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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656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0.08.24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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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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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글자
20쪽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1)

DUMMY

알타미라 후작 가문의 집사인 레메리오는 30년의 세월 동안 알타미라 후작 가문을 섬겨왔다. 알타미라 후작이 아직 가문을 물려받기 전, 후작의 마부로 출발한 그는 남달리 빠른 일처리와 성실한 태도로 후작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몇 년 뒤 집사로 임명 되었다. 집사가 된 지 15년이 흐른 지금, 그는 이미 50대를 넘어섰지만 그는 여전히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알타미라 후작 가문을 위해 온 몸을 바쳤다.

알타미라 후작은 레메리오의 이러한 충성심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신임하고 있었다. 하인들에게 너그러운 후작은 레메리오에게 집안에 관련된 전권을 위임하였으며 되도록 그것에 관해 간섭하지 않으려 했다.

레메리오는 어느 때보다도 주방을 독촉하여 저녁을 차리도록 명령했다. 며칠 전 들어온 하인들은 알타미라 후작의 온화한 성품에 마음을 놓았는지 항상 식사 준비를 느긋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편안하게 풀어주면 항상 이 모양이라고 투덜거리며 레메리오는 식탁 위에 음식들을 가져다 놓으라고 지시했다.

“어머, 벌써 식사 준비가 되었나요?”

베아트리체가 이미 식기가 차려진 식탁을 보며 레메리오에게 물었다. 이 아름다운 아가씨의 물음에 레메리오는 공손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아직입니다, 베아트리체 아가씨. 하인들에게 조금 더 서두르도록 말하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식당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찾으러 온 것이니까요.”

베아트리체가 웃으며 레메리오에게 말했다. 그녀는 식당의 한쪽 구석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의자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책을 읽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여행을 다녀오셨는데 피곤하시지 않으십니까, 아가씨?”

레메리오는 베아트리체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전혀요. 오랜만에 바깥 바람을 쐬어서 오히려 너무 기분이 좋은 걸요. 집사 영감도 언제 한 번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어때요? 제가 아버지께 말씀 드려 볼게요.”

“저는 괜찮습니다, 아가씨. 알타미라 후작 가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노집사가 허리를 굽히며 말하자 베아트리체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작게 웃어 보인 뒤, 책에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더없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하인이 레메리오에게 다가와 모든 요리가 준비되었다는 것을 알렸다. 레메리오는 그 하인에게 후작 내외와 세자르 도련님을 모셔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다른 하인에게는 요리를 식당으로 가져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책에 열중해 있는 베아트리체에게 식사 준비가 완료되었다고 말했다.

“딱 적당한 시간에 맞추었네요. 역시 레메리오 집사에요.”

베아트리체가 더없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책장을 덮었다. 그리고 그녀는 촛불이 놓인 식탁의 한쪽 가장자리에 가서 앉았다.

“오늘은 무슨 요리를 준비했나요?”

“후작님께서 달걀이 드시고 싶다고 하셨기 때문에 메추리알과 채소를 후추와 함께 삶은 요리를 만들도록 지시해 두었습니다.”

“어머, 그래요? 아버지께서 갑자기 웬일이람.”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레메리오 집사가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알타미라 후작과 후작부인이 식당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베아트리체는 기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의 품 속으로 파고들었다. 올해로 22살이 되었건만 여전히 베아트리체는 알타미라 후작에게 어리광 부리는 것을 좋아했다. 후작은 이 아름다운 딸을 부드럽게 껴안으며 말했다.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

“네, 아버지. 정말 즐거웠어요.”

베아트리체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알타미라 후작과 그 부인은 이런 베아트리체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으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레메리오는 후작 내외를 안내하였다. 노집사가 부인과 후작에게 각각 의자를 빼주자, 후작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집사에 대한 신뢰를 표시했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세자르는 아직인가?”

알타미라 후작이 식탁의 한 쪽 빈 자리를 바라보며 집사에게 물었다.

“하인을 올려 보냈으니 곧 올 것입니다.”

레메리오는 변명하듯이 대답했다. 그 말에 알타미라 후작은 ‘흐음’하며 작게 신음을 했다. 오랜 세월을 알타미라 후작과 함께 했던 집사는 후작이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후작은 아래 사람이 자신보다 식사 시간에 늦게 나타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베아트리체 또한 아버지의 기분이 언짢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녀는 아버지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얼른 다른 화제를 꺼냈다.

“어머니. 저번에 레미엔 상인조합에서 가져온 홍차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누군가에게 홍차를 선물하고 싶은데요.”

