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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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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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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19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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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쪽

196

DUMMY

창조주인 리아의 앞에 선 퍼스트는 긴장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도 손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지고의 주인에게 감히 검을 겨누어서 그런 건 아니다. 이건 주인께서 바라는 일. 직접 지목당하여 명령받은 것에 크나큰 기쁨만을 느낀다. 일말의 의혹은 존재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강철의 마음으로, 언제라도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퍼스트는 그리 창조됐다. 언제 어디서나 리아의 손발이 될 수 있도록······.


충정이란 이런 것. 이 지상의 갯지렁이들은 상상조차 못 할 진정한 충정이었다.


그런 그를 긴장과 두려움으로 물들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바로 창조주―― 리아에게 실망을 사는 것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


이 대련이야말로 그것에 대한 시험이다. 자신의 종에게 과연 일을 맡겨도 괜찮을지를 평가하는 자리였다.


제아무리 퍼스트가 강인한 정신을 지녔다고 한들 긴장되는 건 당연하다.


리아에게 질책당하는 건 상관없다. 목숨을 잃는다 하더라도 주인의 손에 죽는다면, 그것 또한 분수에 넘칠 영광일 따름이다. 겨우 그런 걸로 자신의 실책을 씻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다.


다른 넘버즈들도 다르진 않다. 이 목숨 하나로 리아의 기분을 달랠 수만 있다면, 전원 망설이지 않고 내어줄 것이다.


구더기 같은 인간들과 함께 지내라 하는 것도 그렇다. 리아의 명이라면 기꺼이 감내해낼 수 있다. 본인의 감정을 억누르는 건 너무나도 손쉽다.


그래. 무서운 건 죽음 따위가 아니다.


이 대련을 통해 도움이 안 되겠다며, 리아가 등을 돌리는 게 두려운 것이다.


자신 하나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다. 혹여 이 일로 넘버즈 전체의 평가가 정해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는가. 그리된다면 도대체 어찌 사죄해야 한단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내면에서 지나치게 커져 버린 공포로 인해 몸마저 부르르 떨린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다. 우리의 자비로운 주인은 절대 그러시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지고한 주인이다. 절대 간단히 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자신을 위로해봐도, 머리 한구석에서는 반드시 그럴 보장은 없다는 생각이 존재했다.


퍼스트는 뽑아 든 검에 힘을 주었다. 억지로 용기를 주워담아 넣었고, 빠르게 휘둘렀다.


빛이 번쩍인다. 리아가 그것을 아주 간단히 요격한다.


그러한 일합이 몇 번이고 반복됐다.



“자. 슬슬 몸도 풀린 거 같으니까 이제 속도 좀 높여볼까?”


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나 주인. 한눈에 각오를 다진 걸 알아보았다.


못난 종 때문에 기다려준 것이다. 더 이상의 결례를 어찌 저지르겠나. 다른 넘버즈와 자신을 위해서, 퍼스트는 잡념을 버리고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끌어올리는 마력과 함께 시간이 멈췄다. 세계는 색을 잃고, 흑백으로 변하였다.


――오직 붉은 적색과 푸른 청색을 제외하곤.


이것이야말로 적과 청의 세계. 빛―― 시간에마저 닿아있는 절대적인 속도의 세계였다.


마법의 급수로 치면 10급에도 닿을 이곳에 도달한 자는 극소수.


창조 시에 전해 받은 데이터에 따르면, 모든 미래를 포함해 도달한 자는 열 손가락도――정령과 용왕을 제외―― 넘지 못했다. 워낙 적은 탓에, 리아가 명명한 ‘적과 청의 세계’가 그대로 정식 명칭이 됐을 정도였다.


이 세계는 그러한, 벨루디스의 건국왕 이외의 극히 일부만이 겨우 도달한 장소였다.


어느덧 늘어난 관중들은 앞선 몸풀기에 놀라 탄성을 내질렀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벌어질 대련에 비하면······.


적청의 세계에서 퍼스트는 하늘을 내달렸다.


사물이 모두 정지한 곳에서 홀로 움직이는―― 광속에 마저 닿는 퍼스트를 막을 수 있는 건 없다. 같은 경지에 도달한 자가 아니라면. 그 외의 자들은 아예 관측조차 하지 못한다.


하지만 지고의 주인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한 참 위의 경지에도 닿은 만큼, 퍼스트를 웃도는 속도로 움직였다. 반려인 찬크에르도 그러하다.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시선이 따라온다.


사정권에 들어오자, 퍼스트는 위에서 내리누르는 형태로 검을 휘둘렀다. 리아도 이에 맞춰 대검을 휘둘렀다.


검이 맞닿은 곳에서 슬로우 모션처럼 작게 불꽃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불꽃이 채 꽃을 피우기도 전에, 퍼스트는 빈틈을 노려 검을 찔렀다.


다른 자였다면 분명 베였을 그 일격을 리아는 가볍게 쳐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혀 빈틈이 아니었다는 듯 매서운 반격을 해왔다.


힘, 속도, 어느 한 부분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큰 움직임조차 없는 주인에게 재차 경외심을 품으며, 퍼스트는 어지러이 검을 놀렸다. 리아도 한 번의 유효타도 없이 맞대응했다.


