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23.이단자 신학도의 역위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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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토론회도 지난 날과 별달리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승기는 완전히 정통 교회 측으로 기운 상태였고, 뷔그노들의 논리는 박살 날 대로 박살났다. 뷔그노 측은 정통 교회 측에 대항할 의욕을 상실한 모양인지 요하네스 아이크만의 주장에 대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답변을 회피했다.
프레이르는 뷔그노 진영의 참담한 진영을 바라보며 더없이 만족했다. 이렇게 일이 잘 풀린 것은 그가 15살 때 궁성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프레이르의 예상은 완벽히 맞아 떨어졌고, 승리가 눈 앞에 있었다.
'트레버 따위가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이미 대세는 기울었어.'
프레이르는 스스로에게 확신을 심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토론회를 구경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프레이르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알베로에게 ‘잠깐 바람을 쐬고 올 테니 나 대신 자리를 지켜줘요.’라고 말한 뒤 사람들 몰래 좌석 뒤편을 통해 토론장을 빠져나왔다.
교회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 프레이르는 방금 전 베아트리체와 에버딘, 그리고 카린과 함께 점심을 먹었던 잔디밭으로 향했다. 잔디밭의 주변은 마틴 경과 함께 몇몇의 기사들과 총사대, 그리고 국민위병대가 지키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여유 있게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당연하다는 듯이 잔디밭의 정중앙에 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동안 잔디밭을 가만히 보고 있던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앉았던 자리 쪽에 머리를 두었다. 그리고 그는 두 손에 깍지를 끼워 머리맡에 둔 뒤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날씨 좋구나...”
프레이르가 아직 따사로운 햇살을 비추고 있는 초가을의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린 목소리였지만 동시에 안도하는 듯한 말투였다.
프레이르는 마음을 푹 놓은 채 하품을 했다. 이제 걱정할 것은 없었다. 토론회는 거의 끝이 났고, 졸업 논문 역시 완성된 상태였다. 이 토론회만 잘 마무리 된다면 당분간 골치 아픈 일은 피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일이 잘 흘러갈 것이라 예상하자 프레이르는 더없이 기분이 상쾌해졌다. 동시에 그는 긴장감이 탁 풀어지며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역시 아까 낮잠을 자두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제 한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프레이르는 두르고 있던 망토를 벗어 머리 맡에 뭉쳤다. 적당히 망토를 베개처럼 접어 둔 그는 그곳에 자신의 머리를 눕힌 뒤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채 1분도 되지 않아 그는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프레이르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태양의 방향을 보니 한 시간 정도 잠을 잔 것 같았다.
프레이르는 먼지를 탁탁 털어낸 다음 옷차림을 정돈했다. 망토를 채우고, 모자를 각도에 맞게 비스듬히 쓴 그는 최대한 세심하게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낮잠을 잔 것을 들키지 않는 동시에 왕자로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프레이르는 항상 이런 부분은 대충대충 넘기는 것 같아도 나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신의 옷차림을 정성껏 확인한 뒤 프레이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교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교회의 경비를 맡았던 마틴 경이 프레이르에게로 걸어왔다.
“아! 마틴 경.”
프레이르는 얼른 입가의 침자국을 슥 닦아 낸 다음 태연하게 마틴 경을 반겼다.
“경비 상황은 어때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전하.”
마틴 경이 씩씩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프레이르는 씩 웃었다.
“좋아요. 아주 훌륭해요.”
프레이르의 칭찬에 마틴 경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프레이르의 칭찬에 기분이 나쁘진 않아 보였다. 참 알기 쉬운 인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갑자기 마틴 경이 품 속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는 한 종이를 꺼내 프레이르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프레이르는 의아해하면서도 종이를 받아들었다.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종이는 투박한 솜씨로 접혀져 있었다.
마틴 경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아까 코라 형님께서 저보고 전하께 전해달라고 한 쪽지입니다. 형님의 말로는 어떤 노파가 왕자 전하의 신변과 관련된 중요한 일이라고 했다던데...”
프레이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그 멍청이 코라가 또다시 늙은 노파에게 속은 모양이었다. 아마도 무슨 부적이라던가, 행운을 가져다주는 주술 어쩌고저쩌고 한 것에 넘어간 것이라 프레이르는 짐작했다.
프레이르는 졉혀져 있는 쪽지를 펼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쪽지에 적혀 있는 글귀를 발견한 순간 프레이르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동시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런....... 제길......”
프레이르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프레이르의 얼굴이 창백해 진 것을 보고 마틴 경이 깜짝 놀라 물었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자신이 방금 알게 된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프레이르는 자신이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것은 현실이었다. 코라가 전해준 쪽지는 마치 악몽과도 같은 이 사실이 엄연한 현실임을 프레이르에게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결코 프레이르에게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프레이르는 코라가 전달해 주었다는 쪽지를 땅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그는 성큼성큼 교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전하!”
마틴 경이 큰 소리로 프레이르를 불렀으나 프레이르는 마틴 경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교회로 향했다. 프레이르의 이 냉담한 태도에 당황한 마틴 경은 허겁지겁 프레이르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코라가 전달해 준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한 총사대원이 의아해 하며 그 쪽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 쪽지에 적혀져 있는 글귀를 읽었다.
"트레버 레림(treboR reliM)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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