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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프 님의 서재입니다.

cafe, 체리블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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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프
작품등록일 :
2013.02.03 22:51
최근연재일 :
2013.07.15 23:56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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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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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36,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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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6.01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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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DUMMY


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어느새 씻고 나온 에클레어 양과 파이는 테이블에 브런치를 차리고 있었다. 버터를 발라 고소한 내음을 풍기는 베이글과 상큼 달콤한 과일샐러드, 얼어 붙은 몸을 단박에 녹여줄 따뜻한 단호박 수프를 든든히 먹고 나자 식곤증이 몰려왔다. 아침부터 사진 찍고, 눈싸움 하느라 체력을 꽤 소모한 모양이다. 파이를 도와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있는데 에클레어 양이 벽난로에 말린 외투와 장갑들을 다시 끼며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페 뒷문 쪽에 있는 창고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나와 하나씩 파이와 내 손에 쥐어준다.


[자, 오늘은 잠시 눈보라 아가씨가 휴식을 가진 이 시간에 본격적인 몽레알식 겨울맞이 준비를 할거에요. 유리화원을 포함한 정원손질과 추위에 벌벌 떨고 있을 동물들의 목장이며 낡아서 삐걱대는 곳간 수리까지 서두르려면 오늘 하루는 바쁘게 움직여야 해요. 식객인 에릭씨한테 이런 걸 부탁하게 돼서 죄송하지만, 엘레나가 부려먹을 때 확실히 부려먹어도 된다는 노예 계약서를 받아놨으니 잘 부탁 드릴게요. 그 동안 하기 싫어서 미루고 미루다가 지금까지 월동준비를 못했거든요. 그럼, 파이는 유리화원과 목장, 곳간으로 가는 길을 담당하고, 나와 에릭씨는 테라스부터 저 앞에 벚꽃 가로수길 앞까지 쓸러 갈까요?]


나와 파이가 눈을 마주치고 어깨 힘을 빼며 늘어지게 대답했다.


[[네에에.]]


에클레어 양이 야무지게 입을 앙 다물고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어머머, 말 끝이 늘어지는 데요? 다시?]


[[넷!]]


벚꽃 나무 가로수 길에는 눈보라 아가씨가 흩뿌린 눈으로 나뭇가지 사이사이에는 눈꽃들이 벚꽃처럼 피어 있었다. 작은 얼음 결정들이 반짝거리는 모습은 유리 공예가들이 만든 예술작품들을 떠올리게 했다.


허리 가까이 푹푹 바지는 눈들을 치우다가 나뭇가지에 맺힌 눈꽃들을 보며 허리를 피던 내게 에클레어 양이 눈을 치우며 눈보라 아가씨에 관련된 설화를 들려준다. 퀘백어가 아니면 전달되지 않는 단어들이 많아서 그녀는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천천히 제국어와 퀘백어를 번갈아 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우리 퀘백 국에서는 이 시즌에 오는 폭설을 눈보라 아가씨라고 불러요. 기억나시죠?”


그랬었다. 하지만 그 원인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이 현상에 대한 이름을 말해줬었지.


[네. 그런데 왜 눈보라 아가씨라고 불리는지는 말씀해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삽으로 눈을 퍼서 길가에 쌓은 뒤,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에클레어 양도 빗자루로 눈을 가장자리로 쓸어내며 말을 이었다.


“눈 오실 때도 봤지만 설탕 가루 뿌리듯이 잔잔하게 오는 눈이 아가씨의 원피스에 달린 장식들처럼 예쁘게 보였나 봐요. 눈보라 아가씨의 탄생 배경이죠. 또 우리는 정령의 나라라고 불리는 만큼 이 폭설도 정령의 힘이라고 믿고 있거든요.”


