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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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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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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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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203

DUMMY

광활한 산림 속에 존재하는 나트알은 그 대지와 그곳에 사는 자들의 선택으로 외부와 단절된 채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건 강제적인 규칙 같은 게 아니었다. 밖으로 나갈 권리는 개인에게 있어, 이따금 세상을 구경한다거나, 모험을 하고 싶다는 연유로 여행길에 오르는 자도 있었다.


개중에는 밖에서의 삶에 만족하여 정착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역시 한적한 것이 좋다며 돌아오고는 했다. 괜히 오랫동안 산속에서 살아온 민족이 아니랄까, DNA부터 태평한 걸 좋아하는 기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부는 반려자와 아이를 대동한 채로 돌아오기도 했는데, 괜히 끼리끼리 만난다는 말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한적한 나트알에서의 생활에 싫증 내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도 새로운 이주민들을 꺼리지 않고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나트알은 그렇게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열성 유전병의 위험을 낮춰, 단절된 세상을 현재까지도 문제없이 유지해왔다.


그리고 약 130년 만에 여행을 떠난 주민이 돌아왔다.


이에 할 일은 하나뿐. 딱히 새로운 피를 수혈해와서 그런 게 아니다. 마을의 일원으로서, 가족으로서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주민들은 잔치를 벌이기로 했다.


장소는 요새 안의 광장.


리아는 긴 테이블에 가족들과 두런두런 모여 앉았다. 오늘의 주인공이라며 상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했었지만, 단상에조차 오르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당장 에르에게 부탁해, 새하얀 돌이 빛나는 단상과 함께 상석을 없애버렸다. 물론 진짜 없앤 건 아니고 [차원수납]에 보관한 것이었다.


저런 창피한 자리에 앉을 마음 따윈 전무했다. 줘도 싫다. 더군다나 같이 온 손님 중에는 황자와 황손, 공주와 비슷한 위치의 영애가 있다. 그런 사람들을 놔두고 상석에 오른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정작 당사자들이 나트알의 환경과 잔치에 놀라 개의치 않는 듯하지만, 리아로서는 한사코 사양하고 싶었다.


너무나도 아쉬워하는 바지탄스들이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눈물을 머금고 단호히 치워버린 건 옳은 선택이었다. 혹시 몰라 베르그에게 권해보기도 했지만, 그 역시도 사양하고는 같은 테이블에 모여 앉았고.


‘근데 폴스까지 아쉬워한 건 왜지? 몰래 와서 도와줬나?’


사실 주민들의 마중은 에르가 한 일로, [그림자 이동]의 장거리 이동을 시험할 겸 마을로 와서 알렸다고 한다. 잔치를 준비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조용히 그가 귀띔해준 것이었는데, 미리 알고 있던 폴스도 도왔다거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거들지 말고 편히 쉬라는 배려만큼은 고맙지만······. 응.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치우길 잘했어.”

“······날 보지 마라. 벌써 몇천 번이나 말했지만, 혼잣말―― 크흠. 저건 전염되는 게 아니다.”

“응?”


왠지 살기가 느껴진다. 왜 그러지 싶어 돌아보니 사근사근한 필리아의 미소가 반겨준다. 함께 둘러앉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 전원 웃는 얼굴이었다.


어색함은······ 없다. 반년만의 재회이기는 하나, 이전에는 5년 동안 못 본 적도 있다. 재회의 감동은 금세 시들어, 베르다드로 가기 전과 다름없는 분위기가 됐다.


냉정하게 보이기도 할 테지만 어쩌겠나. 장기 외박이 잦은 딸인데. 익숙해질 만도 할 테지.


리아도 매일 만난 것처럼 대해주는 지금이 훨씬 좋으니 불만은 없었다.



“착각이었나?”

“뭐가 말이니?”

“아뇨. 잘못 느낀 건가 봐요.”

“그러니. 괜찮다면, 아직 여유가 있으니 이때 같이 온 분들을 소개하는 게 어떻겠니?”

“아······. 그렇죠.”


깜빡 잊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랜만에 보는 가족들이랑 잡담이나 하고 싶다. 그렇지만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풍당당한 요새에 식겁한 이들을 가만히 둘 수도 없었다. 친구인 라프리트에겐 더더욱 그럴 수 없고. 도리어 잠시라지만 그녀마저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꽤 미안한 기분이 든다.


라프리트만이라면 모를까, 귀찮다는 게 본심이기는 하나, 리아는 에르에게 아까 회수한 단상을 꺼내달라고 부탁했다.



“오! 아가씨가!”


희열이 담긴 마족 주민들의 쑥덕거림을 들으며, 리아는 새하얀 단상에 올라 손뼉을 쳤다. 잔치 준비에 한창인 주민들은 손을 멈췄고, 도와주고 있던 마수와 마물들도 그 자리에 멈춰 리아에게 주목했다.


리아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둘러보기 바쁜 모두를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이미 드러누운 페리까지 억지로 단상 앞으로 모은 리아는 그들을 한 명씩 소개해주었다.


한껏 얼이 빠져있었던 모두는 얼떨떨하면서도 각자 고풍스럽게 인사했다.


