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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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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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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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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202

DUMMY

베르다드 3학년의 졸업식.


경사스러운 이날은 벨루디스의 중신―― 파라디우스 공작이나 벨루디스 국왕이 직접 행차하여 훈화의 말을 남긴다. 이건 베르다드가 세워진 시기부터 존재하던 오랜 전통으로, 만약 벨루디스의 왕자가 재학 중이라면 대신 그 역할을 맡는 게 관례였다.


아마 당대 왕자들에게 관록을 쌓게 하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현재는 타국의 유학생들이 늘어남에 따라 유력 자제들에 대한 주도권과 영향력을 기른다는 성향이 더 강해졌다.


이러한 이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솔직히 귀찮다.


그런 생각을 하며 제1 왕자, 레오노반 디안 벨루디스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국왕을 대신하여 단상에 올랐다.


단상에 오른 레오노반은 대강당에 모인 인원을 쭉 훑어봤다.


‘흐음. 리아 양은······ 역시 오지 않았나?’


재학생의 참가 여부는 강제가 아니다. 완전 자율로, 오고 싶으면 오는 것이다. 그리고 참가하는 재학생의 수로 당대 3학년의 명망과 인망의 정도를 대략적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로 보자면······ 이번 졸업생은 글렀다. 평민 재학생은 거의 전멸했다시피 하고, 몇 없는 귀족마저도 정권에서 뒤처진 떨거지들만이 전부다. 그저 아슬아슬한 연줄을 지속시키기 위해 나왔을 뿐이었다.


애당초 유력 귀족 가문의 자제가 없는 탓이기도 하지만······, 이 정도나 되면 꽤 처참하다.


향후 이름을 떨칠 녀석은 단연코 없다. 삼국이 모두 모인―― 대국 정세를 축소 시킨 이곳에서 아무 활약도 못 했던 놈들이 아닌가. 본 무대에 오른다 한들, 갑자기 두각을 드러낼 리도 만무하다.


‘그런 주제에 기대하는 꼬락서니라니.’


기대란 찬란하게 빛나는 미래. 녀석들이 찾는 건 자신에게로 올 연줄이었다.


졸업식이 한참인 와중에도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보면 확실하다. 저들은 현재 누구보다도 영향력이 강한 리아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다.


도대체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낙관적이다. 3학년과는 특별한 연도 없는 그녀가 굳이 이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리가 없는데.


저들의 심정이 아예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리아의 영향력은 적지 않다. 지나가다 말을 걸었을 뿐인 사소한 일이라도 정권에서 멀어진 귀족들 사이에서는 나름의 힘이 된다. 졸업식 같은 장소에 일부러 찾아와주었다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리아는 정이 많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다. 찾아올 가능성은 높았고, 인사를 나눌 가능성 또한 아예 없진 않았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다. 그녀는 분명 정이 많다. 인격도 나무랄 데 없는 호인이다. 그건 확실하다. 그러하기에 다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


하지만 다들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녀는 무조건적으로 정과 호의를 베푸는, 그런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음과 끊음이 확실한 부류로, 자신을 이용하려 드는 자에게는 조금도 자비를 베풀지 않는 냉철한 면모를 지녔다. 그건 귀족과도 같은―― 위에서는 자가 지닌 사고다. 절대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헛된 바람이다. 저러한 바람을 품는 것 자체가 글렀다는 증표였다.


특히 심한 녀석은 그녀가 주최한 방과 후 모임에 이따금 참석했던 놈들이다. 저놈들은 이미 그녀가 온 것도 모자라, 마치 자신의 것이 된 양 눈살이 찌푸려지는 욕망을 품고 있다.


실로 교만하다. 상대는 이미 남편과 아이까지 있는 유부녀이건만.


여느 평민처럼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여기는 게 되려 가여울 정도로 어리석다. 그런 게 가능했다면 왕가가 먼저 손을 뻗었을 텐데.


저 자신감의 원천은 귀족이라는 권위에서 비롯된 것으로, 겨우 그딴 이유만으로 본인이 위라고 여기는 꼬락서니가 참으로 안타깝다. 더불어 그런 놈들이 벨루디스의 귀족이라는 게 한탄스럽다.


‘그래도······ 딱히 우려할 일은 벌어지지 않겠군.’


리아를 발판으로 위로 올라선다는, 가당찮은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들 명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녀의 미움을 사면 안 된다고. 인식조차 할 수 없는 전투를 벌인 그녀에게 결단코 적대해선 안 된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욕망을 실천하는 놈이 없다. 막상 그딴 미친 짓을 하자니 엄두가 나지 않아, 여기서 절대 나타나지 않을 그녀를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다.


큰 문제는 없겠다며 안심한 레오노반은 평온하게 송사를 마쳤다.