제법 흥미로운 요소다. 퀘백 국민들이기에 믿는 이야기 일 것이다. 제국 국민들이라면 현상에 대해서 조사하고, 분석하고, 실험하고, 이론을 구축할 것이다. 그리고 설화가 아니라 논문으로 세상에 발표될 것이다. 나는 이 내용들을 머리에 기억하여 기사로 쓰기 위해 에클레어 양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몽레알 뿐만 아니라 퀘백 전체에 알려진 설화입니까?]


“네. 왕의 산맥에서 태어난 거라 몽레알이 가장 유명하긴 하죠. 관련된 축제가 바로 페테 데 네이쥬 거든요. 나중에 관람하시면 알겠지만 조각상 중에서 우승이 제일 많은 얼음조각상이 동장군과 눈보라 아가씨에요. 여기서 한 명 더 등장하는 사람이 봄꽃 소녀랍니다.”


[봄꽃 소녀?]


“네, 딱 들어도 연상이 되세요? 비극적인 삼각관계가요? 동장군은 자신에게는 볼 수 없는 봄꽃 소녀의 따스함과 친절함, 넘치는 생명력을 존경하고 사랑하죠. 하지만 그들이 볼 수 있는 건 1년 중 딱 한번, 계절이 교체되는 짧은 한 순간이지요. 아무튼 지금은 봄꽃 소녀가 아니라 눈보라 아가씨가 더 중요하니까, 봄꽃 소녀는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눈보라 아가씨는 겨울 동장군 소속, 눈의 정령으로 사랑스런 하얀 아가씨랍니다. 겨울 가뭄에 한참 목말라 있을 이들에게 한 줌의 수분과 칼 바람 같은 매서운 추위에 잠시의 휴식 같은 포근함을 나누어 주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장난 가득한 함박눈을 선물로 주지요. 겨울 소속의 모든 정령들이 그녀를 아끼지만, 겨울 정령의 선두에 서 있는 동장군님은 그녀를 그저 자신의 소속에 속한 정령으로만 바라봤지요.


그런 동장군님을 바라만 봐도 좋았던 눈보라 아가씨는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동장군의 오른팔로써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녀요. 그리고 봄꽃 소녀를 사랑하는 동장군의 마음을 눈치채게 된답니다. 섬세하고 여린 눈보라 아가씨는 자신이 동장군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바로 그 순간에 깨닫고 심장이 얼어버릴 만큼의 충격을 먹어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이 좋아할 요소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었다. 눈보라 아가씨는 겨울을 관장하는 동장군을 사랑한다라. 그것은 병아리가 처음 본 어미 닭에 각인되는 현상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당연하다고 에클레어 양은 얘기했다. 설화치고는 세세한 설정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일까?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가 앗, 하고 놓쳐버린 부분을 잡아주었다.


[아직 폭설이 내리게 된 이유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에클레어 양도 그것을 알아채고 배시시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계절을 담당하는 대정령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계절의 전환기라 불리는 시기에 새로운 정령으로 재탄생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봄꽃 소녀는 오로지 혼자서 계절을 다스리기엔 너무 어린 담당자였어요. 나이며 힘이며 경험 면에서 무지막지 서툴렀던 소녀는 탄생의 축복을 내리기 만으로도 벅찼었죠(이름부터 봐도 느껴지겠지만 동장군과 눈보라 아가씨는 칭호에서부터 연식이 느껴지지 않나요?). 몽레알을 포함한 퀘백 국은 봄에 봄비가 내리지 않았고, 생명이 탄생하는 소중한 순간에 물이 부족해 가뭄으로 이어졌답니다. 착하디 착한 봄꽃 소녀는 말라가는 새싹과 물을 마시지 못해 죽어가는 아기동물들로 고민과 걱정을 하다 쓰러지게 되죠.


동장군은 봄꽃 소녀가 쓰러진 이유를 듣고 안타까워 자신의 심장을 쪼개 힘을 나누어주지만, 그 것은 계절을 담당하는 대정령의 금기. 한 계절이 다른 계절에 관여하는 것은 절대 불가 하게 되어있어요. 특히나 상성도 반대의 두 계절의 만남이니까요. 이치에 벗어난 사태와 그걸 알게 된 천신은 벌을 내리려 했죠. 이때 둘을 구한 정령은 길게 기른 자신의 머리를 싹둑 자른 눈보라 아가씨.


