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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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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연재수 :
25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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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9,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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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1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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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쪽

205

DUMMY

“하으으음······.”


늘어지게 하품하며 리아는 눈을 떴다.


끔뻑끔뻑.


아직 각성이 덜 된 몽롱한 시야에 비치는 건, 웬 나무로 깔끔하게 마감된 천장이었다.


최근에 맨날 보았던 색색의 타일로 고풍스럽게 꾸민 천장이 아닌, 어딘가 친숙한 광경에 리아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아, 맞다. 나 돌아왔었지······?”


완전히 의식이 각성하고, 정황을 파악한 리아는 그리운 눈으로 실내를 훑어봤다.


오랜만에 온 에르와의 방은 떠나기 전과 큰 차이가 없었다. 5년간 산속으로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필리아가 주기적으로 관리해주었는지 먼지도 없이 깔끔하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오자마자 바로 이 방을 사용할 수 있었다.


딸을 향한 사랑에 리아는 미소 짓고 데굴데굴 굴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으~ 잘 잤다!”


솔직히 침구는 기숙사의 침대가 압승이다. 그쪽이 훨씬 푹신한데다 넓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침상도 썩 괜찮았다. 그저 나무 단 위에 요가 깔린 모양새인지라 다소 딱딱하긴 해도, 에르가 제공해준 요는 보온성과 감촉은 발군. 마찬가지로 에르가 제공한 이불 또한 포근히 몸을 감싸주는 게 일품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도 이 신혼방의 침상을 이길 잠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뻐근하긴커녕 요 근래 중에서 제일 상쾌한 아침이지?”


기분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더 없는 상쾌함을 느끼며 리아는 잠옷을 갈아입었다.



“우으~ 어라?”


크게 기지개를 켜며 방안을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잠을 청했던 친구, 라프리트는 진작에 일어나서 나간 듯하다. 같은 침상에서 함께 자기에 송구스러워하던 안네도.



“새삼스럽지만 라프리트 씨가 우리 집에서 자는 날이 올 줄이야······.”


뭔가 꿈만 같다.


사람과의 인연은 알 수 없다고 하더니, 리카드가 나트알에 찾아온 것부터 여러모로 신기한 기분이다.


어쩐지 재밌었던 리아는 피식 웃고는, 이불을 깔끔히 정리하고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니?”

“어머니!”


필리아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녀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얘가 참······.”


귀여운 딸의 스킨쉽을 싫어할 엄마가 아니다. 필리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숨을 쉬면서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잘 주무셨어요?”

“그럼. 누가 돌아왔는데.”

“헤헤······.”


아침부터 정말 최고다.


리아는 어쩐지 포근해지는 필리아를 꼭 끌어안아, 그녀의 품 안에서 한동안 행복을 만끽했다.



“자자. 이제 그만하고 앉아있으렴.”

“에이. 조금만 더요. 모처럼이잖아요.”

“······우리 리아, 얌전히 기다려주지 않을래?”



사근사근한 웃음이 매력 포인트인 필리아는 그 성격도 대체로 유하다. 그러나 이따금 등골이 서늘해지는 뭔가가 있다. 지금이 딱 그런 때였다. 방긋방긋 웃는 얼굴에서 왠지 모를 싸함이 감지됐다.


위기 센서가 맹렬히 울리는 것을 느낀 리아는 순식간에 몸을 날려 지정석에 안착했다.



“오래 안 걸리니 조금만 참으렴.”

“네······.”


별말 없이 몸을 돌리는 필리아.


위기가 멀어지는 걸 느낀 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뭐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네 아침이지?”

“메뉴는요?!”

“비빔밥이랑 감자전이란다.”

“오옷!”


어쩐지 군침 도는 냄새가 나더라니, 귀향하자마자 제일 좋아하는 요리 2, 3위를 다투는 메뉴들의 향연이다.


들뜰 수밖에 없는 상황에 신이 난 리아는 다리를 흔들거리면서 그 기분을 표출했다.



“아. 그런데 라프리트 씨는요?”


라프리트는 착하다. 1대 천사로 임명했을 정도로 착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그녀의 성격상 요리를 하는 필리아를 봤다면 반드시 돕겠다며 나섰을 것이다. 그런데 집안 어디에서도 라프리트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생각을 읽었는지, 필리아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그, 조금 어색해서······.”

“······네?”

“우리 마을에는 손님이 드물잖니. 딸아이의 친구가 찾아오는 건 아예 없다 봐도 무방하고······.”

“어, 그래서요?”

“아이참. 왜 이럴 때만 말귀가 어두워지니?”

“죄, 죄송해요.”


얼떨결에 사과하니 필리아가 흠흠, 헛기침했다. 아마 좀 당황한 듯싶다.


미안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린 필리아는 다가오더니 리아의 머리를 쓸어내려 줬다. 그러고 난처하다는 낌새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라프리트, 그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구나. 계속 돕겠다고 하는 그 아이에게 진짜 돕게 하는 것도 뭔가 아닌 듯하고.”

“으에? 어머니가 그런 고민을?”

“난들 사람이 아니니? 어, 엄마도 처음 겪는 상황에는 당황한단다.”

