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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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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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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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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DUMMY

나트알에서 벌어진 축제는 땅거미가 진 고즈넉한 저녁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됐다.


아니, 정확히는 리아의 환영 축제가 끝난 것으로, 어린 로즈가 꾸벅꾸벅 졸게 되어 대충 자리를 정리하게 되었다는 게 실상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좀 더 마시며 놀고 싶어하여 광장에 남아 여전히 술잔을 기울이는 등, 내일이 없다는 식으로 즐기는 중이었다.


지고의 주인, 리아는 전자로, 마을 주민들과 왁자지껄 안부 인사를 마치고는 가족들과 집으로 돌아갔다.


리아의 제4 사도―― 폴스는 베르다드에서 같이 온 이들과 함께 요새 내부로 안내되었다.


숲속에 덩그러니 세워진 이 요새는 수년 동안 중축 및 개량을 반복해왔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종의 병참 기지나 다름없어, 안에는 마을 주민들이 족히 10년을 버틸 식량이 비축되어 있다. 그 외에도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진 주거지도 마련되어 있으며, 수로 및 환기 또한 완벽히 이루어졌다.


사도로서 다종다양한 지식을 대모―― 아이에게서 받은 폴스는 이를 한눈에 알아차렸다.


이것들은 모두 치밀하게 계산된 것. 특히 내부의 적이 침투했을 시를 대비한 구역들의 세분화는 결단코 무지한 자가 설계한 게 아님을 시사했다. 하나하나가 심혈을 기울인, 여느 국가의 병참 기지와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을 좋은 요새다.


그렇기에 조금 놀랍다.


세세하게 따져보면 아직 부족한 점은 있다. 그러나 이 요새는 단 한 명이 건축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수년 만에 밑바닥부터 세워 올린 거다. 티끌만 한 요소 정도는 단점이라 보기도 어려웠다.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건 주민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땐 당연히 농담이나 허세쯤으로 여겼다.


그야 요새의 규모가 엄청나지 않은가. 이걸 불과 수년 만에 건축한다는 게 한낱 인간들에게 가당키나 한지 의심만 됐다.


‘우리들에겐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하지만 질문에 대답해주는 주민들의 눈동자는 해맑았다. 지천에 널린 번데기 같은 인간들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욕망과 야심 따위의 하찮은 감정은 전무했고, 아이와 마찬가지의 순수한 빛을 발하였다.


과연 지고의 주인이 인정한 가족들이랄까······.


살짝 남아 있던 의심마저도 요새의 건축자가 누구인지 듣자 말끔히 사라지게 되었다.


‘다름 아닌 리아 님의 조부이시니.’


그렇다. 이 요새를 건축한 자는 촌장, 에이브안이다.


물론 그게 뭐 대단하나 싶을 거다. 실제로도 그렇다. 하잘것없는 직책이다. 애당초 촌락이란 지칭 자체가 그 마을의 규모가 보잘것없음을 가리킨다. 그런 곳의 장이라 봐야 사도인 폴스에게는 그 어떠한 감흥도 생겨나지 않는다.


베르그나 로즈, 라프리트, 거기에 비비안마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귀족이란 특권 계급의 인물들에겐 촌장 정도는 가볍게 대할 하급자였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에이브안은 무려 리아의 조부다. 지고의 주인과 피를 잇는 혈연이 어찌 널리고 널린 촌장들과 결을 같이 하겠는가.


능력의 출중함과는 별개로 경의를 다하기에 충분하다. 부풀렸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고, 되려 으레 당연하겠거니 수긍되기만 했다. 그만큼 에이브안은 여느 인간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됐다.


폴스에겐 에이브안의 중요도는 창조주인 리아를 제외하면 최고위였다. 그다음은 나트알의 인간 주민들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주민들―― 마족이나 호인족, 몬스터들은 그리 높지 않았다. 리아가 이들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선 나름의 존중은 하나, 명이 떨어진다면 주저 없이 목을 베어버리리라.


딱 그 정도의 가치였다. 그나마 이전 동료였던 세스타스만큼은 조금 더 높긴 했지만, 별로 관심은 없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도착했다.


많은 주거지 중 제법 공을 들인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럼 편히들 쉬게나. 아아. 혹 마음에 안 들거든 아무 빈 집으로 바꿔도 괜찮다네.”

“배려해주어 감사드립니다.”


베르그는 손수 거처까지 안내해준 에이브안에게 정중히 예를 차렸다. 다른 이들도 머리를 숙였는데, 유독 가베인이 폴스의 시선을 끌었다. 설렁설렁 행동거지가 반듯하지 못한 그가 몹시도 깍듯이 머리를 숙이는 게 아니겠는가.


‘헤에~ 확실히 리아 님이 전생을 떠올리게 해주셨나 보네. 여러 감정이 담겼어. 사죄의 마음도 있고. 뭐, 전부 부질없다는 건······ 본인도 잘 알겠지.’


가베인에게 큰 악감정은 없다. 주인의 마음을 얻어놓고 제대로 지키지도 못한 게 한심스럽기는 해도.


하지만 어쩔 수 없으리라. 그 또한 비루하기 짝이 없는 인간에 불과하니 말이다.


에이브안은 말없이 슬쩍 눈길만을 주었다. 그러나 달리 언급하지 않고 두근두근, 설레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로즈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지내려무나. 리아에게는 내 나중에 한마디 해두도록 하마.”

“아, 아뇨! 오랜만의 귀향이시잖아요! 그럴 수도 있죠!”

“흠. 그러니······?”

