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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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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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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9,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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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1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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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쪽

208

DUMMY

“어서 오십시오, 성녀님. 환영합니다.”

“어머나. 감사해요, 여러분.”


사근사근 웃은 성녀, 루시는 뒤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앞서 인사한 경비병과 마찬가지로 갑옷에 벨루디스의 국기가 새겨진 병사들이 있었다.



“여러분들도. 여기까지 같이 와주셔서 감사했어요.”

“저희야말로. 성녀님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화색이 돌아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경례하는 병사들. 그들은 이곳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벨루디스의 국경도시, 콜다리움에서 온 것이었다.


국빈인 성녀를 호위하기 위해······.


루시가 성녀임을 알아보는 건 간단했다. 일단 마차에 성국의 깃발이 내걸려 있는데다,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루시아스의 정십자 상징이 있으니. 더욱이 이런 건 직접 인사를 드려야 한다며, 몸소 마차에서 나와 검문까지 했던 터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그다음부터는 소란의 연속이었다. 여태 타국으로는 나오지 않았던 성녀를 보고자 인파가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거리는 줄을 선 사람들을 비롯하여, 지나가던 시민들까지 합세하여 통제 불능이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열기는 더욱 가열차 졌고, 이내 도로는 앞을 나아가기 어려울 만큼 꽉 막히게 됐다.


보다 못한 콜다리움의 국경 경비대는 병사를 차출, 인파를 통제함과 동시에 국빈을 호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명령에 불만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서로 자신이 가겠다며 경쟁마저 했다는 듯하다.


최종 선출된 병사들은 성국과 가까운 콜다리움이라 그런지 신앙심도 깊고, 성녀에게도 공손한 태도로 일관. 어디 하나 부족한 점은 없는 좋은 병사들이었다.


하지만 그 루시와 함께 다니던 남자―― 호위인 알렉스는 죽을 맛이었다.


호위가 왜 호위이겠는가. 어떠한 위험이 닥치더라도 루시를 보호하는 게 임무다. 그런데 이토록 눈에 띄게 움직이면 아무래도 한숨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더욱 답답한 건 호위 대상인 루시 본인이다. 그녀는 일부러 눈에 띄려 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그저 성격이 그러하기에, 어려운 이들을 지나칠 수 없기에 무심코 나서는 것이다.


물론 그 바른 심성에 역시 이러한 분이라며 재차 탄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적당히 라는 게 있지 않는가. 들르는 도시마다 모든 고아원에 들러 그 기적을 행사하는 건 좀 어떠려나 싶다.


덕분에 병사들과 이곳 백성들에게는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됐지만, 본인의 신분조차 망각한 행보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실제로 여러모로 호위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제법 힘들었고.


‘예정도 한 달이나 늦어졌고 말이야.’


혹시 목적을 잊은 게 아닐지······.


한숨을 토해내고 싶은 걸 참고, 알렉스는 함께 해준 병사들에게는 소정의 봉급을 지급했다. 어쨌든 그들은 성실하고 반듯하게 제 역에 충실했으니. 한사코 거절하던 그들은 감사의 의미라니까 마지못해 받아줬다.


알렉스는 루시와 함께 안내받으며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으로 와 본 벨루디스 왕성의 감상은 휘황찬란하다였다. 그 유복함을 과시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마광석을 보석처럼 활용한 세간들을 봤을 땐 저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다.


확실히 신성함과 경건함이 묻어나는 대성당의 치장들과는 사뭇 다르다.


도대체 얼마이려나······.


원래 타국은 이런가 싶어 내심 기가 죽는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다. 루시가 창피당하지 않도록 알렉스는 당당히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곳에 폐하가 계십니다.”

“감사해요.”

“별말씀을.”


여기서 이만 실례한다며 안내해 준 병사가 떠났다. 신기한지 루시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알렉스는 묵례를 하면서도 내심 많이 놀랐다.


성녀의 신분상 국왕과의 알현은 당연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시일도 공지하지 않고 온 것이다. 벨루디스 국왕에게도 일정이 있으니, 알현은 며칠 뒤에나 가능하리라 여겼었다.


‘오고 있다는 건 들었을 테지만······ 역시 너무 빠르지 않나?’


안내된 곳도 옥좌의 방이 아니었다. 예상하기로는 국왕의 집무실이지 않을까 한다.


의문으로 여기면서 알렉스는 루시와 함께 근위병이 열어준 문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루시는 망설임 없이 집무를 보는 듯한 남자의 앞으로 섰다.



“벨루디스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무릎을 꿇는 루시를 따라 호위이자 종자인 알렉스도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만나서 반갑네, 성녀여.”

“루시 올리비아예요. 편히 루시라 불러주시길.”

“음. 고개를 들게.”


똑바로 바라보게 된 벨루디스 국왕의 첫인상은 의외였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왕성 때문인지 내심 살집이 많고, 욕망이 번들거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검소한 의복과 힘찬 눈빛에선 되려 지배자다운 관록이 엿보였다.



“제법 일이 쌓여서 말일세. 집무실로 안내하게 되어 미안하게 됐네.”

“아뇨. 백성을 위해 불철주야 하시온데, 폐하께서 불편한 마음을 품을 연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리 얘기해주니 고맙군. 한데, 여기까진 어인 일인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아크티알.


찰나였지만 알렉스는 날카로워지는 기색을 감지했다. 곁에 서 있는 남자―― 아마 궁정 마법사이자, 뛰어난 통치력으로 명성이 자자한 벨페르 재상이라 여겨지는 그 또한 사뭇 진지했고.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 벨루디스에 들어서면서부터 이상하다는 느낌을 언뜻 받았었다.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고 할까. 루시만큼은 반기는 듯하지만, 왠지 자신과 성국은 꺼린다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째서? 신을 섬기는 이들을 꺼릴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저는 이스피리아, 그분을 만나 뵈러 왔어요.”

“흐음. 그런가······.”


재차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신중하달까, 상당히 경계한다는 게 느껴진다.



“왜 그녀를 만나려는지 물어도 되겠나? 그대의 첫 외출에 시끌벅적 난리인데 말이야.”

“어, 그냥 대화를 나누려는 거예요.”

“단지 그것뿐인가?”

“예. 성녀로서 루시아스 님을 알현한 그분께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뭣······?!”


화들짝 놀란 국왕은 무심코 재상에서 시선을 옮겼다. 그런 그에게 재상은 눈을 크게 뜨면서도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도 둘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이런 걸 말해도 되는 건가 싶어 진짜 깜짝 놀랐다.


이러한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루시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시 후 조금 진정한 국왕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일단 뜻은 알겠다. 하나, 그녀는 이미 방학이 되어 고향으로 떠났다만?”

“역시 많이 늦었군요······. 그러면 찾아뵐 수밖에 없겠네요.”

“미리 말해둔다만, 짐과 재상은 그녀의 고향이 어딘지 모른다.”

“에? 그러신가요?”


알렉스는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최고 국빈이 아닌가. 어디 출신인지도 모른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나.


알려주기 싫은 건가······.


하지만 그런 의심은 어깨를 으쓱하는 국왕을 보고 사라졌다. 그의 태도는 진정 사실을 말할 때의 그것이었다. 어지간히 능청스러운 자가 아니라면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무얼 하던 인간이었는지, 심지어 정확한 연령조차도 우린 파악하고 있지 않다.”


