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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님의 서재입니다.

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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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4.1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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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5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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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쪽

145

DUMMY

‘우우······ 루비아 씨 돌아와요.’


아무리 얼굴 두껍기로 유명한 루비아라도 주교를 상대로는 제멋대로 합석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라프리트를 상대로는 잘만 했으면서.


저 루비아가 못한다는 건 다른 어떤 이들도 할 수 없다는 뜻. 우연히 소식을 듣고 도와줄 지원군은 없다고 가정해두는 편이 좋을 거다. 여차하면 에르나 델리안이 거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다.


부담된다······. 너무 부담된다.


약해진 마음 탓인지 슬금슬금 고개가 아이리스에게로 향한다.


늠름하고 잘생겼다······ 정말 누구 아들인 건지 원.


‘좋아! 우리 아이리스를 위해서라도 힘내보자고! 할 수 있다! 난 이스피리아! 인디아니 카를로 운이라는 이름 따윈 처음 듣는―― 아니, 이름은 소개하질 않았구나. 그래! 그런 이름 따윈 듣지 못한 거야! 아니, 들었었나? 모르겠다! 어쨌든 모르는 거야!’


열의를 다진 리아는 남은 차를 벌컥 들이마셨다.



“저기, 근데 여러분들은 어쩐 일로 저에게―― 응? 왜 그러신가요?”


어쩐지 원치 않은 방문자, 인디아를 비롯하여 모두는 루비아가 나간 문밖이 신경이 쓰이나 보다. 감추려 하지만 동요하는 게 느껴진다.



“흠. 실례. 공녀님과는 오랜만에 만났던지라. 훌륭하게 성장하신 모습에 잠시 마음을 뺏겨버리고 말았습니다.”


하긴 루비아는 겉보기엔 청초한 미녀. 오랜만에 봤다면 눈길이 갈 만도 할 거다.


납득한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시작이다.


분위기가 돌연 진지해진 인디아를 보며 리아는 살짝 긴장했다.


‘괜찮아. 내가 베르다드에 줄곧 있었다는 알리바이는 확실하게 만들어뒀어. 딱히 증거를 남겨두거나 하지도 않았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니 인디아가 말을 걸어왔다.



“시간이 아까우니 거두절미하고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가 이스피리아 공을 찾아온 이유는 최근 성국에서의 사건 때문입니다.”

“전 모릅니다!”

“······.”


‘아······ 너무 빨리 대답했다.’


한순간에 싸해지는 분위기.


인디아들은 물론이거니와 델리안에게서조차 대놓고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던 페리가 작게 콧방귀를 끼었다. 아마 한심하다고 하는 게 아닐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시선이 헤매고 있으니 옆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주교님을 만나 뵙게 되어 긴장하셨나 봅니다. 너그러이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나의 잘못이겠지. 귀공들이 마음 쓸 필요는 없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배려에 힘입어 본론으로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라네, 아이리스 공.”


차분히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한 아이리스는 입가가 웃고 있지만 냉혹한 눈을 하였다. 피는 속일 수 없는지 어딘가 에르를 닮은 모습이다.


······너무 멋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아들에게 도움을 받을 순 없다. 엄마로서 의지가 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작게 헛기침을 한 리아는 물었다.



“성국의 사건이라 하였는데······ 그건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묻는 말에 인디아는 잠시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에르는 물론이고 델리안까지도 천천히 살핀 인디아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착각하시는 게 있으시군요―― 아아. 편하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이러는 게 좀 더 신뢰가 갈 거 같아.”


사자다운 점잖음이 완전히 사라진, 가벼운 언행과 더불어 조금 껄렁한 분위기가 된 인디아. 이게 본래의 성격인가 보다.


돌연 변모한 모습에 놀라고 있으니 인디아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너희들이 대충 뭘 예상하였는지는 알겠어. 근데 우린 그걸로 찾아온 게 아니야. 못 믿겠으면 우리의 신, 루시아스께도 맹세를 드리지. 우린 너희들이 성국에서 벌인 일을 추궁하러 온 게 아니야.”


맹세한다고 이야기할 때 인디아는 전혀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맞잡고 기도를 올렸다.


너무나도 진실한 모습······ 눈앞에서 직접 보니 그게 더욱 잘 느껴졌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지만 신앙심 같은 부분에선 의외로 확고한 면도 있지 않을까 싶다. 저래 보여도 진짜 성직자이기도 하고.


고민했던 리아는 만약 이 행동조차 거짓일 것을 염려하여 감각을 넓혀봤다.


혹시 증거를 잡으려 비디오 녹화 같은 마법을 준비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그런 건 전혀 없다.