“네넷! 감사합니다, 촌장님!”


작게 웃은 에이브안은 한 번 더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폴스야, 따라오렴. 비비안도. 너희가 지낼 곳은 다른 데란다. 리블리지라고 했나? 자네도 따라오게.”

“아, 넷!”


등을 돌려 걷는 그 뒷모습엔 조금의 경계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에이브안의 마력레벨은 340 언저리. 그리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가베인을 제외하면 저들 중에선 꽤 높다.


탁월한 전투 센스와 압도적이기까지 한 마력 조작을 보면, 가베인 이외에는 전원 가만히 앉아서 제압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마력도 벌써 2단계 압축이기도 하고.


‘역시랄까······. 능력의 그래프가 비상식적이네. 보통이라면 이제 막 1단계 압축에 한창일 텐데. 마력조작의 숙련도가 남달라.’


이러한 걸 알지는 못할 테지만 제 나름대로 가볍게 취급당하고 있음을 느꼈는지,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신뢰해서······ 라는 건 아니겠지.”

“조금은 보는 눈이 좋아지셨군요.”


다소 비꼬는 언사에 베르그는 쓰게 웃었다.



“뭐, 배운 게 없다면 황족으로서 부끄럽지 않겠나. 다만, 인제 와서 하는 소리네만, 엔가나가 폭거를 저지르기 전에 자네가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싶었네.”

“그랬으면 과연 전하께서 귀를 기울이셨을지요?”


베르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의 일은 정보로서 전해줬다. 여러 가정을 해보고 계산해보면, 엔가나의 만행을 미리 알려줬더라도 베르그가 듣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본인도 이를 알기에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반성도 하고 좀 성장한 듯싶지만······ 아직 멀었다. 황제도 이 점을 알아서 리아의 곁에 있으라 명한 거겠지.


진짜 목적은 황족의 피를―― 엠페라도 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겠지만, 베르그에게도 영 나쁘지 않은 사정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리아의 곁에 있는 것이니까.


암만 눈이 먼 장님이라도 지고의 주인을 따라다니다 보면 저절로 깨우칠 터. 그것들은 전부 피와 살이 되어 성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물론 번데기들이 리아에게 엉겨 붙는 게 몹시 언짢긴 하지만······.



“저······ 작은 아버님?”

“아아. 어서 들어가자꾸나.”


밤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에 지친 로즈가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는 소리가 들렸다. 애초에 졸기까지 했었다. 더 지체하지 않고 베르그는 안내해준 저택으로 들어갔다.



“저기, 어르신. 실례지만 저흰 어디로 가는 겁니까?”


혼자 남게 되어 불안해졌는지 비비안이 어둑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아아. 내 집이란다.”

“집······이요?”

“이 요새 안에 있단다. 단순한 손님이라면 모를까, 손녀와 증손자의 중요한 손님을 외로이 지내게 둘 수 없지 않느냐? 이 노인네랑 함께라 불편하겠지만 오늘은 거기서 묵으려무나.”

“부, 불편하다니······! 배, 배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과연. 축제 때의 모습을 근거로 모두의 관계를 정확히 꿰뚫어 본 듯하다.


면식이 없는 비비안은 분명 홀로 동떨어져 지냈을 터였다. 그들 나름대로 챙겨주기는 하겠으나, 계급 차가 상당하다 보니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다수다. 고립될 여지는 다분했다. 심판관이었던 리블리지는 말할 것도 없고.


‘둘 다 다소 각오를 해둔 듯하지만.’


제법 기특한 마음가짐이기는 하다. 뻔뻔하게 따라오겠다고 한 만큼의 염치는 있다. 그렇지만 상대가 신경 쓰인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아무 대책도 없는 무계획으로 보이는지라 폴스로서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란다.”


미로처럼 얽힌 길을 나아가다 도착한 곳은, 요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느낌의 정원이 딸린 민가였다.


분명 지식으로서 이곳이 촌장의 집이라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리아가 곧잘 찾아와 지냈던 장소에 자신의 발로 들어서게 되어 크게 감동했다. 심지어 성지를 방문한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자자. 편하게 들어오려무나.”


평범하디 평범한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약초의 진한 냄새와 허브의 향기가 몸을 감싸왔다. 넓은 거실에는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있었는데, 폴스의 눈을 사로잡는 한 의자가 있었다.


그건 다른 의자들과는 달리, 정성을 다해 만들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다리가 긴 아이용 의자였다.



“오오. 리아 님의 의자다!”

“호······. 단순히 만들어진 것에 그친 게 아니라 리아의 기억 또한 이어받은 것이로군.”


흥미롭다는 듯이 쳐다보는 에이브안. 말하는 뉘앙스로 보건대 확실히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의 차이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오토마타의―― 생명 창조의 개념이 없을 텐데도······.


역시 궤를 달리할 정도로 마법에 대해 해박하다.


쇠퇴한 현재의 인간들에 비하면 거의 수 세기를 앞선 수준이다. 마법에 능통한 마족이나 타종족에 비해서도 아득히 월등하다. 다른 때의 기억을 떠올린 지금의 리카드가 그나마 살짝 따라온 정도랄까. 그래봤자 술식을 제외하면 한참 뒤떨어지지만.


솔직히 좀 놀랐다.


여느 때와의 에이브안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전의 그도 마법에 빠삭하기는 했으나 이 정도로 굉장하진 않았다.


‘전부 찬크에르레이 덕분이겠다 만은, 여기까지 올라선 건 순전히 본인의 노력과 의지로 해낸 것이지.’


