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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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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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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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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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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201

DUMMY

무무카케는 손님으로서 출입했다. 신분을 증명할 방법이 따로 없기에 데려다줄 겸 리아는 피프스의 배웅을 하려 따라 나왔다.



“다녀오겠습니다.”

“응. 조심해서 다녀오렴.”


가슴에 손을 대고 조신하게 머리를 숙이는 피프스. 그 옆에선 무무카케가 어색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리아는 떠나가는 둘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에르도 금방 변장을 마치고, 리아는 그의 팔에 안겼다.



“가죠.”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와 함께 리아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성전이라는―― 비록 하룻밤의 일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엄청났던 사건 이후로 세인트리안은 무척이나 바빴다. 성지에서 사는 일반 신도들은 물론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다. 나라의 흥망성쇠에 관여하지 않는 그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하나의 이벤트로서 왁자지껄 떠들며 보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과 실질적인 피해를 조사한 수뇌부, 교황청은 달랐다.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의 어마어마하게 쌓인 문제들에 매일 치이는 나날을 보냈다.


일단은 복구.


세인트리안은 성전을 선포하게 만든 인물, 자인 디바오러에 의해 원초마법이 모두 사라졌다. 이 일로 유물 및 보물들은 모조리 그 힘을 잃고 평범한 물건으로 변모하게 됐다. 결계마저도 가리지 않았다. 성국 전체를 아우르는 대결계는 물론이고, 대성당에 펼쳐진 성자, 디바오러의 유산인 성역결계마저도 소실됐다.


다행이라면 원초마법이 부여된 소재 자체에는 이상이 없다는 것인데, 이마저도 그리 위로되지 않았다. 성지 전체라는, 넓은 범위에 끼친 영향이기에 복구할 것들이 무엇인지,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다.


무엇에 어떠한 힘이 담겨있었는지를 모두 파악하지 않는 한 완전 복구는 무리. 기록이 남은 물건이나 결계에 한해서는 어찌어찌 복구하고 있기는 하나, 그 수는 한 줌에 불과했다. 전체로 보자면 턱도 없는 숫자였다.


이건 그나마 다행인 케이스였다. 어찌 됐든 복구는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소실된 마법 중에서는 현시대에서는 구현조차 하지 못할 대마법도 있다. 이것들은 감히 어찌할 엄두조차 못 내고 방치하는 실정이다.


아니, 그런 걸 다 떠나, 애당초 복구 자체가 원초마법이 필수다. 하지만 원초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 타국에 비해 쇠퇴가 적은 성국에서조차 그리 많지 않았다. 수복 속도는 더뎠고, 전체의 2%를 복구한 것에 그쳤다. 특히 고급 인력인 주교와 심판관들의 이탈이 있어 더더욱 진전이 없었다.


가장 최악인 건 이마저도 정확한 피해를 가늠할 수 없어 대략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거다. 어쩌면 1%도 도달하지 못했을 가능성마저 있었다.


이처럼 안 그래도 암울한데, 분위기 또한 좋지 못했다. 원인은 당연코 이 모든 일의 시작, 성전의 선포 때문이었다.


신언――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 디바오러의 계승자에게 성전을 선포한 우를 범한 것이다. 비단 일반신도만이 아니다. 이 일로 인해 사제와 신관들마저도 교황에게 의구심을 품게 됐다.


교황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했다. 휘청거린다는 것은 성국의 안위가 위태롭다는 것과 다름없다.


당장은 괜찮았다.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쌓아놓은 업적들이 많기에. 의구심을 보이면서도 그 긴 시간 자신의 한 몸을 성국과 루시아스께 바친 교황에게 경외를 잃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다 하더라도 좋지 않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뇌부들은 최악의 사태―― 신도들이 반발하며 일어서는 사태만은 발생하지 않게 여기저기 진땀 빼는 중이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교황청 수뇌부들의 골머리를 썩이는 건, 자인 디바오러라는 변절자 그 자체였다. 무수히 많은 자들이 그 변절자를 디바오러의 정식 계승자로 인정한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수뇌부들 전원이 공감했다.


신언이 무려 성국 전체에 울려 퍼진 것이니······.


성녀라도 그런 일은 못 한다. 그저 목소리가 뻗치는 범위 내에서 그 말씀을 전할 뿐에 그친다.


사적인 감정은 차치하고, 사도의 계승자라 봐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기에 이해는 했다만, 일부 1급 신관마저도 은연중 언행을 조심하는 건 큰 문제였다. 마치 사도의 계승자를 대하는 듯 구는 이들의 태도는 성국이 흔들린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신앙심이 누구보다 깊다 자부할 수 있는 그들이 흔들린다······. 그만큼 자인 디바오러가 남긴 영향력은 지대했다.