처음 보는 격식과 그들의 직책에 주민들은 놀라워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세상과 담을 쌓은 이곳에서 황자나 후작 가의 영애는 그저 신기한 존재일 뿐, 그저 이야기에 나오는 왕자와 공주라는 게 신기하여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범상치 않은 직책임을 제대로 인지한 건, 마국 국경수비대 소속이었던 바지탄스들만이었다. 동요하는 기색이 흐른다. 직후 “역시!”라며, 왜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딱 한 명, 리블리지만큼은 지인의 딸 정도로만 소개했다. 세스와의 일이 있는 그녀가 어디 소속인지 알릴 수는 없었다. 자칫 불화가 조성될 수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세스와 하렘들은 리블리지를 만난 적이 없었는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소개가 끝나는 줄 알았는데, 마지막―― 폴스의 차례에서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나왔다.



“리아 님의 제4 사도인 폴스입니다. 이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 자체는 깔끔했다. 격식을 차린 예법은 흡사 귀족의 적자와도 같았다. 하지만 내용이 문제다.


주민들은 사도가 뭐냐며 수군거렸다. 넘버즈의 제작을 봤었던 이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장소가 장소인지라 묻거나, 나무라는 사람은 없어 다행이지만, 복면을 쓴 폴스의 복장과 더불어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오해가 생기게 둘 순 없다. 황급히 대충 마무리 지으려 했는데, 리아보다 먼저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세스였다.


팔짱을 끼고 폴스의 앞에 선 그는 다소 진지한 분위기를 풍겼다.



“흐응~ 만들었다길래 뭔가 싶었더니. 정말 터무니없는 녀석을 탄생시켰네. 이런 게 4놈이나 있는 건가······.”

“아니. 다섯이야.”

“그래? 많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이러나저러나 리아 아가씨를 따르니.”

“응. 그것만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야.”

“단호하구먼. 이러니까 할망구가 가만히 둔 것이려나? 훗.”


마음에 들었는지 세스는 짧게 코를 울렸다.



“난 사냥이나 다녀올게.”


세느는 일방적으로 말하고는 뒷머리에 깍지를 껴 느긋하게 광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뭐, 뭐지?’


대화 자체도 이해가 안 될뿐더러, 뭔가 평소의 세스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내심 초월자인 폴스를 알아보고 가베인에게 한 것처럼 한 번 붙자고나 할 줄 알았는데.


당황한 리아를 대신하여 자리를 정리해준 건 촌장, 에이브안이었다. 그가 다들 잘 대해주라며 수습해주었다. 웅성거리고 있던 주민들은 원체 털털한 성격들인지라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았고, 금세 왁자지껄 떠들면서 재차 잔치를 준비하러 갔다.


정신을 차린 리아도 단상을 치우고 자리로 돌아갔다. 소개로 나왔었던 이들도 도로 자리에 앉았다.


긴 테이블에 마주 앉은 모두는 침묵했다. 하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러한 잔치를 처음 보았는지 이내 바삐 움직이는 주민들을 흥미롭게 관찰했다. 딱히 신경 쓴다는 느낌은 없었다. 로즈도 그러했다.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폴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사이좋게 지냈다.


톡톡.


안심하며 지켜보고 있자니 어깨가 두드려졌다.



“얘야. 라프리트······라고 했지? 저 아이가 새로 사귄 친구라고?”

“아. 맞아요, 어머니! 제 첫 친구예요!”


드르륵!


직사각형의 테이블에 한데 모여 앉았기에 들렸나, 라프리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놀란 주위는 바라보았고, 그녀는 관심 속에서 우아하게 머리를 숙였다.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입니다. 리아 양의 가족분께 인사드립니다.”


아까 주민들에게 인사할 때보다 배 이상 힘이 들어갔다. 요새로 들어오기 전에 짤막하게 소개하긴 했는데, 이번이 정식 인사라고 여겼는지 어깨도 잔뜩 경직됐다.


안 그래도 귀족의 예법에 익숙하지 않은―― 아예 처음 접한 필리아는 허둥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아의 엄마예요. 우리 딸아이와 친하게 지내주어 고마워요. 그게······.”

“라프리트면 됩니다. 말씀도 편히 해주세요.”

“괜찮니?”


귀족에 대해 문외한인 필리아는 불안한 눈치로 리아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미 말을 놓은 시점에서 아웃이지만.’


그러나 라프리트가 이러한 점을 지적할 리가 없다. 그녀는 방긋 미소 짓는 것으로 필리아의 불안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전 리아 양의 친구로서 놀러 온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디 친근히 대해주셨으면 합니다, 어머니.”

“어머나.”


역시 천사. 사교성도 그렇지만 그 착한 마음씨가 도드라진다.


필리아도 그 면모를 알아보고는 자상하게 눈가를 늘어뜨렸다.



“앞으로도 우리 리아와 친하게 지내주렴.”

“네.”


굳세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프리트. 흡사 다짐이라도 한 것처럼 결연하였다.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필리아는 다른 이들에게 몸을 돌렸다.



“여러분들도 부디 리아를 잘 부탁해요.”


예법을 배우지 못한 필리아는 평범하게 머리를 숙였다. 그러나 딸을 아끼는 마음이 담긴 그 인사는 무척 아름다웠다. 더군다나 필리아는 미인. 청순가련한 그 모습은 귀족의 영애라 해도 믿을만한 것이었다.


‘뭐, 실상은 잘 부탁하고 말 것도 없는 사이지만.’


하지만 리아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고, 대표로 나선 베르그도 별말 하지 않고 황자에 걸맞은 태도로 정중히 예를 취했다.


재차 잘 부탁한다며 고개를 숙인 필리아는 이후 한 자리 차지하여 앉아있던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잘 부탁한단다, 페리야.”

