어 자꾸만 딴 길로 새 버리지 뭔가. 허허. 미안허이.”


사과를 한 교황은 수염이 말끔히 잘 다듬어진 턱을 쓰다듬었다.



“딱히 특별한 이야기는 없네. 광기란 본디 전염성이 있지 않은가? 특히 인간의 광기는 실로 무시무시하지. 그 고결했던 마족들마저 물들이고 말았으니. 그래서 경계하고 약체화를 꾀했다네.”

“자세히 말해 봐라.”

“흠. 모두 아는지 모르겠지만, 인마전쟁에서 마족은 인간이랑만 싸우지 않았네. 엘프와 드워프, 수인, 마수, 마물, 심지어는 요정들과도 불화가 생겼었지. 물론 전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인간과 마족이었네만······ 종족 전체가 고결한 기사와도 같았던 마족들이 그러한 광기에 휩싸일 줄은 몰랐다네. 당시엔 정말 놀랐었지······.”

“인간의 광기가 옮았다는 것이냐?”

“마왕―― 테그리다데 블러드티어가 말하길, 이 대륙의 마족은 원래 그러한 기질이 있었다고 하더군. 싸움광의 면모가······. 하지만 대륙에 먼저 전쟁을 벌인 건 인간일세. 그 광기의 불길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지. 꺼질 줄을 모르고 활활 타올랐으니. 오죽했으면 타종족과 모든 교류가 끊기고 인간만 홀로 남겨졌겠는가?”

“마족은 어떻게 됐지? 결국에는 같은 일을 벌였다는 것일 텐데?”

“그쪽은 마왕이 직접 수습해서 큰 탈 없이 끝났다는 모양일세. 확실한 건 환수와 조약을 나눈 이는 인간뿐이라는 거지.”


마족 쪽의 일까진 자세히 듣지 못했었다고, 별로 아는 게 없다며 교황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꼽다.


무심코 혀를 찰 것만 같았지만 칼윈은 침착하게 지금의 이야기를 돌이켜보았다.



“정리하자면, 인간이 재차 광기에 빠지더라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약체화를 꾀했다는 거로군.”

“정확하네. 나무와도 마찬가지지. 일정 시기마다 적절히 가지치기를 한 것에 지나지 않아. 혹여 제어하지 못할 광기의 불씨가 다시금 피어오르면······ 이번이야말로 인간은 멸종하게 될 테니.”

“그리되길 바라는 건?”

“나 개인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정말 그리된다면 아내에게 면목이 없으니 사양하고 싶군.”


어디까지 본심인지 모르겠다. 아내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인 것도 같지만······.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내 솔직히 말한 것이니.”

“······.”

“뭐, 못 믿겠으면 어쩔 수 없지. 어쨌거나 내가 바란 건 우물 안 프로그라네. 즉, 인간이 철장 우리 밖의 세상을 모르게 하는 것이지.”

“할 말이 많지만, 요지는 간단하군. 서로 관여될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네. 서로 모른다면 관여할 일도 없지 않겠나? 하지만······.”


교황은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이내 참지 못하겠는지 크게 숨을 토해냈다.



“난처하게도 다른 종족들은 배포가 넓더군. 겨우 한 세대 만에 지난날의 과오를 용서하다니 말이야.”

“그건 좀 놀랍군. 인간이 반대의 상황이었으면 몇 세대는 더 이어갔을 텐데.”


가만히 듣던 다른 이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인간은 원한을 오랫동안 기억하고는 한다. 그런 주제에 받은 건 금세 까먹는 성질을 지니기도 한 웃긴 생물이다.



“음. 확실히 밴댕이 속을 지닌 인간과는 너무나도 다르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네. 재차 교류라도 생긴다면 인간은 필시 그들의 머리 꼭대기에 오르려고 할 테니 말일세.”

“그래서 타종족들을 붙잡아 불필요한 고문 따위를 했나? 본보기로?”

“그들에게는 머리를 들지 못할 만큼 죄스러운 마음뿐이네. 그러나 필요한 일이었다. 처참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시신이야말로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인간의 사악을 보여주니 말이야.”

“구태여 동족들에게 시신을 돌려주는 건가······. 악취미가 따로 없군.”


칼윈도 깨끗하다고 할 인생을 살아온 건 아니었다. 황위를 잇기 위해 배다른 동생과 친형을 암살하는 등, 손은 피로 흥건히 물든 삶을 보내왔다.


