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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667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0.09.12 01:06
조회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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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글자
22쪽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4)

DUMMY

“랭카스터와 아키텐의 공작님께서 드십니다.”

아이자크 경이 프레이르의 내방을 알렸다. 프레이르는 아이자크 경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으며 집무실에 들어섰다. 프레이르가 일행을 이끌고 방에 입장하자 자리에 앉아 있던 샤를과 알타미라 후작이 일어서서 프레이르를 맞았다. 곧이어 샤를은 카린을 바라보며 감격스럽게 외쳤다.

“아! 카린! 내 오랜 벗!”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카린을 힘껏 껴안았다. 카린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폐~하.”

카린은 익살스럽게 폐하를 길게 늘여 발음하였다. 이 장난스런 말투와 함께 그녀는 샤를을 포옹했다. 그리고 그녀는 까치발을 하여 샤를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조금 물러서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그리움과 함께 반가움이 떠올라 있었다.

“이제는 아저씨가 다 되었네. 1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팔팔한 젊은이였는데 말이야.”

카린의 거침없는 말에 샤를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는 우정 어린 눈길로 카린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자네는 16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군. 내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야. 그 붉은 빛깔의 눈동자하며... 작은 입가까지...”

“예나 지금이나 귀엽고 예쁘지?”

카린이 다시 뻔뻔스럽게 말했다. 샤를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자리를 비켜주며 알타미라 후작을 앞으로 이끌었다.

“이쪽은 알타미라 후작. 자네는 이 후작을 가리켜 쿠드 군이라고 불렀지. 기억하고 있을까?”

샤를의 소개에 카린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조금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잠시 동안 알타미라 후작이 누구였는지 고민하는 듯 눈매를 좁히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온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알타미라 후작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떻게 쿠드 군을 잊을 수 있겠어?”

카린은 이렇게 말하며 후작과 포옹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가볍게 알타미라 후작에게 물었다.

“베아트리체는 어때? 잘 지내고 있어?”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베아트리체 양은 카시네예프에서도 손꼽히는 숙녀가 되었지. 자네도 언제 그 아이를 보게 되면 감탄하게 될 거야.”

샤를이 베아트리체를 칭찬하며 끼어들었다.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기억하는 베아트리체는 이만한 꼬마아이였는데 말이지. 정말 귀여웠는데...”

카린이 오른손을 자신의 허리 높이쯤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그 자리에 베아트리체가 위치하고 있는 것처럼 애정 어린 눈길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항상 나에게 ‘언니’라고 부르면서 치맛자락을 붙들곤 했지.”

카린이 추억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알타미라 후작과 샤를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카린과 샤를, 그리고 알타미라 후작은 그렇게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며 추억을 회상했다. 프레이르는 세 사람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었다. 세 사람은 레아첼에 관한 이야기라던가, 카시네예프 대학에서 공부했던 이야기와 같이 소소한 일상에 관한 기억을 되살려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특히 카린은 프레이르와 대화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즐거운 기색을 보이며 대화를 주도했다. 그녀는 16년 만에 두 사람과 재회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하루 만에 만난 것처럼 친밀하게 대화를 건넸다.

한편 즐거운 것은 카린뿐만이 아닌 듯했다. 프레이르는 샤를이 평소에 보기 힘든 유쾌한 표정으로 카린과 격식 없이 대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묘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는 누군가가 샤를에게 이렇게 인간적으로 다가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궁전에서 감히 국왕에서 경어를 생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은 어릿광대뿐이었는데 그나마도 샤를은 광대들과 노닥거리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 때문에 프레이르는 샤를이 이렇게 인간적으로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목격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 그가 오늘 카린을 통해 샤를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프레이르로서는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튼 자네가 레인가드에 와서 정말 반갑군. 난 자네가 이곳에 돌아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거든.”

카린과 대화를 나누던 샤를이 감개무량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카린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샤를의 두 손은 마치 소중한 구슬을 닦듯이 카린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16년 전, 자네가 갑자기 국가마법사직을 그만두겠다고 말하면서 홀연히 레인가드를 떠나버린 뒤로 나를 즐겁게 만들어 줄만한 사람이 없었지.”

