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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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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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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4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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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쪽

198

DUMMY

도플갱어―― 무무카케는 생에 다시는 없을 만큼 당황했다.


‘해석이······, 해석이 전혀 안 된다.’


애당초 암컷인지 모를 인간에게 받은 머리카락 자체가 전혀 녹질 않았다. 해석을 위해서는 소화해야 하건만, 몇 분이 흘러도 머리카락은 조금도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 철마저, 심지어 오리하르콘과 아다만티움까지 녹이는 위장을 지녔음에도 이 머리카락에겐 소용이 없었다.


‘아니, 머리카락이 맞긴 한 거야?!’


어쩌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준 게 아닌가도 싶었다. 어느 순간에 들고 있었으니 더더욱.


황당함에 이런 생각까지 했으나, 그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암컷 계집은 손톱으로 가볍게 반 토막을 내어, 자신을 덮쳤었던 어두침침한 놈에게 한 짝을 줬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그런 것을―― 무른 물건 따위를 소화하지 못한다는 게 이상할 따름이다.


순간 뭔가의 독극물인가도 싶었다. 어쨌거나 상대는 갑자기 기습을 한 녀석들이니.


그러나 아니다. 머리카락은 형태만 유지할 뿐, 다른 무언가를 하려는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거죽마저 잃었다. 도플갱어는 원본이 지닌 능력의 대략 80%를 이어받을 수 있는, 막강한 생물체인 건 분명하지만 본체 자체는 연약하기 짝이 없다. 현 상태라면 굳이 암살할 가치도 없이 짓누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럼 이게 정말로 머리카락이라고? 마력조차 안 느껴지는데?’


무무카케는 몹시 실망한 분위기로 어서 변하라고 재촉하는 암컷 계집을 올려다봤다.


덩치가 큰 짐승의 심장 같은 도플갱어는 그 눈이 상단의 혈관처럼 생긴 곳에 있다. 입은 조금 더 밑에 있고.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라 인간으로서는 쳐다보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계집은 달랐다. 정확히 시선을 느끼고는 빤히 마주본다.


‘그 이전에, 계집이 맞긴 하나?’


도플갱어는 암수의 구분이 없다. 자손을 남기는 것도 무성생식으로, 오랜 시간 혼과 마력을 들여 후대를 잇는 식이다. 그러므로 도플갱어에겐 암컷, 수컷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개념이니까.


타종족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더더욱 그렇다. 크고 작고의 차이만 느끼지, 생김새로는 전혀 구별할 수가 없다. 체취를 통해 대략적으로나마 다름을 알고, 암수를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계집에게서는 체취가 극단적으로 적다. 되려 주변에서 묻은 체취가 더 강하게 나는 실정이다. 그 체취 또한 인간이 아닌, 꽤 강한 마수의 것이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단순히 몇 번 마주했다는 느낌은 아니다. 상당히 신뢰 관계를 쌓고, 함께 지내는 것 같은 체취였다.


‘강한 마수를 따르게 했다? 인간이? 그렇다면······ 역시 초월자? 듣던 특징들이랑도 제법 일치하긴 해. 하지만 암만 초월자라도 마력이 안 느껴지는 건 왜지?’


무무카케는 의심 사지 않게, 최대한 자연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이름을 듣지 못했다.》

“응? 변신에 필요한 건가요? 그런 거라면 얼른얼른 물어보시지.”

《하하. 미, 미안.》


계집은 간단히 넘어갔다. 그러나 다른 두 놈이 지긋이 쳐다본다.


어느새 등 뒤로 나타나 제압해버린 저 어두컴컴한 녀석은 도플갱어에 대해 알고 있다. 습격했을 때부터 거죽을 벗으라고도 했었으니까.


계집을 들고 있는 남자도 그러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도플갱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물론 동료이니 알아도 이상할 게 없다.


‘근데 어째서 이 계집만 모르는 거지?’


애초부터도 다른 두 놈들은 어디서 도플갱어에 관해 들은 건지 의아하기만 하다. 구분은 또 어떻게 하는 거고.


‘우리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쳐. 남은 자료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구두로 쭉 전파되었을 수도 있고. 하지만 도플갱어가 아닌 이상에야 단박에 우릴 구분할 순 없을 텐데······?’


어두침침한 놈의 손속엔 주저함이 없었다.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나타나 단숨에 머리를 바닥으로 짓누르고는, 뭐라 할 새도 없이 사지를 잘라버렸다.


거죽은 [신체 구성]의 마법으로 만든 것으로, 신경과 마력이 흐르기는 해도 그래봐야 만들어진 탈에 불과하다. 잘리면 아프긴 할지라도 생명에는 조금의 지장도 없다. 생포를 염두에 뒀다고 생각하면,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어디서, 어떻게 알았는가······?


정체를 들킬 일 따윈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만약 전부터 주시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저 뭔가를 꾸미는 인간이라고만 여겨졌을 것이다. 도플갱어와 연결할 만한 흔적은 결코 남기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둘 다 딱히 지적할 마음이 없다는 건데······.


‘아! 그러고 보니, 강한 인간은 마력의 흐름으로 우리를 구분할 수 있다고 했었나?’


