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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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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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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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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DUMMY

“그······ 내려주지 않을래요? 넘어지거나 하지 않는다구요.”


미끄러지지 않게 신발도 갈아신었다며, 리아는 원피스의 끝자락을 걷어 발목을 덮는 부츠를 보여줬다.


언뜻 평범해 보일 가죽 부츠다.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밑창의 소재부터 마감까지 고루 신경을 쓴 일급품이다. 아니, 대기의 마력이 자연스레 통과되는 것을 보면 가히 유물 급의 마도무구이지 않나 싶다.


결단코 평범한 가죽 부츠는 아니다. 약간―― 꽤 사치스럽기까지 하다. 하물며 사람이 사람이다. 넘어지거나 할 일이 있으려나 의문이 든다.


다만 리아를 안고 있는 찬크에르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요지부동이었다.



“저기, 에르······?”

“······옷의 기장이 길잖아. 더러워질 거야.”


얼토당토않은 주장은 아니었다. 확실히 리아의 원피스는 길다. 거의 발목을 가리는 기장이다. 이 숲을 거닐면 확정적으로 진흙이 묻을 거다.


하지만 평소 줄곧 리아를 보아온 라프리트는 알고 있었다. 리아가 즐겨 입는 저 미술품 같은 원피스는 결단코 더러워진 적이 없다고. 먼지는 당연하고, 과자부스러기, 심지어는 흘린 음료마저도 스며드는 게 아니라 그대로 흘러내린다.


그런, 항시 [청결]이 발동되고 있는 원피스가 더러워진다는 게 가당키나 하겠는가.


원단마저도 평범하지 않다. 부드러운데 뭔가 단단하다. 나트알로 오고 나선 거의 활동복처럼 입음에도 실오라기 하나 트지 않았다. 나뭇가지 정도에 쓸린다 한들 흠집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이따금 만져본 감촉과 빛깔로 보면 아마 데자스 트루 아라나의 실이겠지요.’


기타 치장과 금실마저도 그렇다면 저 원피스는 그 자체만으로도 천문학적인 가치가 있을 터였다. 더불어 더덕더덕 부여된 마법들까지 고려한다면 서로 차지하기 위해 분쟁이 벌어지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어울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몸을 지키기 것에 그런 걸 신경 쓰기나 하겠나. 오히려 최강의 무기라 할 수 있는 신검보다도 저 원피스를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일 것이다.


막말로 신검을 들고 있다 한들, 평범한 철검에 베이거나 마법에 당한다면 죽는다.


목숨보다 중요한 건 정말 드물다. 그러하기에 무기로는 생존확률을 극단적으로 높여주는 저 원피스와 같은 저울에 올릴 수조차 없다.


그만한 물건이다. 나뭇가지나 바위에 좀 쓸린다고 손상될 턱이 없다.


리아는 정확한 가치까지는 모를 거다. 그러나 성능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남편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럼에도 찬크에르는 단호했다. 되려 리아가 내리지 못하게 허리를 더욱 단단히 붙들었다.


도통 말이 안 통한다고 느낀 리아가 도움의 시선을 보냈다.


마음이 아프지만 라프리트는 애써 떨쳐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무리였다.


그야······ 오밤중의 외간 남자와의 밀회를 가지지 않았나······.


전날 밤에 가베인과 있었던 일은 모두가 보았다. 적막한 숲속에서 울리는 금속음을 못 들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외도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봐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그러는 리아가 그려지지도 않고.


당연히 에르도 안다. 오히려 리아의 사소한 것까지 모두 알아차리는 그가 모른다는 게 더 상상이 안 간다. 하물며 가만히 밀회를 용인한 걸 보면 가베인 쪽도 딱히 그런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는 건 명확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안다고 하더라도 마음까지 그러라는 법은 없다. 도리어 잠자코 지켜본 것에 대한 반동으로 찬크에르는 더욱 리아에게 집착하게 됐다.


그 광경이 바로 저거다. 일어나기 무섭게 곧장 리아와 딱 달라붙은 저 광경 말이다.


‘뭐어, 쉽게 말해 질투지요······.’


딱히 누군가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리아가 양보하는 게 맞을 듯싶다. 어쨌거나 리아는 그의 아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애처로운 저 시선을 계속 무시하고 있자니 조금 괴롭다.



“아, 안네? 저희도 잭 씨를 도우러 갈까요?”

“알겠습니다.”

“라, 라프리트 씨?!”


생각지도 못한 친구의 배신에 충격받은 리아의 외침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모질게 몸을 돌렸다.



“잭 씨, 뭔가 좀 찾았나요?”

“응? 아아.”


바닥에 난 풀과 나무 기둥을 살펴보던 잭은 흘끔 쳐다보고는 엄청 의욕 없이 걸었다.


라프리트는 뒤를 쫓았다.



“대충 찾았어. 오래되어서 알아보긴 힘든데 전투를 벌인 흔적이 있더라. 아마 몬스터라도 만났겠지.”

“그래요?”


슬쩍 방금까지 잭이 보고 있던 곳을 쳐다봤다.


나름대로 이런 류의 지식을 갖췄다.


그러나 모르겠다. 암굴왕의 보물전을 구하는 등의 일 때문에 제법 경험도 갖추었으나 이렇다 할 흔적은 찾진 못했다.


