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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r 님의 서재입니다.

로라시아연대기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Stellar
작품등록일 :
2011.11.13 22:52
최근연재일 :
2014.12.15 00:37
연재수 :
146 회
조회수 :
272,748
추천수 :
2,587
글자수 :
788,474

작성
11.07.11 00:08
조회
825
추천
14
글자
20쪽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3)

DUMMY

잠시 후 에버딘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백작 부인에게 기댔던 머리를 들고 지친 기색으로 눈가를 비볐다. 그리고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문득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프레이르와 알베로가 앉아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

프레이르와 알베로가 의자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안 에버딘이 눈을 깜박거렸다. 그녀는 잠이 덜 깬 표정으로 프레이르와 알베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프레이르는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을 깨우는 데는 키스가 최고라는데 실례해도 괜찮겠어?”

프레이르의 이 농담에 에버딘은 겨우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녀는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바람에 옆자리에서 졸고 있던 백작 부인도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노부인 역시 그녀가 자는 사이에 프레이르가 이곳에 이미 도착했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다.

다음에 이어진 광경은 프레이르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에버딘은 당황한 나머지 사과 인사를 건네는 것과 옷매를 정돈하는 것을 동시에 하려다 샤퓌르 백작 부인의 발을 밟고 비틀거렸다. 샤퓌르 백작 부인은 에버딘에게 발을 밟히는 와중에도 에버딘이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에버딘을 붙잡아주었다. 분명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겠지만 노부인은 그런 내색을 전혀 하지 않으며 에버딘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에버딘의 손을 꼭 잡은 채 샤퓌르 백작 부인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백작 부인에게 손을 붙잡힌 에버딘도 프레이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옆에 놓인 화톳불보다 새빨갛게 얼굴이 물들어 있었는데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과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프레이르는 ‘풋’하고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정숙한 샤퓌르 백작 부인이 이렇게 정중하게 사과를 하는데 거기에 웃음을 터뜨리는 것은 상당한 실례였다. 프레이르는 웃지 않기 위해 초인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백작 부인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숙녀 분들을 기다리게 했으니 제가 사과를 드려야죠. 이런 시간까지 두 분을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프레이르는 두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자 에버딘이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그녀는 품속에 무언가를 꼭 껴안은 채 외쳤다.

“저, 전하께서 죄송하시다니...... 갑자기 찾아온 제가 잘못한 거예요. 오빠에게 말해서 전하를 이곳으로 모셔놓고 잠을 자다니......”

에버딘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프레이르와 알베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마음씨 착한 아가씨였다. 몇 년이 지났지만 에버딘의 이러한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에버딘은 어렸을 때부터 타인에게 조금이라도 폐를 끼치면 가슴 속 깊이 죄책감을 느꼈다. 카린이나 베아트리체라면 친한 이들에게는 권위 의식이 희박한 프레이르가 이런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뻔뻔하게 대응했을 테지만 소심한 에버딘은 프레이르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에버딘이 프레이르에 대한 미안함에 울먹거리자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나야말로 늦어서 미안해.”

프레이르가 말했다.

“실은 점심쯤에 알베로한테 네가 이곳에서 기다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거든. 그래서 일정이 끝나면 곧바로 너를 만나러 가겠다고 알베로에게 약속해두고 그만 깜빡했지 뭐야.”

프레이르는 스스로의 머리를 구박하듯 자기 머리를 몇 번 쥐어박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리에 누워서 졸다가 알베로와 했던 약속이 생각나서 이제 온 거야. 그러니 늦은 내가 잘못한 거지.”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 태연히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에버딘이 졸고 있었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평소의 프레이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신사적인 태도였다. 다른 사람의 약점을 잡으면 집요하고 악마같이 물고 늘어지는 모습은 온데 간데 없었다.

“그렇죠, 알베로?”

