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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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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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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2,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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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788,474

작성
10.08.31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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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1)

DUMMY

검은 옷을 입은 의원들이 정숙한 태도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정면만을 바라보는 것이 칼레타 교인의 미덕인 양 똑바로 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국민회의 의원들은 생마르통 대성당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오늘 이곳에서 중요한 회의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이곳 생마르통 대성당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국민회의의 의원들을 바라보며 프레이르는 마치 까마귀 떼가 성당의 의자에 앉아 있는 듯한 기묘한 착각을 느꼈다. 그들의 복장은 모두 검은색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는 마치 까마귀의 암수를 구별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의원들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검은 옷을 입은 의원들이 줄줄이 서 있는 광경은 분명 볼만하긴 했지만 사람을 찾거나 하기에는 대단히 불편한 그림이라고 프레이르는 생각했다.

대성당의 제단에서부터 입구까지 2열로 정돈된 의자를 빼곡히 채운 의원들은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 모두는 옷깃 하나까지도 삐뚤어짐이 없는 철두철미한 부르주아들이었다. 도시의 지식인들인 젠트리들과 지방의 세력가들인 요우먼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들 부르주아들은 국민회의의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세력으로서 왕당파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이들은 비록 성직자와 귀족들이 포진한 의회에 참여할 권한은 없었지만 국민회의를 통해 의결안을 제출할 권리가 있었는데 이 권리는 샤를이 엘리스와 정략결혼을 하면서 레스터 공작파가 포진한 의회의 허가를 얻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뒤로 국민회의의 의결 권리는 지금까지 왕당파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되어 왔다.

오늘도 국민회의는 국왕의 보이지 않는 명령에 따라 한 의결안을 통과시켰다. 아라스 금화와 앙시벨 금화의 금 함유량을 높이는 의결안이었다. 알타미라 가문의 조종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변호사 제롬 테나르디에 의원이 제출한 이 제안은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률을 보이며 통과되었다. 국민회의는 왕당파와 함께 알타미라 후작 가문의 상인 세력이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결의안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샤를에게 제출되었다.

프레이르는 알베로, 알타미라 후작과 함께 브라쇼브 호민관이 샤를에게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프레이르는 그 자리에 함께 하며 더없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활약이 정책에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우면서도 중요한 경험이었다. 프레이르는 자신이 얼마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했으며 그것을 잘 사용하였을 때 얻는 열매의 맛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가슴 떨리고 흥분 되면서도 동시에 즐거운 경험이기도 했다. 프레이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연단 쪽을 바라보았다. 브라쇼브의 옆에 앉아 있던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오른쪽 눈을 찡긋해주었다.

한편 알베로는 알타미라 후작의 표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는 후작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그러나 후작은 항상 그렇듯이 알듯 말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알베로는 그런 후작의 반응에 실망하며 다시 호민관 브라쇼브에게 눈을 돌렸다. 그는 조금 더 후작이 감정적인 동요를 드러내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작은 여느 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테나르디에 의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화에 관련된 제출안을 비롯하여, 2개의 결의안이 더 제출되었다. 이윽고 모든 의논이 끝나자 브라쇼브 국민회의 의장은 작은 망치를 두드리며 폐회를 선언했다. 그러자 권표(fasces)를 든 두 명의 병사가 권표를 두 번 땅에 두드리며 폐회를 알렸다. ‘쿵쿵’하는 소리에 맞추어 의원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사이를 왕관을 쓴 샤를이 지나갔다. 그 뒤를 따라 프레이르와 알베로, 그리고 알타미라 후작이 걸어갔는데 의원들은 모두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협력에 감사하오, 쿠드 경. 역시 그대야말로 왕실의 진정한 친구요.”

대성당의 바깥에 나온 샤를이 알타미라 후작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프레이르에게 모든 보고를 들었기 때문에, 샤를은 이미 모든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알타미라 후작에게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았다. 알타미라 후작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왕실을 돕는 것이 저희 알타미라 가문의 기쁨입니다.”

