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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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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4.07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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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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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172. 꿈의 무대

DUMMY

“당연히 있죠. 감독님도 화를 낼 때가 있어요.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나. 저는 사람이 차분한 상태에서도 무서워질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감독님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소리 지른 적이 없거든요. 대신 주변의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능력을 가졌죠. 저는 이 부분이야말로 그가 선수단을 꽉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인 힘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감독님은 배려가 깊은 분입니다. 프로답지 못한 플레이를 한다거나 이런 절대적인 규율을 어기지 않는 이상 개인을 특정 잡는 공개 처형식의 질책을 하지 않거든요. 언론에 선수를 내걸어 대놓고 비판한 적도 없죠.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피치 위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풍경이 있거든요.” - 수석 코치 ‘닐 스튜어트(Neil Stewart)’ -


“저희는 그걸 반우스갯소리로 겨울이 다가온다(Winter is Coming)고 표현해요. 정말 한겨울이라도 된 것처럼 싸늘해지거든요. 심장이 얼어붙고, 등골은 오싹하고, 식은땀이 흐르기도 하죠. 안 그래도 중저음인 사람이 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눈을 마주 보면서 추궁한다고 상상해보세요.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예요. 이건 진짜 당해본 사람만 알 겁니다. 하일랜드 지방의 겨울에는 나름대로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 감독님의 겨울은 겪을 때마다 견디기가 힘들어요. 겨울을 피하는 방법은 유일하죠. 온몸을 바쳐 열심히 뛰면서 그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것뿐입니다.” - 로스 카운티 센터백 ‘스콧 보이드(Scott Boyd)’ -


*******


잠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2015년 8월 24일.


로이 베넷은 구단주실에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 채 TV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식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4 포트에 편성된 팀은 GNK 디나모 자그레브, FC 바테 보리소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마카비 텔아비브 FC, KAA 헨트, 말뫼 FF, FC 아스타나, 로스 카운티 FC입니다. 여기도 무시할 수 없는 팀이 꽤 있는데요?]


로스 카운티는 유로파 리그 정상에 올라서면서 예선 플레이오프를 거치지 않고, 챔피언스 리그 조별 단계에 무혈 입성하는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더 높은 포트 배정까지 받아내지는 못했다.


“아무리 80위라지만, 명색이 챔피언인데 4 포트라니······.”


포트 편성은 유럽 축구 연맹(UEFA)에서 산정하는 리그 랭킹과 클럽 랭킹을 기준으로 한다.


1 포트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과 상위 랭킹 리그의 우승팀이 나눠 받게 되며, 이후엔 순수하게 클럽 랭킹으로만 나열하는 방식.


리그 랭킹은 혼자만 잘해서 오를 수 없는 구조이니 50위 언저리에서 14위까지 상승한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수준이고.


로스 카운티가 속한 80위는 참가한 팀 중에서 비교적 하위권에 속한다.


베넷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탈리안이 부임하기 전 로스 카운티는 500위 밖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구단이었으니까.


100위권 안에 든 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나게 올라온 셈이다.


여담으로 2013/14 시즌 당시 셀틱의 클럽 랭킹은 62위였다.


하여간 우승팀으로서의 체면이 구겨지는 꼴이었으나 그만큼 이 챔피언스 리그라는 대회는 차원이 다른 곳.


작년 유로파 리그 본선에 들어가기 위한 최종 관문에서 혈투를 치렀던 독일 분데스리가 3위 팀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같은 그룹에 묶여서 포트 배정을 받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16강에서 치열한 연장전 승부 끝에 간신히 꺾었던 그 볼프스부르크마저 고작 3 포트라니.


상위 그룹이라 할 수 있는 1~2 포트. 이쪽에 속한 팀들은 대부분 유로파 리그로 내려갔을 때 곧바로 우승 후보가 될 수 있는 전력.


말 그대로 진정한 별들의 전쟁이었다. 로스 카운티는 그런 어마어마한 무대에 들어선 것이다.


[1 포트 그룹에는 FC 바르셀로나, 첼시 FC, FC 바이에른 뮌헨, 유벤투스 FC, SL 벤피카, 파리 생제르맹 FC, 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PSV 아인트호벤. 이쪽부터 추첨하여 각 조를 배정 받게 됩니다.]