여러모로 경이롭다고 생각하며 폴스는 실내를 안내해주는 에이브안을 따랐다.



“응? 여긴?!”


폴스는 어느 방 앞에서 멈춰 섰다.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세부 위치마저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곧 나타날 것이라고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실제 눈으로 보니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초, 촌장님! 여기! 여기서 지내도 됩니까?”


왜 그런지 바로 안 에이브안은 피식 웃었다. 역시 기억을 계승했다면서.



“원하는 대로 하거라.”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폴스는 싱글벙글 냉큼 달려들었다.


문을 열자 어지러이 책과 약초들이 보인다. 정리 정돈이 안 된, 상당히 혼잡한 광경이었는데, 오늘도 약초를 짓이기며 연구에 매진했는지 특유의 쓴 냄새가 맴돌았다.



“알고 있겠지만 내 연구실인지라 지내기엔 다소 불편할 수 있단다.”

“괜찮아요! 여기가 좋아요!”

“그러니?”

“네!”


불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러긴커녕 이곳에서 지낸다는 것은 포상이나 다름없다.


여긴 리아가 오랫동안 머문 곳이니까······.


하루 이틀 머문 게 아니다. 건강이 악화할 때마다 매번 이곳에서 진단받고 자기도 했으며, [자동화]의 여파로 6개월간 잠들어 있기도 한 곳이었다.


분명 좋은 일로 찾아온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지고의 주인이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폴스를 설레게 하기엔 충분했다. 심지어 아이리스가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장소여서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우와아······.”


눈을 빛낸 폴스는 홀린 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비비안이나 리블리지에겐 관심 밖이었다. 아니, 번데기 따위가 이곳을 돌아다니는 게 짜증이 일었지만, 그걸 훨씬 웃돌 만큼 기분이 들떴다.


번데기들이라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번데기들과는 다른 놈들이니 됐다. 그보다는 시간이 아깝다. 주인이 머문 장소나 둘러보자.


폴스가 가장 먼저 살펴본 건 약초와 책들이 잔뜩 쌓인 책상 위였다.


정보상과 크게 변하지 않은 풍경을 보며 노트를 들어 올렸다. 적은 사람의 성격을 대변하듯 노트에는 고풍스러운 글씨가 가지런히 적혀있었는데, 자세히 읽어보니 그건 한 연구를 기록한 것이었다.



“약초의 약효와 마법의 결합이라······. 일종의 포션 연구인가? 그렇군. 촌장님도 [치유]를 쓸 수 있게 되신 거네. 아직 모자란 부분이 있기는 해도 이거라면 약초의 효능에 더해 [치유]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겠어. 아니면 약초의 효능을 마법의 힘으로 단숨에 끌어올리는 것도 가능하고. 조금만 더 연구가 진행된다면 [정화]를 대체하는 포션도 제작할 수 있겠는데? 앞으로가 중요하겠지만 어쩌면 엘릭서에 준하는 것도 만들 수 있을까 싶네.”


이것이 최근까지 하던 연구.


폴스는 제법 감탄하며 이전 장과 다른 노트들을 살펴봤다.



“응? 뭐야? 마력 증진에 대한 것과 신체의 활성도를 올리는 것도 이미 연구됐었네. 이거 어쩌면이 아니라 잘만 정리한다면 진짜로 엘릭서 비스무리한 걸 만들 수 있겠는데? 암만 그래도 죽인 자를 되살리진 못하겠지만······.”


애당초 엘릭서의 재료는 이 세계 전체를 뒤지더라도 몇 없는 만월의 물망초와 회복초의 최상위 버전인 전능초, 세계수의 만년살이 등등 장난 아니게 초초레어품들뿐이다. 그 외에도 썬라이트 만드레이크나 블러디 화이트 허브 같은 초레어품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다. 대부분의 존재들은 이것을 모을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그래. 어지간하면 그럴 터였다.


폴스는 노트는 슬쩍 내리고는 책상에 놓인 기구들에 남겨진 파편들을 쳐다봤다.



“응. 다 있네.”


비록 쓰다 남은 찌꺼기에 불과하지만, 리아의 막대한 지식을 전해 받은 폴스의 눈을 속일 순 없다.


뭐어······ 진품은 아니다. 세계수의 만년살이 같은 경우 세계수 자체가 용왕이 모여 사는 심소에 있다. 그걸 구해왔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 모두 닮은 뭔가의 신종이었다. 일단 데이터 베이스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은 종들이다.


하지만 종이 어떻든 가장 중요한 건 효과이다. 이것들은 기존의 것들과 효능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아마 원본이 있기야 했겠지.”


이토록이나 효능이 같다면 필시 원본이 되는 오리지널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구했는지는 뻔하다. 분명 찬크에르레이에게 받았을 터다. 그것을 토대로 원래 있던 종을 개량했으리라.



“하지만 세계수를 모방하여 만든다는 게 가능한가?”


세계수는 오엘문리아에 존재하는 정수가 집합하여 탄생한 월계수다. 그 어떠한 과장도 없이 오대신의 신력이 담긴 진짜 신목이다.


뭐, 신목이라면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별거 없다. 그 나무의 목적은 그저 비상용 배터리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정말 그러하다. 신목의 역할은 세상에 마력이 부족하게 됐을 시, 잎사귀마저 듬뿍 품고 있는 신력을 내뿜어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였다. 그 이상의 특별한 의미 따윈 없다.


하지만 신력을 담고 있다는 것만은 진짜다.


