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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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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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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1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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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쪽

216

DUMMY

조용했다. 이 이상은 표현할 길이 없을 완전한 적막이었다.


이따금 들려오던 공포와 고통이 가득 찬 비명조차도 이젠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추적추적, 여기저기 물방울이 흐르는 소리만이 시간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올 따름이었다.


――라프리트는 그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들이 붉다. 언제나 다니던 통학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꽃밭,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고풍스러운 학사 건물, 베르다드의 상징인 새하얀 장벽 등등, 눈이 닿는 모든 게 전부 붉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악몽. 그야말로 질 나쁜 악몽을······


너무나 끔찍하였다. 그러니 얼른 이 악몽이 깨길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신은 왜소한 인간의 기도 따위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시큼하고 비릿한 악취가 코끝을 찔러 잔혹하게 현실임을 인식시켰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존재가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님을 알려줬다.



“라프리트 님~ 이제 다 끝났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친구의 목소리다. 아니, 이 당시로서는 처음으로 들어보는 생기발랄한 목소리였다. 생글생글, 얼굴에도 처음 보는 함박웃음이 지어져 있어, 나이에 비해 훨씬 순수하고 청초해 보였다.


그런 친구가 손을 잡아 왔다.


귀족으로서 바깥에서 타인이 손을 잡는 것에 조금은 저항감이 있었다. 그러나 친구인 그녀가 하는 것이기에 눈치보다는 기쁨이 앞섰다.


다른 때였다면······.



“시, 싫어!”


끈적하면서도 질퍽거리는, 그 끔찍한 감촉에 무심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아······ 그러네. 나 피범벅이구나. 확실히 소스라칠 모습이네. 이래서야 라프리트 님께 실례지.”


쫘아아악······.


아마 [청결]을 사용한 것이리라. 거친 물방울 소리를 내며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던 핏물이 흘러내렸다.


때 하나 남지 않은 그녀는 마치 이 지상에 강림한 달의 여신처럼 보였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정말 아름다운 나머지 시간마저도 넋이 나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까 싶었다.


······그 이질적인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눈길이 뺏겨있는 사이 그녀에게서 흘러내린 핏물이 발밑에 닿았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그 불결함에 몸은 자동으로 뒷걸음질 쳤다.


차박······.


물웅덩이를 밟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허벅지로 튄다. 그리고 미지근한 온기가 그곳에서부터 퍼진다.


친구에게서 흘러내린 핏물은 아니다. 그건 분명하게 피했다.


아니, 피했다느니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짓이었다. 왜냐하면 서 있는 모든 곳이 피로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앞뒤, 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피다.


피의 바다다. 피의 바다가 발아래 펼쳐져 있다. 그곳에 존재하는 거라고는 일부의 살점과 하얀 뼈, 그리고 소화가 덜 된 음식물 찌꺼기와 분뇨들이 전부였다. 그것들은 아직 온기를 품고 있었다.


구역질이 몰려왔다.



“우욱!”

“라, 라프리트 님?! 괘, 괜찮아요?!”


달의 여신 같은 친구가 깜짝 놀라며 다가온다.


하지만 너무 현실감 없는 광경에 얼이 빠졌었던 안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앞을 막아섰다.



“으음······. 시종 씨? 비켜줄래? 라프리트 님의 등을 두들겨 주고 싶은데?”


안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양팔을 벌려 한사코 앞을 가로막았다.


끔찍한 광경에 두려움이란 감각이 마비된 건 아니었다. 미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안네는 쓰러질 것만 같으면서도 꿋꿋이 서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리 생각하면서도 라프리트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차박. 차박.


고요한 가운데, 벌벌 떠는 안네의 움직임에 맞춰 피의 웅덩이가 출렁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응. 좋은 눈이야.”


현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말한 친구가 안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대충 그런 것 같았다. 아직 빈속을 게워 내고 있는 라프리트로서는 정확히 무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더불어 안네가 어떤 표정인지, 무슨 심정으로 자신의 머리에 손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무섭다는 감정뿐―― 가족이 죽을 것이라는 절망감에 휩싸이는 것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강해져. 뭐가 오더라도 라프리트 님을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지는 거야.”

“······에?”


놀라는 안네를 뒤로하고, 가볍게 손을 턴 친구는 천천히 옆을 스쳐 지나갔다.



“잘 지내세요, 라프리트 님.”


너무나도 다정한, 친근하고 상냥한 음색이었다. 언제나 듣던······.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는 미친 것도, 정신이 망가진 것도 아니었다. 하나 변한 것 없이 함께 웃고 떠들던 그때 그대로였다.



“이, 이스피리아 양······!”


안 된다. 절대 이대로 헤어지면 안 된다.


당시에도 그것을 분명하게 느꼈고, 눈물과 위액을 쏟아내면서도 온 힘을 짜내어 간신히 친구를 불렀다.


친구는 무시하는 듯했다. 추한 이쪽의 꼬락서니를 보기 싫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천천히 걷는 게 느려지더니, 이윽고 그녀는 멈춰 섰다.


