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Diov 님의 서재입니다.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웹소설 > 일반연재 > 스포츠, 일반소설

Diov
작품등록일 :
2017.12.04 19:58
최근연재일 :
2024.04.07 19:32
연재수 :
203 회
조회수 :
1,082,623
추천수 :
33,838
글자수 :
1,875,939

작성
24.01.14 18:24
조회
839
추천
35
글자
25쪽

198. 대면

DUMMY

“그 사람은 일에 미쳤어요. 워커홀릭? 그런 표현으로도 부족해요. 그냥 일을 위해 살고,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죠. 맹세컨대 그가 잠깐 휴식을 가지는 건 봤어도 제대로 쉬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삼 년 내내 말이에요. 밤에 감독실 창문이 환하게 밝혀져 있는 건 일상다반사고, 가끔 같이 식사할 때도 축구에 관한 얘기뿐이라니까요. 참 경이로우면서도······ 그렇게 살라고 한다면 난 못할 거 같아요.” - 단장 ‘대런 코너(Darren Connor)’ -


*******


경기가 끝난 뒤, 터널로 들어온 파리 생제르맹 선수들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은 상태였다.


탈락이 믿기지 않는 표정.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 초점이 흐려진 동공이 그들의 심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로스 카운티인데, 그리고 홈에서 치르는 건데 지겠어?’


그런 마음으로 안일하게 임했다가 한방을 제대로 먹은 셈. 빤한 패턴과 읽히기 쉬운 전술도 문제였지만, 1차전을 패배하면서 불리한 처지에 놓였음에도 몇 가지 이점만 믿고서 방심해 버린 탓이다.


“즐라탄, 이번 경기의 소감을 말해줄 수 있나요?”


터널에 모인 기자들이 맨 뒤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오는 선수를 부르며 우르르 몰려갔다. 입가에는 하나같이 웃음기가 머금어져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패자팀에서 그나마 활약이 좋았던 선수를 붙잡고 인터뷰하는 것이었으나, 실은 콧대 높은 선수의 자존심이 무너져 내리는 걸 보고 싶은 게 더 컸다.


경기 이전에 가장 이목을 끌었던 선수였기도 했고 말이다.


“로스 카운티에 밀려 팀이 탈락한 것에 대해 현재 심정이 어떤지?”


“피치 위에 두 마리 사자는 서 있을 수 없다고 했었죠? 결국 델 레오네 쪽이 살아났는데 이제 그를 인정하는 건가요?”


즐라탄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든 기자들을 좌우로 천천히 훑어보다가 한숨 섞인 콧바람을 불더니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대뜸 양팔을 크게 벌리더니 호탕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인정합니다.”


그렇게 입을 뗀 그의 얼굴은 딱히 언짢아 보이지도 않았다.


“팀이 패배한 게 기분 좋을 수는 없겠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탄했습니다. 로스 카운티는 듣던 것보다 더 훌륭한 선수들이 많더군요. 그들을 하나로 결속해 낸 감독이 존재했기에 그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있었겠지만.”


도리어 당황한 쪽은 기자들이었다. 패배로 인한 모멸감과 지쳐 있는 심신으로 돌발적인 추태를 부리길 기대했던 게 본심이었는데.


즐라탄은 평소 거만하지만, 자신이 인정한 상대에겐 흔쾌히 엄지를 들어 올릴 줄 아는 남자였다.


“공식적으로 인정합니다. 리오넬 메시와 안토니오 델 레오네. 오늘부로 즐라탄을 제외한 현재 유럽에는 사자가 둘 존재한다는 걸 말입니다. 그는 진심으로 리스펙할 만한 존재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즐라탄은 가장 입꼬리를 주체 못 하던 기자 한 명의 어깨를 토닥이더니 라커룸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1차전과 2차전 통틀어 세 골, 부진했던 파리 생제르맹의 유일한 득점자. 어쨌거나 부끄럽지 않은 활약을 하며 가치를 입증했고, 자신을 쓰러뜨린 적장에게 아낌없는 칭찬까지 보냈다. 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의 당당한 뒤태에 기자들은 비웃음조차 지을 수 없었다.


*******


8강 진출.


챔피언스 리그에서, 로스 카운티가. 단지 이것만으로도 스코틀랜드 전국의 화젯거리였다.


