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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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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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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1.05.10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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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로라시아 연대기 - 베아트리체의 장난

DUMMY

토론회는 오늘로 나흘째를 맞이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10시에 시작된 토론회는 중간에 점심 시간을 위해 2시간 휴회 하는 것을 제외하면 밤 8시까지 지겹도록 진행되었다. 때때로 성당 내부의 더위와 불편한 좌석 때문에 노령의 성직자들은 혼절하여 밖으로 실려 나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먼저 자리에서 뜰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설사 그들은 이 자리에서 쓰러져 이곳을 무덤으로 삼는다 할지라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어째서 샤를이 종교 문제에 깊이 관여하길 꺼려했는지 알 것 같았다.

끔찍할 정도로 길게 느껴졌던 오전의 토론회가 끝난 뒤 프레이르와 일행은 성당 뒤편의 정원에 앉아 점심 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아...”

프레이르는 뒤로 털썩 누워 잔디밭에 등을 댔다. 그리고 그는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이틀이나 더 이 짓을 해야 한다니...... 대주교의 말이 맞았어. 지옥은 실재하는군.”

프레이르의 말에 잔디밭에 앉아 있던 일행들이 웃었다. 베아트리체와 에버딘은 입을 가린 채 품위 있는 웃음을 지으며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카린은 늘 그렇듯이 천박하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토론회에 참석하지 않은 베아트리체와 에버딘, 카린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프레이르와 그 일행을 위해 그녀들이 점심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일전에 프레이르가 선물해준 드레스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 그녀들의 설명이었지만 실제로는 요즘 들어 토론회를 비롯하여 온갖 일에 치인 프레이르와 알베로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기 위한 배려였다.

그녀들의 사려 깊은 배려 덕분에 프레이르는 오늘 점심은 검은 빵을 물에 녹인 묽은 죽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교회 측에서 토론회의 참석자를 위해 제공해 주는 검은 빵은 평민 가정에서 15년을 보낸 프레이르조차 입에 대기 싫을 정도로 질이 낮은 호밀로 구워진 것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곰팡내와 비슷한 수상한 냄새가 나는 그 호밀빵을 사흘 동안 계속 먹으니 프레이르는 위가 쓰릴 지경이었다. 보는 눈이 있고, 교회에서 만찬을 즐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에 참고 먹긴 했지만 정말이지 끔찍한 식사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베아트리체와 에버딘이 알타미라 가문에서 점심 식사를 가져왔을 때 그는 두 사람이 성모와도 같이 느껴졌다.

“아아...... 정말 돌아가기 싫어라...... 여기서 낮잠이나 잤으면.”

프레이르가 발을 구르며 투정을 부렸다. 그 어린 아이 같은 모습에 에버딘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고, 베아트리체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맨바닥에서 자면 감기 걸려요. 여기 깔아 놓은 자리 위에서 주무세요.”

베아트리체가 자신의 옆자리를 비워주며 말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손을 내저었다.

“별로 넓지도 않은 자리를 저 혼자 누워서 차지하면 너무 이기적이죠. 그냥 바닥에 누워서 자야겠어요.”

프레이르는 두 손을 깍지 끼우며 머리 뒤로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청명하기 그지없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날씨에 성당 안에서 지겨운 토론이나 지켜봐야 하다니... 프레이르는 앞으로 있을 괴로운 시간을 상상하자 우울해졌다.

프레이르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이자 베아트리체는 입가에 손을 올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동안 프레이르와 에버딘, 그리고 알베로 쪽을 번갈아 가며 살펴보던 그녀는 이윽고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에 장난스런 미소를 걸쳤다.

곧바로 그녀는 카린을 불러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베아트리체는 프레이르와 에버딘, 그리고 알베로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제안했고, 카린은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곧 카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베아트리체의 계획에 찬동하였다.

카린이라는 원군을 얻은 베아트리체가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이르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이르 옆에 앉으며 마치 실수인 양 옆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툭 건드려 엎질렀다. 그 바람에 베아트리체의 치마는 온통 물로 젖고 말았다.

“어머!”