저 쟁쟁한 라인업을 보라.


유로파 리그의 최종 보스 세비야도 참 버거웠던 상대였건만, 그와 비교도 되지 않는 굉장한 팀들이 즐비하지 않은가.


새삼 두 무대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당시의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기쁨을 안겨줬던 유로파 리그를 스스로 폄하하고 싶진 않았지만,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매번 이 순간은 심장이 떨려 미치겠군.”


조 추첨이 다가오자 베넷은 긴장으로 얽힌 한숨을 천천히 토해내었다.


로스 카운티와는 평생 엮일 일이 없는, 아예 다른 세상이라고만 여겼던 그 챔피언스 리그라서일까? 더욱 숨이 막혀 올 지경이었다.



어느덧 3 포트까지 배정이 완료되고, 4 포트 그룹이 각 조에 들어갈 차례.


[바테 보리소프가 첫 번째로 나왔는데요. 그들이 맞이할 조는······ F조입니다. 파리 생제르맹, 아스날, 볼프스부르크가 속한 그룹이네요.]


첫 주자로 나선 희생양이 끔찍한 곳에 끌려가 버리는 걸 보며 베넷은 마른침을 삼켰다.


TV 화면에 비쳐지는 바테 보리소프의 임원진들은 헛웃음을 짓고만 있었다.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우리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어느 곳 하나 쟁쟁하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베넷은 유독 한 곳을 눈여겨보고 있는 중이었다.


H조. 벤피카, 레버쿠젠, 올림피아코스가 모여 있는 저곳이라면 로스 카운티가 어느 정도 해볼 만하다.


물론 저들도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레벨이지만, 그나마 낫다는 거다.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다른 조에 비하면.


[아스타나의 배정이 나왔군요. H조에 들어갑니다.]


“안돼에에에!”


유일한 희망이 떠나가자 베넷은 절규를 내질렀다.


“이렇게 허무하게······.”


남은 선택지는 맹수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소굴에 들어가는 것뿐.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이 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마침 추첨 볼에서 꺼낸 종이에 적힌 로스 카운티의 이름. 베넷은 재빨리 허공에 성호를 긋고, 양손을 맞잡으며 외쳤다.


“그나마 나은 곳! 이제 나은 곳은 없지만······ 어쨌든 그나마 나은 곳!”


[로스 카운티의 배정은······.]


“신이시여, 제바아알!”


[E조가 나왔군요.]


“······E조?”


화면에 비춘 명단을 확인하자마자 베넷은 뭍으로 나온 해파리처럼 축 늘어지고 말았다.


[로스 카운티는 첼시, 레알 마드리드, 샤흐타르 도네츠크가 속한 조에 들어가게 됩니다. 유로파 리그 챔피언이 4 포트에 속한 조라······ 상당히 재밌는 죽음의 조가 만들어진 것 같은데요? 하하하.]


“웃지 마······.”


[과연 작년의 그 충격적인 퍼포먼스를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보여줄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많은 기대가 되네요.]


중계하는 해설자는 해맑게 웃으며 속 편한 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베넷은 몸을 의자 뒤로 젖히며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린 진짜 추첨 운 하나는 더럽게 없는 것 같아.”



<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 결과 >

A조 :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시티, 디나모 키예프, 말뫼

B조 : 유벤투스, AT 마드리드, 갈라타라사이, 마카비 텔아비브

C조 : 바르셀로나, 포르투, AS 로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D조 : 제니트, 발렌시아, 올랭피크 리옹, 디나모 자그레브

E조 : 첼시, 레알 마드리드, 샤흐타르 도네츠크, 로스 카운티

F조 : 파리 생제르맹, 아스날, 볼프스부르크, 바테 보리소프

G조 : 바이에른 뮌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CSKA 모스크바, 헨트

H조 : 벤피카, 레버쿠젠, 올림피아코스, 아스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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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조 >

첼시(잉글랜드)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샤흐타르 도네츠크(우크라이나)

로스 카운티(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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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파 리그 올해의 선수

카를로스 바카(세비야)


유로파 리그 올해의 감독

안토니오 델 레오네(로스 카운티)



다음날 이어진 유로파 리그 조 추첨식에서는 미뤄뒀던 올해의 어워드까지 병행하여 마무리되었다.