《흥. 부하를 돌보는 건 두목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고맙구나.”


저딴 시건방진 고양이마저도 챙기다니. 누구 엄마가 아니랄까 봐 착실하기 그지없다.


‘아, 아니! 잠깐!’


깜짝 놀란 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착각인가 싶었다. 그러나 아니다. 요리 보고 저리 봐도 필리아는 검은 줄이 난 페리의 등을 쓸어주며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다.



“어, 어머니, 페리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요?”

“얜 또 뭔 소리래니.”


믿을 수 없다는 리아의 물음에 필리아는 새삼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뒤늦게 깨닫고는 소리를 높였다.



“아. 그러고 보니 넌 학원에 있었구나.”

“어, 어떻게 된 건지 자세하게 알려주세요!”


필리아는 귀엽게 검지를 입술에 대며 생각에 빠졌다.


자연스레 나온 행동이겠지만······ 나이가 몇인데 좀 주책이다.



“응? 뭐라 했니?”

“아, 아뇨.”

“정말이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으나 리아는 참았다.



“진짜 아무 말도 안 했으니까 어서 좀요!”

“별거를 다 궁금해하는구나.”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한 필리아는 슥슥, 리드미컬하게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름 맹수라던데 전혀 무섭지 않은가 보다. 얌전히 있는 페리도 좀 의외고.



“네가 세스 씨들이랑 함께 화이트 팽들을 보냈잖니?”

“어, 화이트 팽 씨요······?”

“아이참. 그 있잖니, 카니스 루프스랬나? 흰 털의 늑대 말이야. 너랑 싸웠을 때 선봉을 섰다고 하던데?”

“엥? 거기까지 말해줬어요?”

“그래. 몸이 회복한 뒤에 세스 씨가 모두를 데리고 와서 사과했단다. 따님에게 실례했다면서.”


그리 말한 필리아의 눈가는 부드럽게 곡선을 그렸다.


사정을 듣고 분명 놀랬으리라. 그렇지만 다름 아닌 필리아다. 조종당했다지만 정정당당한 승부에 왈가왈부하지 않을 모습이 선명히 그려진다. 어떠한 원망도 느껴지지 않는 필리아를 보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다른 분들하고도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 말 다 했지.’


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알고는 있었지만 멋진 남자네요. 세스는.”

“우리 그이보다는 아니지만.”

“으엥? 아, 아버지요?”


딸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딸의 입장을 놓고 평가하더라도 리아의 손은 세스에게로 들렸다. 그만큼 세스는 객관적으로 봐도 멋졌다. 분명 건들거리는 행색은 꼴불견이나, 그것조차도 세스의 오묘한 매력으로서 다가왔다.


이스카르가 좋은 아버지인 것은 분명하다.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목숨까지 걸고 싸워봤던 리아로서는 아무래도 갸우뚱해진다. 필리아에게 빌빌거리는 모습을 매우 많이 목격한 터라 더욱.


그렇지만 정작 필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한정적이라 해도 내가 그저 그런 사람이랑 결혼할 리가 없잖니. 리아, 너는 딸이니까 모르겠지만, 네 아빠는 사실 엄청 멋지단다? ······이 얘기는 비밀이다?”


찡긋하고 필리아가 윙크했다.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리아에게는 미스터리였다. 필리아라는 미녀를 손에 넣었으니 나름의 매력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리블리지―― 청초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에게 넉살 좋게 말을 걸면서도, 그 풍만한 가슴에 시선이 가는 이스카르를 보노라면······ 역시 잘 모르겠다.


‘아. 들켰다.’


과연 여자의 감각은 날카롭달까, 필리아는 금세 남편의 부정을 알아차렸다. 이스카르는 쌍심지를 번뜩이는 아내를 느껴 황급히 베르그에게 말을 거는 등, 어떻게든 무마하려 들지만 씨알도 통하지 않으리라.


리아는 모든 게 늦어버린 아버지의 명복을 조용히 빌어줬다.


‘그러나 딸로서 아버지를 구해주지 않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자업자득이지만 리아는 필리아의 관심을 돌리기로 했다. 가장 중요한 걸 듣지 못하기도 했고.



“어머니, 어머니. 그래서요? 화이트 팽 씨가 와서 어떻게 된 거예요?”

“그래······. 지금은 오랜만에 돌아온 우리 딸이 먼저지. 처형은······ 나중이야.”


불온한 말을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다행히 필리아는 원래의 사근사근한 얼굴로 돌아왔다.



“뭐어, 특별한 일 없었단다. 사람이란 게 환경에 금방 익숙해지잖니. 팽 외에도 다른 마수, 마물들과 부대끼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더라. 그······ 개체 구별은 좀 힘들지만. 다들 비슷하게 보여서 말이지. 그래도 이름은 전부 안단다.”

“그게 전부에요?”

“그렇단다. 정말 아무것도 없지?”

“혹시 다른 분들도······?”

“응. 주민들 전원 대화할 수 있구나. 잭 씨는 사냥꾼이라 그런지 제일 오래 걸렸지만.”


잭은 아직도 그들과 마주치면 이따금 흠칫거린다면서 필리아는 웃었다.


‘아이리스 때부터 다들 편견이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바지탄스 씨들까지 대등한 존재로 받아들이다니.’


가치관을 바꾼다는 게 절대 쉽지 않다. 그건 공국이 증명한다. 달리 ‘만능언어’란 말이 따로 분류된 게 아니다. 놀라움을 넘어 경외심마저 든다.



