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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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로는 리처드 대공과 레스터 공작 일파가 비밀리에 작성한 명단을 직접 입수하는 것을 불가능하리라 판단했다. 이런 기밀사항을 직접 빼돌리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자금, 그리고 조직이 필요했는데 알베로는 그 중 단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작전을 바꾸어 자신의 재능을 살리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일단 레스터 공작의 심복인 셰리프 남작의 집에서 일하는 마부를 매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이 마부를 통해 셰리프 남작이 방문한 귀족들을 알아내 원래의 명단을 역으로 유추하는 방식을 취했다. 셰리프 남작이 방문한 귀족들 중에서 제법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왕립 학교 졸업생들을 추려내는 식이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그는 프레이르의 명령이 떨어진지 이틀 만에 레스터 공작 일파가 만든 19명의 명단 중에서 17명의 신원을 정확히 알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정말 잘 해줬어요.”
프레이르가 알베로가 가져온 명단을 넘겨보며 말했다. 그는 적어도 나흘 이상 걸릴 줄 알았던 일을 단 이틀 만에 해치운 알베로에게 경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프레이르는 한껏 알베로를 치켜세운 뒤 알베로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알베로를 데리고 샤를이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아이자크 경의 안내를 받으며 집무실에서 샤를을 만나 그에게 알베로가 만든 명단을 전달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 명단이로군.”
샤를이 알베로의 명단을 넘겨보며 말했다. 이틀 전 프레이르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에 샤를은 레스터 공작과 리처드 대공의 명단에 관해 알고 있었다. 이것에 대한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 프레이르가 샤를에게 미리 보고를 해두었기 때문이었다.
샤를 역시 프레이르와 마찬가지로 알베로의 보고가 매우 빨리 도착한 것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은 채 알베로가 만든 명단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알베로는 그 모습을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알베로가 국왕인 샤를에게 무언가 보고서를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알베로는 자신의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레이르에게만 보고서를 올려왔기 때문에 상당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샤를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으음......”
샤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보고서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만족스럽지도, 불만족스럽지도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알베로는 샤를의 표정에서 그가 자신이 올린 보고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이 명단은 확실한 것이겠지?”
샤를이 알베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알베로가 조금 뻣뻣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알베로는 너무 자신 있게 대답한 것을 후회했다. 자신감을 보이는 것은 좋지만 건방지게 보이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곧바로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샤를은 이런 점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비서관이라면 자신이 올린 보고서에 충분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샤를의 지론이었다. 그런 점에서 알베로의 자신 있는 대답은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알베로의 보고서에 가타부타 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도 그는 알베로를 그다지 신뢰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에 대한 대책은 생각해 보았느냐?”
샤를이 이번에는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샤를의 질문에 프레이르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알맹이들만 쏙 뽑아가겠다면 저는 각개 격파로 맞받아칠 생각이에요.”
프레이르의 말에 샤를과 알베로는 어리둥절해했다.
“각개 격파?”
샤를이 의아해하며 프레이르에게 물었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웃으며 샤를에게 말했다.
“졸업생들을 세 부류로 나누어 각각 대응을 하는 거예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꼽았다.
“첫 번째 그룹은 알베로가 제출한 그룹이에요. 유능하면서 동시에 귀족파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인재들.”
프레이르의 설명이 이어졌다.
“두 번째 그룹은 유능하면서 동시에 왕당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우호 세력의 인재들.”
프레이르가 장난스럽게 씩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는 일부러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세 번째 그룹은 이도저도 아닌 졸업생이거나 아직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들.”
프레이르는 이렇게 졸업생들은 나눈 뒤 샤를에게 말했다.
“저는 첫 번째 그룹에게는 당근과 채찍을, 두 번째 그룹에게는 관직을, 세 번째 그룹에게는 기회를 줄 작정이에요.”
프레이르의 이 은유적인 말에 샤를과 알베로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프레이르는 웃으며 샤를에게 제안했다.
“아버지께서 기획하신 지방 순회를 이용하는 거예요.”
“윽...”
알베로가 순간적으로 허가 찔린 표정으로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샤를 역시 프레이르의 이 교묘한 방법에 혀를 내둘렀다.
프레이르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정치에 관해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 사람은 프레이르의 의도를 간파했다.
“귀족파에서 졸업생들을 포섭하지 못하게 그들을 지방으로 데리고 가버리겠다는 뜻입니까?”
“무슨 그런 실례되는 말을.”
알베로가 놀라서 묻자 프레이르가 정색했다.