자신의 힘이 담긴 머리카락으로 하얀 옷을 만들어 입은 눈보라 아가씨는 봄이 오기 직전에 나타나 자신의 옷자락을 눈보라로 흩뿌렸어요. 눈이 수북이 쌓이고 호수며 강이며 산이며 물을 가득 머금었다가 봄이 되면 눈과 얼음이 녹아 물이 풍족해졌지요. 자기 계절에서 힘을 써 다른 계절에 영향을 끼쳤지만 관여한 것은 절대 아니었죠. 지혜롭게 행동해 천신의 노여움을 가라앉히지만 눈보라 아가씨는 그 이후로 다시는 동장군 앞에 나타나지 않게 되죠.”


이야기의 절정에서 에클레어 양이 입을 다물어 나도 모르게 결말을 재촉했다.


[……? 왜, 입니까?]


그녀는 내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선, 장난기 어린 얼굴로 비-밀이에요! 하고 빙글 돌아섰다. 어느새 길 가로 눈 무더기들이 한 가득 쌓여 있었다. 가로수 끝까지 길 정리를 끝내고 나니 해가 벌써 중천을 지나서 떠 있었다. 기울기로 봐서 오후 2시 즈음. 평소라면 티타임을 가질 시간이었다.



에클레어 양은 카페로 돌아가려다 말고 눈을 쌓아둔 길가로 걸어 올라가 눈을 뭉쳐 굴렀다. 치운 길을 제외한 나머지 땅들에는 여전히 쌓여있는 눈 덕에 금방 커다란 눈 뭉치가 되었고 금새 에클레어 양이 힘이 부칠 정도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무얼 하는지 넋을 놓고 보다가 얼른 다가가 그녀와 함께 말없이 눈을 굴렸다.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눈사람이라는 걸 만드는 모양이다. 눈덩이는 자꾸자꾸 커져서 카페 앞 테라스에 이르자 내 키보다 더 커졌다. 2미터는 돼 보이는 어마어마한 눈 뭉치였다. 에클레어 양이 굉장히 뿌듯한 얼굴로 동그란 원형이 되도록 쓰레받기로 다듬는 작업을 하였다.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지 추위에 발그레한 얼굴로 열심히 하는 모습에 나까지 그 분위기에 전염되는 것 같다.


때마침, 저쪽 눈길 청소를 끝낸 파이가 에클레어 양처럼 자기 덩치만한 눈덩이를 앞으로 굴리면서 나타났다. 파이가 올리는 것을 도와달라고 해서 나는 파이가 시키는 대로 파이의 눈 뭉치를 들어 올려 나와 에클레어 양이 만든 눈 뭉치 위에 성공적으로 올렸다.


에클레어 양이 그사이 부엌에 갔다 왔는지 도토리와 당근, 산수유 열매로 눈, 코, 입을 만들어 주고, 파이가 쓰고 있던 털모자를 눈사람 위에 씌었다. 에클레어 양도 푸른 목도리를 눈사람에게 둘러주었다. 나도 질 수 없어서 검은 빛이 도는 자갈을 주워 눈사람의 단추를 달아주었다. 우리 셋 다 어린 아이처럼 볼이며 손이며 빨갛게 물들인 채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왠지 나도 아까 그녀의 얼굴처럼 뿌듯한 미소로 눈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뿌듯한 미소를 보기 위해 시선이 옮겨갔다. 그러나 내 생각과 반대로 에클레어 양은 씁쓸한 미소로 눈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자신도 모르게 저런 표정을 짓곤 하였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눈물을 꾹 참는 듯 눈을 비비는 그녀를 보다 못해 나는 아까 청소하기 전에 그녀가 준 머플러를 목에 감아주며 화제를 전환했다.