《어이, 아이리스. 밥은 언제 나오냐?》

“냄새가 풍겨오는 걸 보면 조만간이지 않을까? 좀만 더 기다려 봐.”

“――그래. 부족하진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숨을 죽이고 아이리스와 페리의 등 뒤에 선 자가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다른 이들과 달리, 진작에 기척을 읽은 리아는 태평하게 말을 걸었다.



“어서 와. 금방 다녀왔네, 세스.”

“여긴 먹을 게 풍부하니까.”

“잡은 건?”

“저기.”


세스는 광장에 설치된 간이 부엌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몸집보다 큰 날개를 가진 새와 잔치의 단골 재료인 돼지 마수―― 폴코가 있었다.


그리고 베테랑 주민들에 의해 실시간으로 해체 중이었다······.


리아로서는 경탄스러운 그 솜씨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으나, 어린이가 보기에는 그리 좋지 못한 광경이다. 슬쩍 폴스에게 부탁하여 로즈의 눈을 가리게 했다.



“폴코는 알겠는데, 저 새는 뭐야?”

“윙 버드라고 했던가? 아마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은데, 날개만 커서 양은 좀 별로지만 맛은 좋아. 사모님도 맘에 들어 하길래 잡아 왔지.”

“어떻게? 하늘에 있잖아? 돌팔매로 잡은 거야?”

“아니. 그냥 뛰어올라서 팍!”


세스는 수도로 내려치는 자세를 취했다.



“음. 튼튼하니 괜찮을 테지만, 위험하지 않아? 착지라든가.”

“아가씨가 썼던 [발판] 있잖아. 나도 그걸 습득해뒀으니까 안전해. 사냥감을 갖고 내려오기도 편해서 좋더라.”

“오호. 대단하네. 본 것만으로 습득해버리고.”

“그걸 아가씨가 말하는 거야?”

“뭐, 그것도 그러네.”


어이가 없던지 세스가 피식 웃었다. 리아도 따라 피식했다.


편안하다. 아니, 익숙하다고 해야 하려나. 왠지 세스와는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대하게 된다.



“자, 잠시만, 이스피리아 공.”

“아, 네. 왜 그러시죠?”


꽤 다급했는지 베르그는 빠르게 다가왔다. 그리고 시선이 간이 부엌을 향한 채로 말을 이었다.



“결코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네만, 윙 버드라고······?”


리아는 세스를 쳐다봤다.



“로라샤에게 듣기로는 그랬어.”

“그렇다네요.”

“저, 정말로? 하, 하지만 윙 버드는 구름 위에 서식한다고 들었네만······.”

“어어, 맞아. 구름 위에서 나는 걸 잡아 온 거야.”

“용케도 그걸 봤네?”

“아가씨도 그 정도는 간단하면서 뭘 그래?”

“그런가?”


정말 그런지 살짝 궁금해진 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보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줌이 당겨지듯 시야가 당겨졌다. 거기서 더 멀리 보려고 하자, 우주 너머 별의 지표면이 보인다.


딱히 한계가 느껴지진 않는다. 아마 하려고만 하면 별의 지표면을 넘어, 흙 알갱이까지 보이지 않을까······.


하지만 시도하진 않았다. 인간에서 더더욱 멀어지는 기분이 든 터라 하고픈 마음이 전혀 생겨나질 않는다. 그러므로 “잘만 보이지?”라며 묻는 세스에게도 적당히 보인다고만 했다.


이러나저러나 가능하다는 답을 얻어서 그런가, 베르그는 입을 뻐끔거렸다.



“대체 윙 버드가 어떻길래 그러시나요, 베르그 전하?”

“그게······ 윙 버드는 하늘 위에서 살지 않나. 봤다는 풍문조차 거의 없지. 년에 한두 번꼴이려나? 오죽했으면 세간에는 윙 버드를 보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이야기도 있네. 그런데 기껏 발견하더라도 문제라네. 너무 멀다 보니 잡을 수단이 마땅히 없는 것이지. 보통이라면······.”


보통을 강조하며 베르그는 슬쩍, 리아와 세스를 번갈아봤다.



“그러다 보니 윙 버드는 재력으로도 구할 수 없는 최고급 식재료로서 다루어지고 있네. 심지어 맛조차 좋아, 한 번 맛본 이들은 그 부드러운 살결에 깃든 담백함과 깊은 풍미를 잊지 못해 윙 버드를 찾아 헤맨다고들 하지. 덕분에 윙 버드는 행운을 상징하는 것과 동시에, 이를 탐한 자는 저주받는다는 속설도 있네.”


갑자기 웬 공포 이야기다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기분이었나, 공기가 한층 가라앉았다.


조금 섬뜩해진 리아는 마른침을 삼켰는데, 정작 윙 버드를 잡아 온 세스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꼬았다.



“그런가? 대수롭지 않은 녀석이었던데. 제법 먹은 나도 아무렇지 않고. 사모님은 어때?”

“어, 저도 괜찮아요.”

“막 찾아 헤매고 싶진 않고?”

“아뇨. 정말 맛있기는 했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다른 걸 먹으면 그만이란 생각 밖에 안 들어요. 굳이 힘들게 찾아 먹고 싶진 않네요. 하늘 위를 나는 새라면 더더욱. 세스 씨도 어렵게 구해오시지 않아도 돼요.”

“나한테는 간단한 일이야. 의식해서 찾는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가요?”