황제가 되어서도 그러했다. 제국을 세인트리안에 대놓고 파는 귀족 일가를, 명분을 만들어 내어 직접 전원의 목을 치기도 했었다. 심지어는 그 목을 광장에 내걸어 백골이 될 때까지 전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엠페라도 가문의――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자의 숙명이다. 잔혹해지는 것에 거부감은 없고,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크티알이나 그란도 똑같을 것이다. 지배자란 본디 그런 거다.


하지만 그런 이들조차도 교황이 저지른 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저래서 얻을 메리트가 공감되지 않았다. 득보다 실이 많아 보인다고 할까······.



“인간의 인식을 나쁘게 하는 네놈의 의도는 알겠다. 하나, 너무 과하지 않나?”

“음. 배보다 배꼽이 커졌달까······.”

“그렇다. 자칫 선전포고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서야 본말전도를 넘어, 되레 멸망하지 않겠나?”


그란과 아크티알도 한마디씩 거들고 나섰는데, 전혀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교황이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게 아니겠는가.



“아니. 멸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무얼 하든 침략당해 멸망할 일은 벌어지지 않네.”

“그 확신의 근거가 있다고?”

“······오히려 이쪽이 놀랍군. 설마하니 다들 이 사실을 전하지 않았을 줄은······.”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이 놀랍다며, 교황은 이게 800여 년 동안 달리 교류가 없었던 폐해 같다고 중얼거렸다.



“흐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고심된다는 듯 관자놀이를 짚은 교황은 그리 말문을 열고는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우선 확인부터 하겠네. 그대들이 전해 들은 환수와의 조약 내용이 무엇인가?”

“철장 우리 신세. 즉, 영토의 지정이지.”

“――및 영토의 이탈, 확장 금지.”

“어, 그리고······ 앞선 항목을 어기지 않을 시 자주권을 인정한다 정도인가?”


모두의 말을 듣고 교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앞서 언급되었듯, 벌인 일에 대한 대가치고는 몹시도 상냥한 항목들이지. 그마저도 별로 있지도 않고 말이야. 덕분에 지키기도 편했고, 외부의 영향력 없이 인간은 온전히 자치권을 행사해 왔지.”

“이따금 환수 쪽에서 연락이 올 때도 있지만 말이지?”


아크티알이 끼어들었다. 꽤 불만인지, 째려보는 시선도 그렇고 말에 가시가 돋쳐있다. 당연히 반응 따위 하지 않았지만.



“뭐 어쩌겠나. 모든 인간을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데. 되도록 조심할 수밖에 없겠지.”


어깨를 으쓱인 교황. 그러다 돌연 눈매를 날카롭게 떴다.



“여기부터가 본론일세······. 어째서 인간을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나?”

“······.”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모두를 둘러보며 교황은 이어 말했다.



“그대들도 한 번쯤은 이상하다고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인간은 대륙 전체에 전쟁을 건 전범이다. 그것만이라면 그나마 괜찮았겠지만, 그 잔학성에는 다들 혀를 내두를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후일을 고려하면 재차 같은 짓을 저지를지 모를 인간을 배제하는 편이 옳다. 인간의 눈으로 봐도 그렇다. 멸종만이 답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살려두었다고 생각하나?”


참고로 멸종시킬 힘은 충분했었다고 교황은 덧붙였다.


그야 그러겠지. 그 환상종이 참전했는데.


환수란 그런 존재다. 인간으로서는 어쩌지 못할, 용왕에 버금가는 자연재해······ 그것이 바로 환수다. 제아무리 인류 최강이라는 건국왕이 있다고 한들 버텨낼 리가 없다. 인류 전체가 힘을 합쳐도 마찬가지. 강자, 약자를 가리지 않고 모두 추풍낙엽처럼 쓸려 나갈 것이다.


――그런 환수가 무려 넷이나 된다.


인간이 싸워 생존한다는 건 꿈에서조차 이루지 못할 망상에 불과했다. 그들이 멸망을 계획했다면 그대로 인간은 멸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유일한 희망이라면 현재는 하얀 악몽이 있다는 점이랄까······.’


그녀라면 환수와 버금간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위화감도 없다. 아니, 오히려 뛰어넘는 존재라 해도 쉽게 수긍할 수 있다. 환수가 넷이라는 건 문제가 아니다. 그녀가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건 반드시 이루어진다.


