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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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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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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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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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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153

DUMMY

손에 들린 편지를 쭈욱 읽어 내려간 그란은 마지막 장까지 모두 보고는 책상 위에 내려놨다. 그리고 참지 못하겠는지 한숨이 크게 새어 나왔다.



“도대체 그 아이는 뭘 또 꾸미고 있는 건지 원.”

“뭐가 쓰여 있길래 그래요?”

“당신도 직접 보게나. 내 입으로 듣기보단 그게 빠를 거야.”


길고 길었던 각방의 체벌이 끝나고, 드디어 합방하게 된 레이니가 천천히 다가와 올려놓은 편지를 손에 들었다.


이내 천천히 내용들을 읽기 시작하는데······ 정작 권유한 그란의 온 관심은 매혹적인 네글리제의 차림인 레이니에게로만 쏠려있었다.



“루비아도 잘 지내는 거 같네요. 세인트리안에서 주교가 왔다기에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어요. 그렇죠?”

“······꿀꺽.”

“응?”

“······.”

“당신······”

“어, 어! 그렇지. 다행이고말고.”


차디찬 음성에 깜짝 놀란 그란은 대충 아무렇게나 이야기했으나······ 무수히 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걸로 아내가 속을 일은 없다는 걸.


레이니의 눈매가 싸늘하게 굳어 가늘어진 것을 본 그란은 눈을 감아 자신의 명운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쿵.



“집중 좀 하세요.”


머리를 매만지며 그란은 진지한 눈으로 레이니를 보았다.



“암. 알겠네. 그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

“응? 왜 그런가?”

“아뇨. 꿀밤도 익숙해지신 걸로 보여서요.”

“이만큼이나 맞으면 익숙해지지 않겠나. 그야말로 아다만티움 급으로 단련―― 크흠. 아니라네.”

“흐음······ 새로운 수단을 강구해봐야겠네요.”

“그, 그럴 필요는 없네. 충분히 반성이 되오! 루, 루비아! 그래, 루비아가 뭘 하려는지 짐작은 가는지나 묻고 싶소.”


제 아이만큼 부모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한마디 더 해주고 싶어 보였던 레이니는 예상대로 이야기에 편승해주었다.


물론 단순히 이후로 미룬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당장 잔소리를 듣지 않은 것에 그란은 만족해했다.



“저도 그 아이가 어디까지 그림을 그려놓은 것인지 짐작은 가질 않아요. 다만 직접 움직인 것이니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소리겠지요.”

“그렇겠지······ 하지만 짧게나마 알려줬으면 싶네. 이런 보고서 형식으로 근황을 받을 때마다 이번엔 어떤 일일지 매번 너무 조마조마하지 않은가.”

“어쩔 수 없죠. 어렸을 때부터 그 아이가 있던 환경이 그러했으니.”

“세인트리안 말인가······”


주변이 온통 적과 내통자로 가득한 상황에서 정보의 취급을 어찌해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루비아는 비범했기에, 또 너무나도 똑똑하였기에 이를 아득히도 일찍 깨닫고 말았다.


아직도 그 기억은 생생하다.


――단 3살에 불과한 루비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가.



“아버님, 벌레들이 너무 많아요. 이 나의 성과 나라에 해충은 필요 없어요. 그래서 구제하려는데, 국새를 좀 주시겠어요?”


국새란 국가와 왕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이를 달라는 건 곧 왕의 권한을 달라는 소리나 진배없다.


아장아장 귀엽게 걷는 딸에게는 결코 어울리는 물건이고, 왕으로서도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건네줬다.


왕의 직무를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먼 앞날을 보는 듯했던 루비아의 이질적인 눈을 보니 어느새 국새를 주는 것도 모자라, 레이니를 비롯해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는 다짐까지도 하고 말았다.


지금 봐도 참으로 책임감이 없다고는 생각한다. 애당초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기는 했지만.


그렇지만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뿌리를 알 수 없었던 세인트리안의 첩자들이 말단을 시작으로 모조리 반역죄로 숙청당하기 시작했다. 단 하나 꾸미지 않은 정당한 사유로.


당연히 모두 루비아의 지시로, 이쪽은 그에 어울리며 자신이 한 척 연기만 했을 뿐이다.


――거기에서 그만 멈췄어야 했다.


