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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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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89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1.06.0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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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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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
22쪽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1)

DUMMY

“사람이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아?”

프레이르가 아르넷을 돌아보며 물었다. 프레이르의 옆에서 아이스크림을 떠먹던 아르넷이 입가를 슥 닦으며 어정쩡하게 말했다.

“어? 뭐가?”

아르넷은 코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채 프레이르를 돌아보았다. 프레이르는 혀를 차며 아르넷에게 말했다.

“친구가 약혼하는데 관심 좀 가져라. 루크와 로잔느가 아이스크림만도 못하냐?”

프레이르가 아르넷의 코를 가리키며 핀잔을 주었다. 아르넷은 투덜거리며 코를 쓱쓱 닦은 뒤 단상에 서서 반경 50km의 행복은 모두 자신에게 끌어다 모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크를 바라보았다.

“음... 확실히... 저 녀석 우리랑 놀 때는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아르넷의 지적에 프레이르가 말했다.

“세상의 절반이라도 갖게 된 표정이야."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한 뒤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나머지 절반은 첫날 밤을 치르는 날에 갖게 되겠지."

프레이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자 아르넷은 아이스크림을 먹다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프레이르의 표현이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었다. 루크는 그토록 갈망하던 로잔느와 약혼을 맺는다는 사실에 누가 봐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는 아까부터 침착해하지 못하며 자꾸 로잔느가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로잔느는 자주색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채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평소의 발랄한 그녀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숙한 모습이었다. 과연 로잔느는 세르티프 가문의 차녀이자 앞으로 레스터 가문의 안주인이 될 만한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로버트 마일러와 뷔그노들이 추방된 지 열흘..... 카시네예프는 몇 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성대한 이벤트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레스터 공작가문의 장남인 루크레스티 경과 세르티프 백작가문의 로잔느 양과의 약혼식이었는데 이것은 피로 얼룩졌던 신학 토론회의 기억이 잊히는데 공헌했다. 레인가드에서 가장 막강한 가문들의 결합에 가십거리를 쫓아다니는 귀족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레스터 가문과 세르티프 가문은 이러한 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며 역사에 길이 남을 성대한 약혼식을 열었다.

이 약혼식에는 레스터 가문과 세르티프 가문은 물론 카시네예프에 머무르는 거의 모든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초대되었다. 대충 세어 봐도 3천 명 가까운 인원이 초대된 것으로 보였는데 이것은 아무리 봐도 레스터 공작이 자신의 세를 과시한 것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또한 이 약혼식을 일부러 프레이르의 생일 축하연 열흘 전으로 잡은 것은 왕당파에게 자신들의 결합이 공고함을 시위를 하려는 목적도 담겨져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짐작했다.

이런 내막을 눈치채지 못할 프레이르가 아니었다. 레스터 공작의 의도를 빤히 들여다본 프레이르는 친구인 루크의 행복을 아무런 사심 없이 축복해줄 수 없었다. 레스터 가문과 세르티프 가문의 단단한 결속은 프레이르에게 있어서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적대적인 세력의 단결은 언제나 불쾌한 법이었기에 프레이르는 아까부터 가식적인 미소로 일관하고 있었다. 속내를 숨기고 미소를 짓느라 안면에 마비가 올 지경이 된 프레이르는 이 약혼식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전하.”

카린이 프레이르에게 다가왔다.

“알베로 경이 잠깐 동생을 보러 가겠다며 나한테 보좌를 맡겼어요.”

카린이 어색한 존댓말을 구사하며 프레이르에게 보고했다. 프레이르는 그녀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이 시작되기 전 알베로는 미리 에버딘을 에스코트해 오기 위해 30분 정도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 약혼식에서는 딱히 두 명씩이나 보좌관이 필요하지 않았던지라 프레이르는 너그럽게 알베로의 개인적인 사정을 받아들여주었다.

“알고 있어요.”

프레이르는 카린의 어색한 말투를 따라하며 대답했다. 프레이르의 대답에 카린은 빙긋 웃으며 프레이르의 옆에 섰다.

로버트 마일러가 떠난 뒤, 카린은 샤를과 국가 마법사의 계약을 맺었다. 카린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마법사라고 판단한 샤를은 그녀를 프레이르의 보좌관으로 삼아주었다. 이제 성인이 될 프레이르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말과 함께였다.

