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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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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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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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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212-2

DUMMY

회담의 한 축인 칼윈이 빠진 상황에 더 이야기할 건 남지 않았고, 그대로 역사에 남을 인류 정상 회담은 김빠지게 끝을 맞이했다.


허탈하지만 별 수 있나. 아크티알과 그란도 곧장 추스르고는 귀갓길에 올랐다.


그렇게 미세한 흔들림만이 전부인, 리카드 특제의 마차 안에서 아크티알은 참지 못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2시간······.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회담이 겨우 2시간 만에 종결인가······.”

“뭐, 그런 것이겠지요. 하하호호 떠들러 모인 것도 아니고. 황제의 말마따나 나라를 오랫동안 비우기도 그러하고 말이죠. 오히려 며칠 묵는 쪽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맞은편의 벨페르를 보며 아크티알은 거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모두 모인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아크티알도 딱히 불만이라는 건 아니었다. 여러모로 우려스럽기는 해도 향후 대처에 관해서도 말을 나누었고.


그러나 타국에서도 여전한 충신을 보니 괜히 빈정이 상한다.



“모습을 보니 의욕이 있으신 것 같아 다행이지만, 앞으로 어찌 하실 예정입니까?”

“어쩌긴 뭘 어쩌겠나. 자네도 들었잖은가? 내부를 다스리면서 도플갱어를 대비해야겠지.”

“그녀가 놔준 도플갱어 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설득이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아니. 그건 어려울 겁니다.”


갑자기 끼어든 사람은 교황의 확인 이후 줄곧 조용히 있었던 리카드였다.


아크티알은 부자연스럽게 흠흠, 헛기침을 하였다.


솔직히 벨페르 옆에 공손히 앉은 리카드와 마주 보는 이 상황이 어색했다. 그야 신하를 의심하여 감시자를 붙인 데다, 그걸 들키기까지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뭐, 물론 잘못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군주로서 필요한 일이었고, 전혀 찔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어색한 건 어색한 거다. 관계를 개선할 틈도 없이 곧장 같이 온 만큼 더더욱. 그나마 1달간의 여정으로 살짝 관계가 회복된 듯도 한 데, 아직도 뭐라 말하기 힘든 거리감은 남아있었다.


‘그래도······ 리카드와 함께 온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비록 감시를 붙이기는 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리카드를 신뢰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감시를 철회한 이후 곧장 그에게 동행을 요구했다.


리카드는 곧장 수락했다. 사정을 듣고, 서로 연락할 수단이 있었냐며 놀라워했지만, 신하로서 주군을 따르는 건 당연한 도리라며 예를 갖추었다.


그래서 함께 이번 여정에 올랐는데······ 설마 이쪽이 더 놀라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다.


회담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아크티알은 물었다.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미래에서 그랬기 때문인가?”

“별로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도플갱어가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황제도 놀라지 않았습니까? 이전에도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었다면 그런 반응을 할 리가 없었겠죠.”

“그럼?”

“간단한 추론입니다. 수 세기 동안 진행한 프로젝트이지 않습니까? 너무 멀리 온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매몰 비용이 아쉬워서라도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장로라는 에스쿠드만큼은 반드시······. 다른 미래에서의 상황을 고려하면 분명 그러하겠지요.”

“다른 미래가 어떻게 됐길래 그러더냐?”

“면목 없지만 함부로 말씀드리기 주저되는군요.”


깊게 머리를 숙이는 리카드.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벨페르도 아닌 척하지만―― 아니, 현 그의 상황으로는 누구보다도 미래에 대해 알고 싶을 터였다.


그러나 차마 물을 수 없다. 그 부동제가 착잡한 감정을 대놓고 드러낸 것이다. 그런 그의 충고를 함부로 무시하기에는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딱 하나만······ 딱 하나만 묻고 싶다.



“짐의 아이들은―― 짐의 벨루디스는 앞으로도 건재하나?”

“······.”


리카드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왠지 모르게 알 것만 같았다.



“열심히······ 애써야 하겠군.”

“애쓰신다고 하니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짐에게?”

“예.”