스코티시 축구에서 나온 수십 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16강 이상 진출이라느니 하는 얘기는 차치하고, 구태여 그 대단함에 대해 이것저것 늘어놓을 것도 없었다. 8강에 올라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분명한 건 진작 조별리그에서 떨어졌더라도 사람들은 로스 카운티를 비난할 생각이 없었을 거고, 16강에서 마무리했어도 기꺼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을 거란 사실이다.


챔피언스 리그는 그런 무대였다.


이 위대한 승리의 맨 오브 더 매치는 존 맥긴이 되었다. 선제골의 기점인 날카로운 스루패스를 시작으로 1골 1어시스트. 세 골에 전부 관여했으니 그가 수훈으로 선정되는 건 마땅한 이치다.


하지만 맥긴 하나만으로 요약될 경기는 아니었다. 그만큼 모두가 각자 위치에서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소화했고, 하나의 팀으로서 움직였기에 그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공식 팬 투표 사이트에서 진행한 ‘숨은 맨 오브 더 매치’의 주인공은 아메드 델샤드였다.


물론 로랑 블랑의 지나치게 일관된 전술이 델 레오네에게 싸 먹히면서 삐걱거린 게 주요 원인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델샤드의 역할은 꽤 막중했다.


만일 그가 없었다면 파리 생제르맹의 순수 화력에 뭉개져 전술 자체가 무용지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초반 매치업으로 맞부딪쳤던 에딘손 카바니를 꽁꽁 묶어버렸고, 끝내 존재감이 소멸된 그를 대신해 들어온 루카스 모우라마저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발재간에 일가견이 있는 브라질리언 드리블러인데. 그런 모우라가 모든 수를 읽히며 돌파 한 번을 성공 못 하는 건 상당히 재밌는 장면이었다.


블랑은 결국 앙헬 디 마리아의 자리를 옮기면서 모우라를 반대쪽으로 피신시키는 질책성 변화를 가져갔는데, 그조차 델샤드가 디 마리아를 봉쇄해 버리면서 모우라 개인만의 잘못이 아니라는 게 드러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델샤드 혼자서 파리 생제르맹의 세 명을 틀어막은 셈이었다.


[저 선수는 뭐죠? 마치 거대한 벽이 서 있는 것 같아요. 아무도 저 장벽을 뚫고 지나가질 못합니다. 파리 생제르맹의 공격진이 그렇게 허술한 선수들은 아닌데······.]


당시를 중계하던 프랑스 중계진은 델샤드의 퍼포먼스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그렇게 멘트를 내뱉었고.


[저 알바니아 선수에게서 왠지 그가 보이네요. 튀람······ 릴리앙 튀람에 흡사한 파이팅과 다부진 체격을 가진 수비수입니다. 저쪽 길로 향하는 볼은 모두 그의 발 앞에서 멈추고 있어요. 변방 리그에 머물 클래스가 아닌데요?]


같은 시각, 다른 지역 방송사의 해설자는 인상 깊은 극찬까지 날렸다.


릴리앙 튀람(Lilian Thuram). 과거 프랑스 국가대표팀 레블뢰, 철의 백포 일원이자 무결점의 짐승으로 불렸던 전설.


샤흐타르전에서 파비오 칸나바로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가 일찍이 있긴 했으나, 그건 스코틀랜드 해설자가 한 말이었다. 튀람의 이름을 같은 국적의 프랑스인이 거론한다는 건 확실히 의미가 달랐다.


로스 카운티와 전혀 상관도 없는, 오히려 적대하는 시점에서 바라본 쪽이 내린 평가니까. 그만큼 대단했다는 뜻이다.


심지어 한 사람만의 생각도 아닌 모양이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언론사 RMC는 이 말을 인용하여 경쟁 언론사들이 다른 이슈에 주목하는 동안 빠르게 문구를 내걸며 사람들의 관심을 독점해 버렸다.



[ RMC ] 파리 생제르맹, 발칸 반도의 튀람 앞에서 무릎 꿇다



그리고 이 별명은 일회성이 아니라 평생 훈장처럼 따라올 것이었다.


유로파 리그 때부터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며 존재를 알렸던 그였지만, 이만큼 강력한 수식어가 있을까. 묵묵히 로스 카운티의 오른쪽을 쭉 책임져 왔던 수호자에게 걸맞은 칭호였다.


델샤드는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에게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32세라는 나이. 선수로서는 황혼기에 접어들기 시작했다는 사실.