그랬다······.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비단처럼 고운 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인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를 보니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미친 게 아니었다. 미친 사람이 어찌 저리도 슬픈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 가면 안 돼······.”


완전히 쉬어버린 목에서는 뒤틀린 소리가 간신히 나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쥐어짜 말했다. 가지 말라고······.


절대 보낼 수 없다.


그 간절한 마음이 담긴 말에 친구는 상냥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뒤를 가리켰다. 방금까지 본인이 서 있던 장소를······.


그곳에는 방금까지 살아있던 사람의 잔재가 남겨져 있었다.


가득······. 언덕을 이룰 만큼 많이······.


평범하게 죽은 사람은 없다. 불에 타고 녹아내리고, 얼어붙어 부서지고, 날카롭게 찢기고 뚫리는 등등, 제대로 형체가 남지 않았다. 그것들은 고깃덩어리 혹은 찌꺼기 같은, 시신이 아닌 무언가였다.


저것들을 통해 친구는 말한 것이었다. 저 참상은 분명히 자신이 일으킨 것이라고. 그러니 이젠 함께 어울릴 수 없다고.


재차 무섭고 두려웠다.


이 지옥도를 ‘맨정신’으로 만들어 낸 친구가······.


그렇기에 다시금 헛구역질만을 했다.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위해······ 더는 위액도 나오지 않는 속을 필사적으로 게워 냈다.


친구가―― 이스피리아가 갈 때까지.


방금까지 소중하니 뭐니 했건만 잘도 손바닥 뒤집듯 태세를 바꾼다.


이것이 라프리트라는 여자였다. 공포에 굴복하여 자기 한 몸 챙기기에 급급한, 한심하고 시시하기 짝이 없는 여느 영애에 불과했다.


후에 이날의 선택을 평생토록 후회할 것임을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라프리트라는 인간은 멈추질 않았다. 그녀가 떠날 때까지―― 언제 떠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오직 속 안을 게워 내는 데에 급급했다.


그리고 신은 이런 추레한 여자를 가만두고 보지 않았다. 곧장 그녀를 붙잡지 않은 후회를 일깨운 것이었다.



“으으······.”


그녀가 떠난 휑한 공간에서 신음 소리가 났다.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황량한 지옥도에 산 자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으니.


하지만 다시금 신음이 들려왔다. 멋대로 단정 짓지 말라는 듯 선명하고 또렷하게.


인식했을 때는 미친 듯이 내달려 산처럼 쌓인 살점들을 파헤치고 있었다. 다급히 안네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날카롭게 잘린 뼈와 장비들의 파편에 손이 베이지만 멈추지 않고 파헤쳤다.


그리고 발견하였다. 아직 숨을 내쉬는 생존자를······.


놀랄 틈도 없이 숨을 들이켜고는 피와 오물에 잠겨있는 생존자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닦아줬다.



“하, 학원장님······.”


겨우 발견한 리카드. 그의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콧대를 가로지르는 긴 자상으로 인해 왼쪽 눈은 실명. 꽈배기처럼 비틀린 왼팔은 손가락마저 뭉개져 있었으며, 오른팔도 팔목이 부러져 너덜거렸다. 다리 또한 성하지 않아 대퇴부가 부러져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종아리도 엄지 크기의 구멍이 숭숭 뚫려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자잘한 상처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반송장이라 불러도 무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리카드는 살아있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이상하고······ 의아했다. 과열되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던 머리가 돌연 차분해질 정도로······.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아, 아가씨······”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런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내달렸다.


그렇지만 한 번 냉정해진 머리는 신속하게 판단을 내렸고, 그 즉시 안네에게 리벨리타스의 문장이 그려진 목걸이를 풀어 건넸다.



“안네, 학원장님을 봐주고 있으세요. 그리고 곧이어 올 기사단 분들께 사정을 설명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안색이 나쁜 안네에게는 미안했지만, 누군가는 남아야 했다.


안네가 기다리라며 소리치지만, 곧장 서둘러 움직였다.


그렇게 씁씁한 피의 맛이 나는 침을 삼키고는 교내를 활보했다. 아직 살아있을 생존자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교수동이었다. 생각한 것이 맞다면 분명 생존자가 있을 터였다.


그 예상은 적중하여, 교수동에 들어서고 좀 나아가다 보니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흐느끼는 인기척이 들렸다.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그리 멀지 않은 연구실 구석에, 피투성이가 된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한 교수가 있었다.



“괜찮으세요, 부 학원장님?”


다가올 줄도 모르고 세리오는 몸을 떨었다가, 뒤늦게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울음보를 터뜨렸다.


많이 겁먹은 듯하나, 그녀는 상처 하나 없이 성했다. 뒤집어쓴 피도 본인이 아닌, 오면서 보았던 사람들의 것이었다.



“이, 이스피리아 양이······. 어째서 이런······.”


말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억지로 미소를 만들어 내어 다정하게 세리오의 등을 쓸어줬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그보다 학원장님이······.”

“리카드 님? 아. 그래. 리카드 님! 리카드 님은 어디에······? 설마······?”

“아뇨. 무사는 하십니다. 하지만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셔요.”