제대로 조사한다면야 찾아내긴 할 거다. 하지만 암만 용을 써봐도 잭과 같이 하기란 무리였다. 이만큼 장엄한 숲에 들어선 것 자체가 처음이니까. 곧장 탐색을 잘 해낼 리도 만무했다.


‘역시 숲에서 나고 자라신 분. 당연한 말이지만 비교도 안 되는군요.’


혹시 몰라 다른 곳도 보았지만 마찬가지다. 제대로 자리 깔고 조사하는 게 아니라면 흔적을 찾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근데 말이야······.”

“아, 네. 무슨 일 있나요?”

“별건 아니고, 평범하게 불러줬으면 해서. 씨는 왠지 멋쩍다고 할까, 좀 낯간지럽거든. 하하.”


앞에 서 걷던 잭은 무안하다는 듯이 볼을 긁적였다.



“귀족의 예절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강요할 수도 없고.”

“아, 아뇨! 별로 그런 건 아니에요.”

“그래? 괜찮으면 편히 잭이나 아저씨라고 불러.”

“그, 그럼, 잭 아저씨로······.”

“어. 그거면 돼.”


텁.


머리에 무게감이 생겨났다. 올려다보니 살짝 미소 지은 잭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긴장 좀 풀어. 밖은 어떤지 모르지만 여긴 여기야. 편견 없이 직접 눈으로 본 것만을 믿어. 저 말괄량이 리아랑도 그렇게 친구가 된 거잖아?”

“네······.”

“훗. 그러면 나는 여기에서 전투가 있었는지 확인하러 가볼게. 잠시 쉬고 있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냥히 머리를 쓰다듬어 준 잭은 몸을 돌려 바지탄스에게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라프리트는 한숨과 함께 미소 지었다.



“다 알고 계셨구나.”

“좋은 분이시군요.”

“응.”


라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네의 말대로다. 대충 뒷머리를 한데 모아 묶은 꽁지머리나, 잘 정돈되지 않고 희끗희끗 난 수염을 보면 언뜻 무심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잭은 주변을 잘 살피고 챙겨주는 멋진 성품을 지녔다.


이건 미처 알지 못했던 잭의 모습이었다.


아니, 잭뿐만이 아니다. 세린에게 받은 미래의 기억에서 마을 주민들에 대한 분량은 무척이나 적다. 심지어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주민들이 태반이다. 그렇다 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배경들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무했다. 잭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야기의 극초반만 잠깐 등장하여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였다.


하지만 역시랄까······. 리아의 저 따스한 성격이 달리 성형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그런 분들이 인정하고 계신 거니 저도 똑바로 마주해야겠지요.”


안네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족을―― 바지탄스들을 피하고 있다는 것을.


고의로 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보면 자꾸만 떠오르고야 마는 것이다.


나트알 주민들을 학살하는 광경이······. 그리고 그 모습을 넋이 나가 보고 있는 리아가······.


이 당시의 리아는 이제 겨우 마력고갈에서 벗어나던 때라 정신이 성숙지 못하였다. 그래서 저항이라던가, 도망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멍하니 부모님의 주검과 마을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보는 모습에 바지탄스와 마족들은 차마 리아에게 손을 대지 못했다. 제아무리 손에 피를 물들이기로 했다지만, 무저항인 어린아이를 해할 순 없었던 것이다.


라프리트의 입장으로서는 가당찮기만 했다. 손도끼를 들었다지만 마찬가지로 어린아이였을 터인 루데릭은 단칼에 그 숨을 거둬갔으면서.


이 모든 기억을 전해준 세린마저도 심히 어이없어했었다. 다 죽여놓고 이제 와 죄책감이 생겨나냐고.


물론 이 위선과도 같은 망설임으로 인해 결국 리아는 산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나트알에 발을 디디는 리카드의 손에 의해 전원 죽게 된다. 이후 혼자 살아남은 리아를―― 루데릭의 시신에 기절하면서까지 필사적으로 [치유]를 쓰던 리아를 거둬 베르다드로 향하게 된다.


당시 그녀의 나이 15세 때의 일이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뒤 리아는 베르다드에 입학한다.


이것이 정사. 무수히 펼쳐진 모든 이야기의 시작―― 프롤로그다.


성장 과정에서 극히 일부분이 다른 때도 있지만 큰 틀은 모두 다 똑같았다. 마족들에 의해 마을은 몰살, 오직 리아만이 리카드에게 구해져 베르다드로 향한다.


정말 치가 떨린다. 세기도 힘든 많은 미래에서 리아의 가족들을 죽이는 광경을 떠올리면 지금이라도 당장 저들을 없애버리고 싶다. [그림자 이동]으로 나트알로 넘어온 직후 그들의 얼굴을 봤을 땐 저도 모르게 공격할 뻔도 했다.


솔직히 지금도 바지탄스들을 보면 울컥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죠.’


나트알을 습격하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미래다. 이곳에서는 그들 또한 마을의 주민. 진심으로 모두를 위하며 서로 공존하고 있다. 하지도 않은 일로 그들을 기피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았다.


답은 뻔했다. 빛나는 태양처럼 아름다운 미소로 활짝 웃는 그녀를 보노라면······.