[우리 이거 녹기 전에 기념사진 남기겠습니까?]


[와아! 좋은 생각이에요. 사진, 사진!]


파이가 외모를 급하게 다듬는다. 내가 삼각대를 설치하는 동안 계속 나를 빤히 쳐다보는 에클레어 양에게 동의하는지 시선으로 묻자 그녀는 머플러로 얼굴을 가리며 웅얼거렸다.


[화장도 제대로 안 했는데 레이디의 민 낯인 얼굴을 찍으려고 하다니 매너가 없으시네요.]


내가 타이머를 설정하고 그녀 옆으로 다가가 섰다. 파이는 눈사람 앞에 쭈그리고 앉아 브이자를 하며 함박 웃음을 짓는다.


타이머 직전 나는 그녀를 격려하고자 중얼거렸다.


[에클레어 양은 지금 그대로가 제 사진에 어울리니까 괜찮습니다.]


찰칵! 소리와 함께 추억이 사진에 그려진다.



그 후에 나는 눈사람 혼자는 심심해 보이는 거 같아 친구들을 만들어주기 위해 눈토끼와 눈천사를 만들어 발코니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파이에게 대충 어떤 모양인지 그림으로 보고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간단하고 재미있었다. 산수유로 토끼의 눈을, 터키석과 금빛 철사고리로 천사의 눈과 링을 만들고 토끼의 귀와 꼬리, 천사의 머리와 날개, 얼굴 표정까지 세심하게 다듬는 작업도 즐거웠다. 전에 기사를 쓰기 위해 도자기를 굽던 체험이 생각났다.


라운지에서는 파이가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 보였다. 셋이서 같이 놀았지만 파이는 추위에 약한 듯 혼자서 벽난로 앞을 떠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에클레어 양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한다. 나는 입김을 훅 내뱉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꿀을 넣은 따뜻한 우유들을 나눠주었다. 파이가 이게 바로 천국이네요 하며 한껏 늘어진 표정으로 좋아한다. 그것도 에클레어 양이 후후후 웃으며 하지만 월동준비는 이제부터인걸. 하고 말하기 전까지였지만 말이다.


에클레어 양과 파이의 설명에 의하면 카페 체리블로섬에는 카페뿐만 아니라 다양한 크고 작은 기능성 건물들이 몇 채 더 있다고 한다. 나는 오자마자 눈이 와 틀어박혀 있어서 몰랐지만 말이다. 목장과 곳간, 야외정원과 유리화원까지, 눈이 녹으면 천천히 구경할 생각에 가슴이 뛴다.


파이가 월동준비를 하는 작업을 설명해주었다. 목장은 열이 새지 않도록 두꺼운 천과 솜으로 작업을 하고 짚도 새 짚으로 갈아야 한다고. 특히 아기동물들이 겨울을 제대로 버틸 수 있도록 최대한 관리를 해줘야 한단다. 곳간은 겨우내 바람에 안에 있는 물건들이 상하지 않도록 구멍이 난 부분을 수리하고, 기름칠도 제대로 해야 하며 또 낮과 밤의 급격한 온도 차로 깨져 버릴 물건들을 카페 안 창고로 옮겨야 한다. 마지막으로 야외정원과 유리화원에 있는 식물들을 정령들의 힘을 빌려서 겨울을 무사히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령이라! 나는 이제껏 말로만 듣던 정령에 대해 상상을 해보았다. 그러는 동안 에클레어 양이 다시 지시를 내려준다.


[자, 오후에는 파이는 목장 쪽 작업을 부탁할게. 곳간 안에 필요한 물품들 다 있으니까 꺼내서 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나 불러. 에릭씨는 곳간 망가진 곳 손질 좀 해주시겠어요? 제가 정원이랑 유리화원을 정령들한테 부탁하고 곳간으로 갈게요.]


나는 호기심을 꾹 누르다 결국 참지 못하고 덥석 물어보았다.