샤를은 조금 서글프게 말했다.

“레아첼이 죽고, 자네도 레인가드를 떠난다고 해서 내가 얼마나 상심했는지 자네는 모를걸세.”

샤를의 말에 카린은 빙긋 웃었다.

“내가 워낙 매력이 넘쳐서 말이지.”

“그 농담 솜씨는 여전하군.”

샤를은 가볍게 카린의 농담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그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레인가드에 온 거지?”

“샤를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지.”

카린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샤를은 그 말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것은 알타미라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샤를은 카린의 주먹만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자네가 변덕이 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16년 동안 얼굴 한 번 안 비치다가 갑자기 내 얼굴이 보고 싶어서 레인가드로 돌아왔다고 말한다면 내가 믿어줄 수 있겠나?”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카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당신은 여전히 날카롭네. 정중하지만 늘 정곡을 찌른다니까.”

카린은 풍성한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나와 함께 여행을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이 친구가 신학도이거든. 그런데 이번에 샤를 당신이 레인가드에서 재밌는 일을 꾸미고 있다는 소식에 이 친구가 몸이 달아올랐어.”

“재밌는 일이라면...”

“뷔그노와 정통 교회의 공개 신학 토론회를 연다는 소식 말이야.”

카린의 말에 샤를은 ‘아’하며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 또한 카린의 말뜻을 이해했다. 결국 그녀가 이곳에 돌아와서 샤를에게 연락을 취한 것은 신학 토론회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신학도인 트레버에게 이 신학 토론회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기 때문에 카린을 설득한 모양이었다.

프레이르가 제안했던 신학 토론회는 현재 그 준비 중에 있었다. 교황청의 허가를 얻은 라시드 대주교는 생마르통 대성당에서 대규모 신학 논쟁을 위한 준비 작업을 마무리 지었고, 각지의 신학자들을 끌어 모으고 있는 상태였다. 교황청을 대표하는 신학자 일곱 명은 이미 모두 카시네예프에 모인 상태였고, 뷔그노 측 교수들도 다섯이나 준비되었다. 이 토론회가 열리는 열흘과 그 기간을 전후한 30일 동안에는 뷔그노들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교황청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뷔그노 인사들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나와 함께하는 이 젊은 친구는 신학과 철학에 몸과 마음을 바친 신학도이거든. 어떻게든 구경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에 레인가드로 데려왔지.”

카린은 이렇게 말하며 뒷자리에 서 있던 트레버를 소개했다. 트레버는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샤를에게 모자를 벗어 보이며 인사를 했다. 에우로텐의 공식적인 인사인 모양이었으나 레인가드만큼 우아하지는 않았다.

프레이르는 카린이 트레버를 소개하기 전까지 샤를은 이 엄숙한 남자가 프레이르의 뒷자리에 서 있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만큼 트레버는 말수가 없고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트레버 군이라고?”

샤를이 20대 후반의 청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트레버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폐하.”

“내 궁정에 온 것을 환영하네.”

샤를이 형식적으로 말하며 트레버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그는 딱딱한 얼굴로 서 있는 젊은이에게 격려하듯 말했다.

“공개 토론회까지는 아직 열흘이나 남았네. 그 동안 카린과 함께 궁전을 출입하도록 하게.”

“영광입니다, 폐하.”

트레버는 공손히 대답한 다음 뒤로 물러섰다. 카린은 그런 트레버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만들 물러가 봐도 좋네.”

샤를이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프레이르와 그 일동은 샤를에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물러났다.

“아, 자네는 말고.”

샤를이 카린을 불러 세웠다. 카린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저요?’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 구김살 없는 몸짓이 대단히 천진난만하게 보였기 때문에 샤를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 카린 자네는 조금 더 나와 옛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겠나?”

샤를이 따뜻하게 말했다. 그 말에 카린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와 알베로, 트레버, 그리고 알타미라 후작까지 모두 방 바깥으로 나가자, 방 안에는 샤를과 카린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샤를은 카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조금 섭섭하다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결국 자네가 레인가드에 돌아온 것은 트레버 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라는 뜻이군.”

카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국가마법사직을 맡을 생각은 없나?”