그렇기에 잉여분으로 만년에 한 번 떨어져나온 이 만년살이의 효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괜히 불로불사의 영약으로 불리는 게 아니고, 엘릭서의 재료가 되는 게 아니다.


다만, 좋은 것에는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따른다. 아무 정제도 없이 무턱대고 먹어버리면 만년살이에 담긴 신력에 의해 육체가 먼저 무너져내린다. 일정 수준의 강자라면 그나마 살 확률이 높긴 하겠다만, 그게 아니라면 무조건 죽을 것이다.



“그게 걸림돌이기는 해도 제대로만 정제하면 단숨에 초월자 언저리까지 도달하려나?”


분명 힘들기는 하겠으나―― 특히 번데기들은 절대 해내지 못할 것이나, 만약 정제에 성공해낸다면 필시 그만한 효과가 나타나리라.


여하튼 그만한 힘이 내재된 세계수를 모방하여 만들었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의문이다.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순간 어떠한 기운이 느껴졌다.


폴스는 눈동자만을 돌려 벽 너머를 들여다봤다.


사도로서 어렵지 않게 벽 너머를 투시한 폴스는 계속해서 시야를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아담한 정원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많은 약초와 허브들 사이에 솟은, 키가 작은 생달나무가 있었다.


긴가민가 싶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하다.


저것이 신목―― 또 하나의 세계수다.


분명 이제 겨우 묘목의 티를 벗어난 갓난아기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세계수임에는 틀림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세계수의 잎을 따 연구에 매진한 에이브안조차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폴스에게는 느껴졌다. 세계수에 잠재된 강대한 힘―― 어림잡아도 넘버즈와 비견될 정도의 막대한 신력이······.


후에 성장하면 넘버즈를 아득히 상회하는 건 일도 아니겠지. 그것이야말로 세계수니까.


작게 숨을 토해낸 폴스는 감각을 되돌렸다. 관심은 식었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을 가져봐야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였다. 세계수엔 아직 자아가 깃들지 않은 것이다.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는 것에 신경 써봐야 무얼 하겠는가.


조금 아쉬웠으나 폴스는 마저 방을 둘러봤다.



“오옷?! 이것은 리아 님께서 덮으셨던 담요잖아?!”


폴스는 약재를 보관한 서랍 위에 잘 개어진 담요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모습은 마치 성직자가 신의 신체를 다루듯 하였다.


당연했다. 폴스에겐 리아는 창조신. 남들에겐 그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낡은 담요에 불과하겠지만, 리아의 손에 태어난 존재들에게 이 담요는 신기에 버금가는 성유물이었다.



“이, 이걸 덮어봐도 되나······?”


담요를 펼쳐본 폴스는 돌연 반짝반짝 빛냈던 눈빛을 지우고 주변의 눈치를 봤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한동안 꼼꼼히, 분명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한데도 지나치지 않고 기척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 이쪽의 움직임을 감지해낼 만한 존재는 이 요새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확신이 들고 나서야 폴스는 긴장을 풀었다.



“에헤헤. 그럼······.”


평소의 차갑고 냉철한 얼굴이 헤실헤실 풀린 폴스는 침상 앞에서 신발을 벗고는 온몸에 [정화]를 써 이물질을 모두 제거했다. 그리고 예를 갖춰 정중히 묵례했다. 담요도 그러했지만 리아가 깊은 잠을 청한 이 장소는 사도들에겐 성스러운 영역이었다. 경거망동할 순 없다.


신실하게 마음을 다진 폴스는 천천히, 깨지는 물건이라는 양 조심스럽게 침상에 몸을 눕혔다.


머리맡에 있는 베개도 끌어와 베자, 배어 있던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약초와 허브 그리고 리아의―― 아니, 주인과 무척이나 닮은 에이브안의 체취였다.


이러나저러나 리아와 똑 닮은 체취에 마음은 편안해졌다.


이대로 자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폴스는 유혹을 참아냈다.


가장 군침이 흐르는 것이 남지 않았는가. 아깝게 그걸 놔두고 어찌 잠을 청하겠나.


꿀꺽.


마른침을 삼킨 폴스는 담요를 누운 몸 위로 펼쳤다. 펄럭이라는 의성어가 잘 어울릴 모양새였다.


하늘하늘 아름답게 펼쳐진 담요―― 성스러운 성해포가 천천히 내려앉아 제4 사도, 폴스의 몸을 아늑히 감싼다.


리아의 사도로서 이 이상은 없을 극치의 순간.


성불하는 게 아닐까 싶은 충족감과 행복이 폴스의 안을 내달렸다. 그런 불경한 기분을 음미하고 있으니 뭔가의 향이 코끝에 닿았다.


그게 무엇인지 판별하려던 그때······ [염화]가 걸려왔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나?”


제1 사도, 퍼스트의 제안으로 시작된 모든 넘버즈의 정기연락. 매주마다 한 번씩 하는 그것이 때마침 오늘이었다.


솔직히 왜 이런 연락을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다 모여 하는 거라고는 잡담만 조금 나눌 뿐인 터라 더더욱 그러했다. 다른 넘버즈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세컨드의 경우 자신은 바쁘다며 대놓고 싫어하기까지 했다. 서드도 귀찮다며 투덜거렸고. 별말은 없었지만 피프스 또한 내심 귀찮은 눈치였다.


하지만 전원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정기연락은 다름 아닌 창조주―― 리아의 의향이었으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퍼스트에게 듣자마자 불만은 싹 사라졌다. 그러고는 손바닥 뒤집듯 반색하며 이 정기연락에 열의를 보이게 됐다. 폴스도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에 리아의 명보다 중요한 건 없다. 따르는 건 지극히도 당연한 섭리다.