“어, 어디?! 어디에 리, 리카드 님이 계시나요?! 제발 저를 그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두려움도 잊고 세리오는 간절히 옷깃을 붙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수색하고 싶었다. 분명 생존자가 더 있을 테니. 그러나 지금은 세리오를 우선하여 간신히 진정시킨 그녀를 데리고 돌아갔다. 세리오는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따라왔다.


돌아온 그곳에는 이미 기사단이 도착해 있었는데, 그들은 참혹한 현장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청하니 서 있었다. 일부 비위가 약한 자들은 거칠게 속을 게워 냈다.


세리오는 그런 그들을 제치고 리카드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안네의 품에 안긴 리카드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기사들이 진정하라며 말렸다. 그렇지만 광분한 세리오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부 학원장다운 실력으로 한순간에 얼음의 벽을 세우고는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하였다.


치유사가 왔다며 설득해 보아도 무리였다. 세리오는 품에 리카드를 꼭 안고는 절대 죽게 놔두지 않겠다며 되뇌었다.


그리고 잠시 후······, 리카드의 몸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세리오, 그녀가 마법을 쓴 것이었다.


발동어는 없었다.


그렇다. 심상마법이었다. 사모하는 남자를 살리고자 한 마음이 그 재능을 개화시킨 것이었다.


리카드의 몸은 치료됐다. 하지만 이제 막 사용하게 된 [치유]는 완벽하지 않았고, 그의 몸에는 많은 흉터가 고스란히 남았다. 손상된 안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완치에는 이르지 못했고, 더 이상 그의 왼쪽 눈은 빛을 볼 수 없었다.


······이것이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치료였다.


기사단과 함께 온 사제는 쓸모가 없었다. 그의 능력은 경상의 치유가 전부. 기껏 해봐야 간신히 숨을 붙여 놓는 것에 그친다. 실제로도 사제는 겨우 생존자 3명의 잔 상처를 치료하자 바로 마력이 고갈됐다.


분명하게 말해 짐이다. 일선에서 활약하는 기사들과 함께하기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다.


그렇지만 이때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왜냐하면 치유사의 임금이 너무나도 비쌌기 때문이다.


인디아의 지시가 있었던 지금과 달리, 아무런 제지도 없는 이 당시 치유사들의 몸값은 점차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윽고 개인으로서는 아예 부릴 수조차 없게 됐으며, 나라에서마저도 쉽사리 쓰기 망설여지는 수준에 이르게 됐다.


그럼에도 효율상 치유사는 꼭 필요했고, 아쉬운 대로 넣은 사제는 그 기대만큼이나 형편없었다.


이 말로가 바로 리카드다.


[치유]도 만능이 아니다. 신체의 결손이나, 시신경 같은 복잡한 부위는 고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것이다.


안구의 치료라면 말할 것도 없다. 못해도 2급 신관이 필요하다. 하지만 2급 이상의 신관은 모두 세인트리안에 있다. 물리적으로 하루 만에 다녀올 거리가 아니기에 리카드의 눈이 나을 가능성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성녀를 데려오더라도 무리였다. [정화]를 비롯하여, 1급 신관 이상의 [치유]를 쓰는 성녀일지라도 흉터가 한계다. 시일이 지난 안구까지 고치진 못한다.


인간 중에서 그런 게 가능했던 것은 오직 이스피리아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성녀 후보가 될 수 있었고······, 이 사달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생존자는 채 20명도 안 되는 소수. 하지만 라프리트만큼은 눈치챘다. 아니, 살아남은 자들도 전원 알아차렸다. 자신들이 운이 좋아 산 게 아니라는 것을······.


리카드와 세리오는 물론이고, 일부 교수와 필므, 츠카, 그리드, 닐, 레온하트, 레스, 그리고 룸메이트인 셀레스테 등등, 생존자들은 모두 이스피리아와 면식이 있었던 거다.


좋은 관계였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 어느 정도 아는 사이였음은 분명했고, 그 덕에 그들은 이 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만······ 살아남아서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이 지옥도를 본 것이다. 정신이 건강한 사람마저도 미칠 엄청난 트라우마로 인해 일부는 집에 틀어박히고는 밖으로 다시는 나오질 않게 됐다. 그렇지 않은 이들도 외출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생각해 보면 필연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찌 보면 그게 차라리 나은 선택이기도 했다. 대귀족의 자제와 영애 등, 약 4,000명이 죽은 이 참극은 이후 전쟁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에는 진지하게 전쟁을 준비하는 곳은 없었다. 그야 이스피리아는 혼자이지 않은가.


그나마 수도에서 사건이 발생한 벨루디스만큼은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이조차도 그저 극악무도한 범죄자 취급에 불과했다. 결코 국가의 지지기반이 흔들릴 사안이라고는 보지 않았다.


정말 이 사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겨우 생환한 딸을 감금하다시피 별장에 가둔 리벨리타스 후작도 그러했다. 절대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고, 우리들은 분명 길을 잘못 나아가고 있으며, 이대로라면 전면전으로 이어진다고 간절히 호소했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오히려 딸이 정신적 충격이 크다며 전혀 엉뚱한 곳을 걱정했다.