자리에서 일어난 리카드가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감도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결코 가벼운 이야기가 아님을 직감한 아크티알은 진지하게 자세를 고쳤다.



“말해 보거라.”

“미리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무얼?”

“동향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 소인은 폐하와 벨루디스보다도 리아 양을 우선시할 겁니다.”


불경 중에서도 극치의 불경이다. 주군의 면전에서 한 이야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아무리 리카드라 하더라도 당장 반역죄로 처리해도 하등 문제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크티알은 격노하지 않고 침착하게 물었다.



“받은 은혜가 있어서냐?”

“그렇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분께 많은 것을 받아왔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그 은혜를 갚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배은망덕하게도 줄곧 원수로 되갚아왔었지요.”

“이젠 그러지 않겠다는 것이로군······.”

“모든 걸 안 상태에서도 같은 일을 반복한다면 그건 이미 악의입니다. 인간으로서 도리도 없는, 그런 외도가 되고 싶진 않으므로 이번에는 전력을 다해 그분께 힘을 보태려 합니다. 설령 그 끝이 폐하와 벨루디스에 지팡이를 겨누게 되는 길일지라도······.”

“······진심이로구나.”

“예······.”


거암처럼 꼼짝하지 않는 리카드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결의가 느껴진다.


조용히 벨페르가 어찌할지 시선으로 물었다.


아크티알은 생각했다.


반역이나 아니냐를 따질 수준은 이미 넘어섰다.


하지만 정면으로 자신의 충성심을 말하였던 리카드다. 구린 속내를 가진 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알랑방귀 따위나 뀌었을 거다. 물론 그것조차 계산하는 간신들도 더러 있겠다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못 알아볼 정도로 눈이 흐려지진 않았다.


분명 리카드는 진심이었고, 그건 예를 갖추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 그 또한 벨페르와 마찬가지로 충신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런 충신의 부탁이다. 거기에 반역이냐 아니냐를 따질 가치가 과연 있겠는가.



“생각해 보니 줄곧 네겐 제대로 된 보상 하나 내리지 않았구나.”

“아닙니다. 폐하께선 이미 평생 다 갚지 못할 포상을 내려주셨습니다. 현재의 제가 있는 것도 모두 폐하의 보살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괜한 사족 따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짐은 그저 벨루디스를 위했을 뿐. 결단코 너 하나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제가 받은 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많이 변했군. 고집스럽게 따지는 성격이 아니었건만.”

“저는 여전히 폐하께서 기억하시는 대로 겁 많고 소심한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입니다. 그저 더는 후회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가······.”


답은 나왔다.



“편한 대로 하거라.”

“괜찮으십니까?”

“네 지팡이의 끝이 우릴 향한다면 그건 짐과 벨루디스가 잘못된 길을 나아갔다는 것이겠지. 그것을 신하가 바로 잡겠다는데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

“후후.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짐도 수수방관하며 지내진 않을 터이니. 다만······ 혹여나 그리되거든 레오노반과 레온하트를 부탁한다.”

“예. 맹세코 반드시······.”


도대체 하루만으로 얼마나 많은 일들이 생겨나는 것인지······. 요새도 바쁘다고 생각했거늘 설마하니 그 위가 더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나.


괜히 머리에서 열이 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골이 아픈 것과는 반대로 기분은 매우 좋다.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 성장한 신하를 보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오른다.



“벨페르, 자네는? 하고 싶은 말이나 묻고 싶은 게 없나?”

“괜찮습니다.”

“대답의 여부와는 별개로 물어는 볼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오늘의 일들로 대략 윤곽이 그려졌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 아니, 설마······?”

“일전의 라프리트가 했던 충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저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습니까? 소중한 사람이 ‘잘못’됐다는 연유로 괴롭히지 말라고······.”


그리 말한 벨페르는 휘둥그레 눈을 뜬 아크티알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스피리아―― 후에 그녀를 괴롭히는 인물이 바로 저였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저야말로 용왕조차 토벌할 만큼의 역량을 지닌 그녀를 분노케 하는, 벨루디스에 먹구름을 드리우는 장본인인 것입니다.”