‘아니. 마법이 있긴커녕······ 아무런 장비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호신의 목적이나 여타 생활하는 데에 있어 한두 개의 마도구는 평민도 거의 필수로 지니고 있다. 없는 게 오히려 더 드물다.


벨루디스말고 다른 나라는 좀 다를지도 모르지만, 주교와 심판관이라는 작자들이 없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않을까.


리아는 잠시 인디아들을 보다가 물었다.



“빈손으로 온 건 적의가 없다는 표시인가요?”


놀란 눈을 했던 인디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의심받는 건 정말로 사양이라서 말이야. 혹시 몰라 다 놔두고 왔는데 알아봐 줘서 고마운걸?”

“······그렇게까지 한 이유가 뭔가요?”

“알리기 위해서지. 자인 디바오러라는가, 뒤에 있는 네 스승이나 갈라사르의 마녀 같은 걸 따지러 온 게 아님을 증명하려고 말이야. 그쪽의 아이리스도 당연히 관심 밖이고.”

“마녀는 빼주시죠. 듣기 거북하게. 델리안이에요. 그리고 우리 아이리스는 최고고요.”

“그, 그래. 미안하게 됐군. 거기 델리안에게도 사과하지. 오랫동안 부르다 보니 입에 붙어버렸지 뭐야. 아이리스도. 무시할 마음은 없었어.”


고개를 숙이는 인디아에게 델리안은 사용인으로서 묵례로 조용히 답했다.


아이리스는······ 차분하니 어른스럽고 멋지다.



“뭐, 알겠어요. 귀찮게 굴 용의가 없다는 건 믿어드릴게요.”

“그건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

“근데 그러면 왜 찾아온 거예요?”

“아아. 그거 말이지.”


거기서 멈춘 인디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리카드에게도 말해뒀는데 우린 성국의 뜻으로 온 게 아니야. 순전히 개인적인 이유로 온 거지. 사자라는 건 단순히 명분일 뿐이야.”

“개인적으로 절 만나기 위해서요?”

“그래. 그게 여기 있는 리블리지들과 아베라의 바람이었어. 그리고 ――너의 부탁이기도 해.”

“제가요?”

“어. 너에게 협박에 가까운 부탁을 받았었어. 리블리지와 만나게끔 해달라고. 거기에 아베라나 여기 둘도 만나보고 싶다며 따라온 거지.”

“흐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꼬았던 리아는 머리를 맑게 했다.



“거짓말은······ 아니군요.”

“당연하지. 여기까지 와서 그딴 짓을 할까 보냐.”


거짓말이라는 건 목적이 있다면 언제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의 말을 쉽게 믿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지만······ 인디아의 뒤에 서 있는 이들. 특히 어딘가 간절하고 애틋한 분위기인 리블리지와 아베라를 보노라면 거짓이라고는 차마 생각할 수 없다.


이번에 한에서는 진실이라고 봐도 될 거 같다.



“그런데······ 넌 정말 그때의 기억을 잃었나 보군.”

“어, 네. 당시 제가 폭주했었다면서요.”

“폭······주? 그게? 명백히 인격이 존재했는데? 게다가 기억을 잃는다고 이야기한 것도 너였어.”

“어라, 그래요?”


리아는 힐끔 눈동자를 돌려 에르와 델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둘의 반응은······ 아쉽게도 모르겠다. 은은한 미소로 일관 중인지라 뭘 생각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가 없다. 마력까지 읽어내면 얼추 알 순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다.


‘만약 표정만으로 아는 능력이 나에게도 있었다면 지금보다 꽤 편안히 살았겠지. 가끔 루비아 씨가 부러워지―― 아니, 안다는 것도 그것대로 고충이 있으려나?’


어쩌면 그로 인해 루비아의 성격이 삐딱해진 것일지도 모르고.



“후후.”

“응? 지금 웃을 만한 부분이 있었나?”

“잠시 딴생각 좀 했어요. 미안하게 됐네요.”

“어, 아니. 괜찮아.”


왠지 외형처럼 어린 소년 같은 반응을 보인 인디아를 보며 리아는 조용히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러나 오래가진 않고 눈과 입이 일자가 되었다. 몹시도 불만족스러운 모습이다.



“괜한 헛짓거리는 왜 하는 거람. 딱히 악인도 아니면서.”


인디아들은 얼굴을 굳혔다. 혼잣말이었지만 바로 앞인지라 들렸을 거다.



“그건――”

“――아아. 됐어요. 당신들 나름의 뜻이 있겠죠. 여전히 멍청하게 보이지만. 저와 제 친구들만 건들지 않는다면 알 바 아니에요. 거기에 그런 걸 대화하러 온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


작게 대답한 인디아의 얼굴은 딱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저 꼬락서니는 또 뭐냐.’