이것으로 끝. 학원장인 리카드가 올라 송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졸업식을 마친다. 하지만 올해는 왕자가 둘. 무척이나 드문 연년생의 왕자들이 베르다드에 입학하여 아직 그의 차례가 아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아아.”


정중히 고개를 숙인 전속 사용인, 파세. 그녀의 옆엔 중년의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는데, 순간 기척을 흐트러뜨렸다.



“의외인가, 빌타스?”

“시, 실례했습니다, 전하.”

“책하는 게 아니니 송구할 것 없다.”


동생, 제2 왕자 레온하트의 집사인 빌타스는 그 직책이 부끄럽지 않을 기품으로 조용히 예를 표했다.



“변하셨군요······.”

“아니. 나는 그대로다. 그저 힘을 뺐을 뿐. 너도 알다시피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아. 오히려 변했다는 건······ 저런 거겠지.”


레오노반은 단상에 올라 연설하는 동생을―― 제2 왕자, 레온하트 디안 벨루디스를 보았다.


제법 늠름하다. 목소리도 다부져 힘이 넘친 데다, 몸에 두르고 있는 분위기마저 묵직한 무게감이 존재했다.


이전에도 당당하긴 했으나 저러한 면모는 볼 수 없었다.


‘마치 사람 자체가 달라진 듯한 관록이로군. 지금이라면 무능한 왕자라는 꼬리표도 뗄 수 있겠어.’


분명 좋은 일이다. 왕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이긴 하나, 형으로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우려스럽다.


앞서 말했다시피, 인간이란 쉽게 변하는 생물이 아니다. 유력한 왕세자 후보로서 무수히 많은 유형의 인간을 만나 보았기에 레오노반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만약 변했다면, 그만큼의 정서적인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바뀌었다는 소리다.


여태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레온하트는 가신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고, 신분과 관계없이 능력 있는 자를 존중하는 배포도 지녔다. 다소 여린 면이 있으나 군주로서의 덕목은 충분했다.


왕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도 주변인들이 받쳐주면 나라는 돌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군주로서 레온하트는 결코 나쁜 재목이 아니었다.


그런데 바뀌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과연 길조일지 흉조일지······.


레오노반은 단상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듣기로는 마르티즈 후작과 밀담을 가진다는 듯한데.”

“모르겠습니다. 도통 말씀을 안 하시는지라.”

“후작의 야심은 너도 알 터. 단호히 진언해서 말려야―― 아니, 소용없었겠군.”

“······.”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빌타스는 세력이 없다시피 할 때부터 레온하트의 곁을 줄곧 지켰던 충신이다. 그러한 가신이 진언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저 묵살 되었을 뿐······.



“뭘 노리는지 모르겠군.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조금만 기다렸다 와해한 후작의 파벌을 흡수하면 그만이거늘. 그 잠시를 못 참고 접촉하여 기회를 날려 먹었다라······. 나로서는 무너져가는 후작 파벌의 새 구심점이 되어준 저의가 짐작되지 않는군.”


구심점은 구심점이다. 후작 파벌은 후작의 것이지 결코 레온하트의 세력이 되는 게 아니다.


막말로 좋을 대로 이용만 당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어딜 봐도 레온하트에게는 이점은커녕 리스크만 잔뜩 껴안는 우책이다.


무능력하다는 소릴 듣긴 해도 레온하트는 엄연히 왕자로서 철저히 교육받은 왕족이다. 마법만 못 쓴다 뿐이지, 지천으로 널린 머저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뛰어나며, 정치적 감각 또한 우수하다. 본인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절대 모를 리가 없다.


‘그만큼 레온하트에겐 후작 파벌이 가치가 있다는 것이겠지만, 과연 어떨지는······.’


많은 의문만을 남긴 채 송사가 끝났다.


리카드와 교대하듯 단상을 내려온 레온하트는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보며 걸어왔다.



“수고했다. 좋은 연설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형제간의 대화는 이게 전부였다.


아쉽진 않았다. 애당초부터 정적 관계였으니. 이제 와 형제의 우의를 다지기도 원치 않았으니 사무적인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졸업식이 끝났다.


왕족으로서의 의무는 여기까지였다. 딱히 섭외할 인재도 보이지 않던 터라 레오노반은 즉시 돌아가기로 했다.


레온하트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기다리는 자라도 있느냐?”


무심코 물으니 레온하트가 지긋이 바라본다.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는데, 어쩔 수 없었다고 보았는지 지나가는 어투로 대답했다.



“리아를 찾고 있었습니다.”

“······응?”

“왜 그러십니까, 형님?”

“아, 아니다. 리아 양을 찾는다고?”