둘 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래서 안심이기는 하지만 혹시 모르기에 리아는 에르에게 [염화]로 물었다. 정말 윙 버드가 저주를 걸 수 있냐고······.


에르는 드물게 쿡쿡, 웃기까지 하며 단언했다.



『그 새에겐 그런 힘이 없어.』

『그래요?』

『응. 윙 버드는 천적을 피해 하늘을 택한 새거든. 몸체에 비해 날개가 큰 것도 장기간 에너지를 쓰지 않고 쭉 날기 위해 그리 진화한 거야.』

『애당초 약하기에 뭔가 할 힘은 없다는 거군요.』

『그런 거지. 지성조차 생기지 않은 평범한 마수에 불과해. 하지만 맛있지.』

『어? 에르도 먹어봤어요?』

『동포 중에 요리가 취미인 자가 있거든. 이따금 맛보라며 권하길래.』

『호오.』


안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을 놓은 리아는 그대로 에르와 떠들면서 시간을 보냈다.


병풍처럼 서 있던 베르그는 허탈하다는 듯 숨을 토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머지 사람들도 태평한 리아의 모습에 위험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지만, 저주란 말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경직된 얼굴로 윙 버드가 조리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잔치에 이골이 난 주민들답게 금세 먹을 것들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내 테이블 위에는 여러 음식과 술병이 깔렸다.



“킁킁. 막걸리 같은 발효주인가? 흠흠.”


리아가 술의 정체를 파악하는 동안 에이브안이 잔을 들고 일어났다.



“오늘은 마을의 식구가 무사하게 돌아온 경사스러운 날이네. 하지만 드문 손님들도 방문한바, 적당히들 즐기게나.”


술주정하지 않게 적당히 마시라는 의미가 담긴, 짤막한 개회사가 끝나자 다들 건배하며 잔치가 시작됐다.


리아도 건배를 외치며 잔을 기울였다. 이제는 성인. 결혼식 때에는 마셔보지 못한 마을의 술이 어떨지 기대됐다.



“오오. 생각 이상으로 깔끔하네. 도수도 많이 높지 않아서 마시기 편하고.”


과연 이스카르가 자주 찾을만하다며 리아는 저도 모르게 납득했다. 그만큼 괜찮았다. 벨루디스에서 마셔봤던 여러 포도주에 지지 않을 정도로. 최근 교황과 마신 포도주는 당연히 비교조차 안 된다.


혼자만의 의견은 아니었다. 왁자지껄한 주민들의 기세에 눌려 조심스럽게 맛을 본 다른 이들도 눈을 크게 떴다. 심지어 온갖 진귀한 술을 마셔봤을 베르그와 로즈조차도 꽤 놀라며 투박한 술잔을 내려다봤다.


‘그전에 로즈는 미성년자인데 마셔도 되나?’


물론 마시지 말란 법은 삼국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린다. 하다못해 과음하지 않도록 잘 지켜봐야겠다.



“근데 주류 제조 기술이 좋은 건가, 조그마한 마을에서 만들 퀄리티가 아니지 않나?”


예전 지구에서 굉장히 맛있게 마셨던 지역 특산주와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다. 코끝을 훑는 꽃의 향기도 절묘하게 잘 절제되어 있고.


그래서 의문이다. 지구의 지역 특산주는 효모를 하나하나 분석하는 등의 연구와 무수히 많은 실패 뒤에 탄생한 것들이다.


물론 술에 환장했다면야 온갖 노력을 기울일 테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거다. 하지만 나트알은 딱히 그런 마을이 아니었다. 딱 적당히 즐기는 정도지, 술에 인생을 바친 듯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떻게 이토록 깔끔하고 맛 좋은 발효주를 만들었나 놀랍기만 하다.


당최 영문을 모르겠다며 리아는 술을 홀짝였는데, 시원하게 원샷을 한 이스카르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리아야, 술맛이 좋아진 건 채 10년이 안 됐단다? 옛날 건 이거랑 비교하면 그냥 썩은 음료수였지.”

“어? 그래요? 그런데 지금은 왜 이리 맛있어졌어요?”

“어떤 누군가가 제조법을 알려줘서 그렇지. 안 그래, 찬크에르?”


이스카르가 씨익 웃으며 에르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자네가 매번 나에게도 권해서 개량할 필요성을 느낀 것뿐이다. 이전의 술도 그 나름의 맛은 있었다만, 어차피 마실 거라면 좀 더 괜찮은 걸 마시는 편이 좋지 않나? 재료도 크게 다르지 않고 말이야.”

“크하하하. 다들 나에게 감사해야겠어.”

“암암. 네 덕분에 술배가 늘어났어!”


자화자찬하는 이스카르에 호응하듯 곳곳에서 술잔을 들고 외쳤다. 그리고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이스카르도 그들을 따라 남은 술을 입에 털고는 특유의 쓴소리를 냈다. 직후 본인 앞에 있는 안주―― 지글지글 잘 익은 삼겹살을 먹었다.



“끝내주는구먼. 귀족님들도 어서들 드셔! 비비안이었지? 너도 사양 말고 먹으렴. 맛있단다?”


술 대신 물을 홀짝이고 있던 비비안은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아, 넷!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할아버님이라니. 좀 묘한 기분이지만 듣기는 좋구먼! 아이리스와도 사이가 좋아 보이는데 이대로 손부가 되는 건 아닌지 몰라.”

“언젠가 그리되도록 하겠습니다.”

“하핫! 아재의 기분도 맞춰주고, 비비안은 착하구나!”