상황이 너무 잘 풀렸기에, 루비아를 너무 믿었기에 그 진위를 착각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린 딸에겐······ 피의 축전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다.


이것이 루비아의 진정한 목적이었다. 딸은 국새를 받을 때부터 오로지 이 하나를 위해 판을 키워왔던 거다.


――모든 악평을 본인이 짊어지기 위해서.


처음 이 소리를―― 은폐하고 은폐하여 뒤늦게 접했을 때는 얼마나 암울하고 참담했던지······. 국왕인 것을 떠나 아버지로서 너무나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넋이 나가 있을 순 없었다.


명령권자가 자신임을 밝혀 루비아에게 쏠린 악평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곧장 알아차린 루비아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인생에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힘을 쏟았다. 그것으로 간신히 소문은 모두 거짓이라는 주변 상황을 만들어 냈다.


당연히 루비아가 방해를 해왔지만,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아직은 어린 공주다.


권한이 워낙 작아 손 써볼 방도도 없이 대다수의 악평을 이쪽으로 끌고 왔다. 반대로 호평들은 모조리 루비아에게로 몰아줬다.


모든 일이 끝마쳐졌을 때는 다행스럽게 루비아는 공국의 빛으로서 불리게 됐다.


여전히 타국에서는 피의 축전이란 말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공국 내에서는 손가락질받을 일은 없어졌다.


국왕으로서는 틀린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로서는 너무나 만족스러운 결과. 아마 루비아를 상대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었다.


다시는 없을 승리를 쟁취함과 동시에―― 더는 루비아에게서 정보가 오는 일은 없게 되었다. 지금처럼 단편적으로 자신의 행보만을 알렸다.


물론 후회 따윈 전혀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해준 것조차도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인데 그 이상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이 아비를 믿어줄 수는 없던 게냐······?”


근심을 가득 담아 중얼거리니 레이니가 조용히 어깨를 감싼다.



“괜찮아요. 루비아는 이제 어리지 않아요. 그러니 아직도 종종 국새를 빌려주시는 거잖아요? 게다가 곁에는 그 아이가 인정한 친구들이 있어요.”

“그래. 그 여식들이 있었지······”

“네. 루비아가 드디어 찾아낸 아이들이에요. 분명 의지가 될 거예요.”

“당신의 말대로였으면 좋겠군. 최소한 그 아이 홀로 모든 걸 떠안지 않았으면 싶네.”

“걱정 없어요. 당신도 봤잖아요. 리아와 라프리트. 그 둘이라면 혼자 달려가는 루비아의 옆에 같이 서 있을 거라구요.”

“그러할지도. 후후.”


옆자리에 앉은 레이니도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달라진 루비아를 직접 봤을 때도 그랬지만, 레딧츠 씨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그렇긴 하지. 조그마한 여식에게 준다며 본인의 옷장에서 짐을 바리바리 싸는 루비아라니. 듣는 내 귀를 의심했네.”

“그뿐인가요. 그 둘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는 게 믿어지나요?”

“믿길 리가! 난 당신이 너무 간절한 끝에 꿈이라도 꾸는 줄 알았다네. ······하지만 진짜였지. 전혀 꿈 같은 게 아니었어.”

“네. 그러니까 분명 괜찮을 거여요. 우리 딸이잖아요?”


자식 중 누구보다도 뛰어난 재능을 지닌 루비아. 그러나 막내기에 능력 여하를 막론하고 어느 자식들보다도 걱정이 앞선다.


이러한 이중적인 감정에 그란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문득 내린 시선에 편지가 박히자 바로 오묘하게 일그러졌다.



“하아······. 그렇지만 조금은 덜 화려하게 일을 저질러줬으면 하는군. 삼국이 한꺼번에 이동하다니······.”

“세인트리안의 소동도 아직 진정되지 않았는데 말이죠.”

“황자와 황손까지 대동하고 당최 무얼 하려는 속셈인지 원.”

“다 생각이 있겠죠.”


그 루비아라면 당연히 그렇겠지만, 굳이 비젠탈까지 끌고 가 잔뜩 시선을 모은 그 진위가 정말 너무나도 궁금하다.



“뭐, 내가 생각해봐야 별수 없겠지. 그보다 말이 나온 김에······ 당신, 세인트리안에서 발해진 마력이 어떻게 느껴졌는가?”