선수 쪽 수상은 세비야의 카를로스 바카.


7골 3어시스트, 총합 10개의 공격 포인트. 결승전에서도 득점을 기록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던 그가 받는 게 타당할 것이다.


경쟁자로 거론된 로스 카운티 후보는 제임스 블랜차드와 아메드 델샤드.


블랜차드는 결승전에서도 나쁘지 않은 플레이를 펼쳤으나, 골에 관여한 건 없어서 바카와의 지표 싸움에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델샤드는 인상 깊은 수비를 여러 번 보여주긴 했어도 나폴리전에서 대량 실점을 했던 점이 결국 걸림돌로 작용하고 말았다.


그러나 감독은 모두의 예상대로였다.


소외된 혹은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재능들을 발굴하고, 타고난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한데 규합해 단단한 팀을 만들어냈으며, 매 경기 맞춤 전술을 준비해 나와 차례대로 강적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었던.


이 작은 스코티시 구단의 진정한 핵심 전력.


애당초 로스 카운티는 유로파 리그 본선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칭찬을 보낼만한 수준의 규모였다. 그런 팀을 지휘하며 기어이 우승컵까지 거머쥐었으니 세간에서 얼마나 화제가 되었겠는가.


그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만일 바르셀로나가 트레블을 일궈내지 못했다면 루이스 엔리케 대신 델 레오네가 유럽 올해의 감독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결승전에서 세비야의 베테랑 감독 우나이 에메리와의 수 싸움을 밀리지 않고, 되레 한발 앞서 나갔던 모습은 많은 세계인의 뇌리에 강하게 박혀 아직도 한창 입에 오르내리는 중이다.


이쯤 되니 챔피언스 리그에 올라온 그가 이번에도 놀라움을 선사해줄 수 있을지 주목받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 이제 억 단위의 인구가 인지하고 있는 이름.


만일 그가 올 시즌 떠날 의사를 보였다면 온갖 곳에서 달려들며 혼신의 구애를 펼쳤을지도 몰랐다.


잔류를 선언한 지금도 알게 모르게 접촉하여 꼬드기려 하거나 최소한 물밑 작업을 진행하려는 구단들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물론 그가 모든 걸 다 해낸 건 아니다. 로스 카운티 선수들이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줬기에 이룰 수 있던 업적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안이 없었다면 그들의 활약 역시 저조했을 거라는 평.


당사자에겐 불쾌할 수도 있는 의견이었지만, 아마 선수들은 딱히 부정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감독을 위해 죽으라면 기꺼이 목숨까지 바칠 기세입니다. 대체 어떻게 구워삶은 걸까요? 우리는 구단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릅니다. 그저 델 레오네의 완벽한 전사들이 되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죠. 거대한 돌풍을 일으킨 이후 숱한 이적설에 휘말렸음에도 로스 카운티가 전력을 대부분 지킬 수 있던 비결입니다. 선수들이 감독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기에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거예요.” - 축구 평론가 ‘그렉 코너(Greg Connor)’ -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탈리안이 공들여 조각한 걸작품 로스 카운티는 리그를 넘어서 다른 영역에서까지 적잖은 파급력을 끼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가 UEFA 2016 유로 예선에서 같은 조에 속한 유럽의 강자,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우승팀 독일의 발목을 잡아채는 놀라운 이변을 일으키면서 조 2위로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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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 소집 명단 >


알렉산더 캐리(북아일랜드)

폰투스 얀손(스웨덴)

대니 패터슨(스코틀랜드)

리 월리스(스코틀랜드)

리차드 브리튼(스코틀랜드)

마크 브라운(스코틀랜드)

스콧 보이드(스코틀랜드)

에이든 딩월(스코틀랜드)

앤드류 톰슨(스코틀랜드)

존 맥긴(스코틀랜드)

아메드 델샤드(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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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대표 차출 인원 A매치 플레이 간략 보고서 >