술이 들어가서 즐거운 이스카르는 모르겠지만 비비안은 진심이다. 분명 입은 예쁜 미소를 그리고 있었지만, 눈은 불타오르며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 마을―― 비상식적인 요새가 있기는 하지만 여느 시골과도 다름없는 이 풍경을 보고도 저러는 것이다. 어떠한 타산적인 요소가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역시나 그랬냐며 실망이라도 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비비안은 진실로 순수하게 아이리스의 아내 자리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한때의 열정일지도 모르는 일. 이성과의 감정은 사소한―― 이에 김이 낀 것만으로도 정나미가 떨어질 때도 있으니 미래엔 어찌 될지 모른다. 장애물은 차고 넘쳤다.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건 우리 아이리스려나? 일단 자신을 이성으로서 의식하게끔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겠지.’


아이리스는 영특하고 똑똑한 아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건 사실이다. 에르의 피를 이어서인지 엄마란 감투를 벗고 보더라도 뛰어남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러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10살이다. 애당초부터 순수했던지라 이성에 대한 분류가 없다. 아이리스가 비비안들에게 품는 감정은 단순한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분명 고생 꽤나 할 거다. 그러나 도와주진 않을 거다. 거기서 포기하면 으레 그러하듯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다.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도 나설 마음은 없다.



“우음······.”


어른들의 이야기를 기다리다 지친 로즈가 눈앞에서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여러 요리들을 보며 우물댔다.


‘이곳에서는 딱히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데.’


잘 챙겨주지 못해 미안했던 리아는 편하게들 먹으라고 권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옆에 있던 폴스가 덥석, 로즈의 손을 잡았다.



“자. 이렇게 쥐는 거야.”


그리 말한 폴스는 앞에 놓인 젓가락을 집어, 로즈의 손에 쥐여줬다.


‘아. 여긴 나이프와 포크가 주류지 참.’


나트알에서는 너무 당연한 일인데다, 라프리트와 루비아가 위화감 없이 곧잘 쓰길래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보통이라면 처음 본 물건인 티도 안 내며 잘 쓰는, 그런 초인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저, 저기, 포크를······.”

“아니, 괜찮네. 이것도 경험이 아니겠는가.”


황급히 움직이려는 리아를 멈춘 건 베르그였다. 그도 폴스의 설명을 듣고는 젓가락을 어색하게 집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눈가에 힘을 주고 젓가락을 쥐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국 예의가 아닌, 식기가 생소하여 먹지 않은 것이었다.


리아가 크게 반성했고, 유즈라가 호위로서 먼저 기미를 봤다. 베르그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녀는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며 강행했다. 그리고 이내 정중히 독의 여부를 판별하던 그녀의 눈이 번쩍 떠지고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안전이 판명되자 베르그들은 요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로즈도 잔뜩 신난 얼굴로 삼겹살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렵사리 삼겹살을 집어놓고는 허둥댔다.



“저, 폴스······.”

“소스를 찍어 먹거나, 여기 있는 채소들을 싸 먹으면 돼.”

“이게 소스인가요?”


로즈는 가리키는 작은 그릇들을 보며 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름장이랑 쌈장이라고 해. 마음에 드는 걸 찍어 먹어.”

“포, 폴스는 어떤 쪽이 좋나요?”

“내 추천은 쌈장이야.”

“그러면 저도.”

“아직 뜨거우니까 조심해.”


고개를 끄덕인 로즈는 조심스럽게 쌈장을 찍었다. 그리고 단숨에 입에 넣었다.



“맛있어요!”

“그러네.”


쌈장을 듬뿍 찍어 먹은 폴스가 슬쩍 내린 복면을 다시금 올리면서 무덤덤하게 동의했다.



“그저 고기를 구웠을 뿐인데······.”

“아냐. 밑 준비가 잘 돼서 그런 거야. 마법으로 깔끔하게 피를 빼고, 내부부터 빠르게 저온으로 숙성하지 않으면 이런 맛은 안 나. 원래는 꽤 잡내가 심해.”

“심오하군요!”


‘그, 그러네. 매번 뭔가를 하는 줄은 알았지만 내가 먹지 않아서 관심이 없었는데. ······그런데 자세하게 아네. 혹시 폴스는 미식가인가?’


폴스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한 리아를 뒤로한 채, 감명깊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린 로즈는 재차 기름장에 삼겹살을 찍어 먹었다. 그리고 당연히 맛있다며 소리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기름장은 별로 입맛에 맞지 않았나, 오묘한 얼굴로 갸우뚱거렸다.



“채소랑 같이 먹는 것도 괜찮아.”


그리 말한 폴스는 현란하게 젓가락을 놀려, 순식간에 쌈을 만들어서 로즈의 입에 넣어버렸다.



“로즈린느 님?!”


이전 막대사탕 때와 같은 일에 유즈라가 폴스에게 곱지 못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베르그가 단호히 질책했다.



“유즈라! 문화가 다를 뿐이다. 일일이 과민하게 반응하지 말거라.”

“윽. 예······.”


귀족의 식사 문화에서는 손으로 무언가를 집어 먹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짓이다. 자기 자신도 교양 없는 인물로 비친다. 남이 만든 거라면 아예 논외. 독살의 위험도 있는지라 유즈라의 반응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도리어 문화라며 일축한 베르그의 그릇이 큰 것이었다.