“그렇게 말하면 마치 제가 귀족파에 물을 먹이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잖아요.”
프레이르가 고상한 척 점잔을 빼며 말했다. 그러나 알베로는 프레이르의 입가에 악마 같은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지방 순회를 통해 인재들에게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주려는 것뿐이에요.”
분명히 이것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어느 쪽이 진정한 이유인지 샤를과 알베로는 잘 알고 있었다.
프레이르가 덧붙였다.
“이번 지방 순회에 첫 번째 그룹과 두 번째 그룹 사람들을 초대해서 함께 지방 순회를 떠나자고 제안하는 거예요. 왕실에서 함께 지방 순회를 떠나자고 제안하면 이것을 거절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겠죠. 귀족파가 자신들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이 시기에 왕가의 제안을 거절하면 왕실과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것으로 해석될 테니까요.”
프레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왕실이 건넨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반대로 다른 귀족파에게 왕당파에 가담하려는 배신행위로 보이겠죠. 지방 순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귀족파에서 제안한 관직에 앉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프레이르의 제안에 샤를과 알베로는 귀를 기울였다. 확실히 프레이르의 제안은 효과적으로 귀족파를 분열시킬 수 있었다. 직접 관직으로 인재를 매수하는 것이 아니면서도 귀족파의 움직임을 차단하는 동시에 그들의 의도를 좌절시킬 수 있는 방책이었다.
“거기다 귀족 자제들을 이끌고 지방을 순회하면 대내적으로 그들이 왕실에 굴복했다는 인상을 줄 수 있죠. 많은 자제들이 참여할수록 이번 순회는 단순한 순회 이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될 거예요.”
프레이르가 자신의 순회로 얻을 수 있는 부가 수입을 제시했다. 프레이르의 말대로라면 특별히 관직으로 그들을 매수하지 않더라도 많은 귀족 자제들이 왕당파에 흡수될 수 있었다. 경제적이기도 하고 후학들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레인가드의 장래를 담당한 인재들이 수도와 자신의 영지뿐만이 아니라 레인가드 전역을 둘러보는 것은 큰 공부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르의 제안에는 중대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귀족파와 왕당파의 갈등을 부추길 것입니다. 왕당파와 귀족파의 경계를 뚜렷이 하면 국론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알베로가 프레이르의 제안 속에 담긴 문제점을 곧바로 지적했다.
알베로의 지적대로 프레이르의 제안의 핵심은 적과 아군을 분명히 하는 데 있었다. 즉 ‘지방 순회에 참여하는 자 = 왕당파, 지방 순회에 불참하는 자 = 귀족파’라는 공식이 되어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것은 국론을 둘로 분열시키고 당파 갈등을 부추기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죠.”
알베로의 지적에 프레이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미 내재되어 있던 갈등을 표면으로 끄집어내는 것뿐이에요.”
프레이르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귀족파와 선을 그을 때가 필요하긴 했어요.”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다졌다.
성서에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이 있다,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담으면 부대도 찢어지고 술도 못 쓰게 만들기 때문이다. 프레이르가 귀족파와 선을 긋고 개혁을 서두르려 하는 것은 현재 레인가드의 상황이 바로 성서에서 말했던 그 순간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각 지방에 할거하는 귀족들과 이를 토대로 쌓아올린 봉건주의 체제로는 더 이상 이 사회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이 프레이르의 생각이었다. 각지에 작은 정부가 할거하여 지방에 힘이 분산된 현재의 체제는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프레이르는 지방에 분산된 힘을 중앙으로 모으고 획일화된 관료와 군사 체제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레인가드라는 강력한 민족 국가를 세우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정치체제를 달성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일찍이 봉건주의 체제가 머지않아 붕괴할 것이라 예견한 샤를 역시 개혁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방식은 프레이르의 생각과 달랐는데 샤를은 차츰 힘을 키워가는 시민들을 신세력으로 포섭하는 방법을 취했다. 그리고 그는 구세력과 신세력 사이에 조화를 이루며 조용히 하나둘씩 개혁을 진행시켜왔다. 과격한 개혁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프레이르는 샤를의 이 점진적인 개혁에 만족할 수 없었다. 다소의 혼란이 발생하더라도 그는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구세력을 끌고 갈수는 없었다. 무너져가는 봉건주의 체제를 청산하고 지금 신세력과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였다. 이를 위해서는 귀족파를 배제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해요.”
프레이르가 다시 한 번 다짐하듯이 말했다.
“언제까지나 귀족파를 포용할 수는 없어요. 새 시대에 뒤떨어지는 세력은 과감히 버려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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