프레이르는 샤를의 이 인선을 매우 반겼다. 활발한 마법사인 카린은 프레이르와 죽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프레이르는 알베로 이외의 보좌관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다. 알베로는 분명 뛰어난 비서관이었지만 아직 경험이 부족했고 자신의 색깔이 강했다. 따라서 연륜이 많은 카린은 프레이르에게 알베로와는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한편 알베로의 독주를 견제해 줄 수 있었다. 유능한 비서관을 주의하라는 포르테빌의 충고를 프레이르는 항상 명심하고 있었다.

“이 약혼식을 막을 방법은 없어. 그러니 너무 그렇게 속상해 하지 않아도 돼. 각오했던 일이잖아.”

카린이 프레이르를 살피며 그 귀에 작게 속삭였다. 어느새 존댓말은 쏙 들어간 상태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는 존댓말을 쓰려 노력했으나 프레이르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마다 평소대로 돌아와 건방진 말투를 구사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카린의 스스럼없는 말투가 더 좋았기에 그녀를 그대로 방치해두었다.

프레이르는 자신이 계속 미소를 짓고 있었음에도 카린에게 그 속마음을 간파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멋쩍게 웃었다.

“그렇게 티 났나요?”

프레이르가 묻자 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샤를도 그렇고 당신도 포커페이스에 능하지.”

카린이 덧붙였다.

“하지만 내 눈썰미는 그 이상이야.”

카린은 우쭐하게 뒷짐을 지으며 ‘에헴’하고 말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프레이르는 카린의 머리를 격렬하게 쓰다듬어주고 싶어졌지만 카린은 아이 취급 받는 것을 싫어했기에 꾹 참아야만 했다.

프레이르는 안타까움에 입맛을 다시며 식탁 위에 놓인 사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단상 위에 서서 사람들의 축하를 받는 루크에게로 눈길을 돌린 뒤 들고 있던 사과를 베어 물었다.

바로 그때, 알베로가 에버딘과 함께 프레이르에게 돌아왔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방금 돌아왔습니다.”

부드럽지만 어딘지 차가운 느낌을 주는 목소리에 프레이르는 등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아마도 이번 약혼식에서 최고라 할 만한 풍경을 발견하여 하마터면 들고 있던 사과를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알베로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온 에버딘은 예전에 프레이르가 선물한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연갈색의 머리카락을 모두 위로 말아 올리는 대신 적당히 옆머리를 아래로 내린 뒤 간단한 리본으로 풍성한 머리칼을 장식했는데 노란색 드레스의 발랄한 느낌에 맞추어 에버딘을 한층 더 청순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노출을 꺼리는 에버딘의 취향에 맞추어 성적인 매력을 억누르려는 듯한 스타일로서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가 골라준 것이었다. 에버딘은 이런 드레스가 익숙하지 않은 모양인지 일부러 머리에 묶은 리본 외에 그 어떠한 장신구도 착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그녀가 일부러 목걸이나 귀걸이를 차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에버딘의 매력은 전혀 감춰지지 않았다. 에버딘이 다가오자 주위에 서 있던 남자들은 모두 일순간 넋을 잃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3년 전에는 그녀를 촌뜨기 취급하며 에버딘의 행동 하나하나를 헐뜯었던 영애들도 그녀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화려한 장신구 하나 없어도 자연스레 드러나는 그녀의 아름다움은 가히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 미녀’라는 베아트리체의 평가에 걸맞았다.

프레이르는 알베로의 부름도 잊은 채 에버딘을 바라보았다. 평소에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드레스를 입고 멋을 부린 그녀의 아름다움은 너무 강력했다. 만약 에버딘을 만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면 숨이 멎어버렸을 것이라 생각될 정도로 프레이르는 그녀의 모습에 혼을 빼앗겼다.

“으으...”

잠시 후 겨우 제정신을 찾은 프레이르가 신음 소리를 냈다. 에버딘은 마치 달빛처럼 고고하면서도 어쩐지 수줍은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프레이르가 묘한 반응을 보이자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신이시여! 그 모습은 제가 저 말고 다른 사람한테 보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프레이르가 울먹거리는 어조로 말하며 에버딘에게 말했다. 아까부터 안절부절 하지 못하며 프레이르를 바라보고 있던 에버딘은 프레이르의 호들갑스러운 반응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프레이르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더욱 집중되자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오빠인 알베로의 뒤로 숨어버렸다. 19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아, 이런!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소리치며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제발 여신의 모습을 보여줘!”