‘환수에게서 인간을 지켜내는 것 정도야 당연히 해내겠지.’


하지만······ 그럴 일은 지금도, 앞으로도 영영 없을 것이다.


그게 이스피리아다. 그녀는 정이 많으면서도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하는, 지배자로서의 덕목도 지닌 사람이었다.


일전의 그 패왕과도 같은 모습을 떠올리며 칼윈은 입을 열었다.



“당시 인간의 편은 없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정치 따위가 얽힐 리도 없으니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억제력······. 갑자기 박애의 마음이 피어난 게 아니라면, 그밖에 달리 이유가 없다. 저 환수조차 압도할 강대한 억제력 말고는.”

“정확하네. 역시나군.”

“입에 발린 소리는 됐다. 이야기나 마저 해라.”

“그러도록 하지.”


발끈하는 심판관들을 재차 말린 교황은 잠시 손에 들고 있는 구원의 완드를 쳐다봤다. 굉장히 고심스러운 모습이었는데, 이내 마음을 정했는지 완드의 끝을 바닥에 살짝 내리찍었다.



“환수조차 압도한 억제력―― 그건 바로 용왕이었네.”

“용왕······?”


굉장히 뜬금없는 게 나왔다. 그 신화 속 생물이 당최 뭣 때문에 인간의 전쟁 따위에 관여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환수 네 마리를 압도할 정도의 억제력으로는 충분해 보인다. 환수가 암만 강대하다고 해도 이전――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든 파멸의 용왕보다 뛰어나진 않을 테니.’


예상 이상으로 환수가 분전한다고 쳐도 동률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용왕은 다섯이 있다고 하니, 수적으로도 밀리지 않는 용왕의 눈치를 보더라도 아무 이상이 없다. 하지만 그게 인간의 멸종을 단념할 만한 일인지까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칼윈은 더 이야기해 보라며 눈짓했다.



“다들 들어봤을 수도 있을 걸세. 용왕에겐 한 가지 사명이 있다고······.”

“뜬구름 잡는 소문일 텐데?”


아니. 말은 이렇지만 칼윈은 가볍게 농담을 던진 것에 불과했다.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일반 신민이라면 정말 뜬구름에 가까운 소문일 테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다.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구전과 민담, 노래와 속담들이 정리된 고서를 소지하고 있기에 보다 용왕에 대해 상세하다.


당연히 모두 믿는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가볍게 보기에는 모든 고서가 같은 점을 말하고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 신경 쓰인다.


――무엇보다 어느 미래에선 용왕을 직접 보기도 했다.


세상이 망하기 직전까지 내몰렸음에도 파멸의 용왕이 왜 그랬는지, 어떠한 이유로 그런 폭거를 저질렀는지는 모른다. 만약 내막을 아는 자가 있다면 그건 파멸의 용왕을 퇴치한―― 여섯의 대영웅들 정도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용왕이 실존한다는 것을 본 이상······ 여러 구전들을 무턱대고 헛소리라 치부하긴 힘들었다.


‘떠올린 자들이야 그렇다만······.’


놀랍게도 떠올리지 못한 아크티알과 공왕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그저 분위기상 받아들인다는 느낌이 아니다. 엿보이는 감정에선 생생한 실감 같은 게 존재하였다.


――어떻게?


‘설마······ 떠올리지 못했어도 그때의 감정만은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가? 순환하지 못한 영혼에 새겨졌다거나 해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이 무슨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꿈보다 더한 꿈 같은 소리인가.


자신의 얄팍한 상상력에 실소마저 나온다. 그러나······ 세상은 이미 시간이 반복되는, 상식을 벗어난 세계가 된 지 오래다.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하더라도 이상하지 않고, 기괴한 현상 따위 하나둘쯤 일어나는 편이······ 도리어 자연스럽다.



“아무렴 상관없겠지.”


칼윈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보다 그 용왕이 어떻다는 거냐? 그 사명 때문에 우리 인간이 아직 살아있다고? 도대체 어떤 기상천외한 사명이기에 인간에게 이토록이나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더냐?”

“딱히 인간에게만 유리한 건 아니라네. 여러 상황이 겹쳐 그리되었을 따름이지.”


도대체 얼마나 인간은 운이 좋은 종족이었을까. 어쩌면 신의 총애를 받는 것은 아닐까.


칼윈은 그런 생각이 무심코 들었는데, 바로 이어지는 교황의 말에 얼이 나가게 됐다.