마음에 들지 않는 이들이기에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보고 있자니 더 마음에 안 든다.


크게 한숨을 쉰 리아는 가볍게 혀를 차며 말했다.



“하나 충고할게요. 당신들, 스스로가 결정하고 행동했으면 가슴을 펴고 떳떳하게 지내세요. 그게 어떠한 일이든. 설사 저나 다른 사람들이 머저리 같다고 해도 말이죠. 하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면 그만두시는 걸 추천해요. 업이라는 건 가볍지 않아요. 처음엔 괜찮다가도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짓눌려 있을 거라고요? 그땐 혼자서는 설 수도 없는 지경에 치닫고 말걸요.”

“······그런 사람의 말로는 어찌 되나?”


반문은 없을 줄 알았건만, 의외로 성실히 들었는지 인디아가 진지한 눈으로 물어왔다.



“뻔하잖아요. 당신도 아는 걸로 보이는데요?”

“광인이란 녀석들의 말로겠지.”

“꼭 그렇지 않더라도 어디 한군데는 망가져 있겠죠.”

“그러할 테지.”

“뭐······ 선택은 자유니. 당신들도 마음대로 하고 사세요. 자기의 삶은 본인의 것이니까요. 남이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간섭이겠죠. 단―― 제가 봐 드리는 건 한 번뿐이에요. 여러분들은 벌써 그 기회를 썼고요.”


살짝 몸을 떠는 인디아들.


그들을 한동안 둘러보던 리아는 몸에서 힘을 뺏다. 그리고는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갑니다. 왜 이렇게 꾸물대요? 빨리빨리 용건이나 처리합시다.”

“너······ 꽤 뻔뻔한 녀석이구나?”

“음? 전 솔직할 뿐인데요.”

“······됐다. 그래, 됐어. 아무렴 어떻겠냐.”


꺼질듯한 한숨을 쉰 인디아는 뒤를 가리켰다.



“먼저 볼 일이 있다는 건 얘야.”


소개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이 한 여성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멀리서 본데다가 앞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제대로 보긴 처음이나 마력만큼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분명하다. 이 여성은······ 델리안을 쐈던 그 저격범. 그리고 자신을 폭주하게 만들었던 리블리지란 사람이었다.


꽤 조용해진 실내에서 리아는 찬찬히 리블리지를 보았다.


헤어스타일을 바꾼 건지 아니면 일할 때만 그런 건지, 긴 앞머리를 좌우로 가른 리블리지는 무척이나 가련하고 청순한 미녀 그 자체였다. 신관들의 차림인 백의로 된 복장도 이에 한층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스타일도 발군. 신장 자체는 160cm로 평범하나 비율이 좋아 다리가 길쭉하다.


몸매까지도 들어갈 곳은 들어가고, 나올 곳은 나왔다. 이전엔 너무 가리고 있어서 잘 몰랐지만, 저격 때 입었던 쫙 달라붙은 어두침침한 옷도 나름 잘 소화하고 있지 않았을까도 싶다.


다운됐던 기분도 잊을 만큼 리아는 눈길을 빼앗겼다.


조금······ 반칙 같다.


‘헤헹. 제, 제법이야······. 그, 그래봤자 우리 델리안에겐 안 되지만.’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긴 하다.


묘한 경쟁심을 불태운 리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일단 예의상 인사는 하도록 할까요? 안녕하세요, 이스피리아에요.”

“아, 네! 저, 정중히 감사합니다. 리블리지입니다.”

“만나서 반가······운 건 됐고, 저에게 볼일이 있다죠?”


시간도 주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가자 리블리지는 당황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굳은 얼굴로 침착하게 머리를 깊게 숙였다.



“우선 사죄를 올립니다. 혼자 전투에 임한다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노린 행위.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언―― 이스피리아 님을 업신여기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봉변당한 세니알 님께도······ 죄송했습니다.”


리블리지는 다시금 정중히 머리를 숙이며 사죄를 구했다. 그 모습은 참으로 단아하면서도 순결한 자태였다. 그야말로 성직자 본연의 자태이지 않을까.


하지만 겉보기가 어떻든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이쪽의 몫이다.



“켁! 사과 따윈 됐네요. 징그러우니까 관두시죠?”


냉혹한 거절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공기에도 질량이 생긴 듯 무겁게 가라앉는다. 아까 자신의 기분이 나락으로 치달았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시간 자체가 응축한 듯 농밀한 침묵이 흐른다.


이러한 반응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는지, 리블리지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실망한 듯 얼굴이 흐려졌다.


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기대했건만 그게 빗나간다면 누구라도 실망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리아의 성질을 건드렸다.


‘이 여자는 어떤 정신머리인 거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속으로 삭이는 것에 그치려 했다.