“헤에······.”


무엇이든 곧잘 할 것만 같았던 필리아에게 이런 면모가.


새삼스럽게 놀라워 감탄했는데, 그게 신경에 거슬렸나 보다. 필리아의 예쁘장한 눈썹이 매서운 각도로 치켜 올라간다.


다시금 위기를 직감한 리아는 얼른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저, 저, 씻고 올게요!”


땀도 안 흘리게 된 지 오래여서―― 더군다나 에르가 [완전부여]로 [청결]을 걸어두었기에 몸만 털어도 먼지 하나 남지 않지만, 굳이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황급히 화장실 겸, 욕실로 도망쳤다.


씻는 것도 그렇다. [청결]로 금방 끝내지 않고 일부러 시간 들여 샤워를 했다. 나올 때쯤엔 필리아의 기분도 좀 풀어졌을 터.


그렇게 한바탕 물을 끼얹고, 서훈식 때도 입었던―― 이곳에서는 평상복인, 흰색과 검정이 세련되게 조화된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날이 조금 쌀쌀했기에 회색의 겉옷까지 풀세트로 걸쳤다.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슬쩍 문을 열어 밖을 쳐다보니 필리아가 거실 탁자에 앉아있었다.



“다 끝냈으면 어서 나오렴.”

“헛! 네!”


‘기, 기척을 읽혔다고?’


나름 은밀 행동에는 자신이 있었는데. 설마하니 필리아에겐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나 보다. 반성하고, 더욱 배경과 동화하는―― 무의 경지에 도달하는 훈련을 해 나가야겠다.


그러한 깊은 다짐을 하며 리아는 쭈뼛쭈뼛 욕실에서 나왔다.



“얼른 아침 먹으러 가자꾸나.”

“어디로요?”

“어디긴. 광장 아니겠니?”

“어? 지금도 다 같이 모여서 먹어요?”

“이따금 집에서 먹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광장에서 다 함께 먹는단다. 뭔가 마을의 문화처럼 자리 잡았달까······. 다들 식사가 시끌벅적하지 않으면 되레 허전한가 보더라고.”

“그래요?”


처음에는 그저 식객인 바지탄스들을 위한 것이었던 게 지금까지 이어지다니.


참으로 이곳 나트알다운 광경인지라 개인적으로는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여전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실로 기쁜 오산이 아닐 수 없다.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먼저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은 필리아도 만든 도시락을 챙겨 따랐다.


들뜬 기분이었던 리아는 깽깽이 스텝을 밟았는데, 경쾌했던 그 걸음은 곧장 멈추게 됐다. 집 앞에는 어디 갔나 싶었던 이스카르와 라프리트, 그리고 친구와 편히 자라며 요새에 남았던 에르와 아이리스가 있는 것이었다.



“어라? 다들 거기 서서 뭐 해요?”


다들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방금 막 나온 집을 쳐다보고 있다.



“아아. 리아. 잘 잤어?”

“네에. 에르는요?”

“뭐, 적당히. 나보다는 아이리스가 영 탐탁지 않은 듯했지만.”

“에이. 에르랑 자기 싫었으면 아예 다른 곳으로 갔겠죠. 사춘기 시즌일 수도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그렇군······. 벌써 그러한 때인가.”


아이리스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조숙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초연했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연애 같은 부분에선 분명 아이 같았고, 모두가 겪는 사춘기를 건너뛰진 않을 것이다.


아들이 그렇게 컸다는 것에 감회가 새로웠는지 에르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옆에서 아이리스가 미묘한 표정으로 쳐다보지만, 그런 부분은 정작 자신은 모르는 법이다. 후에 그랬던 적이 있었나? 라며 넘기는 경우도 많고. 참고로 리아도 이쪽으로, 언제 사춘기가 왔는지 시기조차 짐작이 안 됐다. 그저 전생의 기억 때문에 무탈히 지나갔나 생각만 할 뿐이다.



“그보다, 에르. 다들 뭐 하고 있었어요?”

“슬슬 증축할 때인가 싶어서 의논하는 중이었어.”

“중축이요?”

“응. 드물긴 하겠지만 이따금 손님이 올지도 모르잖아? 그때마다 우리가 밖에서 자면 상대방도 눈치가 보일 테니 방을 더 만드는 게 어떨까 싶어. 아이리스도 혼자 지낼 방이 필요할 테고.”

“바보 아빠가 그냥 엄마랑 오붓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면서 핑계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아이리스에게 대항하듯 에르는 대차게 혀를 찼다.


그런 남편을 올려다보며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어요?”

“아, 아니······ 난 그저 합리를 추구해서 의견을――”

“――하긴. 산속에서 돌아온 뒤로는 둘이 밤을 보내는 일이 적어졌죠. 그나마 학원에선 같이 지냈지만.”

“······뭐어, 그렇지.”

“아이리스도 이제 와 우리랑 지내라 하면 불편하려나······? 아버지, 아버지는 어때요?”


어쩐지 얼굴이 조금 불그스름해진 에르를 뒤로 하고 물으니, 이스카르는 팔짱을 끼고 집을 올려다봤다.