성국은 모두의 뜻을 한데 모아 같은 방향을 나아갔기에, 쇠퇴라는 물결에 휩싸이지 않고 발전할 수 있었다. 즉, 성국은 외부와는 무관하게, 안쪽에서부터 휘청이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수뇌부들은 한자리에 모여 논의를 벌였다.


금세 열기를 띠게 된 이들의 논의는 이따금 상대를 향한 힐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전원 성국의 안위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자들뿐. 비아냥이나 조롱이 아니라, 건설적인 비판으로서 그 의견마저도 존중하였다.


다만, 이런 이들의 뼈 빠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정해진 건 하나도 없었다.


물론 수뇌부들이 무능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성실하고 근면하였던 그들에겐 칭송의 말 이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정도로 누구 하나 꾀부리지 않고 전원 정말 열심히 일하였다.


그런데도 이리된 것은 다른 게 아니다. 최고 결정권자인 교황―― 바오로 클레멘스가 어느 것도 결정하지를 않아서다.


방임이라 말해도 좋다. 교황은 “그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성국을 이끌어 보게.”란, 말을 하며 전부 떠넘겨 버렸다.


물론 모든 일은 본인이 책임진다고는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보증이 있다지만, 누가 감히 천여 년간 성국을 이끌었던 교황을 대신하겠는가.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시간만이 흘러가는 형국이다.


이러다 보니 수뇌부들의 불만은 나날이 쌓여갔다. 균형의 주교―― 에쿠릴 브리오 자라나스타가 그나마 대표로 나서 중재하였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직접 따져 물을 자들도 나왔을 것이다.


그렇게 오늘도 무익하게 논의가 끝날 것임을 모두가 직감했던 때에 그 일이 벌어졌다.


제일 처음 알아차린 건 교황이었다. 상석에 앉아있던 그의 시선이 자신의 옆을 향했고, 이것을 기민하게 반응한 에쿠릴이 국무 회의실에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십시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원 1급 신관. 긴박감이 담긴 외침에 기민하게 거리를 벌리고는 신속하게 신성 결계를 펼쳤고, 일부는 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그런 대응 속에 갑자기 교황의 그림자가 넓어지며 동그랗게 원을 그렸다.


마력은 느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마법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두는 긴장하며 바로 대응하도록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쑤욱.


돌연 그림자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 장신의 남자로 추측되는 자였다. 아니, 그의 팔에는 걸터앉은 듯 안긴 작은 인영이 하나 더 있었다.


누구인지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마법의 조치를 한 것이리라.


하지만 침입자라는 것은 명백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러했지만, 짙은 갈색의 망토를 꽁꽁 두르고, 후드마저 깊게 내리쓴 것만 봐도 달리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확인하고 말 것도 없다. 전원 침입자를 배제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어서 오게.”


마치 침입자를 반기는 듯한 교황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다른 이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다. 교황청은 성국의 최중요 시설인지라 소실된 결계를 교황이 직접 다시 복구시켜놓기까지 한 곳이었다. 그것을 돌파한, 방심할 수 없는 침입자에게 보일 태도가 아닌 것이다.


제지하는 것도 잊고 전원 멍청하니 교황을 쳐다봤다.



“재회는 수년 후일 줄 알았건만, 예상보다 제법 빨랐군.”

“저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거든요.”


여자아이로 추측되는 목소리가 귓가를 간드러지게 울렸다. 그리고는 훌쩍, 앉아있던 팔에서 뛰어내렸다.


바람에 나부끼는 망토가 마치 드레스 자락이 휘날린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에 순간 모두는 넋을 놨다.


그러거나 말거나, 침입자는 태평하게 교황에게로 다가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기는 했으나, 이미 교황과의 거리가 가깝다. 자칫 잘못하면 여파가 미치기에, 어찌 손쓰지 못하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흐음······. 혹시 회의 중이었나요?”

“뒷수습으로 논의하고 있었다네.”

“어, 혹시 제가 왔던 일이요? 에이······. 아니겠죠?”

“맞네.”

“에엥?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직도요?”


놀라는 기색의 침입자. 하지만 더 놀란 건 국무 회의실에 있는 전원이었다.


설마하니 침입자의 정체가 모든 일의 원흉인 자인 디바오러였을 줄은······.


치가 떨리는 뻔뻔함이었지만, 동시에 결계를 뚫고 침입한 것을 수긍하기도 했다. 애당초 결계를 없앤 건 자인 디바오러였으니까.


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교황이었다. 마치 오랜 친구 대하는 듯한 그의 태도가 영문을 알 수 없게 했다.