[ 페로 제도 0 : 4 북아일랜드 / 유로 2016 예선]

[ 북아일랜드 2 : 0 헝가리 / 유로 2016 예선]

드디어 올리버 노우드와 알렉산더 캐리의 공존 해법을 찾은 듯하다. 북아일랜드 감독 마이클 오닐은 캐리를 3선에 두고, 노우드를 2선에 올려서 역할 배분을 나눴다. 빌드업 주도를 캐리에게 맡기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 결과 안정적인 시스템이 되었고, 페로 제도와 헝가리를 완벽하게 제압할 수 있었다. 캐리의 국가대표 행보는 순조롭게 갈 것으로 보인다.


[ 러시아 3 : 1 스웨덴 / 유로 2016 예선 ]

[ 스웨덴 1 : 1 오스트리아 / 유로 2016 예선 ]

폰투스 얀손은 벤치에서 자신의 나라가 러시아에 붕괴하는 걸 지켜봐야만 했고, 오스트리아전에서는 선발로 나와 2연패를 막는 데 공헌했다. 이로써 스웨덴은 주전 수비 라인을 재구성하는 데 고민 좀 하게 될지도 모른다.


[ 조지아 0 : 3 스코틀랜드 / 유로 2016 예선 ]

[ 스코틀랜드 1 : 0 독일 / 유로 2016 예선 ]

로스 카운티가 스코틀랜드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새로 발탁되어 합류한 앤드류 톰슨은 조지아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훌륭한 데뷔전을 치렀다. 중요한 건 그다음으로, 대니 패터슨을 제외한 전부가 선발로 나선 스코틀랜드 대표팀은 탄탄한 경기력을 선보이며 에이든 딩월의 결승 골로 독일을 무너뜨리는 쾌거를 이뤄냈다. 경기가 끝난 뒤 스코틀랜드 국민들은 미스터 딩월 구호를 합창하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 덴마크 0 : 1 알바니아 / 유로 2016 예선 ]

[ 알바니아 1 : 1 포르투갈 / 유로 2016 예선 ]

아메드 델샤드는 덴마크전에서 라이트백을, 포르투갈전에서는 센터백을 소화하며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비록 막판에 터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헤더 골을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그걸 제외하면 발군의 수비력을 보여주었다. 센터백으로 뛰는 걸 싫어하는 델샤드지만, 그의 다재다능함 덕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것 같다. 그래도 백스리 시스템에 익숙해져서인지 예전에 비하면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


독일을 잡아낸 이후, 전문 축구 분석 프로그램 Scottish Football Day에서는 흔치 않은 유명 인사를 게스트로 초대하여 해당 경기에 대해 언급했다.



< Scottish Football Day >


[ 케니 달글리시(Kenny Dalglish : 리버풀 레전드 & 스코틀랜드 국가대표 최다 출장 기록자) : 참으로 감명 깊은 시합이었습니다. 독일전은 굉장히 시사하는 바가 컸어요. 단순히 승리를 얻은 걸로 끝날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


[ 스티브 맥멀런(Steve McMullen : 진행자) : 어떤 부분에서 말인가요? ]


[ 케니 달글리쉬 : 만일 로스 카운티가 일으킨 돌풍이 처음부터 없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월리스와 맥긴은 다른 팀에서 활약했던 적 있으니 논외로 쳐도 말이죠. 브리튼, 딩월, 톰슨 같은 선수들이 국가대표에 발탁될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


[ 스티브 맥멀런 : 오, 그렇게 생각하니까 정말로 끔찍한데요? ]


[ 케니 달글리시 : 독일전을 앞두고 문득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어요. 유로 본선 진출도 힘들 거란 전망이었던 스코틀랜드였잖아요? 실제로 우리는 1996년 이후로 4회 연속 본선 진출에 실패하고 있고요. ]


[ 스티브 맥멀런 : 올해도 예선에서 미끄러질 거란 예상이 대부분이었죠. ]