“리아를 말하는 거죠? 근데 어떻게요?”

“기운을 말하는 걸세. 뭔가 이곳에서 내뿜은 마력과 다르지 않나 해서.”


전율이 이는 무시무시한 마력의 파동. 살이 떨리던 그 마력은 잘 설명할 수 없지만, 공국에서 내뿜었던 마력과는 질이랄까······ 그 성향 같은 것이 정반대로만 느껴졌다.


솔직히 누가 벌인 짓인지 몰랐다면―― 정황상 누구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면 절대 동일 인물이라고는 짐작 못할 것이었다.


‘물론 난 그런 마력의 구분은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작게 신음을 내던 레이니가 말하였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 세인트리안에서 발해진 마력이 본래 리아의 마력일 거예요.”

“여자의 감이라는 건가?”

“모르겠어요. 그냥 왠지······ 느낌이? 미안해요. 근거 없는 소리나 하고.”

“무얼 미안해하나. 당신이 그런 거라면 그런 거겠지.”

“고마워요.”


아름답게 눈웃음을 짓는 아내를 바라보며 그란도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한 때로, 그란은 거하게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토해냈다.



“여하튼 뒤처리로 또 바빠지겠군. 적당히 좀 해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푸념이 재밌었는지 레이니는 쿡쿡, 즐거이 웃었다. 그러다 천천히 가득 술병이 담겨 있는 진열장으로 향했다.



“어때요? 앞으로 있을 격무에 대비해 격려 차, 한잔하실래요?”


들어있는 술 중 가장 독하고 센 것을 꺼내 흔들어 보이는 레이니.


도발하듯 고혹적인 미소 안에 담긴 속뜻을 모를 남자는 없다.


없던 의욕까지 가득 충전된 그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잔 받고말고! 어떤 일을 들고 오든 덤비라 이 말이야!”


정말 무엇이든 모조리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좋은 기세에요. 저도 도와드릴 테니까 같이 힘내봐요.”

“천군만마구려!”


입이 찢어지도록 승천한 그란. 간만에 근심, 걱정을 모두 덜게 된 그는 반짝―― 작열하는 듯한 흥분으로 몸을 들썩이고, 그렇게 날은 저물어갔다.











제국. 마법을 하대하며 육체를 이용한 무투를 선호하는 기조를 바탕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쌓은 대국.


이런 제국으로 들어오는 외부의 길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있다.


하나는 대륙의 중앙이자, 거대한 중계 도시 역할인 세인트리안의 가도를 타고 오는 것. 다른 하나는 타국의 끝자락에 있는 교역 도시 등에서 곧장 오는 길이 있었다.


그중에서 두 번째인 벨루디스의 교역 도시, 콜다리움 방향의 관문.


처음에 그것을 발견한 건 관문 위에 설치된 망루에서 망을 보던 병사였다. 그는 쏟아지는 졸음도 깰 겸 기지개를 켜다가 저 멀리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했다.


병사의 특기를 살릴 때가 왔다. 나름 성실했던 그는 자신이 이곳에 배치된 이유라고 할 수 있는 투기술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예상보다도 거리는 더 멀었다.


갖은 방법을 총동원하여 관찰하였음에도 근원지에 무엇이 있는지 판별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발견해낸 게 운이 따랐다. 그만큼 흙먼지는 생각보다 많이 피어오르지 않아 더 접근할 때까지 몰랐을 가능성이 훨씬 컸을 것이다.


병사는 긴장했다. 오랜 경험이 절대 평범한 현상이 아니라고 외쳐댔기 때문이었다.


원인은 모르나 이상 사태임을 감지한 병사는 즉각 종을 울렸다.


댕댕.


시끄럽게 울리는 종소리에 관문을 넘고 있던 사람들의 얼굴엔 살짝 긴장감이 어렸다. 관문에 있던 병사들은 얼굴을 굳히고는 사람들을 인도하며 좀 더 검문 속도를 높였다.


다만 혼란은 없다. 이 종소리는 1단계 경계 태세. 미확인 물체의 발견을 알리는 간단한 경고였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는 빈번히 했기에 익숙했던 노련한 행상인들은 서두르지 않고 병사들의 지시에 잘 따랐다.


