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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프 님의 서재입니다.

cafe, 체리블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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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프
작품등록일 :
2013.02.03 22:51
최근연재일 :
2013.07.15 23:56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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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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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3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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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1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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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6. 네 번째 손님. 플래토 몽 루이얄 골목의 예술가.

DUMMY




[에클레어 양,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구두도 떨어뜨린 채. 철제 계단 사이에서 발만 둥둥 떠 다니는 레이디, 오렌지레드 색의 코트를 입고 있던 레이디, 그리고 구두를 잃어버린 레이디는 카페 체리블로섬의 마스터인 에클레어 양이었다.


“어머, 내 구두! 찾아주셨네요, 후후후. 넋 놓고 보고 있다가 깜박하고 발에서 흘려버렸지 뭐에요. 이번 구두는 사이즈가 좀 커서 헐렁한 게 좀 걸리더라니.”


[그게 큰 거란 말입니까? 키에 비해서 발이 작으시군요.]


나는 그녀의 왼쪽 발에 구두를 신기며 말했다. 에클레어 양은 토라진 목소리로 레이디에게 무례하셔요. 숙녀의 신체에 논하려면 백만 년은 멀었네요. 하고 팩 고개를 돌린다. 에클레어 양에겐 발이 작은 것이 콤플렉스였나 보다. 흘러나오는 웃음을 누르고 토라진 그녀의 화를 풀어주고자 마술사에게 받은 장미를 머리에 꽂아주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런 곳에서 뭐하고 계십니까? 서점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만.]


“아, 공짜로 그림 구경 중 이였어요. 우연히 지나가다가 발견했거든요. 그러는 에릭씨야 말로 이런 곳에서 뭐하고 계셔요? 이 골목은 어지간한 현지인들도 잘 찾지 않는 곳인데.”


에클레어 양이 플래토 몽 루이얄 골목에 대해 설명해준다.


플래토 몽 루이얄 골목. 무명의 예술가들이 꿈을 가지고 열정을 품으며 찾아 드는 곳, 유명 예술가들의 아이디어 창작소이자 마음의 고향, 자신의 미래를 찾는 젊은이들의 현실과 낭만이 부딪히는 세계, 일명 예술가들의 골목이다.


가난하지만 꿈을 꾸는 젊은 예술가들의 거주지로 낮고 오래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재미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건물 외곽에 붙어 있는 철제 사다리를 통해서 각 층의 집으로 연결된 빼곡한 문들이 독특한 특색을 자아내면서 그런 분위기가 자유로운 영혼들의 아지트가 되기에 충분했다.



[…다정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그림이군요.]


길을 잃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서 그녀가 찾은 그림을 보다가 나는 진심으로 벽화에 사로잡혀 말했다. 화제를 돌리는 내 말에 에클레어 양이 갸우뚱 하다가 그림을 보며 흐뭇한 미소로 그렇죠? 하고 반문한다. 그녀가 보고 있던 맞은편 건물에는 하나의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벽돌을 깎아 매끈한 작업을 한 상태에서 위치상 기묘하게 걸리는 창문까지 그림의 한 부분으로 집어넣은 이색적인 벽화. 그림 실력 자체는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지만 감정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가득 들어가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는… 비유하자면, 어렸을 때 처음 받은 크레파스로 엄마와 아빠를 그린 아이의 그림 같았다. 마음 속에 무언가 따스한, 잊어버렸던 추억을 끄집어 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그건 화공이 누군가에게 바치는 인물화였다.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창문 가에 앉아 있는 젊은 여성. 예쁜 풀색 머리를 곱게 한쪽으로 땋아 내리고 에메랄드 눈동자는 사랑스럽다는 듯 정면을, 즉 나와 눈이 마주치듯 쳐다보고 있다. 입고 있는 감색 원피스와 창백하게 보일 정도로 새하얀 피부. 흔들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던지 코바늘과 짜다 만 뜨개질이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예쁜 외형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는 너무나 행복한 표정으로 손으로 배를 만지고 있었다. 한 생명이 담긴 볼록한 배를.