순간 레온하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찰나였지만, 레오노반은 “리아 양”이란 말 뒤에 분위기가 변한 것을 정확히 감지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고, 레온하트도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녀라면 분명 왔을 터인데 찾질 못하겠군요.”


그리 말하며 레온하트는 재차 대강당을 둘러봤다.


······역시 잘못들은 게 아니었다.


놀랍다. 정말 너무 놀랍다.


레온하트는 그녀의 방에도 방문하는 친밀한 사이이다. 리아와 거의 면식이 없는,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3학년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분명 왔을 거라 확신하고 있다. 저들과 똑같이.


이거 조금은 달리 평가해야 할 거 같다······.


레오노반은 바삐 그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유의했다.



“그녀는 오지 않는다.”


뚝뚝, 녹슨 경첩마냥 레온하트의 고개가 움직였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리아 양은 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걸 어찌 형님이 아십니까? 그녀가―― 리아가 ‘형님에겐’ 가르쳐 준 겁니까?”


찌릿――


몸을 울리는 감각에 레오노반은 반사적으로 마법을 쓸 뻔했다. 곧장 멈췄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동생을 살해한 왕족으로 역사에 기록됐을 거다. 그만큼 진심으로 마력을 끌어올렸었다.


‘치욕으로 남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이건······.’


손수건을 꺼낸 레오노반은 동요를 감추며 흐른 식은땀을 닦았다.



“아니. 그녀에게 직접 들은 게 아니다.”


그리 말한 레오노반은 턱짓으로 지시를 내렸다.


신호에 파세가 한 걸음 나와 정중히 머리를 숙였는데, 그녀 또한 레온하트의 그것을 느꼈는지 내심 긴장하는 게 보였다. 그렇지만 달리 제1 왕자 전속이 아니다. 머리를 든 파세는 기품있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전하의 말씀대로, 이곳으로 오는 도중 급우분들의 이야기가 들려와 알게 된 것입니다.”

“급우?”

“그래. 다들 아쉽다는 듯이 떠들어대는 통에 그녀의 거취를 파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어째서 이러한 걸 묻는지, 의도가 무엇인지 떠보려 하지 않았다.


레온하트는 아무 말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조용히······ 졸업생들이 떠드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파세, 돌아간다.”


더 있어 봐야 좋은 건 없다. 레오노반은 빌타스에게 눈짓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렇게 밖을 향해 걸을 때였다. 분노의 찬 외침이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안 오는 거야?!”


마치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듯 남자는 울부짖었다. 주변에서 왜 그러냐며 말려도 소용없었다. 남자는 머리를 움켜쥐고는 미친 사람처럼 광분하여 소리쳤다.



“저자는······ 분명 데인이었지. 나이젤 백작의 서자인. ······근데 뭐 하는 짓이지?”


베르다드는 삼국 모두가 모인 장소다. 추태를 감추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제법 권력이 있다고 한들 그건 자국에서만 통용되기 때문이다. 다른 두 나라에 영향력을 끼치기란 어렵고, 결국 이야기가 나돌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베르다드에 모인 건 엘리트들이다. 추후 각 나라의 요직에 앉을 인재가 많은 터라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볼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에 귀족들 사이에선 일절 괴롭힘이 없다. 제아무리 직급 차이가 나더라도 미래에는 아군이 될 수도 있기에 원한을 사는 짓을 하지 않는다. 짓궂은 장난조차도 없다. 완벽히 자신을 감출 수 있다는 확신이 없기에 사서 척지려 들지 않는다.


평민에게도 그렇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발목이 잡힐지 모르기에, 대놓고 무시하는 경향은 있으나 결단코 괴롭히지는 않는다.


이 졸업식도 마찬가지다. 사교의 장 마지막 페이지에 자신과 가문이 좋은 인상으로 기록되기 위해 특히나 공을 들인다. 자국인들만 있는 파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즉, 다른 날이라면 몰라도, 오늘 이날만큼은 절대 추태를 부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후 각 나라에 돌아간 동급생들의 입방에 오를 테니 말이다.


삼국 전체에 추태가 퍼지는 수모다. 적자라도 용서받긴 힘들 터인데, 서자가 저런 행태를 보인다는 게 레오노반에게는 이해되지 않았다.


‘저 녀석도 모르진 않겠지. 이러나저러나 백작 가의 인간이니.’


하지만 그런데도 데인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날 택하지 않은 거야?! 그 덜떨어진 년은 나를 위한 도구잖아?! 내 발아래 무릎 꿇어 아양이나 떨어대는 존재해 불과하다고! ······그래. 그게 옳아. 무언가 잘못됐어······. 설마 그 녀석이 배신을? 아니,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모르겠어······. 어째서 이스피리아, 그년이 내게 오질 않는 거냐고?!”


‘뭐······?’