망루에서 밑의 상황을 살핀 병사는 다시금 경계를 시작했다.


여전히 무엇이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몬스터일지도 모르는 일이기에 병사는 끈기를 갖고 지켜보았다.


그렇게 3분여를 보고 있자 갑자기 뚝――, 흙먼지가 끊겼다.


물론 뒤에 만들어 놓은 흙먼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그러나 더 이상 새롭게 피어오르는 건 없었다.



“뭐지······?”

“왜 그래?”


옆에 대기하고 있던 동료의 물음에 병사는 자신이 보고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자네도 한 번 봐봐. 아무래도 조금 이상해.”

“흠.”


본인도 궁금했던 건지 별다른 말 없이 동료는 능숙하게 투기술을 행해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마차 아냐?”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마차가 안 보이더라고.”

“그래?”


대꾸하며 살피던 동료는 마침내 병사가 보았던 부근을 찾아냈나 보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맞지?”

“엉. 근데 용케 저걸 봤다. 거의 보이지도 않는데.”

“으음. 일단 주시하고 있어야 하려나?”

“그래야겠지. 근데 좀 기묘하다. 저리 먼 곳에서 보일 정도로 흙먼지가 피어오른 거라면 훨씬 넓게 퍼지지 않나?”

“그래! 그걸 말하고 싶었어. 정말 뭘까. 갑자기 끊기기도 했고.”

“뭐, 기다려 보면 뭔지 알겠지.”

“지나가는 해프닝이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건 그래.”


이 대화를 끝으로 둘은 전방을 주시하며 혹여나 몬스터가 나타나지나 않는지 경계했다.


그렇게 한동안 묵묵히 근무를 서던 둘은······ 동시에 소리쳤다.



“앗!”

“저건?!”


둘은 서로를 보며 자신들이 본 것이 맞는지를 확인하였다.


오랜 세월 같이 호흡을 맞췄기에 대화는 필요 없었다. 이내 틀림없음을 안 병사는 자리를 동료에게 맡기고 서둘러 계단을 탔다.


굴러떨어지듯 망루를 내려온 병사는 헐레벌떡 검문소 앞으로 달려왔다.



“화, 황가의 마차다!”


뜬금없는 이야기에 검문소의 위병들은 멍했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마차는 정말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뭉그적거릴 틈 따윈 없는 것이다.


재차 다그치듯 소리치니 이윽고 전력이 들어온 양 한 차례 몸을 터는 위병들. 그리고 뒤늦게 전파 내용을 이해했다.


변화는 극적이었다. 눈에 불이 들어온 위병장은 황급히, 그러면서도 정확한 지시를 내렸다.



“기, 긴급 진입로의 방책을 걷어라! 그리고 너와 너, 둘! 빨리 가서 살펴보고 정중히 선도하도록!”


군말 없이 서둘러 대기하고 있던 말에 올라탄 위병 두 명이 출발하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면서도 신속하게 움직이는 위병들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하지만 설명할 의무도 없거니와 그런 데에 신경을 할애할 여유는 없다. 모자람 없이 황가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신속히 움직인 보람은 있어서 황가의 마차가 도착하기 전에 방책은 모두 치웠고, 긴급 진입로 주위에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도 물려놨다.



“야, 확실하지?”


특별할 때나 개방하는 긴급 진입로 앞에 선 위병장이 물었다.


병사는 반신반의한 그의 외침이 이해가 갔다. 황가의 마차가 이곳을 지나간 건 한 달이 조금 넘었을뿐이건만, 벌써 돌아온다는 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잠시 실례.”


주변엔 사람이 많다. 함부로 떠들 이야기가 아니기에 병사는 위병장에게 다가가 귓속말하였다.


찬찬히 듣던 위병장은 두 눈을 부릅떴다.



“뭐, 뭣?!”

“위, 위병장님!”

“아.”


다급히 만류하니 평정을 되찾은 위병장은 몸까지 숙이고는 더욱 바짝 달라붙었다.



“저, 정말이야? 지, 진짜로 벨루디스와 루 몬테르의 깃발이 같이 걸려있었다고?”

“예. 셋 모두 확실히 걸려있었습니다.”

“······.”