하지만 감정은 점점 끓어올랐고······ 이윽고 이성의 끈이 끊겼다.



“――이봐, 당신. 어떤 기대를 하고 여길 온 거야?”


생각 이상으로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이 나왔다.



“네, 네?”

“뭔 기대를 했길래 서운하다는 듯이 굴 수가 있냐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당신의 사과를 받지 않을 거라는 건 아예 생각조차도 안 해봤냐고. 지금도 봐봐. 내가 화를 낼 거라고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나 본데?”

“아, 아뇨······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왜 그따위 태도를 보이냐? 그리고 지금 네 얼굴을 한 번 봐라. 그렇지 않다고 하는 년의 얼굴인지.”


비꼬는 말에 리블리지는 동글동글한 눈망울이 커지고는 애처롭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러한 반응이 너무나 어이가 없던 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얼마나 주위에서 오냐오냐해준 거야. 자기가 뭔 짓거리를 하든지 간에 사과하면 ‘아, 그렇군요.’라면서 용서해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


정말 어이가 없다. 이곳보다 훨씬 안전한 지구에서도 저딴 태도는 보이지 않으련만.



“저기 말이야. 내 친구가 죽을 뻔했어. 뭔 소리인지 알아? 죽는 거야. 죽는 거. 다시는 눈을 뜨지도, 하찮은 이야기로 함께 웃고 떠들 수 없게 되는 거라고. ――바로 네놈들 때문에. 그런데 대뜸 와서는 사과할 테니 용서하라는 거야? 아주 잘난 분이 납셨네. 당신들이 모시는 신의 뺨도 후려치겠어?”


몹시도 기분이 나빠진 리아는 팔걸이에 팔을 세워 삐딱하게 얼굴을 기댔다.



“물론 나름대로 전투 중이긴 했으니 어느 정도 참작은 해야 하겠지. 전투란 그런 거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일격을 가하는 그 상황에서 델리안을 노린 게 이해가 안 가. 더군다나 넌 그때 살의조차 없었지. 뭔 소리인지 알겠어? 넌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델리안을 죽이려고 했다는 거야. 거기엔 아무런 정의도 뜻도 없어. 그저 연못을 뛰어다니는 개구리를 돌로 맞히는, 죽인다고 하는 최소한의 자각조차도 없는 상태였지.”


리아는 하얗게 질린 리블리지를 비롯하여 전원을 째려봤다.



“사과하든 말든 그건 그쪽의 자유야. 그게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든지 간에. 하지만 강요는 하지 마. 멋대로 시작한 너희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괜히 사과를 안 받아들인다면서 날 나쁜 년으로 만들지 마. 질질 짜려거든 내가 없는 데에서나 해.”


그렇다. 뻔뻔한 것도 정도껏 해야지. 얼마나 얼굴이 두껍다면 이럴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애초에 쉽게 용서받을 거라는 마인드 자체도 정말 같잖다.


‘빚을 갚으러 갔을 때도 죽어라 반격해댄 주제에 말이야.’


이래서야 형세가 불리해졌기에 설설 기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겠는가. 만약 자기네들이 이겼다면 과연 사과하러 왔을까 하는 의문밖에 들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난 성인군자가 아니야. 지나간 일이라며 흘려보내기에는 진짜 뭐같이 빡치거든?”

“저, 저는――”

“――그만해, 리블리지.”


인디아가 팔을 뻗어 막아 세웠다. 그런 그의 눈은 냉철했다. 적어도 사리 분별 정도는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알면서도 리아는 도발하듯 말하였다.



“헤에······ 주교님께서는 말이 너무 심했다고 탓하시려는 건가요?”

“아니. 네 분노는 너무나도 지당해. 나라도 목숨을 노려지고, 사과를 받아들이라며 종용한다면 어떻게든 처분하려 했을 거야.”

“흠. 헛소리를 늘어놨다면 똑같이 체험시켜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졌네요.”


불온한 말에 몸을 떨며 놀라는 건······ 리블리지 뿐. 나머지 사람들은 침착하니 사태를 관망했다. 적어도 이들은 자신들이 벌인 일에 대해 책임감을 지닌 듯하다.


태도에서 알 수 있다. 목숨 정도는 진작에 걸어두었다는 걸.


‘뭐, 운 씨와 케트로 씨는 저번에 봐서 알고 있었지만.’


힘을 뺀 리아는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델리안은요? 혹시 할 말이 있으신가요?”

“그때의 일은 나 자신의 치부란다. 저자를 탓할 건 아니니 딱히 할 말은 없구나. 다만――”


말을 끈 델리안은 인디아를 똑바로 바라봤다.