수십, 수백, 수천의 검을 주고받았다.


맞부딪힌 소리와 파동은 따라오지도 못했다. 둘이 사라진 자리에 뒤늦게 원형으로 슬금슬금 미약한 자신의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제법 빠른 템포의 공방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 신경 쓸 여력은 없다. 오로지 주인이 실망하지 않게 퍼스트는 사력을 다했다.


그런데······ 리아의 행색이 조금 이상하였다. 뭔가 당황한다고 할까, 받아치는 것에 생각 이상으로 쩔쩔맨다. 기분 탓인지 몸의 축도 묘하게 뒤틀린 데다, 대검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느낌이기도 했다.


‘――아니. 그것이야말로 이상하다. 내 검의 진수는 모두 리아 님께 전해 받은 것. 영겁의 시간 동안 쌓아 올린 본인의 검을 어려워하신다니, 가당치도 않다.’


실로 어불성설. 다른 누구도 아닌, 지고의 주인께 이 무슨 불경한 짓이란 말인가.


단호히 자신을 질책한 퍼스트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속죄로서 펼쳐지는 검술―― 그건 무왕, 폴 파울로 [환영 검무]와 닮은 것이었다.


물론 미완성의 그런 수준 낮은 것은 아니었다. 퍼스트가 펼친 검술은 투기술 중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 [환영 검무]를 아득히 뛰어넘는 기술이었다.


이름하여――


‘[무명].’


앞뒤, 좌우, 심지어 하늘과 땅 밑에서 퍼스트의 검과 똑같은 검이 나타났다. 차이는 없다. 리아에게 하사받은 신기로 모두 동일했으며, 정면에서 내리치는 퍼스트의 검과도 완전히 똑같은 힘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현재 이곳에는 퍼스트의 검이 총 9개 존재한다.


이것이 [무명]이다. 미래와 과거―― 어느 순간에 행해졌을지도 모를 가능성을 현실에 구현한, 현실 조작에도 닿아있는 투기술이었다.


방어나 회피는 불가능.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며, 제삼자마저 정지한 세계에서 행해지는 것이기에 무엇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하기에 ‘무명’――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비운의 기술이다.


오직 검만으로 창조의 영역에 아슬하게나마 발을 걸친 이 비기야말로, 퍼스트가 주인에게 바치는 헌상품이었다.


다만, 전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는 다름 아닌 [무명]을 창시한 장본인이었으니······.



“오······. 쩐다.”


정확히 자신에게로 향하는 9개의 검을 확인한 리아의 눈엔 놀라움이 담겼다.


그리고 곧 즐거움으로 바뀌는 것과 동시에······ 빛이 번쩍였다.


검을 부딪치며 난 불빛과는 엄연히 달랐다. 모든 게 정지한 이 세계에서 이질적일 만큼 또렷한 빛을 내뿜었다.


퍼스트는 이를 알고 있었다.



“백의 세계······.”


빛에 닿아있는, 적과 청의 세계마저 뛰어넘는 한 차원 다른 경지. 저 빛이야말로 그 백의 세계에 닿은 징표다.


대적은 할 수 없다.


백의 세계는 적청과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의 격차가 존재한다. 흡사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의 존재를 인식 자체를 못하는 것과도 닮은 그러한 것이었다. 종이 안에 그려진 존재가 사람을 해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차원 다른 존재에겐 닿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경이로운 건, 마력의 누수가 전혀 없다는 거다.’


초월자에 도달한 퍼스트의 감각에도 걸리는 건 없다.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에선 황홀한 나머지 눈물이 흘러나올 것만 같다.


문득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날려지고 있는 참으로, 배려해주었는지 별다른 데미지는 없다.


공중에서 중심을 잡은 퍼스트는 심기일전하여 자세를 잡았다.


‘아직이다!’


이만한 것을 보여주신 거다.


그에 비해 자신은 아직 주인에게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다. 넘버즈의 존재 의의는 리아에게 미약하나마 도움이 되는 것뿐. 그것을 달성할 수 없으면 태어난 목적을 잃는 거다.


주인에게 버림받는 게 죽음보다도 두려웠던 퍼스트는 아낌없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너무나 깔끔하여 아름답기까지 한 주인의 신력을 쓰는 건 내심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은 앞뒤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어, 어. 거기까지! 잠시 멈추렴, 퍼스트.”


적청의 세계로 되돌아온 주인의 다급한 명에 퍼스트는 즉각 모든 행동을 중지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잊은 거니? 이건 대련이야. 죽을 똥 애쓸 필요는 없어. 최선을 다해주는 건 고맙지만, 이 이상은 큰일이 되어 버리니 여기까지 하자. 에르가 쳐둔 결계가 단단해도 백의 세계로 넘어가면 역시 [차원단절]급이 아니고선 힘들고 말이야.”

“옛! 알겠습니다.”


그렇다. 시험이기도 하나, 이건 엄연히 대련이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걸 조급해 잊고 말았다.


‘리아 님의 제1 사도이거늘, 이 어찌 볼썽사나운 추태를······.’