그 뒤, 노을이 질 때까지 벽화를 보며 이야기를 하던 나와 에클레어 양은 당연하게도, 카페 체리블로섬에 돌아가서 파이의 엄청난 후폭풍을 맞이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나는 늦게나마 에클레어 양을 찾아온 것이 감면되어 파이의 반성문은 피했지만… 에클레어 양의 배신감 느끼는 눈을 피해 2층으로 올라와 내 침실로 들어갔다. 암실에서 인화를 하다 만 작업들과 오늘 찍은 사진들을 인화하면서 벽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카페로 돌아올 때 에클레어 양이 짓던 신비로운 웃음이.


왠지 이번 벽화와 관련된 일이 오늘로 끝날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든다.


그리고 내 예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삼일 뒤, 매일 늦게까지 외출을 감행하는 에클레어 양으로 인해 파이의 인내심은 폭발하기 직전인 듯 하다. 파이는 파이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다가 몰래 나가는 에클레어 양을 확인한 뒤 나를 출동시켰다.


“해 질 때까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지 미행하다가 쓸데 없는 일이면 즉각 데리고 오세요. 저번처럼 같이 휘말려서 늦게 들어오시면, 저녁은 둘 다 국물도 없어요!”


단호한 파이의 말에 어제까지 에클레어 양의 편을 들어주던 나도 깨갱하고 뒤로 물러섰다. 너, 너무 대놓고 편을 들어준 모양이다. 같이 찍히다니… 나는 제국 군대식으로 각진 손으로 거수경례하며 에클레어 양의 뒤를 몰래 쫓았다. 파이가 시켜서 하기는 하지만, 레이디의 뒤를 쫓는 것은 상당히 불쾌한 일일 수 있었다. 나는 거의 시야에 잡히지 않도록 저 멀리서 뒤 쫓으면서 한숨을 푹푹 내 쉬었다. 파이의 말을 거절하자니 맛있는 저녁이 날라가고, 응하자니 내 양심이 날라가는 군.


……좋아, 저녁 밥을 위해서 양심을 잠시만 양보하자. 절대 호기심에 넘어간 게 아니야.


에클레어 양은 다운타운에 다다르기 직전, 골목길을 통해 이리저리 꺾어 들어갔다. 두어 번 놓칠 뻔한 것을 제외하고는 오늘은 비교적 추운 날씨라 사람들이 적어서 잘 쫓아갈 수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걷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찾는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둘러봤는데 그 때문에 나의 미행은 쉽지 않았다. 혹시나 그녀의 시선과 마주칠까 싶어 더 멀리 떨어져서 미행하다 보니 두어 번 놓칠 뻔한 것도 이때였다. 드디어 원하던 것을 찾은 듯 그녀가 가던 길을 멈춰 서서 벽을 짚으며 작게 외쳤다.


“찾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난 그제서야 여유를 갖고 나와 에클레어 양이 있는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곳은 며칠 전 그녀와 벽화를 보고, 나 홀로 산책길을 걸었던 그 플래토 몽 루이얄 골목이었다. 내가 주위를 확인하는 동안에도 에클레어 양은 돌이 된 듯 멈춰 서 있었다. 나는 파이의 부탁(무얼 하는지 확인해줘야 했으므로)을 들어주기 위해(사실, 미행보다는 과감히 말하고 같이 다니는 게 정신적으로 덜 피곤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등뒤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가는 동안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이 가녀린 등이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해 보이는지 그녀는 알까? 나는 세 걸음 물러서서 물었다.


“무엇을요?”


“꺅! 에, 에릭씨 저 엄청 놀랬어요!”