“난 나쁘지 않다고 봐. 듣자 하니 아이리스의 친구가 더 올지도 모르고. 게다가 어쩌면 아이가 더 태어날지도 모르니 미리 준비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확실히······. 요즘 주민분들의 금술 떨어지는 모습을 보면 아이가 숨풍숨풍 태어날 것 같았지. 그 아이들이 언제든 놀러 와도 되게끔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아니, 걔네들 말고――”

“――여보?”

“읏! 그, 그래! 아이들이 바글바글 놀러 오면 좋지 않겠니? 하하. 그래서 증축하는 거란다. 암. 그렇고말고. 필리아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는 조건으로 승낙했으니 걱정 말거라.”

“오······ 그렇군요.”


맞장구치며 쳐다보니 필리아는 부끄러워졌는지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나머지는 다녀와서 생각하자면서. 그러고는 혼자 냉큼 걸어갔다.


귀엽다.


귀도 빨갛고 내심 수줍어하는 모습이 정말로 귀엽다. 차마 다 큰 아이의 엄마라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정말 이리 귀여워도 되는 건가 싶기까지 하다.


‘아버지도 이런 부분에 반해서 결혼하신 건가?’


이 기분을 왠지 공유하고 싶다. 그래서 안부 인사도 할 겸 라프리트에게 다가갔다.



“저희 어머니 귀엽죠?”

“네. 무척 사랑스러우시네요. 저희 어머님이랑은 달리······.”

“에엥?!”


의외의 의견에 놀란 리아는 앞서가는 필리아의 눈치를 보며 발돋움하였다. 라프리트는 의아해하면서도 살짝 몸을 숙여줬고, 리아는 입가를 가리며 속삭였다.



“어머니가 곱고 청렴하게 생기셨지만, 사실 엄청 억세셔요. 라프리트 씨가 있어서 그나마 상냥하신 거지, 아니었다면 쌍심지를 켜시는 게 일상인걸요?”

“제, 제가 볼 땐 전혀 그렇지 않으신 것 같은데······ 되려 저희 어머님이야말로······. 리아 양에게 아양 떠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닭살이 돋았는지 몰라요.”


아니라면서 반박해보았으나 그녀의 대답은 변함없었다. 마리아, 그 천사와 동률 같았던 사람의 내숭이 훨씬 심하다며, 라프리트는 질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평행선을 이어갔는데, 서로의 부모님을 까 내리는 이 상황이 문득 웃겨 리아는 키킥 웃음을 터뜨렸다. 놀란 듯싶었던 라프리트도 입가를 가리고는 즐거이 웃었다. 조용히 따라오던 안네도 작게 웃는 소리를 냈다.


‘참으로 신기하구먼. 이 마을에―― 우리 집에 라프리트 씨가 있는 순간이라니.’


학원에서의 시간이 쭉 이어질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더군다나 방학 막바지에는 루비아와 함께 다들 여러모로 바빴던 터라 뜻하지 않게 선물받은 기분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도착한 광장에 도착했다.


어제처럼 광장은 한창 요리를 준비하는 중이었는데, 분주한 사람들 틈에서 폴스가 접시와 식기를 나르고 있었다.


로즈를 대할 때도 그러했지만 상당히 친화력이 좋다. 주민들의 마음에도 쏙 들었는지, 다들 폴스를 그만 쉬라며 살갑게 대한다. 복면 차림 정도는 그리 개의치 않는 듯했다. 특히 바리오와 루루카나는 아들과 닮은 그 얼굴을 한눈에 알아채고는 더욱 살갑게 굴었다.


세스와 하렘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델리안도 그러했다. 간이 부엌에 서서 진지하게 조리를 돕고 있었다.



“솜씨가 좋네, 세스 엄마.”

“당신들이야말로. 공부가 됐네.”


주거니받거니 하루만에 잘 동화된 델리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마음 놓고 둘러보니, 요새에서 잠을 청한 베르그들과 비비안, 리블리지가 눈에 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엉거주춤, 어색한 분위기로 구석에 모여 있었다.


‘본의 아닌 손님이지만, 저대로 내버려 두기에도 미안하지.’


정말 본의는 아니지만 도와주려 다가갔는데, 그보다 먼저 페리가 훌쩍 그들에게 나타났다.


아니, 볼 일이 있는 건 비비안이었나 보다. 페리는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고 그녀의 앞에 섰다.


뭔가 싶었는데, 페리는 입에 물고 있는 그릇을 비비안에게 내밀었다. 물론 예전에 만들어준 그 그릇은 아니었다. 폴스에게 빼앗듯 받아온 마을 거였다.



“저기, 뭘······?”


아직 마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어색한지 비비안은 어색하게 물었고, 페리는 대답 대신 다시금 그릇을 내밀었다.



“그게······ 음식을 달라는 건가요?”


끄덕.


뭘 당연한 걸 묻는다는 양 페리는 한심해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부탁하는 주제에 상당히 시건방지다.


하지만 이건 페리 나름의 배려였다. 이걸 알았기에 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지켜보기로 했다.