경악스러웠다.


이야기만 들어보면 그냥 수상쩍은 신원 미상의 인물이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최고 국빈으로 지정했는지 그 저의가 궁금하다.


이번만큼은 루시도 놀라웠는지 표정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물었다.



“실례지만, 굳이 두 분을 짚어 말씀하신 걸로 보면, 다른 분은 알고 계신다는 게 아닌가요?”


‘아. 확실히.’


둘은 분명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가 모른다는 법은 없다. 누군가는 알고 있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함께 벨루디스로 온 사람이라든지······.



“아! 그러고 보니 함께 왔었다는 인물이――”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 그대의 종자가 파악하는 대로 베르다드의 학원장만이 그녀의 고향을 알고 있다.”

“시, 실례했습니다.”

“됐다.”


허락받지 않은 발언을 넘어가 주는 도량을 보인 국왕은 루시를 냉철하게 내려다봤다.



“이곳에서 기다릴지 만나러 갈지는 그대의 선택이다. 혹여 찾아가겠다면 행선지는 리카드에게 듣도록. 어찌하겠는가?”

“저는 만나 뵈러 갈까 해요. 그게 예의이기도 하고.”

“······알겠다. 베르다드로 출입을 허가하지.”

“감사해요, 폐하.”


선뜻 허가를 해준 국왕은 그 자리에서 직인을 찍어 허가증을 만들어줬다.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길 기원하지.”


이것으로 끝. 왕성에 더는 볼 일도 없으니 루시는 사뿐하게 머리를 숙이고는 국왕과의 알현을 마쳤다.


이래도 되나 싶은 간결한 만남이었지만 바쁜 국왕을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위안 삼았다. 타국의 국왕과 알현하는 건 처음이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기본 소양으로 예절은 익혀두었으나 그 이상은 모른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으니 괜찮다고 여길 수밖에.


떨리는 심정으로 타고 온 마차로 안내받은 알렉스는 조심히 루시를 태우고는 곧장 마부석에 올랐다.


마부는 따로 없었다. 몇 년을 함께한 전속 마부도 이번 여정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덕분에 알렉스가 마부 역도 해내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호위에만 집중하고 싶었다만, 둘만 가겠다는 루시의 의지가 확고한데 어쩌겠는가. 아마 평생 가도 그 사랑스러운 애교를 이길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호위로서는 실격인 자신을 질책하면서 알렉스는 마차를 몰았다.


베르다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아 금방 도착했고, 알렉스는 경비병들에게 출입증을 제시했다. 눈망울이 커다래진 그들은 환대를 하며 길을 비켜섰다.


방학 중임에도 베르다드에는 제법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신기하다는 눈길로 성국의 깃발이 걸린 마차를 쳐다봤다. 중장갑 차림의 성기사도 단연 이목을 끄는 대상으로, 간간이 어째서 마부 노릇을 하고 있는지 쑥덕거리는 게 들린다.


얼굴이 일그러질 거 같은 수치심을 견뎌내며 알렉스는 무표정하게 안내대로 마차를 몰았다. 이내 도착한 정류장에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당당한 자세로 루시의 하차를 도왔다.



“화, 환영합니다, 성녀님. 학원장님께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려요.”


루시의 눈에 새겨진 정십자는 역시 눈길을 끄나 보다. 경비병은 앞장을 서면서도 이따금 뒤를 돌아본다. 간간이 지나치는 학생들이나 교원들도 힐끔 쳐다보는 등 완전히 주목받는다.


제법 익숙한 광경이지만 이번 여정은 혼자라는 생각에 알렉스는 조금 긴장됐다.



“이곳입니다.”

“에······ 굉장한 대문이네요.”


정말 그러하였다. 학원장실의 대문은 그 크기도 크기지만, 온갖 종류의 보석들과 귀금속들이 장식된 모습이 진짜 장관이었다.


실제 본 적은 없지만 왠지 옥좌의 방보다도 화려하지 않을까 싶다. 못해도 비등하거나.


‘겨, 겨우 문짝에다가 이만한 재력을 투자하다니. 얼마나 과시욕이 심한 거야?’


처음부터 이러는 것이다. 오늘 첫 대면인 학원장,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가 어떤 성품의 사람인지 벌써 유추된다.


그려지는 건 살집이 다닥다닥 붙은, 전형적인 돼지.


괜한 요구를 하지나 않을지 벌써 불안해진다. 물론 어떠한 일이 있든 루시를 지켜낼 테지만.


하지만 그건 괜한 다짐이었다.



“어서 오시지요, 성녀님.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군요.”


생각했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학원장은 전혀 뚱뚱하지도 않은 데다, 학자다운 인상에선 선함마저 느낀다. 확실한 건 과시욕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다.


알렉스가 속으로 당황하는 사이 루시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저야말로 대마법사로 명성이 자자하신 클로디아노 님을 만나 뵈어 반갑답니다.”

“본래 마중을 나가야 했으나 최근 바쁜 터라······. 실례했습니다.”

“아뇨. 갑자기 찾아온 건 저희이니 개의치 마세요.”

“너그러운 말씀 감사드립니다.”


미소 짓는 리카드의 뒤로 널찍한 흑단 책상이 보이는데, 바쁘다는 건 딱히 핑계가 아닌지 그곳엔 상당량의 서류가 쌓여있다.



“이쪽으로 오시죠.”


말끔히 정돈된 학원장실엔 네 명 정도가 앉을 소파와 긴 테이블이 놓여있었는데, 리카드는 그곳으로 루시를 이끌었다.


알렉스는 착석하지 않고 루시의 뒤편에서 대기했다. 맞은편의 리카드도 뒤에 한 여성이 자리하였다.



“이쪽은 부 학원장인 세리오 리벨리타스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세리오 님.”


무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세리오. 틀어 올린 머리하며, 왠지 깐깐할 것 같은 인상이다.



“모처럼이니 차와 함께 느긋이 담화를 나누고 싶으나······, 귀하신 분의 시간을 잡아먹을 순 없겠지요.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려 합니다만, 괜찮겠습니까?”

“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성녀님께서 여기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스피리아 님을 만나 뵈려고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분은 한 달 전에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떠나셨습니다.”

“네. 벨루디스 폐하께도 들었어요.”

“하오면?”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클로디아노 님은 행선지를 안다고 하시던데.”

“물론 어딘지 압니다. 직접 간 곳이기도 하니. ······하지만 알려드리긴 힘들 것 같군요.”


순간 말문이 막힌 루시는 넋이 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그래도 예쁘긴 마찬가지였지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잠시 실례합니다. 어째서 알려주지 않는 건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지한, 다소 노한 기색이 담긴 물음에 리카드는 정말 의아해하며 알렉스를 쳐다봤다. 정말 상상도 못 한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처럼.



“알렉스라 합니다. 멋대로 발언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길.”

“아아. 그건 괜찮습니다만······, 너무나 당연한 것을 물으시는 분이로군요.”

“행선지를 물은 게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리아 양은―― 이스피리아 양은 벨루디스의 최고 국빈. 일국의 국왕과도 같지요. 이해하시기 쉽게 말씀드리자면······ 알렉스 단원님께선 교황 예하나 성녀님의 행선지를 발설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것도 타국의 인물에게.”

“그, 그건······.”


알렉스는 차마 대꾸하지 못했다. 리카드의 말대로였기 때문이다.