평생을 모셔 온 이들에게도 이러한 교황은 처음이다.


경계하는 것도 잊고 신관들은 자인 디바오러와 교황을 번갈아봤다.



“기대에 못 미쳐 미안하군. 하지만 다들 열심히 수습해주고 있다네.”

“당신은요?”

“나는 지켜보기로 했네.”

“본인이 일을 저질러놓고요?”

“그렇다네. 나는 두 손 놓고 방관하면서 모두가 성국을 어찌 이끌지를 관람하는 중이지. 이 특등석에서.”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요?”


지당한 의견에 일동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그만큼 아무것도 안 하는 교황의 행동은 그들에게 의문투성이였다.


누구의 질책이라는 건 관계없다.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입장이 뒤바뀐 듯한 점에선 신경 끄고, 다들 진위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자네에게 들을 것도 없네. 무책임하다는 걸 누가 모르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보고 싶은 걸세. 모두의 선택과 이로 인한 결과를. ······나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질리도록 보았네. 어느 하나 만족할 만한 것은 없었지. 딱 하나······ 희망을 본 적도 있긴 했네. 그러나 그마저도 실패했지. 게다가 당시 나는 무엇하나 하지 않았어. 그저 희망이 절로 찾아왔을 뿐이니.”


교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은 체념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재차 절망에 휩싸이는 건 나라도 질색일세.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았고, 역부족이란 실감만이 남았지.”

“즉, 당신이 끼어들면 안 좋게만 흘러가니 손가락이나 빨면서 구경한다?”

“모처럼의 새로운 시대일세. 여태 잔뜩 실패한 자가 끼기엔 아깝지 않나? 게다가 미래는 자기 자신이 붙잡아야 하는 법. 타인의 의지대로 휘둘리다가 실패를 맞이한다면 아쉬움이 남지 않겠는가?”

“맞는 말이기는 한데, 조금 마음에 안 드네요. 뭐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자인 디바오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을 보며 교황은 작게 웃었다.



“지루한 이야기나 해서 미안하군. 자리도 권하지 않고.”

“됐어요. 처음부터 그런 걸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자인 디바오러는 슬쩍 뒤를 쳐다봤다. 그 즉시 대기하고 있던 장신의 남자가 의자를 꺼냈다. 그리고 마치 집사 같은 모양새로, 천천히 기품 있게 앉는 자인 디바오러에 맞춰 정중히 의자를 밀어 넣어줬다.


상석에서 교황과 마주 앉은 침입자.


신관들은 당혹스러웠다. 이걸 제지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잠시였다. 교황이 짓는 환한 미소를 보자 말끔히 해소됐다. 상하관계를 떠나, 도의적으로 생의 가장 기쁜 순간을 만끽하는 노인의 즐거움에 찬물을 끼얹을 순 없었던 것이다.



“들겠나?”


교황은 공간 너머 보관하고 있던 항아리 형태의 병을 꺼내 보였다. 안식력 20년이라 적힌, 종전 20주년을 기념하는 포도주였다.


무려 846년 전이다.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주금화 수백에도 이를―― 역사적 가치를 생각하면 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포도주였다. 마실 수 있을 만큼 보관 상태가 좋다면 말할 것도 없다. 애주가라면 이 보물의 한 모금이라도 마실 수만 있다면 집이라도 내놓으리라.


그러나 자인 디바오러는 라벨에는 관심도 없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주면 받도록 하죠.”


더욱 환해진 교황은 공간 너머에서 잔을 꺼내 천천히 날려 보냈다.


졸졸졸.


교황은 능숙하게 병의 손잡이를 잡고 우아하게 자인 디바오러의 잔에 포도주를 따라줬다.



“이리 줘요. 궁상맞게 혼자 따라 마시는 게 아니에요.”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자인 디바오러가 빼앗듯 교황에게서 병을 낚아채 갔다.


조금 놀란 듯싶었던 교황이었지만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자인 디바오러는 병을 기울여 포도주를 따랐다. 그 모습은 앞선 교황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 듯 우아함을 품고 있었다.


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은 잔을 마주쳤다.



“쯧. 맛없네요. 무지하게 쓴데다 떫기까지 하고.”


슬쩍 입을 대본 자인 디바오러는 못마땅해하며 잔을 들어 빛에 비춰봤다.


신관들은 울컥했다. 모처럼 대접하는 것이건만 너무나 예의도 없는 행동이 아닌가. 보물이라 칭해도 될 포도주를 마시고 할 평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과 달리 교황은 너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수밖에. 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재건하는데 여념 없는 시기였네. 주류 같은 사치품에 힘을 쏟을 여력은 없었지. 성국도 예외는 아니었네. 하지만 활기가 없으면 나라 자체가 침체하지 않은가? 그래서 포도의 품질이 안 좋음에도 무리하게 추진했지. 맛이 없는 건 그 때문이고.”