비비안은 대화도 통하지 않는 막무가내 부탁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고, 그릇을 받아 요리 중인 주민들에게로 갔다.



“저기······.”


작은 목소리였던 터라 요리하던 주민―― 이전부터 자주 요리를 도맡아 하던 아주머니가 듣지 못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비비안은 재차 불렀고, 이번에는 아주머니가 돌아봤다.



“응? 아~ 아이리스의 친구구나. 그래. 무슨 일이니?”


요리하는 사람 중에는 마족 주민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이니 비비안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살며 들어온 게 있어 마족이 무서운 거겠지.


그렇지만 이내 비비안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눈에 힘을 줬다.



“혹시 요리가 다 됐나요?”

“음. 얼추 다 됐단다.”

“그러면 저기, 페리 것만 먼저 주실 수 있나요? 많이 배고픈가 봐요.”


그리 말하면서 비비안은 쭈뼛쭈뼛, 페리에게 받은 그릇을 내밀었다.



“아하. 심부름이었니?”

“네에.”

“쯔쯧. 직접 받으러 올 것이지. 리아가 영 콧대가 높은 아이를 데려왔구나.”


차마 부정하지 못하겠다.


이쪽이 이러한데, 비비안이라고 뭐라 할 수나 있겠나. 그저 어색하게 웃을 따름이었다.



“그에 비해 아이리스는 참한 새색시를 데려왔어.”

“새, 새색시?!”

“응? 아직 아니니? 그래도 이런 시골까지 따라왔을 정도이니 아예 마음이 없는 건 아니겠지. 힘내도록 하렴.”

“네, 넷!”

“후후. 귀여운 아이구나. 자아, 가져가렴. 듬뿍 담았단다. 혹시 다른 반찬 같은 것도 필요하려나?”

“아, 아뇨. 그릇은 하나뿐이고 하니 충분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비비안은 조금 상기되어 돌아섰다. 귀엽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등 무척 기분이 좋아 보인다.


페리는 어느덧 한 자리를 차지하여 느긋하게 앉아있었는데, 그 앞에 그릇을 놔둔 비비안도 옆자리에 앉았다.



“고마워요, 페리. 맛있게 드세요.”


과연 똑똑한 아이 같다 싶더라니. 굳이 자신을 시킨 페리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하다.


하지만 달리 츤데레 기질이 강한 페리가 아니다. 본심이 들켜 토라져선, 홱 고개를 돌리고 는 작게 콧방귀를 낀다.


상당히 건방진 태도였음에도 비비안은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먹는 데 방해된다.》


까칠하게 말하기는 하나 페리는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지난번에 봤을 때는 에리사와 무척 친해 보였는데, 딱히 그 아이만을 응원하는 건 아닌 모양이네? 웬일이래?’


기회는 공평히, 자기 나름대로 두루두루 신경 써줄 셈인가 보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어제 잡아 온 폴코 고기가 듬뿍 들어간 된장찌개에 시선이 고정된 채이긴 하지만.


‘응. 뜨거워서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겠지. 결과적으로 주민들과 대화도 나눴고.’


그냥 돌아가 줬으면 하는 게 본심이지만, 기왕 온 거, 즐겁게 지냈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어쨌거나 아들의 친구이니.



“아이리스, 잘 돌봐주렴.”

“그럼요.”


산뜻하게 대답한 아이리스는 미소 짓고 있는 비비안에게로 갔다.


아이리스가 오자 화들짝 놀라는 비비안. 그러나 이내 예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모습을 보면, 사모하고 있다는 건 영 허튼소리가 아닌 것 같다. 타산을 노리고 달라붙는 여타 여우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저쪽은 맡기면 되겠지.’


천사를 뛰어넘는 아이리스가 돌봐주는 거니 걱정 없다. 진짜 문제는 저쪽이다.


리아는 아직도 엉거주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멍청하니 서 있는 베르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 만에 여태 귀족으로 살아온 습성을――유즈라와 가베인도 기사 작위를 받아 준남작이라 한다―― 버리라는 게 무리라는 건 안다. 더군다나 귀족 작위를 박탈당하여 평민이 된 것도 아니다. 그런 이들에게 강제로 여기는 나트알이니 특권의식을 버리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황제가 떠넘긴 전권대리인의 힘이 있긴 하다. 이로 명하면 베르그의 성격상 다들 따르도록 지시할 것이다. 하지만 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황제가 준 권한에 기댄다는 게 왠지 께름칙했다.


뜻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으니.


재차 한숨을 쉰 리아는 베르그들에게 다가갔다.



“어젠 잘들 주무셨나요?”


말을 걸자 경직된 이들은 딱딱하게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아주 기계가 따로 없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리아 님!”

“로, 로즈린느 님, 넘어지십니다!”


갑갑하다는 양 로즈가 굳은 사람들의 틈을 헤치고 달려왔다. 황급히 정신을 차린 유즈라가 따라오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로즈는 리아의 앞에 당도했다.


리아는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췄다.



“좋은 아침이에요, 리아 님!”

“그러네요. 잘 주무셨나요?”

“네! 이불은 보들보들하고, 베개도 푹신해서 바로 푹 잠들었어요.”