옛날에 장로가 해주었던 이야기를 언뜻 떠올린 것과 동시에, 계집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무무카케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이, 이스피리아?! 이 계, 계집이 그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화제의 이스피리아란 이름은 무무카케도 들은 적이 있다. 근래의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을 강대한 인물로, 도플갱어들에겐 최고로 유의해야 할 요주의의 인물이었다.


설마 본체임에도 대화가 가능한 인간이 그 대상이었을지 누가 알았겠는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지만 방심했다.


어찌하여 이 계집이 이런 곳에 왔는지가 되려 궁금할 지경이지만, 그걸 해소할 시간은 없다. 후회나 고민할 틈도 없이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콱!


몸 안에 보관하고 작은 병을 깨뜨렸다. 안에 든 내용물이 흘러나왔고, 이내 몸속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은 짧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대업이 우선이다.


‘아아. 장로라면 이 머리카락을 해석할 수 있었을 텐데.’


강대하기 그지없는 카드를 얻지 못한 건 내심 아깝지만, 후 일은 동지들이 잘 해낼 줄 거다. 그것에 만족하며 무무카케는 눈을 감았다.



“――어라. 독? 갑자기?”


바로 사태를 파악한 눈썰미는 인정하지만 이제 늦었다. 자결용의 이것은 아주 강력한 맹독으로, 바질리스크의 독과 붉은 뿔 버섯을 배합한 것이었다. 치료 따윈 불가능. 설령 인간들의 성녀가 온다고 하더라도 무리였다.


무무카케는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명예롭게 죽는 자신을 위로――


――딱!


뭔가 튕기는 듯한 경쾌한 소리였다.


몸을 내달리던 통증이 일순 사라졌다.


몽롱했던 정신마저 번쩍 든 무무카케는 눈을 번쩍 떴다.


앞에는 계집―― 이스피리아가 오른손을 가슴께에 올린 채였는데, 그 모습은 마치 손가락을 튕긴 듯했다.


‘데, 데인에게 들어본 적이 있어. 드래곤 슬레이어는 발동어 대신 손가락만을 튕긴다고! 역시 인간들의 술식마법이 아닌 건가?!’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맹독을 해독할 수준의 마법―― [정화]까지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어중간한 치유사 수준이 아니다. 전투력도 그럴 테지만, 인간의 범주 자체를 아득히 넘어섰다. 새삼스럽지만, 어쩌면 자신이 손에 넣은 이 머리카락은 둘도 없을 귀중한 소재이지 않을까······.



“웬 독이래? 외부는······ 아니고. 아까 뭐 깨지는 듯한 소리도 도플갱어 씨의 속에서 났지? 그렇다는 건······ 자결? 그 깨지는 소리는 병이었나. 흐음. 몸 내부에 보관할 공간 같은 게 있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이 자식은 왜 이렇게 귀가 밝은 거야?! 어, 어떻게 하지?’


이래저래 전부 들통났다. 일단 부정하려 말하기는 했으나, 마땅한 변명이 나올 리도 만무했다.


큰일이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스피리아의 전투력은 특대급. 정말 초월자라면 장로가 아닌 이상에야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정보에는 없던 동료들도 있는 상황인 데다가, 역량마저도 미지수였다.


혹시 이 계집의 시야에 들어온 순간, 이미 퇴로는 막힌 게 아니었을까······.


무심코 든 생각에 무무카케는 전율했다.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자아. 그러면 변신도 못 하시는 거 같으니, 제 용건으로 넘어가죠.”


왠지 즐거운 음색으로 말한 이스피리아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방금까지는 나른했던 것이 공기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압박? 위압? 공포?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눈앞의 계집이 돌연 다른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무무카케에겐 한 차원 다른 존재로 바뀐 게 아닌가 싶은 정도의 극심한 차이였다. 심지어 함부로 눈을 마주하는 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나마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건, 이쪽에겐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왜 저로는 변하지 못한 거예요?”

《그건――.》


소화가 안 돼서라고, 솔직히 이야기하려 했던 무무카케는 말을 멈췄다.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만한 소재를 더 얻기가 얼마나 힘든가. 혹여나 머리카락을 돌려달라고 할지도 모를 일. 그 능력을 눈앞에서 본 터라 더더욱 욕심이 났다.


때마침 좋은 기회도 왔다.


마음을 정한 무무카케는 이야기를 꾸미기로 했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더 필요하다고 말을 꺼내려 했는데――.



《······.》

“왜 그러세요?”

《뭐, 뭐지? 말이 안 나와. 어째서? 지금은 잘만 나오는데?》

“아~ 지금의 저에겐 거짓말을 할 수 없어서 그래요.”

《그게 무슨······.》

“들으신 그대로예요. 제게 거짓말은 못 해요. 암만 하려 해도 입하나 뻥끗할 수 없죠. ――당신이 방금 겪은 것처럼.”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어······ 네. 저도 잘 모르겠는데 되더라고요.”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이스피리아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무무카케는 이스피리아가 거짓말하는 거로 생각했다. 그야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괴상한 현상이지 않은가. 평범하게 마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으리라. 그런데 모른다고 하니 아무래도 거짓말이라고만 여겨졌다.


‘그렇다는 건 본인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로군······.’


