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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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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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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88,474

작성
11.05.26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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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로라시아 연대기 - 23.이단자 신학도의 역위치(5)

DUMMY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깜짝 놀랐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샤를은 언제나 최선의 방책으로 최선의 결과를 내는 인물이었다. 그가 무언가를 결심했다면 거기에는 항상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프레이르는 이 상황에서 샤를을 말릴 만한 자격이 없었다. 프레이르가 제시한 유화책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이상 프레이르로서는 샤를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옳은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포르테빌이 말했다.

“왕실이 뷔그노를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왕실이 교회의 수호에 앞장 서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리처드 대공이 준비하는 추문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포르테빌까지 샤를의 결정에 동의했다는 것은 프레이르로서는 샤를의 결정에 반대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웬만하면 피를 불러올 탄압 대신 원만한 해결을 원했다. 프레이르는 항상 ‘피는 마지막 선택이 되어야 한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교황청에서는 토론회의 원활한 진행과 뷔그노의 보호를 지시했는데요? 그 부분을 처리하지 않으면 뷔그노를 탄압할 명분이 없잖아요?”

프레이르는 탄압의 명분을 지적했다. 노련하고 유능한 국왕인 샤를이 이 부분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었지만 프레이르는 일단 말이라도 꺼내보자는 심산으로 샤를에게 말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샤를은 간단하게 프레이르의 말을 일축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책상 앞으로 다가가 그 위에 손을 짚으며 말했다.

“사실 나는 이 토론회가 우리의 의도대로 풀리지 않아 뷔그노에 대한 유화책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하나 더 준비해두었단다.”

프레이르는 다시 한 번 샤를의 노련한 정치적 감각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샤를은 마일러 교수가 나타나기 이전부터 이미 뷔그노들을 소탕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단 말인가? 샤를의 말에 따르면 그는 중추원 회의에서 프레이르를 지지해주며 대외적으로는 뷔그노에게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뒤로는 착실하게 뷔그노들을 일거에 제거할 비상수단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예전부터 프레이르는 샤를이 기만전술과 권모술수, 냉혹한 결단이 특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 앞에서 직접 그 실체를 보게 되자 경외심을 넘어서 공포까지 느꼈다. 샤를은 관용의 탈을 쓴 채 등 뒤로 날카로운 칼을 갈아 두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심복이라 할 수 있는 프레이르와 포르테빌까지 속여 넘긴 채!

“구체적인 방법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포르테빌 역시 샤를의 이 기만전술에 놀란 것 같았지만 프레이르만큼 당황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샤를과 행동해 온 그는 샤를의 온화한 미소 뒤에 숨겨진 냉혹성과 주도면밀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르테빌의 질문에 샤를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내용은 별것 없네. 교회는 이단자들을 불태우길 원하고, 그 이단자들은 그물 안의 물고기처럼 이곳에 모여 있지. 우린 그들을 한 번에 소탕하면 되는 거네.”

샤를이 말했다. 내용은 간단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만큼 핵심적인 방법은 모두 빠진 알맹이 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교황청의 지시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리고 세간의 비난은요? 아무런 명분도 없이 갑자기 뷔그노를 공격하면 왕실에 대한 신뢰는 땅에 떨어질 텐데요.”

프레이르가 샤를에게 물었다. 그 말에 샤를은 간단히 대답했다.

“그래, ‘아무런 명분이 없다면’ 말이지.”

샤를의 말이 이어졌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미 홀트 백작과 상의해서 준비를 갖춰두었단다. 내 명령이 떨어지면 지금이라도 실행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샤를이 대답했다.

프레이르는 샤를이 말하는 ‘명분’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홀트 백작이 관여되어 있다는 말에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비밀 치안대장이 제시할 명분이란 틀림없이 대단히 꺼림칙한 것일 터였다.

“홀트 백작이요?

프레이르는 가슴 안쪽에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며 샤를에게 물었다. 이제 보니 포르테빌 역시 영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또한 좋지 않은 낌새를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래, 홀트 백작이 우리에게 명분을 만들어 줄게다.”

