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2)
코라와 대화가 끝난 것은 광장에 위치한 종이 9시가 된 것을 알리기 위해 타종되었을 즈음이었다. 하루의 끝을 알리는 이 종소리는 광장을 가득 메운 연인들과 술집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주정꾼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 때문에 대다수의 아라스 시민들은 이 소리를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언제 한 번 우리 집에 오라고.”
코라가 프레이르에게 손을 흔들며 유쾌하게 말했다.
“분명 메르센이 기뻐할 거야.”
“언제 불쑥 찾아갈지 모르니까 각오하고 있어요.”
프레이르가 씩 웃으며 코라에게 말했다. 코라는 턱 아래로 길게 난 수염이 흔들리도록 껄껄 웃으며 이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그는 거나하게 취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모습에 집까지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이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그런 코라의 모습을 많이 봐왔던 프레이르는 별달리 걱정을 하지 않으며 알베로와 함께 남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광장에서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일행이 머무르기로 한 시청 공관으로 향했다. 본래 시청 공관은 공적인 업무로 방문한 손님이 머무르도록 만들어진 건물이었지만 프레이르는 특별히 아라스의 시장에게 일행의 방을 마련해달라고 요청해두었기 때문에 오늘 하루 그곳을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
항상 규칙에 대해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루크는 이러한 프레이르의 행위를 가리켜 ‘직권남용’이라며 비난했지만 비공식적이긴 해도 샤를이 내려준 임무를 받고 있었던 프레이르는 루크의 비난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그리고 그는 ‘권력은 이럴 때 휘두르라고 존재하는 거야.’라며 둘러대었다.
아무튼 감히 왕자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아라스 시장은 오늘 하루밤을 위해 공관을 통째로 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하인들과 하녀들을 공관으로 보내어 프레이르의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도록 명령했다. 오늘 공관에 머무르게 될 사람들은 레인가드의 거물 2세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서 프레이르와 알베로는 일행이 있던 술집이 아닌 공관으로 가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조금 피곤했지만 오늘 얻어낸 성과에 대단히 만족했기 때문에 유쾌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요, 알베로?”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며 프레이르가 알베로에게 물었다. 프레이르의 질문에 알베로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그는 사려 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마도 레미엔 상인조합은 무언가를 구매하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호오? 그 이유는?”
프레이르가 흥미가 간다는 듯이 알베로에게 물었다. 알베로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라스 금화에 대한 유통은 레미엔 상인조합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베로의 말에 프레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추측과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코라와의 대화를 통해 프레이르는 알베로와 마찬가지로 레미엔 상인조합이 무언가를 독점적으로 구매하려고 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가설은 결정적인 증거를 포착하고 있었다.
“아라스 금화에 금 함유량이 높아졌다... 그런데 그 순도가 높아진 금화를 갖고 있는 것은 오직 레미엔 상인조합뿐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재미있어지죠. 같은 아라스 금화 30냥이 어음이나 채권에 기록되어 있다 하더라도 여타 상인조합의 채권보다 레미엔 상인조합의 채권 쪽이 훨씬 가치가 높죠. 갖고 있는 금화에서 질적인 차이가 나버리니까요. 이것은 곧 레미엔 상인조합의 구매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하고요.”
프레이르의 말에 알베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의 말을 이었다.
“레미엔 상인조합은 분명 조만간 아라스 금화의 금 함유량이 높아진다는 중추원 회의 결과를 시중에 뿌릴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상품의 매도자에게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 측에 물건을 넘기십시오. 우리는 금이 더 많이 함유된 신(新) 아라스 금화로 결재할 겁니다. 만약 다른 상인조합과 거래를 한다면 당신들은 금화의 금 함유량만큼 손해를 보는 셈이니 우리와 거래를 하는 것이 당신들에게도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신(新) 아라스 금화는 여전히 아라스 금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으니 말이죠.”
프레이르가 덧붙였다.
“아라스 금화이긴 아라스 금화인데 가치는 훨씬 더 높은 아라스 금화... 그것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은 레미엔 상인조합... 다른 상인조합들은 도저히 경쟁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이 신(新) 아라스 금화를 다른 이름으로 바꾸어 단테스 금화라던지로 이름을 붙여버리면 상관이 없겠지만 알타미라 후작은 금화의 금 함유량만을 바꾸자고 제안을 했으니까요. 금화가 본격적으로 유통되기 전, 몇 주 동안은 이런 기형적인 상태가 지속될 테고 그것은 그 기간 동안 레미엔 상인조합의 구매력 상승을 의미하죠. 상품의 매도자들도 신(新) 아라스 금화 쪽을 일반 아라스 금화 쪽보다 선호할 테니... 결국 그들은 신 아라스 금화의 유통을 틀어막고, 이 짧은 기간을 이용하여 무언가를 대량으로 구매하려는 속셈이 틀림없어요.”
프레이르가 결론 내렸다. 알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을 구매하려는지도 대충 짐작이 가요.”
프레이르가 확신어린 어조로 말했다.
“아마도 대단한 고급품이면서도 물량이 많은 것이겠죠. 밀이나 포도주 따위는 절대 아닐 거예요.”
“그런 물품을 사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입니까?”
“그래요. 닭 잡는데 소 잡는 칼 쓰는 셈이죠. 이익을 많이 남길만한 사치품을 사려는 것이 분명해요. 가치가 낮은 은화가 아니라 금화를 조작한다는 것도 그 증거죠. 그리고 그 사치품은 물량이 많으며 부피를 많이 차지하는 것이 분명해요.”
프레이르의 말에 알베로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알베로가 묻자 프레이르는 씩 웃었다. 그리고 그는 오후에 있었던 레미엔 상인조합의 방문을 상기시켰다.
“아까 레미엔 상인조합을 방문했을 때, 베아트리체가 말했잖아요. 레미엔 상인조합이 창고를 확장하고 있다고요. 금괴나 은괴, 혹은 보석 같이 부피를 적게 차지하는 물건이라면 창고까지 확장할 필요가 있겠어요? 그 비싼 관세까지 물어가며?”
프레이르의 말에 알베로는 대단히 감탄했다. 프레이르의 말대로 레미엔 상인조합은 창고를 확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언가 부피가 큰 물건을 대량으로 들여온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피가 크면서도 값이 많이 나가는 사치품이라면 대충 짐작이 가죠?”
프레이르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알베로는 프레이르가 말하려는 바를 짐작했다.
“하시에르에서 수입되는 향신료, 차... 그리고 비단... 혹은 에우로텐에서 수입되는 커피와 담배...”
“맞아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아라스 금화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금화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갑자기 그런 사치품들을 사들일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거야 차차 조사해 보면 나오겠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알타미라 후작과 레미엔 상인조합의 목적을 간파했다는 점이에요. 덕분에 오늘 밤은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게 되었고요.”
프레이르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오늘의 임무를 마치게 되자 갑자기 졸음이 몰려 오는 것 같았다. 그는 얼른 공관으로 돌아가 잠을 자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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