그렇게 시작된 정기연락은 어색했다. 당최 무얼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터라 다들 별말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제안자인 퍼스트의 주도로 어찌 지내는지 말하기는 했으나, 그것들도 전부 단답형의 짧은 문답에 불과했다.


하지만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대화를 나누게 됐다.


요령이 잡힌다고 해야 하려나······? 크게 의의를 두지 않고, 일기를 써 내려가듯 한 주 동안 있었던 일들에 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이다.


현재에 이르러선 입장이 뒤집혀, 제일 묵묵했었던 세컨드가 가장 열성적으로 멍청한 인간들에 대해 한탄을 토로하고는 했다. 그것들은 충분히 공감 가는 것으로, 전원 그 어리석음에 혀를 내둘렀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도 대체로 비슷하다. 오엘문리아의 존재들이 지닌, 그 태생적인 열등함에 답답함을 성토했다.


그러한 시간이 이어지다 보니, 자연스레 정기연락을 가지라고 한 주인의 의도를 깨닫게 됐다.


리아는 사도들에게 나태해지지 말란 뜻을 전한 것이었다. 번데기 같은 이곳 존재들의 한심한 모습들을 되새기며 절대 저리되지 말라고······. 이를 위한 정기연락이었던 거다.



“역시나 리아 님이셔. 한낱 벌레들에게서마저 배울 점을 찾으시고.”


폴스는 자신은 감히 따라가지 못하겠다며 감동하고는,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오는 [염화]의 연결을 수락했다.



『음. 상당히 늦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폴스?』

『아니. 별일 없어. 환영회가 있긴 했는데 그것도 아까 끝났고.』


그러냐며 중얼거리는 퍼스트의 말에 이어 좀 들뜬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님의 성지는 어땠어?!』

『세컨드······.』

『뭐 어때! 우리들의 일이야 어차피 특별한 것도 없잖아. 그나마 피프스가 할 말이 있으려나?』

『아뇨. 민달팽이를 따라다닐 뿐인 간단한 임무인지라, 저도 이렇다 할 이야깃거리가 없네요.』

『어라? 아직 도플갱어 버러지들을 만나지 못했어? 어디 있는지는 다 탐지해냈을 거 아냐?』

『물론 이 대륙에 존재하는 도플갱어들의 위치는 파악해뒀죠. 에스쿠드라고 하는 민달팽이만 제외하고. 하지만 제가 리아 님께 받은 명령은 서포트. 도움을 청하기 전까지는 나설 수 없죠. 그런데 꼴에 자존심은 있는지, 여간 힘을 빌리려 들지 않아서 당분간 현 상황이 유지되지 않을까 하네요.』

『그래도 되는 거야?』

『리아 님의 명이니까요. 멋대로 지레짐작하여 리아 님의 계획을 망칠 순 없죠.』

『하긴.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큰 그림을 그리셨겠지.』


전원 동의하는 심정을 내비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리아의 지혜는 사도들조차 범접할 수 없을 만치 깊고도 깊다. 함부로 의중을 짐작하여 속단하는 건 크나큰 죄악. 되려 주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러니 피프스의 생각은 실로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장로는 왜 못 찾았어?』


문득 든 의문을 폴스가 말하니 피프스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이······ 소실―― 카른웨난을 지닌 듯하더라고요.』

『존재 자체를 완벽히 감춰준다는 신기? 그걸 걔가 가지고 있다고?』

『그러게. 카른웨난은 카딜라신디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는 시절에 잃어버렸다는 비보잖아? 그게 왜 뜬금없이 그 버러지 손에 들어간 건데?』

『저도 잘······. 예상하기로는 그 민달팽이가 탈취한 게 아닐까 해요.』

『이야기의 흐름을 보자면 그러하겠지만······ 그 정도로 오래 살았다고?』

『정황상 초월자겠죠.』

『과연······. 카른웨난만으로도 번거로운데, 초월자이기까지 하면 원거리에서의 탐지는 확실히 어렵겠어.』

『······.』


옳은 소리라 말이 없는 피프스. 사도로서 면목이 없다고 여겼는지 [염화]를 통해 그 침통한 심정이 전해진다.


아차 싶은 세컨드가 허둥댔다.


매사 신경질적이고 냉혹한 그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오엘문리아의 존재들에게만 그럴 뿐이었다. 리아에게 생을 부여받아 충성을 바친 자들은 모두 소중한 동료로 여기는, 가슴 따듯한 좋은 사도였다.


폴스도 침울해진 피프스가 염려됐다. 더불어 피프스를 곤란하게 만든 에스쿠드에게 몹시 화가 났다.


만약 포획하라는 명이 떨어진다면 그 즉시 붙잡아, 반드시 피프스가 괴로워한 만큼 아픈 꼴을 보게 할 거다.



『어, 어쨌든 그것도 다 포함해서 전부 리아 님의 계획일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

『그건 그렇겠네. 딱히 재촉하지 않으신다고 했고.』

『그래. 여차하시면 리아 님께서 직접 찾아내셨겠지.』


주인께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으나, 이번에도 세컨드의 말은 너무나도 옳았다.


지고의 주인에게 불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 또한 그 손바닥 안에 있다. 에스쿠드의 위치 따윈 손쉽게―― 진작에 파악했다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파악했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다.


즉 가만히 놔둔다는 건 신경 쓸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이란 소리였다.