샤를이 덤덤하게 말했다.

“혹시 마일러 교수를 암살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폐하?”

포르테빌이 미심쩍어하며 물었다. 그 말에 샤를은 손을 내저었다.

“허튼 소리. 암살이야말로 최악의 수일세. 이 상황에서 그를 암살하면 왕실의 권위가 뭐가 되겠는가?”

“호, 혹시나 하는 말씀에 질문을 드린 겁니다.”

포르테빌은 샤를의 말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포르테빌 역시 바보가 아닌 이상 샤를이 그런 자충수를 둘 거라 생각했을리 없었다.

“마일러 교수를 순교자로 만들어 줄 수야 없지. 그는 살아남아야 해.”

샤를은 다짐하듯 말했다. 마일러 교수를 암살할 경우 그 파장이 어떨지는 프레이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마일러 교수가 의문사한다면 이곳에 모인 모든 뷔그노들은 폭동을 일으킬 것이 뻔했다. 명분이 저쪽에 돌아가는 이상 그것은 확실히 최악의 수였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명분을 확보할 생각인가요?”

프레이르가 물었다.

프레이르의 물음에 샤를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비밀 치안대를 동원해 라시드 대주교를 살해할 것을 지시할 거란다.”


샤를의 말에 포르테빌은 기절초풍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다 그만 의자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대주교를 암살하겠단 말입니까?”

포르테빌의 말에 샤를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말도 안 됩니다!”

포르테빌이 소리쳤다. 그러자 샤를은 얼른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올려보였다. 포르테빌은 얼른 ‘합’하며 자신의 입을 가로막았다. 바로 옆 방에 라시드 대주교가 있는 상태에서 고래고래 대주교의 암살에 관한 이야기를 소리 지르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일단 진정하게.”

샤를이 엄하게 말했다. 그러자 다시 포르테빌은 입을 다물고 샤를의 말을 기다렸다.

“나라고 라시드 대주교를 제거하는 마음이 편하겠나? 하지만 방법은 이것 밖에 없어.”

“아무리 그래도... 대주교는 신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런 개죽음보다는 거룩하게 죽을 가치가...”

“주님의 교회를 지키기 위해 죽는 거네. 이보다 더 거룩한 순교는 없을 걸세.”

샤를은 포르테빌의 말을 일축했다. 그리고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

“라시드 대주교는 이단 심문관 시절 12명의 이단자를 불태웠네. 그는 분명 이 땅에서 이단자를 뿌리 뽑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은 희생해줄 거네.”

샤를의 말에 포르테빌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떨고 있었다. 성직자를 살해한다는 큰 죄악에 대해 그는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죄악입니다. 성직자를 살해한다니...”

“주님께서 용서하실 거네.”

샤를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네는 가만히 못 본 척하고 있으면 돼. 어차피 여기서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은 홀트 백작이지 자네가 아니니까.”

“하지만...”

샤를은 더 이상 포르테빌의 반대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결국 언제나 샤를의 명령에 복종하는 포르테빌은 자신의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포르테빌이 입을 다물자 지금까지 샤를과 포르테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프레이르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말씀은 라시드 대주교를 길거리에서 때려 죽인 다음, 그 죄를 뷔그노 측에 떠넘기겠다는 거군요. 이를 이용해 토론회를 중지시키는 동시에 분노한 성직자들과 그 패거리를 이용해 뷔그노들을 학살해버리고요. 왕실은 적당히 상태를 관망하다 천천히 개입하여 폭도들로부터 뷔그노들을 ‘보호’하면 되고 말이죠. 이로서 교황청의 비난도 피할 수 있겠네요. 아니, 애초에 폭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라시드 대주교가 죽은 상황이니 아무도 이 불미스러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겠군요.”

프레이르의 정리에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눈짓으로 프레이르에게 그렇다는 것을 표현해주었다. 프레이르는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고 눈을 감았다. 프레이르가 생각한 플롯은 정확히 샤를의 생각과 일치했다.