“세스타스와 프리에나, 내 두 아이의 일은 잊지 않았다. 여태 그대들이 하는 일들을 잠자코 지나쳤지만, 이후 비슷한 낌새라도 보이면······ 기대해도 좋다네. 내 어리석음에 맹세코 전력을 다해 그대들을 멸망으로 이끌어줄 것이야.”


오래 살았기 때문인지 에르와 마찬가지로 델리안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기껏 해봐야 일부러 살짝 기분이 좋다, 나쁘다는 것을 내비칠 뿐이다.


그러나 지금의 델리안에게는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확연하게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혹한이 불어 닥치는 듯한 싸늘함과 그 안에 공존하는 열화와 같은 노함이.


동감이랄까, 당연하다는 감정밖에 안 든다. 자신의 아이를 죽이려 한 것이니.


그런데다가 프리에나는 만신창이가 된 걸 직접 구출하기까지 했다.


······솔직히 이 자리가 피바람에 휩싸이지 않은 게 기적이다. 아니, 사과랍시고 리블리지가 투정을 부릴 때 폭발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다.



“그 둘이······ 네 아이라고? 그래서 성국에 온 것이었나?”


중얼거리는 인디아를 흘끔 본 리아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델리안, 그땐 저도 도와드릴게요. 알다시피 쌓인 게 많거든요.”

“마음만 받아두도록 하마.”

“에이. 그래도 친구의 일인데 손을 보태야죠.”

“그게 아니란다. 정말 다 쓸어버릴 예정이라서 말이다. 그런 일에―― 후훗. 모시는 자를 데려갈 순 없진 않으냐.”


그렇게 말한 델리안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미소를 내걸었다.


능청스러운 모습에 리아는 순간 무어라 할 말을 잃었다. 정말 보기와 달리 델리안도 은근히 농담을 좋아한다.



“알겠어요. 그래도 사양은 하지 마세요. 델리안이 그렇듯 사용인을 챙기는 것도 제 역할이니까요.”

“후후. 어쩔 수 없지. 만약 그때가 된다면 부탁하도록 하마. 사용인으로서 너무나 송구하지만 말이지.”


어깨를 으쓱이며 농담을 건네니 다시 농담으로 맞받아치는 델리안.


하지만――


이쪽은 농담이 아니다.


경고는 했다. 다음은 없다. 언젠간 나아질 것이라며 자비만을 베푼다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야말로 바보지만······.’


상대는 목숨을 노리고 수작을 건 것이다. 그런데 경고라니······ 미적지근하기 짝이 없다. 이딴 행동을 취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숙하다는 증거나 다름이 없다.


어리석다. 너무나 어리석다.


기회를 살려 정신을 차린다면 모를까, 반대라면 더욱 만반의 준비를 철저히 한 다음 다시금 죽이려 할 텐데 말이다.


비약이 아니다. 전생에서 겪은 전쟁에서도 그러했었다.


당시 중대장이 포로는 멋대로 잡지도 말고, 멋대로 해방도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다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었다. 그래서 보통 전쟁에서는 포로를 상호 협의를 보아 교환하는 식으로 거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과 분대원들은 사로잡은 포로를 안쓰럽게 여겨 몰래 돌려보냈다.


그로 인한 대가는 컸다.


아니, 참담했다.


며칠 후 갑작스럽게 시작된 침공에 전우를 수십 명이나 잃었다. 여태 발견되지 않았던 진지였기에 방심이 생겨 피해가 컸다.


원인은 놔준 포로로, 당시 진지의 위치를 기억하고는 본대와 함께 온 것이었다.


그때의 빗발치는 총탄과 수류탄의 폭발음. 그리고 전우가 죽어가는 모습은 벌써 몇십 년이 지났건만, 아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산 것조차도 기적인 이때의 일은 크나큰 교훈을 깨닫게 해주었다.


――적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어른이든 아이든 관계없다. 어떤 이유든 간에 목숨을 노린다면 죽여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지킬 방법이다.


이 사고야말로 오랫동안 자신의 행동을 결정짓는 방침이 되었다.


주변이 차가운 인간이라며 수군거렸지만 바꿀 마음 따윈 조금도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진짜 죽이려 드는 사람은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면 감옥에 가 있었을 거다. 정당방위를 받아내기란 무척이나 드무니.


그러나 이런 자신도 아내를 만나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든지 실수를 한 번쯤은 한다고.


전, 현생을 통틀어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이 드는 소베르비아조차도 실수는 한다. 그런 마당에 인간에게 완전무결이란 있을 수 없으리라. 있다면 신이라는 존재일 터.


――아니. 그 신조차도 최근 들어서는 실수 정도는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렇듯 인간은 실수한다. 누구나가. 자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나야말로 실수와는 뗄 수 없는 관계이지.’