프레이르의 바보 같은 외침에 아르넷과 카린을 비롯해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프레이르의 이 반쯤 진심이 섞인 농담에 에버딘은 더욱 얼굴이 다가올라 알베로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여자 마음 모르는 녀석 같으니. 상대를 봐가면서 너스레를 떨어야지.”

카린이 프레이르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프레이르에게 속삭였다. 프레이르가 카린을 돌아보자 카린이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게 칭찬하면 될 것을 일부러 놀리기나 하고 말이야. 역시 당신은 아직 어린애야.”

카린의 지적에 프레이르는 씩 웃어보였다. 카린의 충고를 들은 프레이르는 알베로의 등 뒤에 숨은 에버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는 알베로의 옷을 붙잡고 있는 에버딘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진심이야. 여신처럼 아름다워, 에버딘. 정말 잘 어울려.”

프레이르는 에버딘을 칭찬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에버딘은 부끄러운 듯 더욱 고개를 숙였지만 프레이르의 이 반응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아까처럼 뒤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이런 프레이르와 에버딘을 보면서 카린은 킥킥거렸고, 다른 남자들은 부러움과 질시의 눈초리로 프레이르를 응시했다.

한편 알베로와 에버딘이 합류하자 프레이르의 주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체로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이 이끄는 귀족파보다 왕당파에 가까운 인물들로서 루크의 약혼식에서조차 프레이르와 가까이 하기를 원하는 부류였다. 그들은 왕당파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프레이르와 그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 줄을 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어느새 프레이르의 주위에는 하나의 큰 무리가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알타미라 후작과 베아트리체가 레스터 공작이 아니라 프레이르에게 먼저 다가왔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안녕하십니까, 전하.”

알타미라 후작이 프레이르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프레이르는 알타미라 후작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50세가 다 되어가고 있건만 여전히 후작의 풍채는 훌륭했다. 오히려 연륜과 무게감까지 더해져 3년 전에 비해 더욱 거물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플레어 양도 안녕하십니까?”

알타미라 후작이 카린에게 안부를 물었다.

“물론 괜찮아요.”

알타미라 후작의 안부인사에 화답한 뒤 카린이 프레이르에게 존댓말을 쓰며 말했다.

“잠깐 물러나도 좋을까요, 전하?”

프레이르가 무슨 일이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공손한 어조로 터무니없는 말을 했다.

“잠깐 놀고 싶어서 말이에요.”

보좌관으로서는 경질감인 변명이었지만 프레이르는 별말 없이 그녀를 보내주었다. 알베로가 돌아온 이상 이런 약혼식에서 두 사람이나 비서관을 거느릴 필요는 없었다. 비록 철없이 굴기는 하지만 카린 역시 진지해야 할 때는 진지해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프레이르는 이번만은 그녀를 풀어주기로 했다.

카린이 자리를 떠나자 알타미라 후작은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그 다음 그는 프레이르의 뒤에서 에버딘의 손을 잡고 있는 알베로를 바라보았다. 카린을 살펴볼 때보다 훨씬 오랜 시간 동안 알타미라 후작은 알베로와 그 여동생을 관찰했다.

프레이르의 두 비서관들을 연달아 관찰한 알타미라 후작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나만으로도 부러운 비서관을 둘씩이나 거느리다니... 말 그대로 양어깨에 날개를 달고 계시군요.”

알타미라 후작의 칭찬에 프레이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날개들이 뼈로 가득 차 있어서 영 다루기 힘들지만 말이죠.”

프레이르의 뼈 있는 농담에 알타미라 후작은 다시 빙그레 웃었다.

“유능한 비서관들일수록 자기 색깔이 강한 법이지요. 그 정도는 감수하셔야 좋은 인재를 쓸 수 있습니다.”

알타미라 후작은 프레이르와 날씨와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은 뒤 알베로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알베로 경은 저와 면식이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알타미라 후작이 알베로에게 친근감 있게 인사를 건넸다. 알베로는 알타미라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후작님의 살롱에서 몇 번 뵌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항상 후작님의 보호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알타미라 후작은 알베로의 공손한 답변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는 알베로의 손을 꼭 붙들고 있는 에버딘에게로 눈을 돌렸다.

“이 아름다우신 분은 아마도 에버딘 카스티야 양이겠군요.”

알타미라 후작의 눈길이 에버딘에게로 향하는 순간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알베로가 얼떨결에 에버딘을 자신의 등 뒤로 숨긴 것이었다. 알베로의 이 행동은 마치 적으로부터 여동생을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는 알베로의 반응에 크게 당황했다. 이러한 행동은 대단히 무례한 행위였기 때문이었다.