말이 없는 위병장이 무얼 상상했을지는 물어보나 마나다. 세 국가―― 왕가와 황가의 깃발이 모두 내걸린 것의 의미는 너무나도 뻔했으니.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위병장은 몸가짐을 정리하고는 늠름한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조금은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흐르고······


저 멀리 빠르게――처음 발견했을 때와 비교하면 매우 느리다―― 다가오는, 하나로 연결된 두 대의 마차가 보였다.


이윽고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관심 어린 시선과 환성을 뚫고 마차는 관문에 들어섰다. 새치기에 대한 불만 따윈 없다. 자신과의 차이를 확인했을 뿐, 저것을 보고도 그딴 말을 하는 놈은 분명 눈이 달리지 않은 맹인일 것이다.



“서, 설마. 비, 비젠탈······?”


마부도 없이 천천히 속력을 낮추는 모습을 보고 위병장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앞서 나가 선도해왔던 위병들은 본인들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딱히 확인해주지 않더라도 누구나 한눈에 알 것이다. 조금의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은 이 명마를 본다면 말이다.


착각 따윈 절대 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진다.


그제야 병사는 깨달을 수 있었다. 기묘했던 흙먼지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흙먼지는 비젠탈이 발생시킨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차의 바퀴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며, 엄청난 속도에 휘말린 먼지들이 뒤로 분출되듯 내뿜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양은 먼지 하나 안 쌓인 마차를 보건대 무척이나 적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흙먼지를 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라보는 시점이 일직선이었기에――, 구름의 띠처럼 일자로 길게 이어지는 끝 쪽에서 수직으로 겹쳐보았기 때문에 더욱 진해 볼 수 있었던 거다. 분명 옆에서 본다면 실제로는 아주 조금의 먼지만 날리고 있으리라.


도중 흙먼지가 끊긴 건 서서히 속도를 줄였기 때문이겠지.


단순히 달렸을 뿐임에도 대마수다운 면모가 나왔다고 할까,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병사가 이러한 사실에 충격을 받아 굳어있는 사이 뒤의 마차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조금은 기사를 닮은 의복이긴 하나 황가의 문장이 새겨진 뱃지를 보고 단숨에 근위임을 안 위병장은 정중히 예를 표했다.


자신을 유즈라 렌들러라 알린 여근위는 마차엔 제3 황자, 베르그 드몽 폰타르트가 탔다는 것을 알리며 목적을 말하였다.


――예상이 사실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위병장은 너무 놀라 미처 삼키지 못한 숨을 들이쉬고는 경례를 올렸다.



“다음 관문까지 모시겠습니다!”

“마음만 받도록 하지.”

“하, 하지만 호위가······”

“그건 괜찮네. 보다시피 말일세.”


유즈라의 시선을 따라간 위병장은 마차의 선두, 그리고 마부석에 있는 것을 보고는 마음속 깊이 납득하였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에서의 선도는 부디.”

“자네들의 입장도 있겠지. 알겠네. 부탁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일정에 차질이 없도록 잘 모시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유즈라는 곧장 마차로 돌아갔다.


위병장도 빠르게 길을 터고 인도해줄 인원들을 선발했다. 검문소 위병의 태반이 투입되어 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검문 속도가 느려지겠지만, 황자 일행보단 중요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선발과 후발 모두 절대 실수가 없게 잘 모시도록!”

“옙!”


우렁찬 외침과 함께 다들 비장한 얼굴로 출발한다.


마부가 없음에도 비젠탈은 마치 마부가 있는 것처럼 천천히 이들의 뒤를 따랐고, 그렇게 주위 모두의 관심을 받으며 황자를 태운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다.


경례로 배웅하고 있던 위병장은 마차가 사라지자 참고 있던 숨을 거칠게 토해냈다.


마찬가지로 경례하고 있던 병사도 뒤늦게 손을 내리면서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저흰 역사적인 장면을 목격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세인트리안이 아닌, 우리 제국에서 말이지. 하지만 너무 설레발치진 마라. 어떻게 끝날진 아무도 모르니까.”

“옙. 입조심 하겠습니다.”

“그래. 명을 길게 가지고 싶다면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말은 그렇지만 대마수까지 온 마당에 과연 조용히 끝날 리가 있을까?