샤를의 물음에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용하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어. 그건 내가 나 자신에게 맹세한 일이니까. 나에게는 보다 중요한 일이 있어.”

“여전히 그 일이 무엇인지는 밝힐 수 없고?”

샤를이 카린에게 물었다. 카린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난 자네가 꼭 국가마법사가 되어주었으면 했는데...”

샤를의 말에 카린은 위로하듯이 말했다.

“레인가드는 이미 나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재능 있는 국가마법사들이 많이 있잖아. 굳이 내가 없어도 잘 해나갈 수 있을거야.”

카린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듯이 샤를에게 물었다.

“레인가드에 등록된 국가마법사가 몇 명이지?”

샤를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대답했다.

“328명.”

“거짓말 하지 말아.”

카린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아마도 200명 안팎이겠지.”

“역시 국가마법사 출신이라 예리하군.”

샤를이 들켰다는 듯이 말했다. 국가마법사의 숫자를 부풀려 말해서 국력을 과시해보았지만 카린은 이미 그 점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설사 200명 안팎이라 해도, 로라시아 대륙에 이만한 숫자의 국가마법사를 보유한 나라는 모리안 뿐일거야. 에우로텐의 경우에는 전쟁을 거치면서 국가마법사의 씨가 말라버렸지. 아마 50명도 채 안 될걸? 하시에르도 마찬가지고.”

로라시아 대륙을 두루 다녀본 카린의 설명이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제법 정확한 수치를 들며 샤를에게 귀중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녀의 결심을 강조했다.

“그러니까 굳이 나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도 알다시피 내 마법 실력은 사실 그다지 뛰어난 편은 아니거든. 포르테빌은 젊은 시절 내 마법 수준이 ‘성능 좋은 성냥’ 정도라고 말했지. 그나마 비가 내릴 때는 무능력하다고 빈정거리면서 말이야.”

카린은 이렇게 말하며 우습다는 듯이 킬킬거렸다. 그 반응에 샤를은 다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카린에게 말했다.

“정말 아쉽게 되었군. 난 자네가 국가마법사직을 받아들인다면 자네를 프레이르의 전속 보좌관으로 임명하려고 했거든.”

프레이르의 이름을 듣자 카린이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프레이르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샤를이 카린에게 물었다.

“프레이르는 어떻게 생각하나?”

“재미있는 아이던데?”

별다른 생각 없이 카린이 곧바로 대답했다.

“영특하고, 재능도 있어. 결단성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능력도 가지고 있지. 다만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고, 경솔한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여. 아마도 어린 탓이겠지.”

“정확하군.”

샤를은 카린의 직설적인 말에 반박 하나 하지 않고 인정했다. 그 또한 프레이르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잘 인지하고 있었다.

“몇 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훌륭한 국왕이 될 덕목을 갖추고 있네. 프레이르에게 필요한 것은 경험과 주변인의 올바른 보좌이지.”

“보좌라면... 그 알베로 경이라는 냉담한 녀석을 말하는 거야? 정말이지 얼음장 같은 보좌관이더군. 그런 부류의 인물은 유능할지는 몰라도 마음을 터놓을 수는 없지.”

카린이 알베로에 관해 수다스럽게 혹평을 쏟아냈다. 어딘지 허술한 구석이 많은 카린은 항상 냉철하고 빈틈없는 인물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했기 때문에 샤를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카린은 처음에 알타미라 후작을 만났을 때도 이런 식으로 후작을 깎아내렸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샤를 역시 알베로를 그다지 달갑잖게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그 젊은 비서관을 위해 변호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자네에게 부탁하는 거네. 자네가 프레이르가 마음을 터놓고 믿을 수 있는 보좌관이 되는 것 말이네. 이제 곧 프레이르는 성년이 되네. 주변에 국가마법사를 붙여 놓아서 마법의 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고, 그에게 조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단 말일세.”

샤를이 열성적으로 카린에게 말했다. 하지만 카린은 냉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바람의 마법사>인 가보르네도 있잖아. 그 재능 있는 친구야말로 꼬마 왕자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텐데? 아무래도 나 같은 퇴역 국가마법사보다는 젊고 능력 있는 가보르네가 낫지 않겠어?”