에버딘이 깜짝 놀라 베아트리체를 바라봤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괜찮다는 손짓을 한 다음 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느긋한 손놀림으로 치마를 닦았다.

잠시 동안 치마를 적당히 닦는 시늉만 한 뒤, 베아트리체가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그렇게 주무시면 손이 저리고 목도 뻐근하실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베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프레이르는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두 눈에 푸른 가을 하늘 대신 베아트리체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 기대감에 차 있는 표정을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가 또다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금방 일어날 거고.”

베아트리체의 장난을 회피하기로 마음먹은 프레이르가 대답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손사래를 쳤다.

“가을철에 함부로 잔디밭에 누워서 자면 병에 걸릴 수도 있어요. 최소한 자리는 깔고 주무셔야죠. 그렇죠, 카린?”

“그럼. 물론이지. 잘못하다간 열병에 걸려 크게 앓을지도 몰라. 가을은 지면의 열기가 바다로 빠져나가는 계절이니까.”

카린이 베아트리체를 거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수상쩍은 움직임을 눈치 챈 프레이르는 그들의 작전에 넘어가지 않았다.

“전 정말 괜찮아요.”

프레이르가 오른손을 내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아니에요, 전하. 젊다고 해서 몸을 함부로 다루면 병에 걸리기 쉬워요. 그리고 전하께서는 전하 한 몸이 아니라 이 나라의 모든 사람을 위한 분이시니까 몸을 소중히 다뤄야 하고요. 그렇죠, 카스티야 백작님?”

베아트리체가 이번에는 알베로의 동의를 구했다. 알베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눈가를 가늘게 떴지만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요. 고집 부리지 말고 이리 오세요.”

베아트리체와 카린이 프레이르의 팔을 잡아끌었다. 프레이르는 ‘어어’하며 ‘잠시만요’라고 다급하게 말렸지만 두 사람은 그 요청을 듣지 못한 척했다. 그 덕분에 프레이르는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질질 끌려 돗자리 위로 올라왔다.

“베, 베아트리체 양도 상당히 끈질기네요.”

프레이르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두 사람의 속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굳이 돗자리 위로 끌고 와 재우려 한다면 그대로 당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베아트리체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어쨌든 프레이르는 지금 한숨의 단잠이 너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실례할게요.”

프레이르는 두 손을 깍지 끼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그는 아까처럼 자리에 누우려 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가 프레이르를 재빨리 붙잡았다.

“그렇게 대충 누워버리면 기껏 여기까지 올라온 보람이 없죠.”

베아트리체의 말에 엉거주춤하게 반쯤 눕는 자세가 된 프레이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예 침대까지 깔아주시려고요?”

프레이르의 물음에 베아트리체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어도 전하의 침대보다는 훨씬 더 좋을 거예요.”

베아트리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녀는 에버딘을 일으켜 세운 뒤 그녀를 프레이르의 머리맡으로 데려갔다. 에버딘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동안 그녀는 에버딘을 프레이르의 머리가 있을 자리에 앉혔다. 그 순간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의 속셈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프레이르가 뭐라 항변할 새도 없이 베아트리체는 프레이르의 머리를 익숙한 손놀림으로 받치며 에버딘의 무릎 위에 살포시 눕혔다. 프레이르의 몸을 받치던 두 팔은 어느새 프레이르의 옆자리로 다가온 카린에 의해 이미 봉쇄된 상태였다. 결국 프레이르는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머리를 에버딘의 부드러운 무릎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프레이르의 머리가 에버딘의 무릎에 닿자 알베로의 얼굴이 무섭게 일변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분노로 새빨갛게 변했다. 한동안 어리둥절하던 에버딘은 그제서야 상황이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불처럼 달아오른 그녀는 비명을 내지르며 무릎을 뺐다. 그 바람에 프레이르는 ‘쿵’하며 땅바닥 위에 머리를 찧고 말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베아트리체와 카린이 박장대소했다.

“뭐, 뭐하는 겁니까!”