어떤 헛소리를 하든 상관없었다. 그래봐야 결국 자신의 평판만 깎아 먹을 뿐이니. 주위도 그러니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하지 않았던 거다. 휘말려서 좋을 건 하나 없으니.


하지만 누굴 향한 헛소리인지 알게 되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대강당은 왁자지껄했던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일순 적막해졌다. 말리는 시늉을 하던 자들도 사색이 되어 황급히 데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도 데인은 아예 주위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 계속해서 소리쳤다.



“이스피리아, 그년은 내 거야. 정점에 올라설 나의 도구라고! 이것만―― 이것만 있으면 가능해! 남편과 아이가 딸린 건 흠이지만, 그 정도는 넘어가 주지. 난 관대하니까!”


무언가를 움켜쥔 손을 들어 올린 데인은 크게 웃어 재꼈다.


‘미친 것도 정도껏 미쳐야지.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나?’


리아는 엄연히 국왕의 칙명으로 정해진 최고 국빈이다. 그녀에게 행해지는 무례는 벨루디스 왕가를 향한 모욕임과 동시에 수치다.


이 이상 저딴 헛소리를 하게 두어선 안 된다.


왕족의 일원으로서 레오노반은 폭주하는 데인을 막고자 움직였다.


하지만 한 걸음을 떼는 순간―― 대강당을 한순간에 가로지르는 인영이 있었다.


‘레온하트?!’


엄청난 속도임에도 레온하트는 인파를 물 흐르듯 지나쳤다. 마지막 관문인 사람들의 벽도 가볍게 훌쩍 넘어 데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치잉.


순식간에 검을 뽑아 데인을 벴다.


아니, 베지 못했다. 레온하트의 칼날이 데인을 베기 직전, 보호막이 생겨나 가로막았다. 하지만 워낙 찰나였던 터라 주위는 이를 눈치채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그때 소란을 뚫는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거기까지입니다, 전하. 검을 거두십시오.”


목소리가 발해진 건 사람들의 위. [비행]으로 떠오른 리카드가 백금의 작은 지팡이 내밀고 있었다. 마광석이 푸른 빛을 내뿜고 있는 것을 보면 보호막은 그가 친 것일 터다.


레온하트도 이를 보고는 눈가를 가늘게 했다.



“죄인을 보호하다니 무슨 짓인가, 클로디아노 경? 그리고 언제까지 위에서 내려다볼 생각이지?”

“실례했습니다.”


정중히 예를 표한 리카드는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속박].”


주저앉아 있던 데인의 주위로 마법의 빛이 담긴 사슬이 나타나 그의 몸을 뒤덮었다.


한순간에 구속된 데인은 애벌레처럼 발버둥 쳤다.



“무슨 짓이냐?! 이 몸은 장래――”

“――[침묵].”


[침묵]은 본래 일시적으로 말을 못 하게 하는 마법으로, 현대 마법전에서는 발동어를 차단하는 이 [침묵]의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투기술조차 쓰지 못하니 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방비는 필수였다. 고위 귀족의 경우 철저하게 대응 훈련을 하고, 한 번에 당하지 않도록 마도구마저 몸에 지닌다.


하지만 단번에 당했다. 그것도 모자라 데인은 아예 의식마저 잃고 기절하고야 말았다.


‘이게 리카드인가. 나라면 과연 저항할 수 있었을까.’


고위 마법사일수록 발동이 빠른 건 기본이지만 실로 격이 다르다. 술식 마법사임에도 뒤처진다는 느낌조차 전혀 들지 않는다.



“전하. 검을 거두시길. 데인 도미에 나이젤의 신변은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녀석은 왕가를 모욕한 대역죄인이다. 왕족인 나에게는 즉결 심판할 권리가 있다.”

“물론 그러하십니다. 하지만 이미 포박했습니다. 배후가 있는지, 어떠한 목적이었는지 알아낸 다음 심판하셔도 늦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 말하면서 리카드는 데인이 쥐고 있던 물건―― 조잡하기 그지없는 인형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것을 잠시 보던 레온하트는 검을 되돌렸다.



“낱낱이 밝혀내도록.”

“예. 심문에는 저도 참석할 터이니 염려 놓으시길.”

“알았다. 일임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신하로서 머리를 숙인 리카드를 지나쳐 레온하트는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에서는 위풍당당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그야말로 왕자에 어울리는 품격이다.


연설 때도 그랬지만, 여태와는 달라진 모습에 남겨진 사람들은 레온하트가 나가자마자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달라졌군.”


무엇이 계기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레온하트가 달라진 건 명백하다.


다만, 유감스러웠다.


엄청난······ 실로 엄청난 악의였다. 질척질척 끈적하고, 구역질 날 정도로 짙은 그건 분명 좋지 않은 쪽이었으니 말이다.