프레이르가 알베로에게 동의를 구했다. 알베로는 프레이르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프레이르에게 점심 때 에버딘과의 약속을 알려주었다는 것도, 프레이르가 자리에서 졸다가 이곳에 왔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프레이르는 오늘 하루 종일 바빠서 알베로의 이런 사적인 부탁을 들어줄 새도, 자리에서 잠깐 눈을 붙일 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르의 이런 거짓말이 동생인 에버딘에 대한 배려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알고 있는 알베로는 프레이르의 거짓말에 동조해주었다. 그는 에버딘이 안심할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로는 에버딘을 위해서라면 거짓말이 아니라 지옥불이라도 뒤집어 쓸 수 있는 사내였다.

“봤지? 이렇게 널 기다리게 한 건 내 책임이야. 그러니까 그렇게 마음 쓰지 않아도 돼.”

프레이르가 마치 알베로가 당연히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에버딘에게 말했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화술이었다. 이 자연스러운 전개에 아이처럼 순진한 에버딘은 겨우 마음이 가벼워진 모양이었다. 그녀는 글썽이던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아이 같다니깐.”

프레이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겨우 에버딘을 진정시킨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가볍게 물었다. 아직까지 그는 에버딘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

프레이르의 질문에 에버딘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의 일로 당황하는 바람에 그녀는 이곳에 온 용건을 까맣게 잊은 상태였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그녀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튀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뭔가 볼 일이 있어서 온 것 아니야?”

프레이르의 이 마법 같은 동작에 그녀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기억해냈다.

“아......”

에버딘은 다시 얼굴이 빨개졌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우물거렸다.

프레이르는 베아트리체를 제외하면 나이 또래 중 가장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사실 에버딘의 모습을 보는 순간부터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프레이르의 생일인 오늘, 굳이 이곳까지 찾아와 프레이르를 직접 보고자 했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에버딘에게서 직접 그 이유를 말하도록 기다렸다. 에버딘이 용기를 내 이곳까지 와 준 것은 고마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영 모양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서 직접 그 이유를 듣고 싶었다.

프레이르의 이런 마음을 눈치 챘는지 알베로와 샤퓌르 백작 부인 역시 에버딘이 말하는 것을 기다려 줬다. 두 사람 모두 에버딘을 극진히 아꼈기 때문에 지금은 에버딘이 솔직하고 당당하게 말하기를 기대했다.

에버딘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오빠인 알베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알베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에버딘 스스로 말하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한편 샤퓌르 백작 부인은 에버딘의 두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는 에버딘에게 힘을 실어주듯 그녀를 살짝 앞으로 밀었다. 친딸처럼 아끼는 에버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주기 위해서였다.

두 사람으로부터 무언의 지원을 받은 에버딘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프레이르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는 가슴에 품고 있던 물건을 프레이르에게 불쑥 내밀었다.

“이, 이걸!”

에버딘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프레이르에게 수수하지만 깔끔하게 포장된 떡갈나무 상자를 건넸다.

“응? 이게 뭐야?”

이미 모든 내막을 간파했지만 장난기 많은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짓궂게 물었다.

“폭탄? 아무리 내가 적이 많다지만 에버딘 너한테까지 원한을 산 것 같진 않은데?”

“서, 선물이에요!”

프레이르의 말도 안 되는 농담에 당황한 에버딘이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냈다. 그녀는 곧바로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지만 프레이르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생일 선물이라는 거야?”

프레이르의 물음에 에버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프레이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와아! 고마워!”

프레이르는 미처 몰랐다는 듯 호들갑을 떨며 에버딘이 건네준 선물을 받아들었다. 희극 배우와도 같이 과장된 몸짓에 선물을 건넨 에버딘이 민망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에버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대, 대단한 건 아니에요.”

에버딘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듯이 얼버무렸다. 프레이르의 이 호들갑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보고 실망하시면...”

“빈 상자는 아니지?”

프레이르가 에버딘의 말을 자르며 불쑥 물었다. 이 뜬금없는 질문에 에버딘은 조금 당황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프레이르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대만족이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어떤 선물을 받더라도 기뻐할 자신이 있어.”