“아, 아니, 소, 소중한 사람 정도야 누구라도 있지 않은가. 단정 짓지 말게.”

“······라프리트에게 충고를 들은 뒤 생각해 보았습니다. 만약 밀리아나가 숨을 거둔다면 난 무엇을 할까······ 그것을 줄곧 생각해 봤습니다. 그 생각의 끝은 언제나 항상 같았습니다. 오갈 데 없는 슬픔을 해소할 곳을 찾는 것이지요······.”

“그게 어찌 이스피리아에게 향한다는 겐가. 허허······. 기력이 빠지는 하루였다 보니 자네가 좀 지친 모양이야.”

“그리 여기신다면―― 리카드. 어떤가? 나의 이야기가 틀렸는가? 자네가 폐하께 드린 청에 나는 아예 관련이 없었나?”


당연히 관련이 없다. 그도 그럴게 벨페르다. 언제나 어느 때나 냉정을 유지하는 얄미운 충신 말이다. 그런 그가 생뚱맞은 분풀이 따위를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하나.


‘벨루디스에 득이 된다면야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분풀이 같은 짓으로 도움이 될 상황이 과연 있기나 할는지······.’


다방면으로 봐도 말이 되질 않는다. 제아무리 다른 미래라 할지라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그런 일을 벨페르가 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리카드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여봐라, 리카드! 어찌 가만히 있는 것이더냐?!”


다그쳐 보아도 리카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상태 그대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그의 모습은 마치 긍정하는 것과도 같았다.


충격으로 말문을 잃은 아크티알이었는데, 돌연 떠올리고 말았다. 엄청난 적개심을 띤 라프리트를······.


그 활활 타오르던 눈빛이 누구에게로 향했었는지가······ 떠올랐다.



“아,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그래! 리카드는 그저 대답하기 곤란할 뿐이다. 황제도 말하지 않았더냐. 괜히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그렇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폐하, 언제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자고로 군주란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고. 어느 때고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군요······. 황제의 말도 꽤 일리가 있습니다. 정말 알아봤자 좋은 게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포기하시는 겁니까?”


리카드였다. 어느새 고개를 든 리카드가 벨페르를 보고 있었는데, 바라보는 그 눈빛은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를 오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재상 각하께서는 이대로 무력하게 가만히 계실 예정이신지요?”


언뜻 듣기에는 놀리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나 정작 리카드는 무표정.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벨페르는 멍하니 그런 리카드를 바라보았다.


마차 안은 한동안 스르륵―― 리카드가 개발한 마차의 베어링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미래는 바꿀 수 있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가 흐르고······ 벨페르는 호탕하게 웃었다.



“이거 참. 나도 늙은 모양일세.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할 일은 하나밖에 없거늘······.”

“뭐······ 제법 주름이 늘긴 하셨습니다.”

“사돈 남 말할 땐가? 자네도 순한 인상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네.”

“여러모로 바빠서 말이죠. 혼인 준비도 해야 하고.”

“그건 경사 아닌가? 미간에 주름이 생길 일이 아닐 텐데?”

“남자의 즐거운 고충이지요. 그렇지만 기왕이면 진지하게 고민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벨페르는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리카드도 입가를 올리고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러다 리카드가 나지막하니 말했다.



“힘들 겁니다?”

“저 황제마저 실패했었다니 그러하겠지.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을 리가 없지.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부디 그 최선에는 영부인께서 슬퍼하실 일이 없었으면 하는군요.”

“······명심하지.”


한참이나 직급이 낮은 리카드의―― 어쩌면 빈정거림처럼 들릴 말임에도 벨페르는 한없이 진지하게 마주하였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리카드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품에 손을 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벨페르에게 내밀었다.



“술식?”


그렇다. 리카드가 내민 건 흘겨 보면 낙서로 착각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복잡한 술식이 적힌 종이였다.


얼떨결에 종이를 받은 벨페르는 찬찬히 술식을 분석해 나갔다. 하지만 복잡한 만큼 쉬이 알아내진 못했고, 이내 항복을 선언했다.



“도통 모르겠군. 생전 처음 보는 유형의 술식이야. 당최 어떤 마법인 겐가?”