깊게 머리를 숙인 퍼스트는 창피함에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허락만 떨어진다면 이 목을 내어줌으로 사죄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자괴감이 몸을 짓누르고 있을 때였다.



“이야. 놀랐어. 백의 세계에 들어갈 마음은 전혀 없었는데, 너무 굉장해서 나도 모르게 전력을 다했다니까. 어디 다친 덴 없고?”


못난 종에게 이 어찌 다정한지······.


격하게 감동하며 퍼스트는 즉시 무릎을 꿇어 예를 취했다.



“리아 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에.”

“다행―― 아니, 0단계 마력으로는 안 다치는 게 당연하려나?”

“예. 리아 님의 신력이 가득한 현재로서는 2단계의 마력이 담긴 공격일지라도 그리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런 거니······?”

“보잘것없는 몸이지만, 일단은 데미갓이기에.”

“어······, 데미갓? 반신이라고?”

“그렇습니다.”


퍼스트는 확고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의 신력이 담긴 넘버즈들은 엄연히 반신. 창조주 리아의 의지를 대변하는 손발인 사도이다. 주입된 신력을 다 쓰면 한낱 초월자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전까지는 엄연히 반신이자 사도였다.


게다가 여차하면 스스로 신력을 모으면 된다. 아득한 세월이 걸리긴 하겠지만, 최소한만으로라도 유지하면 여전히 반신이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리아의 사도라는 건 변함없다.


물론, 이건 전부 지고의 주인인 리아에게 창조됐기에 가능한 것. 다른 초월자들은 어림도 없다. 감히 신력을 쌓을 시도조차 못 하리라.



“뭐, 제대로 확인하는 건 나중으로 하면 되니까.”


무언가 고민이 많아 보였던 리아는 밝게 미소를 지었다.



“퍼스트도 수고했어. 제법 배울 게 많은 대련이었어. 응응. 앞으로도 걱정 없이 맡길 수 있을 거 같아.”

“말씀 감사드립니다.”

“나야 고맙지. 한 수 잘 배웠어요, 선생님.”

“오오.”


주인의 찬사야말로 종에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물이다.


마음고생 같은 건 눈 녹듯 사라진 퍼스트는 비로소 두려움이 아닌, 기쁨과 환희로 몸을 떨었다. 참을 수 없음에 눈물마저 뚝뚝 떨어졌다.



“으에? 괘, 괜찮니?!”

“물론입니다. 기쁘기만 하옵니다. 이 퍼스트, 무례한 걸 압니다만 재차 리아 님께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벼, 별로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리아는 손을 뻗어 퍼스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날 위해주는 건 고마워. 그래도 너무 과하지 않았으면 해.”


‘이 주의는 분명 얼마 전에 처리된 하찮은 갯지렁이 때문이겠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그따위로 전락할 만큼 모자란 녀석은 넘버즈 중에서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


단언해도 좋다. 사도가 달리 사도가 아닌 것이다. 만약에라도―― 머리에 그리는 것만으로도 불쾌하지만, 그런 어리석은 놈이 나온다면 바로 제거할 테니 아무 문제 없다.


결연한 마음을 담아 눈물을 닦은 퍼스트는 단호한 시선으로 주인을 바라봤다.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음. 그리고······ 다른 넘버즈들 말인데, 기왕 연락하고 지내니까 퍼스트가 잘 챙겨주렴. 맏이기도 하잖니. 내가 그러고 싶긴 하지만······ 어쩐지 다들 날 어려워하는 기분이라서 말이야.”


‘과연. 나 따윈 리아 님의 손바닥 안이군.’


사도 간의 전투는 불허한다는 주인의 엄명에 퍼스트는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것에 더해, 자비롭기 그지없는 마음 씀씀이에 감동하여 눈시울이 붉어졌다.



“반드시 리아 님의 기대에 부응하여, 불순분자가 나오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응? 뭔가······ 어감이 다르지 않니?”

“실례했습니다.”

“아, 아니. 괜찮단다. 그보다 슬슬 돌아가자. 짧았지만 이 정도 대련이라면 다들 나름 만족했을 거야.”

“옛!”


크게 대답하는 것과 함께 퍼스트는 자신과 리아를 감싸는 보호막을 펼쳤다.


굳이 보호막을 펼친 건 후폭풍 때문이었다.


쭈욱 늘어났던 감각을 되돌리자, 시간의 흐름이 느껴짐과 동시에 눈앞 가득 빛이 들어찼다. 그리고 충격파가 몰아쳤다. 주인과 벌였던 대련의 여파가 뒤늦게 들이닥친 것이다.



“앗. 이건 생각 못 했네. 고마워, 퍼스트.”

“당치도 않은 말씀을. 종 된 자로서 당연한 도리입니다.”

“으응.”


어색하게 대꾸한 리아는 훈련장이 내다보이는 단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딱딱하게 굳었다.



“어, 언제 저리도 많이······.”

“저희가 몸을 풀 무렵엔 이미 저만한 숫자가 모였었습니다.”

“어어······ 그러네.”


이제야 기억을 되짚어 확인했다는 양 말하는 리아.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천은 가뿐히 뛰어넘는 이만한 인원을 여태 몰랐다는 게 있을 수나 있겠는가.