프레이르는 턱에 손을 올린 채 이것저것을 재보았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피를 흘리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뷔그노 측 교수들을 살리기 위해 전력을 다해 토론회를 준비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자신의 방침을 결심한 프레이르는 샤를에게 말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아요.”

“프레이르 전하!”

포르테빌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그런 포르테빌을 무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다만 이야기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해서는 뷔그노들의 분노가 대주교에게 집중될 만한 계기를 우리가 준비해야 될 것 같아요.”

“계기?”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되물었다. 프레이르는 천천히 대답했다.

“이 시기에 라시드 대주교가 갑자기 살해당하는 것은 어딘가 작위적이에요. 그 범인을 뷔그노로 단정 짓는 것도 조금 걸리고요.”

프레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모두가 보기에 라시드 대주교가 뷔그노에게 갑자기 살해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상황이 연출되어야 해요. 다시 말해서 대주교에게 뷔그노의 미움이 집중되도록 상황을 연출해야 해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그런 샤를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을 얘기했다.

“현재 상황에서 라시드 대주교가 뷔그노의 미움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면......”

프레이르는 토론회의 중단에 분개하던 뷔그노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토론회를 연기하는 게 가장 좋겠네요. 라시드 대주교의 명령으로 토론회를 다시 하루 더 연기한다면 뷔그노 측의 원성과 불만이 최고조에 이를 거예요. 이런 상황이라면 대주교가 뷔그노들에게 살해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죠.”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프레이르의 계획에 가타부타 이야기하지 않으며 묘한 눈초리로 프레이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편 포르테빌은 프레이르의 냉정한 제안에 섬뜩하다는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그는 프레이르의 입에서 이토록 냉혹한 말에 튀어나왔다는 것에 경악하고 있었다.

“제 제안이 그럴듯하지 않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셔도 좋아요.”

프레이르는 두 사람의 시선에 조금 당황하여 덧붙였다. 그러자 샤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네 제안은 아주 훌륭했다.”

샤를은 묘한 말투로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샤를은 여전히 충격에 빠져 있는 포르테빌을 불렀다. 이어 그는 포르테빌에게 옆방으로 가서 라시드 대주교에게 토론회를 하루 연기할 것을 명령하도록 지시했다.

프레이르 쪽을 응시하며 머뭇거리던 포르테빌은 샤를이 재차 명령하자 허겁지겁 밖으로 나갔다. 포르테빌이 사라지자 방 안에는 샤를과 프레이르 둘만이 남게 되었다.

샤를은 잠시 동안 이상한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응시했다.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면서도,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

프레이르는 조금 애매한 어조로 샤를을 불렀다. 그러자 샤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너는 너무 이르구나.”

샤를이 어색하게 입을 뗐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샤를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프레이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자 샤를이 설명을 덧붙였다.

“난 네가 살인에 관여하는 때는 이보다 훨씬 더 시간이 흐른 뒤라고 생각했거든.”

그제서야 프레이르는 샤를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샤를은 프레이르가 살인을 하나의 도구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살인에 대해 무덤덤하게 이야기한 프레이르를 바라보며 샤를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프레이르는 샤를에게 변명을 하려 했다. 하지만 샤를은 그런 프레이르를 가로막았다.

“변명할 필요 없다. 그것이야말로 네가 국왕으로서의 재목이라는 증거란다. 국왕은 될 수 있는 한 선을 행하되 악을 따름에 있어서 주저함이 있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설사 그것이 살인이라도 말이다.”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프레이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그 검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단지 나는 네가 이미 그 가르침을 깨닫고 있다는 것이 대견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조금 슬프구나.”

프레이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는 잠자코 샤를의 말을 경청했다.

샤를은 그런 프레이르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해서 쓰다듬고 있었다. 마치 살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아들을 격려하려는 듯이...


샤를과 대화를 마친 프레이르는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서는 포르테빌이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그는 프레이르가 방 바깥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얼른 프레이르에게 다가왔다. 아마도 그는 프레이르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전하?"

포르테빌의 말에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베로에게 조금 더 기다리라고 지시한 뒤 포르테빌과 함께 복도 한쪽 구석으로 갔다. 아무도 주변에 없는 것을 몇번이나 확인한 뒤 포르테빌이 말했다.