그렇기에 딱 한 번은 용서해주기로 했다.


······감당할 수 있는 내의 일이라면.


지금도 바보 같단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것이 아내에게서 받은 감정이거늘. 이 사랑스러운 감정을 일깨워준 그녀와의 추억들을 부정하긴 싫다.


‘음······ 옛 아내를 떠올린 건 바람의 범주엔 안 들어가겠지?’


조금 찔렸던 리아는 헛기침하면서 에르를 곁눈질로 살폈다.


다행히 에르는 예민한 감각으로 무언가를 느낀 듯도 싶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조금 착각했는지 걱정스럽게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하기도 그렇지만, 에르는 정말 아내 사랑이 각별한 것 같다.


아주 조금이지만 기분이 풀린 리아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리블리지 씨? 꽤 거칠게 말한 감은 있지만 정정하진 않을 거예요. 그만큼 당신이 저에게 뭔가를 바란다는 건 무척이나 황당한 일이죠. ······그런데다가 당신은 절 보고 있지 않죠. 저는 저예요. 베르다드의 학생인 이스피리아죠. 무슨 소리인지는 아시겠지요?”


리블리지는 눈을 크게 뜨고는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러 감정이 오가는 게 느껴진다.


그러다 잠시 뒤 천천히 머리가 내려간다.



“거듭된 무례에 사죄드립니다, 이스피리아 양. 정말 죄송합니다.”


고개를 드는 리블리지에겐 숨을 삼킬만한 열화와 같은 기척이 전해진다. 올곧게 똑바로 바라보는 그 눈에도 잡념 따윈 모조리 사라진 상태이다.


드디어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거면 됐다. 이 뒤는 알아서 판단하겠지.


리아는 눈길을 돌렸다.



“저분의 용건은 이걸로 됐나요, 인디아 씨?”

“그래.”


한때 흉흉하던 분위기가 되기도 했지만 나름 만족스럽게 끝을 맺었는지 인디아는 은은하게 미소를 그렸다.


하지만 한순간의 일로, 인디아는 곧장 뒤쪽을 가리켰다.



“다음은 여기 아베라야.”


소개받자 인디아의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 아베라는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원래의 자리로 물러선 리블리지를 잠시 보던 리아는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이네요, 아베라 씨.”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스피리아 공.”

“공은 됐어요. 은근슬쩍 편하게 부른 리블리지 씨처럼 대해주세요.”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유머러스한 농담에도 아베라는 표정의 변화조차 없다. 첫 만남보다도 훨씬 깍듯하게 예를 표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진지하다.


내심 안타깝게 여기며 리아는 물었다.



“아베라 씨는 어떤 볼일이시죠?”

“여행을 떠나기 전 인사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여행이요?”


리아는 고개를 꼬았다.



“갑작스럽네요. 제가 걱정할 건 아닌 것 같지만······ 일 쪽은 괜찮은 건가요? 한창 바쁠 거 같은데.”

“다른 분들께는 면목이 없습니다만, 주교직을 내려놨습니다.”

“흐음······ 즉 자기의 일을 남들에게 다 떠넘겼다는 거죠?”


비꼬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베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불어 인디아가 정말 네가 할 말은 아니라며 중얼거렸지만······ 이건 못 들은 걸로 하였다.



“뻔뻔하다는 건 주지하고 있으나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양해를 얻었습니다.”

“양해라······ 그럼 지금은 신관도 아니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현재는 이스피리아 양을 만나 뵙기 위해 임시로 1급 신관의 자격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얼마나 대단한 볼 일이길래 남들은 바쁜 이 와중에 모든 직책을 내려놓는단 말인가. 참으로 욕먹기 좋을 이 시기에 잘도 저랬다.


그만한 일이라는 걸까.


호기심이 조금 동했다. 그렇지만 묻기 애매하달까······ 왠지 알 필요는 없겠단 기분이 든다.



“이야기는 대충 알겠어요. 그래서 절 찾아온 이유는요? 인사라고 했죠?”

“예.”


무겁게 대답한 아베라는 한쪽 무릎을 꿇고는 정십자를 그렸다.



“감사드립니다, 이스피리아 양. 덕분에 도망치지 않고 마음을 다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송했습니다. 용서를 바라지도, 바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꼭 사죄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어딘가 참회와도 비슷한 그녀의 말에 리아는 조금은 마음이 술렁거리는 것을 느끼며 일어섰다. 테이블 너머 아베라는 아직 무릎을 꿇고 있었는데, 마치 기도를 드리는 듯 경건하기 그지없다.


한동안 묵묵히 내려다보던 리아는 걸음을 옮겨 아베라의 앞에 섰다. 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의 뜻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결정권을 지닌 자리에 있던 당신은 공범이나 다름없죠.”