물론 위병장도 당연히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자신도 다독일 겸 말했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이 광경을 새겨두려는 듯 한참을 서서 마차가 사라진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짙은 감탄의 한숨을 쉰 위병장은 겨우 몸을 돌려 검문을 도와주러 갔다.


손은 부족하다. 병사도 바로 뒤를 따랐다. 그런데 걷고 있다가 무심코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위병장님. 갑자기 떠오른 건데, 마부석에 있던 슈페리얼 래퍼드는 뭘까요? 왠지 잘난 듯 앉아있었는데. 마부······는 설마 아니겠고.”

“난들 알겠냐. 헛소리도 그만하고. 그렇지만······ 그 난폭한 게 얌전히 앉아있던 건 좀 신기하더군.”

“참고로 전 무지하게 쫄았습니다.”


비젠탈에 가려져 뒤늦게 발견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위병장도 체면 때문에 말은 안 하지만 분명 쫄았을 거다. 슈페리얼 래퍼드는 그만큼 강한 마수종이니 말이다. 오히려 어떻게 길들였는지가 궁금하다.



“공국에서 키우는 것이려나? 그럼 기싸움 같은 게 아닐까 싶은데······”

“잡담은 이제 그만하고 일에 집중해라.”

“알겠습니다!”


상당히 지체됐기에 불만이 쌓였을만도 하지만 워낙 진귀한 광경이었기에 따로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도리어 서로 떠드는데 바빠 검문은 뒷전인듯하였다.


애꿎은 화풀이는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병사는 검문을 진행해 나갔다. 검문 절차는 단순히 의심되는 자를 뒤질 뿐이니 간단했다.


언뜻 차분하고 침착하게 검문을 실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매우 들떠있었다. 하마터면 재잘재잘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으로 뛰어들뻔한 게 벌써 수차례다.


유난 떤다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소리이다.


걸린 깃발을 토대로 한 단순 짐작이 아닌, 자신처럼 황자 일행의 구성원을 들었다면 반드시 들뜰 수밖에 없다.


――저 행렬은 무려 ‘정상회담’이니 말이다.


물론, 타국에서 온 귀빈은 공주와 후작 영애로 왕은 아니다. 하지만 각국은 당당히 자신의 깃발을 걸고 있었다. 적어도 일개 개인으로 온 건 아닐 터. 준 정상회담엔 이르지 않을까 싶다.


분명 지나치는 다른 관문에서도 이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해 한바탕 소란 날 것이다. 인마전쟁이 종결된―― 초대왕들 이후 여태 없던 만남의 성사이니.


한동안 가라앉을 기미는 없겠지.


병사는 그리 확신하였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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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다들 연말 잘 보내세요! 23.12.26 8 0 -
259 219-2 24.04.10 7 0 13쪽
258 219 24.04.10 35 0 42쪽
257 218 +2 24.03.25 29 1 43쪽
256 217 +2 24.03.14 18 0 50쪽
255 216 +2 24.03.01 28 0 40쪽
254 215 +2 24.02.22 34 0 40쪽
253 214 +2 24.02.15 29 0 45쪽
252 213 +2 24.02.01 38 0 48쪽
251 212-2 +2 24.01.22 23 0 21쪽
250 212 +2 24.01.22 29 0 33쪽
249 211-2 +2 24.01.03 33 0 20쪽
248 211 +2 24.01.03 66 0 43쪽
247 210 +2 23.12.03 103 0 45쪽
246 209 +2 23.12.03 38 0 41쪽
245 208 +2 23.11.11 44 0 55쪽
244 207 +2 23.10.29 69 0 42쪽
243 206 +2 23.10.21 49 0 50쪽
242 205-2 +2 23.10.11 60 0 21쪽
241 205 +2 23.10.11 69 0 37쪽
240 204 +2 23.09.30 67 0 40쪽
239 203 +2 23.09.14 61 0 39쪽
238 202 +2 23.09.14 92 0 36쪽
237 201-2 +2 23.09.02 66 0 18쪽
236 201 +2 23.09.02 71 0 35쪽
235 200 +2 23.08.22 86 0 47쪽
234 199 +2 23.08.14 72 0 42쪽
233 198 +2 23.08.04 85 1 39쪽
232 197 +2 23.07.27 79 0 42쪽
231 196-2 +2 23.07.19 51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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