카린의 제안에 샤를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에는 그 누구도 결코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가보르네는 이미 국가 마법사 계약을 해지했네. 내가 그를 해고했어.”

“왜?”

카린이 순진하게 물었다. 그러자 샤를은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이자크 경은 물론 아무도 방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그가 하려는 말은 오직 샤를과 마틴 경, 그리고 카린만이 아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난 16년 동안 샤를이 비밀스럽게 묻어놓은 이야기였다.

샤를은 카린에게 머리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년 전 있었던 예언 사건을 기억하지?”

카린은 순간적으로 ‘헉’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조심스럽게 샤를의 안색을 살폈다. 샤를을 감싸던 공기는 더없이 무거워져 있었다. 샤를이 농담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녀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브조니 주교가 말한 프레이르의 예언 말이야?”

“그래.”

샤를은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레아첼이 죽고 난 직후, 난 자네에게 예언에 관련된 이야기를 털어놓았지. 자네도 아마 기억할걸세. 프레이르가 악마의 현신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라는 브조니 주교의 예언 말이네. 프레이르가 태어날 때, 브조니 주교는 나에게 프레이르가 레아첼을 죽일 것이라는 로드 4경의 예언서를 알려주었고 그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지.”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옛날의 고통스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심한듯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어갔다. 카린은 샤를의 이 모습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점은 그 다음이네. 자네도 알다시피 갑자기 이냐크 대성당에 화재가 일어나고, 브조니 주교가 실종되어 버렸어. 그것도 로드4경을 비롯한 모든 예언서와 주교의 주석집을 없애버리면서. 도대체 이 화재 사건은 무슨 의미지?”

샤를의 말에 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녀는 샤를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카린의 말에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아니네. 모든 사람들은 내가 브조니 주교를 입막음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성 안드레에 맹세코 난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네.”

샤를의 말에 카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은 샤를을 의심스럽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샤를은 카린의 반응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 말을 이어갔다.

“무언가가 이상하네. 나와 마틴 경이 아니라면 누가 브조니 주교를 제거한 거지? 더구나 애초에 내가 브조니 주교를 방문할 것이라는 정보는 어디에서 새나간 거지?”

샤를의 말에 카린은 천천히 대답했다. 16년 전의 일이었지만 그녀는 샤를이 자신에게 털어놓았던 그 예언에 관한 이야기를 마치 어제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샤를이 누구의 제안으로 브조니 주교를 방문하게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었다.

“가보르네...”

“그래. 가보르네가 나에게 브조니 주교를 방문할 것을 권했지. 내가 브조니 주교를 방문했다는 정보가 새어나갈 곳은 가보르네 밖에 없어.”

샤를이 결론지었다. 카린은 조금 찜찜한 표정으로 샤를에게 물었다.

“그래서... 가보르네는 조사해보았어?”

"물론 아니네."

샤를의 대답에 카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왜?"

카린이 의아하게 묻자 샤를이 조급하게 말했다.

“내가 무슨 수로 가보르네를 조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는 카린에게서 휙 등을 돌리며 마치 동굴 속의 사자처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초조하게 말했다.

“누굴 믿고 가보르네를 뒷조사한단 말인가? 가보르네를 조사한다면 예언에 대한 내용이 누설되는 것은 불가피했네. 아벨 신의 저주를 받은 프레이르에 대한 예언이 누설되면 그 누가 나와 프레이르 편을 들어주겠나? 홀트 백작? 포르테빌? 유능하긴 하지만 칼레타 교인인 그들이 프레이르의 예언에 관해 알게 된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난 확신할 수가 없었네. 그렇다고 내가 직접 조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탄식했다. 카린은 샤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가보르네와 예언에 관해 조사한다면 예언의 내용이 공개되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설사 샤를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홀트 백작이라 할지라도 아벨 신의 저주를 받고, 신의 뜻을 거스른 왕자의 탄생을 알게 된다면, 샤를을 배반할 가능성이 있었다. 따라서 샤를은 양손이 묶인 채 가보르네는 물론 예언 사건에 관해 건드리지 못한 것이었다.