“하지만 차마 팔진 못할 정도로 맛없는 건 문제잖아요.”

“당연하지. 누가 이런 걸 사겠나? 처음부터 종전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전 신도들에게 나눠주어 소진하도록 했다네. 이건 그때 나에게 온 것일세.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한 병이지.”

“······.”


대놓고 어이없어 한 자인 디바오러는 휘릭, 잔을 부드럽게 돌렸다. 공기에 노출시켜 향과 맛을 끌어올리려 한 것 같았는데, 기대만치 효과가 없었나 보다. 입을 댄 직후 바로 쓴소리가 나왔다.



“으. 빈말로도 맛있다고는 못 하겠어요.”

“나 역시. 나눠준 신도들에게 미안한 기분마저 드는군. 후후.”


둘은 정말 친구 사이처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기며 잔을 홀짝였다. 별다른 대화도 없이 편하게 즐겼고, 잔이 비면 병을 건네받은 남자가 재차 안을 채워줬다.


그렇게 두 잔째를 받았을 때, 교황이 나지막하니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왔는가?”

“조금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자인 디바오러는 평온하게 말했다. 그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아이 같은 천진함을 담고 있어, 손녀가 할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결코 오늘의 안부 같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도플갱어······. 그래······. 그들이 암약하고 있었나? 인류의 멸종을 위해······.”

“어라? 알고 있었나요?”

“아니. 몰랐다네. 지금 자네에게 처음 듣는 것이지. 애당초 도플갱어는 이야기 속의 존재―― 현재는 멸종했다 알려졌으니 말일세.”

“그래요?”


생각이 많아진 듯 자인 디바오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수긍되는 부분이 제법 있네. 하지만 그렇군······ 디안, 그 또한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인가.”

“초대 건국왕 님이요? 아마 아셨을 거예요. 비젠탈 씨도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가. 어쩌면 그가 제일 진실에 다가갔었을지도 모르겠군······.”

“조금 다른 질문인데, 왜 디안이에요? 인비트라는 이름이시잖아요?”

“아니. 인비트는 그가 왕으로 옹립되었을 때 붙인 이름일세. 그가 말하기로는 디안은 위엄이 서지 않는다며 주변에서 난리였다더군. 마지못해 받아들였다지만, 누가 자신의 이름을 버리겠나. 가까운 인물들에겐 디안으로 불러달라 했었네.”

“친하셨나 봐요?”

“의외인가?”

“지금의 관계를 보면은요.”


교황은 포도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작게 웃었다.



“당시에는 인류 전체가 위기인 상황이었네. 그때의 인간은 모두가 목숨을 나눈 전우이자, 피를 나눈 형제였네. 타인을 싫어한다는 것 자체가 사치였지.”

“흠. 그만큼 인간은 몰렸다는 건가요?”

“그건 직접 알아보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 정도는 서비스해줘도 되잖아요.”

“미안하네만 그럴 순 없겠군.”

“왜요? 뒤가 구린 게 많아서요?”

“후후. 그것도 있긴 하지. 하지만 그보다는 난 자네가 스스로 파헤치기를 원하는 걸세. 그 누구의 의도도 섞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그리고 보고 싶네. 지금의 그대가 택하는 미래의 가능성을 말일세.”


그리 말한 교황은 가슴에 정십자를 그리고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를 드렸다. 잔을 든 상태의 다소 불경하기도 한 태도였으나,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성스러운 기척이 흘렀다.


달리 교황이 아니랄까, 신앙의 정점을 목격한 신관들도 격한 감동과 함께 저마다 기도를 올렸다.


그랬는데······, 사도이자 성자의 이름을 잇는 자에겐 이 모든 게 하찮은 모양이다. 심드렁하게 코웃음을 친다. 다만, 그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좋으시겠어요. 신실한 신도들이 많아서.”


순간 발끈했던 신관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자인 디바오러의 시선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있던 것이다. 신관들에게는 처음부터 아무 관심도 없었다. 조롱은 그들이 아닌, 그 대상에게 향한 것이었다.


천장 너머, 하늘에 있는 대상. 그것은 과연 누구인가.


설마. 그럴 리가······.


아니겠거니 전력으로 부정하면서도 신관들의 마음속에는 혹시나 싶은 기분들이 생겨났다.


이런 속내를 알아차린 건 아니지만, 모두를 대표하듯 교황이 물었다.



“······보고 계시는 건가?”