“다행이네요. 혹여 잠을 설치셨나 싶었는데.”

“사실 비밀인데······, 제 방의 침구들보다도 훨씬 좋아서 늦잠을 자고 말았어요. 너무 보들보들하고 푹신해서 일어나기 힘들었달까······. 헤헤.”


베시시, 로즈는 귀엽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었나? 마음에 들었다면 돌아갈 때 새 걸로 한 세트 주는 것도 괜찮겠네. 기념품 느낌으로.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멋대로 정할 게 아니니 에이브안에게 물어봐야겠다. 다만 챙겨주는 건 로즈만이다. 베르그들이나 리블리지에게 줄 선물 따위는 없다. 불만이라면 어렸을 때 오지 못한 자신들을 탓하라.



“근데······ 로즈 씨의 방이라면 황성이잖아요? 황성은 황제 씨―― 님이 계신 곳인데, 거기보다 더 좋다고요?”

“어, 네. 겉모습은 전부 하얘, 언뜻 수수해 보이지만 자수들은 모두 섬세했고, 마감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어요. 그 외에도 전체적으로 품질이 월등했고요.”


로즈의 말을 들은 리아를 저도 모르게 고개를 꼬았다.


황성은 앞서 언급했듯 칼윈 황제가 사는 곳이다. 안전상의 이유로 확실히 검증된 직속 어용 상회가 존재할 테고, 그들은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물품을 추리고 추려 황성에 납품할 것이다.


그런데 한낱 시골 마을의 것보다도 품질이 떨어진다고 한다······.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아 베르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로즈의 평가는 예상 이상으로 객관적이었나 보다. 시선이 마주친 베르그가 아주 진지하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리아는 놀랐다.


집에 있는 거야 에르가 준 것이니 당연히 품질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마을은 아니었다. 다들 에르가 지원해주는 물품을 한사코 사양했었다. 그나마 받은 건 물질적인 것이 아닌, 마법의 지원뿐이었다. 그것도 몰래 경계를 치거나,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든가 하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평범했을 텐데. 갑자기 급발전했나? 술처럼 에르가 제작법을 알려줬다던가.’


한창 고민에 빠져있자니 어깨가 툭툭 두드려졌다. 돌아보니 필리아였다.



“리아, 생각은 그만하고 슬슬 식사하러 가자. 다 된 모양이구나.”

“아, 네.”


듣고 보니 지붕까지 갖춰진 간이 부엌에서 풍겨오는 냄새가 무척 배를 출출하게 했다.



“여러분들도 가시죠.”

“감사드리오.”


필리아의 권유에 베르그가 대표로 정중히 예를 차렸다. 다만 어째서인지 직후 필리아가 곁눈질로 이쪽을 째려봤다.


찰나였지만 리아는 불길함을 감지했다.


‘왜, 왜?! 나, 나, 뭐 했나?’


엉덩이가 아련해지는 이미지가 머리에 스친 리아는 바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페리와 아이리스가 있는 테이블로 도망쳤다.



“아. 안녕하세요, 이스피리아 님.”

“으응. 잘 잤니?”


리아는 대꾸하면서 자연스럽게 비비안의 옆에 앉았다.


비비안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이리스는 그런 리아를 보고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번에 도망쳐 온 걸 알아차린 것이었는데, 그 눈은 이번엔 뭘 했냐고 묻고 있었다.


억울하다. 되려 이쪽이 묻고 싶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어찌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껴야 한단 말인가.


이러한 뜻을 담아 리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신뢰가 1도 담기지 않은 눈초리로, 아이리스는 잘 생각해보라며 뜻을 전해왔다.


‘진짜 짐작되는 게 없는데······.’


그러나 모처럼의 아들의 조언이다. 순식간에 잡념을 지운 리아는 빠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모르겠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수차례나 기억을 돌이켜봤음에도 필리아가 쌍심지를 켤 이유가 짐작 가지 않았다. 혹시나 해 어제까지 모두 돌이켰음에도 말이다.



“정말 모르겠어······. 왜지?”

“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하하······. 그, 그보다 배고프지 않니? 어서 아이리스랑 가서 받아오렴. 자세한 건 아이리스가 알려줄 거야.”

“아, 넷!”


직접 배식받아 오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비비안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어제처럼 주민들이 차려주는 건 줄 알았나 보다. 하지만 어젠 잔치였기에 그런 것이다. 평소에는 알아서들 자기 분량을 가져온다.


주민들도 딱히 필요 이상으로 챙겨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곳에 오는 손님은 드문데다, 기껏 온 첫 손님이 바지탄스들이였기 때문이다. 모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과 같은 대접에 무척이나 만족하지 않았나. 감동하여 아이처럼 울기도 했고.


덕분에 별다른 예법이 하나 없었던 나트알에서는 반응이 좋았던 이 대접이 기본 메뉴얼로서 정착했다.


정식적으로 정해진 건 아니다. 그러나 천성부터 털털한 주민들과 실 체험자인 바지탄스들은 이를 적극 반겼다. 이후 리카드마저도 매우 흡족해하여, 이 일상적인 대접은 마을의 문화로서 완전히 자리 잡게 됐다.