물론 후작의 생각이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큰일을 당한 건 사실이고, 나라 대 개인은 그 규모의 차이로 인해 애당초 전쟁이 성립할 수 없는 구조이니까.


혼자서는 한 국가를 이길 수 없다. 그래. 그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스피리아, 그녀는 초월자인 것이다. 전설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그 힘은 일기당천 하여 구름을 가르고 땅을 찢는다고 알려졌다.


다만, 초월자에 도달한 자는 적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초월자에 도달했는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는 판국이다. 그 탓에 초월자란 존재는 극히 일부만 아는 전승이 됐고, 각국이 이 사태를 여유롭게 보는 실정이 됐다.


어리석다. 너무 어리석은 나머지 화조차 난다.


세기의 대마법사 리카드는 물론이고, 수많은 교수, 각 나라에서 모인 엘리트들이 있는 베르다드가 함락당한 것이 아닌가. 도대체 무얼 근거로 저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일 따름이다.


더군다나 이 사건은 다름이 아니라 하얀 악몽―― 후에 그 이명을 모르는 이가 없는 그녀의 첫 발자취이거늘······.



“많이 지친 듯하구나.”

“그래요. 푹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틀렸다. 부모님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놔줄 마음이 아예 없다는 게 크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감금되고 말리라. 지체되면 더는 돌이킬 수 없는데 이 무슨 태평함이란 말인가.


설득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은 그날 안네와 함께 저택을 탈출했다.


첫 가출에 대한 설렘은 없다. 쉬는 것조차 아쉬워하며 이 대륙에서 가장 빠른 비젠탈에게로 향했다.


아직 채 수습되지 않은 베르다드의 경계는 무척이나 삼엄했는데, 후작 가의 영애라는 신분과 생존자로서 추모하고 싶다는 변명으로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출했다는 것이 발각될 테지만, 어차피 그때는 이미 벨루디스에 없을 테니 개의치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비젠탈은 관사에 평온하게 있었다.



“어째서 가만히 계셨는지 묻고 싶지만 그건 됐어요. 어차피 자업자득이니.”


비젠탈은 건국왕과 함께했던 대마수다. 결계로 약화된 이스피리아와 전투를 벌였다면 이기진 못했어도 모두가 대피할 시간 정도는 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있던 당시 그는 이곳에 가만히 있었다. 이스피리아도 굳이 그와 기마들을 헤칠 이유는 없어 이곳에 오진 않아, 다른 곳과 다르게 관사는 전투의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개인적으로는 왜 가만히 있었는지 듣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 한 시가 아쉬운 터라 용건을 말했다.



“더는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아요. 막으려면 지금뿐이에요. 부디 이스피리아 양―― 제 친구를 위해 힘을 빌려주세요.”

《정작 그 친구가 힘들 때는 내버려 두고, 이제 와 힘을 빌려달라?》


대마수라 하여도 동물에게 말을 건다니······. 다른 때였다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상황이 상황이지만, 분명 알게 모르게 망가져 있었겠지. 그 덕분인지 말의 울음소리가 아닌,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것이 만능언어를 깨우친 것이라는 건 한참 지난 뒤에야 알았다.



“말씀대로 분명 저는 그녀가 괴롭힘을 받고 있을 때 보고만 있었습니다. 귀족의 체면치레 같은 것을 따지느라. 그래 놓고는 모른 척 웃는 얼굴로 뻔뻔하게 말을 걸고는 했죠.”

《가장 잘못한 것은 단연코 하찮은 괴롭힘 따위를 즐긴 놈들이다. 그러나 말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도 그런 자가 없었고, 수명이 다한 자를 살리지 못했다는 불합리한 연유로 사형 명령까지 내렸다. 그것도 모자라 불복하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를 쫓아 가족의 묘소를 망가뜨리고 행패를 부렸다. ······정녕 이게 마음을 가진 존재로서 할 짓인가?》

“아뇨. 죽어 마땅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비젠탈은 이스피리아를 막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건국왕과 지키려 했던 백성이 아니기에.


어쩌면 겨우 이런 자들을 구한 것이냐며 후회했을지도······.


심정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렇지만 이쪽도 물러날 순 없었다.



“염치가 없다는 건 압니다. 저 또한 그들과 함께 죽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무얼 하려는지 알게 된 이상 죽어도 죽을 수 없습니다.”

《······막겠다는 건가?》

“처음부터 그리 말씀드렸습니다. 그녀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설령 그녀의 손에 죽게 되더라도 막을 겁니다. 그것이 끝까지 믿지 못하고 제 안위만을 챙긴 저에 대한 벌입니다.”

《가족과 다른 인간을 위해?》

“제 소중한 친구를 위해섭니다. 가족과 인간 모두가 죽어 나가는 것보다, 친구의 마음이 상처받는 게 훨씬 더 두렵고 고통스러우니까요.”


그 미쳐버릴 듯한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다.


순수한 이 마음은 이미 광기와도 같은 것으로 변질. 확실하게 어딘가가 삐걱거리며 어긋났을 게 분명했다.


비젠탈은 잠시 잠자코 쳐다봤다.