“물론 가져가도 되지만... 누구에게 선물을 하려고 하니?”

후작부인 또한 베아트리체의 의도를 알아채고 재빨리 대답했다. 베아트리체는 웃으며 말했다.

“프레이르 전하께 드리려고요. 전하께서 제게 드레스를 선물해주셨거든요. 아무래도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후작은 베아트리체를 돌아보았다.

“전하께서 드레스를 선물해 주셨다고?”

“네, 아버지.”

베아트리체의 대답에 후작은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는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알았다. 네 이름으로 전하께 보내드리도록 하거라. 전하께 간단한 편지를 써서 여기 있는 레메리오에게 전해주도록 하거라. 그럼 레메리오가 전하께 홍차를 선물할 것이다.”

“고마워요, 아버지.”

베아트리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알타미라 후작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후작은 더없이 흐뭇하게 웃으며 베아트리체의 뺨을 다독여 주었다. 알타미라 후작 부인은 후작의 기분이 풀어진 것을 깨닫고 겨우 마음을 놓았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갈 즈음 세자르가 뒤늦게 식당에 나타났다. 레메리오는 세자르에게 자리를 안내하려다가 문득 세자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시에 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세자르의 복장은 완전히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자르의 얼굴에는 잉크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며, 새하얀 셔츠 위로 잉크가 점점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무언가를 작성하다가 하인의 연락을 받고 급히 내려온 모양이었다.

베아트리체와 즐겁게 이야기하던 알타미라 후작은 세자르의 단정치 못한 모습을 발견하자마자 얼굴에 띄웠던 미소를 싹 지웠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는 베아트리체가 애써 없앴던 언짢은 기색이 다시 드러났다.

“늦었구나.”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자 세자르가 황급히 변명하듯이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버님. 여행을 다녀온 뒤, 논문을 쓰다가 깜빡 잊고 시간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세자르의 해명에도 알타미라 후작은 굳은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너만 여행을 다녀온 것이 아니다. 베아트리체도 여행을 다녀왔지만 네 누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지 않느냐?”

후작은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로 세자르를 책망했다. 그 어조는 고요했지만 레메리오는 자신의 주인이 화가 날 때마다 분노를 터뜨리는 대신, 이렇게 나지막하게 꾸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절부절 못하며 세자르와 후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험악해진 분위기가 마치 자신의 책임인양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늦게 식당에 오면서 옷차림도 그렇게 엉망이다니...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되지 않느냐?”

후작의 꾸중이 계속 되었다. 세자르는 후작의 말에 깜짝 놀라 셔츠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셔츠에 점점이 박힌 얼룩을 발견하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어서 셔츠를 갈아입고 오거라.”

알타미라 후작이 엄한 목소리로 세자르에게 말했다. 세자르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잔뜩 주눅이 든 표정으로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레메리오는 그런 세자르를 보자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 항상 알타미라 후작에게 야단을 맞는 어린 도련님이 측은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은 19살의 세자르를 항상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교육했다.

레메리오의 생각에 세자르의 불행은 너무나 똑똑하고 매력적인 누나를 만났다는데 있었다. 재능이 넘치고 매력적인 베아트리체와 달리 세자르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귀족소년이었다. 그는 베아트리체와 같은 외모적 아름다움이라던가, 다른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 혹은 톡톡 튀는 재능 따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알타미라 후작은 항상 베아트리체와 세자르를 비교하였고, 앞으로 가문을 물려받을 세자르에게 더욱 엄한 교육을 내렸다. 레메리오는 알타미라 후작이 언제나 세자르의 재능 없음을 한탄하며 알타미라 가문의 가주가 되기에 능력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알타미라 후작이 항상 베아트리체와 세자르의 능력이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 특히 베아트리체에게는 너무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알타미라 후작은 항상 아들에게만큼은 대단히 엄하게 대하며, 세자르가 실수를 할 때마다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자르는 언제나 아버지의 꾸지람과 재능 있는 누나의 틈바구니 속에서 기를 펴지 못해왔다. 레메리오는 이런 생각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세자르가 깨끗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고 다시 식당으로 내려왔다. 알타미라 후작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며 세자르에게 앉으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세자르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들은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세자르가 꾸중을 듣고 난 뒤여서 그런지 저녁 식사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베아트리체는 이 무거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한 세자르와, 못마땅한 표정으로 세자르를 노려보는 알타미라 후작은 전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의 분위기에 눌린 베아트리체는 잠자코 입을 다물게 되었다. 항상 남편의 뜻에 순종하는 후작 부인 역시 아무 말 없이 식사에만 열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한 식사를 마친 가족은 늘 하던 대로 레메리오가 가져온 홍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의 화목을 다져야 할 이 시간에도 침울한 분위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더없이 울적한 분위기 속에서 홀짝홀짝 차를 마시는 소리와 딸깍거리는 찻잔 소리만이 적막을 깨고 있었다.