‘홀대한다고 느낀다면 어쩔 수 없지. 냉큼 돌아가는 수밖에.’


제발 그러라면서 리아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런 음침한 짓을 하고 있자니, 또다시 어깨가 두드려졌다. 매우 익숙한 감각에 리아는 곧장 필리아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본 리아는 곧장 다정하게 말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짤막하게 대꾸하며 필리아는 리아의 앞에 도시락을 내려줬다.



“아. 고마워요, 어머니. 제가 들고 갔어야 했는데 깜빡했네요.”

“깜빡한 건 그것뿐이니?”

“네?”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분위기가 싸하다······.



“네에? 가 아니란다. 고향에 돌아와서 신난 건 아는데, 너무 주변에 무심한 거 아니니?”

“주변이요······?”

“리아, 너 말이야. 세스 씨들이랑 제대로 인사를 나누지도 않았지? 팽에게 들어보니 다들 기다리고 있다던데?”

“어. 그러고 보니 무리분들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느낌이었지?”


지금도 돌아보면 멀지 않은 곳에 새하얀 울프독이 얌전히 서서 쳐다보고 있다. 그 뒤에는 맹렬히 날갯짓하는 꿀벌―― 아피스가 있고.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머리를 숙였다.



“정중하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으음. 밥 다 먹고 인사하러 가야겠네. 확실히 좀 무심하긴 했어.”

“네가 데려온 손님들한테도 그렇단다. 방치하고 혼자 놀기 바쁘잖니. ······엄마는 슬프구나. 난 그런 싹수―― 책임감 없는 아이로 키운 기억이 없는데 말이야.”


필리아는 눈가를 쓸며 슬픈 척하였다. 어깨까지 떠는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그러고는 눈동자만을 내려 쳐다보는데······ 그 붉은 적안은 싸늘하게 식어 있어, 몸이 떨리는 듯한 한기를 느끼게 했다.



“우리 리아는 이 엄마의 말을 어찌 생각하니?”

“차, 참으로 지당하신 마, 말씀입니다······.”


제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여기서 마을의 문화가 어쩌고 하면 큰일 난다는 것쯤은 안다.


엉덩이의 쓰라림을 떠올린 리아는 두려움에 떨며, 얌전히 필리아가 원하는 대답을 입에 담았다.



“아, 앞으로는 좀 더 신경 쓰겠슴다.”


대답을 듣고 나서야 필리아의 눈은 평소의 다정한 눈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비비안과 로즈를 챙겨서 다행이야. 아니었다면 그저 구두 경고로만 끝나진 않았겠지.’


머리에 바로 그려지는 건 이미 엉덩이를 맞고 있는 자신.


역시 아이는 소중히 대해야 한다.


크나큰 교훈을 재차 새기니 긴장이 풀려 몸에 힘이 빠진다. 그러나 아직 안도하기엔 미소 짓는 필리아의 눈치가 보인다.


벌떡 일어난 리아는 옆 테이블의, 아직 멀뚱멀뚱 앉아있는 베르그들에게로 갔다.



“저기, 베르그 전하? 여긴 예법과는 거리가 먼 곳이에요. 제국이라고 여기시면 안 돼요. 아까 비비안이 요리를 받으러 가는 거 봤죠? 그거처럼 직접 받으러 가셔야 해요. 제법 오래 머물 테니까, 이때 틈틈이 친해 두면 지내시기 편할 거예요.”

“음. 알겠네.”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됐다, 유즈라.”


베르그는 즉시 움직이려는 유즈라에게 손을 뻗어 제지하고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 함께 간다.”

“하, 하지만······.”

“하아······.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두마. 나나 로즈린느는 분명 황족이다. 타국에 방문하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게 관례고, 그게 예의이지.”

“그렇습니다.”


바로 그렇다며 유즈라는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럼. 그 대우를 왜 해준다고 생각하느냐?”

“그야 황족이시니······.”


베르그는 최근 들어 가장 어이없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유즈라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도―― 로즈는 물론이고, 의외로 붙임성 좋게 배식을 타와 어디 앉을지 탐색하던 리블리지마저도 요즘 훤히 드러낸 예쁜 그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물론 리아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당사자는 진지하여,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유즈라는 당혹스러워했다.



“잘 들어라, 유즈라. 우리가 대접받는 건 상호 얻는 것이 있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야. 양국 간에 이익이 없다면 황족이란 그저 허울 좋은 감투에 지나지 않는다. 이곳이 딱 그러하다. 이 마을에 신세를 질 뿐, 무엇하나 이점을 제공할 수 없지. 그러한 상대를 상전 모시듯 떠받드는 게 가당키나 할 것이라고 보느냐? 그럴 의무도 없는데?”

“그, 그래도 한도라는 게······.”

“나도 그렇지만, 유즈라······, 너는 나보다 더하는구나. 네겐 지금 이곳의 주민들이 우릴 홀대하는 것으로 보이나? 만약 그렇게 느꼈다면 반성하도록 하거라. 무수히 많은 배려를 받고 있음에도 모른다면 말이야.”