그러한 일을 굳이 끌어안을 필요는 없다. 못난 자신을 반성하고 정진하여 더 나은 모습을 주인에게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쩌면 그 번데기의 색출이야말로 피프스에게 내려진 과제일지도.’


피프스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결의를 다지는 게 전해졌다.


주인의 뜻이 그러하다면 달리 도울 일은 없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녀가 잘 해내도록 리아에게 기도를 드렸다.



『그러면 피프스의 이야기는 넘어가고. ······폴스, 이젠 네 차례야.』

『아아. 리아 님의 성지 말이지?』

『어때?! 역시 신세계지?!』


흥분하여 소리치는 세컨드를 비롯, 다들 내심 큰 관심을 보이며 귀를 기울인다는 게 느껴진다.


동료의 기분을 공감하며 폴스는 오늘 하루 성지에 있어 본 소감을 들려줬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와도 크게 차이는 없어. 조용하고 한적한 지상 낙원이지. 뭐라 설명하긴 어려운데, 너희도 와보면 알 거야. 이곳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절로 경건해지는 이 감각이. 개인적으로도 이 평온한 경관이 사랑스럽기도 해.』

『한마디로 리아 님의 성지라는 거지?』

『정확해. 언제 만드셨는지 리아 님의 신력이 담긴 세계수도 심겨 있더라.』

『나, 나! 축복을 내려줄래!』

『세컨드가 그러하다면. 보잘것없지만 저도 축복을 내려주고 싶군요.』


세컨드와 피프스는 벌써 신나 하며, 서로 어떠한 축복을 내릴지 상의도 하며 즐거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걸 제지하는 자가 있었다.



『둘 다 진정해라. 리아 님의 신목이다. 무례하게 멋대로 정하는 게 아니야.』


넘버즈들에겐 암묵적으로 정해진 직급이 있다.


제일 첫 번째는 리아의 손에 창조됐느냐다.


이유 불문하고 다른 존재의 영향 아래 창조됐다면 그게 무엇이든 길가를 지나는 벌레와 동급이다. 논할 가치조차 없다.


두 번째는 리아와의 혈연.


보다 짙게 리아의 피와 영혼을 이었다면 경우에 따라 상급자로서 취급한다. 여기에 해당하는 존재가 바로 리아의 부모님과 아이리스였다. 조부인 에이브안도 상급자에 해당하긴 하나 앞선 이들보단 조금 낮다.


세 번째는 리아가 직접 정해준 것에 따른다.


여기엔 나트알의 주민과 라프리트, 루비아 같은 친구들이 해당했다. 그중에서 나트알의 인간 주민들은 희미하긴 하지만 먼 조상에서부터 이어진 리아의 피와 영혼이 존재하는 터라, 리아의 의사도 반영하여 사도와 동급으로 간주한다. 그 외의 아무 연관 없는 자라도 리아가 지정한다면 그에 맞는 직급으로 다룬다.


네 번째는 리아에게 축복을 받았는지의 여부다.


세계수가 여기에 해당했다. 비록 리아에 의해 처음부터 창조되지도, 직급을 정해준 것도 아니지만 세계수가 리아의 신력을 품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신력을 하사받았다는 것 자체가 일종의 축복. 리아가 만든 물건을 받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리아의 소유물로서 나름의 대우를 해준다. 예시로는 작은 괴도단과 리카드 같은 일부 몇몇이 있다.


이 기준들에 따라 세계수는 엄연히 리아의 소유물. 그것도 꽤 가치가 높다. 못해도 사도의 바로 밑 정도는 해당할 것이다. 그러하니 멋대로 손대서는 안 된다.


지극히도 당연한 퍼스트의 딴지에 둘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 내일 내가 리아 님께 넌지시 물어볼까? 축복을 내려줘도 되겠냐고. 황송하게 허락해주신다면 다들 이 성지에 올 구실도 생기고 하니 좋지 않아?』

『오오! 그거 나이스 아이디어야! 너 천재 아냐?!』

『저도 그 명석한 두뇌에 크게 감탄했어요, 폴스.』

『아, 아니, 그런 부탁을 드린다니 리아 님께 실례――』

『――퍼스트, 쩨쩨하게 그러지 마. 사실 너도 바라고 있으면서. [염화]로 기대하는 네 심정이 전해진다는 건 알고 있지?』


안쓰러워 그냥 말해봤을 뿐인데 반응이 격렬하다.


제1 사도로서 리아에게 넘버즈의 중재자 역할을 역임 받은 퍼스트마저 격침됐다. 재차 만류하는 목소리에서 그리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매력적인 제안이라는 건 공감되지만······ 왠지 괜한 소리를 꺼낸 것 같다.


만약 허락받지 못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벌써부터 걱정된다.