화들짝 놀라 두 손으로 가슴을 짚은 채 뒤돌아본 에클레어 양은 진짜 놀란 듯 얼굴도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난 그녀를 진정시키고자 아이스크림을 떠올리게 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놀라지 말라고 세 걸음 물러 섰는데도 이렇게 놀랄 줄은 몰랐는데. 에클레어 양은 제 머리를 쓰담쓰담 대는 내 손을 그대로 받은 채로 뚱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에릭씨야 말로 이 골목엔 어떻게 온 거에요? 쁘띠 쁘와르(다운타운에서 남쪽에 위치한 소수민족들의 거주지와 이색적인 문화 구역)에서 한참을 비집고 들어와 있는 플래토 몽 루이얄은 분명히 말하자면, 외지인이 찾아 들어오기는 힘든 곳이라구요. 며칠 사이에 두 번이나 같은 사람을 만날만한 곳은 아닐 텐데요?”


음… 파이가 미행하라고 내보내더군요. 하고 말할 분위기가 아닌데 이거.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하하하, 웃음으로 때우려고 노력했지만 에클레어 양의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처럼 쉽게 넘어가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어떻게 오신 거에요? 설마……”


음, 파이 미안하다. 널 좀 많이 팔게. 아니, 팔아야 내가 살아남는다. 사실, 난 파이의 부탁으로 그녀를 미행한 죄책감이 너무 크게 느껴지고 있었다. 저녁에 양보된 내 양심의 가책이 쓰나미처럼 몰려와 사정없이 양심을 쿡쿡 찔러대고 있었다.


“……길 잃어버리셨어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혼자서 돌아다니셨네! 파이는 뭐하고 에릭씨를 혼자 내보낸 거람? 위험하게!”


“하하하, 네. 길을 잃었는데 에클레어 양이 보이기에 황급히 뛰어왔습니다.”


그녀는 생각보다 둔했다. 아니면, 모른 척 넘어가주는 걸까? 그래서 난 파이를 파는 것보다는 내가 길치가 되는 수모를 택했다. 양심은 다시 수면아래로 넣고서 난 머리를 긁적이며 에클레어 양을 만나 다행인 표정을 지었다. 에클레어 양을 미행한 것을 들키면 왠지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쉽게 믿고 넘어갔다. 너무 쉽게 믿어서 내 이미지가 저런가 싶어 약간 나 자신이 불쌍해졌지만.


“길 잃은 거에 대해서 너무 당당하시네요. 아직은 혼자 나오시거든 큰 대로만 이용하셔야 한다니까요. 어쨌든 저랑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쪽으로 와서 보세요.”


에클레어 양은 몸을 치워주면서 자신이 발견한 것을 자랑했다. 내가 다가서서 그녀가 가리키는 벽을 가만히 들여다 보며 호오 하고 감탄을 표했다. 예닐곱 살의 꼬마아이 둘이 손을 붙잡고 들판으로 뛰어 가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에서 그려진 소설책 크기만한 작은 벽화였다. 파스텔 톤의 색깔만을 이용해서 그려진 그림은 며칠 전 보았던 벽화만큼이나 뛰어난 기교는 없지만 아련한 느낌과 함께, 뛰어가는 아이들이 전해 주는 생동감으로 보는 이들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주게 했다. 아이들이 제 이름들을 부르면 금방이라도 꺄르르 웃으며 뒤 돌아서 품에 안길 것 같아 손을 뻗어 주고 싶은 기분.


에클레어 양이 며칠 동안 늦게 들어온 것은 이 벽화를 찾기 위해서였을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찾았을까? 어째서? 왜? 연속해서 떠들어대는 내 머릿속과는 달리 에클레어 양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정보들을 토해놓는다.


“여기요, 원래 금이 간 벽돌들 때문에 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던 곳이거든요. 근데, 누구신지 몰라도 여기 벽돌의 울퉁불퉁한 면을 깎아내고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려놓으셨어요. 물어보니까 여기 건물 주인한테 허락 맡고 그린 거래요. 전에 봤던 그 벽화도요, 창문이 걸려 있는 집 주인이랑 건물주한테 다 허락을 맡고 그린 거라는 거 있죠? 어떤 화공일까, 너무 기대 되요. 왜 그런 곳에다가 그림을 그린 건지, 어떤 의미가 담긴 그림인지, 무엇을 위해서 그리는 것인지. 찾아서 물어볼 거에요.”