알베로 역시 자신이 알타미라 후작에게 큰 실례를 범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조금 비켜서 알타미라 후작이 에버딘을 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알타미라 후작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구했다.

“후작님께 실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알타미라 후작이 너그럽게 웃으며 알베로에게 말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동생이니 애지중지할 수밖에요. 이해합니다.”

알타미라 후작의 말에 이번에는 에버딘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며 알타미라 후작에게 인사를 올렸다.

“에버딘 카스티야입니다. 이렇게 후작님을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후작은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베아트리체에게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자태만큼이나 마음씨도 비단결같이 고운 분이라고요.”

알타미라 후작의 칭찬에 에버딘은 얼굴을 붉혔다. 여전히 그녀는 타인의 칭찬에 익숙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에버딘 양은 그런 식의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부끄럼쟁이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았던가요, 아버지?”

여태까지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던 베아트리체가 나섰다.

“아무리 카스티야 양이 여신처럼 아름답고 비단결처럼 마음이 곱다지만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부끄러워할 거예요.”

에버딘은 베아트리체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리며 베아트리체의 장난스런 눈길을 피하다가 프레이르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프레이르의 눈이 자신에게 못 박힌 듯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에버딘은 확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가 아까 자신이 했던 바보 같은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베아트리체는 프레이르와 알타미라 후작의 말을 인용하여 에버딘을 배려해주는 척하면서 오히려 그녀를 더욱 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죠, 전하?”

베아트리체가 눈을 찡긋하며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프레이르는 다시 한 번 베아트리체야말로 진짜 마녀라고 생각했다. 뭐가 에버딘을 ‘그렇게 놀리면 안 돼요.’란 말인가? 얼마 전에 있었던 무릎베개 사건이 에버딘을 놀리려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하지만 죽어도 이러한 불만을 입 밖에 낼 수 없는 프레이르였다. 프레이르를 누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베아트리체 앞에 프레이르는 순순히 백기를 들어올렸다.

“베아트리체 양의 말이 무조건 맞아요.”

“미묘하게 불만스럽다는 느낌이 묻어나오는 말투인데요?”

베아트리체가 지적하자 프레이르는 재빨리 맞받아쳤다.

“하하, 불만이라뇨. 베아트리체 양이 말씀하신다면 팥이 콩이라고 해도 믿을 거고, 리처드가 제 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거예요.”

“그 말은 아까 제가 했던 말이 그만큼 말도 안 된다는 뜻이겠죠?”

베아트리체가 웃는 낯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프레이르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켜 뜨끔했다. 블랙 조크로 베아트리체의 뒤통수를 쳐보려 했으나 역시나 그녀는 프레이르보다 한 수 위였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 앞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프레이르의 이 비굴한 모습에 아르넷은 킬킬거리며 웃었고, 에버딘과 알타미라 후작은 딱하다는 듯 프레이르를 바라보았다. 오직 알베로만이 아무 반응 없이 알타미라 후작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자, 베아트리체. 우리만 전하를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알타미라 후작이 프레이르를 도와주려는 듯이 베아트리체의 손을 이끌었다. 베아트리체는 아버지에게 빙긋 웃어 보인 뒤 프레이르에게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루크와 레스터 공작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마치 공주님과 같은 자태를 뽐내며 그녀는 프레이르에게서 멀어졌다.

“베아트리체를 부인으로 뒀다간 개줄에 목이 묶인 애완견 신세가 되고 말거야, 당신”

누군가가 프레이르의 뒤에서 불쑥 말했다.

“으왓!”

프레이르는 화들짝 놀라며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돌아왔는지 카린이 프레이르의 옆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양고기로 만들어진 꼬치를 오물거리며 먹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했지만 이제는 아주 여우가 다 되어버렸으니까.”

카린은 들고 있던 양고기 꼬치를 다시 깨물었다.

“언제 돌아왔어요?”

프레이르가 카린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실은 이 근처에 있었어.”

카린은 프레이르에게 간단히 대답한 뒤 이를 악 다물었다. 그리고 그는 인상을 쓰며 꼬치에 꽂힌 양고기를 이로 잡아 당겼다.

“으... 질겨...”

카린이 양고기를 뜯다 말고 꼬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원망스럽다는 듯 꼬치를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레인가드 녀석들은 맛을 모르는군. 양고기를 이렇게 꼬치로 만들어버리면 어떻게 먹으라는 거야? 무슨 쓰다 버린 가죽벨트처럼 질기네.”