“예.”

“저와 제 친구들을 죽이려 한 것을 쉽게 용서할 마음 따윈 추호도 없어요. 목숨은 무거워요. 사과한다고 했으니 그 반성하는 마음을 오랫동안 간직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묵묵히 대답만을 하는 아베라.


리아는 시선을 정면으로 하여 아베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말했듯 쉽게 용서할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죽기를 바란다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살아서 오랫동안 반성하기를 바라죠. 그러니 이후 여행길 도중, 자신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부조리함에 맞닥뜨린다면―― 절 부르세요. 딱 한 번만 힘이 되어 드릴게요.”


그리 말한 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발동한 마법을 아베라의 혼에 정착시켰다. 마법을 혼에 새기는 건 드문 일이지만, 바지탄스들에게 [맹약]을 걸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실패 없이 바로 성공했다.


고의로 마력을 드러냈기에 이를 알았을 텐데도 아베라는 거부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뒤이어 나오는 목소리도 평온 그 자체였다.



“다시금 감사와 사죄를 전합니다.”

“알겠어요. 기왕 찾아왔으니 답례로 저도 부디 당신의 여행길이 보람차길 기원해드리죠.”

“말씀 감사합니다.”


한 차례 더 기도를 올린 아베라는 천천히 일어났다.


이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으니 아베라는 정중히 묵례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머지 두 분은요?”


멀뚱멀뚱 서 있는 둘 대신 인디아가 대답했다.



“운과 케트로의 볼일은 이미 끝났어. 쟤네들은 네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고 싶어서 따라왔다더라.”

“아~ 어제 연습할 때 계셨지요. 그럼 이제 볼 일은 마치셨――”

“――잠깐!!”


말을 끊고 운이 끼어들었다.


리아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뭐죠?”

“그······ 무리가 아니라면 네 연습을 좀 더 지켜봐도 될까?”

“아뇨. 무리가 맞으니 거절할게요. 당장 돌아가세요.”

“너,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지 말고. 미덥지 않다는 건 잘 알겠는데······ 어, 그, 그래! 정 그러면 [예속의 서약]을 걸어도 돼. 들어보니 할 줄도 안다며?”


확실히 [맹약]의 파생인 [예속의 서약]이라면 세스가 그랬듯 허튼짓 따윈 절대 할 수 없으리라.


물론 해제하면 그만이지만 운에겐 그럴 능력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러니 운으로선 [예속의 서약]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이쪽이 죽으라고 명령만 하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바로 자살하게 만드는 수도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족쇄다. 솔직히 왜 저런 제안을 한 건지 이해가 안 된다.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나요?”

“당연하지!”


크게 소리친 운은 전원의 시선이 모이자 흥분을 가라앉혔다.



“웃어도 좋아. 난 그저 네 검을 더 보고 싶다. 단지 그뿐이야.”

“별로 웃을 마음은 없지만······ 정말 괜찮나요?”

“아아. 그걸로 네 훈련을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싼 편이지.”

“제가 돌변해서 이상한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데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 난 네 검을 봤어. 이쪽이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올곧더라. 그런 녀석은 뒤에서 수작을 부리지 않아. 하더라도 굳이 [예속의 서약]에 의지하지 않고 정면으로 깨부수겠지. 바보처럼.”

“부탁하는 주제에 바보라뇨. 그리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른다고요?”

“그땐 나의 눈이 틀렸다는 거겠지. 원망 따윈 하지 않아.”

“흐음. 그런가요?”


입부터 행동까지, 모든 게 꽤 가벼워 보이는 운이지만 지금은 진지함밖에 보이지 않는다.


잠시 고민하던 리아는 손가락을 튕겼다.



“예의상 묻지만, 후회는 없으시죠?”

“그래.”

“그럼 됐어요. 운 씨에겐 바라는 대로 [맹약]을 걸었어요. 호신을 제외한 그 어떠한 경우라도 학원 내에선 해를 못 끼칠 거예요.”

“꽤 너그러운 속박인데 그런 미지근한 걸로도 괜찮은―― 응? 그게 아니라! 마, 마법을 걸었다고? 아무것도 못 느꼈는데?”

“여태 느낀 적도 없으면서 뭘 새삼스럽게 놀라나요?”

“하지만 아까 아베라에게 할 때는······”

“그건 일부러 알아볼 수 있게 했으니까요.”

“그, 그렇군.”


뭔가 반응들이 이상하다.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무언가를 깨달은 듯 운이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삿대질했다.



“뭐에요. 버릇없게.”

“너야말로! 이미 마법을 걸어놨으면서 확인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보냐?”