프레이르가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며 외쳤다. 그러자 베아트리체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전하께서 너무 불편한 자세로 주무시려는 것 같기에 무릎베개를 해드리는 것이 어떨까 해서요.”

베아트리체의 능청스러운 대답에 에버딘 못지 않게 당황한 프레이르가 항변했다.

“전 괜찮다니까요!”

프레이르가 소리치자 카린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방금 전 베아트리체가 말했던 핑계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대답이었다.

“당신의 몸은 당신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모든 백성의 것이...”

“카린 당신도 미리 준비했던 대답 꺼내지 말아요!”

프레이르가 꽥 소리를 질렀다. 프레이르의 말에 카린과 베아트리체가 더욱 키득거렸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에버딘은 9월의 태양보다 더욱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자극했더라면 머리에서 김이 날 지경이었다. 남자에게 무릎을 허락한 적이 있을 리 없는 그녀였기에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의 장난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에버딘이 민망해 하는 것 안 보여요?”

프레이르가 에버딘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더욱 너스레를 떨며 대답했다.

“설사 민망하더라도 에버딘 양은 전하의 몸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니 기꺼이 무릎을 내줄 거예요. 그렇죠?”

베아트리체의 말에 프레이르가 투덜거렸다.

“그렇게 제 몸이 걱정 되면 베아트리체 양이나 카린 양이 무릎 베개를 해주면 되잖아요.”

프레이르의 말에 베아트리체가 키득거렸다.

“저야 전하를 제 무릎 위에 눕히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지만 어리석게도 주전자를 무릎 위에 엎지르는 바람에 치마가 온통 축축해져서요.”

베아트리체는 아까 엎지른 물로 축축해진 치마를 들어 올려 보이며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그리고 카린은 ‘어머, 이 여린 다리 위에 머리를 올려놓겠다고? 나 같이 어린 소녀한테?’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 준비된 대답에 프레이르는 ‘크’하며 치를 떨었다. 이 두 영악한 여인네들은 치밀한 계산 하에 프레이르와 에버딘에게 물을 먹이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었다. 아까의 그 일은 모두 실수를 가장한 계획의 일부였다.

물론 에버딘에게 무릎베개를 받는 것을 고사할 만큼 프레이르는 성자가 아니었다. 에버딘의 무릎베개라면 공작 작위를 던지고서라도 얻을 만한 호사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병적으로 여동생을 아끼는 알베로의 앞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누이동생의 일이라면 짚을 지고 불에라도 뛰어들 알베로 앞에서 에버딘에게 무릎베개를 시키려는 것은 상당히 악랄한 장난이었다.

프레이르는 알베로 쪽을 바라보았다. 알베로는 입술을 꼭 다문 채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인 프레이르에게 최대한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그 잡아먹을 듯한 눈빛은 숨길 수 없었다. 그 냉혹한 연갈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사이 베아트리체는 카린과 함께 에버딘의 옆에서 은밀하게(그러나 프레이르와 알베로가 들을 수 있도록) 에버딘을 꼬드기고 있었다. 그녀들은 에버딘의 양 옆에 앉아 어쩔 줄을 몰라하는 에버딘의 손을 꼭 잡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에버딘 양.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 뭐에요? 심신이 피곤한 프레이르 전하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어요?”

카린 역시 에버딘의 옆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녀는 작정한 듯 베아트리체를 거들었다.

“저 왕자는 나흘째 이 토론회 때문에 노심초사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잤지. 저 수척한 얼굴을 보라구. 그게 다 이 나라의 국민들을 위해 노력하는 건데 어떻게 딱딱한 맨 바닥 위에서 재울 수 있겠어?”

카린의 말에 에버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무릎을 꽉 붙들고 있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가 더욱 밀어붙였다.

“프레이르 전하를 위한 일이에요. 설마 에버딘 양은 정말로 전하께서 저런 불편한 자세로 낮잠을 자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

베아트리체의 말에 에버딘은 고개를 들어 프레이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연갈색의 눈동자에는 곤란해 하는 기색이 역력히 머물러 있었다.

에버딘의 그 모습에 프레이르가 말했다.

“에버딘이 곤란해 하고 있잖아요. 이제 그만 해요.”