프레이르가 리처드 대공이 보낸 선물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이 말에 에버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알베로는 프레이르가 진심으로 에버딘을 배려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에버딘의 선물이 프레이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여동생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알베로는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열어봐도 돼?”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물었다. 에버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선물을 내보이기 쑥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물러설 프레이르가 아니었다. 프레이르는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그럼 여기서 이걸 확인하는 대신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열어봐야지. ‘카스티야 에버딘 양이 보내준 선물’이라고 모든 사람 앞에서 자랑하면서 말이야. 아르넷도 부르고, 루크도 부르고... 카린도 불러야겠다.”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에버딘에게 있어서 이보다 두려운 협박은 없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약점을 제대로 파고들며 특유의 심리게임을 벌였다.

프레이르의 농담을 곧이곧대로 들은 에버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려는 순간 프레이르가 재빨리 말했다.

“여기서 열어봐도 괜찮지?”

프레이르의 화술을 당해내지 못한 에버딘은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그녀는 영 내키지 않는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이르는 씩 웃으며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에버딘은 겁먹은 새끼 고양이마냥 프레이르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프레이르가 자신이 건네 준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것이었다.

떡갈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를 열자 푹신푹신해 보이는 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프레이르는 에버딘이 준 선물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바로 베개였다.

프레이르는 그 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비단과 고급 천으로 수놓아진 그 베개는 그다지 값이 나가지는 않아보였으나 제법 훌륭한 솜씨의 장인이 짠 것이 분명했다. 그 부드러운 질감과 뒷면에 수놓인 환형의 십자가 그림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분명히 교회의 축복을 받은 성물임에 틀림없었다. 이런 성물은 최고급품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제대로 된 선물을 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에버딘이 변명하듯 말했다.

“전하께서 매일 피곤하시고 두통을 앓고 계시다고 오빠에게 들어서요...... 머리에 나쁜 피가 몰리거나 악령이 머물면 그런 증상이 생기는 거라 교회에서 그러던데...... 교회에서는 그럴 때 교회의 축복을 받은 베개를 쓰면 된다고 해서 짠 건데......”

에버딘이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네가 직접 짠 거라고?”

프레이르가 놀라며 에버딘에게 물었다. 그러자 에버딘은 황급히 말했다.

“교회에서 직접 짠 것이 아니면 축복을 해줄 수 없다고 말해서......”

프레이르는 다시 베개를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장인의 솜씨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훌륭한 베개였다. 그 박음질 자국이라든가 수가 놓인 위치 모두 깔끔하고 고풍스러웠다.

프레이르는 그 베개를 가만히 지켜보다 에버딘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에버딘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

에버딘은 당황하여 손을 움츠렸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채 돌기도 전에 프레이르는 그 손을 뒤집어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하얀 손 곳곳에 남아 있는 바늘 자국을 발견했다. 그녀의 작고 가느다란 손가락에 한 눈에 보기에도 깊이 찔린 것이 분명한 상처가 몇 군데 보였다.

“이 베개를 짜다가 난 상처들이지?”

프레이르가 에버딘에게 물었다. 에버딘은 황급히 손을 빼내려 했으나 프레이르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할 때까지 놔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프레이르의 이 굳은 의사표시에 에버딘은 난처한 얼굴로 프레이르를 바라보다가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황급히 덧붙였다.

“별로 대단한 상처는 아니에요. 베개를 짜다가 잠깐 조는 바람에 몇 군데 찔린 거니까......”

에버딘의 이 말에 프레이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오늘 수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그는 이보다 더 정성이 담긴 선물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프레이르에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프레이르는 이미 그녀가 이 선물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눈에 선했다. 프레이르는 자신의 에버딘이 생일에 맞춰 밤을 새워가며 베개를 짜는 것과 교회에 직접 찾아가 축복을 받아오는 과정을 마음 속에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 작고 별 볼일 없지만 깊은 정성이 담긴 선물에 깊이 감동했다.