실로 더럽고 치사한 술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경이로운 그 능력은 절대적이다. 몇 번을 시도해보아도 한 마디 벙긋조차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서, 왜 저로 변신하지 못하시는 거죠?”


고민스러웠지만 더는 둘러대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다. 별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했다.



《소화가 되질 않아서야. 복제하려면 소재를 흡수해야 하는데, 네가 준 머리카락은 그럴 수가 없었어.》

“그렇군요. 머리카락은 소화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어쩔 수 없나? 아! 그러면 손톱은 어때요?!”


제 발로 소재를 준다니.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내놓으라 하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니 말은 나올 터.


그렇지만 노려보는 시선에 그만뒀다. 잔혹하게 자신을 제압했었던 어두침침한 녀석이 맹렬한 눈빛―― 흡사 당장이라도 살인을 할 것만 같이 쳐다보는 것이다.


자결하려고 했지만, 굳이 나서서 죽을 이유는 또 없지 않은가.



《아마 손톱을 줘도 안 될 거야. 머리카락이 지금도 전혀 소화될 기미가 없거든. 나로선 너로 의태 하긴 힘들다고 봐.》

“호오. 상대에 따라 변신에도 역량이 따르는가 보네요. 과연······. 아쉽지만, 나와의 대결은 포기해야겠네요.”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나름 만족했나, 기분 좋은 울림을 내며 이스피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음으로, 도플갱어의 생태 말인데요. 자신과 똑같이 생긴 자를 2번인가, 3번 마주하면 죽는다는 설도 있던데, 그건 당신들이 죽여서 그런 건가요?”

《확실히 옛날에는 녀석들도 있었다고 해. 정체를 들키기 싫어 원본을 통째로 먹어 치운 거지.》

“음. 자신과 똑같은―― 도플갱어를 만나면 죽는다는 소문이 퍼진 것도 그러한 연유군요.”

《하지만 그런 방식은 오래 못 가서 들켜. 아까도 말했잖아? 우리가 복사할 수 있는 건 대상의 기억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종족 전체로 보면 완전 민폐나 다름없는 짓이지. 그래서 현재는 하지 않아. 나도 말로만 들어봤을 뿐, 네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해.》

“어, 음. 그, 그렇군요.”


어색하게 말을 더듬는 이스피리아.


풋내기나 다름없는 한심한 꼬락서니다. 분명히. 하지만 형용하기 힘든 분위기만큼은 여전하다는 게 여러모로 기묘하기만 했다.



“여하튼, 개인적으로 궁금한 건 대충 들었으니 이제 본론으로 넘어가죠.”

《본론······이라고?》

“네. 당신―― 응?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무무카케다.》

“그래요, 무무카케 씨! 당신, 데인 도미에 나이젤이라는 분과 함께 뭘 하려 했죠?”


‘젠장. 어떻게 내 소재를 파악했나 싶었더니 그거였나.’


확실히 요즘 여러모로 자주 표면에 드러나긴 했었다. 대체로 조급하게 굴어댄 데인 녀석의 탓이기는 했지만.


한탄스럽지만 이제 와 후회해봤자다. 코앞으로 들이닥친 위기나 신경 쓰자.


그렇지만 사실대로 말하기란······ 무리다. 자신만 걸린 문제였으면 모를까, 이건 동족들까지 걸린 사안. 괜히 이스피리아란 사실을 알자마자 자결하려 했던 게 아니었다.


‘도망은······ 가능할 리가 없나.’


인간은 묘하게도 자신보다 약간 자를 섬기는 경우가 허다했다. 제일 위의 왕이란 작자가 거리에 널린 인간보다 약할 때도 비일비재하다.


이해할 수 없는 습성이긴 했지만, 도플갱어에겐 이만큼 형편이 좋은 곳도 없다.


타종족의 경우 보통 강한 자가 위에 있기 마련이라, 소재를 얻을 엄두도 내기 힘든 형국이다. 하지만 인간은 강하더라도 밑바닥인 경우가 드문드문 있어, 호위를 뚫을 역경도 없이 편히 소재를 취득하는 게 가능했다.


잠입하기에도 좋았다. 밑바닥에 있기에 바꾸더라도 들키지 않을뿐더러, 여차하면 다른 곳에서 능력을 살려 지내도 됐다.


아까 이스피리아에게도 말했듯 아는 이에게는 금방 들키긴 한다. 그러나 어차피 밑바닥에 있던 인물. 다른 도시로 가면 어지간해선 들킬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밑바닥의 인물이 발이 넓을 리도 없고.


덕분에 끝내주는 예비 소재도 구해놨다. 특급이라 할 수 있는 소재도 있다.


하지만······ 그것들을 쓴다고 해도 탈주는 불가능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어두침침한 녀석이 손쉽게 찢어발긴 거죽 자체가 가진 소재 중에서도 최상급의 것. 특급을 쓴다 할지라도 통용되리라 보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현재는 이스피리아와 정체불명의 자가 더 있는 형국이다. 다른 인간들과는 달리, 위에 있으면서도 허약한 그런 분위기도 아니다. 소문이 부풀려졌다는 걸 고려하더라도, 어두침침한 놈보다 약할 거 같진 않다.


솔직히 말해 외통수다. 자결이 실패한 이상 더는 어찌할 수단이 남지 않았다.