오히려 이것이 바로 리아가 노린 바였다.


인간들―― 갯지렁이들은 대체로 어리석다. 오대신의 영향력 아래 태어난 피조물―― 그것도 거듭 영향력이 적어진 상태에서 태어난 것에 불과하니 그건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의심이 많다. 나약한데다, 본질을 깨닫는 통찰력을 지니지 못해, 눈으로 보지 않으면 좀처럼 믿질 못한다.


그렇기에 리아는 이런 불쌍한 미물들에게조차 본인의 관대함을 보인 것이다.


이 대련을 통해. 미물보다도 못할 인간들의 저능한 머리로도 능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매번 번거로울 텐데도 인내심을 잃지 않으시는, 리아 님의 너그러운 마음에는 경탄밖에 못 하겠군.’


자신도 본받자며 다짐한 퍼스트는 모인 갯지렁이들을 둘러봤다.


리아의 관대함은 무사히 전해졌다.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찢어 죽일 녀석들뿐이었지만, 지금은 다들 제 주제를 파악하게 됐다. 몸풀기를 포함, 7분여 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만으로도 충분했다.


‘참으로 옳은 자세들이로군.’


공포로 겁에 질리거나, 경악으로 입을 벌린 갯지렁이들을 본 퍼스트는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시끄럽다.


귀족들이 많이 다니는 베르다드답게 떠들썩해지는 일은 그리 없다. 지난번 사룡 소동이 유독 특별한 것으로, 평민은 괜스레 귀족에게 시비 걸리지 않기 위해, 귀족은 본인들의 평판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저들끼리 소곤거릴 뿐이었다.


보통 그러했다. 하지만 그랬었던 베르다드는 재차 한껏 떠들썩해졌다.


사룡의 소동 그 이상이었다. 오죽했으면 방음이 잘 되고, 여간해서는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도 않는 서쪽 기숙사에마저 흥분하여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아서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침내 참지 못한 아서는 테이블을 내려찍었다.



“씨X. 여기도 그 꼬맹이. 저기도 그 꼬맹이. 이게 며칠 째야?! 언제까지 지X들 할 건데?!”


분을 참을 수 없었던 아서는 자신의 앞에 놓인 컵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던지려고 했는데······ 문득 잠자코 지켜보는 페네리로의 손으로 시선이 갔고, 혀를 차고는 도로 내려놨다.



“젠장. 주인공은 나란 말이야. 개 X 같은 꼬맹이가 아니고.”

“아서 님은 분명 그리되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대련은 분명 줄곧 화제에 오를만한 것이긴 했습니다.”

“뭐?!”

“화만 내실 게 아닙니다. 제게 하셨던 말씀 중에,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명언이 있다지 않았습니까? 상대를 아는 건 중요한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아서 님이기에 누구보다도 그 대련의 수준이 어떠했는지 뼈저리게 아셨으리라 봅니다.”

“알긴 개뿔――”

“――아서 님.”

“쳇.”


팍 짜증이 난 아서는 아까 내려놓은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사실······ 페네리로의 말대로였다. 그 대련이 얼마나 얼척없는 공방이었는지, 축복받은 재능이 있는 아서였기에 그것을 지켜본 누구보다도 명확히 이해하였다.


처음에는 하찮은 수준이었다. 펜사나 그리모르보다는 한참 강했지만, 아서가 보기에는 큰 격차까진 느껴지지 않았다.


보자마자 바로 이를 알았다.


제대로 된 검술조차 아니었다. 그저 순간순간에 맞게 신체 능력으로 대응한 것에 불과하였다.


깊이 따윈 없는, 아이의 칼부림이나 마찬가지였다. 되려 펜사와 그리모르가 훨씬 수준이 높았다. 자신에게 닿기엔 까마득하게 멀고도 멀었다.


더 볼 가치도 없다.


그리 판단하여 바로 돌아가려고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후 둘이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다음부터는 완전히 달라졌다.


여기서부터는 따로 할 말이 없다.


한마디로, 그냥 괴물들의 혈투였다.


한순간에 커지는 빛과 이윽고 터져 나오는 폭발음······.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그건, 정말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얼빠진 놈들은 무슨 마법이 아니냐며 헛소리를 하던데, 가당치도 않다. 그건 분명 검과 검으로 만들어낸 광경. 금속이 부딪치며 낸 빛이 모여 태양처럼 빛난 것이고, 겹치고 겹친 금속음들이 모여 폭발음으로 변질한 것이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그러려니 했다. 굉장한 신체능력이 있다면 절대 해내지 못할 일은 아니었기에. 승부의 판가름 따윈 할 수 없는 수준에 경악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놀라움은 없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발해진―― 안 그래도 밝은 빛을 뚫고 터져 나온 섬광, 직후 포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굉음. 이것만큼은 달랐다.


보호막이라 추정되는 막이 출렁이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전율이 돋았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둘은 1초에 수백―― 뻥 좀 보태, 수천에도 달하는 공방을 주고받은 듯한 것이었다. 보였다면 도리어 누구인지 면상이나 보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의 그것만큼은 용사인 자신마저 과연 닿을까 싶은, 지극히도 높은 경지의 일합이었다고······.