샤를은 알타미라 후작의 말에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알타미라 후작에게 자신의 마차를 타고 함께 궁성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알타미라 후작은 샤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카뮈르 궁성을 돌아가는 것을 배웅한 뒤, 프레이르는 알베로와 함께 다른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들은 왕궁이 아닌 엘브 강가로 마차를 몰아갔다. 샤를이 프레이르에게 맡긴 새로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일은 정말 잘 해줬어요.”

마차를 타고 가며 프레이르가 알베로를 칭찬했다. 알베로는 보기 드물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의 말에 화답했다. 이번 일의 성공으로 그는 대단히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늘 얼음장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알베로가 지금처럼 편안하게 미소를 짓는 모습은 상당히 드물었다. 그만큼 알베로는 프레이르의 유쾌한 기분을 공유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기분을 반영하듯 강바람도 어느덧 시원한 미풍이 되어 카시네예프 시내로 흘러오고 있었다. 여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가을의 냄새가 성큼 다가온 것이었다. 프레이르는 그 특유의 가을 냄새를 맡으며 웃었다.

“벌써 가을이네요.”

“그렇습니다. 이제 전하의 생일이 다가오는 군요.”

알베로가 말했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생각을 기억해 냈다. 그는 1년마다 찾아오는 자신의 생일에 대해 항상 무감각했기 때문이었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저는 제 생일에 굳이 축하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창밖을 바라보며 프레이르가 불쑥 얘기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알베로는 조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진지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내쫓긴 것을 매년마다 축하해야할 이유가 있나요?”

프레이르의 말에 알베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프레이르의 해괴망측한 말에 어떻게 반박해야할 지 몰라 순간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알베로가 복잡한 얼굴로 우물쭈물하자 프레이르는 킬킬거리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저 같이 아벨 신에게 축복 받은 위대한 인물이 태어난 날이니 당연히 축하해야죠.”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손을 움직이며 ‘왕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라고 외쳤다.

알베로는 프레이르의 이 대답이 미묘하게 중심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항상 그렇듯이 프레이르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알베로를 피곤하게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알베로는 한숨을 내쉬며 프레이르의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프레이르는 알베로의 이러한 모습에 다시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동안 마차는 포구에 도착하였다. 마차가 정지하자마자 프레이르는 후닥닥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포구에 접안 되어 있는 범선을 발견하였다.

부두에 대어진 슬루프(sloop) 범선의 돛이 내려져 있는 것을 바라보며 그는 혀를 찼다.

“우리가 늦었네요. 손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프레이르의 탄식에 알베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로도 오늘 맞이해야 할 사람들이 이 슬루프를 타고 오늘 카시네예프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각에 접안까지 마쳤을 줄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알타미라 가문의 조사를 마친 프레이르는 샤를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샤를은 완벽하게 임무를 끝마친 프레이르를 크게 칭찬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에우로텐에서 건너오는 손님을 맞이하라는 새로운 임무를 맡겼다.

프레이르는 ‘길바닥의 땅벌레도 사냥을 마치면 굴 속에서 쉬는데 아들을 너무 혹사시키는 것 아니냐.’라며 장난삼아 항변해보았지만 샤를은 이를 가볍게 받아넘기며 프레이르에게 이 일을 떠넘겼다. 프레이르는 조금 더 승리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샤를이 내린 임무는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레이르는 얼른 범선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슬루프와 부두 사이에 놓인 널빤지를 밟고 배로 올라갔다. 프레이르로서는 너무나 고맙게도 이 범선의 선장은 줄사다리나 보트 대신 몸소 널빤지를 놓아준 모양이었다. 어렸을 적, 요동치는 보트 위에서 줄사다리를 타고 배 위로 올라서는 경험을 해 본 프레이르로서는 이 널빤지가 대단히 반가웠다.

갑판에 올라선 프레이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그가 찾고자 했던 샤를의 손님을 발견하였다. 샤를이 말했던 인상착의와 너무 똑같은데다, 이 칙칙한 갑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손쉽게 프레이르의 눈에 띄었다.

프레이르는 정중하게 에우로텐에서 온 손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 쪽에서도 프레이르와 알베로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와 이야기를 하고 있던 그녀는 프레이르 쪽을 돌아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이르에게로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에우로텐어의 억양이 섞인 목소리였다.