프레이르는 에버딘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안절부절 못하며 프레이르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프레이르가 이 선물에 실망할까봐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슴에 모은 두 손이 작게 떨릴 정도로 그녀는 긴장하고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프레이르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에버딘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는 에버딘의 그 부드러운 손을 들어 올려 그 손에 입 맞추었다. 이 돌발적인 행동에 에버딘은 깜짝 놀라 두 손을 빼려 했지만 프레이르는 그녀의 두 손을 더욱 꽉 잡으며 놓아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당황하는 에버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성서의 구절을 인용했다.

“......의인의 비둘기와 석청은 내가 열납하리니 이는 그들의 제사가 목적에서 난 것이 아니요 그 중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니라. 대저 의인의 신실한 번제는 내가 기뻐할 것이나 악인의 제사는 내치리로다.”

성서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프레이르는 에버딘에게 생일 선물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프레이르가 생각하기에 이보다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르의 이 말에 에버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버딘은 소심했지만 어리석은 아이는 아니었다. 정숙한 샤퓌르 백작 부인 아래서 고대 레인가드어로 된 성서를 읽으며 자라온 그녀는 프레이르가 인용한 이 글귀의 의미를 단번에 이해했다.

“이건 내 진심이야.”

프레이르가 말했다. 그가 한 말은 아벨 신이 악인들의 화려한 제사보다 의인들의 소박하지만 진심이 담긴 제사를 더 기뻐한 것 같이 자신에게는 다른 값비싼 생일 선물보다 에버딘의 정성이 담긴 이 선물이 더 소중하다는 뜻이었다. 프레이르는 이 마음이 진심이라고 에버딘에게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 선물에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어?”

프레이르는 두 손을 꼭 잡힌 채로 잔뜩 긴장하고 있는 에버딘에게 말했다.

프레이르의 이 진심어린 말에 에버딘은 마음이 놓인 모양이었다. 에버딘의 경직된 얼굴에 겨우 화사한 미소가 돌아왔다. 그녀로서는 지금까지의 걱정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에버딘은 프레이르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기뻐하시면 저는 좋아요.”

프레이르의 말이 진심이었던 것처럼 에버딘의 이 말도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두 손을 놓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기뻐하는 게 더 좋은데 말이지.”

프레이르는 이렇게 말하며 잠시 동안 에버딘의 얼굴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프레이르로서는 에버딘이 미소를 짓고 있는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또렷이 기억해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명화를 감상하는 것처럼 프레이르는 에버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가만히 관찰했다.

에버딘이 프레이르의 시선에 다시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리자 프레이르는 씩 웃었다. 그는 에버딘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봐. 피곤할테니......”

프레이르가 에버딘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샤퓌르 백작 부인과 알베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백작 부인과 알베로 경도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세요. 벌써 10시가 다 되었는데 여기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프레이르의 말에 알베로가 프레이르에게 말했다.

“전하를 침실에 모셔다 드리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알베로는 에버딘의 선물을 기쁘게 받아준 프레이르에 대한 감사와 비서관으로서의 의무 때문에 프레이르를 침실까지 모시고 가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고 프레이르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프레이르는 고개를 저었다.

“애도 아니고 침실까지 데려다 줄 필요는 없어요. 거기다 숙녀 분들을 이 밤중에 세워 둘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프레이르가 백작 부인과 에버딘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하, 저희는...”