《비, 빌어먹을······!》

“말하기 껄끄러운가요? 뭐어, 그것도 당연한가? 그럼요, 다른 걸 물어볼게요.”


앞선 질문보단 낫겠다는 생각에 무무카케는 얌전히 그러라고 했다.



“제1 위상―― 가이란이란 인간을 알고 있나요?”

《그게 누구냐?》

“음. 모르시나요? 심판관이란 허영심 가득한 사람 중의 한 명인데.”

《······모른다.》

“그런가요······?”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


남자의 품에서 지긋이 쳐다보던 이스피리아는 의혹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아아. 헛다리였나? 루비아 씨랑 라프리트 씨가 가능성이 높다 해서 분명 세인트리안과 연결점이 있을 듯싶었는데.”


‘잠깐. 세인트리안이라고? 설마 이 녀석들이 찾는 건······.’


무무카케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깨닫게 됐다.


――재차 똑같은 걸 물으면 큰일이라고.


아까까지는 분명 몰랐었다. 정확히 누굴 지칭하는 건지 연관되는 인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세인트리안이라는 소릴 듣고 짐작 가는 게 있었다.


‘확실히 장로가 세인트리안의 어떤 놈과 접촉했었다고······. 제법 소재가 괜찮은 녀석이니 좋은 결실을 볼 수 있을 거라고 호언장담했었어.’


몇십 년 전의 일이지만, 모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장로였다 보니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만, 이건 방금 떠올린 것. 모르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이스피리아가 펼쳐놓은 기묘한 마법에 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마 본인도 잘 모르는 마법의 특성이자 빈틈이 아닐까.


덕분에 무사히 넘겼지만, 언제 알아차릴지 모를 일이다. 특히나 재차 지긋이 쳐다보는 두 놈들의 시선이 엄청 마음에 걸린다.



“저기, 리아 님? 이 자식 지금――”

《――아아! 이스피리아라고 했지? 또 물어볼 건 없어?!》

“그러네요. 아직 물을 게 많았었죠.”


늦지 않았다······.


‘하지만 저 멀대와 어두침침한 놈이 눈치챈 건 분명해.’


간담이 서늘해진 무무카케는 곁눈질로 둘을 봤다.


멀대는 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말하려 들진 않았다. 어두침침한 녀석도 감히 주인의 말을 자를 순 없었는지,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도 입은 굳게 다물었다.


뻔히 수상하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무례를 저지르지 않으려 하다니, 굉장한 충정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살았지만······.’


잠시 덮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였다.



《뭘 더 묻고 싶은데?》

“몇몇 개가 있긴 한데······, 먼저 왜 자결하려고 했는지가 듣고 싶네요.”

《네 이야기는 이곳 수도에 널리 퍼져 나조차 알 정도지. 그런 유력인사인 네게 정체를 들킨 이상 입을 다물려 한 거야.》

“아까 말하지 못한―― 데인 선배 씨와의 일이 관련된 건가요?”

《그래. 동족을 위해서였어.》

“······역시 자세하게 말해줄 수는 없나요?”

《······.》

“그런가요······.”


생각할 거리가 있다는 듯 이스피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조금······ 다른 질문인데요, 여긴 어떻게 들어오셨나요?”

《당연히 그냥 들어왔지.》

“본체로요?”

《그렇지? 문도 봉인한 곳이기도 하니. 구멍 난 곳으로 들어왔지.》

“근데 폴스에게 사지가 잘린 건 왜죠?”


흠칫――


순간 무무카케는 딱딱하게 굳었다.


그리고 분명 반응을 보았을 텐데도 이스피리아는 태연자약하게 물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아까 분명 남은 소재가 없다고 했죠? 그런데 굳이 본체로 이 집을 들어와 모습을 바꾼 연유는 무엇인가요?”

《그, 그냥――.》


말이 안 나온다. 무심코 거짓말을 담으려 한 입에서는 어떠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거짓말할 수 있었다 치더라도 소용없었을 거다.


이 계집―― 이스피리아는 처음부터 모든 전모를 파악한 상태였으니까.


‘이런 개 같은! 당했어!’


어수룩한 반응 따위에 홀라당 속아버렸다. 이 빌어먹을 계집은 순진한 척 가장하여 정보를 끌어냄과 동시에, 최종 확인을 했던 것이다.


어리석었다. 상대는 드래곤을 죽인 인간이거늘 어찌 다른 인간과 같은 수준이라 여겼단 말인가.



“그냥은······ 아무래도 아니겠죠. 모처럼 정체를 감춰줄 안정적인 신분의 거죽이 있는데. 고작 이런 집에 들어오겠다고 번거롭게 소재까지 낭비할 이유는 없어 보여요. 생각할 수 있는 건, 데인 씨를 만났을 때 사용한 거죽이 이젠 필요 없는 상황―― 두 번째 페이즈로 넘어간 정도이려나요?”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발언이다.


이스피리아가 확신했듯, 무무카케도 확신하고는 곧장 몸에 보관해 놓은 소재를 소화시켰다.


한순간에 무무카케의 본체에서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촉수들은 빠르게 서로 꼬여가더니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도플갱어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이 순간을 노리는 것이었다. 변형 중에는 변변찮은 저항조차 할 수 없어 그대로 당하고 만다.