‘질투······인가.’


수습은 교직원들이 할 터. 그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레오노반은 대강당을 나왔다.



“파세, 아바마마께―― 폐하께 기별을 보내거라.”


내밀히 말한 주인의 명에 파세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내려가는 시야. 그 시야가 다시금 올라갈 때쯤부터 느껴지는 조금 차가운 공기. 거기에 서린 습기를 머금은 흙내음과 여러 들풀의 향, 그리고 그 속에 섞여 풍겨오는 약초의 쓴 향까지. 모두 다 리아에겐 너무나도 친숙한 것들이었다.


샤아아······.


밭과 잎사귀들이 넘실거리는 쾌청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드디어 시야가 완전히 올라왔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어, 어서 오십시오.”

“어서 와라, 리아!”


열렬한 목소리들이 환영해준다. 그들은 너무나도 보고 싶었던 나트알의 주민들로,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 광장을 빙 두르고 있었다.



“다, 다들 어떻게 알고······.”


일부러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깜짝 이벤트를 해주려고 기획했기 때문이었다.


그랬는데 반대로 서프라이즈 환영을 받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던 리아는 넋이 나갔는데 함께 온 이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넋을 잃고 환영해주는 주민들을 둘러보기 바빴다.


그러다 한 명이 경악하여 소리쳤다.



“모, 몬스터?!”


소리친 사람은 유즈라로, 그녀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는 검을 빼 들었다. 다른 이들도 놀라고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들이 발하는 적의의 끝에 있는 건 다종족으로 이루어진 몬스터의 군단.


이 뜬금없는 몬스터의 군단은 일전의 체험학습에서 습격을 강행했었던 바로 그들이다. 세스를 비롯하여 모두를 함께 보냈었는데, 유즈라는 그들에게 검을 겨눈 것이었다.



“――약속. 잊지 않았죠?”


몬스터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 목숨을 노린 사이라는 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데려온, 이 마을의 주민이었다.


기존 주민들 간의 풍파라도 있지 않은 한 그건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적의를 드러낸 것이다.


리아는 저도 모르게 싸늘한 목소리가 나왔다.



“공격당하기 전까지는 공격하지 않는다. 이걸 지키지 못하면 돌아간다······. 분명 오기 전에 그렇게 약속했었죠?”

“검을 집어넣거라, 유즈라.”

“네네. 야, 약속했잖아요.”


베르그에 이어 로즈도 재촉했으나 유즈라는 망설였다.



“하,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다. 애당초 따라오겠다고 억지를 쓴 것도 우리. 약속에 따르겠다고 한 것도 우리다. 신변을 염려해주는 마음은 고마우나, 이 이상 창피를 주는 게 아니다. 정 따르지 못하겠거늘 돌아가거라.”

“······실례했습니다.”

“그 사과는 내가 아니라 이스피리아 공과 주민들에게 하거라.”

“옛!”


검은 집어넣은 유즈라는 리아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주민들에게도 검을 겨눠 미안하다며 기사도에 걸맞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마력을 끌어올렸던 리블리지와 비비안도 알아서 자수하여 머리를 숙였다.


이들의 사과를 받은 주민들은 얼떨떨하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내 너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도 있지 너무 신경들 쓰지 마이소.”

“갑자기 둘러서면 놀랄 수도 있지.”

“그래그래. 우리도 리아가 이리 많은 사람을 데려올 줄은 몰라서 놀랐고 말이여. 근데 밖은 우리 마을과는 좀 다른 가벼? 마수 중에서는 괜찮은 녀석도 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겨. 너도 맨 처음 쟤들이 왔을 때는 눈이 뒤집힌 주제에.”

“자, 잠깐.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남이 모처럼 좋은 소릴 하는데!”

“오~ 멋진 처자인데? 혹시 기사라는 양반인가?”

“근데 진짜 땅에서 나타났네. 신기하구먼······.”

“다들 찬크에르처럼 뭔가 옷이 화려하네. 불편하지 않나?”

“으이구. 저게 멋이라는 거야. 당신은 줘도 소화하지 못하겠지만.”

“뭐여?! 나도 한 인물 한다 이 말이야!”

“네네. 퍽이나 그러겠네요.”


마이페이스다. 이쪽은 관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저들끼리 떠드는 이 시장통은 되려 리아에겐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게 하였다.


‘정말 다들 변함이 없으시구나.’


따스하게 미소 짓고 있자니 다가오는 무리가 있었다.



“귀환을 환영합니다, 아가씨.”

“고생하셨습니다!”


대표로 인사하는 한 남자의 말에 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반긴다.


제법 그리운 상황이다.


이 조폭 우두머리가 된 듯한 환영이 달리 더 있을 리가―― 최근에 생긴 듯도 하지만, 나트알에서는 달리 없다.