《힘을 빌려주겠다. 지금 그 마음을 잊지 말아라.》

“예. 감사합니다, 비젠탈.”


종을 떠나 순수하게 고마웠다.


재차 감사를 전하고는 근처 기수의 안장을 비젠탈에게 걸었다. 그리고 안네와 함께 올라탔다.


종전 이래로 등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비젠탈을 탔다는 것에 감흥은 없었다. 그딴 것보다는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우선 제국으로 가주세요.”


대마수라는 명성에 걸맞게 비젠탈은 공중을 박찼고, 눈앞이 흐려지는 듯한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내달렸다.


그렇게 감속이 된다 싶더니 어느새 황성에 도착했다.


황성은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침입자로 인해 잠시 소란이 벌어졌다. 그렇지만 위용이 넘치는 군청의 말이 비젠탈임을 직감하고는 간단한 사정 청취만을 마치고 바로 옥좌의 방으로 안내됐다.



“그럭저럭 우수하다는 평판을 듣긴 했다만······ 설마 기본적인 예의도 없을 줄은 몰랐군.”

“저에 대해선 뭐라 하시든 좋습니다. 아니면 무릎이라도 꿇으면 되겠습니까?”

“호······.”


옥좌에 턱을 괴고 거만하게 앉은 칼윈 황제가 품평하는 듯한 차가운 눈으로 훑어봤다. 미처 몰랐지만 아마 마안으로 존재감을 보는 것이었을 거다.



“이게 그럭저럭이라니 벨루디스는 사람 보는 눈이 없어도 너무 없구나.”


역시나 소문 따윈 믿을 게 못 된다며 황제는 피식 웃었다.


황제가 어떤 소문을 들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소문은 그리 틀리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우물쭈물 눈치만 보며 딱히 특출난 부분도 하나 없던 자신이었기에.


하지만 부정하지 않았고, 한결 가벼운 분위기가 된 황제가 가볍게 손짓했다.


옥좌의 방에 있던 대신들은 예를 취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부동제가 웃었다는 것에 제법 놀라면서.



“필시 중한 사안이겠지. 앞선 무례는 용서한다. 편히 용건을 말하도록.”

“온정에 감사드립니다.”


예를 보이고는 갑자기 찾아온 용건을 말했다.


황제는 고심스러운 얼굴로 턱을 짚었다.



“병사들을 물리라? 벨루디스와도 이미 협의가 끝난 문제이다만?”

“네. 병사들을 물려주십시오.”

“농담······ 따위는 아니로군. 한데 당사자이면서 벌써 잊은 것이더냐? 베르다드의 학살극에서 희생된 제국민은 총 711명. 귀족의 자제는 126명이고, 그중에는 샤라즈 공작의 적자도 끼어있다. 그만한 수가 죽었건만 병사들을 물리란 말이렷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이라면 711명으로 끝낼 수 있습니다.”

“허허. 내 평생에 이처럼 황당한 진언은 처음이로다······. 진정 네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이해한 것이더냐?”

“물론입니다.”

“······.”


살짝 화가 나는지 황제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리벨리타스의 영애여, 만약 너의 말에 따라 군을 물리면 어찌 보이겠느냐. 우리 제국은 계집 하나가 무서워 싸우길 포기한 겁쟁이가 된다. 즉, 적대하기가 두려워 패배를 선언하는 꼴이란 것이다.”

“정치적 명분이 필요하다는 말씀인지?”

“그렇다. 군을 움직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철군 또한 마찬가지다. 기분에 따라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문제없습니다.”

“명분이 있다?”

“네. 패군이라면 명분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까?”

“우리 군이 진다? 단 한 명의 계집에게······?”

“제국군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모든 군이 패배합니다.”

“······직접 이스피리아의 무력을 보았기에 나온 결론이 그거라고? 그렇기에 711명으로 그만 끝내라고 하는 것이더냐?”

“전면전이 되어 이 수도가 불타는 것보다야 낫지 않습니까?”

“크하하핫!”


진심으로 유쾌하다는 듯이 황제는 폭소를 터뜨렸다.



“이거 참 걸작이로군. 비젠탈까지 타고 와서 한다는 말이······. 크큭. 제법 탐이 나는 인재 같아 보이지만 역시 아직 어리군.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 현실 감각도 떨어지고 말이야. ――아니, 그 참상에서 살아남았기에 부풀려서 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부풀리기는커녕 저는 오히려 축소하진 않았을까 염려합니다만?”

“됐다. 이제 알겠으니 그만하면 됐다.”

“······.”


귀찮다는 듯 말하는 황제. 더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예상했던 일이기는 하다. 쉽게 납득될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물론 그 대가는 본인들이 알아서 받을 것이다.


아쉬움도 없이 몸을 돌렸다.



“벌써 가는 것이냐?”

“예. 다른 곳도 들려야 해서.”

“건투하길 빌마.”

“말씀 감사합니다.”


묵례로 인사를 하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퇴실하기 전에 돌아봤다.



“어차피 고려하지 않으실 테지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무엇을?”