“저희도 가죠, 안네. 혹시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분부대로······.”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한 안네의 대답이 든든하다.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한 라프리트는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바지탄스―― 어느 미래에서는 나트알을 파괴하고, 이 시기에는 모두 죽었을 그들에게.


더 이상 증오심은 남지 않았다. 아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잭의 충고대로 직접 눈으로 본 것을 믿기로 했다. 그렇기에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적당히 전망 좋은 그늘진 곳에서 리아가 물었다.


“그러면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 건가요?”


잭은 어깨를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지탄스에게도 확인은 마쳤어. 가물가물하다지만 확실히 근방에서 전투를 벌이긴 한 모양이야.”

“오전만으로 찾을 줄은······. 내심 며칠은 수색하겠거니 싶었는데 좋은 오산이었네요.”


정말로 그러했다. 삼 년이나 지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외지에서 흔적을 찾는 것이다. 말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며칠을 수색하겠다는 각오를 했었다.


아직은 그저 하나의 흔적을 발견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낭보다. 일단 제대로 왔다는 것이니. 되돌아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살았다.



“아저씨가 와줘서 다행이네요.”

“그래그래. 적당히 부려 먹어 줘.”

“네. 수고하셨고, 잠시 쉬고 계세요.”

“그려.”


이제 해방이라는 양, 잭은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고는 근처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제법 축축하지 않을까 싶은데 사양이 없다. 아마 가죽바지이다 보니 나름대로 방수가 되는 게 아닐까.


리아는 마음속으로 재차 감사를 전하고는 에르를 쳐다봤다. 온화했던 아까와는 달리 제법 날이선 눈매로.



“에르? 이제 내려줘요. 슬슬 점심 먹어야죠.”

“모처럼이잖아? 먹을 때 내려줄게.”

“······.”


정말 포기할 줄을 모른다. 지금까지 내려줄 기미도 없이 안고 있다니. 힘들지도 않나 보다.


싫다는 건 아니지만 좀 적당히 해야 하지 않겠나.


‘전적으로 내 탓이기는 하지만······.’


전날 가베인과 있었던 일을 딱히 숨기려던 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훨씬 조용히 굴었겠지.


그렇지만 암만 검 소리가 났다지만 모두가 아는 건 예상 밖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그 흐뭇한 눈빛은······ 지금 떠올려 봐도 낯 뜨겁다.


조금 붉어진 안색을 감출 겸 리아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을 먹기 전까지예요? 밥 먹을 때까지 안고 있으면 안 돼요?”

“응.”


말은 청산유수다.


자꾸만 나올 것만 같은 한숨을 참고 리아는 바지탄스를 불렀다.


몇 차례나 되다 보니 익숙해졌는지 바지탄스는 금세 인원을 짰고, 폴스는 그들과 함께 나트알로 음식을 가지러 갔다.


음식이 오자 에르는 약속대로 내려줬다. 식사하기 직전까지 안고 있던 건 불만이었지만······.


그렇게 짧지만 여유로운 식사를 마치고 재차 이동을 개시했다.


선두는 잭과 바지탄스, 티라이드로, 셋은 이따금 상담도 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거의 잭이 솔선하여 모두를 이끄는 형태였다. 하지만 점차 나아갈수록 길이 떠오른 것인지, 두 시간 후에는 티라이드가 선두에 서게 됐다.


여정의 중반쯤이었다면 백날 지나도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긴 바지탄스들이 여정을 떠난 초반이다. 아직 집중력과 긴장감이 풀리지 않았을 터이니 보다 선명히 기억에 남은 듯하다.


탄력을 받은 이동속도는 차차 빨라져만 갔다.


체력적으로는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로즈는 진작에 유즈라의 품에 안겨 이동했다.


문제는 베르그다. 무를 중시하는 제국의 풍조 탓에 어느 정도는 단련한 듯하지만, 그는 황자다. 본격적으로 할 리는 없다. 고르지 못한 숲길의 영향도 있어 그의 체력이 금세 고갈됐다.



“미안하네. 멋대로 따라왔거늘······.”


적당한 바위에 앉은 베르그가 다소 흐트러진 숨을 내뱉으며 사과했다.



“아뇨. 늦어지는 것도 여행의 묘미 중 하나예요. 베르그 전하가 미안하실 필요는 없어요.”

“으음······.”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으로 베르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부담가지지 말라고 한 나름의 농담이었는데 잘 안됐나 보다. 하지만 정말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예정보다 꽤 빠른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 뜻을 담아 재차 괜찮다고 설득하니 베르그는 마지못해 알겠다며 받아들였다.



“한데, 그······ 전하는 어떻게 안 되겠나?”

“응? 호칭이요?”

“그렇네. 조금 딱딱하지 않은가. 이따금 씨라고도 부르면서 말일세. 공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편히 불러줬으면 하네. 신분적으로도 전권대리인인 이스피리아 양이 위가 아닌가? 그러한데 전하라 불리니 뭔가······ 창피하다네.”

“아······.”


‘확실히······. 가끔가다 베르그 씨라고 부른 기분이······.’

『긍정. 총 11번 실시함.』

‘아. 역시······?’


언제 그렇게도 많이 불러댄 건지. 라프리트와 루비아의 강습 덕분에 그래도 제법 신경 쓴 부분인데.