그런 절호의 기회이건만, 이스피리아는 슬쩍 물러나고는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앞서 변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던 것도 그랬지만, 역시 도플갱어에 대해서는 그리 해박하지 않은 듯하다. 아마 넌지시 들은 게 전부지 않았을까.


어찌 됐었든 잘 됐다. 잡념은 버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심장 형태의 무무카케의 덩치가 부풀려지더니 이윽고 사람의 실루엣이 갖추어졌다.


최종적으로 의태를 마친 무무카케의 모습은 한 명의 인간. 190cm에 달하는 신장에 금발벽안의 탄탄한 몸을 지닌 젊은 미남자가 되어있었다.


무무카케는 눈을 떠 만들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알몸인 채였지만 인간과 같은 부끄러움은 없었다. 그보다는 육신에 가득 넘쳐나는 힘에 전율했다.


‘크큭. 제아무리 이 계집이라도 과연 놀랐나.’


커다란 눈망울을 동그랗게 뜬 이스피리아의 모습에 무무카케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미소는 중성적인 외형에 그리 어울리진 않았다.



“그야 경악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이해는 한다. 변한 나조차도 놀라우니.”

“일단 물어보는데, 대체 누구로 변한 건가요?”

“모르겠나?”

“어······, 네. 어디서 본 듯하면서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가. 후후. 어쩔 수 없지.”


어깨를 으쓱인 무무카케는 너스레를 떨면서 긴 금발을 쓸어올렸다.



“두 귀를 크게 트고 들어라! 이 육신이야말로 벨루디스의 건국왕, 인비트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의 것이니라!”

“아? 초대 건국왕?!”


그랬다. 이것이 장로로부터 건네받은 특급의 소재. 무무카케가 지닌 비장의 수단이자, 최후의 수단이었다.


입을 쩍 벌린 이스피리아의 반응이 내면에 자리 잡았던 불안을 씻어내려 준다. 상쾌함마저 솟아나는 것을 느끼고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처음의 불안 따윈 없다. 괜스레 겁부터 먹었다. 이 절대적인 힘이라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었거늘.


자신만만해진 무무카케는 득의양양하게 내려다보았다.



“이스피리아여. 도플갱어에겐 보물이나 다름없는 특급의 소재를 사용케 한 네겐 경의마저 든다. 긍지를 가져도 좋으리라. 너는 우리가 경계했을 만한 힘을 지닌 인간이었다.”


무무카케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넘어가고 싶었다. 넌 나름 호의적이기도 했으니. 그러나 너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느니라. 우리의 대업에 변수를 남기는 건 용납되지 않은 일. 최소한의 자비로 나만은 이스피리아란 인간 전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슴속에 새겨두겠다.”


어떠한 과장도 없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송이었다.


이에 돌아온 것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딱히 안 그래도 될 거 같아요.”

“뭐?”


이 계집이 뭐라 한 것인가.


무무카케가 느끼기에는 이스피리아는 대적할 수 없는 파도에 삼켜지는 제물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는 게 이해할 수 없었다.



“리아 님, 제가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음. 꼴을 보면 적대하는 거 같긴 한데······. 아니, 됐어. 대놓고 날 지명했으니 내빼는 것도 좀 멋없네.”

“과연. 알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진 않아도 된단다. 오히려 잘 됐어. 마침 나도 조금 몸을 쓰고 싶었거든. 뭐, 설마 이 정도의 패로 덤벼들 줄은 몰랐지만.”

“저도 어이가 없을 지경입니다.”

“별수 없지.”


아무 의욕도 없는, 상대하는 것마저 귀찮다는 기색이 농후한 두 사람―― 세 사람의 반응에 무무카케는 어안이 벙벙하게 되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인류 최강인 건국왕을 앞에 두고!”


보이지도 않는지, 서로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에게 무무카케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냈다.


힘의 우위는 여전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이들의 태도에 솟아오르던 자신감은 사라졌다. 대신 왠지 모를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아니다! 있을 수 없어! 말도 안 된다고! 초월자마저 상대했다는 건국왕을 이길 리가 없어! 그 마왕마저 물리게 한 존재라고! 그런 존재를······ 넘어선다는 건 있을 수 없어!”


의태 하기 전에는 반신반의했으나, 몸소 되어보니 건국왕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었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정말 대단하여 인간임에도 경외심을 품게 할 정도다.


‘그런데 그것을 한낱 쓰레기 보듯 대한다고?’


무무카케는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었다.


이만한 존재를 꺾을 자가 인간에게 존재한다니. 인정 못 한다. 절대 인정할 수 없다.



“으아아아!”


범인은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 그건 적과 청색만이 남은, 모든 것이 정지한 정숙의 세계이다.


무무카케조차도 건국왕의 기억이 알려주어서야 안, 선택받은 자만이 내디딜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경지였다. 괜히 장로가 어렵사리 구한 특급의 소재가 아니랄까, 감히 인간이 대적 할 수 있으리란 생각조차 안 들었다.


즉, 이것은 육체로 하는 궁극의 마법―― 투기술이었다.


그 궁극의 투기술을 사용하기 위해 무무카케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하아. 다들 적청에 도달하면 자신감이 끓어 넘치나? 왜 이렇게 들 호전적으로 되는지 모르겠네. ······에르, 내려줘요. 폴스도 물러나 있으렴.”