예하나 성녀의 행선지는 일급의 기밀 사항. 공식 행사라면 모를까, 평시 어딜 가는지 따위를 어찌 함부로 떠들며 나다니겠는가. 안전과도 직결되는 일이건만.


조금 쉽게······ 아니, 상당히 이번 여정을 만만하게 봤나 보다.


‘어째서 나는 타국에서마저 루시 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여겼단 말인가······.’


어린 소녀라길래 간단할 거라 봤건만, 아주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상대는 무려 루시아스 님께 알현을 허락받은 성인에 가까운 인물인데······.


성녀라는, 만인이 환영하는 이와 함께 다니다 보니 좀 생각이 물러진 거 같다. 성국이라는 환경 안에서만 지냈던 터라 더욱.


호위로서―― 루시를 지키는 기사로서 있을 수 없는 추태에 알렉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알렉······.”


이 이상 못난 모습을 보일 순 없거니와, 모시는 자의 근심을 만든다는 건 가당치도 않다.



“여러모로 실례했습니다, 학원장님.”


알렉스는 재빨리 감정을 수습하고는 깊게 머리를 숙였다.


짧게 괜찮다고 답한 리카드는 잠시 빤히 보다가 루시에게 말을 걸었다.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그분의 행선지를 알려드릴 순 없습니다만, 성녀님께선 어찌하실 겁니까?”

“저는······ 역시 직접 만나 뵈러 가고 싶어요.”


걱정스레 알렉스를 바라보면서도 루시의 대답은 확고했다.



“노파심에 묻습니다만, 두 분만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루시의 전매특허인 발언이 튀어나왔다.


알렉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다. 엄청난 운을 지닌 그녀는 정말로 그 말마따나 어떻게든 해낸다. 분명 고생은 하겠지만 틀림없이 이스피리아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에게는 황당무계한 말에 불과하다.


리카드와 세리오가 처음으로 표정을 무너뜨리고 루시를―― 신기한 생물을 본다는 듯이 쳐다봤다.


잠시 후 리카드는 이마를 짚었다.



“하아. 즉흥적인 분이라 듣긴 했지만······.”

“헤헤. 미안해요.”

“아뇨. 제게 사과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다만, 저와 벨루디스의 입장으로는 두 분만 보낸다는 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녀님께 문제가 발생한다면 제법 책임소재가 있으니 말이죠.”


확실히 일리가 있다. 어쨌거나 성녀의 최종 거처는 벨루디스였으니. 만약 성녀가 실종되거나 하면 성국으로서는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뜻을 굽히지 않으시겠지요?”

“네.”

“알겠습니다. 필요한 채비는 이쪽에서 마련하지요. 병사도 붙일 테니 그리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마국 방면 관문까지는. 관문을 넘어서면 관할 밖. 거기서부터는 여러분들의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찌 봐도 안전에 우려가 있는바, 호위로 한 명을 더 붙이시라 말씀드리지요.”

“죄송하지만 저로서는 역부족이란 것입니까?”


무시하는 게 역력해 저도 모르게 끼어들었는데, 리카드는 당연하다는 듯이 똑바로 보았다.



“나름 고된 훈련을 하신 건 알겠습니다. 실력에 자부심도 있겠지요. 그걸 깔볼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이란 냉혹한 법입니다. 자존심만 세우다 정작 호위에 실패하면 본말전도지 않습니까?”


산뜻하게 웃은 리카드에게 뭐라 대꾸도 하기 전에 그의 입이 빠르게 움직였다.



“[결빙뇌옥].”


알렉스는 한순간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감옥에 갇혔다. 더불어 그 안에서는 가시가 달린 얼음 줄기가 뻗어 나와 행동에 제약을 가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져나갈 공간은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바로 벌집이 될 상황에 알렉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대, 대응조차 할 수 없다니.’


몇 급의 마법인지 모르겠으나, 목덜미에서 번쩍이는 얼음의 단단함이 예사롭지 않다. 느껴지기로는 강철과도 견줄 듯싶다. 깨뜨려 버릴 생각으로 돌진해 봐야 목숨만 잃을 것이다.


이만하면 파생 속성인 것도 있어 4급 이상이라 추측된다. 그런 마법을 순식간에, 지팡이도 없이 발동한 거다.


압도적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마법사 등 명성이 자자한 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몸소 겪어보니 그 차이에 알렉스는 아연실색했다.



“분명 저는 혼자서 그분의 고향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건 혼자서도 안전하리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무엇을 만나든 도망은 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뭐, 오만한 생각이었지만요.”


자조적으로 웃은 리카드는 마법을 해제했다.


해방된 알렉스는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뻣뻣해진 몸을 슬쩍 풀었다.



“물론 무력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미지의 땅에서는 되레 지식이 큰 힘을 발휘하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뭐가 위험한지 알아야 조심하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부분이 상당히 부족한 듯싶군요. 일단 세이트리안을 벗어난 것 자체가 처음이니.”

“지당하시네요.”


무례에 대한―― 마법으로 위협한 것은 언급도 없이 루시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제안하는 겁니다. 여행에 해박한 분이 계시거든요. 아아. 벨루디스의 사람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길. 여러분들과 같은 세인트리안의 사람입니다. 신앙심도 지극히 두터운 분이니 우려하실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벨루디스에 그러한 분이 계시나요?”

“예. ······아, 마침 오셨군요.”


리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두드려졌다.


방음이 끝내주게 잘 되는 이 학원장실에서 기척을 읽은 건가 싶어 놀라는 가운데, 세리오가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



“저기······, 발주하신 물건을 드리러 왔습니다만······.”


찾아온 손님은 젊은 남자였다. 그는 자신감 없는 목소리를 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리둥절한 모습도 그렇고 여러모로 믿음직하지 않다. 인상조차도 흐릿하여 더더욱 신뢰가 떨어진다.


‘유독 윤이 나는 금발도 그렇고.’


왠지 머릿결만 관리하는, 편집증이 있는 사람 같아 괜스레 불안해지기만 한다.


남자가 들고 온 나무 상자를 세리오가 받고, 리카드는 얼떨떨한 그를 친절히 데려와 앞에 세웠다.



“소개합니다. 이분이 여러분들의 여정을 도와줄 협력자―― 청익편성의 단원입니다. 통칭, 잿빛으로 불리지요.”

“뭣?!”


놀람의 외침은 비단 알렉스만이 아니었다. 인상이 흐릿한 남자―― 잿빛 또한 경악하여 리카드를 쳐다봤다. 어떻게 라고 묻고 싶은 얼굴이다.


알렉스도 묻고 싶었다.


다 양보해서 청익편성이라는 건 알아냈다 치더라도, 당최 무슨 수로 코드 네임까지 안단 말인가.


심지어 교황청 소속이자, 루시의 호위인 알렉스도 일신성단의 단원을 만나긴 처음이다. 아니, 만났을지라도 그저 신관인 줄 알고 넘겼을 것이다. 그들은 절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니까.


그러한데 리카드가 정확히 안다니. 어디서 정보가 세기라도 한 것인가.



“아, 아니, 저는――”

“――안녕하세요, 잿빛 씨. 여기에 계셨군요?”


뒤늦게 변명하려던 잿빛의 발버둥은 루시로 인해 허망하게 끝났다.


여기까지 밝혀진 거다.