“[정화]의 술식입니다.”

“······뭐?”


곧장 알아듣지 못한 벨페르는 되물었다가 이내 이해하고는 눈알이 떨어질 듯 눈을 부릅 떴다.


아크티알도 마찬가지였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정화]라니. 짐이 아는 그 [정화]란 말이렷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어디서 난 것이더냐?! 아, 아니, 그전에 [정화]가 일개 마법이었다고?”

“황송하오나,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정화]에 대해서도 아직 연구 중이다 보니 이렇다 할 말씀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군······. 내게 이걸 보여준 건 함께 연구해 달라는 의미인가?”


리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맡은 일이 워낙 많다 보니 아무래도 일손이 부족합니다. 고명한 마법사로서 폭넓은 지식을 갖춘 각하께서 손을 빌려주신다면 무척이나 든든할 겁니다.”

“과연. 이건 이대로 쓸 수 없는 고전 술식이란 거로군.”

“명답입니다. ······그래서, 어떠십니까?”

“자네, 꽤 능글맞아졌군.”

“귀족다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뻔뻔하게 구는 리카드. 본인은 변하지 않았다고 했으나 상당히 많이 변했다.


벨페르도 당황스러운 나머지 허허, 어이없는 웃음소리를 냈다.



“폐하, 당분간 [정화]의 연구에 매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어, 음······. 그리하게. 한동안 알렌나시안 후작 쪽도 잠잠할 터이니 염려 말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됐네. 새삼스럽게 왜 그러나. 그보다 기왕 맡는 거다. 후회 없도록 확실하게 하게.”

“알겠습니다.”

“리카드도······.”

“예. 성심성의껏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다만······ 괜찮으신 겁니까? [정화]의 연구를 한다는 건 세인트리안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뜻입니다. 더군다나 아직 저희는 성도의 안······. 교황이 듣고 있을지도 모릅니다만?”


걱정 가득한 목소리는 분명 모시는 자를 염려하는 기색이 가득하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리카드는 재차 능글맞게 웃고 있었다.


조금 변한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다. 버르장머리 없이 아주 시건방져졌다. 감히 주군을 시험하기나 하고.


‘어지간히도 짐이 만만하게 보였나 보군.’


아크티알은 크게 코웃음 쳤다.



“심기가 거슬린다면 그러라지. 제 성질대로 군대를 일으키면 다 함께 손잡고 멸망하면 될 일이다. 이제 와 눈치 따위를 보겠느냐?”

“폐하, 이판사판식의 방침은 군주가 택할 행동이 아닙니다.”

“에에잇! 자네가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가끔은 눈치 좀 보게!”

“후후······.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막역한 사이이십니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과연······. 그 사달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군요.”


쩍쩍······.


공간이 얼어붙었다. 아까까지 웃고 떠든 분위기가 환상이었던 것처럼 실내는 한순간에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고, 들이키는 공기는 사무칠 만큼 아려 폐를 찢어발기는 것만 같았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세기의 대마법사라는 명칭이 헛것이 아니라는 양 리카드에게선 엄청난 압박감이 발해졌다.


밖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전해졌는지 술렁거림과 함께 마차가 흔들렸다.


똑똑······.



“폐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예. 하명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알았다.”


또각또각,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가왔던 근위병이 멀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숨을 막히게 했던 압박감도 옅어졌다.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딱히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그보다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이냐?”

“그냥······ 옛일이 떠올랐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마음 쓰실 그런 일은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아까 리카드가 중얼거린 말을 토대로 생각해 보면 무조건 거짓이다. 조금 전의 급변은 분명 이쪽이 연관되어 있다.


사람을 바보로 보는 것도 아니고 잘도 뻔뻔하게 군다.


하지만 차마 따져 물을 수는 없었다. 묻는다면 그 즉시 리카드의 지팡이의 끝이 이쪽을 향해 올 테니······.



“리카드, 넌 우리의―― 짐의 적이 되려는 건가?”

“가당치도 않습니다. 소인은 예나 지금이나 폐하께 진심으로 충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리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스피리아에게 받은 은혜가 그토록 크더냐?”