맥 빠지게 말한 이스피리아는 느긋하게 멀대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 넘치는 여유가 안 그래도 커져 있던 무무카케의 공포를 극대화했다.


정말로 건국왕을 넘는다고?


만일 그렇다면 눈앞의 이 조그마한 계집은 초월자를 초월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니아니!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서야 가당키나 하겠는가!’


불안을 불식시키고자 무무카케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금세 만든 육체지만 상관없다. 도플갱어의 능력은 갓 만든 육체조차 최상의 상태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의태한 건국왕의 육체에 가득 담긴 마력이 무무카케의 뜻에 호응하여 폭발하듯 날뛰었다.


그리고 이내 세계는 멈췄다.


――이스피리아도.


‘하핫! 역시 허세였어! 꼼작도 못 하잖아?!’


하지만 방심은 금물. 무무카케는 단숨에 숨통을 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돌진했다.



“와우. 무기도 없이 알몸으로 달려드네. 암만 다급하다지만 장비를 갖추는 건 기본이거늘. 쯧······. 여차하면 풀 세팅을 갖출 시간쯤은 주려 했는데.”


뭐라고? 말을 한다? 이 정지된 세계에서?


의문에 휩싸이면서도 무무카케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저 이스피리아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만을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발은 멈출 테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신성 대극격(Nova Smite)]!’


한 줄기의 빛과 함께 벌건 소형 운석이 내리꽂힌다.


정체는 날아 차기에 불과했지만, 투기술이 발동된 [신성 대극격]은 달리 형언할 도리가 없을 만큼의 맹렬한 파괴력과 열을 담고 있었다.


폭음과 적백의 빛이 산란한다.


극한에 도달한 일격이다. 선과 악은 가리지 않는다. 앞에 서는 모든 걸 소멸하는 절대적인 무력이다. 생물의 한계를 초월한―― 8급 마법에도 달할 투기술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렇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자, 정해진 법칙이다. 예외란 없다.


분명 그러했건만······ 건재했다.


이스피리아라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업을 이룬 저 괴물에겐 통하지 않았다. 소멸하지도, 쓰러지지도, 녹아내리지도, 뒤로 밀리지도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너무 믿기지 않아 선 채로 죽었나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방어조차 하지 않은 이스피리아에게서 살아있는 자의 특권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핫! 역시나 그랬어······. 이만한 마력이 사용됐음에도 1단계 마력이라면 전혀 데미지가 없어. 하물며 물리법칙마저 무시해 밀려나지도 않아. ······그래, 이것이 ‘무효’인가. 그저 살짝 아픈 게 끝.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구먼!”


빛이 사그라든다. 아직 적은 멀쩡함에도 아무 소득도 없이······.



“고마워요. 어째선지 주위 사람들은 제게 이만한 공격을 하려 들지 않아서 곤란했었는데, 덕분에 한 가지 실증이 끝났어요.”


평온하다. 깊은 만족감만이 느껴지는 태평한 목소리였다. 결코 생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 같지 않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는 뭐가 남았겠는가.


무무카케는 그저 뻣뻣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아 님. 외람되오나, 이다음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아무리 명이라지만 하찮은 생물 따위에게 리아 님이 더럽혀지는 모습이 보기 힘듭니다.”


조용히 끼어든 어두침침한 녀석의 언행은 차분하였으나 까드득, 직도의 손잡이를 잡은 아귀에게선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졌다.


아니, 단순한 힘 같은 게 아니다.


건국왕으로 의태한 지금으로서는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주변이 일그러져 가는 감각이 들게 하는 저 녀석은 끔찍한 사악이라고.


잠자코 내버려 두면 무언가가 눈을 뜨고 준동하리라.


세계에 이런 사악이 풀려나선 안 된다.


명확히 그 사실을 느끼면서도 무무카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멍청하니 부하 괴물이 우화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이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단언컨대 없다. 오리지널 건국왕이 온다고 하여도 불가능하리라.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한 사람.



“됐구나. 기왕 시작한 거 내가 끝을 봐야 하지 않겠니?”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어두침침한 놈은 곧장 움직임을 멈췄다.



“하, 하지만, 리아 님······.”

“정말 괜찮아. 나로서는 도움만 받았잖니. 오히려 감사를 전할 판국에 먼지 좀 뒤집어쓰는 게 무슨 대수라고. 그렇지 않니?”

“과연! 모두 리아 님께서 주도하신 흐름이었습니까?!”

“어, 그렇게 볼 수도 있나······? 어쨌든 내가 대화했으니?”

“오오. 이 폴스. 눈앞에서 직접 리아 님의 심연처럼 깊은 지혜를 목격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척하고, 어두침침한 놈―― 폴스가 가슴에 손을 대고는 정중히 머리를 조아렸다.


이스피리아는 넋이 나갔달까, “어, 그러니······.”라며 맹한 소리를 했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다.


이쪽의 마력은 텅텅 비었거늘 이스피리아에겐 상처 하나 만들 수 없었다. 저 괴물에겐 건국왕의 모든 걸 담은 일격이 그저 거친 바람이 분 정도에 불과했다. 전투조차 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존재가 있어도 되는 건가······.