이 상황에 차마 성녀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 없었는지, 잿빛은 무릎을 꿇고 정십자를 그렸다. 정중한 태도와는 달리 한숨을 내쉬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다. 반대로 루시는 아는 얼굴을 봐서 기쁜듯하지만.



“오랜만에 뵙습니다, 성녀님.”

“그러네요. 2년 만인가요? 요새 통 안 보이신다 싶었더니 임무 중이셨군요?”

“뭐······ 그렇죠.”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그에게 사정을 설명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살짝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리카드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잿빛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딱히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터. 어차피 당신의 임무는 저와 리아 양의 감시이니 말이죠. 게다가 특별히 활동의 제약도 없으니 금상첨화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기까지 아는 거지?”

“영업 비밀로 하죠.”

“······.”


노려보는 시선에도 리카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첫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학자와 같은 분위기와 여리여리한 외견과 달리 절대 만만히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학원장, 리카드 디안 클로디아노는.



“칫. 이래서 잘난 사람들이란.”

“납득하시든 말든 저는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선택만이 남았을 뿐. 아, 참고로 성녀님이 가시는 곳은 저 이외에는 아무도 못 간 전인미답의 지역. 위험천만할 겁니다?”


모든 상황이 리카드에 의해 굴러가는 게 분한 듯 잿빛은 입술을 깨물었다.


리카드의 제안은 본래 그의 임무에서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성녀 호위라는 막중한 역할도 얹어지니 그로서는 달리 선택지가 없을 것이다.


‘이토록 완벽하게 정체가 까발려지지 않았다면 또 모를까.’


리카드도 그런 잿빛의 처지를 알고는 진하게 미소 지었다.



“결정된 거 같으니 다행이군요. 나룬 씨에게는 미리 말해두었으니, 직장을 잃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흔쾌히 허락하시더군요. 물론 사정은 대충 둘러댔습니다. 거기에 덤으로 이 방으로의 침입도 불문으로 부쳐드리죠.”

“쯧. 어쩐지 보안이 강화됐다 싶더라니.”

“후후.”


결국 포기한 듯한 잿빛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성녀님. 미력하나 성녀님의 여정에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잿빛 씨가 함께 가주시면 든든하죠. 잘 부탁드려요.”


알렉스도 불만은 없었다.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호위의 증원은 바라던 바였으니.


‘그래. 늦든 빠르든, 느긋하기 그지없는 루시 님에겐 필요한 충원이었어.’


면식까지 있는 상대라 더욱 좋다. 게다가 루시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부족함이 없다.


커져만 가는 아쉬움은 내리눌렀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루시의 안전. 그 밖에는 하등 쓸모없는 하찮은 것이었다.



“헤헤. 조금 아쉽게 됐네요. 모처럼 오붓하게 여행을 다니고 싶었는데.”


그래. 배시시 웃는 루시의 미소만이 자신의 모든 것. 그러니까 이 모습을 눈에 새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자.





“저, 리카드 님. 무사히 도착하실 수 있으실까요?”


성녀 일행이 떠나간 정문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말하는 세리오. 그녀는 상대가 누구인지는 뒷전이었다. 순수하게 위험 지역으로 떠난 이들의 안위만을 염려했다.


역시나 교육자라고 해야 할지······.


가만두고 보기 힘들어하는 약혼녀의 심성에 리카드는 절로 미소를 짓게 됐다.



“아이. 웃지만 마시고요.”

“죄송합니다. 옆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그만······.”

“읏! 주, 주책은 적당히 하시라고 했잖아요!”


볼을 새빨갛게 물들인 세리오를 이대로 쭉 바라보고 싶다. 그렇지만 이대로 화를 돋우게 놔두는 것도 상책은 아니다.


리카드는 잠시 욕구는 접어두고 턱을 짚었다.



“리아 양의 고향에 도착할지는 놔두더라도, 안위만이라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 잿빛이라는 분이 뛰어나서요?”

“아뇨. 세리오 양도 보셨다시피, 성녀―― 루시 올리비아의 눈엔 명확히 생명의 신, 루시아스 님의 심볼이 있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보긴 처음이지만 진짜 신기했어요. 근데 그게 왜요?”

“그건 단순한 동공의 모양 같은 게 아닙니다. 생명의 신, 루시아스의 축복을 받았다는 증표. 그 신력이 신체로 나타난 것이죠.”

“엑?! 그런 소린 처음 듣는데요?”

“그러실 겁니다. 겉으로 드러날 만큼 신께 축복을 깊게 받은 사람은 좀처럼 없을 테니까요.”

“어. 그렇다는 건······.”


리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몬스터들의 감각은 뛰어납니다. 본능적으로 신의 기척을 느낄 테니 함부로 해코지할 생각은 갖지 못하겠지요. 우리 인간이나 마족, 수인 등의 사람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각하진 못하더라도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자제하겠죠. 그러니 여간해선 위험할 일 자체가 없을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응? 그러면 잿빛이라는 분이 따라갈 필요는 없었던 게 아닌가요?”

“마침 잘 됐지요. 이래저래 할 일이 많고, 감시도 번거로웠던 터라. 성녀님도 자신이 가진 특성을 잘 모르고 있어 살았습니다.”

“······.”


세리오가 질린 눈빛이 되었다.


사랑해 마지않는 약혼자에게 향할 게 아니었지만, 리카드는 후련하기만 했다.


게다가 아예 의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제법 바빠질 이번 방학 시즌에 괜한 신경을 쓸 수야 없지 않은가. 정신 사납게 할 요소는 되도록 줄이는 편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시를 위해서라도 필요한 조치이기도 했다.


――무조건 긍정해 주는 기사님 대신, 냉철하게 현실을 판단해 줄 제삼자가 있어야 하니까.


‘슬슬 성녀님도 달콤한 꿈에서 깨야겠지요. 저와 세리오 양, 그리고 모두를 위해서라도.’



“나머지는 리야 양에게 맡기도록 할까요.”

“응?”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해 고개를 갸웃하는 세리오.


사랑스러운 약혼녀의 탐스러운 머리를 쓰다듬으며 리카드는 조용히 바랐다. 이번이야말로 모두 좋게 끝나기를······.










농사나 짓는 평범한 시골답게 나트알의 아침은 빠르다. 게다가 현재는 가을. 추수의 계절이다.


괜히 베르다드가 9월이란 이른 시기에 방학을 하는 게 아니다. 농사에는 때라는 게 있고, 이 시즌을 놓치면 1년 농사를 허탕 친다. 일손은 많을수록 좋고, 이제 막 성인이 된 파릇파릇한 일꾼들은 어디에서도 환영받는다.


그래서 이 시기에 방학인 것이다. 다들 돌아가서 일손을 보태라고. 베르다드엔 평민도 상당히 재적 중이니 말이다. 귀족이라도 이쯤엔 세금의 정산이나 통치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한다.


즉,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다.


리아도 예외는 아니어서 새벽 일찍 일어나 일손을 보탰다. 되려 나트알의 경우, 에르가 사시사철 경작할 수 있는 경작지를 만들어 가을이 아니더라도 할 일은 많았다. 애당초 밭 자체가 넓어지기도 했고.


평소에는 주민이 늘어난 덕분에 널널하지만, 역시 가을은 추수하는 양이 많다 보니 꽤 바쁘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도록 수확한 리아는 산더미처럼 쌓인 작물을 [염력]으로 띄었다.