리아는 이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이곳에 따라오겠다고 한 것은 그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도구를 바꿔주는 것 정도야 괜찮지만, 여긴 나트알이다. 이곳에서 황자 행세를 하려는 꼬락서니를 두고 볼 마음은 없다.


정 못 어울리겠으면 돌아가면 된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원래부터 바라지도 않은 방문인지라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아삭아삭 맛있어요!”


온전히 먹는 것에 집중했나, 쌈을 먹고 외치는 로즈.


아이의 순수함이 가진 절대적인 위력이 여기서 드러났다. 순간 침체했던 분위기가 단숨에 밝아졌다.


그리고 이때를 노려 라프리트가 말했다.



“다들 예의는 신경 쓰지 말고 드시죠. 아시겠지만 갓 만든 음식을 바로 먹을 기회는 좀처럼 없답니다?”


확실히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귀족은―― 특히나 높은 직책일수록 검시가 까다롭다. 중세 지구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직전에 마법으로 데우기는 하나, 자신들의 앞으로 오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마법이 있기에 좀 더 빠르지 않을까 싶지만, 오히려 그 마법 때문에 더더욱 까다롭다. 막말로 먹기 직전에 독을 만들어 넣어도 되니까.


자세한 건 모르지만 이 때문에 귀족의 식사는 단독으로 이루어지며, 정말 어지간히 신뢰하지 않는 이상 같이 식사하지 않는다. 파티에서 나오는 음식들도 다과 위주의 간단한 요깃거리가 전부다. 조심성이 많은 자는 심지어 마실 음료를 직접 지참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귀족 스스로도 독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건 물론, 여러 마도구를 주렁주렁 지참하고 있다. 유즈라를 말린 베르그도 그렇다. 그의 품속에는 독을 검출하는 마도구가 다소 있었다.


‘과연. 식사를 망설인 건 단순히 식기 때문만은 아니었나 보네.’


무엇보다 쟁반 하나에 담긴 음식을 집어 먹는 건 생에 처음일 것이다. 여러모로 망설일만하다.


하지만 여기서 먹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이미 로즈도 맛있게 먹고 있겠다, 베르그가 먼저 쌈장에 고기를 찍어 먹었다.



“로즈의 말대로 훌륭한 맛이군. 유즈라와 가베인도 제국의 예법은 잊고 들게.”

“말씀대로.”


황족과 나란히 앉은 것은 어떻게든 받아들였지만, 같이 식사한다는 것은 송구스러워하며 유즈라는 망설였다. 그녀와 달리 가베인은 냉큼 대답하고는 능숙하게 젓가락을 써 호쾌하게 쌈을 싸 먹었다.


동료의 사양 없는 이 모습에 용기를 얻었나, 실례하겠다며 예를 차린 유즈라도 마침내 어색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제일 처음은 고기였다.


입을 다문 채로 유즈라의 턱이 몇 번 움직였다. 다음은 볼 것도 없다. 맛에 대한 보증은 황족들이 해주었다. 애당초 그녀는 기미를 보기도 했고.


한껏 눈이 커진 유즈라는 테이블에 잔뜩 차려진 나물들에도 눈길을 줬다. 하지만 아직 저항감이 남았나, 조금 집어 조심스럽게 먹었다. 기미를 볼 때와는 상당히 태도가 다르다.



“다소 생소하지만 맛있는 샐러드네요······.”

“쌈으로 먹어도 맛있어요, 유즈라!”

“그, 그렇습니까?”


기대된다는 로즈의 반응에 유즈라는 결심한 듯 조용히 [청결]을 사용했다. 그러고는 가지런히 쌓여있는 상추를 들어 올렸다.


유즈라는 차곡차곡 내용물을 채운 쌈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다 눈빛을 반짝이는 로즈와 시선이 맞았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직후 뭔가 씹는 소리가 들렸는데, 잠시 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는 유즈라가 원래대로 돌아앉았다.



“그냥 드셔도 되는데······.”

“아뇨. 그건 조금······. 그래도 맛있었습니다.”


이러나저러나 먹는 방식에서는 거부감이 있지만 맛 자체는 합격인가 보다. 그렇지만 자신의 몫으로 나온 샐러드 그릇을 들고 야금야금 먹던 리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으음. 역시 밥이 필요해. 제국 쪽에 비스무리한 게 있긴 했지만 좀 성에 차지 않아. 진짜 쌀과 비슷한 다른 곡식이랄까.’


하지만 달리 있는 것도 아니다. 약간의 타협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아. 아니다. 공국이 있잖아?! 농경이 발달한 나라니까 어쩌면 있지 않을까? 나중에 루비아 씨에게 물어봐야겠어. ······아. 밥 생각하니까 비빔밥이 먹고 싶네~’


쌈장이 있다는 건 고추장도 있다는 소리다. 물론 모두 에르의 작품이다. [투영]으로 지구의 기억을 보여줬을 때 에르는 갖가지 것들을 묻고는 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까 만들었다며 맛보게 해줬다.


된장도 그랬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만들어버렸다. 현재는 장독대까지 만들어 요새 내부에 잔뜩 보관하고 있다.


뭐······ 솔직히 완벽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여긴 오엘문리아다. 지구가 아니다 보니 재료에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체로 비슷한 것들로 선별하였다지만 완전히 같기란 힘들고, 덕분에 미묘하게 맛이 다르다. 깊은 맛이 부족하달까, 고추장에 이르러서는 찹쌀이 아닌 보리가 사용됐고.