“멋대로 부른 뒤로부터예요. 그때 이후로 줄곧 보고 있으시네요. 영 거슬리기 짝이 없는 거 있죠?”

“과연. 휴식을 취할 때조차 시선이 느껴진다면 거북할 만도 하겠군.”

“그렇죠? 조물주답게 피조물의 그런 세심한 부분은 개의치 않나 봐요.”


자인 디바오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교황도 피식 웃었다.


신관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명백히 신을 향한 불경한 말이었음에도 잔뜩 굳어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앞선 중대한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그야 만물의 어머니인 생명의 신, 루시아스가 현재 이 자리를 보고 있다지 않은가.


다른 자가 한 소리였다면 가볍게 무시하여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자인 디바오러, 신언을 전할 수 있는 자가 한 말이었다. 더군다나 교황이 의심조차 안 하기에 신관들에게는 더더욱 진실로 다가왔다.



“여신님은 어떠하셨는가?”

“평범······하다면 이상하려나? 그냥저냥 친근했어요. 신다운 면모가 있기도 했고.”

“하하. 여신님을 그리 평가하는 건 필시 자네뿐일 걸세.”

“당신은 어땠는데요?”

“아쉽지만 나에겐 여신님을 알현할 기회가 오지 않았네.”

“허얼······. 교황인데도요?”

“부끄럽지만 그렇네. 아직 신앙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


자조가 섞은 교황의 말을 들은 자인 디바오러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옆을 쳐다봤고, 그곳에서 하얀빛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진 그 자리엔 조그마한 조각상이 있었다.


자인 디바오러는 허공에 떠 있는 그것을 교황에게로 날려 보냈다.



“주는 겐가?”

“불쌍해서예요. 얼마나 모셨는데 얼굴도 못 보고. 포도주 값은 그걸로 퉁쳐요.”

“나라도 안 살 포도주의 값이라기엔 과해 보이네만?”


신관들은 모두 동의했다. 물론 종전 20주년을 기념하는 포도주는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울 만큼 귀한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저 조각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저 조각상은 신상이기 때문에······.


흔한 신상 따위가 아니었다. 다시는 보지 못할 정교하고도 섬세한 루시아스의 신상이었다.


여타 신상과는 달리 흰 나무줄기를 엮은 의자에 앉아있는 것도 그러했지만, 본인을 가리키는 정십자의 징표를 등에 띄운 채로, 근엄하게 바라보는 모습 자체가 가히 충격적일 만큼 아름답고 신성했다. 간접적이기는 하나 여신과 대면한 게 아닐까 싶은 기분마저 든다.


성직자에게는 누구라도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 심지어 어울리지 않는 진득한 욕심마저도 피어오르리라.


1급 신관이란 직책의 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되려 신실하기에 더더욱 저 신상은 감히 값을 매길 수 없을―― 아니,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을 가치의 신상이었다.


하지만 자인 디바오러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준다는 사람이 괜찮다니까 대충 좀 넘어가요.”


교황은 자신의 손에 내려온 신상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정 부담되면 제 부탁 몇 가지 좀 들어주는 걸로 해요.”


말은 꺼냈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인 디바오러는 짜증 내며 후드 위를 긁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교황은 조용히 신상을 공간 너머에 보관했다.



“말해보게. 나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가?”

“······아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한 자인 디바오러는 거한 한숨과 함께 혀를 찼다.



“뇌물 같은 모양새라 미안하게 됐네.”

“됐어요. 그보다 물어나 볼게요. 혹시 에스쿠드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나요?”

“도플갱어인가?”

“맞아요. 그들의 장로이자, 현 수장이래요.”

“······역시 그 무리 중 하나를 사로잡은 게로군.”

“우연이 겹쳐서요. 그리고 그가 말하기로는, 아마 제1 위상, 가이란 씨는 그 장로에게 당했다는 모양이에요.”


국무 회의실의 공기가 일순 무거워졌다.


교황은 잔을 살살 흔들었고, 그는 넘실거리는 포도주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이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암시]라······. 참 버거운 능력을 지닌 존재들이로군.”

“그들을 몰살하려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알다시피 인간이란 두려움이 많은 생물이잖아요? 하지만 그로 인해 증오가 시작되었죠.”

“당연한지고. 종족을 떠나 누구라도 용서할 수 없겠지. 몇 세기가 지난다고 한들 말이야. ······그래. 인간의 업은 이리도 깊었던 건가······.”

“솔직히 저도 당신이 모를 만큼―― 이미 멸종했다고 여길 만큼의 오랜 원한일 거라고는 별로 생각지 않았어요.”

“······.”





리아는 말 없는 교황을 잠자코 보았다.