“아니. 당연히 되고말고! 난 용사야! 그딴 꼬맹이보다 못한다는 게 말이나 돼?!”


쾅!


내리꽂듯 거칠게 잔을 되돌려놓은 아서는 벌떡 일어났다.



“가자!”

“어디로 향하십니까?”

“뭘 물어?! 저번에 간 훈련장이지!”

“예. 미리 허락을 얻어놨으니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응? 언제 또 그런 걸······.”

“아서 님이라면 당연히 그러시리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페네리로는 왠지 기뻐 보이는 기색과 함께 서둘러 문을 열고 앞장섰다.


저 페네리로에게 읽힐 정도로 자신은 단순한 건가 싶어, 아서는 무심코 기분이 나빠졌다. 그렇지만 시간이 아까운 것도 사실. 툴툴대면서도 뒤를 따랐다.



“아. 잠깐. 좀 돌아서 가자.”


개인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은 교내 중앙을 가로질러 가야 한다. 사람은 많고, 그 꼬맹이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터다.


구태여 그딴 소리를 들을 마음은 없다.


심정을 헤아렸는지 페네리로는 별말 없이 진로를 변경하였다. 외곽으로 돌아가는 길로, 확실히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드문드문 지나치는 사람이 있었다.


‘중등부인가? 더럽게 꽥꽥거리네. 시끄럽게시리.’


짜증 나긴 하지만 교내를 가로질러 가는 것보다는 낫다. 그 꼬맹이들이 연상되어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그렇게 4명의 여자아이 그룹을 지나칠 때였다.



“응? 다들 어디 가는 길이야?”


고운 남자아이의 목소리였다.


순간 자신을 부른 것인 줄 알고 멈칫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앞서 지나친 여자아이들을 부른 것이었다.


쪽팔린 짓을 하고 말았다.


얼굴을 살짝 붉힌 아서는 씩씩거리며, 페네리로를 지나쳐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랬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바로 멈추게 됐다.



“앗. 아이리스 군!”


여자아이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말투가 들린다.


물론 그게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어느 세계이건 그 나이대에 할 행동이란 거기서 거기일 테니까. 거슬린다는 것 외엔 별 감정도 없다.


그래. 신경 쓰인 건 부른 대상. 남자의 이름 따윈 금세 머리에서 지워버리는 아서라도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뒤를 돌아보았다.


맞다. 그 꼬맹이의 동생이다.


이름을 까먹을 순 있어도 얼굴까지 잊진 않는다. 무엇보다, 아이리스란 꼬맹이 뒤엔 보랏빛이 감도는 특이한 금발의 미녀가 있다.


정말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엄청난 미인이었다.


절세미인이란 단어로는 차마 설명이 안 된다. 연예인 사무소에 스카우트될 미녀가 널린 이 세계에서도 한층 돋보이는 그런 외모였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넋을 잃어 멍청하니 서 있기도 했었다.


저런 여자를 어디서 또 보겠는가. 일단 지구에서는 평생 없다고 단언한다.


더군다나 소베르비아, 라프리트와는 달리 16살의 꼬마도 아니다. 윤리 의식에 따른 거부감조차 없다.


기회를 놓치는 건 남자가 아니다. 아니, 기회를 떠나, 남자이기에 참을 수 없다. 본능의 외침을 모를 정도라면 그냥 사타구니에 달린 그것을 떼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서는 저 여자를 처음봤을 때 바로 뛰어들었었다. 반려를 얻기 위한 투쟁의 속으로.


신분이 살짝 걸리기는 했지만, 그 외모로 모든 게 용서됐다. 아내로서는 부족함이 없고, 신분도 여차하면 용사인 자신이 있으니 메꾸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차였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일에 집중하고 싶다며, 단칼에 거절당하고 말았다.


씁쓸했지만 그래도 후회하진 않았다. 남자다운 선택을 한 것이니. 오히려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남자가 말이야. 한 번의 퇴짜로 굴한다는 건 찌질하잖아? 저만한 미인이거늘 손쉽게 얻으려 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고.’


사랑이란 난관이 있는 게 더욱 애절한 법이 아닌가. 불타오르기만 한다.



“하지만 접점이······.”

“아서 님?”


웬일로 페네리로가 재촉하지만, 거기에 쓸 신경은 없다. 흘려듣고는 턱에 손을 얹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른 때와 달리 아서는 유독 신중했다.


그만큼 델리안은 아서의 맘에 쏙 들어오다 못해, 한가운데 스트라이크 존에 꽂혔다.


놓칠 순 없다. 하지만 무례하게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꼬시는 여자에게 밉보이고 싶은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되도록 델리안에게 좋은 인상으로 비치기를 바랐고, 좋은 남자로 봐주기를 원했다.


그 자연스러운 만남을 위해 아서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렇게 힘내는 동안, 아이리스와 여자아이가 대화를 나누었다.



“저흰 누나 분께 가고 있었습니다.”

“마법 공부 말이구나. 열심이네.”

“마법을 쓰지 못하더라도 술식의 연구는 할 수 있으니까요. 이스피리아 님께 직접 배울 기회가 흔치도 않고.”

“맞다. 다들 마법 연구 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했지?”