『그나저나 리아 님아의 가족분들은? 잘 지내시디?』

『아, 서드. 애들 이제야 잠들었어?』

『그래. 보던 책만 마저 본다면서 버티다가 방금 막 잠자리에 들었어. 요즘은 맨날 이런 식이야.』

『힘들겠네. 버러지 따위를 돌보느라.』

『딱히 그렇지만도 않아. 알다시피 인간은 무지하게 나약하고 어리석잖아? 이것저것 챙겨주는 맛이 있어. 리아 님아가 직접 내린 명령이라 보람도 있고.』

『켁. 실화야? 나는 다 찢어 죽이고 싶기만 한데. 폴스, 너는 안 그래?』

『난 그냥 그래. 리아 님의 방해가 된다면 모를까, 일부러 찾아 죽이는 수고를 들이고 싶진 않아. 귀찮잖아. 그 시간에 맛있는 음식이나 찾고 말지.』

『음식이라······. 특이하네.』

『······내가 볼 땐 둘 다 특이해.』

『너한테 그런 소릴 들을 정도는 아닌데? 빡빡이.』

『대머리는 훌륭한 옵션이라고? 하긴 성격 나쁜 히스테릭 여자로선 이해 못 하겠지.』

『아앙?! 누가 히스테릭 사디스트라고?!』

『둘 다 진정하시지요.』


뭔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어째서 매번 으르렁거리는지 모르겠다. 말리는 피프스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물론 진심으로 싫어하여 싸우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아니, 그렇기에 더욱 귀찮음을 감수하며 말싸움할 가치가 있나 싶다.


‘나라면 저럴 시간에 다음 맛집 탐방 계획이나 꾸릴 텐데.’


이해하진 못하겠으나 그게 전부다. 기분이 상하진 않는다.


그렇다. 마음에 안 든다거나, 언짢을 이유가 전혀 없다. 어찌 됐든 저 성격과 개성이야말로 창조주, 리아가 구상한 것이니까. 이해를 못 하면 못하는 대로 상관없다. 다들 소중한 동료다. 진심으로 서로 싸울 일은 결단코 없다.



『가족분들 말이야. 잘들 지내고 계셔.』


대충 말릴 겸 이야기하니 돌연 뚝, 말이 끊겼다.


리아에 대한 것은 사도들에겐 초유의 관심사이자 삶의 전부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고 집중한다.



『응······. 다들 따듯하게 대해주시더라. 마치 리아 님의 자식인 것처럼 반겨주시기까지 했어. 이스카르 님께선 아이리스 님의 동생이나 마찬가지 아니냐면서, 자신을 할아버지라 불러도 된다며 허락해주셨어. 뭐, 너무 송구스러워서 그러진 못했지만······.』

『으으······.』

『그것참······ 부럽기 그지없는 시츄에이션이군요.』


한낱 피조물인 자신들이 리아의 자식으로 인정받는다는 건 더없는 영광이다.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폴스 또한 세컨드와 피프스처럼 부러움에 몸부림쳤으리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퍼스트와 서드에게서도 시기와 부러움의 감정이 흘러 들어왔다.



『아. 근데, 우리가 받은 정보랑은 다른 부분이 많더라.』

『어떤 점이?』

『인간 주민과 가족분들 말이야. 전원 정보와 달리 까마득하게 강해져 있어. 특히 필리아 님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어.』

『얼마나 달라지셨길래?』

『필리아 님의 마력레벨은 110쯤이셨잖아? 근데 지금은 촌장님보다 20 정도 낮은 320쯤이셔. 성장 속도가 정말 어마어마해.』

『리아 님의 어머님이시니 당연하지.』

『아냐. 그걸 가정하더라도 진짜 엄청나. 마력은 전부 2단계 압축인 데다가, 전투 센스마저 발군 중의 발군이라니까? 심지어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기척을 알아차리기까지 하시더라고. 눈이 마주쳤을 땐 진짜 놀랐다니까.』

『굉장하시군요······.』

『네가 어설펐던 거 아냐?』


폴스는 의심하는 세컨드에게 단호히 대꾸했다.



『너희도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필리아 님의 스테이터스는 모자란 부분 하나 없는 완벽한 육각형이야. 그것도 꽉꽉 들어차다 못해 게이지 밖을 벗어난 수준이지.』

『그 정도시라고?』

『확실해. 낌새를 보면 마법도 못 쓰시는 게 아니라, 성향이 맞지 않아서 안 쓰시는 거야. 아마 마력량만 확보되신다면 마법전에서 델리안을 압도할걸? 그렇다고 육탄전이 약하냐 하면 그것도 아냐. 되려 그쪽이 더 전문 분야로 느껴져. 좀 더 성장하신다면 아마 이 대륙에서 대적할 만한 자가 없을 거야.』


리아와 그 사도인 자신들을 제외한 가정이기는 하나, 두 눈과 감각으로 느낀 필리아의 잠재력은 정말 그 정도로 대단하였다. 사도 중에서도 가장 몸놀림이 날쌘 폴스의 움직임을 감지한 것으로 보건대, 이미 적과 청의 세계에도 살짝 발을 디뎠으리라 추측된다.


이런 솔직한 평가에 모두는 놀라움을 드러냈다.


아니, 서드만은 심드렁했다. 그는 혼자 아무 감흥도 없다는 듯이 작게 혀를 찼다.



『별거로 놀라네. 아직 불완전하다고는 하나, 어머님은 신의 경지에 오른 리아 님아를 제압해 엉덩이팡팡을 작렬시켰다고? 그 재능의 편린만으로 어느 정도일지 대충 짐작했잖아? 이 대륙을 넘어, 이 세계에서 가장 포텐셜이 높은 존재라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어.』


폴스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애당초 리아 본인도 필리아의 잠재력이 굉장하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도 월등하다는 것도.


‘뭐어······ 강해질 계기가 되어준 건 리아 님이시지만.’


제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걸 갈고닦지 않으면 돼지 목의 진주다. 보이지 않는 뭔가에 쫓기듯 열심이었던 자신의 딸, 리아가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지 않았다면 분명 꽃피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향상심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보다 다른 녀석들―― 그 마족 놈들은 어땠어?』


싸늘하게 식은······ 능청스럽지만 다정다감한 서드가 말한 것이라고는 선뜻 믿기 힘든 음성이었는데, 그 말속에는 은은하지만 살기마저 어려있었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나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살을 찌르는 어두침침한 기운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감돌았다.