살짝 좌절한 리아는 아이에게 알려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물론 두 친구에게는 비밀 엄수라는 것도 잊지 않고 말해두었다.


꼼꼼히 안전을 확보하고 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앞으로 도플갱어라든가, 귀찮은 일이 많아질 이들과 관계를 돈독히 해도 괜찮은지를. 하물며 황제가 준 전권대리인의 권한으로 관계가 깊어져도 될지를······.


뭐, 답은 금방 나왔다.



“뭐, 알겠어요. 그러면 이젠 편하게 베르그 씨로 부를게요. 물론 사적인 자리에서만요.”

“후후. 고맙네.”


베르그는 만족한다는 듯이 웃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래도 되나 고민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로즈랑도 언니 동생 하는 사이이지 않은가. 거기에 작은아버지가 낀다 한들 이제 와서라는 기분이다.


적당히 공적인 자리에서만 조심하면 문제없겠지.


가볍게 생각하기로 한 리아는 슬슬 어두워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물도록 하죠.”


두 번째 겪는 일이다. 아직 일러 보이지만 반대하는 사람 없이 신속히 주변 탐색과 함께 자리를 만들었다.


리아는 근처 터 좋은 곳에다가 중력 마법으로 땅을 다졌다. 그 위에 어제 만든 검붉은 지붕이 멋들어진 4층 벽돌집이 돌연 나타났다.



“우와······. 유즈라, [수납]의 아티팩트는 이런 것도 가능하군요.”

“그, 그러게 말입니다. 넣는 것도 그러했지만 이만한 집이 돌연 나타나다니······.”


리아도 적극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차원수납]이라지만 이 큰 것이 어떻게 들어가는지 기절초풍할 뻔했다. 정작 에르는 기껏 만든 아내의 작품을 놓고 갈 수 없다는, 가볍기 짝이 없는 이유로 챙긴 것에 불과했지만······.


‘잠 자리는 굳어서 다행이지만 다시 봐도 놀랍네.’


내심 보관할 물건은 들 수 있는 크기가 한정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별로 그렇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알게 모르게 고정관념이 있었나 보다. 여기는 엄연히 마법의 세계이건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지구 태생인데다가, [차원수납]은 아직 제대로 다루는 마법이 아니지 않은가.


에르조차도 [차원수납]의 공간을 지정하여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미처 [그림자 이동]으로까진 이어지지 못했었다며 드물게 자책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용왕마저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데 사소한 실수 정도는 넘어가도 될 것이다.



“음음. 나처럼 평범한 아이로는 어쩔 도리가 없지.”

“······엑?”

“응······? 왜 그러시나요, 베르그 씨?”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그래요? 뭐, 괜찮으시다면 다행이지만. 피곤하실 테니 어서 들어가기나 하죠.”

“그, 그렇군.”


뭔가 기묘한 것을 보는 듯했던 시선이 조금 걸리지만 본인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어쩌겠는가. 신경 쓰면 지는 거다.


집으로 들어가니 다들 익숙하게 본인들의 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서두르는 것을 보니 아마 흘러내린 땀을 씻으려는 게 아닐까 한다.


화장실이랑 샤워실이 결합한 데다 그리 넓진 않지만, 3개씩 층마다 빠지지 않고 갖춰 놓았다. 바지탄스들의 경우 인원수가 되다 보니 차례를 기다려야 할 테지만 그리 불편한 점은 없을 것이다. 변기랑 배수로는 에인샤론드가 메고 있던 집의 것을 참조하여 [정화]를 걸어두었기 때문에 오수로 인한 문제도 완벽했다.


그렇게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다가 저녁을 먹고, 리아는 폴스가 마련해준 침상에 편안하게 누워 휴식을 취했다.



“리아.”

“아, 에르. 일로 와서 같이 누워요.”

“무척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하지만 그 전에 잠시 괜찮을까?”

“응?”


어제와 같은 일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거절하지 않는 에르다.


드문 일에 뭔가 싶었던 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볼일이 있나요?”

“응. 잠시 같이 와줬으면 해.”

“음. 알겠어요.”


남편이 부르는 것이다. 리아는 별생각 없이 벗어놓은 부츠를 신고 그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갔다.



“실례할게.”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에르는 리아를 번쩍 들어 올려 팔에 앉혔다. 그 상태로 에르는 어두워진 숲속을 천천히 걸었다.


‘함께 산책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어쩌면 오전만으로는 보상이 조금 부족하고 여긴 것일까.


그리 생각하니 조금 귀여워 리아는 가만히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산책을 즐기기로 했다.


그랬는데······.


‘너무 길어! 심지어 아무 말도 없다니!’


침묵이 싫은 건 아니다. 가끔은 남편과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부부로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길다. 벌써 20분째다. 에르는 20분째 묵묵히 걷기만 할 뿐이었다.



“저기, 에르? 조금 멀리 나오지 않았나요?”


벌써 벽돌집은 어두운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가벼운 산책이라기엔 아무래도 멀리 나왔다.


하지만 묻는 말에도 에르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였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슬슬 나와라.”

“네.”


뭔가 싶었는데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목소리였다.



“역시 발각됐군요.”

“라프리트 씨랑······ 안네 씨?”


그렇다. 멀지 않은 나무 그늘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이번 생에 첫 친구와 그녀의 가족이었다.