"정말 전하께서는 라시드 대주교를 암살하고 뷔그노를 학살하겠다는 계획에 동참하실 겁니까?"

포르테빌의 말에 프레이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달리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해야죠."

"하지만... 너무 많은 피가 흐를 겁니다."

포르테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피를 보는 것이 두려운가요, 친애하는 삼촌?"

프레이르의 말에 포르테빌은 조금 망설였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그는 결심한듯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면 받아들여야겠지요."

포르테빌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작정한 듯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걱정하는 부분은 바로 프레이르 전하 당신입니다."

"저요?"

프레이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포르테빌이 걱정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포르테빌은 아직 어린 자신의 조카가 경솔하게 결정을 내려 마음에 충격을 받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었다.

프레이르의 예상대로 포르테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겁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전하의 명령으로 수백 명이 학살 당하는 것을 보고도 마음을 굳게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살인이라는 것은 무거운 죄입니다. 그 무거운 죄를 안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요."

포르테빌의 말에 프레이르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삼촌은 제가 이런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서 국왕이 될 수 있다고 보나요?"

프레이르의 물음에 포르테빌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국왕은 절대 그 손에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포르테빌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력의 본질에는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왕가의 보검은 이러한 폭력성을 암시하는 물건이었다. 따라서 아무도 다치지 않게 만드는 권력이라는 것은 헛된 이상에 불과했다.

프레이르는 포르테빌에게 말했다.

"군주는 절대적인 신에게 많은 권리를 부여 받은 만큼 많은 의무를 지고 있어요. 백성을 보호해야 할 의무, 주님의 교회를 지켜야 할 의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할 의무, 그리고..."

프레이르는 자신의 오른손을 폈다. 그는 자신의 그 손바닥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때로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서슴지 않아야 할 의무에요."

프레이르는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이번에는 포르테빌에게 들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마치 '제 손에 묻어 있는 피를 봐요'라고 농담을 하는 것처럼 잠깐 동안 미소를 지어보였다.

프레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전 이 나라의 왕자에요.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고작 죄의식 따위에 사로잡힌다면 그거야말로 주님께 죄를 짓는 거겠죠. 저는 필요하다면 뷔그노 3백 명이 아니라 3천 명이라도 화형대에 세울 수 있는 것이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프레이르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결단을 회피하는 것은 비겁한 행동이에요. 저는 그런 비겁자가 되고 싶지 않아요. 군주라면 그래선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죠. 군주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결단을 망설여서도 안 돼요."

프레이르의 답변에 포르테빌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너무나도 훌륭하고 뜻깊은 말에 그는 감탄했다. 동시에 그는 아까 라시드 대주교의 암살에 맹목적으로 반대했던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프레이르에게 이 정도의 각오가 감추어져 있으리라 그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그러니까..."

프레이르가 싱긋 웃어보였다.

"삼촌은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언제나처럼 태평하면서도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그 사랑스러운 미소에 포르테빌은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프레이르의 그 미소는 부드러웠지만 굳은 결심을 품고 있었기에 포르테빌은 마음 속 깊숙이 안심이 되었다.

"자, 이만 돌아가죠."

프레이르가 포르테빌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알베로 경이 있던 곳을 향해 힘찬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포르테빌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가명을 받았다. 이 나이에 저토록 깊은 생각과 국왕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춘 인물은 드물었다. 프레이르의 훌륭한 대답에 포르테빌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이 소년이 언젠가 샤를을 넘어서는 위대한 군주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그를 뒤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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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17 나니아
    작성일
    11.05.26 03:37
    No. 1

    중반이후를 보기 전까지는 얘네가 부자였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만 다시 부자 관계 회복! 이제야 좀 아빠랑 아들 같아 보이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유정
    작성일
    11.06.03 01:28
    No. 2

    흐 작가님 완전 존경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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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2) +10 10.08.15 1,494 23 21쪽
59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1) +6 10.08.14 1,488 2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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