[정령들을 다루십니까?]


에클레어 양이 친절히 대답해준다.


[네, 유스 제국과는 달리 퀘백국에서는 기계보다 정령의 힘을 이용하고 있어요. 정령석이라고 해서 정령을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금속이 있답니다. 정령이 현실에 머무를 수 있는 일종의 집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정령과 궁합이 잘 맞는 사람들이 계약을 맺은 정령들을 정령석을 통해 소환하죠. 혹시 정령을 보신 일이 한번도 안 계시나요?]


[네, 없었습니다. 제국에서 과학자라 불리는 연구가들에 의하면 퀘백국에서만 정령을 불러 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인건 아니겠지만 제국이 유독 과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또 연구자들의 논문 중에는 정령을 통하는 방법은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보다 비효율적이라는 내용도 있어서 효율적인 걸 좋아라 하는 제국민들이 더욱 과학을 발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내 설명에 에클레어 양이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으며 고민을 하더니 박수를 치며 대답한다.


[효율 면에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럼 백 번의 말보다 한번의 눈으로 보고 직접 판단해 보시겠어요? 보여줄 테니 같이 정원으로 가시죠. 파이는 작업 부탁해.]



카페 뒷문을 통해 나가자 파이가 치워놓은 눈 덕에 징검다리마냥 띄엄띄엄 박혀있는 돌길이 보였다. 돌길을 따라 걸어 가자 정원이 나타났다. 여름이었다면 누가 봐도 정성을 가득 담아 기른 꽃, 나무, 허브, 약초들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듯한 멋진 정원일 테지만 아쉽게도 겨울, 그것도 눈보라 아가씨의 눈 덕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이 넓은 정원을 에클레어 양과 파이 둘이서 가꾸는 것일까? 식물원처럼 구획이 나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밀조밀 심어져 있는 식물들이 아기자기해서 주인의 애정 어린 손길이 물씬 흘러 넘쳤다.


내 눈에는 그 자체로 훌륭해 보이는 정원을 에클레어 양은 일찍 작업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한껏 내비치며 식물들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어렸을 때의 일화를 또 이야기 해준다.


[아빠는 야생에서 데려온 아이들은 야생 그대로 키워줘야 한다며 눈이 오든 비가 오든 날씨에 상관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저와 파이는 항상 아빠 몰래 아이들을 관리해주고는 했어요. 나 참, 가꾸기 위해서 뽑아오셨으면 제대로 돌봐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에요? 아빠 덕분에 전 식물학 책을 열심히 읽고 가꾸다 보니 식물보호기사 면허증도 따버렸지 뭐에요.]


그녀는 나오기 전에 집무실의 서랍장에서 챙겨왔던 파이어스톤(불 속성 정령석이라고 가르쳐줬다.)에 숨을 불어넣었다. 불의 모양을 한 정령이 깜빡깜빡 하며 진하게 타올라 구체화 성공 후 그녀의 눈을 마주본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내가 감탄을 자아내자 뒤따라 나오던 파이가 쉬잇~ 하고 손가락을 입에 붙이고 조용히 속삭였다.


[정령을 불러낼 때는 집중력이 필요하거든요. 아가씨가 쉽게 불러내는 것 같아도 굉장한 집중을 요하고 있어요. 조용히 지켜봐 주세요.]


들리지 않는 말을 나누는 듯 입을 뻐끔거리며 정령과 대화를 하는 에클레어 양은 신비로운 느낌이 가득했다. 공기가 살짝 바뀌는 기분이 들면서 불 모양을 한 정령은 사람 눈처럼 생긴 부분을 깜빡깜빡 하며 빨갛게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정령석으로 돌아갔다. 그제서야 나는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턱을 쓰다듬었다. 불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은 생경했던 지라 팔에 소름이 돌았다.