“이상하네. 혹시 샤를이야?”

초면에 반말을 하는 여자였다. 그러나 에우로텐에서 온 그녀의 표정으로 보았을 때, 그녀는 이것이 정중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아무래도 이 손님은 레인가드어의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미숙한 여성에게 프레이르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는 샤를 폐하의 아들인 프레이르 드 세이비어 에인절입니다.”

프레이르의 대답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붉은 빛깔이 감도는 눈동자에는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프레이르야? 그럴수가... 벌써 이렇게 커버리다니...”

그녀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프레이르의 이곳저곳을 뜯어보았다. 프레이르는 그녀의 눈길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인가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플레어 양.”

프레이르가 샤를이 아니라는 말에 당황하던 그녀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녀는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볼에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우아한 태도로 치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나도 정식으로 내 이름을 당신에게 소개할게. 난 카른 르 플레어. 레인가드에서는 <홍염의 마법사>로 알려져 있어.”

그녀는 여전히 존댓말을 생략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옆에 있던 한 20대 후반의 남성을 소개했다.

“이쪽은 트레버 레림이야. 에우로텐 사람이지만 지금은 니블헤임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지. 여러가지 사연이 있어서 함께 여행을 하는 중이지.”

“전하를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내가 말했다. 카린과 달리 트레버는 완벽한 레인가드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발음이 조금 딱딱하긴 했지만 어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레인가드어를 배운 모양이었다.

프레이르는 두 사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늘 그렇듯이 처음 보는 사람의 첫인상을 머리 속에 정리하였다.

먼저 카린 르 플레어는 16세에서 17세 사이로 보이는 여성으로서 아직 어린아이 같은 인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붉은 색의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붉은 빛깔이 감도는 머리칼이 특징적이었으며, 체격은 작은 편이었다. 그러나 선이 매우 가늘어서 키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땅딸막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늘씬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딘지 모르게 허술한 구석이 보이는 여성이지만 오랫동안 여행을 다니다보니 세상 물정은 제법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트레버는 여느 신학도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는 편으로 보이는 이 남성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는데 차갑다기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성격인 것 같아다. 그의 입이 어찌나 굳게 닫혀 있었는지 만약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그를 벙어리로 여길 것만 같다고 프레이르는 생각했다.

프레이르는 이 두 사람이 일행이라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너무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뚝뚝한 신학도와 요란한 여마법사는 분명 이상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카린과 트레버는 서로 마음이 잘 맞는 모양인지 에우로텐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열성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레인가드는 정말 오랜만이네...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구나...”

부두 주변을 둘러보던 카린이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그녀가 마치 노인인 것처럼 말을 하자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의 웃음을 눈치 챈 카린이 조금 뾰루퉁하게 말했다.

“당신, 숙녀가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웃으면 실례이지 않아?”

초면의 상대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이 실례 운운하는 것을 보니 더욱 우스웠지만 프레이르는 이 에우로텐의 숙녀를 달래주기로 했다. 그는 정중하게 모자를 벗어 보이며 사과했다.

“이거 숙녀 분에게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럼 마차로 가실까요?”

프레이르가 우아하게 팔을 벌려 보였다. 그러자 카린은 굳어졌던 얼굴을 풀며 마차로 향했다. 방금 전의 반응은 장난이었던 모양이었다.

네 사람은 샤를이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왕궁을 향해 나아갔다. 마차 안에서 프레이르는 카린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어떻게 제 아버지인 샤를 폐하를 아는 거죠?”

프레이르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카린에게 물었다. 그녀는 굴곡진 붉은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프레이르의 질문을 받고 손놀림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녀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난 원래 레인가드의 국가마법사였어. 길드스턴이 국왕으로 있을 때부터 레인가드에 충성의 맹세를 했었지. 음... 하지만 사실 샤를과는 신하라기보다는 친구 사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거야. 항상 샤를은 나에게 사석에서는 이름을 부르도록 했거든. 레아첼도 마찬가지였고.”