난 내가 떠올린 질문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질문들로 가득 찬 그녀의 머리 속 세상에서 내 질문의 정답을 찾았다. 의미가 있는 일이냐,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그녀에게는. 그녀가 궁금해하는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으므로.


“허락해 주신 건물 주인도 대단하군요. 그러고 보니 아까 찾았다라고 하신 말은 이 그림을 찾았다는 의미입니까?”


“아~아니요. 이 벽화들에서 화가가 그린 사인을 찾아냈단 얘기였어요. 여기 들판에 그려 넣은 꽃들 중에요. 유난히 하얗고 많이 그려놓은 꽃 보여요? 흰 아이리스 꽃.”


내가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에클레어 양은 나를 향해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포스스 달려나갔다. 높은 굽을 신고 있어 조심이 달려나가는 에클레어 양은 나보다 먼저 출발했어도 내가 성큼 성큼 몇 발자국 걷자 바로 따라 잡히는 바람에 내 다리를 보며 뭐라고 투덜댄 것 같았다. 비슷하게 생긴 건물들을 돌아서 또 다른 건물의 한쪽 벽면으로 다가갔다. 며칠 전 둘이서 보았던 첫 번째 벽화그림이었다.


4층을 향해 올라가서 다시 그림을 봤다. 그림의 배경에서 창문 밑 서랍장에 놓인 꽃병. 그 꽃병에 꽂혀 있는… 아이리스.


“아이리스가 꽂혀 있어요.”


“단순한 우연일 수 있지 않습니까?”


“2개의 비슷한 분위기의 벽화 그림에서 아이리스가 나오는 게 우연이라면, 뭐. 하지만 발뺌할 수 없는 세 번째 그림도 찾아 내었다고요, 따라 오세요!”


에클레어 양은 평소보다 흥분된 어조로 빠르게 속삭이듯 말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찾아낸 보물을 보여주는 건 무언가 굉장히 두근두근 거리게 만드나 보다. 그래서였을까, 평소에 우아하고 차분한 걸음걸이를 소유한 에클레어 양이 철제 계단을 성급히 내려가는 도중에 구두굽이 덜컥 걸리며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뒤따라 걸어 내려오던 나는 그렇게 좋으십니까, 조심하세요. 그러다 넘어지겠습니다. 하고 주의를 주려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으로 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기분 탓인지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빠르게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내려가는 도중이라지만 3층에서 1층까지 지상으로 순간이동 하듯 구르면 타박상으로 끝나지 않으리라. 무엇보다 에클레어 양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손에 잡히는 잘록한 허리를 오른쪽 손으로 잡아채며 반동을 이용해 내 품으로 끌어 당기자 자동적으로 내가 앞으로 튀어나간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등이 아래를 향하게 하며 왼팔로 철제 계단의 왼편에 있던 난간을 붙잡았다. 덜컥! 하고 멈추며, 안도의 한숨을 쉬는데 잡고 있던 봉이 쑥 들리면서 몇 계단을 떨어지며 엉덩방아를 찧다가 또 다른 봉을 잡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인가...


에클레어 양은 아까 내가 놀래 킨 것보다 배는 놀란 듯 토끼 눈이 되어 날 쳐다본 채로 박제된 것처럼 굳어서 가만히 안겨있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손으로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벌떡 일어선다. 나도 몸을 일으킨 뒤 에클레어 양이 다친 곳이 없나 살펴보고 갑자기 움직여서 놀랜 근육들을 풀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길래, 오빠라도 된 것처럼 훈계조로 늘어놓게 되었다.


[뭐가 그리 급하십니까? 아무튼 에클레어 양도 재미있으신 걸 발견하시면 앞을 안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있을 땐 괜찮지만 되도록 조심하십시오. 위험하지 않습니까?]