눈이 왔을 때도 느꼈던 바지만, 같은 대륙인데도, 바로 이웃나라임에도 새삼 다른 차원으로 날라온 외지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정령을 다루던 에클레어 양이 힘을 가다듬으며 정령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나는 거의 기자의 습관적인 자세로 그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지만 여전히 마음은 싱숭생숭한 느낌이었다.


[불의 정령의 이름은 파루에요. 방금 제가 식물들에게 최소한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온도를 조절해달라고 부탁한 거구요. 몽레알에서는 정령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아요. 정령석에 종속된 하급 정령들은 계약한 조건에 따라서 계약자의 말을 듣고 힘을 빌려줘요. 물론 그 계약자가 정령에게 줄 수 있는 정신력의 양에 따라 계약 사항들도 조금씩 달라지고요. 저 같은 경우는 아빠보다 정령을 보거나 다루는 세심한 일을 잘 하곤 해서 정령석을 구하면 아빠가 저를 상징하는 계약자의 인을 새겨줘서 카페에 있는 정령석에 새겨진 인장은 다 저로 되어있답니다.]


머릿속으로 정령에 대해 메모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미로 같은 야외 정원들을 쭉 걸어 들어가면서 나무와 꽃들에 대한 이야기자루를 펼쳐놓았다. 나는 그녀에게 제국에서는 국가적으로 공원과 식물원에서 관리를 하고 개인적으로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은 돈이 굉장히 남아도는 취미를 가진 부자여야 한다며 설명했다. 그녀는 몽레알은 정원을 얼마나 잘 꾸미느냐가 중류층과 상류층을 나누는 경계선인지라 자신의 아빠만큼 극성만 아니라면 다들 저택에 작은 뜰이나 정원은 꾸미는 게 보통이라고 말했다.


[아빠가 취미를 한 번 가지면 끝장을 보셨거든요. 체리블로섬도 실제로 하나하나 설계부터 손 대신 거고, 여기 정원도 사실은 벚꽃 가로수 길부터 시작하셔서 유리화원으로 마무리 되었답니다. 체리블로섬이 원래는 여관이었다가 바리스타에 푹 빠지셔서 카페로 전향했지요. 취미를 직업이 될 때까지 배우시곤 하셨죠. 유리화원을 보시면 제 말을 이해 하실 거에요. 참고로, 소박하지만 아름답답니다.]


어조에서는 못 말리는 아빠에 대한 투덜거림이 묻어 나왔지만 그녀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하는 표정까진 숨기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빠를 따라서 바리스타 자격증이나 식물보호기사 면허증을 딸 수 없었을 테니까. 매형을 자랑할 때의 누나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흘러나온다.


[멋있는 분이시군요.]


내 칭찬에 그런가요? 히죽 웃어 보이더니 유리화원으로 안내한다.






작가의말

본격적으로 만능 돌쇠를 꿈꾸는 에클레어의 야망이 가득 들어간 이야기.


파이의 모델은 꼬마공주 유시의 큐브 같은 집사라


오타 검사차 제 글을 읽게 되면 이영아성우의 음성이 더빙된다는...


허나 파이는 큐브보다 건방짐. 잔소리 가득. 시어머니 레벨.


오타와 비평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말하지 않지만 선추코도 환영합니다.


저와 함께 천천히 걸어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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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6. 네 번째 손님. 플래토 몽 루이얄 골목의 예술가. 13.06.11 318 3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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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3. 세 번째 손님. 지하도시의 미로와 길 잃은 아이. 13.06.01 343 3 17쪽
9 #3. 세 번째 손님. 지하도시의 미로와 길 잃은 아이. 13.06.01 358 4 14쪽
8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3.06.01 245 3 17쪽
»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3.06.01 246 3 19쪽
6 #2. 두 번째 손님. 눈보라 아가씨와 늦은 월동준비. +1 13.06.01 391 4 13쪽
5 #1. 첫 번째 손님. 첫 만남. 그 이름은 에릭 윈체스터. +1 13.02.04 456 7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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