돌아보니 역시나. 정말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



“바지탄스 씨! 그리고 여러분! 다들 오랜만이에요!”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아시리트 씨!”


색색의 꽃들로 장식된 꽃다발을 건네는 아시리트. 상냥한 미소를 본 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다녀왔어요!”

“아, 아가씨?!”


아시리트는 꽃다발을 든 채로 우왕좌왕하며 허둥댔다. 그러나 이내 조심스럽게 마주 안아줬다.



“변함없으시네요. 즐거우셨나요?”

“네! 재밌었어요. 친구도 생겼어요!”

“후후. 그러하신가요.”


마치 떠날 때를 재현한 것 같은 광경이다. 그게 어쩐지 재밌어 리아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는데, 등 뒤에선 놀란 외침이 들려왔다.



“마, 마족······. 몬스터에 이어 마족이라니. 도대체 이 마을은······.”

“유즈라, 저분들이 마족이에요?”

“아, 예. 그렇습니다, 로즈린느 님.”

“배운 이야기랑 많이 다르네요······. 마족은 흉포하고 무섭기 짝이 없어, 인간과는 공존할 수 없다고 했는데.”

“저,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잘······.”

“――어떻게 된 거긴. 그냥 헛것을 배운 거지.”


갑자기 끼어든 한 남자의 목소리.


너무나 손쉽게 배후를 잡힌 유즈라는 화들짝 놀라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는데, 남자는 그런 유즈라는 안중에도 없었다. 대신 태평하게 서 있는 가베인을 쳐다봤다.



“호오······. 꽤 하는데? 이름은?”

“가베인이다.”

“쿠두라와 드라케니스의 자식인 세스타스야. 모처럼의 인연인데, 나중에 한 판 어때?”

“과연. 여섯의 대영웅이었나······.”

“응?”

“혼잣말이다. 시간이 나면 한 수 부탁하지.”

“오오! 사나이답게 화끈하구먼!”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가베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리아가 알기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붙자고 할 호전적인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이름까지 들은 이상 더 볼 것도 없고.



“이, 이번엔 수인······.”

“호인족올시다, 여기사 나으리. 카하하!”


이 사람도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리아는 아시리트와 떨어져 뒤를 돌아봤다. 거기에는 무리를 이끌고 호탕하게 웃는 세스가 있었다. 이곳 주민들과 별 차이 없는 어두운 흰 셔츠와 연한 갈색 바지를 입고.


‘――아, 아니. 위, 윗도리를 입고 있어?!’


물론 윗도리를 권해보라는 편지를 쓰긴 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권유였다. 야생의 이미지가 강한 터라 당연히 귀찮다며 거절할 줄 알았었다. 순순히 입을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무척이나 놀라고 있자니, 눈이 마주친 세스타스가 천천히 다가오며 손을 흔들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응? 뭐가 이상해?”

“어? 아, 아니. 오랜만. 잘 지냈어, 세스?”

“나야, 두 팔 뻗고 잘 지냈지. 다들 친절하고 말이야.”

“몸은······ 괜찮은 거 같네.”

“아,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닌데······.”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 세스. 그의 몸은 확실히 나아 있었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면 이전보다 월등해진 것 같다.



“엄청 강해졌네······.”

“으히히. 역시 알아보는구나. 과연 리아 아가씨야.”

“그야 분위기가 다른걸. 어떻게 한 거야? 도저히 3개월 만으로 오를 수준이 아닌데.”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리아는 내심 경악스러웠다. 살펴본 세스의 마력레벨은 600을 넘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력의 압축도 완벽하여 전신에 2단계 마력이 용솟음치고 있다.


첫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격차다. 솔직히 지금 다시 싸운다면 이전과 같은 여유는 없을 것이다.



“종족 특성이지. 우리 호인족은 실전을 치를수록 강해지거든.”

“에?!”


세스는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사이드 체스트랑 비슷해 보이는 포즈를 취했다.


‘쩌, 쩐다······.’


만화에나 나올 그런 전투 민족이 이 세계에서는 진짜 있단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세스를 비롯, 호인족은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인가.


그야 자랑할 만도 하다. 득의양양하게 웃는 세스는 아니꼽지만, 조금 부러우면서도 동경하게 된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퍽.


뒤통수를 맞고 세스는 휘청거렸다.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세스는 분노하여 희번덕거리는 안광을 흩뿌렸는데, 이윽고 그 눈은 놀라 휘둥그레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언제부터 호인족이 그런 뭔지도 모를 생물체가 된 거냐.”

“하, 할망구? 왜 여기에······? 그 옷차림은 또 뭐야?”

“네가 남말할 처지더냐? 얼빠진 소리를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보가.”