수심이 깊어 보이는 그는 묵묵히 잔을 기울였다. 델리안과 마찬가지로, 천 단위의 세월을 살아온 인간의 속내를 살펴보기란 어려워, 이전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가이란의 이야기를 한 순간에 그가 많은 것을 이해했다는 걸 알았다. 되려 이쪽보다도 더······.


한 모금, 두 모금. 이윽고 그의 잔이 비었다.


에르는 천천히 다가가 우아하게 포도주를 따라줬고, 교황은 한동안 잔에 담긴 탁한 붉은 빛을 보았다.



“가이란······ 그는 분명 뒤틀렸다네. 나만큼은 이를 긍정했으나, 분명 지탄받아 마땅했지. [암시]에 당한 것이라도 그렇네. 기본적으로 없는 마음을 키울 수는 없을 터이니. 비록 조그마할지라도 여지를 제공했다면 그건 분명 그의 잘못이지.”


대체로 동의한다. 그만큼 가이란이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지금도 울화가 터진다.


그렇지만 속단을 내릴 시기가 아니었다.


몹시도 아니꼽지만, 리아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우리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되죠. 그들은 [암시]에 특화된 종족. 인간으로서는 엄두도 못 낼 수준의 암시가 가능할지도 몰라요. 장로―― 지도자라면 말할 것도 없죠. [정신 조작]에도 다다를 [암시]를 할 수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거예요. 상황은 언제나 최악으로 가정하는 게――”

“――최선으로 이어진다.”


하려던 말이 잘려 얼떨떨했지만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계시네요. 그 말대로에요. 대비를 많이 해놓는다고 나쁠 건 전혀 없으니까.”

“만약 그렇다면······, 가이란은 단순 희생자라는 건가?”


조용히 쳐다보는 교황. 그 눈에서는 작게 분노와 슬픔이 어려있었다.


리아는 생각해봤다.


‘마법사 죽이기’를 통해 많은 사람을 해하고 조종하고,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유희로써 즐겼던 가이란은 과연 희생자일까······. 리카드와 그의 학생들, 라프리트, 안네, 메이어, 이클립스, 그들에게 그는 과연 피해자라 불리기에 합당한가······.



“우리는 전지하지 않아요. 전능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고. 결국 각자의 입장에서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죠. 속사정을 안 지금으로서는 동정의 여지는 분명 있어요. 하지만 아직 그가 [암시]에 당하였는지 확실치 않은 데다, 당시의 저에겐 미치광이에 불과했어요. 목숨을 취한 것에 일말의 죄책감도 없어요. 오히려 쓰레기를 정리했다는 뿌듯함과 안도감만이 있죠.”

“증오의 연쇄로군. 각자의 판단에 따른다면 그리될 수밖에 없네. 자네는 그러한 형태라도 괜찮은 겐가?”


리아는 적의가 가득 넘치는 신관들을 슬쩍 훑어봤다.


리시타나 인디아도 그렇고, 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이란은 정말 신실한 성직자였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성품도 그에 걸맞은 호인이었을 테고.


‘그게 아니라면 주변인들이 이리 화내진 않겠지.’


그런 그가 정말 [암시]에 당해 가학적인 취미가 생겨버린 것이었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비극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게 세상이에요. 신이 정해주면 편하겠죠. 근데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는 그렇게 오해와 의견대립으로 인해 분열하고 싸워왔죠. 자연의 순리나 마찬가지예요. 그렇기에 우리는 법을 만들어 규칙을 정하도록 한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강한 힘으로 다시 규칙을 세운다······.”

“힘의 논리로 바뀐다는 것이 한탄스럽지만 그게 현실이겠죠. 당신들도 그렇잖아요? 타국에 비해 월등히 강한 힘으로 당신들의 신념을 밀어붙였죠. 그거랑 다르지 않아요. 그 미치광이가 자신의 신념을 억지로 강요하다 더 강한 힘에 삼켜진 것이죠. 그저 그뿐이에요. 피해자, 가해자를 따질 부분이 아니라고 봐요. 결투도 그러잖아요. 승자와 패자만이 나뉠 뿐.”

“그렇지······.”


나지막하니 중얼거린 교황은 눈을 감았다.


처음부터 그가 답을 원하기에 물은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교황, 바오로 클레멘스는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산 인간이다. 그것도 대전쟁이라는 격동마저 넘으며 민중을 다스린 이다. 세상의 이치를 20년―― 기껏 해봐야 100년 정도밖에 안 산 인간보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그가 바라는 건 그저 독려다. 냉혹하게 자신이 아는 진실을 말해주어 가이란을 떠나보내지 못한,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내 주길 원한 것이었다.


