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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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식은 5시까지 계속되었다. 알베로는 결국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프레이르는 알베로와 에버딘이 돌아오지 않자 크게 낙심했다. 근래 들어 보기 드물게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돌아간 에버딘이 걱정되어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울적해할 수는 없었다. 오늘은 두 젊은이가 결혼을 약속하는 경사스러운 날이었다. 왕실의 대표격인 자신이 우거지상을 짓고 있는 것은 두 사람에게 큰 실례였다.
프레이르는 웃는 얼굴로 루크와 로잔느에게 축사를 건넸고, 두 사람에게 준비했던 선물을 전달했다. 프레이르는 루크에게 랭카스터에서 수입해 온 명마를, 그리고 로잔느에게는 수천 km 떨어진 ‘창’국에서 가져온 최고급 비단 50필을 선물해 주었다. 양쪽 모두 약혼 선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었기에 루크와 로잔느는 크게 기뻐하며 프레이르의 선물을 받았다.
두 사람에게 선물을 전달한 후 프레이르는 먼저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는 카린과 함께 마차를 타고 궁성으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샤를이 어젯밤 아이자크 경을 보내 생일 축하연의 문제로 프레이르와 상의할 것이 있다고 전해왔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축하연에 끝까지 참석하는 대신 도중에 궁성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생일 축하연에 관해 상의할 문제라...”
프레이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에요. 매일매일 쉬지 않고 일이 달려드는 군요.”
프레이르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카린은 웃으며 프레이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샤를은 당신보다 다섯 배는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을 거야. 당신이 이해해야지. 다 당신을 위한 일인데.”
카린의 말에 프레이르는 문득 얼마 전에 아버지가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샤를은 자신이 프레이르를 위해서라면 카린을 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그는 온 레인가드가 멸망한다 할지라도 프레이르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것도 프레이르로 인해 이 나라에 주검이 산처럼 흐르고, 피가 강처럼 흐른다 할지라도...
그 때 당시에 프레이르는 샤를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샤를의 냉정함은 프레이르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지만 샤를의 이 집착에 가까운 애정에 그는 섬뜩함을 느꼈다. 샤를의 어조는 침착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정상적인 사람이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자식에 대한 애정을 위해 왕국의 모든 사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그 말은 광기에 젖어 있다고 밖에 여겨질 수 없었다.
“고민거리가 있다는 얼굴이네.”
프레이르의 앞자리에 앉아 있던 카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뭐야? 이 누나한테 털어놔 봐. 에버딘과 베아트리체의 일이야?”
카린이 프레이르를 떠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프레이르가 지금까지 그 일로 낙담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나가 아니라 고모뻘이겠지만 프레이르는 그런 쓸데없는 것을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버지에 관한 일이에요.”
프레이르의 말에 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레이르의 대답이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샤를? 그 완벽남이 왜?”
카린의 질문에 프레이르는 입을 다물었다. 카린의 앞에서 “아버지가 필요하다면 당신을 죽은 개처럼 내다버릴 수도 있대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레이르가 갑자기 입을 다물자 카린은 눈가를 가늘게 떴다. 그리고 그녀는 의혹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 나한테 털어놓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야?”
프레이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카린에게 대답해주는 대신 마차 한구석에 내팽개쳐두었던 책을 꺼내들었다. 카린을 무시하기 위해서였다.
프레이르가 고르지오가 지은 <바르덴 전기>를 집어 들자 카린은 볼을 부풀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그는 잔뜩 부아가 치민 그녀를 무시하며 책을 편 다음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프레이르가 ‘레인가드 남부 바르덴 지방은 난쟁이와의 투쟁으로 얼룩진 곳이다.’라는 도입부를 읽으려는 순간 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재빨리 프레이르의 옆에 앉으며 프레이르에게 팔짱을 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무시해버리면 너무 잔인하잖아.”
카린의 이 집요한 요청에도 프레이르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는 카린에게서 팔을 뺀 다음 <바르덴 전기>의 첫머리를 다시 폈다. 그리고 그는 다리를 쭉 펴서 반대편 의자에 발을 갖다놓은 채 느긋한 태도로 책을 읽었다.
카린은 프레이르가 자신을 무시하자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입을 쭉 내민 채 불만스럽게 프레이르를 노려봤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일부러 책을 눈가로 들어 올리며 그녀를 외면했다.
그러나 <바르덴 전기>를 세 페이지 정도를 읽어나가던 프레이르는 카린의 따가운 시선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카린이 그 루비처럼 빨간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자 찜찜해서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읽고 있던 책을 그대로 편 채 자신의 심란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카린에게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카린. 제 아버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요?”
카린이 움찔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애교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프레이르는 일부러 페이지 하나를 더 넘기며 말했다.
“완벽한 국왕.”
카린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엉망진창인 나라를 20년 만에 이렇게 일으킨 것은 보통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카린의 말에 프레이르는 책을 조금 내리며 다시 말했다.
“그런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아버지만큼 위대한 군주는 없을 거라 저도 생각해요.”
프레이르의 대답에 카린은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 뭐가 걱정이야?”
카린의 물음에 프레이르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는 샤를의 인상을 해치지 않기 위해 애쓰며 천천히 카린에게 물었다.
“카린은 제 아버지가 비정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어떻게든 돌려말하려 했으나 결국 프레이르는 한가운데 직구를 던지고 말았다. 하지만 의외로 이 당돌한 질문은 카린의 의표를 찌른 모양이었다. 카린은 프레이르의 이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흐르자 카린은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프레이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프레이르에게 애정 어린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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