새삼 이와 같은 재능이 뒤늦게 발견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좀 더 일찍 빛을 봤다면 더 이름을 떨쳤을 수도 있을 텐데.


그와 반대되는 사례가 제임스 블랜차드였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도 묻힐 뻔했다가 감독의 눈에 띄어 발굴된 라이징 스타.


“경기를 하면 할수록 무섭게 성장하는 것 같아.”


파리 생제르맹전, 존 프리먼의 기억에 가장 크게 남은 건 블랜차드의 퍼포먼스였다. 최근에는 그의 팬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유독 눈에 들어오는 중이다.


두 번째 골. 티아고 모타와 다비드 루이즈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며 골망을 흔든 그 헤더 골은 나폴리전의 바이시클 킥 이후로 계속 회자될 만한 명장면이었다.


“전부터 프리미어십의 왕이 될 재목이라고 느꼈었지만, 최근에는 그 이상을 넘볼 수도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영입생을 제외하고 순혈 스코티시 출신에서 유일하게 더 큰 무대로 진출해도 활약이 가능할 거라 확신이 드는 재능.


블랜차드는 참 특이한 선수다.


그는 10번을 단 에이스답게 잘한다. 그런데 정확히 뭘 잘하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어려운 단계에 들어간다.


물론 그는 못 하는 게 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특정 영역의 스페셜리스트라고 꼬집어 얘기하기는 뭔가 모호하다.


이를테면 잭 마틴의 타고난 골 감각이나 알렉산더 캐리처럼 경기 흐름을 읽고 판을 주도하는 시야를 가지진 않았다. 활동량이 뛰어나지만 에이든 딩월보다 더 많이 뛴다고 할 수도 없고, 느리진 않지만 톰슨처럼 준족을 가진 것도 아니다.


뭐든지 적당한 능력치를 보유한. 공격수, 미드필더, 측면, 중앙 어디에 놓든 준수하게 소화할 수 있으나, 그 능력이 팀 내 최고라 할 정도는 아닌.


로스 카운티만을 기준으로 할 때 앞서 언급한 선수들이 10점의 능력을 가졌다면 블랜차드는 10점은 없지만 모든 게 6~7점대 이상인 느낌이다.


좋게 말하면 만능이지만, 반대로 특출난 건 없다는 얘긴데. 공격 포인트는 남다르게 압도적인 선수.


“통합하면 그냥 축구를 잘한다는 의미가 되겠지.”


결국 또 그렇게 귀결되지만, 여전히 설명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혹자는 그의 단단한 체격에서 나오는 힘이 특징이라고 하는데, 이도 같은 맥락이다. 등을 지고 볼을 지키는 플레이나 순간적으로 밀고 들어가 상대를 찍어 누르는 침투가 일품이긴 해도, 그게 꼭 주 무기란 느낌은 아니다.


프리먼은 블랜차드의 최대 강점을 굳이 꼽는다면 의외로 축구 지능 쪽이라 생각하는 편이었다.


공간지각 능력과 판단력. 매초마다 혼잡하게 변하는 필드의 흐름 속에서 상대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유리한 공간을 귀신같이 찾아 들어가는 건 그것들이 바탕이 되기에 가능한 거다.


블랜차드는 느긋하다가도 갑자기 민첩하게 움직이며 수비수의 시야를 벗어나 버린다. 항상 볼을 받기 전부터 어떻게 처리할지 먼저 정해두고 한 박자 빠른 플레이로 벗어나기 때문에 압박을 가하기도 어렵다.


패턴을 쉽게 읽을 수 없는 타입.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관중석 쪽에서도 그의 플레이를 이해하려면 대놓고 블랜차드만 눈으로 쫓고 있어야 한다.


육안으로 보이는 힘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 블랜차드가 발휘하는 퍼포먼스의 원천은 되레 지능에 있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능은 눈으로 확실히 보이지 않아 직관적이지 못한 영역이기에 이 선수가 정확히 뭘 잘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뛰어난 지능만으로 블랜차드를 정의내릴 수 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모든 걸 두루두루 잘하는 선수. 그냥 축구 자체를 잘하는 선수라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지.


이런 특성을 아주 오래전부터 느껴왔음에도 여전히 시원하게 풀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연구 대상이야.”