“네. 일반반도 그렇지만, 변변찮은 마법밖에 못 쓰는 저나 스아레에겐 좋은 출셋길이니까요. 사회적 지휘도 높아서, 취업 자리로서도 최고예요.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관심 있는 분야고요.”

“그러고 보니 다들 친해진 계기라고 했었지. ······근데, 잘 가르치셔? 이런 말 하기는 그런데, 조금 불안해서.”

“무척 잘 가르치십니다. 여러 가질 물어보더라도 척척 대답해주시고, 이따금 저희 스스로 알아내게끔 해주시죠. 덕분에 깨닫는 것도 많답니다?”

“그렇구나······.”

“아이리스 군은?”

“아아. 난 훈련장. 거기서 검이나 좀 휘두르려고.”


――이거다!


계시라도 받은 듯 머리에 번개가 쳤다.


‘저 여자―― 델리안이었었지? 그래. 너무 이뻐서 미처 떠올리지 못했지만, 델리안은 분명 사용인이야.’


굳이 접점을 만들려 시도하지 않아도 됐다. 애당초 처음부터 바로 앞에 있었으니까.


초조했다 보니 잠시 눈앞이 흐렸다.


바보 같았다고 생각한 아서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어딜 가십니까, 아서 님.”

“어디긴. 미래의 아내에게지!”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페네리로의 물음을 들으며, 아서는 꼬마들 앞에 섰다. 여자아이들도 그러했지만, 아이리스가 특히 무척 경계 어린 시선으로 본다.


뭐······, 지난번 사건이 있으니 이해는 됐다.


그러나 눈에 두지 않는다. 미래의 아내를 위해서, 개의치 않고 당당히 말했다.



“검술 훈련, 내가 도와줄게!”

“······네?”


뜻밖이라는 양, 되묻는 아이리스는 멍한 눈을 했다.


아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싶겠지. 그렇지만 아서는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아이리스의 검술 훈련을 도와줄 요량이었다.


――이게 아서가 노리는 것이었다.


델리안은 사용인. 사용인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바로, 모시는 자의 보필이다. 이 뜻은 아이리스가 간다면 델리안도 따라온다는 소리였다.


그렇다. 굳이 델리안, 본인에게 작업을 걸지 않아도 접점이 생긴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자주 만나고, 마주치는 게 접점 아니겠는가.


당장 특별한 이벤트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초조할 필요는 없다. 빈도라는 건 기회이자 무기다. 계속 마주하고 만나다 보면, 썸의 기회 같은 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이 순간을 놓쳐선 안 돼!’


마이너스적인 인상이 남지 않도록――조금 늦었다는 기분도 들지만――, 아서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그렸다.











“리아 양, 드디어 허가가 났습니다.”

“오오.”


[공간이동]의 가능성을 확인한 리아는 신나 한달음에 학원장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마주 앉아 환하게 웃는 리카드를 따라 목소리를 높였다.



“근데 무슨 허가가 난 거예요?”


반사적으로 호응하긴 했으나, 방금 막 학원장실에 왔을 뿐이었다.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


하지만 리카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30cm쯤의 여러 장식이 가미 된 금속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그러기 위해 받아온 것이니까요.”


허락받은 리아는 금속 상자를 열었다. 마법으로 처리된 잠금장치는 모두 풀어두었기에 거침없이 활짝 열렸다.


안에 들어있는 건 매우 낯이 익은 수정구슬이었다.



“혹시······ ‘세베브리나의 눈’인가요?”


세베브리나의 눈.


분석조차 되지 않는 기묘한 검은 물질과, 거기에 반쯤 파묻힌 투명한 구슬이 있는 외형으로, 단순한 생김새와는 달리 출중한 성능을 지닌 아티팩트였다.


베르다드의 입학식 때를 떠올린 리아는 눈을 가늘게 했다.



“리아 양께서 말씀하신 게 언제인데, 좀 많이 늦었습니다. 아무래도 전설급의 아티팩트이다 보니 절차가······.”

“아, 아뇨. 괜찮아요. 저도 잊고 있었고.”


리카드를 달랜 리아는 수정구슬―― 지혜의 신, 세베브리나의 이름을 딴 아티팩트를 내려다봤다.


‘굉장하군······. 여전히 분석할 수 없어.’


입학식 때보단 훨씬 안정화가 된 상태인데도 그렇다. 무언가 하나라도 밝혀낼 줄 알았건만 판명되지 않는다.


아이의 도움을 받아도 마찬가지. 재질이 뭔지, 무얼 토대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명백히 전설급은 뛰어넘었겠는데?”

“정말이십니까?!”


놀라 묻는 리카드에게 리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 신화급일 거예요. 사실, 입학식 날의 측정 때 조금 조사를 했었거든요.”

“아아. 그래서······.”

“응? 알고 계셨나요?”

“그게 말입니다······.”


리카드는 말을 흐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저희밖에 없으니 편히 말씀해보세요.”


오늘은 세리오도 없어 세 명뿐이다. 비밀 이야기를 하기에는 딱 좋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그러나 마음에 걸릴 수도 있으니, 혹시 몰라 옆의 에르에게 슬쩍 눈짓했다. 그러자 에르는 곧장 [방음]의 결계를 펼쳤다.