[염력]은 물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띄우는 마법으로, 만화에서 자주 나오는 염동력 같은 것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마법이고, 실제로도 1급에 해당하는 쉬운 마법이다. 그렇지만 어찌 사용하느냐에 따라 활용도는 무궁무진했다. 물론 세기나 정밀도를 높이면 훌쩍 난이도가 뛰어오르지만.


하지만 리아는 손발처럼 사용하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고, 최근에는 숙련도도 올라 추수에도 활용하는 등 자주 애용하고 있다.



“음. 만족만족.”


한창 무르익은 작물들을 보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절로 흥얼거리게 된다.


그 기분대로 리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요새 안의 보관소로 갔다.



“응? 불이 켜져 있네?”


누가 먼저 할당량을 끝냈나 보다.


마도구 램프의 빛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며, 리아는 닫힌 보관소 문을 열었다.



“잭 아저씨였네. 역시 빠르시넹.”

“오. 리아, 너도 끝마쳤―― 와우. 매번 그렇지만 한 번에 가져오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마을의 사냥꾼이자 경비대장인 잭이 곱슬 진 앞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가져온 수확물을 질린다는 듯이 본다. 하지만 정작 본인도 꽤나 만만치 않았다. 발 옆에 리아가 가져온 것과 엇비슷한 양이 쌓여있다.



“이제 분류하시는 거예요?”

“그래.”

“그럼 하는 김에 같이 할게요.”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도 [염력]을 발동한 것이었는데, 잭은 우르르 날아가서 자동으로 분류되는 수확물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촌장님을 봐서 익숙한 줄 알았는데······ 매번 볼 때마다 진짜 경악스럽네.”

“아저씨도 대강 쓸 수 있게 되셨잖아요?”

“술식 마법이란 거?”

“네. 라프리트 씨가 열심히 배우신다고 하던데요?”

“뭐, 일단 마법을 쓸 수 있게 되는 거니까. 하지만······ 역시 차이가 심한걸? 특히 이것처럼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유연함이 정말 엄청나.”

“쉬운 건 아니에요. 신경 쓸 게 많거든요.”


정말 그렇다. 잭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어 쉬워 보일 수 있으나, 머리 한구석에서는 [염력]의 컨트롤로 무척이나 바빴다.


대략 정신을 10개로 쪼갠 느낌이랄까······. 보기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술식 마법도 돌아가는 번잡함은 있지만, 숙달되면 심상마법과 비슷하게 구사할 수 있어요.”

“그건 술식을 하나하나 빠삭하게 깨우쳐야 하잖아? 내 머리로는 불가능. 공부와는 담을 쌓은 내가 하기엔 무리야. 뭐, 처음부터 필요한 마법만 익힐 요량이었으니 불만은 없지만.”

“가장 원하시는 마법은 뭔데요?”

“[정찰의 눈]이지? 적이 나무나 바위 뒤에 숨으면 영 까다롭거든. 대략 기척을 읽어서 위치를 파악한다지만, 역시 제대로 확인이 가능하면 싶지. 궁수에겐 화살 하나하나가 아쉬운 법이니까.”

“으음. [천리안] 같은 마법을 말씀하시는 건가······?”

“응? 비슷한 마법을 알고 있어?”


대답 대신 리아는 [천리안]을 발동시켰다.


허공에 직사각형의 작은 창이 떠올랐고, 거기에는 하늘에서 바라본 마을의 전경이 비쳤다.



“이런 거 아니에요?”

“오오! 그래! 이거야, 이거! 옛날에 스승님도 이걸 써서 쉽게 사냥하셨다고 했어.”


마법엔 소질이 없어 본인은 배우지 못했다며, 잭은 아이처럼 들떠서는 창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무척 탐이 나는지 그 눈에는 작게 욕심이 깃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천리안]의 술식을 줘도 아저씨가 쓰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데······.’


마력면에서는 부족함이 없다. 잭도 어느덧 마력레벨이 320에 육박하니. 그러나 마력조작이나 이미지 부분에선 아직 멀었다. 발동에는 꽤 어려움이 있을 듯하다.


잠시 고민하던 리아는 물었다.



“아저씨, 어디까지 정확히 기척을 읽을 수 있어요?”

“어······. 한 200미터쯤? 그 정도라면 땅 밑에 숨어있더라도 기척을 느낄 수 있을 거야.”

“와. 알고 있었지만 진짜 감각이 예민하시네요.”

“사냥꾼이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그렇군요······. 그럼 까다로운 거리는요?”

“1킬로미터 이상부터지. 거기부턴 감각으로 느끼기에는 애매해서 오로지 시력에만 의지해야 하거든.”

“정밀도는요?”

“잘린 나무의 나이테를 읽을 정도는 되지?”

“엑? 1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요?”

“그렇지? 아마 더 멀리 있는 것도 윤곽은 또렷할 거야.”


‘누, 눈이 너무 좋잖아?! 역시나 검과 마법의 세계! 기본 스펙이 진짜 굉장하네.’


자신도 가능하다는 사실은 염두에 두지 않은 채 리아는 감탄했다. 그러다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염가판의 마법을 구상하는 건 루비아 덕분에 단련됐다.


최대한 간략화하고, 번잡한 공정을 잘라낸다.


가장 먼저 잘라낸 건 화면이었다. 고작 공중에 창을 만들어 낼 뿐인데 술식이 상당히 난해해진다. 대신 바로 머릿속과 연결되게 바꾼다.


다음은 거리의 고정. 원하는 장소를 딱딱 지정할 수는 없지만 불편한 만큼 난이도가 대폭 하락했다.


이 정도라면 잭도 쓸 수 있지 않을까······.


몇 번의 피드백과 실제 확인을 마친 리아는 마법을 사용했다.


반짝이는 빛과 함께 종이가 나타나자 잭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마법이야?”

“네. 생성마법이라고 하는데, 사실 일반 마법이랑 크게 다르지 않아요. 불이나 물을 만드는 것과 원리는 같아요. 그보다 이거요.”

“뭔데?”

“[천리안]―― 아니, [정찰의 눈]이요. 대충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해서 고안해봤어요.”

“으응?! 새로 술식을 만들었다고?! 그거 무지하게 어렵다며?”

“전 심상마법을 쓸 수 있잖아요. 이미지한 마법에서 만들어지는 술식을 역술 하면 그만이라 별로 어렵지 않아요.”

“호오. 그거참 편리하네.”


감탄하며 잭은 건네받은 종이에 눈을 뒀다. 그리고 찬찬히 술식을 살펴봤다.



“어때요?”

“2급―― 아니, 3급 수준인가? 이거라면 어찌저찌 가능할지도······.”

“바로는 힘들겠죠?”

“아마. 당장 하기에는 술식을 그리는 데에 오래 걸려서 마력만 흩어질 거 같아.”


나름 쉽게 한다고 했는데······.


살짝 의기소침해진다.


잭은 이런 상태를 대번에 알았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고맙다, 리아. 멋진 선물이야. 수련하는 맛도 있을 거 같아서 최고라고.”


크고 거칠지만 그 손길에는 상냥함이 묻어있었다. 리아는 꿍한 것도 바로 풀려 헤실헤실 웃었다.


이러는 가운데에서도 분주히 [염력]으로 수확물을 나르고 있었는데, 마지막 밀을 쌓아놓는 것으로 분류가 끝났다.