네에~ 기가 죽은 에클레어 양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다시금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손길을 거두고 계단에 걸려있는 구두를 들고 내려왔다. 살짝 휘어있는 굽을 고치며 그녀에게 신긴 뒤, 조심하라는 의미로 에스코트를 해서 다음 그림까지 걸어갔다.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 들어가자 어제 들렸던 공터보다 더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에클레어 양은 공터가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건물의 옥상까지 나를 이끌고 올라갔다.


옥상에 올라가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내가 에클레어 양을 바라보자 금새 기운을 되찾은 그녀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도 그녀의 미소에 전염되어 씨익 웃어 보이자 땅을 가리킨다.


“공터를 내려다 보세요.”


“…! 모자이크 벽화군요.”


“맞아요, 공터에 박혀 있는 돌들에 하나하나 칠을 해서 지상에서 봤을 때는 잘 모르지만 위에서 바라보면 하나의 그림이 되요. 그럼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쌍둥이 아기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이 자세히 보시면 아까 4층 계단에서 봤던 여성이랑 똑같이 생겼죠? 그리고 아기들을 감고 있는 이불보 무늬를 보면요, 아이리스가 수놓아져 있는 그림이에요.”


“세 개의 벽화, 아이리스, 그리고 임신한 부인-쌍둥이와 어머니-자란 쌍둥이들로 이어지는 순서. 재미있군요, 확실히.”


벽화는 사람의 인생사를 그려 놓은 듯 이어지고 있었다.


“저 그림들이요, 보고 있으면 마음 한 구석이 뭉클해지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벽화가분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 그림들을 그리는 건지 너무 궁금해 지지 않으세요? 왠지 이 예술가 골목에 벽화그림들이 몇 개 더 숨겨져 있을 것 같아요.”


찾아볼래요? 찾아보러 같이 가시지 않을래요? 에클레어 양의 눈빛에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합류했다. 파이한테는 분명 반성문 감의 배신이겠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가 중얼거리는 말을 들었다.


“좋아, 이제 공범은 확실히 만들었으니 파이한테 조금 덜 혼나겠다!”


그래도 저보단 에클레어 양이 훨씬 더 혼나시는 위치에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신나게 코트의 끝자락을 펄럭이는 에클레어 양의 뒤를 쫓아 걸으며 플래토 몽 루이얄을 샅샅이 뒤지러 출발했다.



해가 질 즈음 노을이 도시를 새빨갛게 물들일 시점에 에클레어 양과 나는 두 개의 벽화를 더 찾아낼 수 있었다. 하나는 풀잎 색 머리의 여성과 어수룩해 보이는 청년의 결혼식 장면으로 성당 주위의 다 쓰러진 낡은 담장에서 찾아냈다. 여름에 무성해져 담을 뒤덮고 있던 담쟁이 넝쿨들이 겨우내 말라버리면서 그림이 드러났는데, 제일 처음에 그려진 그림인 듯 색이 연하고 흐릿했다. 내가 마른 넝쿨들을 걷어내자 서로가 깊은 애정을 담아 마주보고 서 있는 풋풋한 커플의 모습이 확연히 느껴졌다. 벽화가의 싸인이었던 흰 아이리스가 여성이 들고 있는 부케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이제껏 봐왔던 벽화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주는 그림이었다. 잔잔하지만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던 벽화들과는 달랐다. 그저 한없이 슬프고, 쓸쓸하고,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는. ‘추억’이 아닌 ‘죽음’을 담고 있었다.


이제껏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그려진 나머지 그림들과는 달리 그늘이 지는 응달쪽 벽에 이끼들과 같이 작게 그려져 있어서 하마터면 놓칠 뻔 하였다. 처음 발견한 그 벽화의 배경과 똑 같은 그림 속에서 바뀐 것은 세월과 쌓여있는 그리움이었다. 노을이 지는 방, 똑같은 흔들의자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는 여인의 뒷모습, 하지만 거기에 앉아있는 것은 젊은 부인이 아닌 병들고 약해진 할머니였다.