“너흰 누구냐······?”


마음이 완전히 꺾인 무무카케는 힘없이 물었다.



“건국왕과 맞설 수 있는 존재는 단신으로 수백만의 외적을 멸했다고 하는 갈라사르의 마녀, 세인트리안의 정신적 지주이자 현재의 기반을 닦은 교황, 개인주의가 강한 마족들을 오직 힘만으로 한데 모은 마왕, 이 셋만이다. 인간에게 그러한 존재는 없다. ······아니, 이제 인간에겐 건국왕을 아득히 능가하는 존재가 있어서는 안 돼. 너는 대체 누구냐?”

“이스카르와 필리아의 딸인 이스피리아에요. 평범한 인간이죠. 조금은 특이한 이력도 있기는 하지만······ 뭐, 알려줘 봤자겠죠. 어차피 시간만 낭비할 뿐이니. 그럴 의리도 없고. 그보다 어떻게 하실래요? 더 해보실 건가요?”


피어올랐던 먼지들이 가라앉고 흙내음이 주위를 덮었다.


모든 게 끝났음을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무무카케는 털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처음에 느꼈었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으며······.





더 이상의 전의는 없다. 완전히 투항하려는 것을 느낀 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개방 상태를 해제했다.


‘여러모로 몸 상태를 체크할 수 있어서 좋았네. 확실히 전보다 훨씬 안정됐어. 개방하는 것도 별로 무리가 가지 않고. ······근데, 갑자기 왜 공격한 거지?’


무무카케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라프리트에게 들었을 때부터 수상쩍기도 했고. 그래서 다음 페이즈로 계획이 넘어가는 것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다만 그건 그거다. 포박 과정이 불미스럽기는 했으나 대체로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았는가.


개방한 것도 그러한 연유였다. 빨리빨리 탐문을 마치고, 별로 관계가 없으면 그냥 돌아가려고 한 것이었다. 당연히 무무카케에게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할 마음은 없었다. 뭔가를 꾸미더라도 순순히 보내주려고 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일은 이 나라가 처리해야 할 것이니까.


벨루디스의 사람인 라프리트에게 넌지시 귀띔해줄지언정, 직접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들진 않았을 거다.


그런데 공격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무려 건국왕으로 변신해서.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그 건국왕이라길래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가짜나 허풍도 아니었다. 살펴본 마력레벨은 무려 464였으니. 얼굴도 그렇고 아마 진짜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건국왕님의 마력레벨은 알려진 것과 달리 580 정도였겠네. 어쩌면 그보다 더 위거나. 근데······ 잘생기긴 했지만 레온과 레오노반 씨랑은 별로 안 닮았네.’


뭐,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보다 무무카케의 처리가 문제다. 이젠 그냥 보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리아 님, 어떻게 처리할까요?”

“으음. 일단은······. ······저기, 에르. 주변에 결계 좀 쳐줄래요? 꽤 강력한 걸로요.”


고개를 끄덕인 에르는 곧장 [차원단절]의 결계를 펼쳤다.


리아는 2단계의 마력을 몸에서 방출했다. 쭉쭉, 공간을 가득 메울 정도로. 일부러 연하게 푼 이유는 자칫 신력을 못 느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빛조차 보이지 않자 허둥대던 무무카케는 헉, 하고 숨을 삼켰다.



“당신의 처우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우선 신병을 확보하려고 해요. 포로라고 봐도 좋아요. 진득하니 심문할 거예요. 일단 공격당했으니. 다만 날뛰는 건 별로 바라지 않아요. 솔직히 귀찮거든요. 그래서 만약 저항하거나 날뛰려는 낌새가 느껴지는 그 즉시 죽일 거예요. ――아니다. 당신의 경우 들어야 할 정보가 있으니까, 죽지 않는 선에서 죽음과 비슷한 고통을 심어줄 예정이에요. 자결하려고 해도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테니 포기하고요. ······질문 있나요?”

“넌―― 아니, 당신은 인간들의 뭐지?”

“무슨 소리죠?”

“인간에 대한 당신의 생각이 어떤지를 묻는 거다. 만약 인간들에게 위기가 닥쳤다고 하면, 당신은 어찌 행동할 거지?”


묘한 질문이었으나 상대는 진지하다. 리아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글쎄요······. 아마 천재지변이라면 조금은 도울 거라고 봐요. 다만, 인재로 인한 사건 같은 것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저와 친구들, 제 고향에 피해가 오면 또 다르겠지만.”

“왜지? 인간의 위기이니 돕는 게 당연할 텐데?”

“그게 왜 당연해요?”


왠지 놀란 기색인 무무카케에게 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저는 써먹기 좋은 해결사가 아니라고요? 제가 뭐라도 되는 것도 아니고 왜 괜히 끼어들어요. 본인들이 저지른 일은 본인들이 처리해야지. 호의가 계속되면 둘리――가 아니라, 권리가 된다는 말도 몰라요? 하나 도와주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도와달라 아우성칠 거예요. 전 느긋하게 지낼 예정이라 그건 사절이네요.”

“네 주변이 그걸 받아들이겠나?”

“안 받아들이면 어쩔 건데요. 내가 안 하겠다는데. 정 귀찮게 굴면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에요.”