‘사람마다 다른 면모도 있다지만, 이걸 보면 가이란······ 그 사람도 어느 부분에선 존경할 만한 인간이긴 했나 봐. 별로 상상은 안 되지만.’


작게 콧방귀 낀 리아는 조용히 포도주를 마시며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교황의 마력이 움직였다. 제법 상당한 양의 마력으로, 마법을 쓴 것이었다. 다만, 마법의 형태가 좀 기묘했다. 심상마법이기는 했으나, 뉘앙스가 다르다고 할까. 왠지 절대적인 명령을 담은 것 같은, 여타 마법과는 다른 독특한 감각이 들었다.



“성지에 있던 도플갱어 둘을 추방했네. 결계도 의태한 자가 들어올 수 없도록 손봤지. 이거면 됐는가?”


애당초 오늘 찾아온 목적은 도플갱어에 대해 경고하는 것. 리아로서는 아무 불만도 없었다. 오히려 원거리에서 강제로 상대를 전이시킨 그의 마법이 놀라울 따름이다.


‘뭔가 마법의 결이 다른 느낌인데······.’


그게 무엇인지 고민하던 리아는 문득 든 생각에 물었다.



“어, 근데 엉뚱한 사람을 내보내진 않았을지 노파심에 묻는데, 도플갱어가 누군지 어떻게 특정했어요?”

“의태라면 필시 만든 몸.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마력의 흐름을 가진 자를 축출하면 되지 않겠는가.”

“훌륭하네요. 거기에 더해 혼의 형체를 보면 더 완벽할 거예요. 심장 부근에만 혼이 있을 거거든요.”

“참고하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교황.


과연 초월자답게 혼 정도는 쉽게 보이나 보다. 마력의 흐름을 읽는 것도 그랬다. 그는 쉽게 말했지만, 그 차이는 극히 미세하여 말처럼 쉬운 건 절대 아니었다.


‘과연 이 정도라면 앞으로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는데.’


리아가 속으로 감탄하고 있으니 교황이 숨을 토해냈다.



“자네의 부탁은 앞으로도 내가 대처해주길 바라는 것이겠지.”

“네. 엄하게 불똥이 튀는 걸 참지 못하겠거든요. 당신들은 자국을 지킬 수 있으니 일석이조고요.”

“그렇군······. 하지만 미안하게 됐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일세. 이다음은 모두에게 맡기도록 하지.”


교황은 그러면서 상석 아래에 시선을 뒀는데, 신관들은 즉시 뜻을 받든다는 모양새로 정십자를 그리고는 머리를 숙였다. 강한 의지를 내비치는 이들에게서는 물리적인 열기마저 풍기는 듯했다.


하지만 리아가 바라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저들이 아무리 용써봐야 결국 교황 하나에 못 미치기 때문이다.



“정말로 가만히 지켜만 본다고요?”

“처음부터 그럴 셈이라지 않았는가. 내가 보고 싶은 건 자네와 모두가 일궈내는 미래라고.”


리아는 입을 꾹 다물고 교황을 째려봤다. 그렇지만 교황도 물러서지 않고 마주 보며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하아. 어쩔 수 없죠. 도통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그리하겠다는데 어쩌겠어요? 말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남은 포도주를 원샷한 리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는 겐가?”

“용건은 다 봤어요. 일단 추방하고 결계도 쳐줬으니 만족하기로 하죠. 신상값은 그거랑 정보를 주신 걸로 대충 퉁 칠게요.”

“싸게 끝내줘서 고맙네.”


능글맞게 대답한 교황은 포도주를 단숨에 마시고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짝 다가오더니 빈 잔을 내밀었다.


‘이쪽의 문화인가······.’


리아는 팔을 뻗어, 마찬가지로 빈 자신의 잔을 그의 잔과 부딪혔다.



“또 보도록 하세나.”

“별로 그러고 싶진 않네요. 당신들이랑 엮이면 매번 귀찮기만 한 터라.”

“오늘도 그렇지 않았나. 재차 변덕 부려 주길 기대하겠네.”

“쯧.”


괜히 왔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피어오른다.


‘왜들 이렇게 반겨주는지 원······.’


분명 미래가 얽혔기 때문이겠지만, 이쪽으로서는 영문 모를 일에 불과하다. 알 수 없는 환대이기에 되레 꺼려지기만 했다. 물론 지금의 자신에게 가진 호감으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나마 편히 받아들였을 거다. 하지만 그것도 아니기에 불쾌한 기분만이 들었다.


대꾸하기도 귀찮았던 리아는 에르에게 잔을 넘겼다. 에르는 곧장 그 잔을 [정화]로 소독하고는 밑바닥이 찰랑거리는 포도주 병과 함께 [차원수납]에 넣어버렸다.