지나간 세월이 무심하면서 그럼에도 누굴 기다리는지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그리움이 어딘가 서글퍼지는 그림이었다.


“이 그림만은 작게 그려져 있군요.”


“그러게요. 근데 이 그림은 제일 최근에 그렸나 봐요. 색도 선명하고 물감도 덜 말랐어요.”


에클레어 양이 그림 속의 아이리스를 쓰다듬다가 하얗게 묻어 나오는 물감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녀도 아이리스에서 위화감을 찾아내고 반사적으로 만진 모양이었다. 벽화가는 마치 세월의 허망함을 표현하려는 듯 처음 발견한 그림 속 아이리스와 다르게, 지금 발견한 그림 속에서는 아이리스의 꽃잎이 죄다 화병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오늘은 그림을 그리러 나오지 않았는가 봅니다. 이렇게 돌아다녔는데도 벽화가는 한 명도 부딪치지 않는 걸 보면. 이제 그만 저희도 돌아갈까요? 파이가 엄청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야겠죠? 에클레어 양이 한숨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발견한 그림을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서 무겁게 발걸음을 떼었다. 나는 방금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들을 정리해보며 에클레어 양과 함께 카페 체리블로섬으로 향했다.


그림 속 노을처럼, 우리가 지나가는 골목을 비추는 노을도 새빨갛게 그림자를 불태우는 듯 느껴졌다.





작가의말

너무 진지한 스토리 진행으로, 중간에 슬쩍 넣어봅니다. 어떤 장면을. 후후후후.


여러분들이 다만, 광대뼈가 승천할 듯 흐뭇한 미소로 웃어주길 바래봅니다.


치유계는 확실히 판타지에서 블루오션이라 불리는 영역이지만, 조회수가 턱없이 낮네요.


슬프다…… 독자 여러분들은, 제 글을 읽으면서 치유가 되시나요?


부디 충분한 읽을 거리가 되시길...


오타와 비평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선추코도 언제나 환영입니다.


저와 함께 천천히 걸어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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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

  • 작성자
    Lv.99 진흙44
    작성일
    13.06.12 16:26
    No. 1

    예..
    저는 보통 글을 읽을때 각 인물의 성격과 상황의 관계에 대해서 머리속에서 그리면서 읽는데요.
    (평면적이거나, 단조롭거나, 관계에 맞지 않는 행동이 나오는 글은 못 읽겠더라구요.)
    이 글은 그 관계가 단순하면서도 단조롭지는 않아 그냥 편안히 읽습니다.
    저에게는 치유되는 느낌이 드는 글이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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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5. 1월의 축제 “퀘백국의 겨울 카니발, 페테 데 네이쥬” 13.06.06 338 3 17쪽
16 #5. 1월의 축제 “퀘백국의 겨울 카니발, 페테 데 네이쥬” 13.06.06 282 3 11쪽
15 #5. 1월의 축제 “퀘백국의 겨울 카니발, 페테 데 네이쥬” 13.06.03 277 3 17쪽
14 #5. 1월의 축제 “퀘백국의 겨울 카니발, 페테 데 네이쥬” 13.06.03 242 3 18쪽
13 #5. 1월의 축제 “퀘백국의 겨울 카니발, 페테 데 네이쥬” 13.06.03 424 3 13쪽
12 #4. 쉬어가는 편, 일상! 휴식을 즐기는 각자의 방법. 13.06.01 348 4 16쪽
11 #3. 세 번째 손님. 지하도시의 미로와 길 잃은 아이. 13.06.01 425 4 13쪽
10 #3. 세 번째 손님. 지하도시의 미로와 길 잃은 아이. 13.06.01 342 3 17쪽
9 #3. 세 번째 손님. 지하도시의 미로와 길 잃은 아이. 13.06.01 358 4 14쪽
8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3.06.01 244 3 17쪽
7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3.06.01 246 3 19쪽
6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 13.06.01 390 4 13쪽
5 #1. 첫 번째 손님. 첫 만남. 그 이름은 에릭 윈체스터. +1 13.02.04 456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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