이렇게 모인 수확물들은 바짝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탈곡하거나 한다. 향식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이 보관소의 경우 그래서 통풍이 잘되게 지어졌다. 이런 과정이 필요 없는 것들은 에르의 [보존] 마법이 부여된 구역에 보관하니 썩을 일이 없다.



“근데 웬일로 혼자다?”

“아, 에르랑 아이리스는 라프리트 씨들을 돕기로 했어요. 다들 밭일은 처음인지라.”

“내가 이런 말 하긴 그런데······. 괜찮은 거야? 황자, 황녀님에 공주님 비슷한 신분들이라며.”

“본인들이 하겠다는데 어때서요.”

“아니, 그건 그렇지만······, 뭐랄까······ 정말 이래도 되나 싶어서. 여기사 양반도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고.”

“베르그 전하랑 로즈 씨는 즐기는 듯하니 괜찮겠죠.”


‘그래. 애초에 눈치 볼 신분도 아니고 말이야. 하기 싫으면 그만두겠지. 별로 일손이 모자란 것도 아니고.’


베르그들이 일손을 돕기 시작한 건 열흘 전. 나트알에 오고 이틀 후에 시작된 추수에 먼저 발 벗고 나선 라프리트와 안네, 리블리지와 비비안을 가만히 보고 있기 미안했나 보다. 갑자기 베르그가 에이브안에게 찾아와서는 남는 작업복이 없는지를 묻더니 추수에 동참했다.


어딜 내놔도 눈에 띌 미남미녀가, 여느 주민들과 다름없는 허름한 복장을 입은 모습은 엄청 이질감이 들었다. 뭔가 엉거주춤한지라 더더욱. 물론 로즈만은 홀로 아주 신났지만······.


앞서 라프리트들을 봤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그만큼 다들 하나 같이 안 어울렸다. 그나마 가베인만은 행동거지가 자연스러워 좀 나았지만.


하지만 밭일은 다들 초보. 먼저 시작한 라프리트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배우며 어설프게 일손을 보탰다.


근데 베르그가 제법 의외였다. 잔뜩 신난 로즈를 유즈라에게 맡기고는 아주 진지하게 임했다. 설명 하나도 허투루 듣지 않고, 집요할 만치 꼬치꼬치 물으며 의욕을 보인 것이다. 땅과 기후, 모종과 생육 등등, 거의 농사 전반에 대한 모든 것을 질문하는 통에 되레 주민들이 난감해할 정도였다.


실전에 들어가서도 그랬다. 모르는 것이 생기면 바로바로 물어보며, 밀 한 동도 아주 신중히 벴다. 몸을 숙이는 건 개의치 않았다. 더러워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너무나 성실히 추수에 임했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에르가 나서게 됐고, 아이리스도 비비안을 챙겨줄 겸 같이 봐주기로 하였다.


‘그러고 보면 가베인 씨도 의외였지. 자유분방한 느낌이 강해 보였는데. 자기 일처럼 전력을 다해줘서 좀 놀라웠어.’


태도도 그랬다. 주민들에게도 매우 정중했지만, 유독 이상하리만치 할아버지와 부모님에겐 그 이상으로 극진했다. 오죽했으면 필리아가 먼저 농담까지 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겠는가.


그게 싫다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아이리스에게도 무척 따듯하게 대해주는 데 어찌 싫겠는가. 다만 왜 이토록 공손히 구는지가 의문이다.


‘아마 다른 미래의 일 때문이겠지만······ 잘 짐작이 안 되네. 나랑 도대체 무슨 관계였던 거야?’


뭐, 어찌 됐든 상관없다.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고, 본인들이 하겠다고 나선 이상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다.


잭도 더는 자신이 왈가왈부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걸 알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제 어쩔 거냐? 점심까진 아직 시간이 남았는데.”

“베르그 씨들은 좀 더 걸릴 거 같고, 저는 할아버지 화단에 잠시 들리려고요. 아저씨는요?”

“난 아내에게 가봐야지.”

“흐흐. 뜨거우시네요.”

“어른을 놀리는 게 아니야.”

“저도 어른인걸요? 오히려 부모로서는 아저씨보다 선배라구요.”

“어이구, 어련하십니다. 나중에 우리 아이가 태어나거든 꼭 좀 육아를 가르쳐 주십사 합니다그려.”

“음음. 맡겨주세요.”


번듯한 아들도 키워본지라 육아라면 자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잭이 한숨을 푹푹 내쉬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



“너도 진짜 여전하구나. 누가 필리아의 딸이 아니랄까 봐.”

“칭찬이죠?”

“그래그래. 어쨌든 난 이만 가본다. 수고했어.”

“아, 네. 들어가세요.”


떠나가는 잭에게 손을 흔들고 리아도 요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익숙한 미로처럼 얽힌 길을 지나, 리아는 정겨운 할아버지 집의 정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응? 안 계시나?”


환성과 동시에 반겨주는 목소리가 없다.


침묵만이 흐르는 실내.


빠르게 감각을 넓혀보니 에이브안의 마력이 마을 밖, 호숫가 근처에서 느껴진다. 옆에는 바지탄스의 마력도 함께였다.


아마 주변 탐색을 하는 게 아닐까.


이 시기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추수에 집중하다 보니, 위험 요소는 없는지 둘러보는 모양이다. 바지탄스는 전위를 서는 겸, 호위로서 따라간 듯하고.


‘이 또한 촌장의 의무겠지······.’


빠르게 살펴보니 주변에 위험이 될 만한 건 느껴지지 않는다. 안심한 리아는 감각을 되돌리고는 천천히 거실을 거닐었다.


그렇게 조금 나아가다 코너를 도니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앗?! 아, 아가씨?!》

“안녕하세요, 드에.”

《마, 마중이 늦어 죄송합니다.》


갑각을 두른 듯한 거대 거미, 드에.


그녀의 정확한 종족명은 타이탄과 타란튤라가 합쳐진 것 같은 타이튤라 라는 명칭이다.


참고로 지금도 성인 남자만한 덩치지만, 놀랍게도 레서급. 보기보단 제법 어린 나이라고 한다. 프라임의 완전한 성체는 전장 3미터에 달한다니까 점점 더 성장할 것이다.


그런 그녀는 정원에 있다가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나온 듯한데, 마치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넙죽 자세를 낮췄다.


상당한 체구이다 보니 그것만으로 복도가 꽉 찬다. 이후 성체가 되면 어떻게 다닐까 조금 우려스럽다.


아니. 그보다, 이러려고―― 부담을 주려 찾아온 게 아니다.


이젠 살짝 남아있던 거부감마저도 없다. 리아는 너무나도 송구스러워하는 드에를 친절히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재차 괜찮다며 안심시키고는 같이 정원으로 향했다.



“지내시는 건 어때요?”

《펴, 편안합니다. 촌장님께서도 살갑게 대해주시고.》


아직 그 고운 목소리가 떨리며 경직되어 있다. 그렇지만 분위기 자체는 한결 가벼워진 게 느껴진다. 정원에 와서인지, 에이브안이 잘 대해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리아는 마음을 놓고 정원을 둘러봤다.


화단이란 이름의 약초밭은 방금까지도 관리받은 모습이다. 잎사귀와 줄기들에 물방울이 맺혀있다. 상태도 파릇파릇한 것이 무척 건강해 보인다.