따라오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라 놀란 눈으로 바라보니 라프리트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네도 그녀를 따라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보였다.



“미행 같은 모양새가 되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아뇨! 미행이라뇨! ――응? 같은 모양새? 라프리트 씨, 어디 가시는 길이었어요?”


이상함에 물으니 라프리트가 맞다고 대답했다.



“잠시 들러볼 곳이 있어서. 물론 집에 계시는 분들께 말씀은 드렸습니다. 다만······ 가시는 길이 겹친 모양입니다.”

“아~ 그래서 미행 같이 되었구나.”


가는 방향이 같다면 그야 그렇겠지.



“근데 에르도 그렇고, 어딜 가시는 거예요?”


묻는 말에 안네는 슬쩍 주인인 라프리트를 쳐다봤다. 보아하니 그녀는 어디로 가지는지도, 밤중의 산책이 그리 내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고 라프리트는 에르를 똑바로 보았다.



“혹시나 하였는데, 가는 길이 같은 듯싶네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함께 가도 될까요?”


리아는 자신을 안고 있는 에르를 봤다. 그리고 에르는 고개를 돌려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해라.”

“고마워요.”


재차 고개 숙여 감사를 전한 라프리트는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어 나란히 섰다.


인원이 불어났지만 이렇다 할 대화는 없었다. 땅거미가 진 어두운 숲속을 묵묵히 걷기만 하였다.


조금―― 아니, 꽤 근질근질하다. 그렇지만 분위기가 묘했던 터라 리아는 입을 다물고 얌전히 있었다.


그렇게 한 15분을 더 걸었다.


조용하고 불빛 하나 없는 숲속은 어두컴컴하여 왠지 모를 알싸함을 자아내――진 않았다. 그야 대낮처럼 훤히 보이는데 무서울 턱이 있나.


라프리트와 안네도 [암시]의 투기술로 어느 정도 보이는지 걸음에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3분여를 더 걸은 끝에 에르가 멈춰 섰다.



“여긴가요?”

“응. 이곳에 볼일이 있었어.”


에르의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프리트.


둘이 보는 정면에는 높이 50m쯤은 되어 보이는, 이끼가 잔뜩 낀 거대한 바위가 있었다.












대륙을 뒤덮은 화마.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발발한 전쟁의 불씨는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이윽고 평온하게 일생을 보내고 있던 환수의 귀에도 들어오게 됐다.


당연히 관심 따위는 없었다. 인간들이 전쟁을 벌이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 전쟁조차 어느덧 보면 금방 끝났고, 한 국가가 없어지거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기 일쑤였다.


무엇 하나 특별하지 않은, 그딴 사소하기 짝이 없는 일에 관심을 가질 환수는 단연코 존재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 전쟁만큼은 달랐다.


당최 어떻게 한 것인지, 인간은 널리 미움을 받아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주제 파악을 못 했다고 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고서야 이 대륙에 존재하는 가히 모든 종족에게 싸움을 걸겠는가.


객관적으로 봐도 정신 나간 짓이다. 대륙 전체에 싸움을 걸고 이길 수 있는 종 따윈 한정되어 있거늘.


그야말로 환수 정도는 되어야 감당할 수 있는 무모함이다.


하지만 환수들이 그러할 일은 단연코 없다. 신화시대 때부터 존재해 온 그들은 아는 것이다. 만약 그딴 짓을 벌인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찌 되는지를······.


현대에 남은 환수들은 모두 그러한―― 눈치가 빠른 이들뿐.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평화를 추구하며,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조용히 지내왔다. 덕분에 워낙 눈에 뜨이지 않아 환상종―― 환수라는 명칭마저 생겨났다.


그런데 더는 세상일에 무관심할 수 없게 돼버리고 말았다. 너무 많은 곳에 미움을 받아버린 인간이 멸종할 우려가 생겨난 것이다.


물론 인간이건 뭐건 멸종한다 한들 아무 상관없었다. 태곳적부터 살아온 환수에겐 종의 멸종은 심심치 않게 보아오던 일상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애당초 환수라 불리는 이들조차 태반이 멸종된 판국에 새삼스럽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 놓고 방관할 수만은 없게 됐다. 자연 멸종이 아닌, 타인에 의한 멸종이었기 때문이다.


용왕이 깨어나 버리고 만다······.


전 세계를 한눈에 둘러보는 용왕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땅속 깊은 곳에 있다고 한들 용왕은 즉각 한 종의 멸종을 포착해 버리고 만다. 그것을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재해 오며 직접 두 눈으로 보았다.


그렇기에 이 세그언도 대륙에서 살아가던 환수들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다들 내키지는 않았다. 그야 스스로 자처한 게 아닌가. 자업자득인 판국에 의욕이 생길 리도 만무했다.


그럼에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세계의 관리자인 용왕에겐 사정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으니. 전쟁의 이유 따윈 안중에도 없이 모두 업화의 불꽃으로 정화해 버릴 것이다.


소규모였다면 그래도 괜찮다며 환수들은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도 누가 멸종하든 말든 관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 전쟁은 거의 대륙 전체가 얽힌 일이었다. 업화의 불꽃이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 터였다. 그 영향은 필연적으로 환수에게도 올 것이고, 태평하게 사는 것만이 낙인 그들에겐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네 명의 환수는 나서기로 했다. 인간의 싸움에 중재자로.