[ 케니 달글리시 : 사실대로 말하면, 예전의 라인업은 그 암울한 전망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유로파 리그 우승 주역들이 합류하고 나서부터는 느낌이 달라요. 성적도 좋습니다. 독일을 잡고 조 2위로 올라섰어요. 로스 카운티의 비약은 결과적으로 스코틀랜드의 전력까지 급상승시켜버린 겁니다. ]


[ 조니 밀러(Jonny Miller : 고정 패널) : 저도 동감해요. 여기서 블랜차드까지 부상에서 돌아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는다고 상상하면 스코틀랜드인으로서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 스티브 맥멀런 : 하하, 저도 갑자기 설레는데요. 이대로 간다면 유로에서의 기대치도 점점 오르게 되겠군요? ]


[ 케니 달글리시 : 그렇죠. 참 재밌는 상황입니다. 남쪽 나라에서 건너온 이방인 덕에 우리 조국이 강해지고 있어요. 전 머지않아 그가 곧 스코틀랜드인 모두가 사랑하는 이탈리아인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아니, 이미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



자국 레전드 케니 달글리시의 극찬은 축구를 즐기는 이 나라 국민의 생각을 정확히 대변해주는 것이었다.


동화 같은 스토리를 가진 팀, 그 팀이 보여주는 매력적이면서도 화끈한 경기력, 그 팀을 지휘하는 이탈리안 신사 또한 적을 만들고 다니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특별히 싫어할 이유도 없다.


게다가 유럽 대항전에서 수년간 구겨왔던 스코티시 리그의 체면을 되살려놓기까지.


작년엔 ‘응원하는 팀은 각자 달라도 세컨드 팀은 로스 카운티로 통일.’이란 말이 나돌 만큼 거의 모두의 팀으로 선택되어 열렬한 성원을 받았었다.


그리고 국가대표의 선전으로 이어진 선수들의 활약은 카운티 신드롬의 유효 기간을 한동안 더 연장시킬 것처럼 보였다.


[화려했던 A매치 주간이 끝났습니다! 이번 주말 재개되는 프리미어십, 햄던 파크에서 이 놀라운 독일전 승리를 안겨줬던 멤버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극적인 승리에 도취된 해설자가 무의식에 편향적인 멘트를 내뱉어도 딱히 지적하려는 사람들이 없었으니 말이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6 Round >

로스 카운티 : 세인트 미렌

2015년 9월 12일 (토) 12:30

햄던 파크 (관중 수 : 40,540명)



[로스 카운티 / 4-1-2-3]

FW : 잭 마틴 / 에이든 딩월 / 필립 로스

CM : 존 맥긴 / 대런 케틀웰

DM : 알렉산더 캐리

DF : 리 월리스 / 폰투스 얀손 / 대니 패터슨 / 스티브 샌더스

GK : 마크 브라운



[들어갑니다! 존 맥긴의 마수걸이 골! 하필 세인트 미렌과의 경기에서 첫 골이 나오고 맙니다!]


[캐리의 프리킥은 수비가 잘 막아냈지만, 얀손과 경합 도중 몸의 중심을 잃으면서 멀리 걷어내지 못한 게 화근이 됐군요. 박스 외곽에 대기하고 있던 맥긴의 왼발에 걸려버렸습니다. 상단 구석에 정확히 꽂혀 들어갔네요.]


[로스 카운티에 와서 처음 기록한 득점이라 기쁠 텐데도 셀레브레이션을 하지 않습니다. 몇 년간 몸담아왔었던 친정팀에 대한 예우겠죠.]


맥긴의 골만 아니었다면 세인트 미렌은 폭주 기관차 같은 로스 카운티의 리그 연승 행진을 가장 먼저 끊어낸 팀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것이다.


3~4일 간격으로 치렀던 두 번의 A매치 경기. 이후 소속팀에 복귀해 일주일도 안 지나서 다시 필드를 밟아야 하는 일정.


반면 세인트 미렌은 국가대표에 차출된 선수가 적었기에 대부분 2주가량을 쉬면서 체력을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런 조건 속에서 델 레오네는 체력 안배 때문인지 평소 베스트 일레븐과 다른 라인업을 구성해 나왔고, 단단히 뒤를 잠근 상대 감독의 수비 축구에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초반 분위기까진 큰일 하나 저지르는 듯했으나 과거 그들의 선수였던 맥긴의 전반전 선제골이 찬물을 제대로 끼얹어버린 셈이었다.