“예. 여차하면 삼국을―― 인간과 등을 질 각오까지 했습니다. 이번이야말로 그녀의 힘이 되기 위해······.”


아크티알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인간과 등을 진다······.


듣기에는 멋진 말이지만, 실제로 이것을 말할 수 있는 건 유년기의 애들로 한정된다. 성인이 같은 것을 말하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혀를 찰 것이다. 그만큼 얼토당토않은 대사다.


그러나 리카드는 달랐다.


만약 그를 비웃는다면 그자야말로 철 좀 들어야 하는 애송이다.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저 각오를 눈앞에서 보고도 모른다면 말이다.


이토록이나 확고한 대답을 들으니 오히려 산뜻하다. 적어도 흉계를 숨기고 거짓 웃음을 짓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허참. 이쯤되니 당최 뭘 어떻게 했길래 저리도 꽉 마음을 붙잡을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궁금하구먼. 응? 그러고 보니······ 베르다드에서도 꽤 많은 학생이 그녀를 따른다고 들었었지? 제법 광신적이란 우려스러운 첨언과 함께.’


리카드도 그렇고······ 어쩌면 진짜 이스피리아만의 비결이 있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진짜 지치긴 했나 보군. 실없는 생각이나 하고.”


어깨에 힘이 빠진 아크티알은 그대로 긴장을 풀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되겠지. 몇 없는 충신의 마음을 잃지 않으려면. 근데······ 리카드여. 일이 틀어지더라도 아까의 약속은 유효한 것이더냐?”

“물론입니다. 전하들은 기필코 지켜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다. 결국 짐만 잘하면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아니더냐.”

“예. 진력을 다해 보필하겠나이다.”

“거참. 실로 산뜻한 태도구나.”


아크티알은 크게 웃으며 편안히 몸을 뉘었다.


솔직히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불안하다. 뭔지도 모를 다른 미래와 그걸 떠올린 자들. 거기에 도플갱어들이 암약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이 저 밑바닥이 없는 늪으로 끌어들이는 기분이다.


까놓고 말해 감당하기 너무나도 벅찼다.


국왕으로서 그른 마음가짐이지만 심히도 무거운 짐들이 자꾸만 나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별로 있지도 않은 충신에게서 대놓고 반기를 들겠다는 말마저 들었다. 내부도 알렌나시안 파벌 등, 난리 통에 정말 첩첩산중이 따로 없다.


이 정도라면 마음이 꺾일 만도 하지 않은가. 만약 탓하는 사람이 있다면 네가 해보라면서 자리를 넘겨주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그리 근심은 없었다.


분명 힘들기는 할 거다. 그렇지만 말했듯 나만 잘 해내면 될 뿐인 문제다. 벨페르도 근심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정화]를 손에 넣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그래. 모든 게 다 잘될 거다.’


우려할 점은 많지만 차근차근 나아가다보면 길이 보이리라. 리카드가 저리 격노할 미래 또한 반드시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아크티알은 말했다.



“다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서로의 미래를 위해.”


작가의말

??? : 하극상당하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 하라고~?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살이 오르는 새해를 잘 보내고 있습니다.

근데 저번 화 때 새해 인사 드린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인사만 했더라고요...

그래서 좀 식겁하기도 했는데, 좀 늦었더라도 무사히 제대로 인사 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하하... 찌, 찡긋?

여러분 모두 건강히 지내시고,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기왕이면 되도록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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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205-2 +2 23.10.11 60 0 21쪽
241 205 +2 23.10.11 69 0 37쪽
240 204 +2 23.09.30 68 0 40쪽
239 203 +2 23.09.14 61 0 39쪽
238 202 +2 23.09.14 92 0 36쪽
237 201-2 +2 23.09.02 66 0 18쪽
236 201 +2 23.09.02 71 0 35쪽
235 200 +2 23.08.22 86 0 47쪽
234 199 +2 23.08.14 72 0 42쪽
233 198 +2 23.08.04 85 1 39쪽
232 197 +2 23.07.27 79 0 42쪽
231 196-2 +2 23.07.19 52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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