무거운 공기는 시간의 흐름마저 한없이 늦추는 것 같았다. 영원처럼 긴 티타임이라고 생각하며 레메리오에게 시간을 물어본 베아트리체는 차를 마시기 시작한지 겨우 5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유쾌하지 못한 시간은 더없이 늘어지는 이러한 현상이야말로 악마의 가장 짓궂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우울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한 베아트리체가 결국 입을 열었다.

“오늘 차는 평소보다 더 향이 좋네요. 차 종류를 바꾼 건가요?”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 애써 밝은 목소리를 꾸미며 베아트리체가 질문했다. 홍차의 종류가 바뀌었다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지만 어쨌든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녀는 굳이 집사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평소의 차와 다른 이즈 차입니다. 하시에르 상인들이 얼마 전에 들여온 홍차지요.”

“그렇군요. 향이 부드럽지만 어쩐지 뒷맛이 독특해서 다른 차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역시 그랬군요.”

베아트리체는 일부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답지 않게 어색하기 이를 데 없는 제스처였다. 그러나 베아트리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끝나자마자, 다시 식당은 긴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착 가라앉은 식당의 공기는 도무지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베아트리체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찻잔에 눈길을 돌려버렸다.

그로부터 삼십 여분 동안 더없이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티타임을 보냈다. 가족들은 그저 기계적인 태도로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그들이 당장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단지 20여년 동안 계속된 티타임의 습관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한참 동안 지겨운 시간이 지난 끝에 결국 참다 못한 세자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며 이만 들어가 보겠다고 말했다.

“논문을 써야 되기 때문에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알타미라 후작은 ‘논문’이라는 이야기에 더욱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세자르가 작년에 논문심사에서 탈락한 것이 생각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난 일에 대해 더 이상 책망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세자르를 돌려보냈다. 후작의 허락을 받은 세자르는 축 늘어진 어깨를 감추며 방으로 돌아갔다.

세자르가 방으로 돌아가자 식당 안의 분위기는 조금 누그러졌다. 알타미라 후작은 불쾌했던 표정을 조금 지운 채, 평소처럼 호감이 가는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후작의 기분을 망쳐 놓은 장본인인 세자르가 눈 앞에서 사라지자 조금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그 변화를 지켜보며 베아트리체는 한가지를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세자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아버지,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알타미라 후작은 베아트리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후작의 대답에 베아트리체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후작에게 물었다.

“어째서 세자르에게 그렇게 엄하게 대하시는 거예요?”

후작은 베아트리체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 같이 현명한 아이가 그런 질문을 할 줄은 몰랐구나.”

후작이 조금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세자르가 이 가문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어요. 그 때문에 아버지께서 세자르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도, 그리고 가문을 위해서 세자르를 엄하게 교육시키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하지만 아버지... 조금만 세자르의 심정을 헤아려 주시면 안 될까요? 세자르가 느껴야 할 압박감과 무거운 짐을 부디 이해해주세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알타미라 후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무거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베아트리체, 내 사랑하는 딸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거라.”

후작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타미라 후작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귀족 가문이라는 것은 하나의 거대한 조직이란다. 이 조직의 우두머리에 앉는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지. 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능력도 없는 자가 오직 혈통에 의해서 가문의 가주 자리를 차지했다가 가문을 몰락시킨 예가 너무나 많이 등장한단다. 재능 없는 자가 너무 많은 권리를 갖게 되면 재능 있는 자는 그 권리를 빼앗고자 욕심을 부리게 마련이고 이것은 곧 피바람을 불러오게 마련이지.”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한 가문이 이어져 내려오면서 항상 재능 있는 자만이 등장할 수는 없겠지. 개중에는 평범한 인물도 있을 테고, 나약한 자도 있을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재능 있는 적들로부터 가문을 보전하고 자신의 신변을 지킬 수 있겠느냐?”

후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이미 그 답을 예상하고 있었다.

