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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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샤를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생각은 샤를이 가진 정치 철학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샤를은 자신의 정책 방향을 대대적으로 수정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것은 그 누구라도 쉽게 받아들일만한 일이 아니었다.
샤를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프레이르의 제안을 고려해보았다. 분명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는 프레이르의 안목은 대단히 날카로웠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프레이르는 현재의 체제가 붕괴 직전이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을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시대적 요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 나라의 군주로 있는 것조차 아깝게 여겨질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었다. 이만한 나이에 이 정도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꿰뚫어볼 수 있는 자는 절대 흔치 않았다.
그러나 시대를 읽는 것과 그 흐름을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두 가지가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프레이르와 샤를은 아직 이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했다.
샤를은 침착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무거운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프레이르의 포부에 공감하고 있었지만 프레이르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급진성과 과격성 또한 인식하고 있었다. 프레이르는 적을 분명히 해서 그들을 짓밟은 다음 빠르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대단히 위험하고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였다. 현 체제를 부수고 구세력을 숙청하기에는 자신들의 힘이 너무 부족했다. 여전히 레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한 귀족파들은 강력한 힘으로 왕실과 왕당파를 압박하고 있었고, 왕실은 알타미라 후작과의 동맹이 없다면 왕실을 유지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제3계급인 시민들의 힘이 커졌다고는 하나 그들의 힘은 아직 제대로 결집되지 못했기에 모래성과도 같은 형국이었다.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오랜 심사숙고 끝에 샤를이 내린 결론은 현재의 정책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프레이르의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아직은 아니야. 시간이 필요하다. 시민들의 힘을 왕당파로 모으고 귀족들의 기반이 더욱 흔들릴 때까지는 기다려야 한다.’
샤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샤를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했다. 샤를 역시 젊고 야심에 불타오르는 국왕이었다. 샤를이라고 해서 이 무너져가는 체제와 시대에 뒤떨어진 귀족들을 모두 깨끗이 숙청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 없었다. 끓어오르는 혈기와 넘치는 야망은 당장이라도 프레이르의 제안을 따를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는 것은 오직 날아오를 때뿐이다.’
샤를은 이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감정을 꾹 억눌렀다. 그는 날아오르기도 전에 날개를 펴다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우를 범할 수 없었다. 지금은 어디까지나 기다릴 때였다.
샤를은 프레이르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아직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다, 프레이르.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샤를의 말에 프레이르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자신의 제안이 거부 당했음에도 아쉬워하는 빛은 전혀 찾을 수 없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는 샤를의 거부에 깨끗이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 듯 두 손을 펴보였다.
샤를은 프레이르가 이미 자신의 결론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프레이르가 아무론 유감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이며 샤를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세요. 전 어디까지나 제 생각을 말씀 드린 것뿐이니까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프레이르는 별다른 충고가 없더라도 샤를의 뜻을 헤아려 스스로 납득한 모양이었다. 굳이 말을 해주지 않아도 프레이르는 이미 샤를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제안을 포기한다면 이 귀족들의 명단 건은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알베로가 샤를과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리는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을 상기시키는 지적이었다.
알베로의 이 지적에 프레이르는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샤를과 알베로에게 두번째 안을 건넸다.
“그럼 이렇게 해보는게 어떨까요?”
프레이르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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