“드래곤의 왕이라 지칭하기도 하네만, 용왕은 그런 하찮은······ 몬스터에 속하는 존재가 아닐세. 아니. 오히려 한낱 드래곤의 왕 따위로 전락하는 게 그들로서는 몹시 기분이 나쁠 걸세.”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의 수호자이면서 심판자이기 때문이다······.


충격적인 내용을 담은 교황의 목소리는 공연히 크게 울렸다.



“모두가 어린 시절 들었을 구전에는 그 어떠한 과장도 없었다네. 그들의 사명은 관리. 용왕은 이 세상의 관리자이자 신의 대리자라네. 성국의 수호자―― 일신성단의 심판관도 사실 그들을 본떠 편성한 직책이지.”

“신의 대리자라고? 용왕이······?”


얼이 나간 그란에게 교황은 짧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는 없었다. 신의 대리자라는―― 성직자에게는 다소 민감한 물음이었음에도 교황은 단호하였다. 심판관의 이야기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디안―― 벨루디스의 건국왕에게 직접 들은 것이라네. 그가 말하기를, 용왕은 신의 뜻을 받들어 이 지상의 생물체를 관리한다더군.”

“어, 그러니까 인간의 멸종도 그들의 관리에 포함된다는 건가······?”

“그렇네. 자연도태 이외의 멸종에는 모두 관여한다는 모양일세. 그래서 인간은 환수의 주도 아래 상호불가침의 조약을 맺게 된 것이지.”

“――어째서지?”


칼윈은 말을 자르듯 끼어들어 물었다.



“용왕이 신의 대리자고, 이 지상을 관리한다······ 분명 놀라운 이야기다. 단순히 드래곤의 왕 정도로만 여겼거늘. ······하지만 그건 그거다. 어째서 조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냐? 말의 아귀가 맞는다고 생각하나?”

“아니. 그리 이상할 게 없네. 잊었는가? 용왕은 수호자이기도 하면서 심판자일세. 어찌 상반되는 두 호칭이 같이 있다고 보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교황은 시간을 주었다.


가르치는 듯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칼윈은 인상을 찌푸렸는데, 그 순간 뇌리가 번뜩였다. 순수한 시절에 들었었던 용왕에 관한 전설이 떠오른 것이었다.


그때서야 칼윈은 깨달았다. 인간이 철장 우리에 갇힌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이것을 바로 알아차린 것처럼 교황은 곧장 이야기를 재개했다.



“용왕의 관리는 철저하네. 어떠한 자비도 없이 멸종에 이를 위협을 그 뿌리까지 모조리 뽑아 제거하네. 거기엔 선악 따윈 존재하지 않지.”

“별로 놀랍지도 않군. 선악이라는 개념은 지상의 존재들이 멋대로 정한 규범에 지나지 않으니. 저 하늘 위의 신적인 존재들에겐 우열 없이 모두가 하찮은 벌레. 그들이 미물 따위가 정한 선악을 알아야 할 이유도, 따를 이유도 없겠지.”

“다소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그리 틀린 말은 아니야. 이쪽의 사정 같은 건 안중에도 없을 테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 종의 사멸······. 인간이 대륙 전체에 전쟁의 불씨를 퍼뜨렸다 한들 아무래도 좋은 것이야.”

“――하지만 그러한 용왕의 기조 덕분에 건국왕이 조약 건을 가져올 수 있었다.”

“유구한 세월 존재해 왔을 환수들은 용왕이 관리에 나선 광경을 직접 목격했겠지. 그렇기에 다양한 종족이 얽힌 인마대전에 촉각이 곤두섰을 테고, 두려움에 중재자로 나선 것이겠지. 그러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디안과 접촉하였고, 앞선 사정을 설명하며 조약 건을 제시했을걸세. 달리 선택지가 없었던 디안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 환수가 지레 겁먹을 정도라고······?”


그란의 질문에 교황은 굳은 눈을 했다.



“말하지 않았나, 용왕은 신의 대리자라고. 그저 이 지상에 태어났을 뿐인 환수와는 그 존재의 격이 비교조차 안 되네.”

“강함도 그러하다는 거로군······.”

“실감하기 어렵다면 비탄의 초원을 떠올리면 되네. 드넓은 초원이었다는 그 사막이야말로 용왕이 어떤 존재인지를 명확히 가리키지.”