유즈라는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황자의 말에 차마 토를 달지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조아렸다.


베르그도 그녀가 아직 수긍하지 못하였음을 알아차렸으나, 굳이 언급하지 않고 잠시 내려다봤다.



“우린 이곳에 억지로 찾아온 불청객이란 사실을, 네가 근위 기사임을 잊지 말도록. 우리의 행동과 발언 하나하나에는 우리 제국의 위신이 실려 있음을 명심해라.”

“예······.”


그것을 끝으로 베르그는 몸을 돌려 음식을 받으러 갔다.


호위로서 가베인도 뒤따라가고, 로즈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유즈라의 손을 잡았다.



“저희도 가요, 유즈라.”

“······예.”


맥이 없어진 모습에 로즈는 되레 더욱 밝게 웃으며 유즈라를 이끌었다. 4살이 맞나 싶은 마음 씀씀이다. 과연 황족으로서 자라 온 아이랄까······.



“로즈 씨는 그렇지만······, 기사로서의 프라이드려나? 의외로 꽉 막힌 부분이 있으시네.”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란다. 사람마다 양보하지 못하는 점이 있잖니. 너도 그런 게 있을 테고.”


필리아는 살짝 나무랐지만, 이번만큼은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야 그녀는 호위 기사가 아닌가.


베르그도 말했지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시는 자의 평판으로도 이어진다. 불만이 있어도 삼켜야 하고,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하는 게 일반적이다. 더군다나 여기는 제국과는 아무 교류도 없는 곳이다. 첫 이미지가 중요하건만, 저리 굴어서는 ‘제국은 극진히 대접받기를 원하는 오만한 사람만 있는 곳’ 같은 프레임이 씌워질 것이다.


나트알 주민들의 성격이 다들 나긋하여 개의치 않아 다행이지, 삼국과 같은 곳에서 저랬다면 베르그와 로즈의 평가는 곤두박질쳤을 것이다.


‘학원에서는 확실히 야무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가 시골이라 만만하게 보는 건가?’


처음에는 타종족도 사는 곳이라 긴장한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경직된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까······.


멋대로 따라와 놓고는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꼬락서니에 여러모로 기분이 언짢아진다.


다른 사람들은 그나마 양호했다. 지금도 베르그가 솔선하여 친근하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이것도 맛있다며 챙겨주자 고맙다며 묵례도 하였다. 가베인도 무뚝뚝하긴 해도 정중히―― 오히려 부담스러울 정도로 모두에게 정중한 태도였다. 로즈는 원래부터 모두에게 활달하니 굴어 이쁨을 받았고.


리블리지도 “이쁜 처자구먼.”이라며, 엉덩이를 두드리는 아주머니에게 얼굴을 붉히면서도 감사하다며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동년배이거나 더 많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마 그렇지······? 어쨌든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돌려보낼 거야.’


그렇게 다소 날카로워진 기분으로 리아는 아침 식사를 했다.





“잘 먹었다! 맛있었어요, 어머니!”

“그러니?”


작게 웃으며 도시락 통을 정리해주는 필리아.


리아는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렸다. 식사 전의 날카로운 기분은 온데간데없이 풀렸다.


꽤 단순하다는 건 알지만 뭐 어떤가. 계속 기분 나쁘게 있는 것보단 낫지.



“어이, 가베인.”


마족과 인간 주민들 사이에 껴, 떠들썩하게 식사를 마친 세스가 기지개를 켜며 가베인에게로 왔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데······, 윗도리를 입은 모습이 영 익숙해지지 않는다. 괜스레 그려지는 건, 반나체의 세스가 징그럽게 달라붙는 광경이다.



“아침도 든든하게 먹었는데 소화할 겸, 어때?”


씨익 웃은 세스가 엄지로 뒤쪽의 숲을 가리켰다.


슬쩍 쳐다본 가베인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베르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편히 다녀오라 하고 싶지만······ 호위로서 그건 영 내키지 않겠지.”


베르그는 그리 말하면서 굳은 얼굴의 유즈라를 곁눈질로 보았다.



“세스타스 공이라 했나? 괜찮다면 견학해도 될는지?”

“상관은 없는데······ 좀 위험하지 않으려나? 여파라든가.”


다른 때라면 여파 같은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조금만 떨어져서 구경하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저 세스가, 벌써 흥을 주체 못 하는 그가 대강 할 리가 없다. 반드시 주변이 초토화 될 것이다.


학원의 학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다른 이들이 그 여파를 버틸 리 만무하다. 안전거리를 확보하자니 너무 멀어 보이지도 않을 테고.


선택이 아니다. 저들의 대련을 구경하기 위해선 보호막은 필수였다.



“그러면 제가――”

“――리아?”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차가운 시선이 꽂힌다.



“에, 에르가 봐줄 거예요.”


괜찮냐는 뜻으로 쳐다보니 에르가 살짝 고개를 끄덕여줬다.


마음 같아서는 폴스를 보내고 싶다. 보호막 정도는 칠 수 있다고 하니까. 그러나 아이를 어른들에게 보내기도 뭐하다. 게다가 완벽히 여파를 막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살짝 있다.