“예언은 사실일수도, 조작된 것일 수도 있었네. 하지만 난 사실의 여부보다도 프레이르를 구하고 싶었지...”

샤를이 침울하게 말했다. 그의 파란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어려 있었다.

“나라고 해서 가보르네를 의심하지 않았겠나? 아니네. 나는 가보르네를 의심했고, 브조니 주교를 의심했네. 브조니 주교가 거짓을 말했을 가능성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지. 하지만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진실과 프레이르 양쪽을 구할 수는 없었네. 단순히 조작으로 보기에는 예언의 내용이 너무나 정확했어. 예언이 조작되었다면 그 누가 레아첼의 죽음을 예측할 수 있었단 말인가? 레아첼이 병약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지만 프레이르를 출산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네. 오직 브조니 주교만이 이를 예언해주었지.”

샤를의 눈에 작은 이슬이 고였다. 레아첼이 죽던 당시의 일을 회상하자 다시 마음이 격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결코 감정의 격랑에 휘둘리지 않는 그는 재빨리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실례했군. 아무튼 예언이 단순한 조작이 아닐 가능성이 너무 높았네. 조사를 진행하다 만에 하나라도 예언이 사실이었다고 밝혀진다면 프레이르의 목숨은 없는 셈이었지. 나로서는 레아첼의 혈육을 지켜내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했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가보르네를 쳐내는 정도가 전부였지.”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카린을 바라보았다.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마음은 잘 이해할 수 있어. 샤를 당신은 레아첼을 너무나 사랑했으니까. 그 사실을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자네는 레아첼의 가장 좋은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샤를은 이렇게 말하며 카린에게 웃어보였다. 그 미소에 카린은 마은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샤를을 동정한다고 해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프레이르의 보좌관 직은 받아들일 수 없어. 미안해.”

카린이 본론으로 돌아와 딱 잘라 말했다.

“나한테는 도저히 국가마법사를 받아들일 수 없는 사정이 있거든. 그보다 더 중요한 일들이 있어.”

카린의 대답에 샤를은 적잖이 실망한 눈치였다. 그러나 카린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자네의 생각이 그렇게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

결국 카린의 설득을 포기한 샤를이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어쨌든 당분간은 카시네예프에 머무를 생각이지?”

“그래. 국가마법사직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지, 당신과 원수가 되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카린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샤를은 그녀에게 따뜻하게 말했다.

“그럼 카시네예프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궁전으로 오게. 그 트레버 군이라는 젊은이와 함께. 아직 자네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렇게 할게. 당신의 아들도 보고 싶고 하니 말이야.”

카린이 프레이르를 들먹이며 태평하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샤를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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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4) +1 11.05.08 779 19 13쪽
81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3) +2 11.05.07 766 15 7쪽
80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2) +1 11.05.06 818 13 8쪽
79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1) +3 11.05.04 850 15 11쪽
78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4) +6 10.10.20 1,080 20 27쪽
77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3) +8 10.10.08 1,137 20 8쪽
76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2) +6 10.09.16 1,214 23 16쪽
75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1) +7 10.09.13 1,352 23 18쪽
»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4) +7 10.09.12 1,352 24 22쪽
73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3) +6 10.09.08 1,298 25 9쪽
72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2) +8 10.09.05 1,286 27 13쪽
71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1) +8 10.08.31 1,381 24 20쪽
70 로라시아 연대기 - 세자르의 보고 +14 10.08.28 1,353 26 4쪽
69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3) +12 10.08.27 1,375 33 21쪽
68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2) +6 10.08.26 1,338 33 14쪽
67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1) +8 10.08.24 1,362 41 20쪽
66 로라시아 연대기 - 아라스에서 맞는 아침 +7 10.08.23 1,404 28 11쪽
65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3) +8 10.08.22 1,401 23 12쪽
64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2) +12 10.08.21 1,384 27 8쪽
63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1) +7 10.08.18 1,418 26 15쪽
62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4) +15 10.08.17 1,483 24 19쪽
61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3) +7 10.08.16 1,453 19 16쪽
60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2) +10 10.08.15 1,493 23 21쪽
59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1) +6 10.08.14 1,487 2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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