프리먼은 경기를 노트북으로 다시 리플레이해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언젠가 제대로 블랜차드에 관한 분석 칼럼을 세세하게 작성하는 것. 최근 버킷리스트로 새로이 등록된 목표 중 하나였다.


*******


“여기 술 하나 주시오, 형씨.”


“오, 블랙 씨구먼.”


조지 맥도넬은 자신의 가게에 찾아온 피터 블랙을 반갑게 맞았다.


“옆에 같이 다니던 일행분은 놔두고 혼자 오셨소?”


“그 친구는 오늘 일이 있어서. 나처럼 술에 환장한 편도 아니라 매번 데려오긴 어려울 거요.”


“그렇군. 안 그래도 오늘 내 친구들 역시 바빠서 발길이 뜸했던 터라 마침 잘 됐구려. 같이 한잔합시다!”


이전에 맥도넬의 펍을 방문한 뒤로 블랙은 곧장 단골손님이 되었다.


술맛이 워낙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주인장이 로스 카운티를 응원하는 올드팬이다? 찾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맥도넬 또한 로스 카운티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는 숫사슴들의 수장이 찾아오는 게 기뻤고 말이다.


두 사람은 연고지 축구팀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통해 단기간 내로 상당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주인장, 프랑스 쪽 소식 보셨소?”


“안 보긴 했다만, 어쩐지 알 것 같은데. 상대 감독한테 경질설이 마구 쏟아져 나오는 중 아닙니까?”


“바로 맞췄소. 아주 난리가 났더군. 한데 뭐, 우리에겐 제법 익숙한 일이지. 그 이탈리안과 붙었다 하면 늘 그래왔지 않소?”


“그러게 말이죠. 로스 카운티를 업신여기다가 봉변을 치르고 나서야 수습하려 드니 그 꼴이 나는 건데.”


블랙의 말대로 파리 생제르맹은 거센 돌팔매질을 감당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홈에서 세 골이나 내주고 질 수 있는지. 로스 카운티가 아무리 잘 나간다 해도 챔피언스 리그를 꾸준히 참전했던 팀이 이런 결과를 낼 수 있는지에 관해 비판과 비난, 심지어 치열한 논쟁까지.


블랑의 책임론에 본격적으로 불이 붙는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고 나선 꼭 우리 감독을 선임한다는 얘기가 딸려 나오곤 하지요.”


“하하하, 잘 아시는군. ‘파리 생제르맹의 나세르 알 켈라이피 회장은 안토니오 델 레오네를 다음 시즌에 데려올 계획.’ 이런 기사가 났었지. 그게 진짜든 아니든 항상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 아니겠소?”


“실제로도 탐낼 만하긴 해요. 주제넘은 소리일지 모르겠으나, 이 챔피언스 리그라는 정상급 대회에서도 레오를 능가할 인물을 아직 못 본 느낌이란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는 훨씬 더 대단한 인물일지도.”


“나도 동감이오. 그래서 난 오늘이 참 기대됩니다. 이번에 만날 상대는 과연 우리 감독과 제대로 견줄 수 있을지.”


단순히 술이 고파서 찾아온 날은 아니었다.


챔피언스 리그 16강의 관문을 통과한 여덟 팀이 또다시 승부를 겨루기 위해 대진을 결정하는 8강 추첨식. 그 과정을 함께 어울리고 감정을 공유하고 싶어서 방문한 블랙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추첨식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축제가 되기 때문이다.



“······허.”


“이거 참······.”


그러나 막상 결과를 받아 든 두 사람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펍 내부의 다른 손님들도 분위기가 싸해졌다. 자연스레 두 손을 올리며 머리를 움켜쥐거나, 입에 댄 맥주잔을 내려놓지 못하고 굳어버리거나. 제각기 다양한 포즈로 경악스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


“하필 저 많은 팀 중에서 왜······.”


맥도넬은 계속 말을 흐렸고, 블랙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쨌거나 이번엔 진짜로 감독 간의 본격적인 머리싸움을 볼 수도 있겠군. 그게 유쾌한 일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시각, 다른 쪽 반응도 비슷했다.


“하······. 8강까지 왔으면 만만한 상대야 없겠지만, 그 일곱 팀 중에 저쪽이 걸리는 것도 참 대단한 일이야.”


용건이 있는 와중, 잊지 않고 챙겨보던 케니 풀러도. 그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과 모든 딩월의 주민들도.