“멸하더라도 상관없다는 거냐?”

“본인들이 저지른 일 때문이라면 그래도 된다고 봐요. 관계도 없는 저에게 떠넘기지나 않았으면 하네요.”

“어찌 관계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지?”

“제 고향은 800여 년이 넘게 다른 곳과 교류가 전혀 없었거든요. 가끔 외부에서 남편이나 아내를 데려온 경우가 있다고는 하는데, 그 외에는 완전히 단절됐죠. 800년 더 전에도 분란하나 없이 서로 도우며 잘 지냈다는 기록도 있고요.”

“그렇군······. 당신은 이 삼국 근방의 인간이 아니로군?”

“네. 제 고향은 멀리―― 거리로 보자면 되려 마국과 인접한 곳이에요. 그래서라는 건 아니지만, 여기 삼국이 어찌 되든 신경 쓰지 않아요. 세상에 인간만 사는 것도 아니잖아요? 당신이나 다른 종족들도 무수히 살고 있고. 인간이 없어도 이 세상은 멀쩡히 잘만 돌아가겠죠. 자연의 섭리란 그런 것이니. 물론 그렇다고 순순히 죽을 마음은 없어요. 제게 불똥이 떨어지면 치울 거예요.”

“그런가.”

“대답이 됐나요?”

“그래. 포로이건만 성실히 답해주어 감사한다.”


정중한 어투였다. 제대로 고마워한다는 것도 느껴진다.


억압하는 느낌인지라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는데 잘 마무리된 것 같다. 2단계 마력을 내뿜어 압도적인 역량 차를 보여준 것도 헛되지만은 않은 듯하여 잘 됐다.


리아는 마력을 회수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에르, 해제해줘요. 그리고 옷도요.”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리아는 주저앉아 있는 무무카케에게 갔다.


무무카케는 에르의 마법으로 한순간에 옷이 입혀져 잘생긴 마을 청년처럼 보였는데,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시선을 맞췄다. 참고로 옷은 [생성]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면 이제 솔직하게 터놓고 말씀해주실래요?”

“그 전에 약속 하나만 해주게―― 아, 아니, 해주십시오.”


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의 폴스가 맞이해줬다.


그러나 찰나의 순간 리아는 보았다. 폴스가 고개를 꼬고 감정이 사라진 눈으로 지긋이 무무카케를 보던 것을······.


곁눈질로 보니 무무카케도 폴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으음. 넘어가야 하나?’


솔직히 깍듯이 대해줘 봐야 곤혹스러울 따름이지만 폴스는 제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것일 수도 있다. 아까는 제법 화가 난 듯하고.


고심하던 리아의 손은 폴스에게 들렸다.


결론을 낸 리아는 대수롭지 않은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말씀해보세요. 약속 받고 싶은 게 뭐죠?”

“안전입니다.”

“어, 네. 당신의 안전은 보장하도록 하죠.”

“그게 아닙니다. 동족들의 안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그들을 멸하지 말아 주시길 간청드립니다.”

“아까 자결하려던 것도 그렇고, 혹시 아까 인간에 관해 물으신 거랑 연관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으음······. 알겠어요.”

“정말이십니까?”

“네. 구태여 나설 마음은 없어요. 제게 무슨 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저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손대지 않을 것을 맹세하죠.”

“······믿겠습니다.”


무무카케는 무릎을 꿇더니 조심스레 머리를 숙였다.


아직은 경계한다는 게 보이기는 한다. 미세하지만 몸도 떨고 있고. 그렇지만 관계상 어쩔 수 없기는 하다. 일단 말을 들어준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러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도플갱어에 대해서 말해주세요!”

“저와 동족이 꾸미······ 하?”

“도플갱어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리 따라 할 수 있는 건가요?! 심지어 마력레벨조차 올라가다니 너무 신기하잖아요! 마력도 갑자기 생겨났고! 소재만 있으면 마구마구 따라 올라갈 수 있나요?! 한계 같은 건 없어요?!”

“어, 그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무무카케. 그제야 리아는 현재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확실히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못하다.


단숨에 생각을 마친 리아는 덥석 무무카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가죠!”

“저, 저기, 어딜······?”

“어디긴요! 대화를 나눌 곳이죠! 아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얼굴도 바뀌었으니 데인 선배 씨는 못 알아볼 거예요.”

“······예?”


반응이 시원찮지만 상관없었다. 잔뜩 흥분한 리아는 무무카케를 이끌며 신난 발걸음으로 지하창고를 나섰다.


못질로 막혀있던 문도 리아를 막을 순 없었다. 손쉽게 밀어젖혀 버리고는, 후드득 떨어지는 판자 따윈 눈길도 주지 않고 냉큼 [발판]을 만들었다. 들어왔을 때의 배상 문제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자자. 빨리빨리 돌아가 볼까요?!”


그렇게 어리둥절하는 무무카케와 함께 모두를 태운 [발판]은 리아의 기분처럼 평소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나아갔다.


작가의말

도플갱어 겟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쪄, 쪄 죽습니다...

환경문제가 심각하다더니 날이 갈수록 덮습니다

정말 쪄 죽는 게 아닐지 걱정까지 드네요...

여러분들도 열사병 조심하시며 몸조리 잘 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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