“무슨 소리야? 아직 당신은 제대로 쉬지도 못했는데.”

카린이 악의가 듬뿍 담긴 미소를 씩 지으며 프레이르를 걱정하는 척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카린이 프레이르 자신의 건강 따위는 반 푼어치 만큼도 걱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프레이르를 걱정했다면 베아트리체의 이 짓궂은 장난에 동참하지 않았어야 했다.

프레이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공주님을 구하는 기사마냥 정의감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서 두 사람의 장난을 말리지 않는다면 알베로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신뢰하는 비서관에게 사소한 원한 때문에 등 뒤에서 칼침을 맞는 것은 절대로 사양하고 싶은 일이었다.

“그만 하라니까요. 더 이상 에버딘을 놀리면 저한테도 생각이 있어요. 에버딘이...”

“좋아요...”

잠자코 앉아 있던 에버딘이 처음으로 입을 열며 프레이르의 말을 뚝 잘랐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마치 달려가는 말의 고삐를 놓친 마부처럼 미리 생각해 두었던 변명거리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그가 놓쳐버린 변명은 순식간에 망각의 저편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와 동시에 프레이르는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좋아... 뭐?”

프레이르가 얼빠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에버딘은 부끄럽다는 듯 두 손을 무릎 위에서 꼼지락거리며 속삭이듯 말했다.

“제 무릎을 베고 주무셔도 돼요.”

에버딘의 대답에 베아트리체와 카린은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혼신의 힘을 다하며 배를 움켜쥐고 입을 막았다. 순진한 에버딘을 간단히 속여 넘긴 그녀들은 자신들의 장난이 성공했음을 확신하고 킥킥거렸다. 그리고 그녀들은 프레이르와 알베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머리 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그 아름다운 눈동자들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두 남자에게 맞추었다.

그녀들의 열렬한 눈빛에 거북해진 프레이르가 베아트리체 쪽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항변을 해보았다.

“에버딘의 목소리를 흉내 내서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어요. 안 속아요.”

프레이르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키득거리며 프레이르를 무시했다. 카린은 고개를 돌린 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젖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참아내고 있었다.

프레이르에게서 대답이 없자 에버딘의 얼굴이 더욱 새빨개졌다.

“죄, 죄송해요. 제가 주제 넘게...”

에버딘은 자신의 무릎에 손을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물론 전하께서 싫으시면 저는......”

에버딘의 자신 없는 말에 이번에는 프레이르가 쩔쩔 맬 차례였다. 에버딘이 용기를 내 이렇게까지 말해 줬는데 프레이르가 극구 사양하는 것도 에버딘에게 창피를 주는 일이었다. 베아트리체와 카린의 농간에 보기 좋게 넘어가는 셈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를 노려보았다. 오늘의 일은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미의 눈빛이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그 눈빛을 거리낌 없이 받아넘겼다. 오히려 그녀는 더욱 짓궂게 말했다.

“숙녀를 기다리게 할 생각이세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프레이르는 자신의 패배를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알베로의 눈치를 보았다. 알베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프레이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버딘 본인이 허락했으니 본인은 아무런 반대를 하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였지만 그 눈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누, 눈으로 경고하고 있어.’

프레이르는 다시 한 번 오한을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시 방석에 앉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두 명의 여인네와 살쾡이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오라버니 앞에서 절세의 미녀에게 무릎베개를 받는 것은 생각만큼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에버딘에게 무릎베개를 받는 꿈 같은 호사 속에서도 프레이르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점심으로 먹었던 스튜가 뱃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프레이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잠은 저 멀리 달아난 뒤였다. 적어도 피로를 달랜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우울한 기분을 애써 무마했다.

“그럼 실례할게.”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 말했다. 에버딘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무릎을 내주었다.

프레이르가 머리를 눕히자 포근하고 부드러운 허벅지가 그 머리를 감쌌다. 에버딘은 잔뜩 긴장하여 몸이 굳어진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무릎은 너무나 기분이 좋았다.

‘이, 이거... 위험한데...’