카린의 말을 들은 프레이르는 어째서 샤를이 카린을 가리켜 ‘자신의 친구’라고 말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카린은 예전부터 샤를과 친분이 깊었던 모양이었다. 사석에서 경칭을 생략하고 이름을 부르도록 한 것이 그 증거였다. 샤를은 여간 친한 사이가 아니면 함부로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가 알기로, 샤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왕비인 엘리스와, 알타미라 후작뿐이었다.

그때, 프레이르의 마음 속에 또다른 의문이 생겨났다. 그는 카린의 말에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샤를과 레아첼, 그리고 카린이 친구 사이였다? 그렇다면 카린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샤를과 친구였다는 뜻인가?

“잠시만요... 그렇다면 지금 카린 양은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제 아버지와 친구 사이였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프레이르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하지만 프레이르의 이런 어조와 달리 카린은 시원스럽게 그지 없는 어조로 간단히 대답했다.

“맞아. 그 때도 샤를은 정말 의젓했지. 포르테빌 같은 난봉꾼과는 전혀 딴판이었어.”

그녀는 포르테빌의 이름을 담으며 킥킥거렸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그녀를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여전히 그에게는 커다란 위화감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알베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는 프레이르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카린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 플레어 양.”

알베로가 말을 걸었다. 카린은 알베로를 돌아보았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알베로의 질문에 카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조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숙녀에게 나이를 물어보다니...”

알베로는 이 반응에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린은 곧바로 찡그렸던 얼굴을 폈다. 아까의 짜증스런 반응은 단지 알베로를 당황하게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표정 변화에 능한 아가씨였다.

“카린 양이 너무 아름답고 귀여워서 알베로 경이 나이가 궁금해진 모양이에요.”

프레이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러자 카린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히 몇 살이나 먹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다만 나는 샤를이 15살일 때부터 레인가드의 국가 마법사가 되었지.”

프레이르와 알베로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렇다면 카린은 대충 생각해봐도 40살은 넘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녀가 샤를과 동갑인 15살에 국가 마법사의 직위를 따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나이는 이미 40을 훌쩍 넘기는 것이 되었다.

프레이르와 알베로의 반응을 지켜본 카린은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즐거운 비밀을 가르쳐주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나이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난 마법사야.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 마법사들은 인간에 비해 수명이 훨씬 긴 대신 성장이 느리지.”

그제서야 프레이르는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요컨대, 카린은 마법사이기 때문에 성장이 느린 것이었다. 그녀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것은 단지 마법사인 그녀는 아직 청소년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어리고 귀엽게 보여서 10대인 줄로만 알았지?”

카린이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르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 말에 프레이르는 잠시 동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곧 킥킥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은 이렇게 동안인 여성들이 좋다며 카린에게 장난스럽게 추근댔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알베로는 의외로 카린은 프레이르와 죽이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레이르는 항상 이렇게 뻔뻔한 소리를 늘어놓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마법사라면... 어떤 속성에 속하십니까?”

프레이르의 장난이 진정되기를 기다리며 알베로가 카린에게 물었다. 마법의 4대 속성인 물, 불, 흙, 공기 중 어디에 속하느냐는 질문이었다. 그 질문에 카린은 오른 손을 들어올렸다.

“맞춰볼래?”

카린은 이렇게 말하며 주먹을 살짝 쥐었다 폈다. 순간, 카린의 오른 손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프레이르와 알베로는 깜짝 놀라 조금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트레버는 이러한 광경을 이미 많이 목격했는지 별다른 동요 없이 카린을 지켜보았다.

“내 칭호는 <홍염의 마법사>. 불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뜻이지.”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마치 장난을 치듯이 손을 빙글빙글 돌리기도 하고, 이리저리 흔들기도 하며 불길을 어루만졌다. 프레이르는 그 모습을 감탄하며 지켜보았다. 카린은 이러한 프레이르의 시선을 즐기며 말했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불꽃으로 이름을 날린, 홍염의 마법사는 바로 다름 아닌 나란 말씀.”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오른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노닐던 불꽃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이 신기한 장난에 프레이르는 박수를 쳤다.

“정말 멋져요.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에요.”

“나중에 시간이 나면 당신에게 한 번 가르쳐 줄까?”

“어? 마법사가 아니어도 가능한가요?”