“하긴······. 다른 미래에서는 단 한 마리의 용왕에 의해 대륙 전체가 불바다가 되었었으니 말 다 했지. 심지어 그때 환수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다른 대륙으로 도망쳤겠지.”

“뭐, 뭐?! 그, 그게 정말인가, 황제여?!”

“하아······. 그란, 체통이라는 것을 가져라. 그리고 생각을 해라. 아까도 말이 나오지 않았느냐. 국왕이라는 자가 허둥대는 꼴을 보이는 게 아니다.”

“어······ 아, 아니, 그건 내가―― 이 짐이 알아서 해! 그보다, 그 여식이 정말 용왕을······ 환수조차 무서워 도망친 용왕을 쓰러뜨렸다고? 진짜로?”


경악으로 가득하여 묻는 그란. 아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 새삼 저러는 것은 용왕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리라.


그전까지는 쓰러뜨렸다고 해도 막연히 대단하다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의 대리자라는 걸 알고 재차 생각해 보니, 그 경이롭기 그지없는 업적에 귀가 이상해졌나 싶었을 거다.


하지만······



“사실이다. 다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용왕을 토벌했다. 그 업적을 기려 후에 그들은 세상을 구한 여섯의 대영웅으로 칭송됐지.”

“여식 말고도 다섯 명이 더 있다고······?”

“누군지는 몰라도 된다. 입이 종이짝마냥 가벼운 네놈이 알아봤자 방해만 될 뿐이다.”

“시, 실례네! 이래 보여도 난 입이 무겁다구?!”


발끈하여 외치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여기에 없다.


싸늘한 시선만이 대답 대신 쏟아진다. 심지어는 직속 신하인 디카이로트와 시종장마저도 불신 가득한 눈빛을 향하였다.



“뭐, 뭐냐고, 다들!”


모두가 한 마음 한뜻인 것에 기가 죽었는지 그란은 불만스럽게 투덜댔다. 다들 루비아―― 공국의 공주처럼 군다며.


거꾸로 산뜻할 만큼 방정스럽다. 그렇지만 저 바보 같은 모습에 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적재적소라는 건가······. 끝을 맺기에는 딱 좋군.’


국왕이 지니기에는 아까운 재능이 아닐 수 없다. 광대라면 필히 대성했을 터인데.


피식 웃은 칼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갑주의 차가운 금속음과 함께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렸다.



“어딜 가느냐?!”


칼윈은 벌떡 일어난 아크티알에게 시선만을 보냈다.



“제국으로 간다. 그 외에 뭐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국왕이 언제까지고 자국을 비워두는 게 아니다. 너희도 어물거리지 말고 돌아갈 채비나 해라.”

“아직 이야기는 안 끝났다!”

“아니. 끝났다. 도플갱어는 결단코 직접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 용왕에게 퇴치당하기 때문에. 물론 다 죽이진 않을 거다. 용왕은 어디까지나 멸종을 막을 뿐이니. 하지만 거의 대다수가 몰살당하는 건 기정사실이다. 그걸 알기에 놈들은 여지껏 뒤에서 야금야금 행동한 것이다.”


직접 손을 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암시를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 선택하는 건 자기 자신―― 인간이다.


무엇보다 서로 싸우다가 멸종하는 건 자연의 섭리에도 부합한다. 자연도태와도 크게 다르지 않고, 그러니 용왕이 나설 일도 없다.


도플갱어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암만 인간이 싫기로서니 함께 공멸하는 쪽을 택하기란 꽤 어렵다. 설령 실성하여 공멸을 선택하더라도 채 실행하기 전에 용왕에게 발각당할 위험마저 있다. 아니, 오히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용왕은 아주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고 있으니까······.


그 존재감, 기억에 남아있는 그 거대한 기척으로 보건대 틀림없다. 그가 바로 용왕―― 이전 세상을 암흑으로 물들인 파멸의 용왕이다.


이미 그는 관람하기 좋은 특등석에서 도플갱어가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분명 인간도 상당한 피해를―― 멸망에 이르기 직전까지는 움직이진 않겠지만, 그 눈을 피해 갈 일은 절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벌써 몇 세기 동안 공들인 작업에 돌연 초를 치진 않을 터. 안 그래도 수가 적어진 도플갱어이기에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금과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들이 힘을 합치자는 게 아닌가?!”