[로스 카운티는 확실히 되는 팀이네요. 오늘은 그동안 보여준 것에 비하면 퍼포먼스가 좋은 편이라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맥긴의 골이 들어가면서 어려울 수 있었던 경기 운영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해설진의 말 대로였다.


세인트 미렌은 골을 내준 뒤에도 탄탄한 수비를 유지하며 추가 실점을 막아냈지만, 화력이 뒤쳐진 탓에 점수를 뒤집어내진 못했다.


로스 카운티도 생각만큼 위협적인 기회를 많이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 여러모로 맥긴에게 당한 실점이 뼈아픈 일이었다.


물론 선제골이 없었다면 이탈리안 감독이 후반전에 또 어떤 승부수를 꺼내 들어서 판을 뒤흔들어 놓았을지도 모르겠지만.


[후반전 80분, 마지막 교체 카드로 앤드류 톰슨이 투입됩니다. 오늘 아메드 델샤드와 리차드 브리튼은 풀타임으로 휴식을 가지게 되겠군요.]


결과적으로 보면 로스 카운티는 중대한 일전을 앞두고, 체력적인 이득을 많이 보면서 승리까지 얻어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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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 카운티 1 : 0 세인트 미렌 >

존 맥긴(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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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 15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풀럼 로드, 스탬퍼드 브리지.


챔피언스 리그, 첫 경기를 앞두고 열린 첼시 측 컨퍼런스.


“음······. 그럼, 조제. 질문해도 될까요?”


한 명이 대표로 나서며 조심스레 물었고, 주변의 다른 기자들도 슬쩍 눈치를 보며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말씀하시죠.”


정중하게 대꾸하는 목소리.


하지만 그것이 기자들을 더 긴장케 만드는 원인이었다.


“그······ 챔피언스 리그가 다가왔습니다. 분위기를 반전하기 좋은 기회 같은데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기자의 질문에 천천히 입을 여는 남자.


뚜렷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매가 돋보이는 얼굴. 머리가 하얗게 셌으나, 모델이나 영화배우를 해도 위화감이 없을, 미중년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그런 외모였다.


“챔피언스 리그가 지닌 특별함은 새로운 동기부여를 일깨워줍니다. 방향을 잃고 표류하던 배에 돛을 펴고 나아가기 좋은 타이밍이죠. 우리는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다시 순항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전혀 문제 될 게 없는 답변.


“그렇군요. 그런데······ 첫 상대가 만만치는 않을 것 같은데요. 로스 카운티는 조제 당신도 잘 알고 있겠죠?”


“유로파 리그 우승을 거둔 기적의 팀이라고들 하죠. 그 점은 동의합니다. 기적이라 부를 만한 일이었죠. 저 또한 그들의 축구를 꽤 흥미롭게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너무나도 무난한 답변.


“로스 카운티와 치르는 경기를 기대 중인가요?”


“그들은 작년에 가장 주목 받던 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기대 중이냐고요? 물론입니다.”


“······.”


아니다. 이 맛이 아니다.


지금의 답변들은 온화함을 연기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무난함과는 거리가 먼, 진정으로 쇼맨십이 뭔지 아는 인물이었으니까.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내뱉으며, 예의 따위를 차리는 데 신경 쓰지 않는 거만함의 대명사로 이름을 날린 독설가.


조제 무리뉴(Jose Mourinho) 답지 않은 인터뷰였다.


“다음 분은 누가 질문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미소로 일관하는 무리뉴.


기자들이 보기에는 그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전혀 달갑지도 않은 모습일 뿐이었다.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남은 달 겨울 다들 조심하시길..
인후통으로 며칠간 고생했더니
건강의 소중함을 새삼 느낍니다.
독자분들도 건강하시길 바라겠습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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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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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 201. 공간 싸움 (2) +11 24.02.27 643 39 31쪽
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198 198. 대면 +5 24.01.14 839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3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8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4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8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7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1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2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5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4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1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9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2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69 50 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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