프레이르가 카린에게 물었다. 그러자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물론 불가능하지만, 에인절 왕조에는 마법사의 피가 조금 섞여 있거든. 그래서 몇 세대를 건너뛰어 간혹 마법사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어쩌면 당신도 마법사의 피가 흐르고 있을지 모르는 것 아니겠어?”

그녀는 프레이르에게 눈을 찡긋했다. 그리고 그녀는 한 동안 불의 속성을 지닌 마법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찬사를 늘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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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8

  • 작성자
    Lv.1 Enya
    작성일
    10.08.31 03:19
    No. 1

    와아 오늘은 분량이 대단히 기네요!!
    게다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ㅎㅎㅎㅎ
    프레이르의 생일에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드네요 ㅋㅋㅋㅋ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二月
    작성일
    10.08.31 08:15
    No. 2

    범상치 않은 인물일거 같아요!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1 제크
    작성일
    10.08.31 09:13
    No. 3

    재밌게 잘 보고 갑니다.
    중세 시대 속에 들어가 있는 느낌이네요.
    간만에 미디블 토탈워나 한 번 달려봐야 겠습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1 NEOshin
    작성일
    10.08.31 09:54
    No. 4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8 백인대장
    작성일
    10.08.31 10:28
    No. 5

    감사히 읽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유정
    작성일
    10.08.31 11:03
    No. 6

    붉은 눈동자 -ㅇ-

    어떻게 프레이를 알까용?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연두초록
    작성일
    10.08.31 13:25
    No. 7

    마법이 없던 중세시대에도 초상화는 있었으니까요. 지금 이 소설에서는 마법이 있으니까 중요 인물에 대해 미리미리 공부했겠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9 은하계
    작성일
    10.09.27 20:11
    No. 8

    프랑스의 역사가 교묘하게 버무려져 있군요
    공부를 많이하는 작가님이시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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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로라시아 연대기 - 23.이단자 신학도의 역위치(3) +1 11.05.20 801 16 8쪽
85 로라시아 연대기 - 23.이단자 신학도의 역위치(2) +2 11.05.15 854 18 7쪽
84 로라시아 연대기 - 23.이단자 신학도의 역위치(1) +2 11.05.11 776 18 8쪽
83 로라시아 연대기 - 베아트리체의 장난 +2 11.05.10 786 13 21쪽
82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4) +1 11.05.08 779 19 13쪽
81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3) +2 11.05.07 766 15 7쪽
80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2) +1 11.05.06 818 13 8쪽
79 로라시아 연대기 - 22.믿음의 수호자(1) +3 11.05.04 850 15 11쪽
78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4) +6 10.10.20 1,080 20 27쪽
77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3) +8 10.10.08 1,137 20 8쪽
76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2) +6 10.09.16 1,214 23 16쪽
75 로라시아 연대기 - 21.카시네예프 대학(1) +7 10.09.13 1,352 23 18쪽
74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4) +7 10.09.12 1,352 24 22쪽
73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3) +6 10.09.08 1,298 25 9쪽
72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2) +8 10.09.05 1,286 27 13쪽
» 로라시아 연대기 - 20.마법사와 신학도(1) +8 10.08.31 1,382 24 20쪽
70 로라시아 연대기 - 세자르의 보고 +14 10.08.28 1,353 26 4쪽
69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3) +12 10.08.27 1,375 33 21쪽
68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2) +6 10.08.26 1,338 33 14쪽
67 로라시아 연대기 - 19.알타미라 후작가(1) +8 10.08.24 1,362 41 20쪽
66 로라시아 연대기 - 아라스에서 맞는 아침 +7 10.08.23 1,404 28 11쪽
65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3) +8 10.08.22 1,401 23 12쪽
64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2) +12 10.08.21 1,385 27 8쪽
63 로라시아 연대기 - 18.재회(1) +7 10.08.18 1,419 26 15쪽
62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4) +15 10.08.17 1,483 24 19쪽
61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3) +7 10.08.16 1,453 19 16쪽
60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2) +10 10.08.15 1,493 23 21쪽
59 로라시아 연대기 - 17.이중목적(1) +6 10.08.14 1,487 24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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