그녀, 델리안은 재차 세스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힘은 담기지 않았다. 살며시 어루만지는 듯한 다정한 꿀밤이었다. 이것을 알아본 세스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맞았다.



“난 너희의 부모다. 무슨 일이 있거든 연락 정도는 하거라. 걱정되지 않느냐.”

“델리안······.”

“······무사해서 다행이다, 세스.”

“응. 미안.”


사과하는 세스와 짐짐 화났다는 듯하면서도 은은하게 미소 짓는 델리안. 영락없는 모자의 모습이다.


여기서 방해하는 것도 운치가 없다.


리아는 조용히 거리를 벌렸다. 둘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그의 무리들도 뒤를 따랐다. 그 사이에는 홀린이 있었는데, 그의 귀를 본 유즈라가 이번에는 “에, 엘프?!”라며 놀라워했다.



“오랜만이에요, 여러분. 잘 지냈나요?”


묻는 말에 하렘의 장녀, 세이라가 대표로 나와 대답했다.



“덕분에.”

“어, 언니, 말투!”


기억하기로 로라샤란 이름의 여성이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다급하게 말했다. 그 다급함에 세이라는 침음을 흘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전에 무례를 저질러 미안합니다. 은인이건만 면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세스를, 저희를 구해주어 감사합니다, 게헤르, 이스피리아.”

“감사합니다, 이스피리아 아가씨!”

《감사드립니다, 아가씨.》


세이라에 이어 하렘의 일동이 재창하며 가슴을 한 번 두드렸다. 마수와 마물들도 알아보기는 어렵지만 호의적인 분위기로 머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리아는 살결이 많이 드러난 전과 달리 평범한 마을 처자 같은 차림새의 하렘을 둘러봤다.


다소 긴장하는 낌새였으나 모두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마주한다.


진심이 전해진다. 여러모로 당혹스럽기는 하나 리아는 순수한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하렘들에 이어 두 남녀가 다가왔다. 한 명은 델리안과 함께 있었던 홀린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백호―― 아니, 백호의 가죽을 통째로 뒤집어쓴 것 같은 소녀였다.


‘상당히 특이한 차림이시네. 판타지다워서 좋긴 하지만.’


비단 리아만 신기한 게 아니었는지 함께 온 사람들의 시선도 쏠렸다.



“그······ 오랜만일세.”

“네. 오랜만이에요, 홀린 씨. 적적한 마을인데 지내기 괜찮았나요?”

“무, 물론. 엘프의 마을과도 비슷한 곳이라 지내기 편했네.”

“다행이네요.”

“으음. 아, 이쪽은······.”

“쿠두라와 드라케니스의 딸인 프리에나라고 해요. 오빠, 세스타스의 혈육이에요.”


이제는 익숙한 호인족 식의 소개를 한 소녀―― 프리에나는 가슴을 한 번 두드렸다.



“게헤르, 이스피리아 공. 구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 은혜는 언젠가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뇨. 저는 아무것도 안 했어요. 때마침 볼 일이 있어 우연찮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었죠. 그러니 은혜라던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사정이 어떻든, 아주머니께 손을 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은인이라 하기엔 충분합니다.”


정중하다. 어린아이라고 무시하는 것도 없다. 예절과는 담을 쌓은 듯한 세스의 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의 바르다. 이런 동생이 있는데, 도대체 세스는 어쩌다가 저 지경이 됐는지 살짝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사실이다. 마음 씀씀이는 고맙지만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리아는 재차 괜찮다고 하려 했는데――



“언제까지 그러고들 있을 거야?”


――한 남자가 끝없이 이어질 사양과 사양을 말리며 중재에 나섰다.


그 그리운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리아는 돌아봤다. 리아의 눈망울은 점차 커졌고, 말릴 새도 없이 내달렸다.


가감은 없다. 리아는 그리운 이에게로 몸을 내던졌다.


뒷일은 안중에도 없었다. 무조건 받아주리라는 믿음만이 존재했다.


파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는 저 청년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동생을 잠자코 지켜볼 리가 없으니까······.



“오라버니!”


팔을 벌려 돌진해오는 리아를 보며 청년, 루데릭은 당황하며 허둥댔다.


그러나 그건 한순간이었다.


진지하게 미간을 찌푸린 루데릭은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포탄처럼 날아오는 리아를 잡았다.



“읏!”


짧은 신음과 함께 루데릭은 땅을 끌며 밀려났다. 그러다 3m쯤을 나아가던 때에 기묘한 감각이 듦과 동시에 리아는 하늘 위로 붕 떴다. 날아오는 힘을 역이용해 날린 것이었다.


힘의 방향을 직각으로 전환한 거다. 굉장한 기교가 아닐 수 없다.