“쓸데없는 짓이다. 본디 협력은 신뢰가 가능한 이들끼리나 하는 것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수백 년 동안 서로를 견제하며 지낸 게 우리다. 정녕 진심으로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다고 보는가?”

“······.”

“그래. 무리겠지. 애초에 서로 내부조차 완벽히 다스리지 못한 판국이다. 하나로 움직여도 시원찮을 마당에, 이딴 상태로 협력해봤자 서로 발목을 잡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나? 그럴 바에 각자 적자생존을 하는 편이 더 이롭겠지.”

“······결국, 이 회담은 아무 의미가 없었던 건가······.”

“그건 아니다. 의미는 있었다.”


낙담하여 고개를 떨구는 아크티알이었으나 곧장 번쩍 들어 올리고는 빤히 쳐다본다.


제법 유난이다 싶은 반응이었는데······ 문득 그 눈에서 굳은 결의가 맺혀있음이 보였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건 타인을 위한 결의다.


이런 자에게 설렁설렁 구는 것도 품위가 없다.


칼윈은 몸을 돌려 정면으로 아크티알을 바라봤다.



“분명 협력은 무리다. 뭘 어떻게 하더라도 이루어질 수 없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눈에 띄는 협력만이 서로 돕는 길은 아니다. 괜히 신경 쓰이게 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건 그뿐이고, 그것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서두르지 마라. 조급함은 실수를 자아내고 실패를 자초하게 만든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라는 것이냐······.”

“우리가 상대하는 건 인간의 멸종을 꾀하는 녀석들이다. 종 대 종의―― 제2의 인마대전이라 여기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그것도 그러하군.”


알겠다고 하는 아크티알을 보고 칼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회담을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했을 터다. 이 자리에 있는 그대들을 인정한다고. 이 몸 또한―― 아니, 이 몸이야말로 그대들보다도 이 위기를 극복하길 바라고 있다. 그러니 선언하지. 현 시간부로 정세가 급변하지 않는 한 제국이 타국에 간섭할 일은 없다. 기한은 이 사태가 종결을 맞이할 때까지다. 그전까지 제국이 그대들의 영토를 밟을 일은 없을 것이야. 이 엠페라도의 이름을 걸로 맹세하지.”

“기왕이면 정세 같은 자잘한 조항이 없었다면 더 괜찮고 멋있었을 거 같은데······.”

“나 개인이라면 그랬겠지. 하나, 이 몸은 황제다. 멋은 우선순위가 아니야. 그대도 그렇지 않은가, 공왕이여?”

“음······ 당연하지.”

“어째······ 대답이 좀 느리시군요······.”

“아, 아니다! 시종장,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목소리를 높이지만 허둥대서야 신뢰를 얻기는커녕 불신만 피어오를 뿐이다. 그러한 주군의 모습에 디카이로트마저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보기 시작했다.



“후후. 생각보다도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 서로 고군분투하도록 하고, 언젠가 다시 보도록 하지.”

“잠깐. 이걸 가져가라!”


부르는 말에 돌아보았더니 무언가가 날아왔다.


순간적으로 바하기스와 샤라즈 공작이 움찔하며 반응했는데, 칼윈은 그보다 한 발 빠르게 앞을 가로막으려는 둘의 어깨를 잡아 붙들었다. 그리고는 정면으로 날아오는 물체를 가볍게 잡아챘다.



“반지······? 고명한 마도구로 보인다만?”

“정신 방벽의 반지다. 전설급으로, 암시, 세뇌, 매료, 현혹 등의 정신에 작용하는 마법들을 막아준다. 그 외에도 어지간한 암속성의 마법이라면 뚫지 못하고 막힐 것이다.”


황가나 왕가는 특성상 은밀하게 수작을 부릴 수 있는 정신 계열의 마법은 다른 속성, 계열의 마법들에 비해 극단적으로 발달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쇠퇴한 인간의 수준에서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닌 이능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고, 제1 위상마저 세뇌한 도플갱어의 능력과는 비교조차 안 됐다.


그럼에도 아크티알이 건네줬다는 건 쉽게 볼 수 없는 물건. 즉, 말 그대로 전설에나 나올 장비라는 것이다.


가품 따위는 아니었다. 반지는 정말 전설급에나 어울리는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나라의 국보 같은 물건이다. 선뜻 줘도 괜찮은 건가?”

“착각하지 마라. 빌려주는 거다. 이번 사태가 종결되면 되돌려 받을 것이다.”