“어째서 비젠탈이 함께―― 저에게 힘을 빌려주게 되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


어찌 받아들일지 결과가 뻔했지만, 기왕이면 이대로 잘 끝났으면 하는 것도 사실이기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것을 끝으로 제국을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공국이었다.


이번에도 순식간에 도착했고, 제국과 마찬가지로 사정을 설명하니 곧장 공왕을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왕 폐하.”

“으음······. 그렇구나. 오랜만이로다.”


이번 미래와는 달리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공왕에게 아까 이야기했던 것을 말했다.


반응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제와 똑같이 군을 물리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고, 아무 근거도 없는 패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본인들이 질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뿐이랴, 정신적 충격으로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안위를 걱정하기에 이른다.


실망하진 않는다. 여기도 그저 글렀을 뿐이니 말이다.


다만, 왜 비젠탈이 함께인지를 생각해 보란 마지막 말 만큼은 진지하게 들어줘서 좀 의외였다.


그렇게 다음 곳으로 가기 위해 걷고 있으니, 정면에서 낯익은 사람이 다가왔다.



“어머? 벌써 돌아가시어요?”


밝게 웃으며 말을 건 사람은 공국의 빛이라 불리는 그녀,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였다. 그 곁을 언제나 지키는 레딧츠도 살며시 묵례로 인사를 건네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공주님.”

“그러네요······. 한 3년 만인가요?”


소베르비아와는 동급생이었다. 아주 잠시······. 표면상의 이유로는 건강이 악화하여 베르다드 입학 후 반년도 안 되어서 그녀는 공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3년 만에 만난 기분은 안 든다. 그녀와는 줄곧 만났었던 느낌이다.



“졸업식이건만 큰일을 겪으셨다고 들었어요.”

“청산유수시네요. 그리되길 바란―― 도리어 부추기기까지 하신 분이······.”

“제가요?”

“괜한 연기는 됐습니다. ······아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마음껏 즐기시죠. 분명 다음은 여기일 테니.”

“그 계집이 이 나의 공국을 치기라도 한단 말씀인가요? 그게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가능하고도 남는다고 보입니다만?”

“개인이 국가를 상대로······. 겨우 베르다드 하나를 무너뜨렸다고 호들갑이시네요. 후훗. 공상 소설을 너무 많이 보신 듯하시어요.”

“집사님? 당신도 공주님과 같은 의견인가요?”

“······.”

“응? 잠깐, 레딧츠······?”


자신의 충직한 신하는 즉답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게 되자 소베르비아의 눈이 커졌다.



“발언을 허가 한다니까?”

“닦달하셔도 대답하시기 곤란할 겁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아~ 그게 원래 성격이군요. 뭐, 맨날 고고한 척 굴면서 시비를 걸어댄 터라 알고 있었지만요. 그리고 저도 알 건 압니다.”


기분이 상한 듯 미간이 찌푸려진 소베르비아를 놔두고, 무표정한 그녀의 집사에게 시선을 뒀다.



“저는 가문이 가문인지라 항간에는 퍼지지 않은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자랐죠. 그리고 그중에는 유구한 세월 동안 암살의 업을 이은 카딜라신디에 대한 것도 있었습니다. 카딜라신디의 수령, 그자는 허상과도 같은 신기루라고······.”

“뜬금없이 뭔 소리야?”

“그냥 이상했을 뿐입니다. 예전에 공국에서는 대규모 숙청이 있었잖아요? 그만한 규모라면 필시 본인 차례쯤은 예상할 터.”

“그런 막다른 길에 몰린 놈들이 암살자를 준비한다?”

“거의 일족이 몰살당한 숙청입니다. 무조건 최고의 암살자에게 의뢰하겠죠.”

“그렇겠지.”

“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왕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어보질 못했네요. 대상은 반드시 제거한다는 카딜라신디에게 의뢰했을 텐데.”

“이 나의 공국에는 디카이로트 경이 있어. 퇴치당했겠지.”

“무결의 기사님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분의 몸은 하나. 자제분 모두를 지키기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뭐, 아무래도 좋겠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는 한다는데.”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되묻는다. 조금 막 레딧츠의 반응도 예측하지 못했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소베르비아와는 그리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 영특함은 톡톡히 느꼈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모습에서는 경악을 넘어 신비롭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녀도 인간. 너무나도 당연히 완벽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소베르비아의 허점이자 실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완벽한 인간이라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 대가는 쓰게 받을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자신에게 다가올 그것을 모른다니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최대한 연민을 담아 말했다.



“베르다드에서 일찍 귀향한 공주님은 모르시겠지만, 제 친구―― 이스피리아 양은 배우시는 게 무척 빠른 분이세요. 보는 사람이 기겁할 정도로. 지난번에 뵀을 때는 언제 그런 걸 배우셨는지 사라지시는 듯 움직이시더라고요. 예. 마치 신기루처럼······. 무척이나 신묘한 나머지 학원장님은 물론이고, 교수님들과 학생들도 속수무책이었죠.”

“······.”


완전히 무표정으로 변한 소베르비아를 보며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그 이름도 높은 카딜라신디가 실패한 첫 암살이 혹시 이스피리아 양이 아니신지요?”