“대진운 따위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됐어. 이게 토니를 얻은 대가라면 신의 뜻을 따를 수밖에······.”


구단주실에서 기도를 올리며 지켜보던 로이 베넷도.


추첨식장에 직접 참석한 대런 코너 단장과 마리 코넬은 자포자기한 듯이 그저 웃어버리고 말았다.


해당 경기를 직접 뛸 선수들과 코치진도 추첨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쉽게 가는 법이 없구나.”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정도 레벨과 맞닥뜨리니 그렇지만도 않네.”


선수들 사이에도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나폴리와 세비야······. 분명 강력한 팀이었고, 재대결하면 과연 이길 수 있을지 장담 못할 그런 상대였는데. 오늘따라 그들이 작게 보이는 것 같네요.”


닐 스튜어트는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았고.


옆에서 잠자코 듣던 감독은 잠시 명상에 잠기더니 천천히 눈을 뜨며 희미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재미는 확실히 보장되겠어.”


*******


추첨 결과가 나온 다음 날.


기자들은 로스 카운티와 격돌이 확정된 상대 팀 감독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한곳으로 몰려들었다.


현지 기자들, 원정 온 기자들 모두 그의 인터뷰를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로스 카운티를 얕잡아보는 마음이 새어 나오길 바란다든가, 델 레오네를 향한 열등감이 표출된다든가, 갈등에 불을 붙일 실언이 튀어나오길 바란다든가 하는 것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해서였다.


왜냐하면 평소 차분하고 정중한 인터뷰 스킬로 그럴 거리를 워낙 잘 안 주기로 유명한 데다가, 신예 감독에게 흔들릴 만한 스펙도 아니었으니까.


녹록지 않은 커리어에 최근 행보도 딱히 흠잡을 데 없어 퇴물이라는 표현과 거리가 먼 그런 인물.


논란과 싸움을 부추기는 걸 좋아하는 기자들 또한 이번엔 참된 저널리즘 자세에 충실해지려 노력 중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좀 과장하면 세기의 대결이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라고 할 수 있었다.


이윽고 여유로운 얼굴로 등장하는 남자. 캐주얼한 니트 상의와 깔끔한 정장 바지의 조화가 무척이나 어울려 보였다.


모두가 그의 등장만으로도 오묘한 설렘과 긴장감을 느꼈다.


작년에는 라파엘 베니테스와 우나이 에메리, 올해는 조제 무리뉴와 로랑 블랑, 그 외의 수많은 감독들. 현역 축구판에서 제법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유명 인사들이 델 레오네 앞에서 차례대로 씁쓸한 패배의 잔을 마셨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현대 축구의 전술을 비약적으로 개선시킨 혁명가이자, FC 바르셀로나의 최전성기를 지휘했던, 당시 역대 최고 반열에 드는 팀을 이끌며 챔피언스 리그를 정복하고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위업을 이룩했던.


주제프 과르디올라(Josep Guardiola), 별칭 펩(Pep).


현 바이에른 뮌헨(FC Bayern Munich)의 감독.


최근 그런 얘기들이 스멀스멀 나오곤 했었다. 안토니오 델 레오네와 펩 과르디올라가 붙는 걸 보게 될 날이 올까?


그 말은 곧, 델 레오네가 일회성으로 반짝인 게 아닌 걸 마침내 모두가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진정 유럽 축구의 핵으로 떠올랐음을 인정했다는 것이며, 그 위치에서 과르디올라만큼 제격인 적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불모지에서 영웅처럼 나타나 굳건한 왕조를 무너뜨린 이탈리안, 엘리트 코스를 차근차근 밟으며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은 스페니시.


어쩌면 앞으로 세계 축구의 판도를 주름잡을지도 모를 두 감독의 첫 대면이었다.


두 팀 간의 전력 차는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파리 생제르맹과 호각을 다투고 올라온 시점에서 그건 딱히 중요한 부분이 아니게 되었으니까.


“저는 로스 카운티가 우승 후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과르디올라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진지하게요. 8강에 올라온 팀은 모두 우승할 자격이 있죠. 그런데 로스 카운티는 그중에서도 유력합니다. 그들의 경기를 밤새워 보고 분석한 결과, 확신이 들었어요. 실로 놀라운 팀입니다.”