프레이르는 상상 이상으로 부드러운 에버딘의 무릎에 당황했다. 마치 동방에서 수입해 온 비단과도 같이 부드러운 감촉이 목덜미 너머로 느껴졌다. 포근하면서도 탄력 있는 그 느낌이 곧바로 전해지자 프레이르는 머리털 하나하나가 곤두서는 것 같았다.

프레이르를 괴롭히는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프레이르가 무릎에 눕자 에버딘의 수줍으면서도 부드러운 시선이 프레이르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국이 되었다. 그녀는 부끄러움과 따뜻함이 담긴 눈빛으로 프레이르를 내려 보고 있었는데 프레이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그 사랑스러운 반응이 계속되자 프레이르는 이성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결국 프레이르는 이성의 끈을 놓쳐버리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 어딜 가시려고요? 조금 더 쉬시지 않고.”

베아트리체가 영문을 모르는 척하며 능청스럽게 물었다. 프레이르는 이때만큼 베아트리체가 마녀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

“들어가서 다음 토론회를 준비하려고 해요. 불만이에요?”

프레이르가 씩씩거리며 대답했다. 그 얼굴은 새빨개진 채 굴욕감에 젖어 있었다.

“이만 가 봐요, 알베로 경.”

프레이르가 알베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호위 기사도 없이 성큼성큼 대성당 쪽으로 향했다. 그제서야 알베로는 마귀처럼 굳어졌던 얼굴을 겨우 풀고 프레이르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교회 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베아트리체와 카린은 서로를 마주보며 깔깔거렸다.

“저 녀석, 영악한 줄로만 알았더니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사실 숙맥 아니야?”

카린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프레이르 전하는 국왕 폐하와 마찬가지로 함부로 여자를 가까이 하시지 않으니까요. 아직까지 한 번도 여자를 안지 않았다는 소문이 있어요.”

“세상에 어느 왕자님이 그런 금욕적인 생활을 하겠어? 얌전한 고양이가 식탁 위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 몰라? 분명 뒤로는 인생을 즐기고 있겠지.”

카린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베아트리체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믿기지 않지만 사실인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롱에서 아무런 소문이 돌지 않았으니까요. 살롱이 조용하다는 것은 곧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뜻이 되죠.”

베아트리체의 말에 카린의 입이 벌어졌다. 수십 년을 살아온 그녀가 살롱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그게 정말이야?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게 사실이에요.”

베아트리체가 덧붙였다. 그러자 카린이 말했다.

“정말 샤를과 판박이네. 이 방탕한 궁전에서 쾌락을 찾지 않는 게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카린이 놀라며 말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것이 프레이르 전하가 쾌락을 찾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뜻은 아니지만요.”

베아트리체의 의미심장한 말에 카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카린이 베아트리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은 채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프레이르가 사라진 성당의 문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토론회의 재개를 의미하는 두시 종이 울려 퍼지자 일행은 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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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2) +6 10.09.16 1,215 23 16쪽
75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1) +7 10.09.13 1,353 23 18쪽
74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4) +7 10.09.12 1,352 24 22쪽
73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3) +6 10.09.08 1,298 25 9쪽
72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2) +8 10.09.05 1,287 27 13쪽
71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1) +8 10.08.31 1,382 24 20쪽
70 로라시아 연대기 - 세자르의 보고 +14 10.08.28 1,353 26 4쪽
69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3) +12 10.08.27 1,375 33 21쪽
68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2) +6 10.08.26 1,339 33 14쪽
67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1) +8 10.08.24 1,362 41 20쪽
66 로라시아 연대기 - 아라스에서 맞는 아침 +7 10.08.23 1,404 28 11쪽
65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3) +8 10.08.22 1,402 23 12쪽
64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2) +12 10.08.21 1,385 27 8쪽
63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1) +7 10.08.18 1,419 26 15쪽
62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4) +15 10.08.17 1,483 24 19쪽
61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3) +7 10.08.16 1,453 19 16쪽
60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2) +10 10.08.15 1,494 23 21쪽
59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1) +6 10.08.14 1,488 2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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