용왕을 막거나 설득할 마음 따위는 생겨나지도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신의 화신과도 같아 가히 절대자처럼 군림하던 환수마저 금세 갈기갈기 찢긴 것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오금이 저렸다. 트라우마처럼 떠오르는 그 기억들이 마주할 용기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만큼 용왕은 오랜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무서웠다. 대적할 자가 없이 유구한 세월을 존재해 온 환수조차 감히 말을 섞기 두려울 정도로.


관리자―― 용왕의 앞에 서느니 차라리 귀찮지만 중재자로 나서는 게 낫지.


이건 네 명의 환수 모두의 공통된 생각으로, 그 어떠한 반대의 의견도 없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왕 중에서 평화를 물색하던 자에게 접근. 그를 통해 어떻게든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게 네 명의 환수는 각자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인간을 감시하기로 했다.


――인간이란 종이 자연 멸종할 때까지.


분명 길 것이었다. 하지만 유구한 세월 존재해 온 환수들에게는 종의 멸종이란 그리 긴 기간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력이 끈질겨 멸종하지 않게 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환수들이 바라는 건 무사태평한 나날들이었으니. 굳이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야 뭔들 괜찮았다.


지정한 구역의 동쪽을 맡은 히야신스도 그러했다. 적당히 지내기 좋아 보이는 터에 뿌리를 내렸다. 감시 등의 일은 그리 관심 없었다.


그렇게 800여 년의 세월 동안 마음 편히 숙면을 취했다.


‘그, 근데 어쩌다가 이리된 거라닝?’


히야신스는 혼란스러웠다.


혹시 잠만 자서 그런 건가. 아니면 간혹 인간들이 영토를 벗어나 지나치더라도 가만히 놔둔 벌을 받는 것인가······.


무수히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지만, 히야신스로서는 도대체 어찌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이해조차 안 되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용왕이 자신의 앞에 있단 말인가······.


방금까지 분명 잘 자고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정말 그럴 일은 어지간하면 없겠지만 설사 들고 옮기더라도 모를 정도로 푹 잠들었었다.


근데 이상한 느낌에 깨보니 이거다. 바로 앞, 5m 전방에 용왕이 서 있다.


······게다가 이질적인 뭔가가 더 있었다.


정체를 모를 것이었다. 존재는 분명하게 느껴지지만, 그 외에는 어떠한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저 부분만을 도려낸 듯 텅 빈 것 같았다.


처음 겪어본 일이었다. 용왕조차도 그 거대한 마력의 압력 정도는 느껴지건만. 영혼은커녕, 마력의 일렁임조차도 감지가 안 된다.


‘웬 인간 아가들도 함께인뎅······ 이젠 어쩌징?’


히야신스는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고민했다. 그리고 내린 답은 가만히 있는 것이었다.


아직 말을 걸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않나.


어쩌면 우연찮게 여기서 휴식을 취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괜찮은 터이다 보니 여러 생명체가 왕왕 들르고는 한다. 용왕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어쩌다 괜찮은 곳을 발견하여 쉬는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응응. 굳이 먼저 아는 척하지 않아도 될 거양. 편히 쉬는 데 놀랄 테공.’


마음을 정한 히야신스는 꼼짝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그대로 있었다. 잠시 뒤면 돌아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지만 그 얄팍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 에르, 이분에게 볼일이 있는 거예요?”

“응. 줄곧 마력이 느껴지길래.”

“그러네요. 엄청난 마력이에요. 거의 아니마무스 씨랑 비슷―― 아니, 마력량만이라면 더 많기까지 하네요. 혹시 환수인가요?”

“그런 거지.”

“오. 역시. 어쩐지 마력레벨이 잘 측정이 안 되더라니.”


‘이거······ 들킨 거다냥?’


명백히 자신을 가리키는 듯한 말투와 환수에 대한 언급. 심지어는 아니마무스의 이야기까지 나온 것으로 봐선 틀림이 없어 보인다. 마력마저 느껴진다니 빼도 박도 못할 수준이다.


근데 뭐?


아직 부르거나 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우연히 맞아떨어졌다는 가능성이 남아있었다. 아니면 그냥 구경하러 왔다든가.


어쩌면 자고 있다는 판단하에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다.


히야신스는 그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 나는 지금 푹 자고 있음을 관철하기로 했다. 냉철하게 말해 그럴 가망은 없다 하더라도.


덤으로 무지하게 상냥했던 용왕의 목소리는 못 들은 걸로 하자.



“라프리트 씨도 이분을 보러 오신 건가요?”


‘응? 라프리트······? 왠지 모르게 기억에 남아있는 이름이넹?’


누구였는지 떠올려 보고 있자니 다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눈에 익은 지역이다 싶어서. 혹시나 해서 한 번 만나 뵈러 왔어요.”

“에? 그거 굉장한 우연이네요?”

“그러게요. 리아 양처럼 마력이 느껴지거나 한 건 아니어서 반신반의했는데 운이 좋았어요.”


화기애애하다.


좋은 징조다. 이대로 돌아가 주기만 하면 완벽하다.



“근데 왜 모른 척하고 계시는 걸까요?”

“주무시는 게 아닐까요?”