묘한 감탄과 함께 리아는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높이가 꽤 있다 보니 가속도가 제법 붙었는데, 루데릭은 그런 리아를 사뿐히 받아냈다. 몸에 가해지는 충격은 없었다. 그건 모두 루데릭이 상쇄하여 자신의 몫으로 돌렸다.


역시 언제나 툴툴대지만 마음씨 좋은 오빠다. 동생을 팔 위에 앉히는 루데릭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좋지 않았지만······.



“리아, 너――”

“――다녀왔어, 오라버니!”


말이 막힌 루데릭은 기가 막힌다는 양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방긋방긋 웃는 여동생을 이기진 못했다. 한숨을 내쉬고는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서 와, 리아.”


상냥하게 눈웃음 짓는 루데릭.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진짜 오라버니다. 그 실감이 들자 더는 멈출 수 없었다. 리아는 확, 루데릭의 머리를 잡고 볼을 비볐다.



“우헤헤. 진짜 오라버니다.”

“야야. 뜨거워. 살 다 까진다!”

“으히히. 남자답지 않게 부드럽네. 오라버니, 혹시 키는 더 컸어?”

“뭐? 조금 크긴 했나―― 그게 아니라, 인사! 리아, 아직 인사할 사람이 더 있잖아! 그만 좀 해.”

“응응. 오라버니 성분을 좀 더 섭취하고 인사드리러 갈 거야.”

“헛소리 그만하고 당장 인사하러 가!”


뭔가 단호하다.


떼어내려 안간힘 쓰는 루데릭에게 맞서, 압도적인 완력으로 버티던 리아는 그제야 볼을 떼고 고개를 갸웃했다.



“응? 누구에게?”


루데릭은 뜨거워진 볼을 쓸어내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에휴. 조금은 성장한 줄 알았더니.”

“서, 성장했다고······ 아마.”

“신체를 말하는 게 아니니까, 그건 하지 좀 말아 줄래?”


절박한 말에 리아는 가슴을 모으려던 손을 멈춰 세웠다. 어쩐지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든다.



“애 엄마인데 언제 철이 들련지······.”


고뇌가 느껴지는 한숨을 푹푹 쉬며 루데릭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품에 안겨 이동하던 리아는 곧장 인사하란 이들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얌전히 있어. 나처럼 네 무대포 돌진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응. 고마워, 오라버니.”


조용히 입꼬리를 올린 루데릭은 천천히 걸어가 리아를 데려다줬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는 가족들을 향해······.



“저, 다녀왔어요.”

“우리 리아, 어서 오렴.”

“재밌었니, 리아야?”


부모님―― 이스카르와 필리아는 건네받은 리아를 포근히 안아줬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은 무척이나 큰 애정이 담겨있었다.


겨우 반년이었다. 그러나 마치 수십 년 만에 재회한 기분이다.


리아는 눈을 감아 따스해지는 가슴의 고동을 만끽했다.



“흠흠.”


한동안 부모님을 끌어안고 있으니 누군가가 헛기침을 했다. 그것엔 무척이나 섭섭하다는 기색이 가득 담겨있었다.


뭔가 싶었던 리아는 눈을 떴고, 부모님 어깨 너머로 남자가 서 있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어머니, 필리아와 똑같은 금발적안의 남자였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 걸맞은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시선이 마주치자 입가가 살짝살짝 꿈틀거렸다.



“할아버지!”

“오오, 리아야!”


손녀의 부름에 남자, 에이브안은 곧장 얼굴색이 밝아졌다. 그리고는 크게 두 팔을 벌렸다. 냉큼 넘기라는 시선을 부모님에게 슬쩍 보내며.


필리아는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차마 보내주지 않을 순 없어, 따가운 눈총을 보내면서 리아를 에이브안에게로 넘겨줬다.



“다녀왔어요.”

“그래그래. 고생했다. 교복이 잘 어울리는구나.”

“헤헤. 고마워요, 할아버지!”


리아의 미소에 에이브안은 함락. 근엄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풀려 그의 광대는 누가 봐도 알아차릴만큼 크게 승천했다.


덩달아 신난 리아는 학원에서의 근황을 희희낙락 떠들어댔다. 에이브안도 인자한 얼굴로 그러냐며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를 들어줬다. 할아버지가 즐거워하니 리아는 더욱 신이 났고, 무한의 고리가 완성됐다.


결국 인사치고는 너무나도 긴 대화에 지친 필리아가 다시 리아를 뺏어가고 나서야 끝났다.


여전하다.


모든 게 변함없는 고향의 모습에 리아는 혼나면서도 아이처럼 명랑하게 웃었다.


작가의말

방학편 이제 시작임닷!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밀린 만큼 다음화도 준비되어 있으니 자세한 인사는 거기에서 하겠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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