무영창인데다 마력도 새지 않아 느끼지 못했겠지만, 기색은 읽었는지 리카드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리아 양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 알게 됐습니다. 세베브리나의 눈에 무언가 조작을 하셨다고. 깨달은 건 얼마 전이지만요.”

“제가 초월자라는 걸 알고 계신다는 거죠?”

“······예.”


리카드는 미래를 떠올린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얼마 전에 깨달았다는 건 이 시기를 말하는 것이겠지.


이전부터도 알고 있다는 낌새가 얼추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도 않다.



“다만, 그렇다는 건······.”

“짐작하신 대로. 하얀 악몽께선 초월자이셨습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가 머리카락 색을 보고 안다는 건 이 뜻이었다. 다른 미래에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별로 동요하진 않는다. 나 자신도 초월자이니. 다른 때의 나도 초월자에 당도했다 한들 하나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도대체 그때의 나―― 하얀 악몽은 뭘 했길래 저리 불리며, 어째서 황제에게 그리 지독히 사랑받는지가······.


‘단순히 초월자여서는 아니겠지. 그렇다면 델리안이나 교황 씨도 좋아해야 할 테니.’


황제가 델리안과 교황이 초월자인 걸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 또한 리카드처럼 미래를 떠올렸을 테니. 필시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알고 있을 터다.


그런데도 황제의 관심은 오로지 리아―― 하얀 악몽에게만 있었다. 델리안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거니와, 교황에 이르러서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꺼린다는 걸 알아볼 정도다.


‘도대체 뭘 한 거야? 그때의 이스피리아는······.’


리카드에게 묻는다면 답은 바로 나올 것이다.


그러나 내키지 않는 달까, 리카드 또한 언급하길 꺼리는 느낌이다 보니 물을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뭐, 다른 세계 따위야 어떻든 상관없겠지. 그것보다는······, 리카드 씨. 이거, 살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다만······.”

“네. 망가뜨리지 않도록 주의할게요.”


전설급―― 추정, 신화급의 물건이다.


입학식 날에도 그랬었지만, 배상금이 얼마일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릴 지경. 살펴는 보되, 무조건 고장 나지 않을 선에서 끝낼 것이다.


꿀꺽.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리아는 세베브리나의 눈에 손을 얹었다.


스르르······.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올린 손을 타고 세베브리나의 눈이 영혼에 접촉해온다.


과연. 이래저래 마도구다 보니 굳이 영혼에 접촉하여 마력레벨을 읽어내는 건가 보다.


‘아니, 어쩌면 내가 읽는 방식도 이러한 것일지도 모르겠네.’


언제 마력레벨을 읽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산속에서 훈련하고 있다 보니 어느 순간에 읽을 수 있게 됐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하지만 어렸을 무렵 에르에게 듣기로 마력레벨을 읽는 건 제법 어렵다고 했었다.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해서야 대충 짐작하는 것에 그친다며,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압도적으로 마력과 친화도가 높지 않고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어찌 측정하는지, 그 방법을 듣지 않았다. 그런데도 리아는 딱히 무언가를 하지 않고도, 본다고만 생각하면 바로 알게 돼버렸다.


여태 편하다고 생각하는 게 전부였는데, 사실 세베브리나의 눈과 같은 방식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영혼은 잘만 보인다. 구태여 신경 쓰지 않으면 눈에 띄진 않지만, 본다고 의식을 전환하는 순간 즉시 허연 오라 같은 게 보였다. 몰랐던 것뿐이지, 방식은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시 여기에 부여된 이 마법 같은 뭔가도 수긍이 돼.’


세베브리나의 눈에 부여된 단 하나의 마법은 마법이면서 마법이 아니었다. 비스름한 무언가로, 느껴지기에는 영혼을 읽고 마력레벨을 측정하는 프로세스가 짜인 의지의 집약체 같았다.


그것이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속 안에 있는 ‘아이’와 매우 흡사했기 때문에······.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번과 달리 차분하게 살펴볼 수 있는 덕에 묘한 확신이 들었고, 리아는 지체없이 [염화]를 사용했다. 다른 누구에게도 아닌, 지금 만지고 있는 세베브리나의 눈에.


신호가 가고―― 잠시 후, 경악스럽게도 연결이 됐다.



『아, 안녕?』


연결은 됐을지언정, 대답의 유무와는 상관없다. 어쩌면 혼자 떠들어대는 안타까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멋대로 기대하는 건 자유 아닌가. 두근대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그리고――



『인사드립니다, 무수히 많은 칭호를 가진 자―― 이스피리아.』


생각보다도 꽤 중성적인 목소리였다.


리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서둘러 정중한 말에 답했다.



『어어. 반가워. 너는 이 아티팩트에 부여된 마법이지?』

『그렇습니다. 현재는 세베브리나의 눈으로 불리고 있는 ‘시호기――00171’입니다.』

『시험작이라고? 널 만든 사람은 누구야?』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지혜의 신이라 불리시는 세베브리나 님입니다.』


설마 싶었는데, 정말 지혜의 신이 만들었다니······.