리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제가 당신들에게 해줄 배려는 없네요. 물어봐 준 것만으로 감사히 여기세요. 마음에 안 들면 당장 돌아가고요.”

“이미 마법까지 걸렸는데 그냥 가겠냐?!”

“어라? 그러면 해제해주면 바로 돌아간다는 뜻? ······운 씨, 일로 오세요. 지금 당장 해제해 드릴게요!”

“······.”


[맹약]을 거는 건 좋지만 아직 해제엔 익숙하지 않다. 루비아 때처럼 맞닿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남이 건 것에 한정으로.


이번엔 자신이 건 것이니 바로 해제가 가능하다. 다가오라고 한 건 그냥 골려주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를 운이 알 턱이 없다.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리고 리아는 슬금슬금, 먹잇감에게 접근하는 야수처럼 자세를 낮추었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 인디아가 돌연 말을 걸어 왔다.



“이봐, 이스피리아.”


조금 놀아주려고 했을 뿐인지라 리아는 아쉬움도 없이 바로 자세를 고쳤다.



“어, 네.”

“우리에겐 안 걸어도 되는 거냐?”

“뭘요?”

“그 [예속의 서약] 말이야. 우리도 당분간 베르다드에 있을 예정인데?”

“으응?”


리아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인디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혹시 속박당하는 걸 즐기시는 취향인가요?”

“하아······ 그럴 리가 있겠냐. 뭘 어떻게 받아들이면 그쪽으로 빠져? 그냥 걱정은 안 되는 거냐고 묻는 거야.”

“왜 걱정을 한다는 거죠?”

“그야 우리가 허튼짓을······”


말을 멈춘 인디아는 눈을 가늘게 하여 리아를 봤다.



“그러네······ 실언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저야말로 알아주셔서 고맙네요. 하지만 주의해주세요. 다음은 없다는 걸.”

“아아. 명심하도록 하지.”


한발 물러난 형태로 말한 인디아. 그런 그를 순진무구한 미소와 더불어, 한 편으로는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응시했던 리아.


그러나 이내 둘은 가볍게 분위기를 털어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볼 일은 진짜 끝이죠?”

“그래. 오늘은 고마웠다. 정말 별 기대를 안 하고 있었거든. 나중에 따로 사례하도록 할게.”


그렇게 말한 인디아는 살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바쁜가 봐요?”

“아니. 그냥 이야기가 끝나서 돌아가려는 건데?”

“허얼······ 매정하네요. 볼일만 보고 안녕이라니.”

“······뭘 하고 싶길래 그러냐.”

“기왕 온 김에 대화나 하려고요. 걱정하지 않아도 당신들의 속셈을 떠보거나 하지 않아요. 말 그대로 잠시 시답잖은 주제로 떠들고 싶거든요.”

“그런 거라면야······”


인디아는 뒤에 늘어서 있는 이들을 쳐다봤다.


시선을 받자 운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케트로는 마음대로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아베라도 고민스러운 듯하였으나, 가까스로 마음을 정했는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자리하겠다고 했다.


마지막 리블리지는 눈가에 잠깐 슬픔의 기색이 어렸으나, 뺨을 두드려 떨쳐내고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의 반응을 살핀 리아는 곧장 에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의자 좀 부탁해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르는 [차원수납]을 열어 안에서 의자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는 혹시 모르니 의자를 준비해놓으라는 루비아의 지시로 인해 챙겨두었던 것이었다.


원래 있던 4개의 의자와 똑같은 고풍스러운 의자들이 놓이는 것을 보며, 리아는 여기까지 예상한 루비아의 두뇌에 새삼 감탄했다.


‘덕분에 의자를 찾으러 우왕좌왕하지 않아도 됐어.’


마음속으로 감사를 전한 리아는 다닥다닥 테이블에 옹기종기 붙어 앉는 이들에게 의식을 돌렸다.


다과도 추가되고, 모두에게 찻잔이 놓이자 리아는 방의 주인으로서 먼저 운을 뗐다.



“어흠······ 솔직한 심정으로는 다들 별로 연관되고 싶진 않지만, 이것도 나름 인연이겠지요. 그러니 앞으로는 서로 귀찮게 굴지 않기를 바라며 이 친목회를 개최합니다.”


차가 아닌 술병이 들려있는 게 어울릴만한 축사에 인디아가 쓸데없이 거창하다며 투덜댄다. 그에 비해 여전히 사용인으로서 있을 모양인지,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델리안과 에르는 조용히 손뼉을 치며 호응해줬다.


이윽고 눈치가 보였던지 운과 리블리지, 아베라도 어색하게 따라 손뼉을 친다.


그렇게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떠오를 기묘한 친목회가 시작되었다.


작가의말

감사합니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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