필요하면 쉬지 않고 일에만 몰두하는 성격 역시 서로 닮은 구석이 있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철저하게 연구한 뒤 최선을 다해 싸우는 거죠. 그들과 대결하기 전까지 만반의 준비를 갖추도록 할 겁니다.”


간결하고 매너 있는 답변이었으나 이보다 무서운 말이 있을까? 과르디올라의 어조와 표정에서는 한 치의 방심조차 없어 보였다.


‘진짜는 진짜를 알아보는 건가?’


기자들은 조용히 경청하며 인터뷰 내용을 열심히 수첩에 따라 적었다. 한자라도 놓쳐선 안 될 내용이었다.


바이에른 뮌헨과 로스 카운티, 주제프 과르디올라와 안토니오 델 레오네, 그리고 펩과 레오.


감히 8강전에서 최고로 주목받을 경기라 말할 수 있는 대형 이벤트. 그 중심에 선 것은 분명 두 감독이었다.


*******


< 15-16 Scottish Premiership 32 Round >

인버네스 CT : 로스 카운티

2016년 3월 21일 (월) 19:45

칼레도니안 스타디움 (관중 수 : 6,368명)



[더비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경기력과 스코어입니다. 이럴 거면 클라크를 경질해선 안 됐을 거 같은데요.]


인버네스 CT의 상태를 보며 혹평을 가한 해설자의 말이었다.


네 골째. 물론 원정팀 로스 카운티의 네 골이었다.


스티브 클라크를 경질한 후 로베르토 데 제르비 선임에 실패한 그들은 정식으로 데려올 감독을 끝내 구하지 못했고.


전 마더웰 감독인 이안 바라클로에게 급히 소방수 역할을 맡겼는데, 반등은커녕 끝도 없이 추락하는 성적으로 완전히 실패했다는 걸 몸소 증명하는 중이었다.


최근 승리가 없던 그들에게 오늘 경기는 가혹한 처형식이나 다름없었다.


철썩 -


기어코 잭 마틴의 해트트릭이 터졌고, 인버네스 CT의 수비진은 의욕을 상실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래도 예전에는 더비답게 치열했고, 부진한 시기에도 로스 카운티와 만났다 하면 거센 저항을 보여주기라도 했었는데. 지금처럼 무기력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는 모습은 생소하기까지 했다.


침몰하는 배 안에서 클라크가 필사적으로 버텼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일말의 기대를 쥐고 찾아왔던 팬들은 하나둘 일찍이 자리를 떠나버렸고, 칼레도니안 스타디움을 장악한 숫사슴들의 목소리만 더 우렁차게 퍼져나갔다.


“하일랜드의 주인은 누구?”


카운티 -


“다시 한번! 하일랜드의 주인은 누구라고?”


카운티 -


피터 블랙의 주도하에 그들이 조롱하듯 내뱉는 열창은 미세하게나마 살아있던 열의마저 처참히 깨부쉈다.


사실 저들이 어떻게 되든 라이벌 팬으로선 그저 승리를 만끽하면 될 뿐이니까. 딱히 동정을 건네줄 사이는 아니었다.



=============================

< 인버네스 CT 0 : 5 로스 카운티 >

잭 마틴(11‘, 36‘, 72‘)

제임스 블랜차드(23‘)

리암 보이스(77‘)


=============================


*******


한편, 프리먼은 독일에 있었다.


적어도 올 시즌의 칼레 시슬은 팀으로서 기능이 아예 정지된 수준. 하일랜드 더비였다 해도 최악의 상태에 놓인 상대를 굳이 볼 가치는 없다고 판단해서 과감히 넘겨버렸다.


그 대신 로스 카운티와 맞붙을 바이에른 뮌헨을 조사하는 데 시간을 쓰기로 했다. 때마침 분데스리가 경기가 있었고, 분석해서 칼럼을 작성하기에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과연 독일의 최강자답게 FC 퀼른을 압도적으로 두들기는 중이었다.


매끄러운 빌드업으로 압박을 벗어나 물 흐르듯 전진하는 볼. 수비의 틈새를 허물고 들어가는 예리한 스루패스.


“호오.”


클래스가 다른 플레이로 십분도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벌써 골망을 흔드는 걸 보며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알론소······. 저 선수의 발에서 전개되는 걸 조심해야 해.”