“헤에~ 당신이?”


세스가 에르를 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냈다.



“불만인가?”

“전혀. 그냥 리아 아가씨의 남편이라길래. 지내는 동안 이런저런 소문을 많이 들었거든. 실제로 보니······ 과연. 아가씨는 남자를 보는 눈이 좋군. 어쨌든 반가워, 세스타스야. 세스라고 불러줘.”

“찬크에르다.”


세스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잠깐이지만 빤히 쳐다본 에르가 그 손을 맞잡았다.


‘보기 좋네.’


에르는 친구가 적다. 기껏 알고 지내는 건 가족들과 마을 주민들쯤이 전부다. 그나마 에이브안, 잭과 나름 막역하게 지내지만, 그 외에는 달리 친구라 부를 사람이 없다.


호탕한 세스라면 무뚝뚝한 에르와도 잘 지내줄 터. 이대로 친해졌으면 싶다.


그랬는데······


뿌드득.


맞잡은 손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난다.



“헤에······. 힘이 좋으시구먼? 버티기 꽤 빡센데? 아······. 혹시 예전의 일로?”

“······.”

“음. 나라도 우리 이쁜이들에게 그랬으면 화가 났겠지. 이해해. 오히려 상판대기에 바로 주먹부터 안 꽂은 게 용해.”


순간 세스는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다. 우리의 사정으로 그대의 아내에게 큰 폐를 끼쳤다. 더불어 동생의 구출에 힘을 보태주어 감사한다. 이 은혜는 언젠가 반드시 갚겠다. 나, 세스타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다음은 없다.”

“명심하지.”


망설임 없는 대답에 만족했는지 그제야 에르는 힘을 빼고 손을 풀었다.


에르는 다정하지만 완고한 면도 있다. 그러한 성격상 그는 확실하게 매듭을 짓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용서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전부 날 위해서겠지.’


만약 자신만의 문제였다면 그는 별말 없이 넘겼을 것이다. 에르는 그러한 성격이었다. 아내에게 한결같이 최선을 다하는 멋진 남자다.



“에르······.”


리아는 팔을 뻗었다. 그러자 곧장 에르는 몸을 숙여 리아를 상냥히 안아 들었다.


체중을 고스란히 맞긴 리아는 살며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녀오세요.”

“응. 다녀올게.”


쪽.


다정하게 말한 에르는 이마에 살짝 키스해주고 리아를 조심스럽게 내려줬다.



“좋아! 가보자고!”

“저, 저는 뒷정리를 도울게요.”

“저도······.”

“에이. 이번만 신세를 지기로 하고 따라와. 어지간해선 보기 힘든 거라고?”


넉살도 좋은 세스는 남겠다고 하는 리블리지와 비비안을 끌어들인다.


선택권은 없는 듯한 억지에 그녀들은 불안한지 시선이 방황했다. 주민들 사이에서 뒷정리를 돕는 폴스를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보다 못한 아이리스가 나섰다.



“뭐, 별일은 없을 거야. 바보 아빠가 같이 가니까.”


아니다. 말리는 게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처음부터 따라갈 마음 한가득하였다. 참지 못하겠다는 양 흥미진진해한다.


확실히 이럴 때를 보면 아이 같기는 하다.



“하아. 어쩔 수 없죠. 저희도 가도록 해요, 안네.”

“말씀은 그렇지만 그냥 아가씨가 보고 싶으신 게 아닙니까?”

“아니에요.”


모두가 간다고 하니 눈치를 보던 비비안과 리블리지도 결국 따라가기로 했다.


묵묵히 떠나는 에르. 긴 흑발을 휘날리는 뒷모습도 멋지다. 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배웅해주는 이것이야말로 아내의 내조이려나 싶다.


전생에서의 아내도 이런 애절한 기분이었을까······.


에르와 떨어져 본 적이 처음은 아니지만 대부분이 반대의 상황. 베르다드에서 드문드문 에르를 배웅할 때도 있긴 했으나, 고향에서 이러니 조금은 감정적으로 된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 보이지도 않나 보네. 아휴······. 증축은 반드시 해야겠구나. 나중을 위해서라도.”


중얼거리는 필리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리아는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모두가 떠난 자리는 제법 고요했는데, 필리아가 툭툭 등을 두드렸다.



“이제 가자꾸나.”

“네.”


아쉬운 마음에 리아는 한 번 뒤돌아보고 걸음을 뗐다.


필리아가 이끈 곳은 어렸을 적 루데릭과 함께 단련했었던 공터였다. 현재는 주변을 상당히 개간하여 꽤 넓어졌는데, 그곳에 어느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무리는 인간이 아닌 몬스터들의 군단. 어림잡아도 200은 가볍게 넘을 정도로 많다.


이것이 은근히 압박하여 리아가 가지 못하게 막은 이유였다. 필리아는 아까의 말을 곧장 지키게 하기 위해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들 모여 있는 걸 보니······ 처음부터 이야기가 됐었던 모양이네.’


어쩐지 강요하더라니.


그런 생각을 하며 리아는 무리 앞에 섰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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