이것을 본 교황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이것들은 제가 정당히 값을 치른 것이니 가져가는 것뿐이에요.”


괜히 나이를 먹으면 능구렁이가 된다는 소리가 나온 게 아닌가 보다. 정정하기는 했으나 교황은 빈말임을 한눈에 알아채고는 인자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주 즐겁다는 듯이······.



“언젠가 다시 한잔하세.”

“내키면요.”


짤막하게 대꾸한 리아는 왔을 때처럼 에르에게 안겼다. 그러고 지체없이 돌아가려 했는데······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눈에 익은 신관이었다. 인디아처럼 금색의 영대를 어깨에 두른 그가 돌연 불러세웠다. 갑작스러운 돌발 행동에 주위의 신관들은 술렁거렸다.


여태 한 마디도 없던 그였다. 호기심이 생긴 리아는 손을 들어 에르를 멈춰 세웠다.



“아마, 에쿠릴 씨였었죠. 제게 볼 일이 있나요?”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주워듣기로 균형의 주교라고 하는 그―― 에쿠릴이 똑바로 쳐다봤다. 흔들림 없는 그 눈은 무언가 결연한 다짐을 한 자의 것이었다.



“말씀해보시죠. 무얼 알고 싶으신 건가요?”

“가이란 케아코찰은 편히 여신님께 갔습니까?”


내심 도플갱어나 성전 때의 사건을 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다른 소리가 나와 조금 당혹스러웠다.


어째서 그런 걸 묻나······. 그의 죽음을 원망한다면 또 모를까.


입을 다문 에쿠릴의 생각을 엿볼 수는 없었다. 그 또한 보기보다 연륜이 깊은지,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의 표출이 옅었다. 그렇지만 진지하다는 것만큼은 전해진다.


‘이들은 분명 나를 죽이려던 세력이지.’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일은 되갚아줬다. 청산은 끝났고, 원한은 없다. 그러하기에 교황과도 편히 술잔을 나눌 수 있었다.


에쿠릴도 다르지 않았다. 그와는 원한 관계가 아니다.


정중한 그에게 맞춰 리아도 성실히 대답했다.



“아마 고통은 없었을 거예요. 어찌 죽었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이었거든요.”

“혹시 유해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간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러주고 싶습니다.”

“그건 힘들겠네요. 장례를 치를 상태조차 아니거니와, 그의 유해는 현재 연구 중이거든요.”

“연구······?”


멍청하니 묻는―― 아마 가이란의 능력을 몰랐을 그에게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법사 죽이기라는, 술수로 여러 일을 저질렀거든요. 자세한 건······ 교황 씨가 아는 듯하니 나중에 물어보시고, 어쨌든 그 술수로 저와 제 주변이 피해를 봐서 확실하게 분석하려고요. 다시는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게. ······이만하면 답이 되셨나요?”


다른 신관들은 그런 게 답이 되겠냐며, 어찌 유해를 모욕하냐며 수군거렸다.


‘애당초 수인들에게 비슷한 짓을 해놓고는 무슨 소리다냐. 오히려 자기들이 심하면 심했지 절대 덜하진 않으면서.’


같잖기만 했다. 아니, 그 뻔뻔함에 화조차 나려고 한다.


하지만 그걸 진정시키려는 듯 에쿠릴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연구가 다 끝난 뒤라도 상관없습니다. 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거라면······. 알겠어요. 연구가 다 끝나고 나면 돌려드리겠다고 약속드리죠. 자인 디바오러, 제 이름을 걸고.”

“감사드립니다.”


에쿠릴은 정중히 정십자를 그려 예를 보이고는 깊이 머리를 숙였다. 행동에서도 그렇지만 진심으로 감사한다는 게 전해진다.


‘이 나라도 영 이상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네······. 뭐, 이기적인 이유로 나나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든 건 변함 없지만서도.’


하지만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을 것도 같다. 하다못해 폭주하려는 이들의 최후의 양심이 되어줬으면 한다.


그런 바람과 함께 리아는 조용히 말했다.



“이만 돌아가요.”


에르는 즉시 [그림자 이동]을 발동했고, 시야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공간을 넘는 순간······ 교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가 갔다네. 혹여 만나거든 그녀를 잘 부탁함세.”


리아는 바닥을―― 익숙한 기숙사의 융단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리아의 목소리.


그렇게 즉흥적으로 간 세인트리안은 의외로 나쁘지만은 않았던 시간과 소득을 얻고, 영문 모를 부탁을 받은 채 끝을 고했다.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자세한 인사는 -2에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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