카린이 투덜거리는 것을 지켜보며 프레이르가 재빨리 말했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아직 전 베아트리체와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래? 저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데?”

카린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에버딘의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카린과의 대화에 열중한 프레이르는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물론 알타미라 후작은 절 엮으려 들고 있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식으로 약혼도 하지 않았고 말이죠.”

“아래로 흐르는 물이 ‘아래로 흘러라.’라고 약속해서 아래로 흐르는 건 아니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거지. 당신과 베아트리체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냐?”

카린이 농담처럼 가볍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레스터 공작과 세르티프 백작이 정략결혼으로 동맹을 맺는다면 에인절 왕가와 알타미라 후작 가문도 결혼으로서 동맹을 공고히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당연히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가 될 터였다. 물 흐르듯이 당연한 전개였다.

처세술에 밝고 눈치가 빠른 프레이르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알타미라 후작의 생각에 놀아나는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베아트리체와의 결혼이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상황의 주도권을 알타미라 후작에게 넘겨주는 것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정략결혼은 프레이르가 가장 싫어하는 화제였다.

“그만 둬요.”

프레이르가 카린에게 명령했다. 카린은 프레이르가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르가 더 이상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하기 싫다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늘 장난스럽게 행동하지만 물러날 때와 진지해져야 할 때를 알고 있는 카린이었다.

우연이었을까? 프레이르의 눈이 카린 다음으로 머문 곳은 에버딘이 서 있는 자리였다. 그리고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어두운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아까 카린이 돌아왔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제나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던 그녀의 입가에는 어딘지 모를 슬픔이 머물러 있었다.

“에버딘...?”

프레이르가 조금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에버딘은 화들짝 놀라며 프레이르를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이 연회에 어울리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는 평소처럼 청초하다기보다는 애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프레이르가 그녀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알베로가 프레이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아까 알타미라 후작 때와 마찬가지로 에버딘을 보호하려는 듯 등 뒤로 숨긴 다음,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여동생이 조금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잠시 물러나도 되겠습니까, 전하?”

공손하지만 힘이 들어가 있는 단호한 말투였다. 프레이르는 에버딘과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에버딘의 어두운 기색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알베로는 프레이르에게 인사를 한 뒤 에버딘을 데리고 연회장에서 나갔다. 프레이르는 두 사람이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 얼굴에는 낭패감과 함께 당황함이 떠올라 있었다.

카린은 이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간의 나이로 50년에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녀가 이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를 읽지 못했을 리 없었다. 프레이르와 베아트리체, 그리고 알베로와 에버딘의 대화를 모두 지켜본 카린은 앞으로 네 사람의 관계를 더욱 주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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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로라시아 연대기 - 29.의회의 권표(3) +4 11.10.14 762 19 6쪽
114 로라시아 연대기 - 29.의회의 권표(2) +3 11.10.08 707 15 5쪽
113 로라시아 연대기 - 29.의회의 권표(1) +3 11.10.02 695 15 6쪽
112 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4) +2 11.09.24 674 13 5쪽
111 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3) +3 11.09.16 804 14 11쪽
110 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2) +1 11.08.15 801 13 19쪽
109 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1) +3 11.08.10 842 15 12쪽
108 재미삼아 해보는 성격 테스트 +7 11.07.31 894 8 11쪽
107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5) +1 11.07.31 744 17 19쪽
106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4) +2 11.07.22 942 13 11쪽
105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3) +7 11.07.11 826 14 20쪽
104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2) +2 11.07.06 813 12 13쪽
103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1) +5 11.06.28 888 12 18쪽
102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3) +1 11.06.26 826 12 13쪽
101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2) +2 11.06.24 724 15 11쪽
100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1) +2 11.06.21 888 14 9쪽
99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4) +5 11.06.16 731 12 11쪽
98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3) +5 11.06.12 715 14 11쪽
97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2) +2 11.06.11 716 14 7쪽
»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1) +5 11.06.09 769 18 22쪽
95 로라시아 연대기 - 로버트 마일러 추방 +5 11.06.05 764 14 13쪽
94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6) +7 11.06.02 753 16 11쪽
93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5) +2 11.06.02 693 14 16쪽
92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4) +5 11.06.01 735 15 9쪽
91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3) +2 11.05.31 694 15 8쪽
90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2) +5 11.05.30 765 18 11쪽
89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1) +3 11.05.27 830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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