소문이라는 것은 과장되기 마련이지만, 보통 없는 일에서 시작하진 않는다. 하물며 리벨리타스 후작이 근거도 없는 소리를 딸에게 할 리도 없다. 조심하라며 경고한 것이기에 더더욱.


즉, 카딜라신디의 수령은 신기루 같은 움직임을 한다거나 그리 보인다는 소리다. 그리고 앞선 정황들을 따져 보았을 때 수령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 레딧츠다. 그렇기에 공왕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거다. 의뢰를 할 카딜라신디는 이미 소베르비아의 휘하에 있으니까.


그런 레딧츠이니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터다. 자신의 기술이 결코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습득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임은 자명했고, 암살에 실패해 본 바, 이스피리아의 저력이 짐작됐을 것이다.


정면으로 그녀와 맞붙으면 어찌 되는지······.


그래서 그는 주인의 물음에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으리라.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제 추천은 군을 물리고 공주님과 집사님, 그리고 암살에 연루된 자들의 목만 내놓는 것입니다만······ 완전무결하신 공주님이시라면 뭔가 방도가 있으시겠죠. 모처럼 담화를 나눌 수 있어 즐거웠고, 부디 좋은 소식이 있길 빌겠습니다.”


나름 충고를 하긴 했지만, 소베르비아는 자존심 때문에 듣지 않을 것이다. 레딧츠 또한 주인의 목을 내놓는 선택지를 취할 리가 없고.


솔직히 소베르비아에겐 좋은 감정이 없다. 그렇지만 미운 정이라도 있으니,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 될 그녀에게 정중히 예를 취해 작별 인사를 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안네와 기다리고 있던 비젠탈은 결과를 묻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봤다. 이에 분노를 담아 말했다.



“최선을 다해 말은 해봤지만, 체면 차리기에 급급하네요.”

《······다음은?》

“세인트리안으로 부탁하고 싶은데, 혹시 이스피리아 양의 마력을 느끼실 순 없나요?”

《바로 앞에 있는 게 아니라면 무리다.》

“그런가요. 어쩔 수 없죠.”


아쉬운 마음을 달래고 세인트리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비젠탈의 위광 덕분에 곧장 교황과의 면담이 성사됐다.


신관의 안내로 도착한 장소는 대성당 안에 있는 소박한 야외 정자였다. 이는 교황의 의향으로, 말하길 800년 만에 만나는 비젠탈과 해후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이윽고 도착한 교황은 미소 띤 얼굴로 비젠탈에게 왔다.



“오. 반갑네, 비젠탈. 실로 오랜만일세. 잘 지냈나?”

《평범했다. 자네는?》

“나야 무탈했지. 한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왔는가?”

《저 아이가 바란 것이다.》

“흠. 못다 한 해후를 즐기고 싶다만,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지. 그······.”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입니다.”

“그래. 예는 됐으니 편히 앉게나.”

“감사합니다.”


교황은 사용인인 안네도 편히 합석하게끔 권했다. 정점이라는 직책에 어울리지 않게 친절하다고 할까, 교황다운 너그러움과 관용이 있는 사람 같았다.


――이땐 이리 느꼈었다.


하지만 착각이었음을―― 이 자는 결코 교황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알게 됐다.



“군을 물리는 데에 협조해달라······. 확실히 많은 이들이 죽긴 했으나 그보다 더한 희생자가 나온다면 막아야 하겠지. 비젠탈이 동행했으니 영 허튼 주장만은 아닐 테고.”

“그럼?!”

“아아. 잠시 기다려 보게.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네.”

“무엇이 궁금하신 겁니까?”

“――자넨 어떻게 살아남았지?”

“네······?”

“모욕할 셈은 아닐세. 하지만 자네의 마력레벨은 겨우 63. 기척으로 보아하니 마법 또한 변변찮은 것들만 쓰는 실력이겠지. 그런데 당최 무슨 수로 학원장과 교수, 학생들이 몰살당한 현장에서 살아남았는가?”

“······.”

“비젠탈이 경고할 정도의 강자가 놓친다는 건 있을 수 없지. 깜빡이나 변덕이라는 것도 말이 안 돼. 그런 성격이었다면 애초에 교내를 돌아다니면서 학살을 자행하지도 않았겠지. 정 귀찮으면 베르다드 자체를 날려버리면 그만일 테고.”


느긋하게 말하는 것 같았지만 교황에게서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살았다는 인간이랄까, 여태 만나본 국왕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 소베르비아조차 당황하여 이 생각에 이르지 못했거늘.



“······다시 묻겠네. 자네와 다른 생존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나?”


사실 말하고 싶지 않은 내용이다. 황제와 공왕, 부모님에게도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빠져나갈 틈도 없을 만큼 논리정연한 물음이다. 그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큰 실책이었다······.



“친분? 친분이라고? 미치거나 격분에 지배당한 게 아니란 말인가? 하하. 그래. 그런 것인가······.”

“뭔가 잘못됐나요?”

“아닐세. 잘못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하지만 이스피리아라······ 음. 전부터도 눈여겨봤으나 한참을 잘못 봤군. 이만한 자였거늘. ······후후. 실로 유쾌한 일이로고. 설마하니 ‘증오’를 모으는 것이었다니.”