이 탓인지 된장을 만들었음에도 간장을 만드는 데에는 꽤 시일이 걸렸다. 전생의 부모님과 할머니가 간장을 담갔던 절차를 정확히 알려줬는데도 불구하고, 그 에르가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왜 그런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마법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만을 알려줬다.


이래저래 재현은 힘들다는 거다. 그래서 액젓과 젓갈도 아직이다. 멸치나 까나리 같은 생선에 소금만 들이붓고 숙성되길 기다리기만 하면 되건만, 어째서인지 성과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인 김치와의 재회는 아직 먼 것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만족이기는 하다. 다른 세계임에도 지구의 맛을 볼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완벽한 게 좋으니 쌀은 반드시 찾아야겠다.


‘근데 이제 와 든 생각인데, 어쩐지 식재료가 많이 늘어난 기분이다? 옛날에는 좀 더 단순했던 거 같은데······.’


어렸을 때의 주식은 포리지 같은 보리죽이었다. 그것도 간이 거의 안 된 밍밍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금씩 약초가 들어가서 끝맛이 쓰기도 했다.


건강하지 못했기에 그랬겠지만 다 나은 이후도, 놀러 간 다른 집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딱 중세 서민의 식단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은 모양새로, 기껏 해봐야 날것을 구워 살짝 조리한 것이 전부였다. 아니면 우유나 물을 부어 조린다든가.


그런데 지금은 재배하는 곡식이나 채소 자체가 다양해졌을뿐더러, 향식료 또한 몇몇 허브만 있던 것에 비해 이제는 뭐가 있는지도 모를 만큼 많아졌다. 카레를 재현했으니까 일단 적진 않다는 건 분명하다. 한때 중세 시대 인기 교역품인 후추도 흔해졌고.


‘난 밭일은 잘 모르지만 다 재배하는 거겠지? 따로 교역하는 곳도 없으니. ······어라? 그러면 씨앗들은 다 어디서 구해왔다냐?’


근처에서 발견했다기에는 아무래도 종이 너무 많다. 그것만이 아니다. 애당초 한 지역에서 그 많은 허브와 곡식들이 자랄 수나 있는 것인가.


아니. 불가능하다. 자라는 데에 필요한 환경이 다를 텐데 가능할 리가 없다. 우연히 맞아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건 한두 종이다. 사계절이 있어 생육에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종이라면 키울 방법조차 없다.


만약 이를 가능케 하는 거라면 그건 마법밖에 없다.


‘에르구나!’


에이브안도 뛰어난 마법사이기는 하나, 가능했다면 더 일찍 했을 터. 보리죽만 먹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키울 환경을 만들었다 하더라도 씨앗이 없으면 시작조차 못 한다.


확실하다. [차원수납]에 온갖 것들을 다 보관해 놓은 에르만이 이리 식재료를 늘릴 수 있다.


무엇보다 눈앞에 펼쳐진 상차림이 너무 눈에 익다. 언뜻 보면 그냥 한국이지 않은가.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리아는 감동했다.


정말 아내를 위해 모든 걸 다 해줄 것 같은 남자다. 생색내거나 하지도 않고.


이런 남자가 또 있기나 할까······.


안 그래도 반했었지만 이젠 흠뻑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반해 버렸다. 이에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었다. 이번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은 그와 결혼한 것이라고.


거기서 리아의 온 마음은 에르에게로 향했다. 베르그들이 뚝배기에 담겨 아직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백숙을 먹든 말든 아무 관심도 없었다.


에르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정신이 몽롱해지는 미소를 지으며 빤히 올려다보는 리아를 안아 올렸다.


라프리트에게만은 조금 미안했지만, 모처럼 남편이랑 알콩달콩 지내도 괜찮지 않은가? 천사 같은 그녀라면 분명 이해해줄 것이다. 뒷일은 폴스에게 맡기도록 하자.


그러한 뜻을 폴스에게 [염화]로 알리고, 리아는 에르의 품에 안겨 천천히 요새의 벽 위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식사 도중이라는 건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제지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또 시작했냐는 뉘앙스의 한숨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삼겹살은 전채 요리가 아니야. 백숙도 먹어. 저주 따윈 없으니까. 자. 여기 숟가락.”


등 뒤로 조금의 사양도 없는 폴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부탁을 이행하는 것이다.


이윽고 천을 내리는 소리와 함께 꿀꺽 삼키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감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이어 웅성대는 소리와 함께 훨씬 많은 이들의―― 주민들의 탄성이 터졌다.


이 모든 반응을 머리 한켠에서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리아는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어릴 때의 루데릭을 닮았네?”


신기하다는 듯한 이스카르의 말에 이어, 뒤통수를 따갑게 찌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오직 에르만을 바라보며 그에게 최대한 의식을 집중했다.


그래. 움찔거리거나 한 적은 없고, “리아······!”라며, 제법 화가 난 루데릭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것이다.


‘응.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미소 지은 리아는 그렇게 에르의 품에서 이 적막한 순간을 즐겼다.


작가의말

네. 그렇습니다. 밥을 먹으려면 복면을 벗어야겠죠?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닷!

여태 다음화가 올라오지 않아서 놀라셨죠? 사실 검지 손가락을 다쳐서 수술 좀 하느라...

당분간 얌전히 있으라는 처방에 진짜 얌전히 있었습니다...

뒤늦게 공지라도 쓸까 했지만... 

서프라이즈~

집필은 계속했고, 2화 분을 준비했슴다!

헤헤. 부디 만족하시길 바라며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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