후작은 베아트리체가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바로 엄격한 규율과 교육이란다. 재능 없는 자는 이것들을 통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날카롭게 다듬는 수밖에 없단다. 적들을 압도할 만한 능력이 없다면, 혹독한 교육과 연습을 통해서 자신의 빈틈을 없애는 방향으로라도 나아가야 하니까. 없는 능력을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있는 약점을 없애는 것은 가능한 법이거든.”

후작은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런 말을 하는 나의 마음도 편치 않지만 너에게는 이야기해야겠구나. 세자르의 경우에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재능이 없는 쪽이다. 그에게는 프레이르 전하와 같은 결단력도, 레스터 후작과 같은 고귀함도, 레드포드 남작과 같은 과감함도, 베아트리체 너와 같은 매력도 없지. 작년에 세자르가 논문심사에서 탈락하는 것을 보며 나는 이러한 나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단다. 다시 말해서 세자르는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다.”

후작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의 말은 침착했지만 더없이 차갑고 냉혹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후작은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자 베아트리체는 세자르를 두둔하며 말했다.

“하지만 세자르에게는 프레이르 전하에게 없는 성실함과, 레스터 후작에게 없는 학구열, 레드포드 남작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신중함, 그리고 저에게 없는 노력하는 정신이 있어요. 아버지께서는 세자르에게 재능이 없다고 하시지만 그는 그 부족한 틈을 메우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있고요.”

“베아트리체. 네가 항상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장점을 보려 한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단다.”

알타미라 후작이 말했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세자르는 어느 쪽도 크게 부족한 아이는 아니지만, 그 대신 어느 쪽도 재능이 있다고 볼 수는 없어. 그리고 재능이 없는 사람이 이 무법천지와도 같은 살롱에서 살아남으려면 혹독한 교육과 훈련을 거쳐야만 한단다. 냉엄한 귀족사회는 결코 능력 없는 자가 많은 권리를 가져가는 것을 두고 보고만 있지 않기 때문이니까. 이것이 내가 세자르를 엄하게 교육시키는 이유란다.”

후작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동안 후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베아트리체 역시 귀족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아버지의 말에 수긍해버린다면 사태는 호전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에게 간곡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 아버지의 엄한 가르침은 세자르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어요. 그 아이는 항상 아버지의 책망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다고요.”

베아트리체는 더없이 애원하는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호소했다.

“사람이 자신감을 잃으면 갖고 있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법이잖아요. 세자르의 경우가 바로 그래요. 그러니 아버지... 그 아이에게 신뢰를 보여주세요. 그에게 기회를 주세요. 그 아이는 정말 노력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아버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라는 것을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고요, 그러니까 제발 세자르를 믿어 주시고 그에게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그러면 세자르는 자신이 인정 받았다고 생각하고. 자신감을 얻어 분명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거예요.”

베아트리체의 말에 후작은 아무 말 없이 찻잔을 톡톡 두들겼다. 그의 눈동자에 잠시 동안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는 베아트리체에게서 눈을 돌린 채 찻잔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후작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아아, 네가 세자르이고, 세자르가 너였다면 좋았을 것을...”

후작은 조용하지만 깊은 안타까움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탄식했다. 그 말에 알타미라 후작 부인은 남편에게서 눈길을 돌렸다. 그녀의 눈에는 아들에 대한 측은함으로 작은 눈물이 맺혀 있었다.

이런 부인의 반응을 무시하며 알타미라 후작은 베아트리체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사랑하는 딸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았다. 네 말대로 하겠다. 언젠가 세자르에게 한 번 기회를 주도록 하마. 샤를 폐하께서도 17살의 프레이르 전하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니 말이다. 네 말대로 어쩌면 세자르에게는 기회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감사해요, 아버지.”

베아트리체는 조금 웃어 보이며 후작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다가와 그 목을 양팔을 감쌌다. 더없이 따뜻한 손길이었다. 알타미라 후작은 그런 그녀를 부드럽게 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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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3) +12 10.08.27 1,374 33 21쪽
68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2) +6 10.08.26 1,338 33 14쪽
»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1) +8 10.08.24 1,362 41 20쪽
66 로라시아 연대기 - 아라스에서 맞는 아침 +7 10.08.23 1,404 28 11쪽
65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3) +8 10.08.22 1,401 23 12쪽
64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2) +12 10.08.21 1,384 27 8쪽
63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1) +7 10.08.18 1,418 26 15쪽
62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4) +15 10.08.17 1,483 24 19쪽
61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3) +7 10.08.16 1,452 19 16쪽
60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2) +10 10.08.15 1,493 23 21쪽
59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1) +6 10.08.14 1,487 2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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