‘웅! 자고 있쪙!’



“아뇨. 진작에 깨셨어요. 이미 저희를 다 관찰하셨는걸요?”

“그런가요?”

“시선이 느껴졌으니까 아마 틀림없을 거예요. 그런데······ 좀처럼 일어나시질 않네요. 아직 비몽사몽하시나? 앞에 있다는 건 분명 아실 텐데.”


······.


꿀꺽.


히야신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심경은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착잡했다.


각오를 다져야겠지.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도저히 일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니, 한바탕 거하게 지릴 자신만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바로 그때였다.



“이봐. 뭐 하는 거냐?”


맑고 청량한, 듣기에 기분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였다. 모르고 들었다면 그 좋은 음색에 저도 모르게 헤실거리고 말 것이니라.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짜증과 절대자의 기색을 느낄 수 있었던 히야신스는 몸이 얼어붙고야 말았다.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다. 진짜 용왕이다.


움직여야 한다.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굳어진 육신은 말을 듣지 않았다.



“안 들리나? 나는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여전히 음색 자체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히야신스에게는 모든 것을 용납하지 않는 강철 같은 말이었다.


거부권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죽는다······.


죽음을 직감한 육신의 반응은 극적이었다. 생각보다도 먼저 생을 갈구한 것이다.


쿠구구구궁――


흡사 지진과 같은 진동이 생겨났다.


히야신스는 800여 년 동안―― 이 일을 맡기로 시작한 이래 터를 내린 이 자리에서 사시사철, 어떠한 때라도 움직이지 않고 숙면을 취했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가 쌓이기 좋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히야신스의 육체에는 먼지와 이끼 등의 토사물들이 차곡차곡 쌓였고, 시간이 지나 그를 하나의 바위로 탈바꿈시켰다.


그런 상태에서 움직인 거다. 가히 일체화되었다 싶은 토사물들에 균열이 생겨났고, 이윽고 하나둘 떨어지며 지상에 안개와도 같은 먼지구름을 만들어 냈다.


쿵! 쿵!


흡사 땅 밑에서 나온 듯한 2쌍의 발이 좌우로 넓게 대지를 짚었다.


단순히 발만 드러났을 뿐이지만 성벽이 연상되는, 둘레가 족히 5m에 달하는 짧고 뭉특한 발은 그 크기가 압권이었다. 딱 달라붙어 있는 4개의 발톱도 워낙 거대하여 언뜻 새로운 광물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미안합니당! 죽이지만 말아주송!》


쿠궁.


재차 지진이 났다. 히야신스가 그 머리를 냉큼 바닥에 박은 것이었다. 거구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머리다. 그렇지만 원체 크기에 인간 정도는 가볍게 압사하고도 남았고, 땅을 울리는 것도 손쉬웠다.


하지만 이 광경을 찾아온 손님들이 볼 수는 없었다. 아직 먼지구름이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히야신스의 뇌리에도 이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저질렀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 왔다.


그나마 저쪽에서 먼저 [방벽]을 쳐두어 먼지나 진동으로 인한 피해를 차단하여 다행이랄까.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최대한 기분이 상하지 않았기를 기도하며 그대로 머리를 박은 채로 대기했다.


용왕도 그대로 있을 마음은 없는지 단숨에 마법으로 먼지구름을 날려버렸다.


이윽고 히야신스의 모습도 드러났다.



“어······ 거북이?”


용왕과 대화를 나누었던 어린 인간 아이가 쭈욱 올려다본다.


물론 말처럼 거북이는 아니었다. 평범한 거북이는 꼬리에 뱀의 머리가 달려있을 리도 만무하니까.



“아니다. 거북이가 아니라 현무인가······? 헤에. 있긴 있는 거구나. 상상하던 것과는 좀 다르지만 굉장하네. 박력 넘쳐.”


‘아니아닝! 굉장한 건 아가란다?! 뭘 어떻게 하면 아라드 토르토리스를 알고 있닝?’


아라드 토르토리스란 현무로, 그 종족 명은 저 멀리 신화시대에서 잊혀 사라진 것이었다. 기억하는 자는 극히 소수로, 당대를 같이 살아온 존재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히야신스도 한평생 자신의 종족 명을 입에 담거나 하지 않아 인간이 안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경악하고 있자니 그 조그마한 아가가 고개를 꼬았다.



“응? 근데 현무라면 북쪽을 담당하는 사성수 아니었나······? 여긴 따지고 보면 동쪽에 가까운데? 뭔가 뒤죽박죽이네.”

“리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지만, 그건 다음에 둘이서 할까?”

“아, 네.”


알 수 없는 말을 한 인간 아가를 말린 용왕이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 머리를 박고 있으면 대화하기 어렵다만?”

《네엥! 죄송하게 됐습니당!》


인간 아가에게 한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싸늘한 목소리에 히야신스의 고개는 거의 반사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제야 보게 된 손님들의 면면은 히야신스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어라랑? 인간?》

“불만인가?”

《아, 아뇽! 당치도 않습니다용!》


화들짝 놀란 히야신스는 냉큼 머리를 박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용왕이 직접 마법으로 멈춰 세웠다.



“일일이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볼일이 있어 찾아온 것은 이쪽이다.”