“이 몸은 한 번 받은 물건을 순순히 돌려주는 인물이 아니다만?”

“떠보는 짓은 그만해라. 아니면 정말 인정한다는 상대에게 치졸한 짓이나 하는 사내로 기억했으면 하나?”

“아무래도 좋다. 그거야 자기 마음이 아니겠나? 그보다 벨루디스 쪽은 괜찮은 것이냐?”

“건국왕께서는 일찍이 도플갱어의 존재를 아셨던 분이다. 그에 따라 대비도 하셨지. 하나둘 나누어줘도 문제없다.”

“그런 거라면 고맙게 받도록 하지.”

“그래. 당하지 말아라.”

“당하더라도 괜찮다. 이스피리아―― 그녀에게 이미 이 몸의 권한을 모두 넘겼으니 말이야. 혹여나 제국 쪽에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녀에게 힘을 빌리면 될 것이다. 뭐, 그녀가 수락할지 말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이 말을 끝으로 칼윈은 반지를 품에 넣고, 더는 돌아보는 일 없이 회담장을 빠져나왔다.


곧장 대기하고 있던 여신관이 다가온다.


존재감으로 보건대 심판관이다. 감추기는 했으나 펑퍼짐한 신관복 너머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두 자루의 시미터도 있었다.



“마중――”

“――짐은 현재 몹시 기분이 좋다. 괜히 망치려 드는 게 아니다.”


눈치를 살펴라.


다소 직설적인 지적에 심판관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허튼짓할 수는 없었고, 여자는 얌전히 물러났다.


‘좀 아쉽구먼. 한 발짝만 더 들어왔으면 반으로 갈라버렸을 것을······.’


아직 세인트리안과 대치할 마음은 없다. 정면으로 대치하기에는 준비가 덜 됐다.


하지만 그게 여태 제국에서―― 무수히 많은 미래에서 줄곧 활개 쳐 온 심판관을 찢어 죽이지 않을 이유는 못 된다.


책임을 따지더라도 저쪽이 먼저 무기를 들고 다가온 것이다. 제아무리 세인트리안이라도 제1 위상까지 잃은 마당에 혼잡한 현 정세를 무시하면서까지 물고 늘어지진 못 한다.


아쉽게 애검의 손잡이를 쓰다듬고 칼윈은 대성당을 나아갔다. 제 안방을 거닐 듯 당당하게······.


작가의말

으으... X간... 멸종시킨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드디어 인마전쟁의 진상과 뒤에 얽힌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감격입니다. 거의 160화만에 나온 것이라서요...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싶습니다.

기뻐하는 건 잠시 미루고, 오늘도 -2가 있습니다 자세한 인사는 거기서 드리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히로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다들 연말 잘 보내세요! 23.12.26 8 0 -
259 219-2 24.04.10 7 0 13쪽
258 219 24.04.10 35 0 42쪽
257 218 +2 24.03.25 29 1 43쪽
256 217 +2 24.03.14 18 0 50쪽
255 216 +2 24.03.01 28 0 40쪽
254 215 +2 24.02.22 34 0 40쪽
253 214 +2 24.02.15 29 0 45쪽
252 213 +2 24.02.01 39 0 48쪽
251 212-2 +2 24.01.22 23 0 21쪽
» 212 +2 24.01.22 30 0 33쪽
249 211-2 +2 24.01.03 33 0 20쪽
248 211 +2 24.01.03 66 0 43쪽
247 210 +2 23.12.03 103 0 45쪽
246 209 +2 23.12.03 38 0 41쪽
245 208 +2 23.11.11 44 0 55쪽
244 207 +2 23.10.29 69 0 42쪽
243 206 +2 23.10.21 49 0 50쪽
242 205-2 +2 23.10.11 60 0 21쪽
241 205 +2 23.10.11 69 0 37쪽
240 204 +2 23.09.30 67 0 40쪽
239 203 +2 23.09.14 61 0 39쪽
238 202 +2 23.09.14 92 0 36쪽
237 201-2 +2 23.09.02 66 0 18쪽
236 201 +2 23.09.02 71 0 35쪽
235 200 +2 23.08.22 86 0 47쪽
234 199 +2 23.08.14 72 0 42쪽
233 198 +2 23.08.04 85 1 39쪽
232 197 +2 23.07.27 79 0 42쪽
231 196-2 +2 23.07.19 52 0 1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