알베로와 마찬가지의 이유 때문에 백작 부인이 프레이르에게 자신들은 괜찮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프레이르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프레이르의 고집을 이길 만큼 백작 부인은 완고한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그녀는 프레이르의 말에 따라 에버딘을 데리고 자신이 타고 온 마차로 향했다. 알베로 역시 프레이르의 고집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별 수 없이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프레이르는 알베로가 백작 부인과 에버딘을 마차에 태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검소하고 정숙한 노부인의 취향에 맞춘 마차는 아담한 크기로서 언뜻 봐서는 귀족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낡아 있었다. 알타미라 가문에 채무를 져 가며 근근이 살아가는 카스티야 가문 사람들로서는 이 이상의 사치를 부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프레이르는 이 낡은 마차를 살펴보다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마차 안을 바라보았다. 마차의 작은 창문 사이로 에버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두 손을 창문에 올린 채 프레이르를 바라보고 있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여 얼른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 귀여운 반응에 프레이르는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다음 손을 흔들었다.

잠시 후 마차는 요란한 바퀴소리와 함께 왕궁 입구에서 멀어져갔다. 포장도로의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프레이르는 마차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카스티야 가문 사람들을 배웅했다.

마차가 그의 시야로부터 완전히 사라지자 프레이르는 미소를 지으며 에버딘이 준 선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 베개는 화톳불 때문인지 혹은 몇 시간 동안이나 껴안고 있었던 에버딘의 온기 때문인지 굉장히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마치 어린 강아지가 품 속에 안긴 것 같은 느낌이었다.

프레이르는 그 선물을 보물처럼 소중히 품속에 안았다. 그리고 그는 선물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자신의 침실로 되돌아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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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7

  • 작성자
    Lv.17 나니아
    작성일
    11.07.11 01:20
    No. 1

    알콩달콩하니 좋은걸요? 가끔은 이렇게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이야기도 있어야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6 대흥안령
    작성일
    11.07.11 08:29
    No. 2

    글을 읽는 네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더군요!!

    귀여운 에버딘의 사랑스런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8 형관애비
    작성일
    11.07.11 10:45
    No. 3

    감정이입이 돼서 눈물이글썽여지더군요 로맨스는이렇게써야하는거죠 요즘나오는것들보면 어찌나짜증나는지 아무튼 작가님은 능력자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6 石破天
    작성일
    11.07.11 15:22
    No. 4

    손가락을 튕기며 레드썬 하며 마법의 단어를 내뱉었다면....
    잘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유정
    작성일
    11.07.11 16:36
    No. 5

    캬아 따뜻한 느낌의 이야기 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1 韓熊
    작성일
    11.07.12 11:18
    No. 6

    헉 청순 미소녀 루트 중반단계인 손수만든 선물 득템이군요 ㅎㅎ
    언제나 재미있게 읽고갑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요호이
    작성일
    11.07.12 11:30
    No. 7

    재밌게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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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로라시아 연대기 - 28.19인의 명단(1) +3 11.08.10 841 15 12쪽
108 재미삼아 해보는 성격 테스트 +7 11.07.31 893 8 11쪽
107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5) +1 11.07.31 744 17 19쪽
106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4) +2 11.07.22 941 13 11쪽
»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3) +7 11.07.11 826 14 20쪽
104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2) +2 11.07.06 813 12 13쪽
103 로라시아 연대기 - 27.생일(1) +5 11.06.28 888 12 18쪽
102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3) +1 11.06.26 826 12 13쪽
101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2) +2 11.06.24 724 15 11쪽
100 로라시아 연대기 - 26.샤를의 계획(1) +2 11.06.21 888 14 9쪽
99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4) +5 11.06.16 731 12 11쪽
98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3) +5 11.06.12 715 14 11쪽
97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2) +2 11.06.11 715 14 7쪽
96 로라시아 연대기 - 25.루크의 약혼식(1) +5 11.06.09 768 18 22쪽
95 로라시아 연대기 - 로버트 마일러 추방 +5 11.06.05 763 14 13쪽
94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6) +7 11.06.02 753 16 11쪽
93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5) +2 11.06.02 693 14 16쪽
92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4) +5 11.06.01 735 15 9쪽
91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3) +2 11.05.31 694 15 8쪽
90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2) +5 11.05.30 764 18 11쪽
89 로라시아 연대기 - 24.생 마르통 대학살(1) +3 11.05.27 829 13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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