“뭣······?!”

“응? 몰랐던―― 아니, 숨기려던 것이었나?”


떠보는 말이었다.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진정하고 숨을 골랐다. 금세 머리는 차분해졌고, 날뛰던 심장도 잠잠해졌다.



“증오를 모은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흠······. 뭐, 어울려 주겠네.”


마침 적적했었다며 교황은 기품 있게 차를 따라 한 모금 마셨다.



“자네는 알겠지만―― 아니, 알고 있으니 군의 철수를 요청하러 다니는 것이겠지. 여하튼 자네의 친구, 이스피리아는 미치광이가 아닐세. 그런 자였으면 친분이고 뭐고 결단코 살려두지 않았겠지.”

“노리는 바가 있어 학살을 감행했다는 말씀이신지?”

“그렇지, 그렇지. 자네의 친구는 사람이 살해당했을 때 생기는 부산물을 노린 것이라네.”

“부산물······ 그것이 증오라는 겁니까?”

“흔히들 듣지 않은가. 남겨진 자들―― 가족이나 사랑하는 이들이 살인범을 증오한다는 이야기를. 이스피리아는 그것을 모으는 것이지. 악의로 점철된 거대한 증오를 말일세. 베르다드를 가장 먼저 친 것도 그러한 연유지. 그곳은 권력자들의 자제들이 많이 있으니. 쉽게 말해, 국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노림수라는 게야.”


그러니 4,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였다.


여기까지 듣고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잘못됐다는 기분에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손이 떨려왔다.


이젠 정말 잘 생각해야 했다.


진실을 알게 될 경우, 교황이 할 반응은 두 가지. 하나는 이스피리아를 위험인물로 여겨 삼국과 함께 군을 일으키는 것. 다른 하나는 많은 사람이 희생될 것을 우려하여 철군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극과 극의 결과.


줄타기 하는 기분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라프리트가 선택한 것은 후자 쪽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교황. 분명 인명을 우선시할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무엇일까요?”

“문제인가?”

“아뇨. 궁금해서.”

“그런가. ······흐음. 얻는 거라······.”


차를 마시며 잠시 고민하던 교황은 이내 깨달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평화―― 그래! 그녀는 평화를 바란 것이었나?!”


진심으로 경악스럽고 놀라웠던지, 교황은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중얼거렸다.


그때 서야 알아차렸다. 교황, 그는 절대 인자하고 온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범위는? 어디까지 바라본 것이지? 기한은? 암만 그래도 평생은 아닐 테니 분명 끝이 존재할 터. 그녀는 어디까지 내다보고 계획을 수립한 것이지? 혹시 조약을 알고 있나? 그렇다는 건······”


교황은 힘이 다한 인형처럼 우뚝 멈췄다. 그리고는 돌연 웃었다. 우렁차게, 세상이 떠나가라는 듯 미친 듯이 웃었다.


고막마저 떨리는 소음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안네도 벌떡 일어나 앞을 막으며 경계했지만, 그녀 또한 버티기 힘들어 인상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다. 무슨 일인가 하여 온 신관들도 귀를 막고는 교황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얼마나 지속됐을까, 웃음을 그친 교황은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내려다봤다.



“미안하게 됐구려. 내 조금 흥분한 모양일세.”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아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이야기 쪽도 걱정하지 말게나. 다 이해했으니.”

“그 말씀은?”

“전력을 다하기로 했네.”

“정말이십니까?!”

“암. 내 전력을 다해―― 자네의 친구, 이스피리아의 뜻에 따를걸세.”

“네······?”

“물론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는 순전히 이스피리아의 능력에 달렸지만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되겠지. 적어도 비젠탈의 보증도 있고 하니 병사 따위에게 죽진 않을 터. 앞으로가 기대되는구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순간 철군하는 것을 돕는다는 줄로 알았다. 아니, 사실 제대로 들었음에도 부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이 도박에서 패를 잘못 골랐음을.



“친히 이곳까지 와서 알려주어 감사하다네. 진심일세. 정말 진심으로 내 꿈을 이루게 해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내 따로 해줄 건 없고, 해줄 필요도 없겠지만 매일 여신님께 자네를 향한 기도를 올리겠네.”

“자, 잠시만―― 비젠탈?”


앞을 가로막은 비젠탈은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잡으면 안 된다고. 만약 방해한다면 그대로 전투가 벌어질 거라고.


교황은 감사를 전한 만큼 라프리트에겐 손을 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 상관 없는 안네는 무정하게 죽일 거다. 교황이란 그런 사람이었다.


이스피리아를 택한 모습에서 그것을 확실하게 실감했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멍하니 교황을 바라만 보았다.



“마침내······. 마침내 아내의 곁으로 갈 수 있다.”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교황이 사라졌고, 얼마 후―― 세인트리안이 가세한 인류 연맹이 발족했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암울한 과거편 이야기네요 그런데 안타깝지만 다음 화까지 이어집니다

그리 길진 않으니 걱정은 마시길!


그럼 다음주에 뵙도록 하고 이만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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