‘보기와 달리 엄청 섬세하시니까 문제없겠지. 할아버지도 별말 없으셨고.’


되려 약초 관리에 능숙하여 조수로 삼고 싶다는 소리까지 했었다. 누구도 화단에 손대지 못하게 한 그 에이브안이. 물론 지나가는 투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지 않는 한 그런 소린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큰 문제는 없겠지. 지금도 큰 덩치로도 화단의 잎사귀 하나 건들지 않고.


리아는 잠시 잘 꾸며놓은 화단을 거닐었다. 그러다 묘목―― 1.5미터까지 자란 뒤로는 성장이 더디던 생달나무 앞에 섰다.



“흐음. 매번 신기하단 말이지. 어렸을 때부터 보아오던 나무가 신목이 되어 있고.”

《이전에는 평범했습니까?》


신목의 이야기라 그런지 드에가 관심을 보인다. 꽤 들뜬 분위기를 띤다.



“네. 옛날에는 평범한 묘목이었어요. 지금은 의도치 않게 제 신력을 품고 있지만.”


차마 마법의 실패로 인한 여파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창피하지 않은가.


비록 [자동화]가 에르도 쓰지 못하는 마법일지라도 그렇다. 실패는 언제나 창피한 법이다.


그래서 숨겼는데······ 드에가 빤히 쳐다본다.


‘서, 설마 눈치채셨나?!’


잘못한 건 없지만 왠지 찔리는 기분으로 있자니 드에가 시선을 낮췄다. 몸을 숙인 것이었는데, 드에는 사뭇 심각하게 말했다.



《저기, 실례가 아니라면 방금 ‘제 신력’이라고······.》

“네. 이 신목이라는 아이, 제 마력을 품고 있거든요.”

《소, 송구합니다만, 보여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력이요?”

《예······.》

“아하. 그러고 보니 신목을 바로 아셨다는 건, 드에 씨는 신력을 느끼실 수 있다는 소리구나.”


어찌 보면 뻔한,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에 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여기요. 이게 제 마력―― 신력이에요.”


아담한 손바닥 위에 떠오른 은색 빛의 마력 덩어리.


극한으로 압축된―― 신력으로 승화된 조그마한 구슬을 드에는 멍하니 바라봤다. 반응으로 보아 신력을 느낄 수 있음은 분명했다.



“저기, 드에 씨?”


너무 오래 멍한 것 같아 눈앞에 손을 흔들었다. 그때야 드에가 부르르 몸을 떨고는 정신을 차렸다.



《저, 정녕 이것이······ 진짜로 아가씨의 신력이란 말입니까?!》

“어, 네. 맞아요.”

《이게 무슨······! 그렇다면 저 신목은······.》

“일단 제 신목이죠······?”


심은 것 자체는 에이브안이고 여태 돌보던 것도 그이지만, 담고 있는 신력의 주인 만큼은 분명 리아였다.


하지만 딱히 소유권을 주장할 마음은 없었다. 이 신목은 어디까지나 에이브안이 키우는 것이니까. 가끔가다 둘러보는 게 전부인 자신이 뻔뻔하게 주인행세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애당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자아가 생긴다. 그런 대상을 소유물처럼 취급할 생각은 없다.



《이럴수가······! 이 무슨 불경이었는지!》


격양되어 외친 드에는 돌연 몸을 땅바닥에 붙였다.



“가, 갑자기 왜 그러세요, 드에 씨?”

《크, 크나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아,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용서를!》

“예······?”

《몰랐다고는 하나, 위대한 분께 감히 불경을 저질러 면목이 없습니다! 하, 하지만 신목을 돌보겠다는 마음에는 한치의 부정도 없습니다! 부, 부디 이대로 계속 신목을 돌볼 수 있게 해주십사 간청드립니다!》

“진정하세요. 화단은 오히려 제가 드에 씨에게 계속 부탁드리고 싶으니까.”

《저, 정말이십니까?》


드에가 번쩍 머리를······ 든 건 아니고, 홀눈과 곁눈을 위로하여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진짜 괜한 걱정인데.’


안 그래도 화단이란 이름의 약초밭은 점점 커지고 있다. 파악하기로는 이곳 말고도 요새 안에 3배나 큰 정원을 만들어, 에이브안이 여러 약초를 재배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본인이 좋아하는 일이니 말리진 않을 거다. 그렇지만 한창 팔팔해 보여도 에이브안은 제법 연세가 있다. 곁에서 도와 줄 사람이 있었으면 싶었고, 고꾸라지는 줄기마다 거미줄로 고정해 주는 등의 세심함이 있는 드에라면 제격이다. 계속 도와줬으면 한다는 건 본심이었다.


그 뜻을 담아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욕도 있고, 너무 잘해주고 계시는데 뭐 하러 다른 분으로 바꾸겠어요? 그보다 갑자기 뭣 때문에 이러시는 거예요?”


계속 화단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에 드에는 안도했지만, 그녀는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지만 리아는 서두르지 않고 그녀를 안심시키는 데에 주력했다.


다시 일어서게 하고, 잠시 후 드에는 어느 정도 차분해졌다.



《위대하신 분께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취급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셨으면 해요.”

《예, 예! 아, 아가씨의 뜻대로······.》


잔뜩 긴장한 게 모습이 명령이 내린듯하여 달갑지는 않다. 그러나 초를 칠 순 없다. 리아는 겉으로 티 내지 않고 다시금 왜 그랬는지를 상냥히 물었다.


필사적으로 지은 미소 덕분이었나, 드에는 눈치를 보면서도 안심하여 대답했다.



《그······ 아가씨는 신력을 지니지 않으셨습니까?》

“네. 맞아요. 명명백백히 제 마력이에요. 그런데요?”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 신력을 품고 있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신께 축복을 받은 겁니다. 그런 그들의 신체에는 분명 신력이 깃들어 있죠. 하지만 그 양은 극소량에 불과합니다. 아가씨가 방금 내보인 신력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드에는 신목에 시선을 줬다.



《이 신목이 품고 있는 신력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합니다. 분명한 건 신의 축복을 한참 넘어섰다는 겁니다.》


확실히 많긴 하다. 넘버즈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니.


혹시 몰라 마력레벨도 확인해 봤는데, 무려 118밖에 안 됐다. 계속 성장하고 있으니까, 나중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신력을 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보다 많아질지도······.’


이 부분은 과연 신목이라 할 수 있다. 양도 양이지만, 보통이라면 아직 시련도 넘지 못한 마력레벨로는 3단계 마력을 쌓기란 불가능할 테니. 물론 여전히 신성하고 염험한 것과는 거리가 먼 느낌이지만······.



“음. 그래서요?”

《호, 혹시 아가씨는······ 이 지상에 강림하신 창조신이 아니십니까······?》

“아닌데요?”


도중부터 드에가 어떤 오해를 하는지 얼추 짐작이 갔던 터라 막힘없이 말이 나왔다.


그녀는 리아가 지닌 신력의 존재를 모르고 있던 것이다.


앞서 보았다시피 드에는 신력을 느낀다. 소질이 있었겠지. 만화라면 카르마 수치가 선에 가까운 신성한 거미랄까. 덕분에 신목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리아의 몸에 담긴 신력만큼은 느끼지 못하였다.