《어······ 넹. 알겠습니당.》


뭔가 생각하던 것과 다르다. 이전에는 감정이 없는 무기물처럼 느꼈었는데······.


직접 마주친 것은 처음이지만, 무자비하게 환수를 도륙 냈던 때와는 분명하게 인상이 다르다. 왜인지 인간으로 변해있기도 하고.


뭐어······ 무서운 건 여전하다. 뼛속 깊이 새겨진 공포심은 하루아침 만에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저, 저깅······ 오, 오늘은 어쩐 일로 보잘것없는 제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그리 말한 용왕은 잠시 시선을 내려 본인이 안고 있는, 몹시도 눈을 빛내는 인간 아가를 쳐다봤다.



“여기 이 사랑스러운 사람은 나의 반려다.”

“이스피리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바, 반려?! 아, 아내라공?!’


히야신스는 무심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어쩐지 인간의 모습이다 싶더라니 설마 저 용왕에게 반려가 생길 줄은.


오래 존재해 왔지만 아마 이번만큼 놀란 일은 여태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반려라는 인간 아가가 너무나도 예상 밖이었다.


‘으에?! 이, 이스피리아?! 마, 맞징? 많이 작아 보이지만 분명 그 아가지······?’


너무나 경악한 나머지 잘못 들었나 귀가 의심됐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되면 저 둘이 한 쌍이 된단 말인가.


하지만 무엇을 생각하든 농담 따위가 아니었다. 용왕이 그럴 리도 없거니와, 소개할 때의 그 자부심 가득한 목소리와 따스한 눈빛은 결코 농담이 아님을 직감케 했다.


어안이벙벙한 히야신스를 뒤로 하고 소개는 이어졌다.



“이쪽은 아내의 친우들이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라프리트 로 디안 리벨리타스입니다.”

“안네 시빌라카입니다.”

《으응?》


인간의 예법으로 정중히 인사하는 두 인간 가운데 이색적인 이름이 껴 있다.


아까는 몰랐지만 풀네임과 모습, 영혼과 함께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다. 오래 전, 먼 미래에서 만났었던 그때 그 아가였다.



《아가······. 너, 혹시 기억이 있닝?》


반신반의하며 자신도 모르게 물은 것이었는데,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만나 뵙네요, 히야신스 님.”

《어머어머! 역시 그랬구낭! 만나서 반갑구나, 얘! 잘 지냈닝?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구낭.》


라프리트는 미소 지었다. 미적 감각이 다른 히야신스의 눈에도 참으로 어여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렇게나 무섭도록 날이 섰던 아가가······.’


이전 첫 만남이 있었을 때의 그녀를 떠올린 히야신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시야를 맞췄다.



“고마워요. 그땐 제 생각에만 치우친 나머지 미처 감사하다고 말씀드리지 못했네요.”

《아니란당. 친구를 위해 열심히 애쓴 거잖닝. 밝게 웃는 모습이 보기 좋구낭.》

“히야신스 님······.”


모처럼의―― 말 그대로 신의 기적이나 다름없는 재회다. 이 또한 새로운 인연이니 잠시 밀린 회포를 풀도록 하자.


그렇게 라프리트와 대화를 나눴다.


시대를 넘어, 무척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여전했다. 정말 명석하고 착한 아가다.


구태여 지금 만나러 온 것도 그러하다. 기억을 되찾자마자 곧장 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들어봐야겠지만, 아마 무엇이 중요한지 알고 있었겠지.


라프리트는 그렇게 본인의 위치에서, 지금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들에 사력을 다해 살아왔을 거다. 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며······.


환수 같은 게을러터진 아줌마들에게 의지하기보단 그편이 더 현명하다.


고군분투했을 그 모습을 생각하니 짠하면서도 기특하다. 아니, 너무나도 기특하여 쓰다듬어 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


더는 참을 수 없었던 히야신스는 마법을 썼다.


빛이 히야신스를 감쌌다. 잠시 후 사그라들었을 때는 거대한 바위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사라진 건 아니다. 히야신스는 단지 오랜만에 [소형화]의 술을 쓴 것뿐이었다.


이젠 사람의 손바닥만치 작아진 히야신스는 천천히 날아 라프리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놀라면서도 양손으로 받쳐주는 그녀의 얼굴을 뱀의 머리로 상냥히 쓰다듬었다.



“히, 히야신스 님?”

《기특한 아가를 칭찬해 주는 게 어른의 역할 아니겠닝.》

“······.”

《열심히 노력했구낭.》

“저는······.”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라프리트는 입을 앙다물고 어떻게든 버텨내려고 했다. 하지만 버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이스피리아와 함께 서 있는 것이다. 이 미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운명을 바꾸기 위한 노고가 어땠을지는 히야신스로서도 짐작할 수 없었다.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녀는 신조차 해내기 힘든 위업을 이뤘다고.


다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할 위업이다. 고독하게 만신창이가 되면서도 가시밭길을 헤쳐 나갔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나만은 그녀를 칭찬할 것이다. 고생이 많았다며, 혼자 열심히 했다면서.


그리 생각하며 히야신스는 북받쳐 우는 라프리트를 따스하게 달래주었다.


작가의말

새로운 환수의 등장임다! 그리고 오카마입니다!

아... 근데 환수에게 성별은 그닥 의미가 없는지라...

어쨌든 누님속성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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