그만큼 이건 중요한 일인지라 폴스도 귀찮다는 감정을 지우고는 신중히 말을 골랐다.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 그대로야. 전원 리아 님께 충성을 맹세했어.』

『믿을만했어? 혹여나 리아 님아의 자비를 이용하는 거 아냐?』


그 쓰레기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이것은 모두의 공통된 생각으로, 폭탄이 터지듯 흉흉한 기척이 [염화] 너머로 뚜렷하게 퍼졌다.


폴스도 이전 마족들이 벌인 짓을 떠올리면 분노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튀어 나가 최대한 괴롭게 찢어발기고만 싶다. 그만큼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짓거리를 무한히 반복해왔다.


하지만 진정하고 마음을 편안히 가라앉혔다. 왜냐하면 그건 리아의 뜻에 반하기 때문이다. 주인의 의지가 그러하다면 하찮은 종의 분노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맹약]도 걸려있는 데다, 성지에는 찬크에르레이의 결계도 있어. 우려할 만한 사태는 일어날 수조차 없어. 게다가 내가 볼 땐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한 듯해.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아마 목숨을 내버리고 적지로 뛰어들라고 하면 전원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네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단언할 수 있어?』

『나도 마음에는 안 들어. 하지만 리아 님에 관련된 걸 허투루 말할 순 없잖아? 울화 터지지만 사실이야. 다들 리아 님을 신앙하고 있어.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명줄이 길군.』

『웬일로 말이지. 그렇지만 이 세계의 존재들은 어리석잖아? 시간이 지나 달라질지도 모르니 소멸시키고 싶은 욕구는 그때까지 참아둬. 아아. 혼자 독차지하면 안 된다? 모두 사이좋게 나눠 가져야지.』

『그래······.』

『수긍했으면 다들 기운들 좀 가라앉혀. 주위에 있는 놈들 다 얼어 죽겠어~』


후우······.


길게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오더니 잠시 다들 명상에 잠겼다. 다른 때라면 굳이 저러지 않아도 바로 수습했겠으나, 대역죄를 밥 먹듯이 저지른 바지탄스들이 얽혀서인지 진정하는데 조금 시간이 소요됐다.


‘나야 먼저 만나봤으니 그나마 괜찮지만······ 첫 만남 땐 참기가 영 힘들었지. 라프리트······ 그분도 상당히 참는 데에 곤욕을 치른 느낌이었지? 과연 리아 님의 진정한 친구시랄까.’


영겁의 시간 동안 쭉 리아의 하나뿐인 친구로 있어 준 라프리트, 그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자니 자리를 정리하는 퍼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자. 우중충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지. 다른 궁금한 게 또 없나?』

『음······. 뭐가 더 있나?』

『리아 님은 취침하셨나요?』

『그거까진 모르겠네. 일찍 집으로 돌아가시긴 했는데. 헤헤. 무척 행복해 보이셨어.』

『다행이로군요.』

『그러게. 요즘 귀찮게 하는 일들이 많아지셔서 염려됐는데 말이야.』


리아의 행복은 넘버즈의 행복. 무엇보다 반길 희소식에 다들 따스하게 미소 짓는 분위기를 띠었다.



『너는 뭐 하고 있어?』


모처럼 기분 좋게 묻는 세컨드의 질문에 폴스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누워있지. 옛날에 리아 님이 주무셨던 침상에서.』

『하아······?』

『그 있잖아? 촌장님의 서재 겸 연구실. 거기 있는 침상에 누워있어. 리아 님의 담요를 덮고······ 앗!』


폴스는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늦었다. [염화]에 연결된 상대 전원이 자신과 같은 사도. 새어나온 말을 듣지 못했을 턱이 없다.


곧장 날이 선 말들이 날아든다.



『우후후······. 이거, 자세히 들어봐야 할 거 같은데? 뭘 어쩌고 있다고?』

『그러하군. 그야말로 중대 사안이 아닌가. 어째서 가장 먼저 이실직고하지 않았나?』

『자자, 폴스. 우리의 중재 권한을 맡은 퍼스트가 저리 말하잖아요? 어서 말씀해보세요.』

『그, 그냥······. 눈앞에 보이길래······.』

『그런 부러운?! ――아, 아니, 보인다고 냉큼 리아 님의 담요를 덮는다고?!』

『그래요! 지금 당장 [기억공유]로 모두와 경험을 나누도록 하세요!』

『어, 그게······.』

『뭐야. 지금 시건방지게 혼자 독차지할 생각이야?!』


내심 자신만의 특권으로 여기려고 했으나 그러긴 힘들 듯하다. 놓치지 않겠다는 양 다 함께 밀어붙인다.


이해는 한다. 사도라면 리아의 물품은 무엇보다도 가치가 큰 보물이었으니.


하지만 그렇기에 이걸 나누기엔 아무래도 주저됐다. 제아무리 소중한 동료들일지라도.



『꽤 길어질 거 같은데, 난 괜찮으니 이만 가도 될까?』


서드의 말은 공허하게 울려 퍼졌고, 그렇게 나트알에서의 밤은 깊어갔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아... 진짜 오랜만에 인사드리네요.

사실 번아웃이 와서...

미리 알리기라도 했어야 됐는데 미처 신경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명절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어찌어찌 집필하여 업로드 하네요.


늦었지만...

다들 즐거운 명절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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