당연했다. 리아는 신력을 완벽히―― 조금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몸 안에 갈무리하고 있다. 애초에 느끼기도 어려운 게 신력이다. 이것을 감지하기란 드에에겐 무리였다.


그러다 보니 드에는 여태 신목이 오대신 중 누군가의 신력을 이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해한 거다. 신력의 주인인 리아를 지상에 강림한 오대신 중 하나라고.


솔직히 불유쾌한 오해다.


이쪽의 부모님은 엄연히 인간.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난 듯한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다, 무책임하고 무신경한 그들과 동일선상에 놓는다는 것이 영 탐탁지 않다.


그래서 리아는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드에 씨가 착각하시는 건데, 신력이라는 거요. 사실 마력이에요. 마력이 극한으로 압축되면 신력이 되는 거죠.”

《네······?》

“아까부터 저는 계속 마력이라고 했잖아요. 신력이라며 거창하게 불리지만 사실은 별거 아니라는 거죠.”


리아는 아직 손 위에 있는 신력을 조작하여 천천히 압축을 풀었다.


2단계에서 1단계.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게 된 마력은 이윽고 대기 중의 농도와 비슷해졌다. 리아에게는 멀쩡히 잘만 보였지만.



“봤죠?”

《지, 진짜로······?》

“네. 신력의 정체는 마력. 저는 신이 아니라구요.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누구나가 신일걸요? 드에 씨도 그렇고.”


노력은 필요하지만 정말 누구나 가능한 일이다. 겨우 그러한 걸로 오대신이라고 오해받다니. 놀리려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그런 거니까 오해 마시고 평범하게 대해주세요.”

《하, 하지만 사도도 계시지 않습니까?》

“아~ 그건 그냥 본인들이 지칭하는 거예요. 제게 만들어졌으니까 스스로 그렇게들 부르고 싶은가 봐요. 일종의 역할극이라 보시면 돼요.”


사실이다. 사도라 생각하며 만들지도 않았고, 그리 지칭하게 시키지도 않았다. 단지 넘버즈들이 긍지와 자부심을 품기에 뭐라 터치하지 않았을 뿐.


이러한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였나, 드에는 조용했다. 그러다 이윽고 공손히, 고개를 숙이는 듯한 느낌으로 몸체를 낮췄다.



《바라시는 대로. 저 또한 아가씨의 무녀로서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무녀······? 뭐, 뭐지? 드에 씨도 역할극에 어울려 준다는 건가?’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아니,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안 그래도 넘버즈만으로도 버거운 판국에.


하지만 어찌저찌 납득해주는 듯한 참이다. 구태여 반문하기가 조금 뭐했다. 무녀라 지칭한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 여하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옛!》


대답에 엄청 힘이 들어갔다. 분위기도 기분 탓이 아니라면 바지탄스들이 풍기는 것과도 닮아 있었다. 숭배하는 듯한 그거 말이다.


백방 신력 때문에 그런 거겠지만······ 등골이 간질거려 미치겠다.


이럴 땐 도망이 상책이다.


잔뜩 격식을 차린 드에의 배웅을 받으며 리아는 밖으로 나왔다.



“으으. 생각지도 않게 지쳤어.”


그냥 잘 지내는지 안부나 확인하러 왔을 뿐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을까.


터벅터벅 걷던 리아는 문득 든 생각에 힘 없이 떨군 고개를 들었다. 할머니의 산소가 떠오른 것이었다.



“온 김에 들를까?”


할머니의 산소는 에이브안의 집과 멀지 않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생전에 이 마을을 사랑하셨던 당신의 뜻을 반영하여 골랐다나.


‘지금은 요새 때문에 전혀 보이지 않아서 좀 미묘하지만······.’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할머니이기는 하나 혈육은 혈육이다.


이런 건 돌아오기 마련. 불효녀가 되고 싶진 않아 도의적으로 가보기로 했다. 힘든 것도 아니고.



“어라? 프리에나 씨?”


먼저 온 선객은 백호 차림의 여성, 세스의 여동생이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고개만 돌려 리아를 쳐다봤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세요?”


산소는 터가 좋아 그리 외지진 않았다. 그렇지만 요새도 세워진 마당에 일부러 찾아올 곳은 또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밭일도 돕고 있다. 시간상으로 보면 끝나자마자 왔을 것이다.


단련해 둔 덕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일이 끝나자마자 구태여 여길 온 이유를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프리에나가 천천히 일어났다.



“인간에게도 매장하는 문화가 있는지 몰라서. 무심코 묘비가 보이길래 와보게 됐습니다. 게헤르께선?”

“성묘하러 왔어요. 제 할머니시거든요.”

“리브······. 그렇군요. 게헤르의 조모님이셨습니까.”


만나 봬서 반갑다며, 프리에나는 손녀님 덕분에 지금 자신이 인사를 드릴 수 있었다면서 묘비에 말했다.


성실하다. 보아하니 묘비 주변도 정리해 준 듯하고.


‘정말 세스와는 여러모로 다르네.’


남매가 이리도 다른 건가 싶어 신기해하며 리아도 할머니에게 안부 인사를 건넸다.


마음 같아서는 제사라도 지내야 하는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여기엔 그런 행사는 없다. 죽으면 신에게로 가 다시 태어난다는 인식이 강한 터라, 묘비를 만드는 것에 그친다.


당연히 정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그저 이곳 사람들은 죽으면 신에게로 돌아간다는 인식이 팽배했던 탓이다.


실제로도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령이나 용왕들을 제외하면. 어쩌면 그들도 진실은 어떠한지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굳게 그리 믿고 있었고, 매년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지내거나 하지 않는다. 숨을 거둔 당 해에만 장례식을 치르는 게 전부다.


그렇지만 역시 무얼 하든 자유가 아니겠는가.


리아는 리브란 성명이 적힌 묘비 앞에서 성실히, 최근 근황을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하듯 소식을 전하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보고를 하고는 두 번 절을 올렸다.



“인간의 문화입니까?”

“아뇨. 제 개인적으로 하는 인사에요. 마을에서도 하진 않아요.”

“혹시 제가 해도 되는 실례가 되는 건 아닌지요?”

“마음만 담는다면 누구라도 괜찮아요.”


대답을 들은 프리에나는 손을 모아, 어설프지만 절을 했다. 하지만 무척이나 진지하게 임하였다. 백호 가죽에 먼지가 묻는 정도는 개의치 않았다.



“고마워요. 할머니도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


말이 없다. 대화가 끊긴 게 아니라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인다.


리아는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그렇게 5분이 지나자, 프리에나는 결심한 듯 몸을 돌려 리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부탁이 있습니다, 게헤르.”

“게헤르는 됐다고 했잖아요. 그냥 리아로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리아.”

“네. 그래서 부탁이 뭐죠?”

“저와 대련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어렵지 않죠.”


선뜻 수락할 줄은 몰랐나, 프리에나가 살짝 놀란다. 그렇지만 곧장 표정을 수습하고는 가슴을 한 차례 두드렸다.



“조금 있으면 식사 시간이니까······. 대련은 그 이후가 어떠세요?”

“편하신 대로.”

“그럼, 그때 하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성녀의 막장 진군!! 고생은 수행원들의 몫!!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어머니께서 허리를 다치셔서 한동안 보필하다 보니 늦고 말았습니다

역시 연세가 있으셔서 잘 낫지 않으시는...

그래도 최대한 빠르게 연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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