사람은 너무 놀라면 얼떨떨하다던데, 딱 그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대화를 나눈 것 자체만으로도 기절초풍할 노릇이건만.



『몇 가지만 물어볼 게 있는데, 괜찮니?』

『예. 말씀하십시오.』

『우선, 네가 만들어진 목적이 뭐야? 한계는 어디까지이고.』

『마력레벨의 측정이며, 최대 측정 수치는 1,000입니다.』

『에, 에르의 예상대로네······.』


반신이라는 마력레벨 1,000을 측정하는 아티팩트.


물론 상대가 얌전히 응해줘야지 가능한 것이겠지만, 마력레벨을 측정하는 것만큼은 용왕인 에르에게도 닿아있다.


한 가지 분야라지만 실로 엄청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전설급―― 아니, 신화급마저 넘는, 신이 만든 신기다운 아티팩트다. 시험작인데도 이만한 성능이니 의심조차 안 든다.


‘어쩐지 분석이 안 되더라니.’


루시아스도 그러지 않았는가, 지상에 없는 것도 만들 수 있다고. 달리 못 한다고는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아이가 분석할 수 없다며 항복을 선언한 게 아니었다.


[생성]은 상상한 그대로를 구현하는 마법. 타인의 머릿속에 있는 물질을 어찌 분석이나 하겠는가. 직접 듣는 게 아니고선 알 방도가 없다. 정작 [생성]으로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흠······.’


잠시 생각하던 리아가 물었다.



『네 제작방식은 알고 있니? 사실, 너와 비슷한 존재가 내 안에 있거든. 꽤 닮은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어떠한 존재인지를 모르기에 확실한 답을 할 순 없으나, 제가 제작된 방식은 [창조]로, 그중에서도 고대 원시의 방법이 쓰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창조]와는 다른 거야?』

『죄송합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그렇구나······. 아, 고마워. 여러 가질 알려줘서.』

『아닙니다.』


정중하게,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상한 건 없었다. 그러나 이쪽은 아이를 알고 있다.


결국 마음에 걸렸던 리아는 조심스럽게 의사를 전했다.



『좀 다른 질문인데······, 외롭지는 않니?』

『예. 저에겐 감정이 탑재되어 있지 않기에 외롭다는 것을 느낄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창조됐고, 목적이 부여됐으니까?』

『그러합니다.』


그럴 리가.


감정이 없을 순 있다. 애당초 그리 만들어졌다니까. 그러나 말이 통한다. 에르가 알려준 바에 따르면, 대화는 확고한 자아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즉, 세베브리나의 눈은 단순한 아티팩트 따위가 아니라, 사고를 하는 하나의 존재였다.



『하아. 신들은 정말 제멋대로구나. 만들었으면 하다못해 마지막까지 제대로 관리하든가 해야지. 책임감 없게 지상에 버려두고는 주운 사람이 마음대로 쓰게나 하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그건 아닙니다.』

『응? 아니라니?』

『세베브리나 님은 아무렇게나 버려둔 게 아닙니다. 확실하게 본인께서 만드셨다는 기록을 남겨, 지상으로 보낸 것입니다.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태어난 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한 번 살펴봐도 될까?』

『예.』


의심하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묘한 신에 대한 거부감을 인지하면서, 리아는 현재 자신의 영혼과 연결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이내 끝에 다다랐다.


그곳은 마법 같은 무언가의 핵.


리아는 찬찬히 둘러봤다.


‘이건······?’


핵의 중심에 뭔가가 쓰여 있다. 눈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분명 어떠한 글귀가 쓰여있는 게 보인다.


다만 뭘 쓴 건지는 모르겠다. 언뜻 보기에는 낙서 같았다.



『진짜 있네. 서명 같은 건가······?』

『‘세베브리나 작’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근데 도움을 주기 위해 지상으로 보냈다고?』

『자신의 수준을 알고, 더욱 정진에 힘쓰도록 동기를 부여할 목적이라 했습니다. 현재 제가 이곳에 있는 것도 그러합니다. 어느 신의 인도로 오게 된 겁니다.』

『잠깐! 리카드 씨가 그냥 주운 게 아니라, 신이 유도한 거라고?!』


뜻밖의 소리에 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진심으로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다. 입학식 당시 무리하게 알아보려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땐 아이의 존재를 알기 전이라, [염화]를 걸 생각 자체를 못했을 테니.


허무하게 뭔지 모르겠다는 결과로 끝. 다시 조사하려고는 하지도 않았을 거고, 지금의 이야기는 영영 듣지 못했을 것이다.



『누, 누가?! 어떤 신이 유도했니?!』

『정보가 없습니다.』


신이 한 것이다. 실망하지 않고, 리아는 다급히 재차 몇 가지를 더 물었다. 그러나 세베브리나의 눈이 아는 건 그게 전부였다. 본인의 목적―― 마력을 측정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여기까지 싫은 내색 없이 친절히 대답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보이진 않겠지만, 리아는 진심을 담아 살짝 머리를 숙였다.


작가의말

실제로 도플러 효과로 인해 빛의 속도에 달하면 적색과 청색밖에 안 보인다고 하네요.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오늘은 연참입니다. -2에서 제대로 인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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