사비 알론소(Xabi Alonso). 그의 발에서부터 시작된 전개가 퀼른을 무너뜨렸다. 캐리와 비슷한 활동 반경에서 움직이는 저 뮌헨의 레지스타를 철저히 제어하는 것이 게임의 관건일 것이다.


“······가만.”


그러다 갑자기 프리먼은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위화감? 아니, 그것보단 기시감이라고 해야 할까?


“······.”


잠시 생각에 잠겨 필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순간 깨달았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이거야. 이거였어.”


프리먼은 공중목욕탕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철학자처럼 유레카를 크게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방금 득점. 측면으로 빠지는 듯하다가 기습적으로 중앙을 파고들며 수비수를 완벽하게 따돌린 뒤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로 밀어 넣은 저 선수.


뭔가 익숙하다. 분데스리가 직관은 별로 경험이 없는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의 근원은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바로 블랜차드에게서 보이던 변칙적이고 지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생각해 보면 더 일찍 알아챌 수도 있었던 건데. 왜 인식조차 못했을까?”


왜 유독 블랜차드만 보면 기존과 다른 특별함이 느껴졌던 건지. 왜 잘하는 걸 아는데도 무엇을 잘하나 뚜렷하게 설명이 힘들었던 건지. 그 답답하면서도 어딘가를 간질이는 듯했던 현상의 원인을 찾아낸 것이었다.


프리먼은 사실 답을 알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말이다.


깨달은 이상 이제 설명은 이전보다 어렵지 않았다.


제임스 블랜차드의 유니크한 특색은 저 뮌헨의 25번을 달고 있는 선수, 토마스 뮐러(Thomas Muller)와 유사한 점이 많았으니까.


“그래. 둘이 같은 유형이었던 거였어!”


작가의말

매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도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감사합니다. (_ _)


소중한 후원금을 보내주신

kkatnip 님

모아두상 님

보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 _)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5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감독 이야기 : 낯선 이방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2015/16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스포일러 주의) 23.01.14 559 0 -
공지 2014/15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스포일러 주의) +4 18.09.04 2,082 0 -
공지 연재 주기에 관한 공지입니다 +4 18.04.11 3,272 0 -
공지 독자분들께 공지 하나 드립니다 +11 18.02.08 5,472 0 -
공지 2013/14 로스 카운티 선수 명단 +9 17.12.19 18,424 0 -
203 203. 공간 싸움 (4) +5 24.04.07 481 36 25쪽
202 202. 공간 싸움 (3) +6 24.03.18 576 35 25쪽
201 201. 공간 싸움 (2) +11 24.02.27 644 39 31쪽
200 200. 공간 싸움 +6 24.02.06 751 37 26쪽
199 199. 대립 +5 24.01.25 788 33 26쪽
» 198. 대면 +5 24.01.14 840 35 25쪽
197 197. 팀의 완성도 +8 24.01.04 814 43 24쪽
196 196. 신뢰의 결실 +5 23.12.23 869 38 28쪽
195 195. 한 마리의 송골매 +5 23.12.10 855 40 23쪽
194 194. 두 마리의 사자 (2) +5 23.12.02 864 42 25쪽
193 193. 두 마리의 사자 +4 23.11.22 925 43 25쪽
192 192. 캡틴 잭 +3 23.11.10 879 40 26쪽
191 191. 경기장 위의 숫사슴들 +6 23.10.31 938 35 28쪽
190 190. 계몽의 시대 (3) +3 23.10.20 962 44 23쪽
189 189. 계몽의 시대 (2) +5 23.10.08 971 39 26쪽
188 188. 계몽의 시대 +4 23.09.26 1,013 42 26쪽
187 187. 새로운 국면 (5) +7 23.09.15 1,066 45 22쪽
186 186. 새로운 국면 (4) +6 23.09.03 1,095 42 25쪽
185 185. 새로운 국면 (3) +8 23.08.19 1,177 45 22쪽
184 184. 새로운 국면 (2) +8 23.08.04 1,226 40 26쪽
183 183. 새로운 국면 +7 23.07.13 1,302 56 22쪽
182 182. 지상 최고의 팀 (4) +8 23.06.28 1,278 50 29쪽
181 181. 지상 최고의 팀 (3) +5 23.06.16 1,169 39 24쪽
180 180. 지상 최고의 팀 (2) +6 23.05.27 1,283 50 24쪽
179 179. 지상 최고의 팀 +5 23.05.07 1,370 50 27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